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셋과의 싸움(사무엘 상 4:1-9)
사무엘과 관련된 이 부분이 첫 마디 말씀은 "그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 는 것인데, 이는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와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그들이 블레셋과 싸우러 간 것은 사무엘의 어떤 지시에 의해서 간 것임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비록 그가 새롭게 등장한 선지자이긴 했어도, 그에게 의논하였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 놓은 것보다 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그를 무시하였으며, 그를 통해서 신탁을 구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아직 공적인 일에 자신을 개입시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그로부터 몇 년 후에야 다시 들을 수 있으며(7:3), 여기서는 다만 "그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 고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온 땅에서 모여드는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들만이 그를 의지하였으며, 그에게 의논하였던 것이다.
또는 그의 말이란 엘리의 집에 대한 그의 예언을 의미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예언을 알고 이야기 하였으며,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 예언과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비교하여 보며, 그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Ⅰ. 블레셋과 싸움이 벌어졌다(1절). 이 싸움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멍에를 벗어 나려고 하는 시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회개하고 자신들을 개혁하였더라면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며, 바르게 시작하였으면 좋은 결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싸움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40여년 동안 다스리는 기간의 (삿 13:1) 중간쯤에 일어난 것이며, 삼손이 죽자 얼마 안 되서 일어난 것이라고 패트릭(Patrick) 주교는 계산하고 있다. 그는 생각하기를 삼손이 죽으면서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살륙한 것이 크게 이스라엘을 고무하여 이런 싸움을 시도하게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엘리가 오랫동안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을 보아서(18절), 이 싸움은 삼손이 죽은 후 40년 후에 일어난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다.
Ⅱ.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패배하였다(2절). 공격해 들어가던 이스라엘이 오히려 크게 살륙당하였고, 그 싸움에서 4천명 가량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한사람이 천 명을 상대하여 무찌를 수 있으리라고 약속하여 주셨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였다."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는 가증히 여길 죄악이 편만하였으며, 따라서 이스라엘이 바라던 승리가 그들의 원수에게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Ⅲ. 그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다. 작전 회의가 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들의 생활을 고치지는 않고 다른 짓들만 하였다. (그런 선생들 밑에서 배웠으니만큼) 그들은 잘못 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그들은 싸움에 진 것을 두고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하였다(3절).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패하게 하셨는가?"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게 된 그 까닭을 참으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이 비록 이를 시인하고자 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분명히 죄를 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뻔뻔스럽게 충고하고자 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항쟁하고자 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며 하나님께 항쟁하고자 하는 것같이 보였다.그들은 그들의 괴로움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시인하였다(이것만은 그들도 바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를 패하게 하신 이는 여호와시다" 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대신 이에 대해 항의하였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노여움을 표시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을 노엽게 한 진실한 까닭을 알아보고자 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우리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앞에 패하였는가?" 라는 말은 진정한 까닭을 알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 대해 그 처사가 온당치 못하다고 불평을 토로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도 마음으로 는 여호와를 원망한다" (잠 19:3). 그리고 잘못이 하나님께 있다고 불평한다.
2. 그들은 하나님께 궤를 그들의 진영으로 가져 오면 다음 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리석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그런 제안을 하였고(3절), 백성들은 재빨리 그렇게 하였다(4절).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 오도록 실로에 사람을 보냈다. 엘리는 감히 이를 반대하지 못하고 그의 불경스런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함께 보내 주었다. 아마 엘리는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을 따라 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1)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를 존중히 여기고 있었다. "오! 이를 가져오게 하라.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고 그들은 생각했다. 하나님의 궤란, 제도적인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임제를 나타내는 가시적인 상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룹들 사이에 계시겠다" 고 말씀하신 바가 계시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궤 위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궤와 함께 어디로든지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이 신성한 궤에 대해 그들의 존경심을 최대로 표시하면,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임을 확실히 나타낼 수 있으며 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종교의 진수에서 떠난 자들은 흔히 외적인 종교의 형식만을 좋다하고 이에 집착하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자도 그 형식만을 취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전을 찬양하며, 여호와의 궤를 열심히 붙들고 있지만 그 전의 주인이신 여호와와 그 궤의 임자이신 하나님은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기독교라는 그 이름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표시하면 그 기독교 자체를 무시하여도 상관않는 듯이 행하고 있는 것과 같다. 더우기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우상화하였으며, 그것을 바라보기를 마치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의 형상을 바라보고 예배하듯 한갖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 보았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은 그를 전혀 예배하지 않는 것과 같다.
(2) 그들은 하나님의 궤에 대해 엄청나게 잘못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그들의 진영에 가져오기만 하면, 그 궤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이며",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궤가 행진을 시작하여 떠날 때에 모세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라고 한 바가있다(민 10:35). 그들은 그 궤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사 그들을 성공시켜 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사 그들을 돕게 하는 데는 달리 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알맹이가 없을 껍질만의 궤가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2]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움직여도 좋다는 허락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주할 때 그의 궤를 그가 지시하는 곳에 두라고 그의 율법에서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시하였다(신 12:5, 11).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으로 와야지, 하나님의 궤를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져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여도 좋다는 정당한 법적 근거가 없으며 또 그것을 있는 곳으로부터 옮겨도 좋다는 허락이 없는데 이를 마음대로 옮긴다고 해서 어떤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를 욕되게 할 뿐이다.
[3] 가령 그들이 하나님의 궤로부터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자. 하지만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은 사람들로 이를 가져오게 할 때 그들은 어떤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하나님의 궤가 그처럼 배은망덕한 제사장들의 손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에 대해 어떤 도움을 준다면, 이는 그들의 잘못을 인정해 주는 결과과 될 것이다.
Ⅳ. 하나님의 궤가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진영에는 큰 기쁨이 터져 나왔다. (5절).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렸다." 그들은 이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도 치르기 전에 승전가를 높이 불렀다. 그들은 이처럼 함성을 지름으로서 그들 자신들에게는 생기를 북돋아 주고, 대적들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승리는 확실한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육체적인 인간들은 종교의 형식적인 특전과 실행에 대해 개가를 올리며, 이것들을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들은 마치 이것들이 그들을 틀림없이 구원하여 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으며, 그들의 진영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보좌이신, 하나님의 궤가 그들을 하늘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Ⅴ. 이스라엘 진영에 여호와의 궤가 오게 되자 블레셋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군사들은 서로 매우 가까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진영에서는 이스라엘이 말썽을 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곧 이스라엘이 어찌해서 의기가 양양해졌는지 알 수가 있었다(6절). 그리고 그 때문에 오게 될 결과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1. 왜냐하면 전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이 그들의 진에 이르렀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화로다" 라고 말했으며(7절), 또 다시 "우리에게 화로다" (8절)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도 두려워 떠는 이름이었으며, 이스라엘과 싸우는 이방인들에게도 두려움이 되었다. 인간의 본능적인 인식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대항하시면 그들은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블레셋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보자. 그들은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궤가 그 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진영 중에 전혀 계시지 않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건전한 생각을 가지지 못했던 것인만큼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오! 이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취했던 어떤 전술보다도 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새로운 시도로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분명히 이는 우리 군사의 간담을 녹게 하고, 그들의 손목에 맥이 풀리게 하겠구나."2. 예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매우 큰 놀라움을 가져다 주었던 일을 기억하였다.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8절).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재앙들은 하나님의 궤가 작성되기 이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로 나오기 전에 내려진 것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이야기를 잘못 알고 있었으며, 또 그 놀라움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궤 자체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그 궤를 우상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블레셋 사람들은 그 궤를 하나님 자신이라고 잘못 알고,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능한 신들" 이라고 말하기는 하면서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농담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았다면 마땅히 후퇴하거나 아니면 강화조약을 맺을 차비를 차렸을 터인데, 그렇지 아니 하였으며, 오히려 서로를 고무하여 더 큰 함성을 지른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이 어려운 처지가 오히려 그들에게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니라" (9절)라고 서로를 고무하게 되었다. 블레셋 군대의 사령관들은 그들의 병사들에게 그들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으로 삼았던 것을 기억하게 하며, 만일 여기서 그들이 위축되어서 이스라엘의 종이 되면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인가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마음 속에서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이스라엘의 패전(사무엘 상 4:10,11)
여기에는 그 전쟁의 결과과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Ⅰ. 이스라엘이 싸움에 패하였다. 모든 군사들은 완전히 흩어졌으며 패주하였고, 전번처럼(2절) 다시 규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진영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살길 만을 찾아 각자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3만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이 살륙을 당하였다(10절).
1. 비록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들의 대적인 블레셋 사람들은 할례받지 못한 백성들이라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마는 이스라엘은 패배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와 자유를 지킬 수가 없었으며, 이를 지키는데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잘못 때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2.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커다란 확신을 가졌으며, 보다 용감할 수 있었는데도 그들은 패배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떨 때 그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매, 블레셋의 공포는 승리로 변했고, 이스라엘의 함성은 애가로 변했다.
3. 하나님의 궤가 그들과 함께 있었건마는 이스라엘은 패배하였다. 아무리 귀한 특권이라도 이를 남용할 때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하며, 그들을 살려 주지 못한다. 그들의 진영 가운데 아간이 함께 있는 한, 아무리 하나님의 궤가 거기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Ⅱ.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 때문에 먹고 살고 있기 때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 그 곁에 가까이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다" (11절). 이 비극을 시편 기자는 78편 61,64절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그 능력을 포로에게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도다."
1. 그들의 악한 인품을 볼 때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그다지 큰 손실은 못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엘리의 집에 대해서는 무서운 심판이 되었다. "네 두 아들이 한 날에 죽으리니 이것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2:34)란 예언과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3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만일 엘리가 자기의 책임을 다해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느 7:64) 하였다면, 그들은 구차한 삶이기는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들을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칼로 이 세상에서 좇아내게 되었다. "여호와는 심판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신다." 칼은 누구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특히 보복이라는 칼을 기다렸다.그들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못했다. 전쟁의 진영 가운데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 자기의 마땅한 본분을 떠나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스스로 막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런데 이것이 또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하나님의 궤를 위험한 곳으로 가졌왔기 때문에 이를 원수의 손에 넘겨 주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잘못됨이 얼마나 가증한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2. 그러나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대해 매우 커다란 하나님의 심난이 되었으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의 표시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악함으로 말미암아 특권을 상실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특권을 믿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 계시건만 하나님의 궤가 그들을 지켜 주리라고 믿었던 그 어리석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곳에서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가 위험한 곳에 내놓게 하였던 그들의 경솔함과 무력함에 대해 크게 후회하게 되었다.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망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지시를 받기를 원치 않으시매, 우리더러는 하나님의 궤에 얽매여 있게 하시면 서도 스스로는 하나님의 궤에 자신을 묶어 놓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어리석은 친구들에 의해 모욕당하기 보다는 차라리 원수들의 손에 자신을 맡기기를 더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나 감히 겉 모양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실 수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김을 받을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엘리의 죽음(사무엘 상 4:12-18)
블레셋 사람들에게 진 치명적인 패전의 소식이 실로까지 전달되었다. 나쁜 소식일수록 빨리 전달된다. 이 소식은 즉시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 각기의 장막으로 도망친 자들은 분명히 본 바를 이웃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하지만 어느 곳보다도 이 슬픈 소식은 실로에 즉시 전달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급히 실로에 급사를 보냈다. 그 사람은 베냐민 사람이었다. 유다인들은 그 사람이 사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썼다." 그는 그가 달려가는 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슬픈 소식임을 알려 주며, 또 그 자신도 매우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이런 표시를 하였을 것이다(12절). 그는 그 소식을 가지고 곧장 실로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기사들을 볼 수 있다.
Ⅰ. 그 성읍이 그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의 형편을 볼 수 있다. "엘리는 성문 곁에 앉아 있었다" (13,18절). 그러나 급사는 그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기가 꺼려서, 그의 곁을 그대로 지나쳐 가서 온 성에 슬픈 소식을 고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예언되었던 바 그대로,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렸다" (3:11). 그들의 가슴은 무서움에 떨었고, 그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온 성이 부르짖었다" (13절). 이것이 온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침통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실로의 멸망과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궤가 그 후 얼마되지 않아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아오기는 하였지마는, 다시는 결코 실로에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촛대가 그들에게서 옮겨졌으며, 그 성읍은 점차 쇠잔해져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실로의 성막을 떠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에게서 떠나 가시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를 그들 속에 간직함으로 340년간 축복을 누려왔던 에브라임 지파는 그 영광을 상실하였다(시 78:60, 67). 그리고 그후에 그 영광은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 으로 옮겨졌다(68절). 이는 실 로 사람들이 "그들의 은혜의 날" 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실로를 버렸던 일을 오랜 후에 예루살렘에 대한 경고로 이용된 일이 있다(렘 7: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실로게 가서, 내가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라." 그러한 까닭에 실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말을 듣고 부르짖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Ⅱ. 엘리에게 내려진 비참한 운명을 볼 수 있다.
1.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비록 나이가 많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았고, 몸이 둔했어도 이스라엘의 영광이 백척간두의 위험한 지경에 놓인 것을 알고는 그대로 자기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누구보다도 먼저 그 고식을 듣고자 하여 몸소 길가까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엘리의 마음은"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리고 있었다" (13절). 엘리의 세심한 마음은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며, 승리의 소식이 가드에 알려지며, 아스글론 거리에 전파되면, 이는 하나님께 얼마나 욕을 돌리며, 이스라엘에게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불운을 가져다 주게 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었다.엘리는 또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잘못 (특히 엘리의 아들들의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블레셋 사람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 속에는"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 이라(2:32)은 예언이 떠올라서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또 그의 마음은 그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궤를 전쟁하는 진영으로 끌고 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를 떨게 만들었다.
훌륭한 신자들은 모든 세속적인 일이나 자기 자신의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교회의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만일 하나님의 궤가 안전치 못하다면 어떻게 안심할 수 있단 말인가?
2. 엘리에게 전해진 소식은 슬픈 소식이었다. 그는 비록 볼 수는 없었지마는, 온 성이 "부르짖고" "훤화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이 애가요 슬픔의 노래요 탄식소리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심스러운 지도자다웁게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쩜이뇨" 라고 물었다(14절). 진중에서 되어진 모든 일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는 급사가 진중에서부터 왔노라는 대답을 엘리는 들었다(16,17절).이스라엘 군대가 패배하고, 많은 군사들이 살륙을 당하였다는 소식은 사사인 그에게는 매우 슬픈 소식이었을 것이다. 또 아버지로서, 비록 그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기는 했어도 그의 두 아들이 회개하지 못한 채 비명에 죽었다는 소식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 때문에 그의 마음이 그처럼 떨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심령은 그것들보다 더욱 큰 관심사에서 쏠려 있었다. 그 관심사는 다른 것들을 덜 생각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압살롬의 소식을 듣고 다윗이 취했던 것과 같이, 그의 아들들에 관한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고 해서 그 말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급사가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궤에 대한 소식을 틀림없이 말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엘리는 그가 이렇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나님의 궤는 안전합니다. 그것은 지금 도로 모셔 오는 중입니다." 그랬다면 그의 기쁨은 능히 다른 재난 때문에 오는 슬픔을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며, 이로써 안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급사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나이다" 라는 말로 그의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그 말을 듣자 엘리의 마음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의 심령은 낙담하였고, 그는 졸도하여 의자에서 넘어졌다. 그는 실신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였기 때문에 갑자기 죽고 말 한 마디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이 먼저 터지고 다음에 그의 목이 부러졌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요 사사인 그가 무참히 쓰러졌다. 이처럼 98년간 그의 목 위에 붙어 있던 그의 무거운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이처럼 40년 동안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한 그의 영광의 면류관이 그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처럼 그의 태양은 구름 속으로 가리워졌고, 그의 악한 아들들을 바로 잡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 자신이 넘어지고 쓰러지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 그 자신을 바르게 처신하지 못한 의인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불만의 표시를 나타내 보여 주시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가운데 경고로 삼게 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비참한 죽음을 죽지마는 영원한 죽음이 아닌 죽음을 당하는 수가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불의한 죽음을 죽되 평안하게 죽는 수가 있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엘리의 죽음이 대속받지 못했기 때문에 목이 꺾인 나귀 새끼의 죽음과 같은 것" (출 3:13)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엘리에 대한 칭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죽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궤와 함께 쓰러지게 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떠났는데 경건한 이스라엘이 어디에서 위로를 찾을 것인가?" 하나님의 궤가 없는 이 세상에서는 살 필요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비느하스 아내의 죽음(사무엘 상 4:19-22)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하나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엘리의 집이 처량해지는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이 몰고온 슬픈 느낌이었다. 또 그 이야기는 비느하스의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비느하스는 이 모든 재난을 이스라엘에 몰고 오게 한 장본인들인 엘리의 아들들 중의 하나이다. 그녀는 젊은 나이지만, 나이가 많은 그의 시아버지 엘리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생명을 바치게 되었다. 검은 머리도 흰 머리를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슬픔에 젖어 무덤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을 가져왔다. 여기에 나타난 기록에 의해 미루어 보면 그녀는 다음과 같은 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Ⅰ. 그녀는 매우 연약한 심령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녀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이르게 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19)라고 말씀하신 바 계시다. 그것이 비록 사내 아이라 할지라도 그 출산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은" 수태 못하는 이가 복이 있다" (눅 23:29)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행한 시기에 놀라운 소식이 전달되었다. 그 소식은 다른 커다란 공포와 또 슬픈 격정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주었다. 그녀가 존경하던 시아버지의 죽음과 또 아무리 나쁜 남편이라도 그녀가 사랑했던 남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더우기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부려 해산하였다. "(19절). 그녀에게는 온갖 도와주는 힘이 모두 필요한 때였는데, 오히려 그 소식은 그녀의 심령마저 약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 아이를 낳을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듣자 맥이 빠지고 죽어 가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생을 위로한 크신 위로를 잃어 버린 마당에 도무지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이처럼 괴로움예 처한 사람들은 은혜로우신 언약으로부터 위로를 받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슬픔만이 아니라 그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갑작스럽고도 매우 위급한 비탄에 처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때에 신앙은 그를 연약하지 않게 하여 준다(시 27:13).
Ⅱ. 그녀는 비록 악한 남편과 짝을 맺게는 되었어도, 매우 은혜가 충만한 여인이었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가졌던 그녀의 관심은 단지 그녀의 본능적인 정서의 발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다고 할 때에 나타내었던 그녀의 커다란 관심은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에 대해 품었던 그녀의 경건하고 고귀한 정서를 나타낸 것이었다." 전자는 그녀의 출산을 재촉하였다. 그러나 후자는 그녀의 심령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유언에 의해 밝혀졌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고 그녀는 말했다(22절). 그녀는 자기가 속한 자기 가족의 멸족보다도 하나님의 궤가 빼앗기게 됨으로써 당하는 이스라엘 온 민족의 침울한 운명을 더욱 안타깝게 한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슬픔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1 . 그 슬픔이 그녀로 하여금 자기의 자식을 잘 돌보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아마 그 성읍의 귀부인들이었을 여인들이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그녀의 관심이 전적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데서 오는 고통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가 출생하자 이렇게 그녀에게 말했던 것이다.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즉 이제 어려운 때는 지나갔다는 것이었다(아마 그 아이는 그녀의 첫 아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였다." 만일 그녀에게 다른 근심이 없었다면, 그 출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은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다시 기억지 아니" 하게 되었을 것이다(요 16:21).
(1) 하지만 그녀 자신이 죽어가는데 그 기쁨이 무슨 소용이 된단 말인가? 그때는 영적이며, 하나님께서 오는 기쁨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죽음은 너무나 심각한 것이기에 세상에 속한 기쁨을 맛보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죽음은 쓸쓸하고 거칠은 것이다.
(2) 또 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것을 애통해 하는 사람에게 그 기쁨이 무슨 소용이 된단 말인가?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잃어 버리고, 그것이 블레셋 땅에 노획되어 갔는데, 이스라엘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여도 그것이 그녀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우리가 더욱 바라고 있다면 세상적이며 물질적인 쾌락에서 우리는 기쁨을 얻지 못한다. 더우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와 사랑의 돌보심에서 위로를 얻고자 하면 더욱 그렇다. 그처럼 "무거운 마음" 을 가진 자에게는 "노래를 불러 준다는 것" 은 마치" 신김치에 초를 치는 것" 과 같은 것이다.
2. 그 슬픔은 그녀로 하여금 자기 아이의 이름을 그 침울함을 기억할 수 있는 이름으로 짓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지마는 사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단지 "이가봇" 이라고 부르라고만 하였다. 그것은 "어디에 영광이 있단 말인가?" 또는 "아이고 영광이여!" 또는 "영광이 떠났다" (21절)는 뜻이다. 그것은 그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자 하는 매말라가는 마지막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이다(22절).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그 아이는 명예롭지 못한 아이이니만큼 그 아이의 이름도 명예롭지 못하게 지어서 불러라.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은 갔다. 이제 다시 그것을 회복할 희망도 없다. 이제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이, 더우기 제사장들의 이름이 영광스러운 이름이 될 수 없구나."
(1)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임재의 감시와 하나님의 많은 계명이 그들의 부요와 이익보다도 더욱 그들의 영광이 되었다.
(2)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런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와 하나님의 계명이 없어질 때, 그것은 곧 그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영광도 떠나고 모든 선한 것도 함께 사라진다. 하나님이 떠나 가시면 우리는 저주를 받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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