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굴속에서 사울을 살려줌(사무엘 상 24:1-8)
Ⅰ. 사울은 다시금 다윗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1,2절). 블레셋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돌아 오자마자, 사울은 다시금 다윗을 찾아 그를 해치고자 나섰으며,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내가 구원을 얻었노라" (렘 7:10)라고 말하는 자처럼 다윗을 해하려고 결심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의 빈번한 침공은 다윗을 다시 불러 들여서 다시금 군대의 지휘자로 삼아야 할 필요성을 깊이 깨닫게 하여 주었을 것 같은데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다윗을 찾아 없애려고 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 에 있다는 말을 듣자, 온 이스라엘에서 텍한 사람 3천명을 거느리고 "들염소 바위" 로 다윗을 잡으려고 갔다. 다윗이 그런 곳에 있다면 구태여 애써 찾아서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곳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해칠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다윗이 그런 곳에 갇혀 있다고 하여도 사울에게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다윗이 살아 있는 한 사울은 안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Ⅱ. 하나님의 섭리를 사울로 하여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숨어 있는 바로 그 굴 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3절). 유대 나라에는 큰 바위나 산 허리에 커다란 굴들이 많이 있다. 어떤 것들은 자연 그대로의 굴이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양들에게 뜨거운 태양 빛을 가려주기 위해 인공적으로 넓힌 것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떼를 오정에 쉬게 한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아 1:7). 그리고 이런 굴들을 일컬어 양의 우리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굴 중의 하나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다. 아마 그의 사람들 전부, 즉 6백명 전부가 한 굴 속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 몇 사람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나머지는 이와 비슷한 곳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사울은 이 굴 옆으로 지나가다가 혼자 그 속으로 들어갔다. 다윗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다윗은 야심만만한 사람인지라 들염소처럼 높은 바위 위에 기어올라 가는 곳에서 찾을 수 있지, 양처럼 굴 속에 있으리라고는 사울이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발을 가리우기 위하여" 그 굴 속으로 들어갔다. 즉 그는 잠시 낮잠을 자기 위해 들어갔다. 굴 속은 시원하고 조용한 곳이기 때문에 한낮의 더위를 식히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아마 사울은 대부분의 군사들을 그대로 전진하게 하고, 다만 몇 사람들만 굴 입구에서 자기를 기다리게 하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발을 가리운다는 말을 용변을 본다는 말로 이해하며, 따라서 용변을 보기 위해 사울이 굴 속으로 들어 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자의 해석이 더 타당성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Ⅲ.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재촉하였다(4절). 다윗의 사람들은 그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때가 왔다고 말했으며,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러 주시던 바로 그 때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제 고난의 때가 끝나고 높이 들려 올려질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사울의 목숨은 전적으로 다윗의 자비심 여하에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나 다윗이 사울에게 자비를 베풀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당신 소견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시오" 라고 그의 사람들이 말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릇 이해하기 쉽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를 사울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신다고 확신을 넣어 주셨다. 그런데 그의 사람들은 이것이 곧 사울을 없애라는 허락이라고 해석하였다.2.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그릇 이해하기가 또 쉽다. 지금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힘이 있기에 그를 죽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다윗의 사람들은 결론을 내렸다.
Ⅳ. 다윗은 "사울의 겉 옷자락을 베었다." 그러나 즉시 다윗은 이런 일을 행한 것을 뉘우쳤다. 그것이 조금도 사울을 직접 해한 것은 아니며, 또 그에게 충분히 사울을 죽일 힘도 가지고 있었으나(11절),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를 손상시켜 준 것이기에 다윗은 이런 일을 원치 않았고, "그의 마음이 찔림을 받았다" (5절). 적게 보이는 죄에 대해서도 우리의 마음이 찔림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양심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증거이며, 이로써 보다 더 큰 죄를 방비할 수 있다.
Ⅴ. 다윗은 그 자신과 그리고 그의 부하들에게 사울을 헤하지 못 하도록 설득하였다.
1.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타일렀다. "내가 여호와의 기름부음를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다." 죄란 우리들이 깜짝 놀라야 할 것이며, 다만 인간의 결심만이 아니라 거룩한 의분을 가지고 그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그 때에도 사울을 그의 원수라거나 또는 그의 출세를 가로막는 사람으로 생각지 않았다(그렇게 생각했었다면 그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자 (즉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지명하셨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사람)으로 생각했으며, 그가 충성을 다해야 하는 그의 주인으로 여전히 생각하였다. 사환들과 신하들은 아무리 어려운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책임과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다윗에게서 배워야 한다(벧전 2:18).2.다윗은 그의 사람들을 타일렀다. "다윗이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였다" (7절). 그는 자기 자신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 역시 악을 행치 않도록 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의 선을 악으로 갚은 사람에게, 그 악을 선으로 갚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로 그에게서 자기를 핍박한 자를 구원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리고 "모든 악을 선으로 정복하여야 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을 찾아 볼 수 있다.
Ⅵ. 다윗은 사울을 뒤따라 굴에서 나왔으며,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이용하지 않았지마는, 사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사울의 생각과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님을 밝혀 줌으로 그의 증오심을 없애고자 하는 기회로 지혜롭게 이용하였다.
1. 다윗은 자기의 모습을 드러냄으로 그가 사울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다윗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사울이 그를 보는 한 곧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울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이 어떻다는 것을 생생한 증거와 함께 보여주면 사울이 능히 진실을 깨달아 알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2. 다윗의 행동은 사울을 매우 공경하는 태도였다. "다윗은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 그는 마땅히 존경할 자를 존경하는 태도였다. 우리느 그에게서 우리도 마땅히 우리보다 높은 분들에게는, 그들이 비록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고 하여도, 그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그들을 공경하여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다윗이 사울을 충간함(사무엘 상 24:9-15)
여기에는 사울을 향해 호소한 다윗의 부드럽고도 감동적인 호소가 있다. 이 호소에서 다윗은 사울로 하여금 그가 다윗을 핍박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임을 깨닫게 하여 주며, 따라서 다시금 마음을 돌이킬 것을 호소하였다.
Ⅰ. 다윗은 사울을 "아버지" 라고 불렀다(11절). 사울이 왕으로서 그 나라의 국부였기 때문 만이 아니라, 특별히 자기의 장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아버지로부터는 연민과 호의를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왕으로서 자기의 선한 신하가 멸망 당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이 멸망 하기를 바라는 것같이 부자연한 노릇이다.
Ⅱ. 다윗은 사울의 악한 참모들에게 자기의 분노를 터뜨렸다.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니이까?" 라고 다윗은 말했다(9절). 이 말은 왕관을 쓴 분은 존경해서 하는 말이다. 만일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곧 그들에게 자문하는 자들이 잘못했다는 말이다. 사울이 그를 핍박한 것은 전적으로 사울 자신의 질투와 악의에서 나온 것임을 믿을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 근거를 다윗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다른 사람들이 사울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했으며, 다윗이 그의 원수이며 그를 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믿게 만들었다고 공손히 추측하였다.
믿는 형제들을 크게 모함하는 사탄은 그의 하수인들을 아니 보낸 곳이 없도록 다 보내 놓았는데 특별히 그들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는 왕궁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대단하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함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가이사의 대적이며 왕과 방백들을 해하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Ⅲ. 다윗은 자신의 무죄함과 그리고 사울을 전혀 해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읍니다(11절). 나에게는 책망받을 만한 죄가 없고, 어떤 허물이 있다는 기억도 없읍니다. 내 마음에 창문이 있다면, 나의 주장이 진실하다는 것을 당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께는 죄를 범했을지라도) 왕에게는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그러나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이다."
아마 베냐민 사람 구시(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곧 사울이라고 생각한다)의 일과 관련하여 노래한 시편 7편은 이 때에 지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였다(3-5절). "내 손에 죄악이 있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밞게 하소서." 그리고 난외의 관호 속에 있는 주를 보면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뒷받침해 줄 만한 것이 있는데, 이렇게 다윗은 덧붙여 말을 했다. "오직 나는 무고히 대적된 자를 구원하였도다."
Ⅳ. 다윗은 사울이 자기에게 대하여 품고 있는 적의는 거짓된 추측 위에 근거한 것임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보여 주었다.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해하려고 한다고 비난을 받아왔다. 이에 대해서 다윗은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11절)라고 말했다. "이것이 확실한 증거이옵니다. 내게 대한 비난이 사실이라면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은 당신의 옷 자락이 아니라, 당신의 머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는당신의 옷자락을 쉽게 벨 수 있었 듯이 당신의 머리도 쉽게 벨 수 있었습니다."
1. 다윗은 자기의 증거가 확실하다는 것을 더욱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가 그에게 그런 기회를 주시었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여호와께서 왕을 오늘날 내 손에 붙이셨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왕의 목을 치라고 나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모든 사람이 말하더이다." 사울은 다윗을 칠 수 있는 약간의 유리한 입장에 놓였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23:7)라고 외치고는 그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기로 결심하였던 일이 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2. 다윗은 또 그의 참모들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이용하라고 간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혹이 나를 간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사람들의 말에 따른 것을 대해 비난하였다. 그리고 "만일 내가 그들의 말을 따랐다면 당신은 지금 살아 계시지 못할 것입니다."
3. 다윗은 그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은 하나의 원칙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사울의 수행원들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복수를 당할까 두려워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두려워서 이를 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주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나는 그를 지켜야 하며, 나의 충성과 신의를 다해야 할 분이라. 나는 그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손대지 않겠노라라고 말하였나이다." 다윗은 커다란 분격 속에서도 자기의 본성을 잘 지켜서 자기의 왕에게 반기를 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타이를 수 있었다.
Ⅴ. 다윗은 결코 자기 손으로 사울에게 보복을 가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굳은 결심을 밝혀 주었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실 것입니다. 즉 나를 왕의 손에서 건져 주시리이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2절).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다(13절).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읍니다." 옛 사람들의 지혜는 잠언을 통해 후대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이미 우리 선조들로부터 그러한 교훈을 전통으로 전달 받았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그러한 교훈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한 교훈 가운데 다윗 시대에 널리 알려졌던 속담의 하나가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는 것이었다.
1. 그 뜻은 즉 인간의 부정이 결국은 그 사람을 멸망시킨다라고 어떤 사람들은 이해한다. 완강한 사람은 결국 제 칼로 자기 목을 친다는 것이다. 또 그런 사람에게는 밧줄만 주면, 제 스스로 목을 매어 단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다윗이 말한 바 "내 손으로 그를 해하지 않겠다" 는 생각은 그럴 듯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취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2. 악인은 악행을 자행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그 인간의 성품과 기질에 따르게 마련이다. 이것 역시 전후 문맥과 관련이 잘된다. 만일 다윗이 말하는 그대로, 악인이었다면 그는 악행을 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악행을 행하지 않았다.
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악인이 비록 우리를 해치고자 할지라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가시 덤불속에 앉았으면 가시에 당연히 찔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보복해서는 안 된다. 욕설에는 결코 욕설로 대해서는 안 된다. 비록 "악이 악인에게서 나온다" 고 하여도, 우리에게서는 그들을 보복한다는 뜻에서라도 결코 악이 나와서는 안 된다. 개는 양을 보고 짖을 지라도, 양은 개를 보고 짖지 않는다(사 32:6-8 참조).
Ⅵ. 다윗은 사울에게 자기를 해치고자 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며, 또한 무익한 일임을 알려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자기와 같이 보잘것 없는 인간을 쫓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하였다(14절).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쫓기 위해" 이처럼 많은 군사를 데리고 왔는가? 죽은 개와 벼룩(히브리어에서는 한 마리의 벼룩)을 쫓기 위한 것이 아닌가? 위대한 왕이 싸울만한 상대가 되지 못하며, 그의 신하이며, 천한 목동 출신이며, 현재는 한갖 유랑민이며 더우기 어떤 대항을 할 수도 없고 하고자 하지도 않는 그런 자와 겨루는 것은 너무나 자기를 비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그의 명예가 되지 못하며, 자기를 경멸하는 행동이다. 만일 사울이 자기 자신의 평판을 생각한다면 (다윗이 그의 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대적은 경시하고, 그에게서 어떤 위험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여야 했을 것이다.
다윗은 자기의 부족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일컬어 죽은 개라고 하지는 않았다. 므비보셋은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삼하 9:8). 사울에게 약간의 관대한 마음이 어느 한 구석에라도 있었다면 다윗의 이런 겸손한 말은 그의 마음에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자는 먹이를 쓰러 뜨리는 것만으로 만족해 한다" (Satis est prostr asse leoni). 죽은 개를 짖밟았다고 해서 그것이 사울에게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비록 벼룩이 잘 찾기가 어려운 것이지만 이를 찾아 내었고, 또 잡기 어려운 것을 잡았다고 해서 그것이 그에게 무슨 커다란 기쁨이 되겠는가? 더우기 왕이(어떤 사람이 보는 바와 같이) 벼룩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해도 그것은 큰 상이 될 수 없다. "독수리는 파리를 보고 달려들지 않는다" (Aquila non captat muscas). 다윗은 사울이 자기에 대해 벼룩 한 마리 정도로 생각하면 되리라고 보았다.
Ⅶ. 다윗은 하나님께 이미 한번 그리고 또다시 바른 판단을 내려 주시기를 호소하였다(12,15절). "여호와께서 왕과 나 사이에 판결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무죄한 가운데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피할 만한 곳이며, 위로의 원천이 되신다. 사람들이 우리를 아무리 잘못 판단하여도, 마지막 때의 크신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바르게 판단하여 주신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맡기고, 안연히 거하며,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사 모든 것을 판단하여 주실 때를 기다렸다.
다윗의 말에 마음이 풀린 사울(사무엘 상 24:16-22)
Ⅰ. 다윗의 말을 듣고 사울이 후회하는 빛으로 대답했다. 사울이 다윗을 매우 난폭하게 대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사울과 그의 신하들을 제지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사울은 미묘한 사건에 충격을 받았으며, 더우기 자기가 전적으로 다윗의 자비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여기서도 만일 사울의 마음에 어떤 감동을 받지 못했다면 그의 가슴은 돌보다도 더 굳은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1. 사울은 눈물을 흘렸다. 그가 허위로 눈물을 흘렸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의 현재의 심정를 솔직이 표현했다. 사울은 다윗의 친절에 압도당한 사람과 같이 말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그리고 자기의 어리석음과 배은망덕을 깨닫고 마음을 돌이킨 사람처럼, 소리를 높여 울었다" (16절).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진실로 회개하지 않으면서도 울며 애통한다. 그리고 죄를 여전히 사랑하며, 동맹을 계속한다.2. 사울은 솔직하게 다윗의 무죄와 자기의 범죄함을 인정하였다(17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라고 사울은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리라" (시 37:6)고 하셨는데 이제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선한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이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 안전을 도모하여도 좋다.
사울의 정당한 고백은(비록 원수의 판단이기는 하지마는) 다윗이 무죄하다는 것을 밝히는 데는 충분하였다. 그러나 사울 자신이 진실로 회개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는 의롭고 나는 악하도다" 라고 사울은 말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울은 결국 "너는 나보다 더 의롭다" 고 말하고자 했다. 악인의 고백은 보통 이 정도 이상 더 좋은 고백을 할 수 없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만큼 선하지 못 하다는 식으로 말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보다 좋고 보다 더 의롭다고 말한다.
사울은 여기서 자기가 다윗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18절). "네가 나를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이 우리를 해하려고 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이 오해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이 때의 사울처럼 과감하게 이를 철회하여야 한다.
3. 사울은 다윗이 자기를 선하게 대해 준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선으로 보응하여 주실 것을 기원하였다. 다윗이 자기를 당연히 죽일 수 있는 여건하에서도 자기를 살려 준 것은 원수지간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놀라운 자비에서 나온 행동임을 시인하였다. 아무도 감히 그렇게 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제 사울은 자기에게 그런 큰 은혜에 보답할 능력도 없거니와, 또 주고 싶은 생각도 자기에게는 없으므로, 그 보답을 하나님께 돌렸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7절)라고 기원하였다. 불쌍한 거지는 자기에게 동냥을 주는 사람을 위해 다만 기도하는 것뿐이다. 여기의 사울도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4. 사울은 다윗이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하였다(20절).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안다." 사울은 전에 사무엘이, 다윗에게 임한 보다 훌륭한 성령과 비교해서 자기에게 말한 약속에 의해 이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실 그 때문에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그의 죄와 어리석음이 더 가증되었다. 사울도 다윗이 자기를 두고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에게 내가 손을 댈 수 없다" 고 한 말을, 그대로 하여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 원수인 자기를 살려준 왕자다운 정신을 접하고서야 이를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는 이 사실을 시인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온전한 제정신에서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것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조만간에 사탄의 회에 속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알고 또 이를 고백하고 그들의 발 앞에 절하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시다(계 3:9).
다윗이 틀림없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을 사울이 시인했다고 하는 사실은 다윗에게 크신 위로를 주었고, 또 그의 신앙과 희망을 굳게 하여 주었을 것이다.
5. 사울은 다윗에게, 그가 현재 자기의 육체에 대해 보여준다. 그런 친절을 앞으로도 계속 자기의 후손과 자기의 이름에 대해 나타내 주기를 맹세하도록 요구하였다(21절). 다윗은 맹세에 의하지 않고서도 사울을 멸망시키지 않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사울은 그런 점을 주장하지 않았다(만일 정의와 명예가 그를 속박하지 않는다면, 맹세도 그를 속박하지 못한다). 사울은 다윗을 성실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윗을 맹세만 시키면 그의 안전이 확실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사울은 불순종을 통해 그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어 갔다. 그렇지만 회개함으로 그런 멸망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이름이 멸절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의 후손들이 끊어지지 않기를 열심히 원하고 있다.그렇지만 다윗은 사울에게 맹세하였다(22절). 사울은 다만 복수심에서뿐 아니라, 후환을 없애야 겠다는 생각에서도 사울의 가문을 온전 멸족시키고 싶은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스스로도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였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런 피 흘리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시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맹세는 그 후에 성실하게 이행 되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잘 보살펴 주었고,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을 배반자라고 하여 처단하였다. 사울의 후손 일곱을 목매어 달은 것은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다윗이 위의 맹세를 깨뜨리는 처사가 아니었다.
Ⅱ. 다윗과 사울은 서로 화목한 가운데 헤어졌다.
1. 사울은, 현재로서는 다윗을 핍박하기를 단념하였다. 사울은 다윗에 대해 적의를 품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잘못을 깨닫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회심은 하지 않은 채, 그 마음 속에 쓰라림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다윗을 보았을 때 계획했던 대로 다윗을 죽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핍박자들이 완전히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을 때에라도, 그들의 손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붙잡아 매신다.2. 다윗은 여전히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다윗은 아직 사울을 지나치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갔다." 금방 화해한 원수의 자비를 지나치게 기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예수는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치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시었다(요 2:24). 다윗과 같은 사람은 비둘기처럼 순전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뱀과 같이 지혜로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