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단과 의논하는 다윗(사무엘 상 20:1-8)
Ⅰ. 다윗은 현재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민을 요나단에게 털어 놓았다. 사울이 혼수 상태에 빠져서 나욧에 누워 있는 동안 다윗은 궁궐로 도망쳐 와서 요나단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왕좌에 앉은 이는 그에게 몹시 심한 원수인데, 궁궐 안에 이처럼 귀한 친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매우 귀한 축복이다. 우리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자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불안해 할 필요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도 또한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가 있으면 또 다른 하나도 마련해 주셨으며,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 요나단은 다윗을 언제나 사랑하는 친구였다. 그는 재난 속에 있는 다윗을 여전히 사랑하였으며, 다윗이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환영하였던 것같이(18:1), 지금도 역시 그를 환영하였다. 그는 참으로 "위급한 때를 위해 난형제" 였다(잠 17:17).
1. 다윗은 요나단에게 자기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그러나 자기의 무죄에 대해서는 여러 말로 증거를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의 아버지 사울에 대해서 자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던 것이며, 그런 일이 있다면 겸손히 용서를 구하겠노라고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하였느냐?" (1절).2. 다윗은 요나단에게 그의 무죄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식의 도리로서 자기 아버지에 대해 그가 그런 계획을 꾸미거나 또는 그처럼 악한 일을 하리라는 것을 쉽사리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2절). 또 그렇지 않기를 바랬다. 왜냐하면 요나단 자기는 그런 계획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언제나 사울이 자기에게 모든 일을 알게 하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충실한 아들로서 요나단은 다윗에 대한 신의가 손상되지 않는 한 자기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 주려고 애썼다. 사랑은 더우기 부모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고전 13:5). 그리하여 다윗은 맹세코 그가 위험하다는 것과 또 사울이 아무 말도 아니한 것은 요나단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한 것임을 말했다. "무엇 보다도 확실한 여호와의 사심과 그리고 네가 있어서는 다른 무엇 보다도 확실한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는 어찌 생각하든지, 나와 사망의 사이에는 다만 한 걸음 뿐이니라" 라고 다윗은 말했다(3절).
사울이 요나단에 대해 이 일을 비밀에 붙인 까닭은 쉽사리 알 수 있다. 사울은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일은 요나단과 의논했지만 이 일만은 의논하지 않았다. 정당하고 명예로운 일이라면 요나단 이상 사울을 도와줄 사람이 또 없다. 그러나 사울은 요나단이 다윗을 죽이는 것과 같은 비열한 일에 있어서는 자기 편이 되어주지 않으리만큼 고결한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Ⅱ. 요나단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윗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하였다(4절).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고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했다. 요나단은 반드시 합법적이며 또 정당한 요구라야 한다는 단서를 붙일 필요가 없었다(왜냐하면 요나단은 다윗이 그런 것은 요구조차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다운 우정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
Ⅲ. 다윗은 먼저 요나단이 사실을 알도록 하고, 그리고 정말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지 아닌지를 자기에게 알게 하여 달라고 하였다. 아마 다윗은 자기 자신 보다는 요나단이 더 확실한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 이런 일을 꾸몄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은 이미 확실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 다윗이 제안한 방법은 매우 자연스러운 방법이었고, 사울이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정말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다음 이틀동안 사울은 공동 식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은 월삭을 맞아 특별한 제물을 드리는 성대한 제의와 잔치 자리였다. 사울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서 떠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거룩한 의식은 지키고 있었다. 참다운 덕행은 없어진지 오래 되어도 외적인 봉헌은 남아 있을 수 있다.이 엄숙한 잔치 자리에 사울은 그의 자녀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하였으며, 거기에 다윗의 자리도 마련되었든지, 아니면 그의 중신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 다윗도 그들 중의 하나로 참석해야 했든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하여간 다윗은 이틀 동안(5절) 그 자리를 비우기로 결심하였다(이것이 정말 거룩한 잔치라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의식이 전부 끝날 때까지 행방을 감춤으로써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보려고 하였다. 만일 사울이 그가 결석한 이유를 허락해 주고, 용납해 준다면, 이는 사울의 마음이 변했으며, 다윗을 좋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그때문에 화를 내고 분격한다면 이는 여전히 사울이 다윗을 해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사실 다윗이 그 자리에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사울이 다윗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해할 기회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7절).
2. 요나단이 말해 주기를 바랬던 다윗의 이유는 진실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친척들과 함께 월삭을 지내기 위해 자기의 성 베들레헴으로 맏형의 초대를 받아 가야만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달마다 가지는 회식의 모임 이외에도 "온 가족을 위하여 가지는 매년제와 거룩한 잔치가 있었다" (6절). 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누려온 은혜를 감사하며, 또 그 은혜가 계속되기를 간구하는 날로 지켰다. 이로 미루어 보아서 다윗이 성장한 가정은 매우 신앙적인 가정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의 가정에는 일종의 교회가 있었다고 보여진다.3. 다윗이 요나단의 친절을 구하기 위해 그를 설득한 말들을 매우 간절한 뜻을 나타내는 말들이었다(8절).
(1) 다윗은 요나단과 자기 사이에 우정의 약속을 하였으며, 그것도 요나단의 제안으로 그렇게 한 것임을 말했다. "네가 네 종으로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케 하였음이니라."
(2) 그는 결코 그의 입장이 정당치 못하건마는 지지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만일 나에게 죄악이 있다면, 나는 너와 내가 맹약을 했다고 해서 네가 나의 죄악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만큼 마음대로 하여 먼저 네 손을 내게 되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정직한 사람은 친구에게 자기를 위해 부정직한 일을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윗에게 준 요나단의 약속(사무엘 상 20:9-23)
Ⅰ. 요나단은 고난 중에 있는 다윗을 틀림없이 도와 주겠노라고 굳게 다짐하였다. 다윗이 아무리 요나단을 믿는다고 하여도, 요나단이 아버지의 영향과 또 자신의 이해 때문에 다윗을 뒤틀리게 하거나 냉담해질 수 있다고 보고 두려워할 이유가 다윗에게는 충분히 있었다. 그리하여 요나단은 자기의 우정을 다시 한 번 다윗에게 확실히 보여 주어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9절). "내가 너의 죄를 의심하여 너를 너를 내 손으로 죽이거나, 나의 아버지께로 끌어 가리라는 의심을 너는 절대로 품지 말라. 아직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11절). 거기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들로 가지고 이끈 것은 자기에게 보여준 모욕을 인하여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우정을 더욱 확실히 드러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기 아버지의 의향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그것이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틀림없이 알려 주겠노라고 성실하게 약속하였다. "만일 네게 대한 나의 아버지의 의향이 선하면, 네가 안심할 수 있도록 네게 알게 하였고(12절), 만일 악한 의향이면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겠다" (13절).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이 당하고 있는 위험이 사실이라면 그를 구하는 일에 도와 주겠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다만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면 역시 그런 두려운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겠노라는 다짐하였다. 그리고 요나단은 그의 약속을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1. 요나단은 증거자로서의 하나님께 호소하였다(12절). "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당신은 나의 말이 신실하다는 것과 또 나의 말과 생각이 일치하다는 것을 아시나이다." 그의 열정이 그처럼 간결하고도 당돌한 말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2. 요나단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내가 만일 거짓으로 말하고, 친구에게 말한 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13절).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이 그의 진실함을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엄숙하게 자기를 드러내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로 "큰 안위" 를 받게 하시려고 그의 약속을 단단히 하여 주셨다(히 6:17, 18).
요나단은 이처럼 확고한 선언만이 아니라, 그 위에 충심에서 나오는 축복의 기도까지 곁들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여호와께서 전에 내 부친과 함께 하셨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시사, 너를 보호하시며, 너를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요나단은 다윗이 자기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할 것임을 믿는다는 것과, 그가 자기 아버지보다 훨씬 그 일을 잘하여 주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Ⅱ. 요나단은 다윗과 세운 우정의 계약이 그의 자손대까지 계속 될 길을 마련해 놓았다(14-16절). 그는 자기가 죽은 뒤에도 다윗이 자기의 집에 대해 계속 우정을 보여주기를 요청하였다(15절).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이말은 요나단이 자기 죽은 이후에도 자기의 가족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본능에서 나온 말이다. 그 말은 또 다윗의 융성과 그의 후손에 대해 친절을 베풀든지 아니하든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윗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그가 확실히 믿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울 자신이 스스로 제거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을 지면에서 끊어버리실" 때가 이를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때에 "네 인자를 내 집에서 끊어 버리지 말고, 내 아버지의 허물을 내 자녀들에게 보복하지말아 달라" 고 하였다. 다윗의 집은 대대로 요나단의 집과 한 집처럼 묶어져야 한다. 요나단은 "다윗의 집과 언약을 맺었다" (16절).
참다운 친구들은 그 서로간의 우정이 그들의 후손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란다. "네 자신의 친구와 그리고 네 아버지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
1. 요나단은 그 "인자" 를 "여호와의 인자" 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 인자는 하나님께서 더불어 언약을 맺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인자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그 후손들은 "조상들 때문에" 후나님의 사랑을 받는다.2. 요나단은 일종의 저주의 말을 함으로써 다윗과의 언약을 더 확실하게 만들었다(16절). 요나단은 다윗의 집에 대하여 언약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라고 말했다. 요나단은 (다윗 만큼은 전적으로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윗의 후손들 가운데서, 그들의 왕권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 아비멜렉이 기드온의 아들들에 대해 행했던 것과 같은 일(삿 9:5)을 행하지 않을 것인가를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이를 충분히 막을 차비를 차렸다. 그러나 요나단이 다윗과의 우정 관계를 후손들에게 지속시키고자 애써 내세운 이유는 순전히 폭이 넓은 것이었으며, 결코 사리사욕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17절). 그것은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자기와 자기의 자녀들이 그의 사랑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윗이 비록 지금 왕의 총애를 잃고 고난 중에 있지만 요나단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러기에 자기의 아버지는 그를 미워하였지만, 그는 적지 않게 그를 사랑하였다. 이처럼 그들의 우정은 순수한 원칙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요나단은 먼저 자기 자신이 맹세를 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뒤이어 맹세하게 하고 "또 다시 여기에 맹세하게" 하였다. 다윗도(정직한 사람이기에) 그에게 사랑으로 맹세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거룩한 것을 대하듯 하였다. 요나단의 마음은 매우 들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서로 헤어지면서 하나님께 엄숙히 호소하는 말로 그들의 이야기를 끝냈다.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계시느니 라" (23절)라고 요나단은 말했다. 말하자면 이런 뜻이다. "만일 우리 가운데 어느 한편이라도 이 우정의 맹약을 어긴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친히 심판하실 것이다." 이 언약을 기억했기 때문에 다윗은 므비보셋에 대해 인자를 베풀었다(삼하 9:7; 21:7).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또 그의 친구를 우리의 친구로 만들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베풀어 주시는 인자이시다.
Ⅲ.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다윗에 대해 어떤 의향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윗에게 알려 줄 방법과 표시를 정했다. 월삭에 다윗이 자리를 비게 됨으로 첫날이나 적어도 둘째 날에는 그 까닭을 물을 것이다(18절). 그가 베들레헴에서 돌아오는 사흘되는 날, 정해 놓은 장소에 오면(19절), 요나단은 활과 화살을 가지고 그 장소로 와서 화살을 쏘는 데 과녁을 빗나가게 하고(20절), 아이를 보내어 화살을 찾게 할 터인데, 화살이 그 아이보다 못 미쳐 떨어지게 하면 다윗이 안전하다는 표시로 알고, 머리를 드러내도 좋고(21절), 만일 화살이 그 아이보다 멀리 떨어지게 쏘면, 그것은 위험하다는 표시인 만큼 안전을 위해서는 몸을 피하여야 한다고(22절) 알려 주었다. 요나단이 이런 방법을 정한 것은, 혹시나 다윗과 직접 이야기하며, 직접 말로 결과를 보고할 기회가 없지나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을 위한 요나단의 해명(사무엘 상 20:24-34)
여기서 요나단은 그가 도무지 믿기가 싫은 바를 믿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그의 아버지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다윗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다윗이 사울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용감하게 그러한 생각에 맞서 본다.
Ⅰ. 다윗은 첫 날에 식사 자리에 나가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없었다. "왕은 평시와 같이" 화목제의 잔치 자리에 앉아 식사하기 위해 "자기 자리에 앉았다" (25절).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다윗에 대한 시기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먼저 다윗과 화목한 뒤에 와서 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 잔치 자리에서 다윗의 피를 마시기를 원했다. 이처럼 악한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제사인 만큼 그 제사가 얼마나 가증했겠는가!(잠 21:27).
왕이 자리에 앉았을 때, 요나단은 서 있었다. 사울을 아버지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경의를 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제자리에 앉거나 섰다. 그러나 다윗의 자리는 빈 채로 있었다.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다윗은 거룩한 의식에 참여하는 의무를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만일 결석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의 생명은 매우 위태로왔을 것이다. 그는 할 수 없이 자위책을 위해서는 그 자리를 피할 수 밖에 없었다. 임박한 재난이 현재의 기회를 포기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우리 스스로가 위험 속으로 뛰어들 필요는 없다. 예수님도 자기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기 까지는 몸을 피하신 일이 많으시다.
그러나 사울이 첫 날에는 다윗을 놓친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다만 이렇게만 말했다. "그가 정녕 부정한가 보다(26절). 어떤 사고로 저에게 부정이 생겼으면, 옷을 빨고 맑은 물로 몸을 씻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못하고, 저녁까지는 부정하겠지 그래서 못 나온가보다." 사울은 다윗이 율법을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부정한 채로는 성회에 참석치 않기 위해 불참한 것으로 알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부정 때문에 성회에 참석하는 길을 막지 않게 하여 주셨으며, 언제나 믿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가면, 열린 샘에서 씻을 수 있게 하여 주셨다(시 26:6).
Ⅱ. 사울은 둘째 날에야 다윗에 대해 물었다(27절). 사울은 다윗의 친한 친구로 알고 있는 요나단에게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식사에 나오지 않느냐?" 고 물었다. 다윗은 사울의 사위였다. 그러나 사울은 그를 멸시하여 "이새의 아들" 이라고 불렀다. 사울은 다윗이 종교적인 행사에 빠진 것이 불쾌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리고 한 가장으로서 그의 식구들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모임에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말했다.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엄숙한 집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런 집회에 빠진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도마는 제자들의 모임에 한 번 빠짐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뵙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사울을정말 불쾌하게 한 것은 다윗을 해하고자 하였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Ⅲ.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변명을 해 주었다(28,29절).
1. 다윗이 이 자리에 참석치 못한 것은 결코 잘못 때문이 아니며, 여기에 참석하지는 못했어도, 전보다는 (17:28) 훨씬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된 그의 맏형의 부름을 받고 지금 다른 곳에서 이러한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형제간의 우의를 지속하며, 친척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갔다는 것을 말했고, 또 아무리 주인이라도 그의 종이 그러한 곳에 가고자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2. 요나단은 또 다윗이 자기에게 겸손하게 허락을 받고 갔으며, 자기가 그의 상관이기에 그가 자기에게 허가를 받은 것은 정당한 것이었음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이 결코 정부에 대한 경의와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임을 말해 주었다.
Ⅳ. 그 말을 듣고 사울은 매우 감정이 격해서, 먹이를 놓친 사자와 같이 울부 짖었다. 다윗은 그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따라서 모든 분노는 요나단에게 쏟아부었다(30,31절). 그는 신사라면 그리고 또 왕으로서는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비열한 말을 사용했으며, 다른 보통 인간에게도 하지 못할 말을, 자기 아들, 더우기 장차 자기의 왕좌를 물려받을 태자인 아들이며, 그를 제일 잘 섬겼고, 그의 집안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에게 하였고,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또 모든 마음 가짐을 더욱 경건하게 가져야 할 그런 종교적인 모임에서 그런 인사를 사용하였다. 그가 실제로 요나단을 향해 던진 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1. 사생아라고 하였다.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 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남자들의 짐승과 같은 성품에서 나오는 어리석고 더려운 말이다. 오늘의 말로 하면 "매춘부의 아들" 이란 뜻이다. 사울은 요나단이 "그 어미의 수치를 위해 태어난"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사울의 적자가 아니지 않느냐는 의심을 주는 말이었다. 사울은 요나단이 자기의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였고, 자기 가정을 파괴할 자를 도와 주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사용하였다.2. 반역자라고 하였다. (글자 그대로 보면). "너 패역부도(悖逆不道)의 계집의 소생아" 라고 되어 있는데 그 뜻은 또 "너 패역부도한 자여" 라고도 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도 사울이 요나단만큼 신임하고 또 사랑한 참모와 군대장관이 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매우 격노하여 그를 일컬어 자기의 보좌와 생명을 노리는 위험한 자라고 하였다.
3. 어리석은 자라고 하였다. 그는 요나단에게 "네 수치를 위해 이새의 아들을 네 친구로 택한 것이라" 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 있는 한"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요나단은 그 자신과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현명하게 처사하였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도록 택함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때문에 가장 어리석은 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의 사람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과 함께 행하는 것은 가장 좋은 길이다. 그것이 비록 지금에는 경멸스러운 생각이 들고 핀잔과 같이 생각이 되지만 결국에는 우리에게 크게 도움이 된다.
사울은 자기를 기름부은 손에 의해 다윗도 왕이 되도록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다음에 왕이 될 사람은 요나단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뜻을 꺾어보려고 생각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다윗이 죽어야 하며, 요나단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울이 생각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라. 이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방종에 대한 경고로 삼아야 한다. 극도의 노여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다."
Ⅴ. 요나단은 아버지의 야만적인 생각때문에 몹시 슬펐고 극도의 혼란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 기대가 그만큼 컸는데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이다(2절). 그는 자기 아버지가 그처럼 짐승과 같은 사람이기에 괴로와 하였다. 또 하나님의 벗으로 알고 있는 친구가 그처럼 학대를 받는 것 때문에 괴로와 하였다. 그는" 다윗을 위하여 슬퍼하였다." (34절).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괴로와 하였다. 왜냐하면 "그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지" 마는 그 부당한 일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 가련하게도 요나단은 죄의 위험 속에 놓이게 되었다.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은 이런 분한 일 앞에서도 자기의 평정을 찾기 위해 무척 애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아버지의 비난에 대해서 요나단은 댓구를 하지 않았다. 노한 마음을 가지고 멸시하는 말을 아무 말없이 겸손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를 매우 낮추는 것이다. "네가 혐의를 받았을 때는 가만히 있으라" 는 말이 있다. 그러나 다윗을 죽인다고 하는데는 요나단이 참을 수가 없다. 그 말에 대해서는 열을 내서 대답을 했다(32절).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관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당하는 모욕에는 잘 참을 수가 있으나 친구가 모욕을 당할 때는 참을 수가 없다.2. 요나단은 죽음의 위험에 빠질 뻔하였다. 지금 사울은 너무나 난폭해져서, 요나단을 향해 단창을 던졌다(33절). 사울은 요나단이 자기의 왕국을 꼭 이어 받아야 한다고 상당히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였다(31절). 그런데 지금은 그 자신이 요나단의 목숨을 노리게 되었다. 노여움은 인간을 극도로 어리석게 만들고, 사나운 짐승과 같은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는 노여움의 코에 고리를 끼고, 그 턱에 재갈을 먹일 필요가 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이미 틀림없이 결정 될 줄을 실시로 확인하자,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는 자기의 생명이 노림받았던 것을 생각하며, 좋은 기회로 알고 "자리에서 떠났다." 그리고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슬픔 중에 있을 때는 거룩한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손님들은 불안에 떨게 되고, 그래서 그 잔치는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한다" (잠 11:17).
위험하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사무엘 상 20:35-42)
1. 요나단은 다윗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는 위험을 무릅썼다. 그는 다윗과 약속한 시간에 약속한 장소로 갔다(35절). 거기서 다윗이 숨음직한 바위가 있는 곳에 오자, 아이를 보내며, 화살을 주어 오라고 하였다. 그는 화살들을 되는 대로 쏘아서(36절), 화살이 그 아이의 머리 위로 지나가게 함으로 다윗에게 그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하였다(37절). 그는 아이를 향해 "화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고 소리쳤다. "앞편에 있다" 는 말의 뜻을 다윗은 그 아이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요나단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를 보내고, 그 지경에 인기척이 없고, 또 발견될 위험도 없다는 것을 알자, 다윗에게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속히 도망치라고 한 뒤에는 잠시 동안 속에 있는 말을 털어 놓고 이야기하였다.2. 이것은 사랑하는 두 친구의 마지막 슬픈 이별이었다. 그들은 그 후에 단 한 번 수풀에서 만나본 것뿐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23:16).
(1) 다윗은 한 사람의 자유로운 친구로서가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요나단을 존경하며 말했다. "다윗은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했다." 이는 요나단이 그에게 베풀어 준 봉사에 대해서 그 은혜를 깊이 알고 있다는 표시이다.
(2) 그 둘은 서로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리며, 큰 애정을 품은 채 헤어졌다. 그들은 서로 목을 안고 울었는데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었다" (41절). 이처럼 진실한 두 친구가 헤어진다는 것은 두 친구에게 모두 똑같이 슬픈 일이겠으나, 다윗에게는 그 슬픔이 더욱 심했다. 왜냐하면 요나단이 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돌아가면, 다윗은 완전히 외톨이가 되고, 위로받을 곳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받을 위로마저 바랄 수 없게 되매 그 슬픔이 요나단의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즉 다윗의 마음이 요나단의 마음보다 더 부드럽고 그 감정이 보다 더 예민했다고도 볼 수 있다.
(3) 이와 같이 슬픈 이별을 맞아 그들은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그들 사이의 우정의 맹세를 다시 한 번 서약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을 위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대대로 서로 신실하리라 하였노라." 이처럼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우리 집에 있으면, 여호와로부터 떨어져 있어도, 여호와께서 "우리와 영원한 언약을 세워 주셨기에"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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