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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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궤에 대한 다윗의 걱정(사무엘 하 7:1-3)

이 문단에서는 이런 것을 보게 된다.

Ⅰ. 다윗은 편히 쉰다. "그가 집에 앉았다" (한글과는 다소 다름-역주)고 했다(1절). 아무런 소란거리도 없었다. 전쟁도 없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 즉 다윗이 보좌에 앉는 것을 대적하는 모든 적에게서 평안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안식을 누렸다. 그는 비록 무사였지만, "평화의" 사람이었다(시 120:7). 전쟁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요를 즐기게 되었다. 그는 자기 집에 앉아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게 되었으니, 그의 천성에 맞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Ⅱ.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생각을 한다. 그는 자기 궁과 자기 신하들이 있을 도성을 건설했다. 그리고 이제는 궤의 거처를 지을 생각을 하는 것이다.

1.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존귀케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보답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생활 중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했을 때는, 우리도 그와 그의 영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도록 애써야 한다. "내가 여호와께 무엇을 드릴꼬?"

2. 그럼으로써 현재의 평안을 선용하고, 하나님이 내려 주신 안식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산당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가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므로, 다른 방식으로, 즉 자기의 생각과 시간과 재산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것이다. 자신의 안일에 빠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호화로운 생활을 향유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섭리를 통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사, 세속 사업에 별로 할 일이 없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왕궁에 편히 앉았을 때 "자기의 길로 행한" (단 4:29, 30), 느부갓네살과 다윗의 생각은 얼마나 다른가! 그 교만한 인간은 자신의 권력, 자기 자신의 위엄만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겸손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 하는 생각만 했다. 또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 주시고 영광 주신다는 것을 이 사건은 잘 나타내 준다.

다윗은 자기 집의 위풍을 생각해 봤다(2절)("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도다"). 그리고는 궤의 거처의 비천함과 비교해 보았다("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그리고는 자기는 궁궐에 사는데 궤는 천막 속에 있어야 함은 부당한 일임을 알았다. "궤의 거처" 를 마련하기까지는 다윗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시 132:4, 5). 그러나 이제는 더 좋은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1) 감사한 마음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인간은 결코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 할만큼 다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미 많은 일을 하고도, 더 좋은 것, 더 후한 일을 하려고 궁리한다.

(2) 그런 자들은 교회가 곤경에 빠져있을 때에는 자신들의 안락을 즐길 수 없다. 궤가 좋은 집에 있기 전에는, 다윗도 자기가 백향목 궁궐에 거한다는 것이 조금도 즐겁지 못했다. "상아 침상에서 딩굴어도 요셉의 환난을 슬퍼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다윗의 음악은 가졌어도 그의 정신은 못가진 것이다(암 6:4, 6). 또 하나님의 집이 황폐케 된 때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골방에 거하지 않는다.

Ⅲ. 다윗은 자기 생각을 나단 예언자에게 알린다. 나단은 그의 친구요 심복이다. 늘 그에게 의논하곤 했었다. 다윗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의논해야 했던가? 다윗 자신도 예언자의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모사가 많은 게 안전하다." 다윗은 나단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달라고 했다. 그 일 자체는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일을 다윗이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불확실하다.

Ⅳ. 나단은 그 의견에 찬동한다. "좋습니다.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하십니다. 마음에 품은 뜻을 행하십시오" (3절).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런 집이 없어서 곤란하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단은 다윗의 심중을 쉽사리 헤아릴 수가 있었고,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의 뜻을 밀고 나가라고 했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생각이나 계획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대로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는 것이 좋다. 나단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의 뜻으로서, 그것이 좋다고 말했다. 즉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일개의 지혜롭고 선한 인간으로서 그런 일은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어서, 다윗은 그런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지만,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각자 자기의 처소에서 신앙의 증진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헌신해야 함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언제든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한 특권이었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예언자들은 예언의 영이 자기들에게 임할 때에만 그것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잘못이 있었을 때에는(삼상 16:6 의 사무엘처럼, 그리고 여기의 나단처럼), 하나님이 즉시 그들의 실수를 시정해 주셨다.

 

7:2 없음.

 

7:3 없음.

 

7:4

다윗의 고결한 뜻과 그 상급(사무엘 하 7:4-17)

여기서는 다윗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 호의 속에 있는 자비로운 뜻을 나단 예언자를 보내어 알려 준다. 나단은 이 긴 전갈을 다윗에게 전할 임무를 맡는다. 그 전갈의 내용은 성전을 지으려는 다윗의 의도를 중단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1. 그 일을 하라고 격려해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소식이 온다. 만일 다른 예언자가 와서 그 소식을 전하게 되면, 나단이 멸시를 받게 되고, 한 예언자는 하라 하고 다른 한 예언자는 말라 한다면, 다윗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 바로 그 날 밤에 전해진다. 나단이 계속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고, 다윗이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직접 다윗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단을 시켜서 하셨다. 그럼으로써 예언자의 영예를 높이고, 다윗도 그들을 중히 여길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머리였지만, 그가 전능자의 이상을 알아 보기 위해서 필요한 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입의 역할을 하는 예언자들이 있어야 했다.

나단에게 이 긴 소식을 전한 분은 그것을 잘 기억할 수 있는 기억력까지 도와 주셨다. 그래서 그 소식을 받은 그대로 완전히 전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 소식 의 내용을 살펴 보자.

Ⅰ.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으려는 다윗의 의도는 기각된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알고 계셨다. 그는 사람의 심중을 아시기 때문이다. 열왕기 상 8장 18절에 있는 때로, 하나님은 그 뜻을 매우 좋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마음이 네게 있음이 매우 좋도다." 그러나 그 뜻을 이행하지는 못하게 했다(5절). "네가 나를 위하여 거할 집을 짓겠느냐? 아니다. 그러지 말지니라(대상 17:4). 네게는 먼저 해야 할 다른 일을 명하리라." 다윗은 무사였다. 그는 정복을 계속하여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 다윗은 훌륭한 시인이다. 그러므로 성전이 생기면, 그 안에서 사용할 시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레위인들의 질서를 정해야 한다. 반면에 그의 아들의 재질은 성전을 짓기에 다윗보다 적합하며, 그 비용을 부담할 더 좋은 보화를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가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할지니라." 성전 건축은 시간이 드는 일이므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알리셨다.

1. 하나님은 지금까지 집이 없었다(6절). 회막에서 지냈다. 조금 더 회막을 이용해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의 장황함을 중시하지 않으신다. 궤가 성전에 있을 때든 장막에 있을 때든 언제나 그는 그 백성 중에 함께 계신다. 궤가 천막 속에 있다는 것이(가변적이요, 비천한 자리였다) 다윗에게는 좋아보이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그것이 불편하다고 조금도 불만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한 곳에 거주하지 않으시고, 행동하신다. 그러나 고단하거나 지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 마치 장막이나 회막에서 지내신 것과 같다. 그는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기" (행 10:38) 때문이며 아버지의 집, 위에 있는 처소에 가시기까지는 자기의 집에서 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교회는 법궤처럼 이동적이고, 장막에 거한다. 교회의 현재 상태가 목회적이요 동시에 군사적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원한 도성은 앞으로 올 것이다.

다윗은 자기의 시편에 종종 회막을 성전이라고 불렀다(시 5:7; 27:4; 29:9; 65:4). 비록 회막은 휘장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의 앞에서는 성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은 겉모양으로 속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윗은 그 백향목 궁에 거한 그 어떤 후계자들보다도 더욱 진실한 신앙심과 더욱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졌을 것이다.

2. 하나님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어느 홀 혹은 사사(대상 17:6 방백은 "홀" 이라 칭했다. 겔 19:14, 저 위대한 방백도 그렇게 불리우셨다, 민 24:17)에게 성전을 지으라는 명령이나 암시조차 하지 않으셨음을 알리셨다(7절). 명령된 것은 오직 용납될 만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일을 하려 했는가?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게 하자. 하나님이 명하신 천막이 인간의 고안으로 나온 성전보다 더 낫다.

Ⅱ. 하나님이 다윗에게 베푸신 큰 일들을 그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그래서 다윗이 비록 이 일을 맡지 못할지라도, 하늘의 총애를 받은 자임을 스스로 알게 한 것이다. 또한 다윗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결코 다윗의 선한 의도 때문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함께 하셨음을 알려 준다(8, 9절).

1. 하나님은 낮고 천한 자리에서 다윗을 끌어 올리셨다. "하나님은 그를 목장에서 취하여 내셨다." 크게 출세한 자들은 자기들의 미천하던 초기를 기억하여 늘 겸손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2. 하나님이 다윗을 원수에게 이기게 하셨다(19절). "네가 어디로 가든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네가 쫓김을 당할 때는 보호해 주었고, 쫓아갈 때는 빨리 달리게 해 주었다. 내가 네 모든 원수들을 멸하였느니라. 그들은 네 길을 막고 안정을 방해하던 자들이었다."

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다윗에게 주었다. 뿐만 아니라 열방 중에서 명성을 떨치는 영예도 주셨다. "내가 네 이름을 존귀하게 하였느니라." 다윗은 용맹, 지략, 큰 업적으로 유명해졌고, 그 당시의 어느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의 얘기거리가 되었다. 위대한 이름이란 감사히 여김을 받을 이유가 충분하고 좋은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으나, 그러면서도 그것을 뽐내지 않는 자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선량한 이름이 더욱 바람직하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으나 아주 편안히 살다 간다.

Ⅲ.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좋은 안정이 약속되었다(10, 11절). 이 사실은 하나의 괄호처럼 나와 있다. 즉 다윗 자신에 대한 약속이 있기 전에 나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그로 알게 하여, 그 백성이 그의 통치 밑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고, 이스라엘에게 임한 평화를 예상하고 다윗 자신도 지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때에 "그의 자녀의 자녀들을 보리라" 는 약속도 주어졌다(시 128:6). 훌륭한 왕은 자기 나라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기 전에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이 다음에 나오는 약속은 그의 집안과 후손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안정을 말한 이 약속은 다윗 자신의 통치의 행복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약속 내용은 두 가지이다.

1. 평온한 자리에 대한 약속.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한 곳을 정하리라."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지정된 것이지만, 그들이 실망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제는 실현되리라. 아무런 방해없이 저들이 가나안을 향유하게 되리라.

2. 그 자리를 조용히 즐기리라는 약속이다. "악한 자녀들(특히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블레셋을 지칭한다)이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라. 전에 내가 사사들을 통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고, 내 모든 대적들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11절). 즉 "내가 그 평안을 지속시키고 완성하리라. 그리고 사사 때와는 달리 그 땅이 전쟁에서 쉼을 얻으리라" (영문 원본에는 "사사 대와 같이" 로 되어 있음-역주).

Ⅳ. 축복이 다윗의 집안과 후손에게 허락된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으려 했다. 그런데 그 보답으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너에게 집을 지어 주리라" 고 약속한다(11절)(이것은 가문의 형성을 말함-역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든지, 또는 섭리가 그 실행을 못하게 했을지라도, 그것은 "결단코 상급을 잃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름을 크게 해 주시겠다고 했다(9절). 여기서는 집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 한다. 그 집은 그의 이름으로 불리울 집이다. 다윗이 생존시에, 자기가 죽어도 그의 집안은 번영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우리 자신의 영혼과 하나님의 교회의 행복 다음으로는, 우리에게서 날 후손이 우리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을 때에 지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라야 한다.

1. 그 약속들 중 어떤 것은 그의 후계자 솔로몬과 유다 왕국의 왕손에 관계된다.

(1) 하나님이 솔로몬을 왕좌에 오르게 하시리라. "네 날수가 다하여, 네 조상들과 잠들게 될 때" 라는 말은, 다윗 자신이 평안히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때에 "내가 네 씨를 세우리라." 이것은 정말로 위대한 은총이다. "내 양을 치" 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 중 어느 누구도, 모세나 여호수아나 어떤 사자들에게로 이런 은총이 내린 적이 없다.

허락된 첫 내용이 다윗의 정권이었다. 그 왕국의 그리스도에게 향한 약속은 그의 영적 자손들에게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라면 상속인이 되리라."



(2) 솔로몬의 보좌를 안정케 하리라 했다. "나는 그의 나라(12절), 그의 나라의 왕위(13절)를 견고케 하리라." 그의 왕권은 분명하고, 경쟁될 수 없으며, 그의 권세가 확실해지고, 그의 정부가 시종여일하리라.

(3) 하나님은 솔로몬을 그 성전 짓는 일에 쓰시겠다고 하신다. 다윗은 그 생각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지으리라" (13절). 다윗은 못하지만, 그 일은 꼭해내야 한다.

(4) 양자의 계약을 그와 맺으리라 하셨다(14, 15절).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할 일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것 이상 다른 일이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들을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사 자기의 아들로 삼으시고, 자녀가 되는 특전을 주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상하고 관후하신 아버지라면, 우리는 그에게 대해 복종하고 의무를 지키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

[1] 필요가 있으면 그 아버지가 징계하리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으면, 그 자식이 뭐가 되겠는가?" 환란이 계약의 한 조항으로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어버이 같은 사랑에 일치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가 만일 범죄하면(왕상 11:1 에서 나타났듯이), 내가 그를 경계하여 회개케 하리라. 그러나 사람이 막대기를 사용하듯이, 사람의 막대기로 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큰 권능을 가지고 그를 치지 아니하리라" (욥 23:6). 아니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막대기로 하리라. "내가 그의 기질을 고려하여, 필요할 때는 가장 유순하게 징계하리라. 그것은 채찍으로, 사람의 자녀들(인생들)로 되리라. 그러나 죽음이나 상함으로 하지 않으리라.

[2]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지 않으시겠다 하셨다(15절). "내 자비(이것이 아들들의 유업이다)가 그에게서 떠나지 않으리라."

열 지파의 반동은 다윗 자손의 범죄에 대한 징계였다. 그러나 끝까지 묻고 있던 두 지파는-능히 왕가의 품위를 지킬 수 있었는데-다윗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이 약속에 따라서 보존한 것이었다. 그 가문이 오래 못 갔지만, 사울의 집안처럼 멸족되지는 않았다. 어떤 집안도 다윗 집안처럼 유다의 왕권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이것이 바로 구속과 은총의 계약에 대한 전형으로 찬미권 왕권의 계약이다(시 89:3 등).

2. 그 중 어떤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된다. 그는 가끔 다윗과 다윗의 아들이라고 호칭된다. 이 약속들은 그 다윗의 아들을 지시하는 것이요, 그에게 실현되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 이다(행 13:23). 그에게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 다윗의 보좌를 주셨다" (눅 1:32). 즉 천지에 있는 모든 권력과 심판을 행할 권위를 주신 것이다. 그는 곧 복음의 성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집을 지어야 할 자였다(눅 6:12, 13).

"나는 네 아비가 되고, 너는 내 아들이 되리라" 는 저 약속은 사도에 의해서 분명하게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히 1:5). 그러나 또한 그의 집, 그의 보좌 그의 "나라" 를 영원히(13절에, 그리고 16절에 두 번 "영원히") 세리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아니고는 적용시킬 데가 없다. 다윗의 집과 나라는 오랜 후에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영원히 있을 것, "그 정의와 평화가 끝없이 증가" 될 것은 메시야의 나라뿐이다.

악을 저지를 것이라는 가정은 실로 메시야 자신에게는 적용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영적 자손들에게는(마음 놓고) 적용시킬 수가 있다. 참된 신자도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징계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멸절되지는 않는다. 계약을 범한다 하여, 그것이 우리를 계약권에서 쫓아내지는 못하리라.



(1) 이 소식은 나단이 성실히 다윗에게 전했다(17절). 자기의 생각과는 달리 성전 건립을 금하라는 명령이었지만, 하나님의 생각에 더욱 귀를 기울이기 때문에, 그는 주저치 않고 전했다.

(2) 때가 되자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성실히 이 약속을 이행하셨다. 비록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지르려는 그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집을 이룩해 주시겠다는 그의 약속을 실현하셨다. 우리에게 있는 계약의 취지도 그러한 것이다. 우리들은 그 계약을 이행함에 있어서 많은 잘못을 범하지만, 하나님은 계약 이행에 아무 잘못을 범하시지 않는다.

 

7:5 없음.

 

7:6 없음.

 

7: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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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응답 기도(사무엘 하 7:18-29)

다윗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로운 소식에 답하여 엄숙한 기도를 드리는 대목이다. 다윗이 나단에게는 뭐라고 말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틀림없이 그를 아주 정중히, 하나님의 사신으로 맞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직접 응답한다. 나단을 시켜서 하지 않았다. 사역자들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해 주면, 우리의 마음은 그 사역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의 언어를 아신다. 우리는 그에게 담대히 나갈 수 있다. 다윗은 그 전갈을 받자, 그 인상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는 동안, 즉시 응답을 보냈다. 여기서 이런 것을 살펴보자.

Ⅰ. 그가 물러간 장소는 어딘가! "그는 여호와 앞으로 갔다." 즉 궤가 있는 천막으로 갔다. 궤는 하나님의 현존의 표지였다. "그" 앞에 다윗은 임석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은 어디서든 기도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서 기도하든,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처럼 우리를 정돈하고, 그를 우리 앞에 모셔야 한다.

Ⅱ. 그가 취한 자세는 무엇인가? "그는 여호와 앞에 앉았다."

1. 이것은 그의 자세를 가리킨다. 기도할 때는 무릎을 꿇는다든가 서는 것이 가장 적합한 몸가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유대인들의 말에 의하면, "다윗가의 왕들에게는 성전 안에서 앉아 있는 자세가 허락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필요한 경우에야 어떡하든, 보통 때도 앉아서 기도하는 자세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다윗은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자리를 취했다" 라고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은 기도할 때 보통 서서 했다.

혹은 그는 "여호와의 앞으로 들어가서 계속 있었으며," 잠시간 조용히 묵상을 한 후에 기도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보통 때보다 더 오래 그 회막 속에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2. 아니면 그 말은 당시의 다윗의 마음가짐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그는 여호와 전에 들어가서, 자기들 앞에 고정시켰다.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언제나 그래야 한다. "오 하나님, 내 마음이 확정되었나이다. 내 마음이 확정되었나이다" (시 57:7).

Ⅲ. 그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심과 사랑이 가득 차 있었다.

1. 그는 자신과 자신의 공적을 아주 낮추어 말했다. 놀란 사람처럼 말을 시작한다. "내가 누구입니까? 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내 집이 무엇이관대!" (18절) 하나님은 그의 본래 처지의 미천함을 상기시켰었다(8절). 그리고 다윗은 그것을 인정했다.

(1) 다윗은 자신의 개인적 공적을 천히 생각했다. "내가 누구입니까?" 모든 점에서 볼 때 그는 매우 값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신체와 정신의 소양이 모두 범상했다. 그의 소질과 미덕이 탁월했다. 그는 존경과 성공과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국내의 자랑이요, 외적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 대해 말할 때는, "내가 누구입니까? 알 가치조차 없는 자가 아닙니까?" 하고 말했다.

(2) 자기 집안의 공적을 천히 여겼다. "나의 집이 무엇입니까?" 그의 집안은 왕족이다. 그는 그 나라의 가장 좋은 가문의 출신이다. 그러나 기드온과 같이, 그는 자기 집안은 유다의 보잘 것 없는 집안이요, 자기는 "아버지 집의 가장 작은 자라" 고 생각했다(삿 6:15).

사울의 딸이 아내로 천거되었을 때에도 다윗은 자신을 천히 여겼다(삼상 18:18). 그러나 지금은 자기를 천히 여겨야 할 이유가 더욱 충분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아무리 높은 지위에서 한창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라도, 사람은 자신을 겸손히 여기는 것이 합당하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벌레에 불과하며, 아무리 선한 자라도 역시 죄인이며, 아무리 높이 출세한 자라도 실상은 그럴 자격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관대, 주께서 나를 이렇게까지 하셨나이까? 나라를 주시고, 그 나라에 안정을 주시며, 모든 나의 적국으로부터 평안하게 하시나이까?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시지 않았다면, 자기 혼자 수완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모든 업적은 하나님의 허락으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준 은혜에 대해서는 극구 찬양했다.

(1)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행하신 바에 대해서 "주께서 나를 이렇게까지 하셨나이다." 이렇게 높은 권력의 자리에 앉게 하셨나이다. 이렇게까지 나를 도우셨나이다. 앞으로 어찌될지 불확실한 중에라도, 이미 받은 바에 대해서 감사해야 마땅하다(행 26:22).

(2) 그에게 약속해 주신 바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를 위해서 이미 큰 일을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더 큰일을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19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허락하신 것이 크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것은 무한히 더 크다(시 31:19). 성도들이 현재 누리는 은혜와 위안은 무한히 값진 은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미리 주는 것으로는 그것이 너무 작다는 듯이, 그는 계속해서, 아니 영원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보살피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다윗처럼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



[1] 그것은 우리의 기대 이상이다. "이것은 사람의 방식대로가 아닙니까?" 즉

첫째, 사람이 감히 자기의 조물주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아담의 법입니까?"

사람의 성질과 형편을 생각하시사, 하나님이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감격스런 일이다. 사람이란 미천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거리의 법에 묶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무효이다. 그리고 경시와 경멸의 법에 묶여 있다. 죄가 많고 혐오스럽다. 그러므로 죽음과 저주의 법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이 아담의 법에 따라 대하시다니,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답지 않은가! 다윗은 하나님이 높은 가격을 치루고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되었다. 하나님과 더불어 계약을 맺고 교제를 나누었다. 이런 일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으랴!

둘째, 사람이 동료를 항상 그런 식으로 대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사람의 방식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비록 높은 데 계시지만, 낮은 데를 주목하신다. 사람의(행동) 방식도 그런가? 그는 비록 공격을 당하지만, 사람과 다시 화해되기를 원하며, 은혜로이 기다리시며, 무수히 죄를 용서하신다. 사람의 행동 방식이 그런가.

어떤 사람은 그 구절을 이렇게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 곧 주 여호와의 법입니다." 즉 "그 나라가 영원히 세워져 있으리라" 고 한 이 약속은, 사람이나 동시에 주 여호와이신 자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그런 자의 법칙이다. 내 허리에서 나올 메시야는 인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니, 하나님임에 틀림 없다" 는 뜻이라 한다.



[2] 이외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다윗이 주께 더 뭐라 하리이까!" (20절) 즉 "내가 더 무엇을 구하리까? 주 여호와여, 당신은 주의 종을 아시나이다. 뭣이 내게 행복인지도 아시나이다. 이미 하신 약속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에 넉넉하나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약속에는 모든 것이 포괄되어 있다. 만일 그 사람, 주 하나님이 우리의 것이라면 더 무엇을 바라랴!(엡 3:20) 은혜의 계약이 주는 약속은 우리를 아시는 그분에 의해서 된 것이요,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그 약속을 어떻게 적응시켜야 할지를 아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신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모든 조건에 만족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것 외에 무엇을 더 간구하랴?

3.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에다 돌렸다. 하나님이 이미 행하여 주신 큰 일도, 맡겨 주신 큰 일들도 모두 그에게 돌렸다.

그 모든 것은



(1) 그의 말씀을 인해서, 즉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인해서이다. 그것은 모두 그의 공로에 의한 것이다. 또는 "주께서 주의 이름 위에 세워진 약속의 말씀을 높이시사, 그것이 주의 백성의 보물 창고가 되게 하소서."

(2) 그것은 주 자신의 뜻에 따른 것이요. 주의 은혜로우신 생각에서, mero motu-즉 주 자신의 기뻐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는 것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6).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 자기 백성에 베푸신 모든 것, 약속으로 보증하신 모든 것이 그가 기뻐하시는 바이며, 그의 말이 찬양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4.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찬미했다(22절). "주는 위대하시도다. 오 여호와 하나님이여! 주 같은 이가 없나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겸비, 그에게 주신 영예는 하나님의 엄위에 대한 그의 경외심을 결코 감소시키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의 영광을 더욱 잘 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 그의 눈에 우리가 더 귀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그는 또한 우리에게 그만큼 더 위대한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 그 외에는 다른 어떤 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의 눈으로 그의 권능과 자비에 관해서 본 바는 모두 우리가 귀로 들은 바에 의한 것이며, 우리에게 이야기된 것은 실제의 절반도 안 됨을 알아야 한다.

5. 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크게 찬미했다(23, 24절). 여호와와 비교될 만한 신이 없듯이, 이스라엘과 비교될 만한 민족이 없다.

(1)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역사 때문이다. 그는 그들을 구원하러 가셨고, 그것을 중대사로 여겼으며, 그 일을 엄숙히 수행하신다. Elohim haleeu, dii jverut-즉 하나님이 가셨다. 창조 때처럼 구속에 관해서도 거룩한 삼위의 위격(位格)들께서 마치 무슨 회의라도 있는 듯이 하나님이 가신 것이다. 창조 때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보냄을 받은 자들을 구원하러 가셨다."

여기에 나와 있는 대로, 이스라엘의 구속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가 다음에서 구속됨의 한 전형이었다.



[1] 그들은 열반과 그들의 신에서 구원받았다. 그렇듯 우리는 모든 불의와 이 현세에 대한 순응으로부터 구원받는다. 그리스도는 그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러 오셨다.

[2] 그들은 구원받아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 성별되고 구별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실 수 있었다. 하나님의 영예, 그리고 성도들의 영원한 행복, 이것은 구원의 두 가지 목표이다.

(2) 그가 그들과 맺은 계약(24절). 그것은

[1] 상호적인 것이다. "그들은 주께 한 백성이 되고, 주는 그들에게 신이 되옵소서. 모든 그들의 이해 관계는 주께 속하는 것이요, 주의 모든 속성은 거기에 관계되나이다."

[2] 불상호적이기도 하다. "주는 그것들을 견고케 하셨나이다." 계약을 맺은 분이 그것을 확실하게 하시고, 또 실현하실 것이다.

6. 그는 하나님께 겸손한 탄원을 드리면서 기도를 맺는다.

(1)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전갈에 기초하여 탄원을 올린다(27절). "주께서 이것을 주의 종에게 알리셨나이다." 즉, "주께서는 주의 선한 뜻을 내게 약속하셨으니, 나의 집을 육성해 주시리라 하셨나이다. 그러하옵지 아니했다면, 이런 기도를 올릴 생각은 도무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주의 약속이 이런 것을 격려해 주시지 않았다면, 감히 그런 간구는 못했을 것이옵니다. 실로 그것은 너무 큰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나이다. 이제는 주의 종이 이런 기도를 올릴 생각이 났나이다." 원문과 칠십인 역은 그런 뜻으로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가서 자기들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구한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마음을 알았다. 즉 그 마음이 확정되고 있었다. 방황하기를 멈추고, 오직 기도의 의무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 혀에서만 나오는 기도는 하나님을 즐겁게 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라야 된다. 마음을 들어바치고, 쏟아부어야 한다. "아들아, 하나님께 네 마음을 바치라."



(2) 그는 자기의 믿음을 굳건히 했고, 하나님의 약속이 속히 이뤄지기를 희망한다(25절). "주는 그 하나님이시옵니다" (주는 그 분, 그 하나님, 곧 만군의 여호와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말씀이 진실한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는 이 자비를 주의 종에게 약속하셨나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기도할 용기를 가졌나이다.

(3) 그래서 그는 거기서 기도의 제목을 가져왔고, 그것을 기도의 지침으로 삼았다.

[1] 하나님의 약속이 이행되기를 기도했다(25절).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것이 내게 희망을 주었나이다(시 119:49).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옵소서. 더 큰 것을 바라지도 않으며, 더 못한 것을 기대하지도 않나이다. 그 약속이 그토록 충만하고, 그토록 확실하기 때문이옵니다." 우리도 이처럼 주신 약속에 따라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그 약속이 이행될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말과 행동이 둘이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행동하신다.

[2]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한다(26절). "영영히 주의 이름이 높여지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모든 기도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도의 알파가 되고 오메가가 되어야 한다. "주의 이름이 거룩케 되옵소서" 로 시작하여, "영원히 영광이 주의 것이옵니다" 라로 끝내라. "나 자신이야 높아지든 말든, 주의 이름이 높여지게 하옵소서."

그는 또 생각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외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없으리라 했다. 적합한 사랑을 품고서,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위대함" 을, 즉 그는 "만군의 주(主)" 임을 말한다. 어떻든, "주의 이름이 영영히 크게 되옵소서." 모든 피조물과 교회는 그러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다윗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되게 하기 위해서 그의 약속이 실행되기를 기도한 것이다. 다윗의 아들(예수)도 그렇게 기도했다.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요 12:28).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요 17:1).



[3] 그는 자기 집을 위해 기도했다. 그 약속은 특별히 그의 집에 관계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기도했다(29절). "주의 종의 집을 축복함이 주를 기쁘시게 하옵소서" (한글과 다소 다름:역주). 그리고 다시 "주의 복을 내리소서." 즉 "주의 종의 집이 진실로, 영원히 복을 받게 하소서. 주께서 축복한 자는 진실로 복받은 자이옵니다" 는 것이다. 선한 사람들의 걱정은 그들의 집안에 대한 것이 많다. 그리고 가정에 물려 줄 가장 큰 유산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 간구를 반복함은 헛된 반복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축복을 그만큼까지 생각한다는 표현이다. 그의 간절한 소원임을 표시 한 것이다.

둘째, 그들의 행복이 계속되기를 위해서다. "그 집이 주 앞에서 영영히 서게 하옵소서(26절). 주 앞에서 영영히 계속되게 하옵소서" (29절).

그는 기도했다.

1. 왕권 계승이 멸절되지 않으며, 계속 그 집에 남아 있어서, 아무도 그 권한을 잃지 않게 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써 확고히 서기를 바랐다.

2. 그의 나라가 메시야의 나라에서 완전해지고 번영하기를 기도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오른 편에 영영히 좌정하고(히 10:12), 그의 자존과 보좌가 하늘 나라에서처럼 될 확증을 모두 받게 된다면, 이세의 아들 다윗의 기도는 응답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집이 "영영히 하나님 앞에서 계속되는" 셈이다(시 72:17 참조). 메시야 왕국의 영구성은 모든 선한 사람들의 소망이요, 신앙이다.

 

7:19 없음.

 

7:2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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