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궤를 옮기려는 시도(사무엘 하 6:1-5)
법궤가 블레셋에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직후, 기럇여아림에 머무르게 된 이래로는(삼상 7:1, 2) 사울이 한번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삼상 14:18)는 얘기 외에는, 법궤에 대해서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전날에는 그렇게 유명하던 것이 이제는 수년간 무시된 채 버림을 받고 있었다. 법궤가 이렇게 수년 간을 어떤 집에 놓여 있었다고 하면, 교회가 그토록 오랫동안 광야에 있었던 것을 안다고 하여 놀랄 것은 없으리라(계 12:14). 항상 사람의 주목을 끈다는 자체가 참된 교회의 징표는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외적 표적이 없는 때에도,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그들의 심령 속에 함께 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제 다윗이 보좌에 좌정하게 되자, 법궤의 명예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법궤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심도 다시 꽃피기 시작했다." 분명히 지금까지 선한 자들이 "염려를 해 왔지만 기회가 없어서"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빌 4:10 참조).
Ⅰ. 법궤에 대해서 영예로운 말이 나와 있다. 오랫동안 법궤 얘기가 나오지 않았으니, 여기서 법궤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를 살펴보자(2절). 그것은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하나님의 법궤" 이다. 즉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조차도 거기에서는 불리워진다. 혹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 불려진다." 혹은 "선포된 그 이름, 곧 만군의 여호와란 이름으로 인해서 불리는 것이다" (즉 법궤 앞에서 일어난 기적들 때문에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셨다). 또는 "그 이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의 법궤", "그 위에 있는 그룹들 위에 좌정해 계신 분" 의 법궤라고 했다.
여기서 이런 것을 배우자.
1. 하나님을 귀히 생각하고 찬양하는 법을 배우자.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신 이름, "만군의 여호와" 이시다. 그는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다스리고 있으며, 그들 모두에게서 충성을 받으시며, 그러면서도 그룹들 사이에, 곧 속죄소, 자비의 보좌에 앉으시나 자기 백성에게 자기를 기꺼이 나타내 보이시며, 한 중보자를 통해서 화해하시고, 그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2. 거룩한 규례를 존경스럽게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배우자. 그런 규례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그런 것들은 이스라엘에게서의 법궤처럼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요(마 28:2), 그와의 교재의 방편이 된다(시 27:4). 법궤는 그것이 하나님의 법궤라는 데서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질투하시며, 그것을 통해서 찬양받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그 이름이 불리워진다. 하나님의 제도는 거룩한 규례들에다가 미와 장엄함을 부여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것들은 모양도 맵시도 없는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법궤이다.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그의 사랑이 전달되며, 우리의 관여와 기도를 받으신다.
Ⅱ. 궤를 옮기는 데에 영예로운 행차가 뒤따른다. 다윗이 제의를 했고(대상 13:1-3), 장로들이 동의를 했기 때문에, 그 일은 시행되었다(4절). 이스라엘의 택함받은 모든 사람들이 이 의식을 장엄하게 하기 위해 소집되었고, 그래서 궤에 대한 저들의 존경의 열을 표하면서, 궤가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게 되었다. 귀족들과 명사들, 장로들과 관원들이 왔는데, 그 수가 3만이었다(1절). 그리고 많은 서민들이 그 옆에 섰다(대상 13:5). 그러므로 혹자는 이 일이 3대 절기 중의 어느 하나에 있었던 일로 본다. 아마 이것은 고귀한 행렬이 되었을 것이요, 그 나라의 청년들에게 궤에 대한 존경의 염을 고무했을 것이다(아마 그 청년들은 궤에 대해서 한 마디도 못들었을지 모른다). 왕과 고관들이 직접 수행하여 지키는 이것은 필경 무한한 가치의 보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Ⅲ. 궤의 이동에 대한 큰 기쁨의 표현이 있다(5절). 다윗 자신과 음악인들이 함께 하여 자기들의 기쁨을 악기로써 표현했다. 아마 궤가 한적한 곳을 떠나 공적인 자리로 옮겨지는 것을 보면 그들은 기쁨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없는 것보다는 외딴 집에라도 궤가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 다곤의 신전에 포로로 되어 있는 것보다는 집에 궤를 두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궤를 위해서 마련한 장막에 궤를 두는 것이야말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거기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밀한 예배는 은밀할수록 좋듯이 공중 예배는 공적(公的)으로 되면 될 수록 더 좋은 것이다. 그리고 제한이 없어지며, 하나님의 궤가 다윗 성에 무사히 들어오고, 시민의 권력을 보호 지원해 줄 뿐만 아니라, 대변해 주고 격려해 준다는 것을 알면 기뻐함이 당연하다. 이 기쁨 때문에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유희했다." 공적 기쁨은 언제나 "여호와 앞에서" 있는, 그를 염두에 두고 그에게서 끝나는 그런 기쁨이어야 하며, 육욕적인 쾌락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라이프푸트(Lightfoot) 박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때에 다윗이 시편 68편을 지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편은 모세가 궤를 옮겨갈 때 드렸던 옛 기도문,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대적을 흩으소서" 라는 구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그 시편의 25절에는 "가수와 악기 다루는 자" 가 수행했다는 이야기 및 지파들의 여러 방백이 수행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그리고 아마 그 마지막 구절, "오, 하나님이여, 주는 주의 거룩한 처소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나이다" 하는 것은 웃사가 죽었을 때 추가된 것이라 한다.
Ⅳ. 이 일로 인해서 죄를 짓는 실수가 생긴다. 즉 그들이 수레로 궤를 날랐다는 점이다. 실상은 제사장들이 매어서 날라야 했던 것이다(3절). 고핫 자손들은 궤를 맡게 되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수레가 할당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임무가 자기들의 어깨로 궤를 나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민 7:9).
궤는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시온 산까지 어깨로 메어 나를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세속된 물건처럼 수레에 실어나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렇게 했는데도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잘 몰랐고, 궤를 나를 만한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없었다. 그래서 다곤 신전의 제사장들이 나르기보다는 차라리 수레에 실어 나르는 게 더 나았었다. 블레셋인들이 혹 건방진 자세로 궤를 수레에 실어 날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이 그런 짓을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잃는 위험한 일이 된다. 그 궤를 새 수레로 날랐다고 하여 사태를 조금도 호전시키지는 못했다. 새 것이건 낡은 것이건 수레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니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율법에 능통하고, 지혜가 많으며 선량한 사람이 어떻게 그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됐는지 알 수 없다. 아마 그가 이 의식의 내용에만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외부적 사정에 대해서는 등한히 했을 것이라고 좋게 생각해 본다.
웃사의 불상사(사무엘 하 6:6-11)
웃사가 궤를 만지자 즉사하게 된다. 이 일은 궤가 다윗성을 향해 막 떠났을 때에 일어났다. 그들의 즐거움을 꺼버린 슬픔의 섭리가 궤의 행진을 중단시켰다. 그래서 잠시 동안 이 큰 회중들은 슬픔에 찼다. 그들은 모두 궤에 수행하던 자들인데, 이제 급히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Ⅰ. 웃사의 죄는 아주 하찮은 것으로 보인다. 아비나답의 아들들, 웃사와 그의 동생 아효가 궤를 뒤따르고 있었다. 궤가 그들의 집에 묵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따라간 것은 궤를 자기 집에다가 두고 자기들만이 영예와 혜택을 받는 것보다는 공공의 이익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자기들도 좋아한다는 표시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궤를 나르는 수레를 몰았다. 아마 이것이 저들이 행할 수 있는 궤에 대한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궤가 다윗 성에 들어가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궤를 돌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효가 앞서 갔다. 길을 치우고, 필요하다면 소를 인도해 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웃사는 수레 옆에 바짝 따라갔다. 그런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다(6절). 여기에 쓰인 원어의 뜻이 무엇인지 비평가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고 있다. "소들이(흠정역 난외에 있듯이) 걸렸다." "그들이 발길질을 했다" (혹자는 그렇게 본다). 아마 웃사가 소를 모는 그 몰이 막대기를 향해서 걷어찼을 것이다. 또 혹자는 "그들(소)이 진창에 빠졌다" 고 읽기도 한다. 어쨌든 궤가 전복될 위험에 빠졌다. 이리하여 웃사가 궤를 붙들었다. 넘어지지 않게 하려함이었다. 그것은 좋은 의도였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궤의 명예를 보존하고 악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범죄의 행동이었다.
율법은 고핫 자손들에 대해 명백히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이 비록 궤의 채를 잡고 날라야 할 때에도, "성물에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된다. 죽을까 함이라" (민 4:15). 웃사는 궤에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다. 늘 궤에 시종했었다. 그래서 이런 무례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Ⅱ. 이 범죄로 인해 받은 그의 벌은 지극히 중해 보인다(7절). "여호와의 진노가 그를 향해 발하니라" (하나님은 성물을 위해서는 질투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보면, 하나님이 그의 경솔함을 인해서 거기서 그를 쳤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하나님의 궤 옆에서" 죄를 짓고, 거기서 죽었다. 속죄소도 그를 구해 주지 못했다. 왜 하나님은 그에게 이토록 가혹했는가?
1. 궤를 만지는 것은 레위인들에게도 분명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이 죽을까 함이라" 고 했다. 그리고 이 가혹한 실례를 통해서 하나님은 같은 형벌을 주겠다고 하여 금지하셨던 열매를 먹은 첫 조상들에게도 이렇게 정당히 대우하셨을 수도 있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들에게 "죽을까 하노라" 고 하시면서 금지하셨었다.2. 하나님은 웃사의 마음 속에 있는 교만과 경솔을 아셨다. 웃사는, 이 큰 회중 앞에서, 자기가 지금까지 궤에 친밀히 지냈으므로, 궤에 대해서 담대히 처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을 것이다. 친근성이란 것은 비록 가장 경외해야 될 것에 대해서도 경멸로 대하기가 쉽다.
3. 나중에 다윗은, 자기들 모두가 저지른 잘못, 곧 궤를 수레로 나른 잘못 때문에 웃사가 죽었다고 시인했다. 궤를 레위인의 어깨로 나르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치신 것이로다" (대상 15:13). 그러나 웃사만이 표본이 되었다. 아마 웃사가 그런 식으로 나르는 방법을 가장 적극적으로 제안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이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아마 오소리 가죽으로 덮지 않았을 것이다(민 4:6).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더욱 분노케 했다.
4. 이로써 하나님은 수 천 이스라엘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셨을 것이다. 궤가 아무리 오랫동안 비천한 처지에 놓여 있었더라도 결코 그렇게 하찮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려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지닌 채 즐거워하는 것을 가르치며, 성물은 언제나 신중하고 경외의 염으로 대하도록 가르치려 하셨던 것이다.
5. 이로써 하나님은 선한 의도가 악한 행실을 정당화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 하셨다. 잘못된 일을 보고, 그것은 사실 좋은 뜻으로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자기의 궤를 안보할 수 있으며, 또 안보하실 것임을 알리려 하셨다. 그래서 궤를 안보하는 데 무슨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님을 밝히려 하셨다.
6. 권리가 없는 자가 궤를 만진 것이 이렇게 중한 범죄라면,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자가 계약의 특권을 주장하고 나서는 일은 오죽하랴. 그런 악한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네가 어찌하여 내 계약을 입에 오르내리느냐?" (시 50:16) "친구여, 그대가 어찌 여기까지 왔느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궤가 그렇게 신성한 것이라면, "계약의 피" 야 얼마나 신성하랴!(히 10:29)
Ⅲ. 이 사고로 인한 다윗의 감정은 매우 예민했다. 아마 너무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그는 하나님의 손길에 부복하여,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의를 시인하며, 더 이상 불쾌감을 내지 않기로 하고, 자기가 착수한 그 선한 사업을 계속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 기분이 나빴다. 그것이, 웃사가 하나님께 불경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웃사를 쳤기 때문이라고 했다(8절). "다윗이 분하였다." 그런데 이 때의 단어가 하나님의 진노를 표하는 단어와 같은 것이다(7절). 하나님이 노하셨기 때문에 다윗도 노한 것이고, 기분을 잡친 것이다. 마치 다윗의 허락 없이는, 하나님이 이 궤의 영예를 주장하거나 거기에 함부로 손대는 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죽을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 의로울 수 있단 말인가!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쫓는 사람" 답지 못했다. 즉 그답지 못했다. 아무리 부당하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진노하셨다고 해서 인간인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웃사의 죽음은 다윗이 지금까지 자기를 생각하고 있던 그 엄숙한 의식의 영예를 실족시킨 것이요, 다윗을 좋아하지 않던 자들은 하나님이 다윗을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는 그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옳고 지혜로우심을 표명해야 했지, 불쾌하게 여겨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더라도, 우리가 따라서 분을 내서는 안 된다.
2. 그는 겁을 먹었다(9절). 그는 심히 놀라서 겁을 먹었음에 틀림 없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 라고 말한 것을 보아 분명하다. 마치 하나님이 다윗에 관한 모든 일을 훼방하시며, 궤를 너무 사랑하시는 나머지 아무도 손 못대게 하시며, 따라서 다윗은 멀리서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 같은 일이었다. Qui procul a Jove, procul a fulmine-즉 주피터를 피하면 벼락을 피할 수 있다. 차라리 "궤를 내게로 가져오라. 그리하면 내가 이 일로 경고를 받았으니 앞으로 더욱 신중히 다루리라" 고 말했어야 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렘 25:6). "나를 노하게 하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상하지 아니하리라."아니면, 이 놀라운 심판을 다윗이 잘 선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웃사는 확실히 누구보다 큰 죄인이었도다. 그런 일을 했으니……" 라고 말하지 아니했다. 오히려 다윗은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호의를 받기에 부당한 자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기분 나쁜 점만을 아는 자 같았다. "하나님은 웃사처럼 나를 죽였어야 옳았으리라. 나의 육체는 주 앞에서 두려워 떨었나이다" (시 119:120). 하나님이 이 심판에서 의도하신 바는, 남들도 듣고 두려워하게 함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수용 준비가 더 갖추어지기까지 궤를 자기 도읍으로 가져오지 아니했다(10절).
3. 다윗은 그곳에다 새로 이름을 붙임으로써 이 사건을 영구히 기억하려 했다. "베데스 웃사" 곧 "웃사를 침" 이란 뜻의 이름이었다(8절). 그는 얼마전 자기의 원수들을 쳐 승리를 거두고 나서, "바알-베라심" 곧 "침의 장소" 라는 이름을 그 전장에다 붙였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자기의 친구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 우리는 한 사고를 만나면, 그 다음에는 어디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이 사고에 대한 추억은 후손들로 하여금 온갖 성물(聖物)을 다룰 때 조심하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것들 속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4. 다윗은 레위 지파인, 오벧에돔의 훌륭한 집에 궤를 안치했다. 그 집은 이 사고가 난 근처에 있던 집이다. 거기서는(1) 궤를 친절히 영접하여 "석 달간" 머물게 했다(10,11절). 오벧에돔은 궤를 나포해간 블레셋인들, 그리고 그것을 들여다본 벧세메스인들의 궤가 어떤 화근이 되었던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웃사가 그것을 만지다가 즉사한 것도 보았다. 다윗도 이 일에 개입되기를 무서워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쾌히 궤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고는, 두려움 없이 문을 열었다. 그는 궤를 잘못 다루는 자들에게만, 그 궤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냄새" 인 것을 알았던 때문이다.
홀(Hall) 주교는 말한다. "오, 정직하고 신실한 자의 거룩한 용기여! 그밖에는 아무 것으로도 하나님을 친구로 삼을 수 없도다.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사랑이 되는도다."
(2) 궤를 환대한 대가를 받았다.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안에 복을 주시니라." 웃가의 경거망동을 처벌하신 바로 그 손이 오벧에돔의 겸손한 용기에 보상을 주었고, 그 궤로 하여금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 가 되게 하였다. 아무도 복음을 거부한 자에게 심판이 내린다 하여 복음을 업신여기지 말라. 오히려 그것을 잘 수용한 자들에게는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어느 때고 간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헛되도다" 는 말을 하지 말라. 가장들은 자기 식구들에게 신앙을 육성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하라.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 나라의 권세를 위해 집안 전체가 재산을 드려 노력하도록 하게 하라. 그것이 바로 그들 모두가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궤란 그것을 영접한 자가 결코 손해를 보지 아니하는 그런 손님이다. 오벧에돔이 이전에는 가난했으나, 그 석달 동안 갑자기 부자가 되어,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다고 요세푸스(Josephus)는 말한다. 신앙심은 번영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지혜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다.
오벧에돔의 집안이 모두 그 축복을 받았다. 궤를 영접하는 것은 가문의 복이 된다. 그 주위의 모든 일이 더 잘되기 때문이다.
다윗의 재도전과 미갈(사무엘 하 6:12-19)
다윗은 여기서 다시 한 번 궤를 자기의 도성으로 옮기려는 시도를 벌인다. 그리고는 이전과는 달리 성공을 거둔다.
Ⅰ. 다윗이 다시금 도전을 하도록 하게 된 주요 원인은, 오벧에돔이 궤 때문에 받은 축복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12절), 다윗은 즉시 사람을 보냈다. 그 이유는
1. 그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화해하시사 노를 돌이키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웃사의 죽음에서 자기들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읽었듯이, 이제는 오벧에돔에게 내린 번영을 보고 저들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화해해 주시면, 우리는 즐거이 우리의 계획을 밀고 나갈 수 있다.2. 궤란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그 가까이에 있는 자들에게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불복종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걸림돌이요 훼방의 반석" 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그가 "모퉁이 돌이요, 세워 주는 귀중한 돌" 이 된다(벧전 2:6-8).
다윗은 오벧에돔이 그토록 궤의 은덕을 입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것을 도성으로 가져오려 했다. 남들이 복을 받는 경험을 보면, 우리도 더욱 신앙심을 굳게 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궤가 어떤 집에 축복의 근원이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우리 집으로 가져오라.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서 빼앗지 않고도, 가지게 되고, 복을 받게 되리라.
Ⅱ. 이번에는 다윗이 어떻게 일을 처리했는지 보자.
1. 그는 이전의 실수를 시정했다. 이번에는 궤를 수레에 싣지 않았다. 그 일을 맡을 임무가 있는 자들에게 시켜서, 그것을 어깨로 매고 가게 했다. 그 사실이 여기서는 암시만 되었지만(13절), 역대 상 15장 15절에서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전의 실수를 교정하고 났을 때에야, 우리에게나 남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선용한 것이 된다.2.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시작했다(13절).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의 실수를 속죄하고, 오벧에돔에게 내려 준 축복을 감사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서 일을 시작하고, 그와 화해를 하는 데에 부지런했을 때에야, 우리의 계획을 급속히 진행시킬 수 있는 법이다. 거룩한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받을 때에는, 저 대희생 제물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한다. 그 제물을 통해서 우리가 계약을 맺을 수 있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시인해야 한다(시 50:5).
3. 다윗 자신이 최대한의 기쁨을 표명하면서 그 식전에 참례했다(14절). "그는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그는 마치 도취된 사람처럼 기뻐서 뛰었다. 더구나 지난 번에 당한 일로 인한 좌절이 컸기 때문에, 이번엔 그만큼 기뻤던 것이다.
잘못이 시정되고 자기가 의무를 이행하게 되는 것을 아는 일은 선한 자들에게는 즐거움이다.
생각건대, 그가 아무렇게나 춤을 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는 일정한 규칙을 따라서 춤을 추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와 함께 춤을 추지 아니했다. 그러나 그의 춤은 최대의 기쁨과 환희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런 표현이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종교적 행사를 최대한의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해야 한다. 실상 온갖 힘을 다한다 해도, 그것은 거룩한 의무를 다하기에는 어림도 없다.
이 때를 당하여 다윗은 자기의 왕복을 벗어치우고, 평범한 베옷으로 갈아 입었다. 그 베옷은 가벼워서 춤추기에 편리했으며, 제사장이 아닌 자들이 종교적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사무엘도 그런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삼상 2:18).
이 위대한 임군은 자기가 궤를 받드는 일군의 관습을 따르는 것을 조금도 품위 하락으로 생각지 않았다.
4. 이 제가 진행되자 모든 사람들이 나팔을 불었다(15절). "그들은 소리를 치며 나팔을 불어서 궤를" 왕성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박수갈채를 보내어 자기들의 기쁨을 표했고,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같이 즐거워한다는 뜻을 알렸다.일반 시민 권력의 보호와 또 웃음 아래 규례가 공적으로 자유로이 집행되었다는 것은 모든 민중에게 실로 즐거움거리였다.
5. 궤는 미리 준비된 장소에 안전하게 인도되어, 영예롭게 안치되었다(17절). 그들은 궤를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다가" 두었다. 모세가 쳤던 장막은 아니다. 그것은 기브온에 있기 때문이다(대하 1:13). 게다가 그것은 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오랜동안 낡아졌기 때문에 이동하여 다니기에는 부적합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궤를 맞이하기 위해서 새로운 장막을 마련했던 것 같다. 다윗은 궤를 자기의 사저나 궁궐로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필경 다윗이 지나치게 그것을 독점하는 것이요, 백성들이 그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 나아오는 출입이 부자유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궤를 위해 집을 짓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면 시기가 되어서 보다 견고하게 건축될 성전 건축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분간 모세의 회막을 본떠서 만든 장막 속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궤가 정돈되자마자 다윗은 번제와 화제를 드렸다. 더 이상 아무 실수도 없이 그 업무를 하게 된 데 대한 하나님께 감사를 위해서요, 계속하여 은혜를 내려 주십사고 비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의 뜻이었다. 우리도 기쁨이 있을 때는 언제나 찬미와 기도를 수행해야 한다. "그 같은 제사를 하나님이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아마 이 때를 당하여 시편 132편을 썼을 것이다.
6. 그러자 백성들은 크게 만족한 태도로 돌아갔다. 다윗은 이렇게 하여 그들을 돌려 보냈다.(1) 은혜로운 기도를 해 줌으로써. "그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18절). 그것은 예언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늘과 특별한 이해 관계를 가지고 한 것임과 동시에 그들을 다스리는 군주의 권위로 한 것이었다. "더 작은 자는 더 큰 자의 축복을 받는 법" 이기 때문이다(히 1:7).
다윗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특별히 그같은 여행이 자기들에게는 조금도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기들의 가사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감당키 어려운 것이 되리라는 확신 밑에서, 그들이 궤에 대해서 표한 그 존경심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 있기를 기도했다. 다윗은 이 기도로써 그들의 복리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입증했고,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사랑해 주는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 셈이다.
(2) 관대한 대접을 하여 보냈다. 사실 상당한 자선을 베풀어 보냈기 때문이다. 귀빈들은 아마 자기 집에서 대접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무리에게 남녀를 불문하고" (요세푸스는 아이들에게까지라 한다) 한 가지로 "떡 한 개, 고기 한 점, 그리고(요세푸스에 의하면) 화목 제물 한 조각" 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다윗과 같이 "제물과 포도주" 를 즐기게 했다(19절:한글 성경과는 다소 다름-역주). 아마 다윗은 그들을 각각 지방별로 나눠서 이 같은 대접을 할 수 있도록 조처했을 것이다.
[1] 그것은 다윗 자신의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의 표시였다. 마음이 즐거움으로 커지면, 손은 후대로써 열려져야 한다. 부림절은 "서로 예물을 주면서" (에 9:22) 지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는 용서의 자비를 남에게 베푸는 데에 자비로 와야 하듯이, 하나님의 관후한 대접을 받은 자들은 역시 남에게 주는 데에 관후해야 한다.
[2] 백성에게 자신을 천거하며, 자기와 그들과의 이해 관계를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예물을 주는 자는 모두 친구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기도에는 관심없던 자도 그의 후한 인정 때문에 다윗을 사랑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사실 때문에, 앞으로 언제든 다윗이 부르면 그들은 기꺼이 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으리라.
저주받은 미갈(사무엘 하 6:20-23)
다윗은 축복을 하여 회중을 돌려 보내고 나서, "자기 가족을 축복하려 돌아갔다" (20절). 즉 집안 식구들과 같이,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이 국가적 축복을 맞아 가족들의 감사제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사역자들은 공적 의식이 가정 예배를 대신해 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들은 강이나 기도로써 의식에 참례한 회중들을 축복하고 난 다음에는, 집으로 돌아가서 그와 비슷한 식으로 그들을 축복해 주어야 한다. 사역자들은 그 집 식구들에게는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에게는 그를 대신해 줄 제사장, 예언자, 레위인들이 자기 주위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을 맡기지 아니하고 친히 "자기집 식구들을 축복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천사들의 직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아무리 위대한 인물에게라도 인격적 손상은 절대로 주지 않는다.
다윗이 궤를 인근에다 옮겨 놓았을 때와는 달리,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들은 조금도 기뻐하거나 만족해 하지 않았다. 이 즐거운 날이 고민과 역정으로 가득 찬 그의 부인 때문에 좋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궁성도 가정 불화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다윗이 이스라엘 대중 모두를 기쁘게 해 주었지만, 궤 앞에서 춤을 추었다 해서 미갈은 다윗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일 때문에, 미갈은 멀리서 보다가 다윗을 경멸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오자 그를 꾸짖었다. 그녀는 백성에 대한 다윗의 후대를 기분 나빠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다윗이 백성들을 후히 대접했다는 사실에 인색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다윗이 궤 앞에서 춤을 춘 것은 다윗 자신의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갈을 역정나게 한 것은 그녀의 탐심이 아니라 교만이었다.
Ⅰ.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며 길거리에 있는 것을 미갈이 보았을 때, 그녀는 "심중에 저를 업신여겼다" (16절). 그녀는 하나님의 궤를 향한 다윗의 강렬한 열심, 그리고 궤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고 황홀해 한 그것은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며 무사와 정치인, 더욱이 다윗 같은 임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윗이 남들의 신앙심을 조장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친히 열성을 내는 것은 다윗으로서는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미갈은 생각했다. "내 남편이 이렇게 스스로 바보가 되다니! 지금까지 그토록 오래 버려두었던 궤는 그대로 제자리에 놓아두어도 될텐데, 그것을 이토록 좋아하다니! 필경 신앙심이 지나쳐서 미친게로군."
신앙의 행사도 신앙심이 거의 없거나 아주 없는 자들에게는 비천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Ⅱ. 다윗이 한창 기분이 좋아서 집에 돌아오자, 그녀는 다윗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경멸심과 노기가 가득찼던지, 다윗이 사저로 들어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길거리에 나가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1. 그녀는 다윗을 얼마나 조롱했던가!(20절) "오늘 이스라엘 왕이 얼마나 영화로우셨던고! 폭도들의 한 가운데 낀 당신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출중했던고! 그것 모두 지위와 품격에 어울리지 않도다!" 다윗에 대한 그녀의 경멸심이나 다윗의 심중에 시작된 신앙심은 모두 그 입에 가득한 것을 입 밖으로 발설했다. 미갈을 불쾌하게 한 것은 궤에 대한 다윗의 열성이었다. 미갈은 자기가 궤에 대해 갖는 마음보다는 다윗의 궤에 대한 마음이 더 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미갈은 다윗의 처신을 비천하다고 말했다. 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다윗의 존귀를 가리는 일이라서 싫어해 놓고도, 그런 일은 다윗의 덕성에 욕이 된다 하여 싫어하는 듯이 말했다. 즉 다윗이 "계집종들의 눈 앞에서 자기 몸을 드러냈다" 고 했다. 그런 것은 염치심이 없는 "방탕한 자들" 의 짓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갈의 말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분명히 다윗은 예의범절을 지켰을 것이고, 자기의 열성도 신중히 자제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심을 비난하는 자들이 그 같은 거짓 구실을 붙여서 나쁜 행실로 누명을 씌우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어떤 자를 그의 신앙심을 들어 비난한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불경한 일이며, 게다가 자기 남편을 그렇게-실상은 지극히 존경했어야 했던 자를-모욕한다는 것은 아주 비열하고 사악스런 일이다. 특히 신중성과 덕성이 남달리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녀를 데려오기까지는 왕관도 수락하려하지 아니했던(3:13) 그토록 애정이 넘치는 남편에게 대한 그런 행동은 가장 악랄한 짓이며, 그녀 자신은 자기가 다윗의 아내나 요나단의 누이라는 사실보다는 사울의 딸이라는 사실을 실증해 주는 것이었다.2. 다윗은 그녀의 비난에 어떻게 응수했던가? 다윗은 그녀가 자기를 떠나 낯선 자의 품에 안기는 부정한 짓에 대해서도 비난하지 아니했었다. 그 일을 용서해 주었다. 잊었다. 비록 양심은 그런 여인을 다시 맞은 자신을 비난하고 있었을지 모르나(그 같은 일은 땅을 더럽힌다고 했기 때문이다. 렘 3:1), 다윗은 이번의 처신을 옳게 생각했다.
(1) 다윗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했던 것이다(21절).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로다." 그리고 그분을 생각해서 한 일이라고 했다. 비록 미갈은 아무리 악한 해석을 붙이더라도, 다윗의 양심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여 신실히 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이 그녀의 아버지의 집을 버리사 자기가 왕좌에 오르도록 해 주신 일을 상기시켰다. 그래서 그렇게 잘된 것을 미갈의 덕분이라는 생각을 그녀 자신이 지닐 수 없도록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아버지 앞에서 나를 택하사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지명하셨도다. 그러니 내가 이제 영예의 근원이 된 것이로다.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신앙심의 발로가 당신 아버지의 뜰에서는 천박한 일이였을지 모르나, 나는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그리하여 그 같은 발로는 훌륭한 일임을 알리려 하노라. 또 비록 이 일이 천하다면(22절), 나는 더욱 천해지기를 원하노라."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남들이 우리 기분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들의 신앙심을 힐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수락하는 자들을 멸시하는 우리들은 누구인가!
[2] 우리가 신앙으로써 하나님께 봉사했음을 실증할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된 일임을 말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비난에 개의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다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비록 천박하게 보이더라도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3] 선행을 했기 때문에 천해지면 천해질수록, 우리는 선행에 그만큼 더 단호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더욱 돈독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신앙에 더욱 다가 가야 한다. 사탄의 부하들은 우리를 삼키려고 애쓰고 있으며, 신앙을 부끄러워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더욱 천해지리라."
(2) 다윗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낮추려 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보기에도 천해지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면 아무 것도 천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리라." 심판의 보좌에서,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아무도 다윗보다 더 근엄하고 권위로와 보일 수 없으리라. 그러나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높은 자의 생각을 온전히 물리치고, 여호와 앞에서는 티끌처럼 자기를 낮추며, 궤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비천한 일에도 가담하며, 그러면서도 그 모든 행실이 자신의 품위 손상을 가져온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람의 위대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규례의 지극히 작은 것보다 더 작다.
(3) 그러한 일이 미갈은 비난을 살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가 비난하리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들에게서도 존경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계집종들에게서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서민들은 이 경건한 겸양 때문에 다윗을 업신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그만큼 더 존경할 것이다. 진실로 경건한 자들은 때로 그들을 비난하는 자들의 "양심 속에도 드러난다" (고후 5:11). 남의 비난을 겁내서 의무를 게을리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끊임없이 굳은 각오로 의무를 이행하다 보면, 오히려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명성도 얻게 된다. 경건심은 찬양을 받을 것이다.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무관심하지도 말자.
이로써 다윗은 자기를 정당화시켰다. 그리고 미갈의 무례를 더 이상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하나님이 그녀를 벌하셨고, 그 후로 자식이 없게 하셨다(32절). 미갈이 부당하게도 다윗의 신앙심을 비난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에게 무자(無子)의 비난을 당케 하셨으니, 그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높이시리라." 그러나 그를 멸시하는 자들, 그의 종이나 일을 멸시하는 자들은 "경히 여김을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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