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에 간 사무엘(사무엘 상 16:1-5)
사무엘은 다시는 공식적인 일을 위해서는 백성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라마에 있는 자기 집에 은퇴하고 있었다. 그리고 19장 20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가 거느리고 있던 선지자의 생도들을 훈련하고 교육하는 데만 자신을 전적으로 몰두하고 있었다. 사무엘은 젊은 왕보다는 젊은 선지자들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죽는 날까지 하나님은 여기서 볼 수 있는 다윗에 대한 기름부음 외에는 달리 사무엘을 불러내어 국가에 관련된 공식적인 일에 종사시킨 일이 없으시다.
Ⅰ. 하나님은 사무엘이 사울의 버림받음에 대해 그처럼 오래 슬퍼하는 것을 꾸짖으셨다. 하나님은 슬퍼한 것 자체를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계속 슬퍼하는 것에 대해 꾸짖으셨다.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1절) 사무엘은 그의 가족들이 제침을 당하고 그의 아들들이 면직을 당했을 때에도 그처럼 슬퍼하였다는 기사를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사울과 그의 후손들이 버림받은 일에 대해서는 다할 수 없는 슬픔을 표시하였다. 전자는 백성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며, 후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 때문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제 자신을 되찾고 계속 슬퍼만 하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다.
1.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으며, 그는 또한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사울에 대한 그의 감정을 잊어버려야 한다. 사울을 멸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사무엘은 이로써 만족해야 한다. 이미 판결은 내려졌다. 그의 기도와 눈물이 그 판결을 돌이킬 수 없다(삼하 2:22).2.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손해 보는 바는 없다. 사무엘은 그의 친구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에 빠져 있지 말고 공동의 복지를 마련하여야만 했다. "사울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아라. 내가 한 왕을 예선하였노라. 백성들이 스스로 한 왕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가 잘못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하여 내가 한 왕을 예선하였는데, 저는 내 마음에 드는 자이다" (시 89:20; 행 13:22 참조). "사울이 버림을 받았어도, 이스라엘은 목자 없는 양같이 되지 않으리라. 나는 다른 목자를 그들을 위하여 마련해 놓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오는 너의 기쁨이 능히 버림받은 왕으로 말미암는 슬픔을 극복하리라."
Ⅱ. 하나님은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어 이새의 한 아들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다. 아마 사무엘은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너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고 말씀하셨다. 사울에게는 병에 채워진 기름을 가지고 기름을 부었다(10:1). 그것은 보잘 것 없고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다윗에게는 뿔에 담은 기름으로 기름을 부었다. 그것은 보다 풍성하고 든든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 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눅 1:69).
Ⅲ. 사무엘은 이 심부름을 가기가 두려워서 이를 거절하였다(2절). 그리하여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 수 있다.
1. 비록 사무엘이 한 마디의 언급이 없어도, 사울은 버림받은 이후 더욱 악독하여졌으며, 더욱 난폭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불신앙에 떨어졌으면 감히 사무엘을 죽이고자 할 수 있었을까?2. 사무엘의 신앙이 기대했던 것만큼 강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사울의 격노를 그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보내신 분이 그를 지켜 주시며, 그 일을 성취시키도록 하여 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의 입장에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조용히 처리하여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노출시키지 않는 방법을 지시사여 주시기를 바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Ⅳ.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번제를 드린다고 하여 그의 계획을 숨기라고 명령하셨다. "내가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하라" 고 하셨다. 사무엘은 그대로 했다. 그가 왕에게 기름부으려고 왔을 때 제사를 드리려 왔다는 것은 조금도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하다(11:15). 선지자로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제사를 드릴 수 있다. 그가 비록 다른 목적이 또 있었지마는 이를 숨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서, 그가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만 말하였다고 하여도, 실제로 제사를 드린 이상에는 진리의 법에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는 것을 알게하고,그를 제사에 초대하고 그의 가족들을 제사 뒤에 가지는 잔치에 초대하도록 시켰다(아마 이새는 그 성읍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는 매 과정마다 하나님의 지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실수하지 않고 가장 잘 해낼 수 있다.
Ⅴ.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베들레헴에 갔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행렬을 지어서 간 것도 아니고, 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간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제사에 쓸 암송아지를 끌고 가는 사환 한 사람만을 데리고 갔다. 그렇지만 "베들레헴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였다." 그들은 사무엘이 그 고장의 불법과 죄악을 심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기 위해 오는 줄 알고 두려워하였다. 죄는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 사실 죄가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를 무서워하게 되고 또 그의 말씀을 두려워하게 된다. 아니면 그들은 그들에 대한 사울의 노여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사울이 사무엘에 대해 대단히 노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사무엘을 환대하면 그것 때문에 사울이 그들에 대해 시비를 걸 것이라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라고 물었다. "당신은 평안한 가운데 오신 것입니까? 사울을 피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화평을 주러 오신 것입니까? 진노의 소식을 가지고 오신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좋은 말씀 듣기를 애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를 거스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들의 기도를 듣기를 두려워해야 한다. 다윗의 자손이 유다의 임금으로 탄생하셨을 때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다(마 2:3).
사무엘은 언제나 집에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 집에서 멀리 떠나온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어떤 비상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가 온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사무엘이 그들을 안심시키기까지는 크게 두려워했었다(5절). 사무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평강을 위하여 왔노라. 나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지, 너희에게 줄 진노의 말씀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온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환영하여라. 그리고 내가 드리는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너희 자신을 성결케 하라. 그리고 그 제사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라."
엄숙한 임명이 있기 전에 먼저 엄숙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자 할 때는, 우리 자신을 세상과 떨어지게 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에 합당하도록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한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의 사명은 세상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두렵고 떨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화평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인간들에게 충분히 확신시켜 주셨다. 그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신 것이며, 그 제물은 자기 자신이시었다. "당신은 나를 위해 당신의 몸을 내주셨나이다." 우리는 예수의 제사를 통해 크게 도움받기 위해 자신들을 성결케 하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사람들은 화평을 가지고 와야 한다. 종교적인 행사는 떠들썩하고 폭력적인 것이 되도록 준비되어서는 안 된다.
Ⅵ. 사무엘은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특별히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비밀히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사무엘은 이새를 처음 보자.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고, 그의 집에 숙소를 정했으리라고 보여진다. 사무엘은 다른 모든 장로들에게는 "자신을 성결케 하라" 고 말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기도와 가르침을 통해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케 하여 주었다. "사무엘은 그전부터 그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20:29 을 보면 이새의 가족들이 드린 가족적 제사를 볼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서) 이새의 가정은 매우 경건한 신앙의 가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무엘은 공적인 제사에 참여하기 위한 그들의 가족적인 준비를 도와 주었다. 그리고 아마 다윗을 택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공적인 제사가 거행되기 전에 가졌던 이새의 가정 제사에서의 일이었다고 보여진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욥이 그 아들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던 것처럼" (욥 1:5), 아들들 하나하나를 위한 개인적인 제사를 드리게 하고, 그것을 구실삼아 그 아들들이 하나하나 그의 앞에 나오게 하였던 것 같다. 한 가족에게 축복의 신호가 오면 그 가족들은 모두 스스로를 성결케 하여야 한다.
기름부음 받은 다윗(사무엘 상 16:6-13)
하나님께서 만일 (1절에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이새의 아들들에게 그들 중에서 한 왕을 택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면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로 멋진 모양을 꾸몄을 것이며, 모두가 바로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Ⅰ. 발탁을 받기 위해 멋진 자세로 서 있었던 이새의 큰 아들들이 모두 그대로 통과되었다.
1. 맏아들 엘리압이 제일 먼저 혼자 사무엘에게 왔다. 그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이새만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그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라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6절). 비록 선지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떠나서 말을 하면, 나닫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삼하 7:3), 다른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잘못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마음 속에 은근히 속삭여 주심으로써 선지자의 잘못을 시정하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 용모를 보지 말라" 고 하셨다(7절).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미치지 못할 준수한 용모와 키를 가졌던 사울에게 극도로 실망한 사무엘이 여전히 그런 표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려고 하였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기쁘게 하여 주고자 왕을 선택하셨을 때는 외모가 준수한 사람을 택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드는 자를 택하고자 하셨을 때는 외모를 보고 택하지 않으셨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신다(사 11:3). "여호와 는 중심을 보신다."
(1)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을 아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 "인간은 눈으로 본다" (라고 이렇게 원문대로는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 나타난 쾌활함이나 명랑함을 보고 즐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고, 그의 생각과 의도를 보신다.
(2)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판단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좋은 마음의 기질과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앞에서 값진 것은" (벧전 3:4) 이러한 것들이지, 결코 겉으로 보이는 위엄이나 힘이나 신장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참다운 미는 그 마음에 있는 것이지 결코 그 풍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들의 마음을 보고 판단하되, 풍체를 보고 판단하지 말자.
2. 엘리압이 밀려나자, 아비나답과 삼마의 뒤를 이어, 다른 이새의 아들들 네 명이 모두 사무엘 앞에 차례로 나타났지만, 이제 처음과는 달리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보다 주의깊게 관찰하는 사무엘에 의해 모두 거절을 당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라고 그들 모두를 두고 말했다(8,10). 인간은 그들의 명예와 재산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줄 때 그들의 나이와 출생 연도에 의해 처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는 말씀이 있다. 만일 사무엘이나 이새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었더라면 이들 중에서 하나가 반드시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인간들이 볼 때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물론 다소 유망하다고 보는 자들도 그대로 지나쳐 버림으로써 자신의 주권을 더욱 공고히 하신다.
Ⅱ. 드디어 다윗이 선택되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자였다. 그의 이름은 "사랑받은 사람" 이란 뜻이다. 다윗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주어졌다.
1. 다윗은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다(11절). 아버지의 집에서는 제사와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건마는 그는 들에 남겨지고 있었다. 막내는 흔히 가정에서 제일 귀여움을 받는데, 이새의 집에서는 다른 아들들에게 밀려난 형편이었던 것 같았다. 또 그들은 다윗이 가지고 있던 훌륭한 영적인 가치에 대해 그것을 분간하지도 그리고 바르게 평가하지도 못했다. 많은 위대한 천재들이 냉대와 멸시 속에 파묻혀 있는 수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혹 인간들이 경멸하는 자를 추겨 세워 주시며" 그 부족한 부분을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신다." 다윗의 자손을 인간들은 멸시했으며, 그는 "건축자가 버린 돌" 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이름들 위에 뛰어난 이름" 을 가지고 계셨다. 모세가 이드로의 양무리를 칠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같이, 다윗도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기르도록" (시 78:71) 이끄심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겸손하고 근면하였다는표시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사, 그 위에 은혜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것들이다. 우리는 훌륭한 왕의 자질을 위한 준비로서 군인 생활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자의 생활을 보신다(목자 생활은 하나님께 대해 명상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의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목자 생활을 통해서는 그러한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 있다.제사를 드리는 때이건마는 다윗은 양들을 치고 있었다. 왜냐하념 제사에 먼저 참여하는 이에게 자비가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2. 사무엘은 다윗이 오기를 매우 간절히 기다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다른 모든 아들들이 택함받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가 바로 택함받은 자이다" (아마 그 때의 식사는 제사시의 잔치가 아니라 보통의 식사 자리였을 것이다). 식탁에 전혀 자리까지도 마련되지 아니했던 그가 이제는 그 식탁의 주인공으로 초대되어 기다려지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낮은 자들을 높이고자 하시면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3. 다윗이 왔을 때의 그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의 옷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아니했다. 그의 옷은 그의 직무상 다른 모든 목자들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보잘 것 없고, 초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요셉처럼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다(창 41:14). 그렇지만 사울처럼 준수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마는 정직하게 보였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의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고 했다(12절). 말하자면 그는 해맑은 안색과, 좋은 눈과 그리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목구비는 뛰어나고 보기에 매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애써 꾸민 것이 없고 오히려 직무상 햇볕과 바람 속에 자신을 드러내 놓고 지나게 하건마는 자연이 가져다 주는 아름다움은 그의 성품까지도 상냥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마 다윗이 사무엘 앞에 나타났을 때 사무엘이 그를 매우 정중하게 대해 주는 데 놀라서, 수줍음 때문에 얼굴이 홍조(紅潮)를 띠은 것이 오히려 그를 더 멋진 사나이로 보이게 한 것인지 모른다.
4.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의 귀에 다 대고(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9:15) "이가 바로 그가 기름을 부을 자라" 고 말씀하여 주셨다(12절). 사무엘은 그가 배우지 못했거나, 너무 젊거나 또는 그의 가족들에게서 무서워하거나 하는 점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름뿔을 취하여 "그에게 부었다" (13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1) 사울이 죽으면 왕국을 그가 다스리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하셨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왕권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그에게 이양될 것이다.
(2) 왕국을 다스리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그에게 하늘의 은사와 은혜를 내려 주시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야로 합당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시는 것이다.
다윗은 "그 형제 중에서(in the midst of)"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아직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지명받은 것인 줄 몰랐으며, 그러므로 (요셉과는 달리)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형제들은 그에게 주어진 장래의 영광과, 또 채색된 옷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패트릭(Patrick) 주교는 이 말을 "사무엘이 그들 형제들 중에서 나오게 하여 기름을 부었다(He anointed him from the midst of his brethren)" 라고 읽는다. 그것은 사무엘이 다윗을 형제들 가운데서 따로 불러내어 비밀히 기름을 부어, 형제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단지 그 자신만이 알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엘리압이 아무 것도 몰랐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17:28). 이 때의 다윗의 나이는 20세이었다고 계산이 나왔다. 그렇다면 사울 때문에 받은 그의 고통이 약 10년 가량 계속되었을 것이다.왜냐하면 그의 나이 30세에 사울이 죽었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그 때의 다윗의 나이는 25세 쯤이었고 그의 고난은 5년간 계속되었다고 보았다.
5. 기름부음에 이어 좋은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그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13절). 그가 받은 기름부음은 빈 의식이 아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하늘의 능력이 언제나 그와 함께하였다. 그리고 그의 외적인 환경은 변한 것이 없어도, 내적으로는 왕의 자질인 지혜와 용기와 그리고 나라의 일들에 대한 관심이 크게 싹터 오는 것을 자신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그로 하여금 그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이었음을 크게 확신하게하여 주었을 것이다. 우리가 영광의 왕국에 들어가도록 예정되었다고 하는 그 가장 좋은 증거는 우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받았다는 것과 또 마음 속으로 은혜의 활동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사자나 곰을 맨 손으로 잡은 용기나 또 뛰어난 음악의 재주들은 모두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셨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였다고 한다. 하여간 그는 이스라엘에서 노래 잘하는 자가 되었다(삼하 23:1).이 일을 끝낸 후 사무엘은 무사히 라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외에는 (19:18), 한 번도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의 홀이 유다 지파로 돌아가고 그의 눈이 그 구원을 보았기 때문에, 평안히 죽기 위해 은퇴하였다.
악신이 들린 사울(사무엘 상 16:14-23)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몰락과 다윗의 번영을 볼 수 있다.
Ⅰ. 여기에 보면 사울은 스스로가 공포를 조성하였다(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났다." 사울이 하나님과 그의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바른 심판으로서, 지금까지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나 또 싸움을 할 때 그를 도와 주고, 용기를 주고, 그에게 모든 것을 지시하여 주던 선한 신을 그에게서 철수 시키셨다. 그는 그의 모든 좋은 자질들을 잃어 버렸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저버린 결과요, 그가 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증거였다. 이제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삼하 7:15 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의 은총을 빼앗았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신이 우리를 떠나가면 모든 좋은 것들도 아울러 사라진다. 인간이 악한 죄를 지어 성령을 슬프게 하고 이를 막아 버리면, 성령은 그 사람을 떠나고, 그를 위해 애써 주시지 않으신다.
이 결과 "하나님의 부리신 악령이 그를 번뇌케 하였다." 선한 신을 쫓아내는 자는 당연히 악신의 밥이 된다. 만일 하나님과 그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시면 죄와 사탄이 우리를 다스린다. 악마는 하나님의 허락하에 그의 몸의 체질과 마음의 기질을 파괴함으로 그를 번뇌케 하고 그를 괴롭혔다. 그는 점점 더 초조해지고, 성미가 까다로와지고, 불평을 잘 토하게 되었으며 소심해지고, 의심을 잘 품는 수가 있게 되었으며, 때로는 깜짝 놀라서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조세푸스(Josephus)는 말하기를 그는 마치 목이 졸려 질식할 것 같은 모양이 되었으며, 경련으로 완전히 귀신 들린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런 것 때문에 그는 자기의 임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그의 권위도 떨어지고,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주위 사람들의 짐거리가 되었다.
Ⅱ. 다윗은 여기서 사울을 고쳐 주는 의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궁전으로 불리어 가서 아무도 고칠 수 없었던 사울의 흉악한 질병을 고쳐 주었다.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왕으로 기름부음를 받았다. 다윗에게는 궁전으로 가서 왕궁내의 모든 세계를 들여다 본다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 자신이나 그의 친구들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펴기 위해 수고하도록 부르신 사람에게는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은혜 가운데서 그 길을 마련해 주신다. 사울은 병들었다. 그의 신하들은 그의 병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는 것" 이라고 솔직하고 용감하게 말했다(15절).
1. 사울의 신하들은 그의 병을 고치는 방법으로 음악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면하였다(16절). "당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수금 잘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런데 여호와의 부리신 악령이 그를 괴롭힌 것이기 때문에, 참다운 친구들이라면 사울에게 참다운 회개를 옹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힘쓰라고 권했을 것이며, 또 사무엘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를 위해 기도해 주며, 하나님과 그의 사이에 중재하여 주기르 간청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였다면 지금의 병만 고칠 뿐 아니라,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 다시 돌아오시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사울로 하여금 즐거이 놀 수 있도록, 그의 병을 고쳐 주는 데만 힘을 썼다. 양심이 마비된 많은 사람들은 모든 영혼의 관심을 감각적인 기쁨에만 몰두하는 이런 방법에 의해 영원히 멸망 받는다.만일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좋은 충고를 줄 수 있는 선지자를 부르러 심부름꾼을 동시에 보내기만 하였다면, 그의 영혼을 고무시켜 주는 데 도움을주기 위해 노래 잘하는 사람을 불렀다는 것이 아직은 그렇게 큰 잘못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홀 주교가 관찰한 바와 같이) 그들이 주술의 힘을 이용하여 악신을 쫓아내기 위해 박수나 신접한 자를 부르러 보내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자 들이 그들의 괴로움 때문에 악마에게 물어보고, 지옥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다. 사탄을 따르는 사람들이 사탄의 손길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는 기적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2.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이 일을 위해 적합한 사람으로 다잇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그 추천은 다윗이 바로 사울로부터 왕국을 이어받을, 사울보다 나은 사울의 이웃이라고 사무엘이 말한(15:28) 사람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한 추천이었다. 여기서 다윗을 추천한 사울의 한 신하는 다윗의 훌륭한 인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18절). 그는 다윗에 대하여, 그가 준수하며 수금을 탈줄 알 뿐 아니라,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자라고 하였고, 더우기 (무엇보다도 그의 최고의 인품으로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신다" 는 것을 말했다.이로 미루어 보아서 우리는 비록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도 그가 시골 목장의 일에 되돌아 갔으며, 그의 머리에 기름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비밀로 붙여 두도록 노력하였지마는, 기름으로 표상화된 성령의 활동은 숨길 수가 없었으며, 은근히 광채를 발함으로 그의 모든 이웃들이 그의 심령이 가진 급진적인 변화를 보고 놀라와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목자들의 누더기를 걸쳤으나 명사가 되었고, 용사가 되었으며,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사울은 그런 젊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14:52), 다윗의 명성은 곧 사울의 궁전에까지 알려졌다. 하나님의 성령이 어떤 한 인간에게 임하시면 그의 얼굴이 빛난다.
3. 이리하여 다윗은 사울의 궁전으로 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볼 수 있다.(1) 그의 아버지 이새는 즐거이 다윗을 보내며, 사울에게 선물도 아울러 보내기를 원했다(20절). 그 선물은 그 당시의 습관에 따라서 떡과 포도주를마련하였다(10:3, 4 과 비교하라). 그러므로 그 선물은 보내는 자의 존경과 충성심을 나타내는 예물이기에 받을 만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던 이새는 여기 하나님의 섭리가 실현되는 것인 줄을 알고, 그 섭리를 따라서 그의 아들을 기쁜 마음으로 보냈으리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네 아들 다윗을 내게 보내라" 는 사울의 전갈을 이새가 받았을 때, 그는 사울이 다윗의 기름부음을 알고 그를 해하려고 사람을 보낸 것이라고 추측하고 두려워했으며, 그래서 사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푸짐한 선물을 함께 보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이 다윗을 부르는 이유를 밝히 말해 주었기 때문에 이새가 잘못 생각했을리는 없다고 보여진다.
(2) 사울이 다윗에게 친절을 베풀었다(21절). 사울은 "그를 크게 사랑하였으며", 그리고 그를 "자기의 병기 듣 자로 삼았고", (보통 임금들이 하는 방식과는 달리, 8:11)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22절), "다윗으로 내 앞에 모셔 서게 하라" 고 요청하였다. 다윗은 또 사울로부터 존중함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음악을 가지고 사울을 위해 크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23절). 여기에는 다윗의 수금 연주에 관한 언급만이 있지마는, 조세푸스(Josephus)가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다윗은 수금에 맞추어서 입으로 노래도 불렀으며, 그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노래였다고 한다. 다윗의 노래는 사울의 질병을 고쳐 주었다.
[1] 음악은 흐트러지고 우울해졌던 마음을 안정시키고 상쾌하게 하여 주는 자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엘리사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자 하였을 때 음악을 이용한 바가 있다(왕하 3:15). 어떤 사람은 음악을 통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영향과 감화를 받는데, 사울이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음악은 악신에 대해 어떤 마법을 거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그의 영혼을 진정시키며, 악마가 이용하는 동물적인 심령의 소란함을 가라앉힌다. 태양의 광선은 칼로도 짜를 수 없고, 물로도 끌 수 없고, 바람으로도 불어버릴 수 없다. 그러나 덧 창문을 닫아 버리면 방 안에서 쫓아낼 수 있다. 음악은 악마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작용을 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악마가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릴 수는 있다.
[2] 다윗은 음악에 대해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다웁게 궁전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연주의 솜씨를 성공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 하여 주셨다. 사울은 다윗에 대해 적의를 품은 뒤에도 다윗이 할 수 있는 수금 연주를, 다른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9:9, 10). 그것이 사울로 하여금 다윗에 대해 더욱 난폭하게 하였는 지도 모른다. 인간의 선량한 기질을 위해 봉사하도록 창조된 음악을 가지고 혀영과 사치를 위해 잘못 사용하며, 이를 가지고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누구든지 음악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면 그 음악은 악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영을 쫓아버리는 결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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