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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지속되는 양가의 암투(사무엘 하 3:1-6)

이 대목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다윗의 왕좌가 안정되기 전에 다윗과 사울가(家)가 벌였던 투쟁이 나와 있다(1절).

1. 양편이 모두 경합을 벌였다. 사울가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처형을 당하고 숫적 감소를 당했으나, 순순히 몰락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 간에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다윗가가 자리를 잡고, 따라서 하나님이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 그렇게 긴 전쟁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진리와 정의가 마침내는 승리할 것이지만, 슬기롭고 거룩한 종을 보기 위해서는 그 투쟁을 연장하시는 것이다. 이 싸움의 지루한 기간은 다윗의 신앙과 인내심을 연단해 주었고, 결국 그에게 찾아온 그의 안정된 지위가 그에게 소중한 것이 되게 해주었던 것이다.

2. 다윗 편이 기선을 제압했다. 사울가는 점점 약해졌고, 지위와 사람을 잃어갔으며, 명성도 잃었다. 그래서 이제는 볼품없는 집안이 되었고 모든 사업에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다윗가는 점점 강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몰락해 가는 사울가를 버리고, 지혜롭게도 언젠가는 다윗이 승리하리라는 신념 하에서 다윗의 휘하로 모여 들었다. 성결되었으나 단지 부분적으로밖에 되지 못한 신도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은총과 죄악의 갈등을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다 비교하는 것도 적당하리라고 본다. 은총과 죄악 사이에는 오랜 갈등이 있다. 즉 영을 거스르는 욕정의 육체와 육체를 거스르는 영의 소망이 싸움하고 있다. 그러나 성결의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서 사울가와 마찬가지로 죄악은 점점 약화되고, 다윗가와 마찬가지로 은총은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사람은 완전한 인간이 되기에 이르며, 의가 승리를 거두기에 이른다.

Ⅱ. 다윗가의 강성. 다윗이 헤브론에서 즉위한 지 제7년에, 그의 여러 아내에게서 얻은 여섯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 나온다. 아마 이 사실이 여기에 기록된 것은, 이것이 다윗의 권세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은 그 집안의 안전이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요, 그들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그 공동체에 새로운 안전을 약속해 주는 것이다. 자식이 많은 자는 "성문에서 원수와 이야기할" 수 있게끔 강성해진다(시 127:5). 사울의 아들들의 죽음이 사울의 권세를 약화시켰듯이, 다윗의 아들들의 출생은 다윗의 권세를 강화시켜 주었다.

1. 율법에 어긋나게(신 17:17) 아내를 많이 둔 것은 다윗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나쁜 본을 보이게 되었다.

2. 이 7년 동안 그 아내들에게서 각각 하나씩의 아들을 얻게 되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한 아내에게서 많은 자손을 얻고, 또 명예와 위안도 더 받는다.

3. 이 아들들 중 어느 누구도 훌륭한 자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그들 중에서 암몬과 압살롬과 아도니야는 악명을 떨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집안을 이루어나감에 있어서 두려운 마음으로 기뻐해야 한다.

4.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은 "길르압" 이라고 했는데(3절), 역대상 3장 1절에서는 "다니엘" 이라고 했다. 패트릭(Patrick) 주교에 의하면, 이러한 이름에 대한 히브리 학자들의 의견은 이러하다. 즉 그의 첫 번째 이름은 "다니엘" -"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셨도다" (즉 나발에 대한 일로)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의 원수들이 그를 조롱하여 이르기를 "그는 나발의 아들이지 다윗의 아들이 아니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섭리자 하나님은 이 같은 중상을 논박하기 위해서 그 아이가 성장했을 때는 용모가 다윗과 아주 흡사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아들보다도 다윗을 닮았고, 그래서 "그의 아비와 같은 자" 라는 뜻의 "길르압" 이란 이름을 다윗이 붙여 주었다는 것이다.

5. 압살롬의 어머니는 이방 군주 그술의 왕 달매의 딸이라고 했다. 아마 그로써 다윗은 자기의 권세를 보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혼의 결과는 그의 근심과 수치가 되고 말았다.

6. 그 마지막 여인은 "다윗의 아내" 라고 했다. 그래서 혹자는 미갈이 아닌가 한다. 그녀는 다윗의 첫 번째 아내요, 가장 정당한 아내였다. 그녀가 여기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운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다윗을 조롱한 이후로는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그 이전에도 아들을 못낳았으리라.

이리하여 다윗의 집안은 강성해졌다. 그러나 "사울의 집에서 권세를 잡은 자는" 아브넬이었다. 이것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6절), 그가 몰락하면 그 집안도 몰락하고 만다는 것을 말해 주려는 것이다.

 

3:2 없음.

 

3:3 없음.

 

3:4 없음.

 

3:5 없음.

 

3:6 없음.

 

3:7

아브넬이 다윗에게로 감(사무엘 하 3:7-21)

여기서는 이런 이야기를 보게 된다.

Ⅰ.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자기에게 한 비정한 말 몇 마디 때문에 그와 결별하고 자기의 이권을 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와 과실을 통해서도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실 수 있다.

1.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자기 아버지의 첩과 간음한 것이나 다름없는 죄를 졌다고 비난했다(7절). 그가 정말 그런 짓을 했는지, 아니면 어떤 근거에서 그런 혐의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내용이야 어떠하든, 아브넬을 잃는 것이 자기의 이권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생각했다면, 이스보셋이 가만히 있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거짓이었으며 터무니없는 질투심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다했으며, 이 세상에서는 둘도 없는 친구였던 아브넬에게 부당한 의혹을 갖는다는 것은 이스보셋으로서는 지극히 부정직한 일이요, 배은의 처신이었을 것이다.

2. 이 비난에 대해서 아브넬은 몹시 분개했다. 아브넬이 "아버지의 첩과 간통" 했는지 안했는지는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8절), 그가 명백히 부인하지 않은 것을 봐서 그런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브넬은 자기가 그런 죄를 지었지만, 이스보셋에게 이런 점을 알려준다.

(1) 아브넬 자신이 이스보셋에게 그 같은 비난을 받았으며, 그러나 즉석에서 대적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아브넬은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 내가 더럽고 사악한 짐승, 개 대가리냐? 그대는 마치 그런 소리를 하는구려!(8절) 내가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 집에 베푼 친절에 대한 보답이 이것이냐?"

이리하여 아브넬은 자기의 업적을 자랑했다. 즉 이스보셋은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내가 곧 유다 지파에 대한 대적이요, 또한 이 판국에 사울의 집을 지원한다는 것은 자기의 양심에나 이해 관계에 어긋나는 일인데도 했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보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에게도 이득이 되고, 자기의 야망을 달성할 수 있게 되지 않았다면, 아브넬이 그런 일을 열심히 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비난, 특히 자기들이 은혜를 베푼 자들에게서 받는 비난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2) 아브넬 자기는 이스보셋에게 기어코 복수하리라고 했다(9, 10절). 아브넬은 이스보셋에게 이것을 단호히 통고했다. 즉 자기가 그를 그렇게 높여 주었듯이 이제는 그만큼 떨어뜨리겠다고 했다. 아브넬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에게 나라를 주시겠다고 맹세했으며 자기는 그것을 알고도 야심 때문에 자기의 힘으로 그것을 지지하고 있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는 미명 하에서-실상은, 복수심 때문에 그 섭리에 순응하겠고 했다. 자기들의 정욕을 숭상하는 자들은 많은 주인을 섬기게 된다. 그리고 그 주인들은 제각기 이리저리 몰고 가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을 차리더라도 그들은 자가당착에 의해서 피해를 입게 되는 법이다. 아브넬의 야심은 이스보셋을 위해 충성하게 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원한은 그를 다윗에게 충성하게 만들었다. 그가 만일 진심으로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중히 여기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처신했더라면, 그는 다윗의 한 참모가 되었을 것이요 자신에게 시종여일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넬이 자기의 정욕을 섬기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그를 통해 자신이 찬양받게 하시고, 그 결과로 다윗이 강성해지게 하신다.

끝으로,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거만한 반응에 어떻게 응수했는가를 보자. 그는 "감히 한 말도 대답하지 못했다" (11절). 이스보셋이 사나이의 기상을, 특히 군주의 기상을 지녔던들, 아브넬은 그의 공적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그 범죄를 중하게 했으며, 자기는 그런 야비한 자의 섬김을 받고 싶지 않으며, 그가 없어도 잘해나갈 수 있음을 자신한다고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보셋은 스스로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태를 악화시키게 될까봐 한 마디도 못했던 것이다. 그의 사기는 꺾였다. 다윗이 자기의 대적들에게 예고했던 바대로, 이제 그는 "무너져 내린 성벽이요, 기울어진 울타리" (시 62:3)가 되고 말았다.

Ⅱ. 아브넬은 다윗과 흥정을 했다. 틀림없이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명분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그를 버릴 기회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그가 이스보셋의 일에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자신에 대한 비난을 거부하기 위해서 그렇게 빨리 분노에서 나온 자기의 언동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다(12절). 그는 "다윗에게 사신을 보냈다." 자기가 다윗을 섬기겠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이 땅이 뉘 것이니까? 당신의 것이 아니옵니까? 그것은 당신이야말로 정권에 대한 가장 유력한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백성의 유익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 진정한 애호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본인들은 거기에 몹시 거역하는 그런 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나라의 일군이 되게끔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원수들은 때로 지나가는 발판 구실이 되며, 게다가 우리가 도약할 수 있는 디딤판 구실을 해 주기도 한다. 땅이 여인을 도왔다.

Ⅲ. 다윗은 아브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아내 미갈을 데려와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13절).

1. 이것으로써 다윗은 자기의 첫 번째요, 그리고 가장 정당한 아내인 미갈에게 대한 부부의 신실한 도리를 표한 것이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건, 또 자기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건, 그것이 다윗과 미갈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많은 물도 그 사랑의 불길을 끌 수 없었다.

2. 또 그것으로써 사울의 집에 대한 다윗 자신의 존경심을 입증한 것이다. 그는 조금도 사울가를 유린하지 않았다. 이제 그 집안은 몰락했고, 자기의 집안은 높아졌지만, 자기가 그 집안과 관련이 있다 하여 그것이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이 왕위의 명예를 자기와 같이 누리지 않는다면, 왕위의 명예도 기뻐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원수의 가문에 대해서 조금도 악의를 품지 않았다.

아브넬은 그 말을 이스보셋에게 전해야 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14절). 즉 다윗이 미갈을 비싼 대가를 치르고 샀다는 것과 부당하게 빼앗겼다는 것을 탄원했다. 이스보셋은 감히 아브넬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넬을 자기 옆에 세우지는 않았다. 단지 사울이 미갈을 다시 시집 준 남자 바디엘에게서 미갈을 데려왔다(15절). 그리고 아브넬은 그녀를 다윗에게 데리고 갔다. 이리하여 아브넬은 한 손에는 아내를 다른 한 손에는 왕관을 가지고 가니, 이제는 갑절로 다윗의 환영을 받을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미갈의 나중 남편은 미갈과 헤어지는 것을 섭섭히 여겨 "울면서 따라왔다(16절).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자기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갈을 데려올 때 이미 그녀는 남의 아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섭정자는 하야(下野)하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무릇 누구든 자기의 권한 밖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

어떤 불화로 헤어져 버린 부부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서 다시 화합되기를 기대한다면, 다시 화합하라. 그리고 지난날의 모든 화근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규례에 따라, 다시금 서로 사랑하며 살라.

Ⅳ.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과의 이해 관계를 이용하여 그들을 다윗에게로 넘겨준다. 그들의 향방에 따라서 대중들이 움직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전향하고 나자, 다윗을 편들어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택함 받은 자임을 환원할 수 있게 되었다(17절).

1. "너희가 과거 여러 번 그(다윗)로 너희 왕을 삼고자 했었도다. 그때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과의 여러 가지의 일로 자신을 입증했으며, 너희들에게 큰 유익을 끼쳤느니라. 아무도 다윗보다 더 좋은 자격을 가진 자가 없으며, 아무도 이스보셋보다 더 못한 공적을 가진 자는 없도다. 너희들은 그들 둘을 모두 시험했도다. Detur digniori-즉 하나님이 왕관을 주신 자가 가장 적격자로다. 다윗으로 너희 왕을 삼으라."

2.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라고 했다(18절).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해 말씀하셨도다(8절과 비교해 보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시켜 다윗에게 기름 부으셨을 때 실상 그는 다윗의 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로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다윗이 왕이 되었도다. 하나님이 다윗의 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그리고 너희가 대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제 다윗에게 복종하는 것이 너희의 의무이기도 하거니와 유익도 되느니라. 그를 거역한다는 것은 지상에서 가장 큰 불행이다."

누가 아브넬의 입에서 이 같은 논증이 나오리라고 기대했으랴?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가 그들을 사랑하신다" 는 사실을 자기 백성의 적군들에게도 알리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계 3:9). 아브넬은 특히 자기 소속 지파인 베냐민 지파의 장로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그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줄 수가 있었고, 과거에는 그들을 사울의 집으로 끌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들을 속인 자가 바로 아브넬이므로, 그는 다시 그들의 기만됨을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대중은 으레 그들의 처신을 따른다.

Ⅴ. 다윗은 아브넬과의 약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현명하게 처신했으며, 그것은 장한 일이었다. 어찌되어서 아브넬이 그렇게 되었든 간에, 싸움을 끝낸다는 것은 좋은 일이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왕좌에 앉는다는 것은 잘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이 바리새인에게서 연보를 받을 수 있도록-그 때 물론 바리새인은 교만과 위선에서 준다-자기의 직권을 이용한 것은 다윗으로서는 정당한 일이기도 했다. 아브넬은 민중의 생각과 그들에게 의사 소통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다윗에게 보고했다(19절). 아브넬이 처음에는 홀로 왔었으나, 이제는 2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왔다. 그리고 다윗은 그들에게 "잔치" 를 배설하여 대접했다(20절). 그것은 화해와 공약의 표시였다. 창세기 26장 30절의 경우와 같이 계약을 두고 베푼 잔치였던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 그러나 그가 투항하거든 잔치를 베풀어 주라.

아브넬은 잘 대접을 받고 기뻐했다. 그리고 자기가 사울의 집안에 빠지지 아니하게 된 사실(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과 다윗의 휘하에서 잘 등용될 수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 흡족하게 생각하고, 즉시 혁명을 완수하고, 온 이스라엘을 다윗에게로 넘어오게 하려고 결행했다(21절). 그는 다윗에게 "당신이 마음대로 다스리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다윗의 등극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다윗이 자기 스스로 원하여 통치자가 된 것인 양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악인들은 종종 그렇게 하지만) 그는 그 선량한 사람 다윗을 자기와 같은 부류로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다윗과 아브넬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들 사이의 문제는 잘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다툼을 피해야 한다. 물론 악인과도 그래야 하며, 모든 사람들과 화합하고, 자기들은 빛의 자녀임을 세상에 보일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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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넬의 피살(사무엘 하 3:22-39)

여기서는 요압에 의한 아브넬의 피살과 그에 대한 다윗의 깊은 분개를 볼 수 있다.

Ⅰ. 요압은 아주 건방지게도 다윗이 아브넬과 약정을 맺은 것은 잘못이라고 대들었다. 마침 아브넬이 다윗과 같이 있을 때, 요압은 외지 근무를 하고 있었다. 아마 블레셋 군대나 사울 일파를 추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압은 돌아오자 아브넬이 막 떠났다는 소문을 들었다(22, 23절). 더구나 다윗이 그에게 큰 친절을 베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압은 실상 다윗의 신중한 처사에 만족하고 거기에 묵종해야 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런 일을 당하든 다윗은 지혜롭게 선하게 처신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명분에 회의를 가졌듯이, 요압도 마치 다윗의 명분에 회의를 가졌다는 듯이, 다윗을 면박하며 어리석다고 했다(24, 25절). "어찌하십이니까?" 마치 다윗이 자기의 처신을 그에게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식이다. "어찌하여 저를 보내었나이까? 그를 투옥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는 간첩으로 온 것이니, 필경 당신을 배반할 것입니다."

과연 요압이 자기 군주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뻔뻔했는지, 다윗이 그것을 견딜 만큼 인내심이 강했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사실 요압은 다윗을 "바보" 라고 불렀다. 아브넬이 자기를 속이려고 왔는데도 그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다윗이 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무서워 말못했듯이(11절),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마 요압을 무시해서 대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요압이 다윗의 답변을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오만한 자였는지도 모른다.

Ⅱ. 요압은 무모하게도 아브넬을 다시 불러오게 하려고 사람을 보냈다. 그와 은밀히 의논할 일이 있다고 구실을 붙였다. 그리고는 잔인스럽게 자기 손으로 아브넬을 죽였다. 마치 다윗이 더 자세한 지시를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처럼 꾸며서 다윗의 이름을 빙자했다는 사실은, "그러나 다윗은 알지 못하더라" 는 말속에 숨어 있다(26절). 아브넬은 아무 것도 모르고 천진하게 헤브론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성문에서 요압이 기다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다가가서 은밀히 말했다. 그는 자기가 아사헬을 죽일 때 한, "내가 어찌 그대의 형 요압에게 낯을 들랴?" (2:22)고 했던 말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요압은 그를 죽였다(27절). 그리고 아비새도 이 계획에 공모했으며, 조력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자기 형을 도우려 했던 것 같다(30절). 그래서 그는 공모자의 비난을 받았다. "요압과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였도다." 그러나 실상은 아비새는 단지 그런 의향을 알고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에서 보면,

1.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 것이 확실하다. 아브넬은 악의를 품었었고, 자기 양심을 거역하고 다윗에게 반역했었다. 게다가 이제 비열하게 이스보셋을 버렸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생각한다는 미명 하에 그를 배신했다. 그러나 실상은 교만과 원한과 불만 때문에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비록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지극히 선한 사업을 기도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토록 사악한 자를 들어 쓰시려 하지 않으셨다. 아브넬과 같이 야비한 인간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2. 그러나 요압이 불의하며, 그가 한 행동이 약하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자였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그의 마음을 따르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수 많은 선왕(善王)들이 나쁜 신하들을 거느리고 있다.

(1) 이런 짓을 한 그 구실로써 매우 부당했다. 아브넬은 사실 요압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다. 그리고 요압과 아비새는 그의 피의 원한을 갚으려고 가면을 썼었다(27, 30절). 그러나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정정당당히 전쟁터에서였다. 그 전쟁터에서 아브넬은 실로 도전을 보였고, 그래서 요압은 친히 그 도전에 응수하여 아브넬의 친구 여럿을 죽였다. 아브넬이 그를 죽인 것은 마치 정당방위와 같았다. 죽이기 전에 먼저 정당한 경고를 보냈다(그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지 못해 그렇게 했다. 그러나 요압은 여기서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 (왕상 2:5)를 흘린 것이다.

(2) 아브넬에 대한 요압의 적개심의 저변을 생각해 보면, 이 사건은 더욱 비열해진다. 요압은 당시 다윗 군대의 장군이었다. 그러나 아브넬이 이 진영에 들어오게 되면, 그가 요압보다 더 원로요 전술에도 능하기 때문에,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터였다. 요압은 이것을 경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경쟁 의식에서 머물지 않고 피 흘림의 죄를 졌던 것이다.

(3) 비겁하게, 그리고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나서 죽였다(신 27:24). 정당하게 도전을 했더라면, 그는 군사다왔을 것이다. 그러나 자객처럼 은밀히, 비겁한 겁쟁이처럼 죽였다.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럽다. 그러나 뽑힌 칼이로다" (시 55:21). 그는 역시 이처럼 비열하게 아마사도 죽였다(20:9, 10).

(4) 그런 짓은 다윗에 대한 모독이요 권리 침해였다. 요압도 알다시피, 다윗은 아브넬과 협약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넬은 당시 사실상은 자기의 주인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요압은 바로 다윗의 측면을 공격한 셈이었다.

(5) 게다가 성문에서, 공공연히, 얼굴하나 붉히지 않고 처치했다는 데서, 그의 살인죄는 더 한층 무거웠다. 성문이란 바로 법정이요 민중의 회의 장소였다. 따라서 요압은 정의를 모독한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나 사람을 도무지 무서워할 줄 모르며, 자기가 최고인 양 생각하는 자로서, 법관들의 공정한 선고와 군중들의 정의로운 분개심을 모두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헤브론은 레위인들의 성읍이요, 도피성이었던 것이다.

Ⅲ. 다윗은 이 비열한 행동에 대해 몹시 가슴 아파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혐오의 감정을 표했다.

1. 그는 아브넬의 피의 죄책에 대해서 손을 씻었다. 아무도 요압이 다윗과 어떤 내통을 하고 나서 그런 것을 한 것이 아닌가(그리고 요압은 오랫동안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하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무죄함을 진지하게 하나님께 아뢴다. "나와 내 나라(내가 그러니 내 나라도 그러하도다)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무죄하나이다" (28절). 어떤 불상사가 생겼을 때 우리가 거기에 무관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위안이 된다. "우리는 이 피를 흘리지 아니했도다" (신 21:7).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비난을 당하고 의심을 받을 수는 있다.

2. 다윗은 이 사건으로 인해 요압과 그의 집안을 저주했다(29절). "그것이 요압의 머리로 되돌아갈지어다. 피가 요압을 고발하여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복수가 그에게 임하기를…… 어떤 유전적인 질병이나 그밖의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자식들에게 징벌이 임할지어다. 이 처벌이 지연되면, 일단 그 처벌이 내렸을 때는 그만큼 오래 지속되리라. 이 자손들이 유출병이나 문둥병같이 사회 생활을 금지시키는 그런 질병으로 인해 혐오스럽게 낙인이 찍힐지어다. 그들이 거지나 불구자가 되어,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게 될 것이요, '그도 요압의 혈족이라'는 말을 듣게 하리라."

이 말을 보면, 피 흘림의 죄는 집안에 저주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복수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복수하실 것이요, 그 피해가 자손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살인자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라고 하는 이런 격한 저주보다는 다윗이 그 살인자 자신을 처벌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3. 다윗은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요압까지 불러모아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게 했다(31절). "옷을 찢고 아브넬 앞에서 애곡하자." 즉 아브라함처럼, 그의 상여 앞에서 애곡하라는 것이다. 그리고도 다윗이 왜 그렇게 그들이 진실하고 엄숙히 애곡하며 그의 장례식에 참례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 준다(38절). 즉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대인(大人)인 자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울과 맺은 동맹, 장군으로서의 그의 지위, 그의 권세,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위대한 봉사는 그를 "방백이요 위인" 이라고 부르기에 족하다.

다윗은 그를 성자나 성인(聖人)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으므로, 결코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록 자기의 원수였지만, 그를 찬양하는 것이 합당했을 때에는 그를 "방백(군지)이요 위인" 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에서 이런 사람이 죽었도다. 바로 이 날에 죽었도다. 바야흐로 그가 생애 중 최대의 일을 막 수행하려던 바로 그 때에, 백성의 복리를 위해 가장 충성할 수 있었던 바로 이 날에 죽었도다."



(1) 모두가 이 일로 통애하라. 죽음이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저 비천한 변화는 마땅히 통애할 일이요, 특히 유능한 방백과 위인이 죽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슬프다, 슬프도다!(계 18:10 참조) 살아 있는 자들의 영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도 죽음으로 인하여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가! 그러나 유능한 자들이 가장 필요한 그 때에 그런 자들이 죽는다는 것은 정말로 슬픈 일이다. 공적인 손해는 모든 자들의 슬픔일 수밖에 없다. 모든 자들이 그 손해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다윗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공을 세운 자를 기념하여 영예를 돌리도록 조처했다.



(2) 특별히 요압은 이 일을 통애하라. 마음에는 없었겠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이 일을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다. 만일 그가 진심으로 통애했다면, 그를 살해한 자기의 죄를 회개했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그가 단지 겉치레로 그런 일을 했다면-아마 그랬을 것이다-그것은 그에 대한 벌칙이요, 동시에 그의 형벌에 대한 당분간의 감면이었다. 아직 살인자를 피로써 속죄시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먼저 뭔가 눈물로써 속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마 요압은 그렇게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여기에 순복했을 것이요, 일단은 그가 이긴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어떤 허식을 부리더라도 그 몸은 영구차에 실려 있는 셈이다. Sit divus, modo non sitvivus-즉 성인으로 추앙받게 하라. 그러면 죽음은 면하리라.

4. 다윗 자신이 마치 상주인 양 시체를 뒤따르면서, 무덤에서 장례 식사를 했다. 그는 영구차를 수행하였고(31절), "무덤에서는 울었다" (32절). 아브넬이 지금까지 자기의 원수였고, 별로 좋은 친구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전쟁터에서 용맹스러웠었고, 이 난국에 공공복리를 위해 크게 기여할 수도 있었으므로, 과거의 모든 싸움은 잊어버렸고, 다윗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통했다. 장례식에 참예한 모든 자들이 자기들은 이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그 때에 다윗이 무덤을 보고 한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자들에게 새로이 눈물을 자아내고 말았다. "아브넬이 어찌 미련한 자처럼 죽었는고?" (33, 34절)

(1) 그는 아브넬과 같은 위인, 행실과 용기로 이름난 자가 어리석은 자처럼 자기의 생을 마치게 되고, 우정을 빙자한 급살을 맞아야 했다는 사실로 심히 괴로운 듯이 말했다. 아무리 지혜롭고 강한 자라도 배신에서 면제될 수 있는 방편을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 아브넬, 곧 그 자신도 자기는 이스라엘의 난국을 타개할 지주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시련을 겪는 정부를 바로 잡는 데 일익을 담당하리라고 믿었던, 그리고 훌륭한 복안을 가득히 가지고 있던 자가 비열한 적수에 의해서 우롱을 당하며 급기야 야심과 질투심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보라. 야심과 질투심은 지극히 영광스런 자만을 더럽히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이 세상적인 어떤 자랑 때문에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방백들을 신뢰하지 말지어다" (시 146:3, 4). 따라서 우리는 우롱당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라. 사람이 자기의 생을 누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귀중한 모든 것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 때가 오리니, 지혜와 염려와 정직으로도 그것을 막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윗 세상에는 어떤 도적도 훔쳐갈 수 없는 것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과 위안을 지속시키는 것은 스스로의 분별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은혜를 입고 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이 악인들의 양심을 견제해 주시지 않는다면, 약자와 무흠한 자들이 순식간에 강자와 악인들에 의해서 희생물이 될 것이며,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바보처럼 죽게 될 것이다.



(2) 또한 아브넬이 바보처럼 자기의 생을 마친 것은 아니라고 말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브넬이 어리석은 자처럼 죽었는가? 아니다. 아브넬은 범인, 곧 반역자나 중범인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런 자들은 공공의 정의에 의해서 죽는다. 그러나 아브넬의 손은 결박되지 않았고, 그의 말도 차꼬도 채우지 않았다. 즉 악인의 취급을 받지 않았다. 아브넬은 의인 앞에서, 법의 선고를 받고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사나이로서, 무흠한 자로서 불의한 자 앞에서 엎드러졌다. 도적과 강도들이, 가장 잔인한 자들이 그대를 죽였도다."

"아브넬이 나발처럼 죽었는가?" (칠십인 역은 이렇게 해독했다) 나발은 주정뱅이처럼 살다가 그렇게 죽었다. 그러나 아브넬의 운명은 세상에서 가장 슬기롭고 선량한 자가 지닐 수 있는 삶과 같았다. 아브넬은 아사헬처럼 무모하게 자기 목숨을 던지지도 않았다. 아사헬은 정당한 경고를 받고도 무모하게 창끝으로 돌진해 가서 급살을 맞은 것이다. 아무튼 자기들의 날수가 그렇게 단축되고, 게다가 저 세상을 위한 아무런 차비도 못 갖추고 바보처럼 죽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5. 다윗은 그 날 종일 단식했다. 밤중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려 했다(35절). 당시에는 크게 애통해 하는 자들은 당분간 육의 양식을 삼가는 것이 관습이었다(1:12; 삼상 31:13). 그런 때에 애통의 집을 잔칫집으로 바꾼다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짓이 되랴!

다윗이 아브넬에게 표한 이러한 경의는 백성들을 크게 기쁘게 했고, 다윗은 결코 살인 공모자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36, 37절). 시므온과 레위의 비행이 야곱을 의심하게 했듯이(창 34:30), 요압의 비행이 다윗을 곤란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다윗 자신은 신경을 썼다.

바로 이 때를 맞아, "왕이 한 모든 일이 온 백성을 기쁘게 했다" 고 했다. 이것은 다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1) 백성들에 대한 다윗의 깊은 애정. 다윗은 모든 점에서 백성을 기쁘게 해 주려고 애썼고, 불행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유의했다.

(2)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호의. 백성들은 그가 한 일은 모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서로 즐겁게 해 주려하고, 또 기꺼이 즐거워하려는 마음 자세는 모든 관계를 원활히 해 줄 것이다.

6. 다윗은 자기가 살인자들에게 안전하게 정의를 집행할 수 없었음을 한탄했다(30절). 그는 아직 약했고, 그의 나라는 신생국이었으며, 조그마한 동요가 와도 무너질 지경이었다. 요압의 집안은 큰 권력을 잡고 있었고, 대범했으며, 이제 와서 다윗이 그들을 자기의 원수로 삼는다는 것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던 터였다. 이들 스루야의 아들들은 다윗에게는 힘겨운 자들이었고, 법으로 다스리기에는 너무도 거대했다. 그러므로 사람, 곧 법권의 손에 의해서 살인자는 "죽여야" (창 9:6) 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었고, 자기는 사인(私人)으로서 만족하면서 심판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행악자들을 그 악행에 따라 보수하리로다."

그리고 이 일은 다음에 대한 감쇄라 하겠다.



(1) 다윗의 위대성에 대한 감쇄. 그는 기름 부음 받은 왕이다. 그러나 자기 부하들 때문에 겁을 먹고 있다. 부하들 중에는 그보다 강한 자도 있었다. 이름은 가졌고 책임은 져야 하나, 사용할 수 없다면, 어느 누가 권력을 좋아하랴?

(2) 다윗의 선함에 대한 감쇄이다. 그는 마땅히 의무로 알아서 이 일(처벌)을 해야 했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어야 했다. Fiat justia, ruat coelum-즉 정의는 집행하라.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만일 요압에 대한 법의 심판을 가했더라면, 이스보셋, 암몬, 그리고 그밖의 사람들에 대한 살인은 방지되었을 것이다. 요압을 살려 둔 것은 욕심에서 나온 정책이요 잔인한 동정심이었다. 의는 왕좌를 지켜 주지 결코 훼방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이 요압에게 내린 것은 단지 집행유예였다. 다윗은 임종시에 아브넬의 죄의 복수를 솔로몬(그는 전쟁의 칼을 뽑은 적이 없으므로 정의의 칼을 뽑기에 보다 적격자였다)에게 맡겼다. 형벌은 죄인들을 추적하며, 마침내는 사로잡고 말 것이다. 다윗은 아브넬의 아들 야아시엘을 등용했다(대상 27:21).

 

3:23 없음.

 

3:24 없음.

 

3:25 없음.

 

3:26 없음.

 

3:27 없음.

 

3:28 없음.

 

3:2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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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없음.

 

3:33 없음.

 

3:34 없음.

 

3:35 없음.

 

3:36 없음.

 

3:37 없음.

 

3:38 없음.

 

3:39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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