암논의 음욕(사무엘 하 13:1-20)
여기에는 자기 누이를 겁탈한 암논의 가증스런 죄악이 상세히 기록되고 있다. 이것은 상세히 설명하기에는 마땅치 않은 재료이며, 실로 얼굴을 붉히지 않고서는 입에 담지 못할 일이다. 사람이 이토록 악하며 더군다나 다윗의 아들이 그렇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암논의 성품이 다른 일로서도 악했다고 생각할 만하다. 그가 만일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결코 이토록 애욕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건한 부모가 사악한 자녀로 고통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은혜는 유전되지 않으나 부패는 대를 잇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윗의 자녀들이 그 아버지의 신앙심을 모방하는 경우를 찾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비의 그릇된 전철을 밟았고 그나마 더욱 악하게 행하면서 뉘우치지 않았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나쁜 본을 보이는 경우 그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지 못한다. 암논이 짓는 죄의 여러 단계를 관찰해 보자.
Ⅰ. 악마는 음란한 영으로서 암논의 마음에 자기 누이 다말에게 대한 애욕을 불어넣는다. 아름다움은 많은 자에게 함정과 올가미가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다말은 미인이었다. 그래서 암논은 그녀를 탐내었다(1절). 유달리 용모가 출중한 자들은 그 때문에 자기 용모를 자랑할 게 아니라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1. 암논의 욕망은 천륜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자기 누이에 대해 욕정을 품는다는 것은 천래의 양심이 경악할 짓이며 두려움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짓이다. 인간의 부패한 본성 속에는 이토록 모순된 심령이 들어 있어서 여전히 금단의 열매를 희구하며 금지가 강력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욕망도 더욱 커진다. 암논은 오라비로서 동생의 미덕과 명예를 보호해 주어야 할 텐데 어찌 유린할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성화되지 않고 무방비 상태의 심령을 가만 내버려 두면 얼마나 악한 생각이 들어오는지 주목하자.2. 이 욕정은 암논을 매우 괴롭혔다. 그는 다말에게 정조를 요구할 만한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 신경을 많이 써서 심화로 병이 되었다(2절). 육체적 욕망은 그 자체가 형벌이 되며 영혼을 거스려 싸우고(벧전 2:11) 몸과도 싸우며 뼈를 썩게 한다. 죄인은 얼마나 엄한 주인을 섬기고 있으며 그 멍에는 얼마나 무거운지 명심하자.
Ⅱ. 악마는 간교한 뱀처럼 이 악한 계획을 성취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암논의 머리 속에 그 방법을 넣어 준다. 암논에게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그를 친구라고 부르지만 실은 원수였다.) 그는 친척이었다. 그에게는 다윗의 정신보다 다윗의 피가 더 많이 썩여 있었다(그는 다윗의 조카였으므로). 그는 교활한 자였고 간사해서 어떤 악한 계획도 안출할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종류의 음모에는 남다른 솜씨가 있었다(3절).
1. 그는 암논의 병색을 주목했다. 간교한 그였기에 암논이 상사병에 걸렸다는 결론을 짓고 이렇게 묻는다. "왕자여,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뇨? 왕의 맏아들이자 왕위 계승권자인 그대가 어째서 이렇게 수척해가느뇨?"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1) "당신에게는 심신을 전환시킬 궁중의 쾌락이 있다. 그 즐거움을 취하고 그로써 근심을 쫓아버리라." 왕궁이라고 하여 언제나 만족과 안락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풀죽어 있는 성도들에게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느냐" 고 물을 이유가 더욱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왕 중 왕의 자녀들이며 생명의 면류관을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2) "당신에게는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명령할 수 있는 왕자의 권세가 있다. 그 권력을 이용하여 만족을 얻으라. 당신은 왕의 아들이기에 합법적인 것이든 불법적인 것이든 원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런걸 가지고 뭣 때문에 수척하느냐? Quio quid libet licet-즉 당신의 뜻은 법이다. 마찬가지로 이세벨도 아합에게 "왕이 이제 이스라엘을 다스리나이까?" (왕상 21:7)하고 말했다. 권력의 남용은 권세자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시험이다.
2. 암논이 후안무치하게 자신의 음욕을 고백하고 그것을 "연애" (원의 "사랑")라고 표현하자 요나답은 그에게 목적 달성의 방법을 일러 주었다(5절). 그가 소위 친구였다면 그런 악한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그 악함을 암논에게 일러 주었을 것이다. 그런 악한 생각을 품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노엽게 하며 자기 영혼을 얼마나 그르치게 또 그런 생각을 소중히 여겨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얼마나 치명적 결과가 될 것인지 암논에게 설명해 주었으리라. 그는 자기의 간교한 지혜를 이용하여 암논을 사련에서 전향시켜야 했다. 즉 다른 여인을 그에게 권하여 그로 합법적 결혼을 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암논의 그런 고백에 놀라지도 않은 것 같다. 그는 이 연애의 불법성이나 성사 난망을 들어 반대를 표명하지도 않으며 수치스러움이나 다윗의 노여움을 빙자하여 제동을 걸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다말을 침상 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이런 친구를 둔 자의 처지는 비참하다는 데 주목하자. 친구에게 충고하거나 책망하기는커녕 아첨하고 격려하여 죄의 길로 계속 행하게 하며 악행의 조언자가 되며 나쁜 꾀의 안출자가 되는 자는 친구를 망치는 자들이다. 암논은 이미 아픈 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소 수단이 필요하다고 요나답은 역설한다. 그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구미에 맞지 않으면 그 어떤 것에도 식욕을 느끼지 못할 만큼 아픈 것처럼 가장해야 한다는 것이다(그의 수척한 용모는 이런 가장을 은폐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는 별미도 싫어해야 하고(욥 33:20) 왕의 식탁에서 가져온 극상의 요리도 즐거워하지 않아야 하며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이 다말의 고운 손으로 주는 것 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요나답의 계획이다.
3. 암논은 이 지시를 따랐고 그리하여 다말을 자기 곁에 데려올 수 있었다. 암논은 누워 병든 체하였다. 그는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는다(시 10:8-10). 다윗은 언제나 자식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고충이나 없는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암논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친히 문병하러 왔다. 이로써 부모는 자기 자녀를 돌보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병든 아이는 어머니가 위로하는 것이 보통이지만(사 66:13) 아버지라고 해서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윗이 병든 아들을 문병하러 왔을 때 그에게 고난을 정당하게 이용하도록 하라고 선한 교훈을 한 뒤 그와 함께 기도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행위 또한 암논의 악한 의사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관대한 아버지 다윗은 떠날 때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느냐? 소원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고 묻는다. 아들은 시치미를 딱 떼고 "예, 아버님 내 속이 허약하나 내 누이 다말이 만드는 과자 외에는 먹고 싶은 것이 없군요. 그리고 그 애가 만드는 것을 보지 않으면 속이 차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 애의 손으로 주는 것을 먹으면 더 좋겠고요" 라고 말한다. 다윗은 그 속에 악한 의도가 있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은 이 일에서 다윗의 총명을 가리우셨으므로 다윗은 즉시 다말에게 명하여 그 오라비에게 가서 시중들라고 한다(7절). 다윗은 아무 악의 없이 이렇게 명령을 내렸지만 나중에는 틀림 없이 크게 후회하며 자책감을 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말도 순진하게 아무 두려움 없이 오라비 방으로 들어간다(오라비 더욱이 아픈 오라비에게서 무슨 두려움을 느낀단 말인가?). 그녀는 아버지에게 대한 순종심과 오라비에게 대한 애정으로 그를 경멸하지도 않고 간호하러 들어간다(8, 9절). 다말은 왕의 딸이었고 대단한 미인이었으며(1절) 아주 잘 차려 입었지만(18절) 가루를 반죽하여 과자를 굽는 것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수도 없었으리라. 살림살이는 극히 귀한 부인에게도 천한 일이 아니며 그들은 가사를 체면 손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남편이 장로들 중에 앉아 있는 유덕한 부인도 부지런히 그 손으로 일한다(잠 31:13). 오늘날에도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다. 혹자는 이런 말을 케케묵은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다. 부인네들은 귀빈을 위해 음식을 장만할 때보다 병자를 위해 준비할 때 더 많은 정성을 쏟고 더 많은 기쁨을 느껴야 한다. 자비심은 호기심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4. 암논은 다말을 데려오는데 성공했으므로 그와 단 둘이만 남도록 하려고 궁리한다. 간음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하도록 배려한다(욥 24:15). 음식은 준비되었다. 그러나 그는 주위 사람들이 보고 있는 한 먹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다 나가달라고 한다. 그들은 병자를 존중해야 했다. 병자는 자기가 명령할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는 왕자가 아닌가! 다말은 기꺼이 그 오라비의 비위를 맞추고 기분을 편안히 만들어 주려고 한다. 정숙하고 유덕한 그녀는 자기 오라비의 오염된 마음속에 음욕이 가득 차 있을 줄은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오라비 혼자 있는 침실로 들어간다(10절). 이제 이 사악한 철면피는 가면을 벗고 음식을 팽개친 채 그녀를 누이라고 부르면서 뻔뻔스럽게도 자기와 동침하자고 요구한다(11절). 자기 누이의 처신이 정숙하고 고결하여 항상 모범이 되어 왔음을 아는 오라비가 악행의 설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녀의 미덕에 대한 추잡스런 모욕이었다. 그러나 음란한 생활을 하는 자들이 남들도 자기들과 같은 줄로 생각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들은 적어도 남들이 자기들의 불꽃에 쉽사리 불붙는 부싯깃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한다.
Ⅲ. 악마는 강한 유혹자로서 암논의 귀를 막아 다말의 모든 조리있는 말을 못 듣게 한다. 다말은 그의 겁탈에 저항하며 이치에 닿는 말로 그를 설득하여 그의 몰지각한 행위를 중지시키려고 하였다. 이 젊은 처녀가 이 같은 공격을 받고 얼마나 놀랐으며 수치스러웠고 떨었는지 우리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당황한 중에서도 그녀가 한 말은 너무나 적절하고 설득력이 있다.
1. 그녀는 그를 "내 오라비" 라고 부르면서 자기들 사이가 근친임을 그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그가 그녀와 결혼하는 것도 불법인데 하물며 겁간하는 것이랴! 그것은 중벌을 받는 죄(레 20:17)로 명백히 금지되어 있었다(18:9). 친척 간의 사랑이 사련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크게 조심해야 한다.2. 그녀는 그에게 힘으로 겁탈하지 말라고 간청한다. 이것은 어떤 정도이든 완력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데서 무슨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
3. 그녀는 그에게 이 일의 큰 악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괴악한 일이었다. 모든 죄는 다 괴악한 일이지만 특히 음란은 그러하다. 음행은 극히 나쁜 한 종류의 악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중에서는 그런 가증한 일이 자행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에게는 이방인의 법보다 더 선한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우리가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남들보다 변명의 여지가 더 없으며 우리의 정죄함도 더 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를 욕되게 하고 그의 존귀한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귀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때문이다.
4. 그녀는 이 일의 수치를 그에게 설명한다. 그에게는 아마 죄책감보다 수치심이 더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 수치를 무릅쓰고 어디로 가겠느냐? 설사 이 일을 감춘다고 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생각만 해도 낯이 붉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알려지는 날이면 내가 어떻게 사람을 바로 쳐다 보겠느냐? 너로서도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즉 너는 인간 말자와 흉악한 난봉꾼으로 간주될 것이다. 너는 지혜롭고 선한 모든 사람에게 존중받지 못할 것이며 장자이긴 하지만 통치하기에 부적한 자로 소외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런 괴악하고 우매한 자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치 특히 영원한 수치를 예견하고 죄를 금해야 한다.
5. 이런 순간에 그녀는 그의 악한 의도를 돌이키고(가능하면) 그를 따돌리기 위해 "왕께 말하라. 저가 나를 네게 주기를 거절치 아니하리라" (13절)고 말한다. 그녀는 부왕이 아마 그녀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고 신의 율법을 사면시켜서라도 성혼시켜 줄 것이라고 시사한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신법의 규정을 면제시킬 만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또 자기 아버지가 감히 그러리라고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부왕이 그의 이런 악한 요청을 받으면 효과적 조치를 취하여 자기를 암논에게서 보호하리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말과 재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의 교만한 마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했다. 그에게는 거절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녀의 위안과 명예 그리고 그녀의 소중한 것은 송두리째 그의 수욕이 희생되어야 했다(14절). 암논은 아직 청년이었지만 음탕한 생활을 오래 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를 몰랐거나 아니면 알고도 벌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갑작스레 이런 악의 절정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말에게 대한 그의 사랑인가? 이것이 병 중의 그를 기꺼이 시중하려는 데 대한 보답인가? 그는 자기 누이를 창녀처럼 취급하였다. 이 얼마나 개망나니 짓인가! 하나님께서는 정숙하고 유덕한 모든 사람들을 그런 비이성적 인간들에게서 구출하신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는 다르다.
Ⅳ. 악마는 고통자와 배신자로서 그의 사랑을 즉시 증오로 바뀌게 한다(15절).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더라." 그의 증오는 그의 거친 욕정보다 더욱 흉흉하였다.
1. 그는 야비하게도 그녀를 완력으로 축출한다. 아니, 이제는 자기 손을 대기도 싫다는 듯이 암논은 종에게 다말을 내어보내고 문빗장을 걸라는 명령을 내린다(17절).(1) 아무 죄없이 피해만 입은 다말은 이 모욕적 처사에 크게 분개할 만하였다. 이것은 어느 면에서 먼저 번 악보다 더욱 나쁜 처사였다(16절). 그녀로서는 이보다 야만적이고 치욕적인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일을 교묘히 숨긴다면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그녀뿐일 터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용서를 빌었다면 시원찮긴 해도 다소 위안이 될 터였다. 그가 만일 이 두려운 순간이 지난 뒤 그녀에게 충격을 가라앉힐 시간적 여유라도 주었더라면 그녀는 나갈 때 얼굴 표정이라도 애써 태연히 지을 수 있고 남에게 이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그녀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듯 이렇게 무례하게 그리고 황급히 쫓아버린 이상 그녀는 자기 방어를 위해서도 자기에게 행한 그의 못된 짓을 공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우리는 여기서 죄의 악함(제어하지 않는 욕정은 절제하지 않는 식욕만큼 악하다)과 죄의 해로운 결과(결국 그것은 뱀처럼 문다)를 배우게 된다.
[1] 죄를 저지를 당시에는 감미로운 것 같으나 나중에는 혐오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 죄이다. 암논이 다말을 미워한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악한 제의에 동의하려 하지 않고 수치의 일부를 떠맡으려 하지도 않으며 끝까지 항거하며 반대의 이유를 논하다가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죄를 미워하고 범죄한 자기 자신을 혐오했더라면 누구나 그가 참회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분노를 이룬다(고후 7:11 참조). 그러나 욕보인 사람을 증오한다는 것은 그의 양심이 겁에 질렸으나 그의 마음은 전혀 겸비치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다. 육체의 쾌락은 얼마나 거짓되며 얼마나 쉬 지나가며 혐오로 바뀌는지 명심하자(겔 23:17 참조).
[2] 저지를 때에는 은밀하지만 나중에는 공개되고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이 죄다. 죄인은 흔히 남몰래 범죄하지만 스스로 공개하고 꼬리를 밟히기 마련이다. 말은 바로 죄인들 자신의 입술에서 나온다. 유대 박사들은 암논이 이 죄악을 범한 뒤 청춘 남녀가 단 둘이 있는 것을 금지하는 율법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왕의 딸이 이렇게 당했다면 사사로운 백성의 자녀야 어떻게 되겠느냐?" 는 것이다.
2. 범법자는 자기 양심의 가책에 맡기더라도 이 가련한 희생자는 어떻게 되는지 살펴 보자.
(1) 그녀는 자신의 피해를 심히 슬퍼한다. 비록 그 일이 자기 미덕에는 실제로 아무런 오점을 끼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명예는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슬픔의 표시로 자신의 아름다운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덮어썼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장식물을 혐오하며 자기 모습을 추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암논의 사련을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죄를 위해서도 울면서 갔다(19절).
(2) 그녀는 자기 친 오라비 압살롬의 집으로 물러나 고독과 슬픔 속에서 살았다. 이것은 그녀의 정숙과 음란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낸다. 압살롬은 자기 누이에게 친절히 말하면서 당장은 그 피해를 참고 지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 스스로 복수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20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는 압살롬의 물음에는 암논이 호색으로 악명이 높아서 정숙한 여인이 그와 함께 있으면 위험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 같다. 압살롬은 이 사실을 알았으나 다말은 전혀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압살롬의 음모와 암논의 죽음(사무엘 하 13:21-29)
솔로몬은 다툼의 시작을 물이 새는 것에다 비유하였거니와 그 말은 모든 범죄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일단 방축의 수문이 파괴되면 물은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듯 한 가지 재난 뒤에는 또 다른 재난이 잇따른다. 그래서 그 결국이 어떠하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Ⅰ. 우리는 다윗이 암논의 범죄한 소식을 듣고 몹시 진노하였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다윗 왕이 이 모든 말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21절). 그는 그렇게 노할 만하였다. 자기 자식이 그토록 악한 짓을 하고 자기를 그런 치욕스런 일에 이용하다니 어찌 노하지 않으랴! 그 일은 암논을 보다 훌륭하게 교육시키지 못한 데 대한 비난을 몰고 올 것이며 가문의 수치가 될 것이었다. 더욱이 자기 딸의 장래를 망쳤으며 자기 나라의 악한 본보기가 되고 자기 아들의 영혼을 그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노하는 것만으로 족했던가? 아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처벌하고 공공연하게 망신을 주어야 마땅했다. 아버지와 왕으로서 그는 그럴 만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70인 역에는 이런 말이 추가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들 암논의 심령을 슬프게도 아니하였으니 그는 장자였으므로 사랑함이라." 그는 엘리 제사장의 실수를 범하였다.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다(삼상 3:13). 설령 그가 암논을 귀여워하였더라도 그를 처벌했더라면 그것은 자신의 음란에 대해서도 큰 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수치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남을 징계하는 자는 자신의 수치를 의식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데 다윗은 그렇질 못했다. 그러므로 그의 노여움은 자기 공의를 대신한 셈이다. 죄에 대한 묵과 때문에 죄인은 더 완악하게 된다(전 8:11).
Ⅱ. 압살롬은 몹시 분개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 노릇을 하려고 결심한다. 자기 아버지가 암논을 처벌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는 정의감이나 도덕적 원칙에서가 아니라 복수심에서 이 일을 하려고 한다. 그는 자기 누이가 받은 학대를 자신에게 대한 모욕으로 간주한다. 그들의 어머니는 이방왕의 딸이었다(삼하 3:3). 이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형제들에게 이방인의 자식이란 욕을 먹었던 것 같다. 압살롬은 자기 동생이 이방인의 딸로서 이런 학대를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암논이 자기 동생 다말을 창녀처럼 다루어도 좋다고 생각했다면 자기는 종처럼 생각할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니 압살롬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암논의 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분노를 끌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음을 살피자.
1. 계획의 수립. "압살롬은 암논을 미워하였다" (22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자요, 가인처럼 악한 자에게 속한 자다(요일 3:12, 15). 자기 형제의 죄악에 대한 압살롬의 증오는 칭찬할 만하다. 그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그를 고소해야 옳았다. 그래서 남들의 본이 되게 하는 동시 자기 누이의 피해에 다소 보상이라도 되게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죄보다 사람을 더 미워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작정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행위였다. 그는 여섯째 계명을 범함으로써 일곱째 계명의 위반을 징치하겠다고 나섰다. 그것은 하나님의 십계명이 다 같이 신성하다는 것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그러나 "간음하지 말라" 고 하신 분이 "살인하지 말라" 고도 말씀하셨다(약 2:11).2. 계획의 은폐. 그는 암논에게 이 일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다거나 나쁘다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양 행동했으며 그에게 대한 종전의 예의를 잃지 않고 다만 그를 해칠 적당한 기회만 기다릴 뿐이었다. 다음과 같은 악의야 말로 극히 나쁘다.
(1) 이 악한 생각은 남몰래 감춰졌으며 누설되지 않았다. 압살롬이 이 일로 암논과 대화를 나누었더라면 그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암논의 마음은 더욱 완악해졌고 압살롬 자신의 원한은 더욱 더 깊어만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이웃을 책망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의 증오를 삭게 만든다(레 19:17 참조). 격정을 토설시켜라. 그러면 그것은 발산되어 버릴 것이다.
(2) 겉으로는 이 악의가 우정으로 도금되어 있다. 그의 말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 마음은 전쟁이다(시 55:21; 잠 26:26 참조).
(3) 이 악의는 장기간 그의 흉중에 들어있었다. 만 이년 동안 압살롬은 이 원한의 뿌리에 물과 거름을 주고 있었다(23절). 처음에는 그가 자기 형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그럴 의사가 있었다면 이와 같은 적당한 기회야 그전에라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암논을 망신시키거나 아니면 모종의 해를 가할 기회만 노렸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의 미움은 살의로까지 성숙하게 된 것이다. 한 번 해가 져도 분노가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데(엡 4:26, 27) 만 이년 간 해가 졌으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3. 계획의 착수.
(1) 압살롬은 나발처럼 양털 깎는 일을 당하여 향리에 있는 자기 집에 잔치를 배설한다(23절). 그는 자기 몸에 대해서도 몹시 주의 깊은 인물이다(14:26). 그는 지체가 높은 자였지만 자기 양떼의 형편을 알고 잘 돌보았다. 도회지에서 쓸 줄만 알지 시골에 있는 전답을 돌볼 줄 모르는 자들은 십중팔구 그 재산의 끝장을 보게 된다. 압살롬은 양털 깎는 일을 당하자 털 깎는 자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였다.
(2) 그는 이 잔치에 자기 부왕과 모든 왕자들을 청한다(24절).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려 할 뿐만 아니라 이웃 사이에서 더욱 존경받는 자가 되려고 하였다. 세력가의 가족들은 자기 친척사이에서 너무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3) 왕은 그에게 과도한 접대 비용을 부담시키기 싫어서 직접 가려고 하지 않는다(25절). 압살롬은 직접 자기 손으로 재산을 관리하여 이를 근거로 생활한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는 왕자로서 남 못잖은 체면을 차린 것 같다. 그 재산은 다윗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이 그 재산을 잘 관리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부모의 귀감이 되고 있다. 부모는 자녀가 장성하면 신분에 따라 생활의 근거가 될 재산을 주어야 하는 동시에 자식들이 무위도식하지 않도록 배려를 해야 한다. 특히 부모는 자녀의 무위도식을 방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젊은 관리자들이 제 때에 털깎이를 시작하고 털깎으면서 양모를 낭비하지 않는 것은 슬기로운 일이다.
(4) 압살롬은 암논과 나머지 모든 왕자들을 초청하는데 성공했다. 왕자들 특히 암논을 왕 대신에라도 보내서 향리의 자기 식탁을 빛내 달라고 청원하여 왕의 윤허를 얻은 것이다(26, 27절). 압살롬은 암논에 대한 적의를 너무도 교묘히 감추었으므로 다윗은 이 특별한 초대에서 음모의 낌새를 챌 수 없었다. "내 형 암논으로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다윗이 이 말에 이끌려 동의한 것은 전보다(7절) 더욱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이었다. 전에는 그가 간음의 기회를 주었으나 이제는 살인의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아들들은 비록 장성하였을지라도 그의 허락 없이는 이런 작은 나들이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 아버지를 공경했던 것 같다. 자녀들은 이처럼 장성해서라도 부모를 공경하고 상의하고 그들의 동의 없이는 아무 일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 하물며 부모의 의사를 거스리는 일이랴!
4. 계획의 실행(28, 29절).
(1) 압살롬의 접대는 푸짐하였다. 그는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을 술로 흥청거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암논만큼은 흥겹게 해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왜냐하면 그는 암논의 과음하는 주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 그는 자기 종들에게 암논의 술잔이 그의 피로 뒤범벅이 되게 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그 명령은 매우 야만적이었다. 그가 만일 자신의 선한 명분과 하나님의 공의에 의존하여 직접 도전했다면 비록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악한 일이긴 하나 그래도 보다 명예롭고 해명할 여지가 있을 터였다(우리의 고대법도 경우에 따라 결투에 의한 심판을 허용했었다). 압살롬의 살인은 그 이유만 다를 뿐 가인의 선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벨이 자기 의 때문에 살해되었다면 암논은 자기 악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차이뿐이다. 이 죄가 보다 중한 이유를 살펴 보자.
[1] 압살롬은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 할 때 그를 살해하고자 했다. 그는 술취함 때문에 위험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저항할 능력이 거의 없으며 이 세상을 떠나기에 가장 적합치 못한 상태에서 화를 당하는 셈이다. 그의 악의는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말할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영혼과 육체를 다 멸하려고 작정한 듯이 행하였다. 죽음은 방탕함과 술취함으로 그 마음이 둔해진 많은 자들에게 얼마나 두렵게 엄습하는지 유의하자(눅 21:34).
[2] 그의 사환들은 이 일을 위해 고용되어 이 범죄에 연루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암논을 치라" 고 명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그에게 청종하여 암논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사환들은 그의 권세로 자기들을 지켜 주리라하는 가정 하에서 그의 명령에 따랐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 "살인하지 말라" 고 명시하고 있는데도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이 아니냐? 그것이면 족하다. 너희는 담대히 용맹을 내라. 그리고 하나님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말라" 는 장담과 함께 암논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율법을 불경스럽게 무시하는 짓이냐! 하나님을 거스려 가면서 자기 주인의 명에 따르는 종들은 그릇되게 교육받은 자들이며 종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주인은 악한 자들이다. 자기 영혼을 저주해 가면서까지 주인을 기쁘게 해 주려는 자들은 너무 아첨하는 자들이다. 주인의 큰 소리도 그들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인들은 언제나 자기들도 천국에 주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답게 종들에게 명령해야 한다.
[3] 그는 왕의 모든 아들의 면전에서 이 일을 행했다. 그들은 대신이였다(삼하 8:18). 이 일은 그들이 집행하는 공법과 그들이 대표하는 그의 부왕을 모독하는 짓이었고 그의 악행에 두려움이 되어야 할 칼을 멸시하는 짓이었다. 이와 반대로 그의 악행은 오히려 그 칼을 차고 있던 자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던 것이다.
[4] 압살롬이 이런 만행을 저지른 것은 자기 누이의 복수를 위해서였을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을 위한 정지 작업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만하다. 그는 왕위에 대한 야망이 컸고 장자인 암논이 제거되면 그의 왕위 계승 전망은 무척 밝아질 터였다. 명령이 떨어지자 압살롬의 사환들은 두 번째 왕위 계승권자인 자기들의 주인이(패트릭 감독이 생각하듯 길르압은 죽었으므로) 자기들을 구해 주리라는 생각에 고양되어 어김없이 이를 시행하였다. 다윗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으리라던 경고대로 드디어 그의 집에서 칼부림이 일어난 셈이다.
첫째, 다윗의 장남은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려졌고 그 자신이 그 일의 원인이었다. 그의 아비는 묵인으로 말미암아 이 일의 공범이 되었다.
둘째, 다윗의 모든 아들은 이를 피해 달아나 공포에 질린 채 돌아왔다. 그들이 도망한 것은 그 형제 압살롬의 유혈극이 어느 정도로 확대될지 몰랐던 때문이다. 죄는 가정에서 어떤 해를 끼치는지 명심하자.
압살롬의 도주(사무엘 하 13:30-39)
Ⅰ. 다윗은 예루살렘에 들어온 헛소문에 경악하게 된다. 즉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살해했다는 헛소문이 들어온 것이다(30절). 풍문이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의 첫 소식은 나중 실제로 판명될 때보다 더욱 두렵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증되지 않는 흉보를 두려워하지 말자. 극히 악한 소문을 들을 때는 좋은 소식 아니면 적어도 보다 나은 소식을 기대하자. 그러나 이 오보는 마치 사실이기라도 한 듯 당장에는 다윗을 크게 괴롭혔다. 그는 그것이 아직 뜬 소문에 불과한데도 그 옷을 찢고 땅에 엎드러졌다(31절). 다윗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는 감정이 격한 사람이었기에 어느 누구보다 은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Ⅱ. 두 가지 일로 이 소동은 진정되었다.
1. 다윗의 조카 요나답의 암시로써. 요나답은 소년 왕자들이 다 살해된 것이 아니라 암몬만 죽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또 이 일이 압살롬의 작정으로 시행되고 암논이 다말을 겁간한 날로부터 계획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얼마나 사악한 인간인가! 이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의심할 만한 점이 있었다면 왜 좀 더 일찍 다윗에게 알리지 않았더란 말인가! 그렇게만 했더라면 다윗이 분쟁을 조정할 방책을 강구했을 것이고 아니면 최소한 암논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위험 속에 몰아넣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화를 방지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방조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고 말하더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우리의 행위를 통찰하지 못하시겠는가?(잠 24:11, 12) 요나답이 암논의 범죄에는 동참했지만 암논의 죽음에는 동참하지 않았다면 다행한 일이다. 이런 친구들은 자기들의 조언에 귀기울이는 자들을 악행으로 유도해놓고 그들의 파멸에는 오불관언이다. 암논의 범죄를 방지해 줄만큼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 두 가지를 다 방지할 수도 있었던 것 같다.2. 암논을 제외한 모든 왕자가 다 무사히 돌아옴으로써 왕자들과 그 시종들은 파수꾼에게 신속히 탐지되었고(33, 34절) 그들은 곧 도착하여 자기들의 생생한 모습을 드러냈으나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했다는 확실한 비보를 가져온 것이다. 다윗은 실재하지 않은 뜬소문을 인해 슬퍼했었다. 그러나 그 슬픔은 다윗으로 하여금 실제로 다가온 일을 더 잘 참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사태의 실상을 깨닫자 자기의 아들 전부가 죽지는 않은 데 대해 하나님을 송축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암논이 자기 형제한테 그토록 패역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살해됐다는 것은 왕과 조야와 온 국민을 진정한 슬픔으로 몰아 넣고도 남음이 있었다.
Ⅲ. 압살롬의 도주.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34절). 왕의 아들들은 압살롬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그의 악의를 피하여 달아났고 그는 그들의 정의를 피하여 달아났다. 이스라엘 땅에는 그의 피난처가 될 곳이 없었다. 도피성도 고의적 살인자에게는 보호처를 제공할 수 없었다. 다윗은 암논의 만행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겼으나 압살롬은 이 살인죄를 용서받을 수 없었다. 이 경우의 율법은 너무도 명백하였고 다윗의 정의감과 유혈죄에 대한 그의 두려움은 너무도 유명하였다. 그러므로 압살롬은 외가를 찾아가 은신하기로 하였고 자기 외조부 그술왕 달매에게로 가서 그의 환대를 받았다(37절). 그는 거기서 삼년 간 보호를 받았고(38절) 다윗이 그를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달매는 그를 돌려 보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Ⅳ. 다윗은 압살롬의 부재로 인해 심기가 편치 않았다. 그는 한참동안 암논을 위해 슬퍼했다(37절).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 슬픔은 사라졌다. 그는 암논에 대해서는 위로를 받았다. 세월은 압살롬의 죄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사그러뜨렸다. 살인자인 그를 미워하긴커녕 다윗은 "그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였다" (39절). 처음부터 그는 압살롬에게 법대로 시행할 마음이 없었다. 이제 그는 압살롬을 다시 총애할 마음이 생겨난 셈이다. 이것은 다윗의 약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서 남다른 어떤 점을 발견하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존중히 여긴 엘리와 다른 것이 무었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