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무엘상 0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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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궤를 돌려 보내기로 작정함(사무엘 상 6:1-9)

제 6장의 맨 처음에 나온 말은 여호와의 궤가 얼마나 오랫동안 노획당했었던가를 말해 준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라" 고 되어 있다. (원래는) "블레셋 사람의 들"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추측하고 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여러 성읍에 다 보내보았지만 그 때마다 그 곳 주민들이 재앙을 입는 것을 보고 드디어 그들은 그것을 빈들로 내보내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도 역시 많은 쥐들이 나와서 거의 익어서 추수할 때가 다 된 곡식들을 망쳐 놓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의 심판을 통해(5절), 그들이 그 궤를 어디로 가지고 가든지 그들이 그 궤를 노획하고 있는 한 그들이 저주를 당하리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하여 주셨다.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 (신 28:16). 그러나 우리는 기록된 대로 단순히 "블레셋 사람의 지방" 이라고 보아야 한다.

1. 궤를 빼앗김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현현의 징조로서의 징벌을 일곱 달 동안 받았다. 여호와의 궤가 없는 회막은 얼마나 텅빈, 허전한 것으로 보였을까! 거룩한 도성이 얼마나 쓸쓸하였으며, 거룩한 땅이 얼마나 황폐하였을까? 그 일곱 달이란 기간은 선한 백성들, 특히 사무엘에게 있어서 매우 우울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궤가 어디에 있든지,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며,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공적인 의식에서 위로받을 길이 막혔을 때에도 믿음과 기도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궤가 비록 멀리 있어도 하나님 자신을 우리 가까이 모실 수 있다.

2.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가 나타남으로 오히려 일곱 달 동안 징벌을 받았다. 그들이 그것을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내지 않는 한 그들은 재앙을 면할 수가 없었다. 죄인들이 그들의 죄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한 그들은 계속 비참한 생활을 면할 길이 없다. 바로의 마음이 그렇게 강퍅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일찌기 떠나가게 하였던들 애굽이 당한 재앙은 열 가지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돌려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여호와의 궤를 붙잡고 있는 한, 달리 치료할 길은 없었다.

Ⅰ.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자문에 응하였다(2절). 그들은 지혜의 법과 또 제사법이나 속죄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리라고 추측되었기 때문이었다. 탁월한 종교 의식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이웃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율법이나 관습에 익숙하였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문을 받은 것은 잘한 일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어떤 백성이든지 그들의 제사장들의 입에서는 모든 대답이 나오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존경한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예언자가 있었을까? 우리에게는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여호와 앞에 이를 수 있으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가" 고 물어야 한다.

Ⅱ. 그들은 만장일치하는 가운데서 충분한 충고를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그들 나라의 방식대로 공식적으로 이를 자문하지 않았다.

1. 그들은 바로와 애굽인들의 경우를 볼 때(6절), 그 궤를 돌려보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내어 주기가 싫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궤를 멀리 두고 좀더 시험해 보기를 원했을는지 모른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렇게 쏘아 붙였다 ."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들은 모세의 역사를 잘 알며, 그것을 마음대로 인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것을 잘 이용하여 우리도 완악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를 지연시켜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그들처럼 강퍅케 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애굽인들은 드디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블레셋 사람들은 드디어는 궤를 돌려 보낼 수 밖에 없도록 굴복당할 것이다.

2. 그들은 그 궤를 돌려 보낼 때 속건제의 제물도 함께 보내라고 충고하였다(3절). 다른 백성들의 신은 어떤 신이든지 간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으며, 그 하나님은 그 자신의 백성에게 속죄제와 속건제를 엄히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궤가 붙들려 갔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진노하시리라는 것을 알알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며, 그리하지 아니하면 병이 낫지 못하리라" 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상을 입은 의로움은 반드시 보상을 요구한다. 자연의 빛조차도 인간에게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 배상품을 어떤 것으로 할 것인가를 궁리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의 생각대로 완전히 잘못 처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이 궤에 대해서 행한 것 같이, 불의로 진리를 막은 사람들은(롬 1:8), 그들이 상처를 입힌 사람과 화해할 길은 오직 속죄제를 통하는 길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의 방법으로 죄를 없이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3. 그들은 이 속건제의 제물이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은 형벌을 사죄하는 것이 되도록 지시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굴복당하고 범죄한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였으며, 가장 능하신 정복자이시며, 가장 의로우신 복수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화를 돌려 보내게" 하였다(5절).

그들은 "독종" 의 형상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것은 곧 그들이 괴롬을 당한 종기와 화농인데, 그러한 치욕적인 질병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스스로 길이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시 78:6). 다음에는 또 "땅을 해롭게 하는 쥐" 의 형상을 만들어야만 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승리의 날에도, 그처럼 보잘 것 없는 작은 짐승을 가지고도 그들을 혼내주고 꺾어 버릴 수 있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인정하고 것이다. 이런 형상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화목하여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값비싼 금속인 금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들은 "아무리 좋은 금" 을 사용하더라도 조금도 값비싼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 금독종" 의 숫자는 "방백의 숫자" 에 따라서 다섯이어야만 했다. 그들은 아마 피해를 받은 사람들일 것이며 그러한 결정에 만족했을 것이다. "금쥐" 도 역시 다섯 개를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온 땅이 그 피해를 입었으며, 금쥐의 수는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의 수와 같다는 두번째의 생각으로 볼 때(18절), 그 숫자는 그 이상이었다고 보여진다.

제사장들은 "그들 모두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 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재앙을 당한 것으로 볼 때 다 같이 죄를 범했다는 것이 명백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죄과에 대해서 속건제를 드리도록 제안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충분히 하늘의 계시에 따라 순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러한 속건제의 제물로 그와 같은 물건들을 보낸다는 것은 매우 일방적인 태도였다. 그리고 그들이 모세의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화해의 방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대속을 위해서는 금이 아니라, 피가 요청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그들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런 방법이 바로 재앙을 면하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소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병도 나으리라" 고 하였다(3절). 그들의 의사가 처방하여 준 치료법은 그처럼 완강한 질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그 궤를 그들에게 돌려 보내라. 그리하면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다시 말하면 너희가 궤를 돌려보냄으로 재앙이 그친다면, 너희에게 내려졌던 질병이 바로 너희가 그 궤를 붙잡아 둠으로 인해 발생하였던 것임이 명백히 드러나리라."

하나님은 때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개과천선이 그들의 구원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시험해 보라고 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보라" 고 하셨다(말 3:10; 학 2:18, 19).

하지만 그들은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에게 대해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라는 식으로 의심적게 말했다(5절). 그들은 이제서야 겨우 그 궤를 속히 돌려보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오는 심판이 임하실 것이며, 그렇게 하면 자비하심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원인 을 제거해야 작용하는 힘을 중지시킬 수 있다.

5. 하지만 그들은 그들에게 내린 재앙이 정말 이스라엘 하나님의 손에서 온 것인가 아닌가를 좀더 시험할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들은 궤를 위해서 새 수레를 마련하고, 날마다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던 두 젖소로 하여금 이를 끌게 하였다(7절). 그 소들은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으며, 그들이 먹이를 먹던 구유를 위해서나 그들이 먹이던 송아지들을 위해서 집안에 있고 싶어 하던 소들이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로 가는 낯선 길을 향해 가야만 했다.

그 젖소들은 끄는 사람이 없이 자기들끼리만 찾아가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 소들이 자기 집을 향해 도로 올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이 기적처럼 역사하여, 그 소들로 하여금 자연적인 동물의 본능에 거슬러 가면서도 이스라엘 땅, 구체적으로 말하면 벧세메스로 가게끔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을 취소하며, 그들이 당한 재난은 하나님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들에게 임한 것" 이라고 믿고자 하였기 때문이다(8,9절).

이처럼 하나님은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셨으며, 시험을 당하셨다. 그들이 신 다곤이 이러한 모욕을 당했을 때 그들은 그래도 좋다고 만족할 수 있었을까? 악인들이 얼마나 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정죄의 손길을 피해 보려고 애쓰며, 그들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도 "우연한 것" 이라고 얼마나 믿고 싶어하는가 보라! 만일 그렇다면 그 채찍은 그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소리는 아무 것도 들려 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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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가 돌아옴(사무엘 상 6:10-18)

Ⅰ. 블레셋 사람들이 궤를 돌려보낼 때 어떻게 돌려보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준다(10,11절).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빼앗아 왔을 때만큼 그것을 떠나 보낼 때도 기뻐하였다. 하나님은 그 궤를 한 가정의 속박에서부터 이끌어 내셨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포로된 신세로부터 이끌어 내셨다. "애굽인들도 이스라엘이 떠날 때 이를 기뻐하였다" (시 105:38).

1.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상당히 많은 액수의 보상금을 요구할 수 있었는데 도, 아무런 댓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고레스에 대한 예언도 이와 마찬가지였다(사 45:13). "그가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2. 아니 오히려, 애굽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쫓아 내면서 행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금은 보배를 보태어 주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패전의 전리품 모양으로 블레셋 땅으로 이끌려 갔던 하나님의 궤가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불명예를 영원히 기념하게 하는 자신의 전리품을 이끌고 돌아왔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궤에 거슬러 행동하는 교회의 원수들이 아무리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로 말미암아 결코 자신의 영광에 손상을 입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드디어는 자기를 경멸하는 자들에게서 자신의 명예를 되찾으시는 분이시다.

Ⅱ. 그 소들이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이스라엘 땅으로 모시고 왔는가를 보여 준다(12절). "그것들은 벧 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였다." 벧세메스는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이스라엘의 성읍이었으며, 제사장의 성읍이었다. "그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

이것은 미물 짐승까지라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보여 주는 산 예증이다.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소들이 어떻게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곧장 앞으로 끌고 갈 수 있었는지,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기적 이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이끄는 자도 없이, 본능적으로 늘 향하게 되던 자기 집을 떠나며, 더우기 자기들의 송아지가 있는 집을 거슬러서 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끌고 가는 자도 없이 8~10마일 밖에 있는 벧세메스로 곧장 가야만 하였다. 더우기 길을 헛딛지 말며, 무엇을 먹으려고 길 옆으로 내닫지도 말아야 했으며,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려고 집으로 돌아가도 안 되었다.

그 소들은 새끼들을 생각하고 음매 소리를 내며 울면서 갔다. 그들이 결코 새끼 송아지들을 잊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연적인 본성은 비록 짐승이라도 새끼를 두고 떠날 때 비탄을 금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연의 강한 충동을 이기기 위하여 더 능력 있게 역사하셨다.

이 두 마리의 젖소에 대해 라이트프트(Lightfoot) 박사는 말하기를 그들은 그들의 위대하신 임자를 알았다(사 1:3)고 하였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임자를 알지 못했다. 나는 이에 대해서 그 젖소들은 하나님의 궤를 되돌려 오기 위해 아무 일도 해 보려고 시도하지 않은 어리석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로 그 궤를 되돌려다 주었다고 덧붙여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록 미물 짐승의 행동까지라도 철저하게 이끄시며, 그것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뜻을 펴신다.

블레셋의 방백들은, 상당한 수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놀라와하면서 그 소들을 뒤따라 갔다. 한 때는 하나님의 궤에 대해 승리자로 군림하였던 저들이 이제는 마치 머슴 모양으로 그 뒤를 따랐던 것이다.

Ⅲ. 이스라엘 땅에서 그 궤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보여 준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밀을 추수하고 있었다" (13절). 그들은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가 알아 보지도 않았다. 만약 그들이 관심을 나타냈다면 그들은 그가 궤가 돌이오기 전에 이를 은근히 나마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이를 맞이하러 갔을 것이며,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땅으로 이끌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집은 황무하게 하고 자기 집은 단장 하기에 바빴던 사람들" 모양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원수가 방해하건, 그의 편 사람들이 협력을 하지 않건 간에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그의 교회를 구원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가 돌아올 때 이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한가하게 놀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들에서 밀을 거두며 부지런히 일하고 있던 사름들이었다는 데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쁜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들은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 마귀는 게으른 사람을 유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지런히 일하는 자에게 은혜를 끼친다.

젖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땅으로 곧장 오도록 이끄신 보이지 않는 손이 이번에는 그 소들을 여호수아의 밭으로 인도하여 그 밭에 이르러 서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소들이 거기에 선 것은 그 밭의 주인이 선한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곳에 서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큰 돌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러 선 것이라고 보고 싶다. 그 돌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기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그 돌에 대해서는 여러번 언급이 되었다(14,15,18절).

1. 거두는 자들이 "궤를 보았을 때 기뻐하였다" (13절). 그들의 기쁨은 밀을 거두는 기쁨보다 더 컸다. 그리하여 궤를 환영하기 위하여 그들의 일거리를 버려둔 채 마중 나갔다. 여호와께서 그 궤를 포로 가운데서 돌리실 때 "그들은 꿈꾸는 자 같았으며, 그들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였다" (시 126:1, 2).

비록 그들은 궤를 도로 찾아오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보상해 오기 위해 열심을 다하지 못하고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그들은 충심으로부터 이를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궤가 돌아오며, 억압과 환난의 날이 지난 다음에 거룩한 의식이 다시 시행되게 될 때,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으리만큼 클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젖소를 잡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으며 수레의 나무를 패서 번제의 불을 피우기 위한 장작으로 삼았다(14절). 아마 블레셋 사람들도 처음에 궤를 돌려보면서 이것들이 그들이 드리고자 하고 속건제의 제물 일부가 되기를 바랐었는지도 모른다(3,7절).

하여간 벧세메스 사람들은 이것들을 보자, 이를 바르게 사용할 방법을 알아차렸다. 그것들이 만일 다른 데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바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물을 운반했던 수레는 절대로 다른 세속적인 물건을 운반할 수는 없다. 소들 역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은 바가 있은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따라서 모든 번제물은 숫놈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록 암놈일지라도 번제로 드려야만 했다.

3.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보내온 보물 상자와 함께 하나님의 궤를 들판에 있는 큰 돌 위에 놓았는데 여호와의 궤를 모실 자리로는 너무 냉냉한 곳이며, 너무 보잘 것 없는 곳이다. 하지만 다곤의 신전이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것보다는 좋다. 하나님의 궤는 장엄하고 광채가 빛나는 환경 속에 거처를 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있는 것보다는 나무가 우거진 돌과 큰 돌 위에 있고 것이 더 낫다.

비록 그 제사를 드리는 장소가 보잘 것 없고, 누추한 곳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사법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그 장엄함은 우리의 눈에 보기에 조금도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궤를 싣고 온 수레를 태워서 그 소들을 번데로 드린 것은 다시금 그들의 궤가 이스라엘 땅 밖으로 실려 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그들의 소원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으며, 또 그 궤를 큰 돌 위에 놓은 것은 그 궤가 이제는 굳건한 터전 위에 터잡아지기를 바라는 그들의 희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는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웠졌다.

4.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어떤 사람들은 따로 흙으로 제단을 쌓지 않고 그 큰 돌 위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으로 본다(15절). 이 때의 제사는 특별한 제사였다. 여기서는 회막에 있는 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법이 지켜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마 그때 실로가 무너져 황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쓰러내렸다. 그리고 가장 귀한 영광은 여기에 그들과 함께 있었다.

벧세메스는 단 지파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지만 그러나 유다 지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궤가 이 곳으로 운반되어 온 것은 우연한 사건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 동안 그 궤를 두시고자 하는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요셉의 장막을 거절하셨을 때, 유다 지파를 택하셨다(시 78:67, 68). 벧세메스는 유다 지파로부터 떼어 "다른 자손" 에게 준 땅이었다(수 21:16). 어떻게 해서 궤가 제사장의 성읍으로 온 것일까 ? 아마 그것은 이미 그 고장에서 궤를 내려놓고 번제를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단지 "레위인" 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15절), 그들은 제사장들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 블레셋의 방백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심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은 채 에그론으로 돌아갔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곤 신의 예배를 저버릴 수 없었다. "어느 나라나 비록 신이 아니지만 그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바꾸어 섬긴 일은 거의 없다" (렘 2:11). 그들은 비록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마땅히 거룩하시며, 영예로우시며, 두려워할 만한 분이시며, 찬양할 만한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하기는 하면서도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그들은 생각해야 하며, 그 신이 곧 자기들이 신이기 때문에 떨쳐 버릴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6. 그 큰 돌이 같은 곳에 계속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들은 그 날까지도 거기 있었다고 한다(18절). 그 돌이 그대로 간직되었던 까닭은 그런 위대한 사건을 길이 기념하는 것이었으며, 후손들에게 전승되는 역사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돌은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부터 돌아왔을 때 안치되었던 그런 돌이다. 그 일은 결코 잊어 버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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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 사람들의 범죄와 형벌(사무엘 상 6:19-21)

1. 여기에는 벧세메스 사람들의 범죄가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았다" (19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깊은 숭배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궤는 휘장 안에 가리어져 있으며 대제사장까지라도 일년에 단 한 번만 그것도 향의 연기 속을 통해서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아마 이런 것 때문에 그처럼 많은 사람이 와서 보았을는지 모른다(그것은 금지된 것은 더욱 하고 싶은 인간의 심정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떤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것이 공개되었던 것보다도 더 그 궤를 볼 때 기뻐하였는지(13절) 모른다.

하지만 단지 보는 것만으로 그들은 만족치 않았다. 그들은 단지 보기만 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의 일을 행했다. 그들은 아마 못박아 놓았을는지도 모르는 그런 포장을 뜯어 제키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아마 블레셋 사람들이 증거의 두 돌판을 없에 버린 것이 아닌가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감추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그런 것을 더욱 보고 싶어하는 그들의 죄악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보잘것 없는 인간이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은 비밀한 것을 알아보고 캐려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모욕하는 것이다(신 29:29; 골 2:18).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금지된 지식을 탐하다가 멸망받았다.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본 커다란 죄는 하나님의 궤를 우습게 본 데서부터 나온 것이다. 이 경우 지나친 친밀함이 결국 멸시와 불경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들은 아마 제사장들이 하는 모양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 직분의 위엄이 보상되었나 하면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성물에 대한 불경을 한층 더 심하게 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들이 먼저 시범을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멀리 떨어져서 하나님의 궤를 경외심을 가지고 우러러 보게 가르쳐야만 했다.

그들은 아마 그들이 베푼 궤에 대한 환대와 그리고 궤가 본토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여 그들이 드린 번제 때문에, 다시 말해서 그들이 그 궤를 위해서 행한 바가 많기 때문에 그 궤를 드려다보는 것으로 보상을 받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한 바가 많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것에 대한 그의 불경과 무례가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들은 아마 그 궤가 포로에서 갓풀려 나오고 아직 안주하지 못한 현재의 환경이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기에 그렇게 행한 것인지 모른다. 지금 그 궤는 차디찬 돌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거리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이 보잘 것 없이 시행된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명령 자체를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바르게 보며, 순전히 그 겉 모양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궤가 그 어느때보다도 지금 바로 그 위엄이 극치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궤는 그 자신의 능력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이기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무덤을 벗어나듯이) 그 속박을 벗어났다.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생각했다면 그들은 보통의 궤를 드려다보듯이 하나님의 궤를 드려다보지 않았을 것이다.

2. 여기에는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의 기록이 있다. "여호와께서 벧세메스 사람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궤의 면목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질투를 많이 부리신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자기에 대한 모독을 용서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그는 속임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그의 은혜의 표를 두려운 마음으로 사용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노여움의 표를 받게 된다. 금지된 것을 캐보려고 하며, 거룩한 불에 너무 가까이 가는 자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오만 칠십인을 치셨다." 여기 살륙당한 자의 숫자는 원래 이상한 방법으로 기록되었다. 그 처럼 많은 사람이 범죄했으며 그리고 살륙당했겠느냐는, 그 불가능 때문에 그 본문이 바르게 기록된 것인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원래는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또는 사이에서) 칠십인, 오만인을 치셨다" 고 되어 있다. 시리아와 아라비아 역본에는 "오만 칠십인" 이라고 되어 있다. 갈대아 역에는 "장로 칠십인과 일반인 오만" 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칠십인의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오만명과 막먹는 것" 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은 또 칠십인은 궤를 들여다 본고로 살륙을 당한 벧세메스 사람의 숫자이고, 오만은 궤 때문에 살륙을 당한 블레셋 지방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스무명에 한명씩 죽어가는 대량 학살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이 칠십인 즉 천명 중에서 오십명을 살륙하셨다" 라고 본다. 칠십인역은 오늘날 우리가 가나아가 성경과 같이 "하나님이 오만인과 칠십인을 치셨다" 고 되어 있다. 그런데 조세푸스(Josephus)는 단지 칠십인이라고 말했다.

3. 벧세메스 사람들을 휩쓴 무서운 공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라고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20절). 어떤 사람은 이러한 말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여 주셨다는 불평을 하나님께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죄에 대해 책망하지 않고, 이와 비슷한 경우에 "다윗이 분하게" 여겼던 것과 같이 (삼하 6:8, 9), 하나님과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불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경외어린 찬양이라고 본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여겼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판단 앞에서 "누가 감히 이 궤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고 말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청함을 받고, 격려를 받고,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쟁론하기 위해 그의 앞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감히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 설 수 있으며, 그것을 바로 쳐다볼 수 있겠는가?(딤전 6:16) 누가 감히 굽힐 수 없는 정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설 수 있으며, 자기의 옳음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시 130:3; 143:2) 하나님께서 강한 팔을 휘두르실 때 누가 감히 그 앞에 설 수 있으며 그 매를 맞고도 버티고 설 수 있겠는가?(시 76:7)

4. 그 궤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자 하는 그들의 원함을 기록하고 있다.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라고 그들은 물었다(20절).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화목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그의 은혜를 되찾을 수 있는가?" 하고 물었어야 했을 것이다(미 6:6, 7). 그러나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궤에 대하여 진저리를 치기 시작하였다. 만일 이때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정중히 모셨다면, 하나님의 궤가 그를 가운데 자리를 잡고, 이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의 양심에 공포로 임하자, 그들은 자기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말씀에 대해 쟁론을 제기하며, 이를 멀리 하였다(렘 6:10).

그들은 그들보다 훨씬 고지에 있는 강한 성읍 기럇여아림의 장로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들이 내려와서 하나님의 궤를 그리로 가져 가라고 요청하였다(21절). 그들은 감히 그들이 손을 대서 이를 가져다 주려고도 하지 않고, 위험한 물건으로 생각하고 다만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만 하였다.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은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달으며, 완고한 철면피에서 비굴할 정도의 수치심으로 곧장 달려갔다.

"삼림의 성읍" 인 기럇여아림은 유다 지파에 속해 있었다(수 15:9; 60). 그리고 벧세메스로부터 실로에 이르는 길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궤를 가지고 가라고 사람을 보냈을 때, 우리 생각에, 그들의 생각은 그 궤를 실로의 장로들이 가져 가기를 원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궤가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옮겨지며 아무도 정식으로 돌봐주는 이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아직 이스라엘 왕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6:20 없음.

 

6:21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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