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하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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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됨(사무엘 하 2:1-7)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은 자기가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될 것과 자신의 진로를 명확하게 알았지만 그는 그 즉시 전령을 전국에 보내서 백성들을 집결시켜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지 않고 서서히 진행시켰다. 확실한 것을 믿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린다. 다윗이 시글락에 머무는 동안 여러 지파에서 그를 돕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대상 12:1-22). 다윗은 그 세력으로 사울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겸손으로 통치하는 사람은 폭력으로 임하지 않는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다윗이 추구한 길을 하나님께서 이 위기 속에서 열어 주셨다(1절). 다윗은 이 행운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인간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나 정당한 방법을 사용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은 매우 늦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실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았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 면류관은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나를 택하고 지도하고 인도하시는 분의 뜻을 따르면 면류관을 얻게 된다.

1. 다윗은 하나님의 교훈을 따랐고 그의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했다. 다윗은 아비아달이 그에게 가지고 온 흉패(우림과 둠밈)로 하나님께 문의했다. 우리는 절망에 처했을 때만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웃음을 던져 주고 일이 순조롭게 될 때에도 하나님께 문의해야 한다. 다윗은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하고 하나님께 문의했다. 시글락은 폐허의 땅이 되었으나 다윗은 하나님의 지시가 있기까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은 "내가 이곳에서 움직여야 한다면,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하고 하나님께 제한을 두지 않고 문의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기만 하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어느 도성에라도 가겠다는 뜻이다. 이같이 신중을 기하는 것은 유다의 어느 도성에서도 많은 추종자를 만날 수 있고 겸손을 나타내는 뜻이다. 다윗은 이 시점에서 자기의 족속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움직임에도 하나님이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것을 깨닫는다면 기쁘고 복된 일이다. 우리도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가시게 할 수 있다.

2.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길을 지시하셨고 제사장의 도성이고, 다윗에게 피난의 도성이 되며 하나님 자신이 다윗에게 작은 피난처가 될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셨다. 조상들과 족장들의 무덤이 있는 헤브론은 다윗에게 소망을 준 하나님의 옛 약속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보내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베들레헴은 유다 성중의 작은 곳이기 때문이다(마 2:6). 그러나 그 당시 동족의 고향이고 무시 못할 헤브론으로 보내셨다.

Ⅱ. 다윗은 가족과 그의 추종자들도 헤브론으로 데리고 갔다.

1. 다윗은 시련 속에서 함께 있었고 그가 통치할 왕국에서도 함께 있게 될 두 아내를 데리고 갔다. 그의 자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언급도 없는데 그의 첫 아기는 헤브론에서 낳았다(3:2).

2. 다윗은 그의 추종자들도 데리고 갔다(3절). 이들은 다윗이 방랑할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므로 새로운 정착지에도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참으면 함께 왕노릇할 것" 이다(딤후 2:12).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선한 군사들에게 다윗이 자기 추종자들에게 한 것 이상의 대우를 하신다. 다윗은 추종자들에게 거처를 제공했다. 그들은 헤브론과 헤브론에 인접한 각 성에 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든 시험에 함께 한 자들에게는 나라를 맡기고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실 것이다(눅 22:29, 30).

Ⅲ. 다윗은 유다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는다. "유다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다" (4절). 유다 족속은 다른 족속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족속이다. 사울 시대에는 주로 다른 족속과 구별되었고(삼상 15:4), 다른 족속과 구별된 행동을 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 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 족속만 위한 것이었다. 다른 족속들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이 지배하기를 바랐다. 다윗이 점차적으로 변하는 것을 주목하자. 처음에는 "계승" 의 뜻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그 다음에는 한 족속의 점유로, 마지막에는 "모든 족속" 을 위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와 같이 주의 나라와 "다윗의 자손" 되신 예수님도 다윗과 같이 독특한 신분으로 세우심을 받았다. 주님은 "만유의 주" 가 되셨다. 그러나 "우리는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음을 깨닫지 못한다" (히 2:8). 다윗이 처음에 유다 족속만을 다스린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 축소된 것이라고 하나님의 섭리로 암시되었다. 이것이 다윗의 손자 대(代)에 가서 열 지파의 반항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암시는 경건한 유다의 왕 다윗으로 하여금 처음에 유다 족속만 통치하는 데 큰 격려가 되었다.

Ⅳ.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울에게 베푼 친절에 대해서 감사를 표한다. 다윗은 자기의 전임자 사울을 존경할 수 있는 길을 계속 모색하고 자신은 왕관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울에게 어떠한 야망이나 적개심을 품지 않았고 다만 하나님께서 왕으로 불러 주셨음을 나타내려고 한다. 다윗이 자기가 평소에 좋아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을 장사지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다윗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은 사실과 다르다.

1.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행한 일을 칭찬한다(5절). 우리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던지 그 사람이 죽었을 때 그가 남기고 간 것(유해, 명성, 유족)에 대해서 경의를 표해야 한다.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너희의 주 사울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풀었으니 잘하였도다" 라고 말한다.

2. 다윗은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보답하시기를 룻기 1장 8절과 같이 기도한다.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와 명성과 유족에 대한 경외심은 보상을 잃지 않을 자선 행위이다. 이에 대해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고 말했다(6절). 하나님은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진리로 선대하신다.

3. 다윗은 자신이 그에 대해서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하고 보상할 것을 약속한다(6절). 다윗은 자신이 표시할 감사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기를 바라지 않는다. 호의(好意)를 베풀고 그 실증으로 감사를 표시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 이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일 때에는 값싼 감사가 될 수밖에 없다.

4. 다윗은 이 기회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7절).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에게 최종적인 경의를 표시하였으니 그들이 자기와 함께 있기를 바라면서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저희의 왕을 삼았으니 그들과 일치해서 강하고 담대하기를" 바란다. 아무리 고귀한 사람이 죽었을지라도 죽은 사람에게 도취되어 하나님께서 일으켜서 살아남은 사람을 통해서 임할 축복을 소홀히 하거나 경멸해서는 안 된다.

 

2:2 없음.

 

2: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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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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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내란(사무엘 하 2:8-17)

Ⅰ. 두 왕(하나님이 세운 다윗과 아브넬이 세운 이스보셋)간의 경쟁심. 사람들은 사울이 전사했을 때 그의 똑똑한 아들들도 출전했을 것이므로 다윗이 아무런 반대 세력 없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자신이 암시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지명하셨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모순된 생각으로 인해서 아버지(사울)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기에도 부적합한 약하고 어리석은 이스보셋이 다윗을 무시하고 왕위를 계승하리라고 생각했다. 다윗의 왕국은 "열방이 분노하며 관원들이 꾀하며" (시 2:1, 2) 메시야의 왕국에 도전하는 전형적인 모형이다.

1.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다윗과 경쟁해서 왕으로 세운 사람이다. 아브넬은 사울의 직계 자손이 왕권을 계승해야 하리라고 열망했다(아브넬 일파들은 왕위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계승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브넬은 자기의 가족과 친족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컸다(아브넬은 사울의 사촌임. 삼상 14:50). 그리고 이렇게 하지 않고는 자신의 명예로운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교만과 야망이 얼마나 큰 화를 일으켰음을 주시하자.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도움이 없이는 왕위에 오를 수 없었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스보셋을 도구로 쓰려했다.

2. 이스보셋이 왕위에 오른 마하나임은 요단강 동편에 있고 다윗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곳이고 다윗의 세력이 미치기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세력을 강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스보셋이 이곳에서 왕의 기치를 들자 지각없는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이들에 대한 통칭)은 그에게 복종했고(9절), 오직 유다 족속만 다윗을 따랐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다윗의 믿음과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실현하시기까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다윗이 직면한 어려움은 이스보셋과 경쟁하는 기간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다윗이 유다 족속만 다스린 것이 7년이었다(11절). 그런데 이스보셋은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스보셋이 다스린 2년(10절) 이전이거나 그 이후, 또는 이 양 기간을 합한 것을 "사울의 집" (3:6)의 통치 기간으로 간주하고, 이 기간에 특이한 인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보셋이 통치한 것이 오랫 동안 계속된 내란(12절) 이전이거나 남은 5년에 포함되었을 것이다(3:1).

Ⅱ. 양군 간의 충돌

1. 양측이 내란에 군사력을 다 출전시켰는지의 여부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사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30, 31절). 다음 사실에 주의하자.

(1) 유다 족속의 사람들은 표면에 많이 나타나지 않으나 모든 백성들을 다윗에게 복종시키기 위해서 더 용감하고 활기있게 행동한다. 그러나 다윗은 모든 일이 원만히 이루어지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 흘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기다리면서 공격적으로 행하지 말라고 하는 듯하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기 때문이다(시 72:14). 심지어 자기의 원수까지도 부하로 생각하고 그렇게 대했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립인 태도를 취하면서 다른 족속들이 이와 같은 시기에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를 주시하면서 묵묵히 이스보셋의 지배 하에 있을 수 있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은 현명하고 힘세고 싸움 잘하는 군사들 대부분은 통치자의 손아귀에서 7년 동안 유명무실하게 지내왔다. 하나님의 섭리는 경우에 따라 이 사람들의 우매함을 통해서 이행되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행동을 통해서 이행되므로 이들은 일치되지 않지만 하나님 섭리는 동일하다.

2. 이 내란을 일으킨 사람은 아브넬이다. 다윗은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으나 사울의 집과 그들의 두목인 아브넬은 도전을 가했지만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러므로 "급히 나가서 다투거나" 말다툼에 앞장서지 말아야 한다. "욕을 보게 될 때에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 이다(잠 25:8). 어리석은 자의 입술과 손은 분쟁에 개입한다.

3. 내란이 벌어진 곳은 기브온이었다. 아브넬이 이곳을 택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고 사울의 친구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브넬이 전쟁을 벌렸기 때문에 다윗의 군대 장관 요압은 이를 거절하지 않고 이 전쟁에 가담하여 "기브온 못 가에서" 아브넬과 만났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했기 때문에 지리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양측 중간에 있는 연못은 양측에 생각할 여유를 가지게 했다.

4. 양측에서 각기 12명씩 출전시키자는 제안을 아브넬이 했고 요압은 이를 수락했다.

(1) 이 기교있는 대결은 운동경기같이 시작됐다. 아브넬이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고 했다. 아마도 사울이 폭군같이 자기 부하들에게 이런 야만적인 장난을 해서 아브넬이 그에게서 배워서 부상을 입고 전사하는 것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유혈과 공포심을 잊으려 했다. 아브넬이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는 말은 "우리 앞에서 싸우게 하자" 는 뜻이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긴다" (잠 14:9). 인간의 피를 낭비하는 아브넬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고 내가 희롱하였노라" 고 하는 자이다(잠 26:18, 19). 다윗 밑에서 성장한 요압은 지혜가 있어서 이같이 어리석은 제안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 같은 말을 할지라도 그 말에 저항하거나 부정할 결의도 약했다. 왜냐하면 그는 명예로운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도전을 거절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압은 "일어나게 하자!" 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요압이 이같은 장난을 좋아하거나 그 결투에서 승리하리라는 확신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적수로부터 지분거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 줏대없고 거만한 사람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고귀한 생명을 잃었을까! 양측에서 각각 12명이 명단에 의해 선수로 출전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죽기 아니면 살기 운명을 걸었다. 아브넬의 선수들이 진지를 먼저 차지했기 때문에 그들이 먼저 출전한 것 같다(15절). 아브넬은 미련한 야망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 일파의 두목이 되었다.

(2) 이 결투가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피로 끝났다(16절). 출전한 사람들은 각기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하여 이들은 일제히 쓰러졌다. 24명 전원이 칼에 찔려 쓰러져서 양측이 팽팽히 비기는 결과를 초래해서 어느 측에서도 용서를 빌거나 살려달라고 애걸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들이 서로 약속한 대로 서로 죽음으로 해결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도 해하고 오직 죽음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한다. 양측의 완고한 고집은 그들의 격투장에 붙여진 "헬갓핫수림" (완고한 사람들의 들판)이란 지명이 잘 상기시켜 준다. 육체적으로 강인할 뿐만 아니라 굳고 흔들리지 않는 이들의 의지는 죽음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잔다" (시 75:5). 광대한 것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희박한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생명을 잃는 사람은 다시 얻게 된다.

5. 전군이 교전하여 아브넬의 군대가 패전한다(17절). 앞서 있었던 기브온 못가에서의 격투는 양측 군사가 다 죽은 무승부의 전투였다. 그래서 아브넬은 다른 전쟁을 일으켰으나 그들의 실패로 끝났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므로 다윗 측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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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헬이 아브넬에게 피살됨(사무엘 하 2:18-24)

본문은 아브넬과 아사헬의 대결에 대한 기록이다. 요압의 동생이고 다윗의 생질인 아사헬은 다윗의 군대장 중의 한사람인데 걸음이 빠르기로 유명했다. "그의 발은 들노루같이" 빨랐다. 이 같은 이름은 날아다녀서가 아니라 추격하는 데 빠르기 때문에 주어졌다. 아사헬은 기능있게 훈련된 군인으로는 아브넬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주시하자.

Ⅰ. 아사헬이 아브넬을 생포하려는 것은 경솔했다. 아사헬은 다른 사람들은 제쳐놓고 아브넬만 추격했다(19절). 다윗과 요압과의 혈연 관계를 자랑하는 아사헬은 그의 재빠름과 자기측의 승리의 전리품으로는 아브넬을 죽이든가 생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브넬만 처치하면 전쟁도 끝나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길이 무난히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이 아사헬로 하여금 아브넬을 맹렬히 추격하게 하였고 그의 좌우편에서 여러 사람을 손쉽게 생포할 수 있는 기회마저 망각하게 했다. 아사헬의 눈은 아브넬만 주시했다. par negotio-즉 성취할 수만 있었다면 그의 의도는 매우 용감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한 사람을 제쳐놓고 발이 빠른 사람이 영광을 얻어서는 안 된다. magnis excidit-즉 지나친 포부는 위험하다.

Ⅱ. 아브넬은 아사헬이 자신을 지나치게 노출시키는 위험에 주의를 주고, "화를 자처하지 말라" (대하 25:19)고 권고하리만큼 관대하다.

1. 아브넬은 자기보다 작은 전리품(prey)에 눈을 돌리라고 권했다. "너는 소년 하나를 잡아(21절) 포로로 삼고, 너보다 힘이 우월한 자에게 관여하지 말라" 고 하였다. 모든 경쟁에서 자신의 능력을 상대방의 능력과 비교하고 합당한 적수인가를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자신의 능력을 평가하고 주의해야 한다.

2. 아브넬은 자기를 기필코 죽이려고 하는 아사헬에게 오히려 아사헬 자신이 죽을까 조심하라고 간청한다(22절). 아브넬은 요압을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사헬을 죽이면 그의 미움을 사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수가 서로 존경하는 것은 칭찬할 만하다. 아브넬이 요압을 어떻게 대면하겠느냐고 근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명으로 종국에는 다윗이 왕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확신을 무시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

Ⅲ. 아브넬에 대한 아사헬의 경솔함은 치명적이었다. 아사헬은 아브넬이 자기를 두려워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브넬은 아사헬이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찔렀다" (23절). 이 같은 공격은 아사헬에게 익숙치 않은 위기였고 경계하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아브넬은 전부터 사용해온 창으로 효과를 올렸다. 아사헬은 그 상처로 즉사했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으로 인해 죽음을 직면한다. 재빠른 적과 창끝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재빠름과 창의 대결에서 아사헬이 죽음의 부상을 입는다.

2. 인간은 종종 재능의 교만에게 배반당한다. 아사헬이 지나치게 이용한 재빠름은 그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그의 운명을 재촉했고, 그 재빠름으로 죽음을 피해 도망치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사헬의 패망은 아브넬의 생명을 안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침략자의 추격을 저지시켰고 아브넬에게 재규합의 기회를 주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사헬의 쓰러진 곳에서 머물러 섰고 요압과 아비새만은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격노하여 더욱 맹렬히 아브넬을 추격하여 해질 때에 그를 뒤쫓았으나 날이 저물어 할 수 없이 그 발을 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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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군의 휴전(사무엘 하 2:25-32)

Ⅰ. 침략을 한 아브넬이 비열하게 휴전을 제의한다. 아브넬은 마치 자기가 다시 두목이 된 듯이 그의 잔류 군사를 규합해 가지고 작은 산 꼭대기에 집결한다(25, 26절). 전쟁을 추구하는 사람이 먼저 실증을 낸다. 피흘리는 것(살인)을 장난으로 여기던 사람(소년들로 일어나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14절)이 자기 자신이 패배하게 되자 피 앞에서 충격을 느낀 것이다. 아브넬의 말씨가 일변한 것에 유의하자. 칼(격투)을 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그가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고 말한다. 칼이 하루에 상하게 하였는데 아브넬은 그 칼이 자기에게 임하게 되자, "영원히" 상하게 하겠느냐고 생각한다. 아브넬은 형벌로 인해서 해가 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아브넬은 처참한 내란을 종결시키기 위해 요압 앞에 나타나서 "칼로 인해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 말한다. 전쟁을 결산하게 되면 아브넬에게 불리하게 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전쟁에 가담하면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 지파와 베냐민 지파 간의 전쟁이 끝났을 때 당한 쓰라림과 황폐함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른다(삿 21:2). 아브넬은 요압에게 휴전하기를 간청하면서 서로 물로 씹어서 멸망당해서는 안 될, 서로 형제임을 자처한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1.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할 때에는 구실을 제기하기 쉽다. 만약 아브넬이 침략자라면 그가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불평하거나 양측이 형제임을 호소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아브넬로 하여금 전쟁에 패하였음을 알게 하고, 그가 제기하는 이유는 재규합하고 보완해서 흩어진 그의 병력을 패망에서 구출시키자는 것이다.

2. 사건의 결과는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한다. 아침에 기쁨을 주던 것이 저녁에 침울하게 하기도 한다. 분쟁에 앞장 서던 사람이 그 분쟁이 끝나기도 전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분쟁에 개입하기 보다 회피하는 편이 좋다. 모든 죄는 마지막이 쓰고 종국에 가서는 뱀같이 문다.

Ⅱ. 요압도 침략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상관(다윗)이 피(흘리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관대하게 휴전 제의를 받아들인다. 요압은 전쟁에 앞장 서려는 아브넬을 비난하고 피를 많이 흘린 그를 책망한다(27절). "네가 흔단( 端)의 말을 하지 아니하였다면" (서로의 사이가 벌어지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역자 주)이라는 말은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더라면 격투하거나 칼을 뽑지 않았을 것이다. 불평하는 자는 칼에 멸망당한다. 그러면 누가 먼저 칼을 뽑았는가, 누가 싸움을 시작했는가? 이제 백성들은 갈라졌다. 백성들은 싸움을 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명심해야 한다. 도전이 없었다면 싸움을 벌이지 않고 아침에 흩어졌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장난을 시작하는 사람이 먼저 후회하고 불평한다. 요압이 계속 공격해서 아브넬의 군사를 제압했더라면 결례를 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의 과오를 동정하고 이스라엘군 사령관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면서 나팔을 불어 추격을 중지시켜 아브넬을 후퇴하게 하였다(28). 요압이 피흘림을 예방한 것은 잘한 일이다. 군인들이 자기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본 요압은 어떠한 사람도 해하지 않고 온 이스라엘의 행복을 추구하는 다윗의 교훈에 순종했다.

Ⅲ. 양 군은 분리하여 밤새도록 행군하여 아브넬 군대는 요단강 건너편 마하나임으로 돌아갔고(29절) 요압과 그의 군대는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돌아갔다(32절). 양측의 전사자를 계수하였다. 다윗측에는 아사헬 외에 19명이 전사했고(30절) 아브넬 측에서는 360명이 전사했다(31절). 이보다 앞서 있었던 내란에서의 전사자(삿 7:6, 20, 44)에 비교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현명하고 온화해진 증거이다. 여기에 아사헬의 장례에 대한 기록이 있다. 다른 전사자들은 전장(戰場)에 매장하고 아브넬의 시체는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무덤에 장사하였다(32절). 여기서는 두 가지의 죽음의 특성을 볼 수 있으나 부활시에는 신앙으로 인한 부활과 불신앙으로 인한 영원한 죽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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