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의 가문(사무엘 상 1:1-8)
여기에는 선지자 사무엘이 출생할 당시의 그의 가정의 상태가 잘 기록되었다. 그의 부친의 이름은 엘가나였다. 그는 레위 자손이며 역대상 6장 33,3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그들 족속 가운데서 가장 영예로운 가문인) 고핫의 자손이었다. 그의 조상인 숩은 베들레헴의 유대인이라는 뜻을 가진 에브랏이라 일컬어지는 에브라임 사람이었다(룻 1:2). 베들레헴은 레위의 후손들이 처음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중의 한 지파가, 엘가나가 살게 된 에브라임 산지로 이동하였다. 미가의 집에 찾아간 레위인은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갔다(삿 17:8). 모름지기 목회자의 가정은 어떤 곳으로든지 이동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원래부터 에브라임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그들과 다윗과의 관련성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엘가나는 라마 또는 라마다임에서 살았는데, 라마다임이란 윗동네와 아랫 동네를 의미하는 "두 개의 라마" 를 의미하는 것이며, 요셉의 고향인 아리마대와 같은 고장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곳을 라마다임소빔이라고 기록하였다. 소빔이란 "파수꾼" 을 의미한다. 아마 거기에는 선지자의 학교가 하나 있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파수꾼" 이라고 일컬어졌기 때문이다. 갈데아 말로 읽으면 엘가나란 "선지자의 생도" 라고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선지자의 직무가 다시 시작된 것은 사무엘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오랫동안 이상(open vision)이 흔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3:1). 그리고 또 모세로부터 사무엘에 이르기까지는 다만 한 곳(삿 6:8)을 제하고는 선지자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그러므로 사무엘 자신이 세우기 까지는 어떤 선지자의 학교 같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19:19, 20). 이상이 사무엘의 가문과 그의 출생지에 관한 기사들이다. 이제는 그의 가정의 상태에 대해 알아보자.
Ⅰ. 그의 가정은 헌신적인 가정이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이 전부 그래야 했겠지만, 레위 지파의 가정은 더욱 이러한 태도가 요청되었었다. 목회자의 가정은 모범적인 신앙 가정이 되어야 한다. 엘가나는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 장중한 제물을 차려 가지고 올라갔다. 성서에서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사바오드 - Johovah Sabaoth)시라고 일컬은 것은 여기가 맨 처음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에는 이 이름이 널리 일컬어졌고 또 알려졌다. 아마 사무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칭호를 사용한 최초의 선지자일 것이다. 그는 그 당시 그들의 군사는 적고 미약한데 반해 원수들의 군사는 많고 강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로하기 위해 이러한 하나님의 칭호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군의 여호와가 되신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으신 주권을 가지시고 계시며, 그것을 발동하신다는 생각은 이스라엘을 기쁘게 하였다고 본다.
엘가나는 시골에 묻혀서 사는 레위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까닭에 그는 반드시 성전에 올라가야만 하는 지위나 직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예물을 가지고, 다른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과 똑같이 성전에 올라갔으며, 그리하여 이웃 사람들을 격려하였고, 그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그는 번제를 통해 예배와 기도와 그리고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이러한 종교적인 의식을 끊임없이 행하기 위해, 그는 해마다 성전에 올라갔었다. 그의 그러한 행위는 다음의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더욱 칭찬받을 만한 것이었다.
1.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타락해 있었으며, 거의 신앙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더러는 이방신들을 섬겼고,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데 게을리하였다. 하지만 엘가나는 성실히 하나님을 계속 섬겼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였든지 간에 그와 그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굳게 결심하였던 것이다.2.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당시 하나님의 집에 서 봉사하기 위하여 특별히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알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자기들의 지위를 악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엘가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 당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한 장소, 한 제단에만 묶어 두시고, 어떤 구실 하에서도, 그 밖의 다른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시키시었다. 그리하여 엘가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전히 복종하기 위해 실로에 올라갔었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지만 엘가나는 그의 의무르 다하였다.
복음 아래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지라. 우리는 오늘날 어떠한 장소와 한 가정에 매여 있지 않는다. 승천하신 대속 주께서 그의 교회에 보내 주신 목사나 교사들은 다만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 기 위해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이다(엡 4:11, 12). 아무도 우리의 신앙을 지배할 수 없다. 의식의 타당성과 효력은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의 순결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의무는 우리의 거룩함과 기쁨을 충족시키도록 도와 주시는 분들에 대한 것이지,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이 그들의 비도덕적인 추행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드리는 제를 손상시키는 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Ⅱ. 그의 가정은 분열된 가정이었다. 그리고 가정의 불화는 그들에게 죄와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신앙의 가정에 불화가 있다는 것은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합심 기도는 이 가정의 불화를 끝장낼 수 있을 것이다.
1. 이 불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엘가나가 두 아내를 얻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제정하신 근원적인 혼인 제도를 어기는 것이었다(마 19:5, 8). 혼인이란 "본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두 아내를 얻는 일이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야곱의 가정에도 그리고 여기 엘가나의 가정에도 모두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가 제멋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법으로 묶어 두신 것은 얼마나 우리의 위안과 평안을 위해 유익한 것인가! 아마 엘가나는 한나와 먼저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한나가 자녀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브닌나와 결혼하였으며, 브닌나는 자녀들을 많이 낳았을 것이다. 그런데 브닌나는 자녀외에 그에게 괴로움도 안겨 주었다. 이처럼 인간은 가끔 자기가 만든 채찍으로 자기 자신이 매를 맞는다.2. 이러한 잘못이 기원이 되어서 일어난 결과는 두 여인 간의 불화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축복을 가지고 있었다. 브닌나는 레아처럼, 대의 열매가 풍성하여 많은 자식을 낳았다. 브닌나는 비록 자기가 첩이며, 남편의 사랑도 많이 받지 못했지마는 자식들이 많다는 것 때문에라도 기뻐하며 감사해야만 했을 것이다. 한나는 라헬처럼 자녀들을 낳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엘가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사실을 그녀나 또 다른 사람들도 알아 볼 수 있도록 처신하였다. 예를 들면 엘가나는 제물의 분깃을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었다" (5절). 그녀는 이것만을 가지고도 기뻐하고 감사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모두 그렇지 못했다. 브닌나는 자식을 많이 둔 축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더 오만불손해졌다. 그리고 한나는 자식이 없는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점점 더 우울해지고 불만이 가득차게 되었다. 엘가나는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처신하기가 난처하게 되었다.
(1) 엘가나는 이러한 가정적인 불행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가기를 중단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이 다른 문제에서는 서로 화합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는 같이 합심하여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의 두 아내와 자녀들을 언제나 함께 데리고 갔다. 가정 예배가 그 가정의 불화를 없애주지 못하더라도, 그 불화가 가정 예배를 중단시키게 하여서는 안 된다.
(2) 엘가나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한나의 마음을 위로하고 고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4,5절). 그는 제사를 드릴 때 가정의 화목을 간절히 원하는 가운데 화목제를 빠짐없이 드렸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이 하나님과의 친교의 표로서 제물의 분깃을 나누어 먹을 때, 그는 브닌나와 그녀의 자녀들에게 충분한 몫을 나누어 주었지만, 한나에게는 제상에서 가져 온 것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으로 갑절의 몫을 주었다. 대개의 경우 그 가장 좋은 부분은(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언제나 제일 귀한 분에게 드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하는 표였으며, 또 그의 사랑을 확신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1] 엘가나는 그녀가 자식을 낳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였다. 교회가 잘못 투성이요 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해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남편들도 마땅히 그의 아내를 사랑하여야 한다" (엡 5:25). 어떤 결점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주어야 할 정당한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그의 교훈과 맞서게 하는 것이며, 더우기 불행을 당한 자를 더욱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결점이란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 사람의 불행이긴 하되 결코 죄는 아니다.
[2] 엘가나는 한나에게 더 많은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해 궁리하였다. 그것은 한나가 불행하며, 모욕당하며, 따라서 의기가 소침해졌기 때문이었다. 약자를 도와 주고, 넘어진 자를 붙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 지혜요, 우리의 의무이다.
[3] 엘가나는 화목제의 제물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녀에 대한 자기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 주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친구나 친척들에게, 그들을 위한 많은 기도를 통해 우리의 관심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
(3) 브닌나는 매우 심술이 사납고 말썽을 많이 일으키는 여자였다.
[1] 브닌나는 한나의 불행을 비난거리로 삼았으며, 자식을 낳지 못한다고 하여 그녀를 멸시하였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여자라는, 조롱하는 언사를 사용하였다.
[2] 브닌나는 한나가 받은 엘가나의 사랑에 대해 질투하였으며, 엘가나가 한나에게 친절을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더 분격하였다. 이 모든 그녀의 행동은 지나치게 천하고 야비한 것들이었다.
[3] 브닌나는 이상과 같은 행동을 "여호와의 집에 올라갔을 때" 더욱 심하게 나타내었다. 아마 그 때가 다른 어느 때 보다도 두 여자가 가까이 지내게 되는 때였으며, 또는 엘가나가 한나에 대한 그의 사랑을 더욱 많이 표현하는 때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제단을 향해 노여움이나 다툼이 없는 깨끗한 손을 들어야 할 때에, 브닌나가 한나에 대해 그런 적의를 나타낸다는 것은 더욱 죄를 짓는 일이었다. 그때에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기 위해 더욱 박정하게 대해 주었다고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이 함께 있게 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 주기를 바래서 그랬을 뿐만 아니라, 한나가 헌신 기도를 드리기로 작정하였고, 그리하여 최고의 평온과 침착 그리고 안정이 요구되는 때였기 때문이기도 했었을 것이다. 우리의 순결과 평화를 교란시키고자 하는 원수들은 우리가 가장 평온하여야 할 때, 오히려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가장 애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의 앞에" 설 때 사탄 역시 "그들 가운데 왔던" 것이다(요 1:6).
[4]브닌나는 몇 해를 두고, 해마다 그렇게 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그렇게 했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복종심이나 한나에 대한 그녀의 동정심 같은 것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행동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5] 브닌나의 의도는 한나의 마음을 찢어 놓기 위해 그녀를 애태우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며, 남편의 마음을 독차지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또는 한나를 불안하게 함으로 거기서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말해서 우울하고 슬픈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더욱 슬프게 하고, 고민하며 번민에 싸인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사람들은 좋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들이다. 우리는 짐을 서로 나누어져야 한다. 결코 남에게 무거운 짐을 더 얹어 주어서는 안 된다.
(4) (불쌍한 여인인) 한나는 그러한 격동을 견딜 수가 없어서 "울고 먹지 아니하였다" (7절). 그러한 그녀의 행동은 자신은 물론 모든 가족들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제사 잔치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 모든 식욕을 가시게 한 그녀의 괴로움은 그녀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였고 가정의 조화된 즐거움에도 일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나가 "제사 후의 잔치에서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 은 "애곡하는 날에 성물을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신 26:14; 레 10:19). 지금 한나는 그녀의 약점에서 오는 세상적인 슬픔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의 거룩한 기쁨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괴로와하는 심령과 가슴 속에 지나친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미워한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생활과 신앙에서 조차 위로를 찾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일치감을 이루지 못하는 부부관계에서 오는 잘못된 결과를 주목하신 바가 있으시다. 하나님은 학대받은 사람들이 "눈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시지 아니하시겠다" 고 말씀하셨다(말 2:13).
(5) 엘가나는 할 수 있는대로 한나를 위로하고자 애썼다. 한나는 다른 여자와 또 결혼한 엘가나의 매정함에 대해서, 사자처럼 그를 비난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브닌나를 욕하고 나무란 것도 아니다. 한나는 모든 것을 자기 잘못으로 돌렸다. 그러기 때문에 엘가나는 한나를 더욱 동정하였다. 엘가나는 한나의 슬픔에 같이 동참하였다(8절)." 한나여 어찌하여 우느냐?" 고 그는 물었다.
[1] 엘가나는 한나가 매우 슬퍼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언짢았다. 결혼으로 한 몸이 된 사람들은 이처럼 마음 역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편이 어려움을 당할 때, 다른 한 편이 결코 평안할 수 없다.
[2]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으로 꾸짖었다."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고 물었다. 하나님은 사랑을 많이 할 수록 더욱 더 꾸짖으신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엘가나는 한나가 슬퍼하는 이유를 캐물었다. 한나에게 괴로와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까지 슬퍼해야 하며, 더우기 거룩한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슬퍼할 까닭이 있는 것인가고 묻는 것이었다. 우리의 슬픔이 어떤일 때문에 오는 것이든지 간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의무를 저버리게 하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 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우리의 기쁨을 손상시키며,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서 오는 위로를 받지 못하게 만들 때, 그것은 죄가 되며 지나친 것이 된다.
[3] 엘가나는 한나의 슬픔을 자기가 능히 달래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당신은 내가 당신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것으로 위로를 받으시오." 우리는 우리가 질 십자가에 대해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도록, 우리가 받을 위로를 주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십자가를 질 운명에 있으면서도 위로는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형평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우리편에게 해로운 것뿐만 아니라 이로운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며 또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도 친절한 것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신다" (전 7:14).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한다.
한나의 기도(사무엘 상 1:9-18)
엘가나는 한나의 지나친 슬픔을 점잖게 나무랐다. 그리하여 엘가나의 꾸지람이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Ⅰ. 한나는 음식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그들과 같이 먹고 마셨다" (9절). 한나는 남편의 꾸지람을 듣고 나서는 자신을 슬픔 속에만 쳐박아 두거나 더 이상 우울증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자기가 그들과 함께 먹으러 가지 않음으로 해서 남편의 마음이 대단히 불안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한나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식탁으로 나갔던 것이다. 우리의 격정을 조정하는 것도, 우리의 욕망을 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극기심의 일부이다.
Ⅱ. 한나는 기도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가? 내가 애태우는 것이 좋은가? 그런 것들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그 무거운 짐을 내 어깨에 감아 올릴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여호와께 그 무거운 짐을 맡겨버린 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엘가나는 한나에게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한나는 아마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야 그렇든 아니든, 하나님은 꼭 그러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며, 하나님께 나의 모든 불만을 털어놓고, 그의 구원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한나가 이 문제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간구하여야 한다면 지금, 이 때야말로 가장 좋은 때이다.
그들은 실로에 있었으며, 성전의 문 앞에 있었다.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신 곳이며," 기도의 집" 이었다. 그들이 바로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의 표로서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렸던 곳이다. 그리고 그들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는 위로의 마음을 가지고 그 제물을 나누어 먹는 잔치를 벌였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그 제사의 덕을 힘입어 그녀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화목제는 속죄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중제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목제를 통해 우리의 죄가 속죄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상달되고 화평한 응답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할 때 그 희생의 제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한나의 기도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한나의 기도 속에는 뜨겁고도 깊은 헌신이 있다. 그녀의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와 방향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가를 몇 가지 배울 수 있다.(1) 한나는 그녀의 기도 가운데서 그녀의 경건한 격정을 표시함으로 현재 그녀가 당하고 있는 슬픔과 영혼의 괴로움을 나타냈다. "한나는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였다" (10절). 우리도 우리의 고뇌를 선용하여야 한다. 그러한 고뇌가 하나님께 구하는 우리의 간구를 보다 깊은 간구가 되게 만들어 준다. 우리 주님께서 도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신" 바가 계셨다(눅 22:44).
(2) 한나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그녀의 기도는 메마른 기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통곡하였다. 참다운 이스라엘처럼 한나는 그녀의 눈을, 우리의 영적인 고뇌를 아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향해 돌리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 (호 12:4).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을 때,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기도 소리가 터져나왔다.
(3) 한나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겸손한 간구를 드렸다. 한나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봉사할 수 있는 아들 하나를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일반적인 자비만을 구하도록 허락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고 또 원하고 있는 구체적인 자비도 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 하지만 한나는 라헬처럼 "나로 자식들을 낳게 하라" (창 30:1)고 구하지는 않았다. 한나는 하나만 주셔도 고맙겠다고 하였다.
(4) 한나는 엄숙히 맹세하고 약속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한 아들을 주시면 그녀는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 고 하였다(11절).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레위인이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맹세로 나실인이 됨으로 어렸을 때부터 더욱 성결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한나는 전에 이미 남편 엘가나에게 자기의 뜻하는 바를 알려 주었고 그리고 그의 동의와 허락을 받았을 것이다. 부모들은 자기들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쳐서 산 제물로 살게 하며 신령한 제사장으로 만들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그들의 평생에" 하나님을 충실히 섬길 의무가 있다. 더우기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자비를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바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마땅하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공로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기에 이를 힘쓰는 것이다. 자비를 힘입으려면 의무를 다해야 한다.
(5) 한나는 너무나 조용히 기도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술은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도 "음성은 듣지 못했다" (13절). 이로써 한나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신앙을 증명하였다. 우리의 생각은 곧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결코 "큰 소리로 불러야" 듣는 그런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시다(왕상 18:27).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의 한나의 겸손함과 거룩한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하나의 단적인 표현이다. 한나는"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고" 하였던 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사 58:4). 그녀의 기도는 은밀한 기도였다. 그러므로 공적인 장소에서 드린 기도지만, 은밀하게 드렸으며, 바리세인의 기도와 같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아니었다. 기도란 부끄러워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 진리이긴 하다. 그러나 결코 자랑을 늘어놓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에 어떤 말이 오고 갔든지 그것들은 우리 자신 안에만 간직하여야 한다.
2. 그것 때문에 한나는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그 당시 엘리가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요 사사였다. 엘리는 성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성전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9절). 이때 성막이 여기서는 전이란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왜냐하면 이제는 고정된 형태를 이루었고 성전의 구실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는 거기 앉아서 문안도 받으며, 여러가지 지시도 내렸다. 그리고 그는 (한쪽 은밀한 구석에서) 기도하고 있는 한나를 보았는데, 술에 취해서 기도하는 듯한 이상한 태도를 보고 한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14절).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이것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자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말했던 것과 똑같은 비난이다(행 2:4, 13).
이처럼 타락한 시대에는 성전 문 곁에서도 술취한 여인을 흔히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들의 타락한 정욕의 대상들을 그렇게 쉽게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2:22). 엘리는 한나를 그런 여자들 중의 하나로 여겼다. 이것은 죄악이 관영하고 유행처럼 창궐하게 된 잘못된 결과에서 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죄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병이 창궐하면 모든 사람이 그러한 병에 걸렸다고 보게 된다.
(1) 이것은 엘리의 잘못이었다. 더우기 자세히 알아보지 아니하고 그처럼 가혹한 꾸중을 내렸다는 것은 더욱 큰 잘못이었다. 이미 그의 눈이 침침해져서 모든 것을 자세히 살필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면 그는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살펴줄 수 있는 사람을 두어야만 했을 것이다. 술취한 자들은 대개 떠들썩하고 소란을 피운다. 그러나 이 불쌍한 여인은 조용하고 침착하였다. 엘리의 잘못은 그가 "무식한 자를 능히 용납해야 하는" (히 5:2) 대제사장이었기에 더욱 큰 것이었다.
만일 그러한 잘못이 우리에게도 있게 되면, 우리는 아직 꾸중을 정말 들을 만한 것이라고 확실히 판명되지도 않고 또 옳바른 것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도 서슴없이 너무 서둘러서 다른 사람을 꾸중하기 쉬우며, 악을 행했다고 믿어버리기 쉽다. 사랑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들에 대해 좋은 점을 바라보며, 비평을 삼가하라고 명령한다. 바울도 사랑을 가졌을 때는 좋은 소식을 들었지마는 "대강 믿었을" 때는 그렇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전 11:18). 특별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경건한 행동을 비난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결코 우리는 순결한 열심에서 나왔으며, 또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행위들을 "위선" 이라거나," 열광주의" 또는" 미신" 이라고 하여서는 안 된다.
(2) 그것이 한나에게는 큰 괴로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영혼의 상처에 초를 붓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한나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고 하여서 남편 엘가나의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가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는 오해를 받아, 책망을 들었다. 모든 것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언제 우리도 그런 일을 당할지 모른다. 그때도 우리는 조금도 이상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3. 한나는 자기에게 부어지는 비난에 대해 겸손하게 변명하였다.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잘 참았다. 한나는 말대꾸를 하지 않았으며, 엘리 자신의 아들들의 방탕을 근거로 해서 그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또 엘리에게 자기의 가정을 돌아보고 그들을 제지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입술을 지키는 파수꾼을 갑철로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서로 책망하거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을 다시 비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한나는 자신을 변명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다(15,16절). 우리도 그래야 한다.
(1) 한나는 그 비난이 자기에게 합당한 것이 아님을 밝히면서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고 엘리에게 말했다. 한나는 엘리를 "나의 주여" 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그녀가 얼마나 정당하며, 그래서 그의 비난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씨이다. "아닙니다. 나의 주여, 당신께서 생각하시는 바와는 다릅니다. 비록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지만(잠 31:6) 나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여종을 벨리 알의 딸로 여기지 마옵소서."
술취한 자들은 벨리알의 자녀들이다. 더우기 여자들이 술취했을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악한자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술취하지 않을 때도 그렇지만, 더우기 실제로 술을 마셨을 때는 더욱 멍에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자기 스스로를 거느릴 수 없는 자들은 아무 것도 감당할 수 없다. 한나는 만일 자기가 그런 죄를 범했다면 그 죄악은 매우 큰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또 자기는 하나님의 심판에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시인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변명하는 그녀의 말씨는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2) 한나는 그러한 의혹을 살만 하였던 자기의 현재의 입장에 대해서 말했다. "나는 마음이 슬프며, 낙심되고 괴로움을 많이 당한 여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 보입니다. 나의 눈은 포도주가 아니라 눈물 때문에 벌그스름 해졌읍니다. 지금 저는 저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제가 마음으로 하는 말씀을 들으시며, 알아 주시는 주 하나님께 나의 진정을 쏟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보통 이상의 열심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 여자의 기도하는 태도는 보통과는 다르게 보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부당한 비난을 받았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오해하여 부당하게 비난하는 형제들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서도 아울러 노력하여야 한다.
4. 앨리는 그가 퍼부었던 경솔하고도 불친절하였던 비난을 친절하고도 자비로운 축복의 말씀으로 보상하였다(17절). 엘리는(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의 잘못이 지적당하고, 자기의 잘못을 알게 된 것을 큰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기분을 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전에는 한나의 기도에 대해 언짢게 생각했던 그만큼 이번에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엘리는 "평안히 가라" 는 말씀을 가지고, 그가 그녀의 무죄함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축복권을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한나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엘리는 한나의 구하는 바 축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도 그녀의 기도에 "아멘" 으로 화답하여 주었다. 엘리는 한나의 사려 깊고도 경건한 기도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우리를 오해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친구로 만들 수 있으며, 그들의 비난이 변하여 우리를 위한 기도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5. 한나는 대단히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18절). 한나는 엘리가 계속해서 자기를 선히 여겨주며,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간구하고 돌아가서 화목제의 남을 음식을 먹었다(그것들은 아침까지 남겨둘 수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다." 다시는 전과 같이 마음의 근심이나 동요의 빛이 없었다. 오직 즐겁고 기쁘게만 보였으며, 이처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었다.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어떻게 해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한나는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다시는 그 문제 때문에 괴로와하지 않게 되었다. 한나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였으며, 엘리는 그녀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구하는 바를 꼭 이루어 주시리라고 믿었다. 기도란 넘치는 은혜를 통해 마음에 안정을 가지는 것이다. 야곱의 후손은 하나님께서 결코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리라" 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실 것을 확심함으로 기도를 통해 찾는다. (빌 4:6, 7 참조). 기도는 우리의 용모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또 그래야만 한다.
사무엘의 출생(사무엘 상 1:19-28)
Ⅰ. 정한 잔치 날이 지나자 엘가나와 그의 가족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19절). 그들이 성전에 있는 동안의 긴 시간을 어떻게 잘 이용하였는가 보자. 그들이 거기 있을 때는 물론, 집으로 돌아갈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날까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경배드렸다.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첫째 되시는 분에게 우리의 첫 시간을 드리자. 엘가나의 식구들은 먼 길을 떠나야만 했었다. 그리고 많은 자녀들을 데리고 가야만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두 함께 예배 드리기까지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기도와 양식은 여행길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기 있는 며칠 동안 내내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출발에 앞서 다시 한번 더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결코 좋은 일에 싫증을 내어서는 안 된다.
Ⅱ. 기다리던 아들을 낳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드디어 여호와께서 한나가, 더도 말고 오직 한 가지 소원하고 있던 바를(11절) 기억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한나가 잉태하고, 한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무거운 짐과 고통과 그리고 기도를 오랫동안 잊어버리시고 계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 주신다.
어머니는 이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하였다(20절). 어떤 사람들은 이 이름이 "하나님이 들으심" 이란 뜻을 가진 이스마엘과 매우 흡사한 어원에서 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기도가 상달되고 그 응답으로서 그 애를 낳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아들" 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본다. 그 두 가지는 다 같은 뜻을 나타낸다. 한나는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러한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처럼 한나는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녀 자신이 위로를 받으며, 하나님의 넘치는 친절에 대해 영광을 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자비하심에 대해서는 특별히 감사를 표시하여야 한다(시 116:1, 2). 한나는 그의 아들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 줌으로 그로 하여금 항상 여호와께 순종하도록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얻은 아들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바쳐진 아들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한 것이었다. 기도의 아들은 특별한 의미에서 선한 아들일 수밖에 없다. 르무엘의 어머니는 그가 "서원대로 얻은 아들" 임을 기억하게 하였다(잠 31:2).
Ⅲ. 아기를 키우기 위해 한나는 성전에 올라가는 일을 당분간 중단했는데, 이는 아기가 사랑스러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아기가
하나님께 바쳐진 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나는 하나님을 위해 그 아기를 스스로 양육하였다.
그리고 그 아기를 다른 사람의 품에 맡기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것이다라는 자연 법칙의 관점에서만 돌봐줄 것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 바친 자녀들이라는 은혜의 계약의 관점에서 도 돌봐주어야 한다(겔 16:20, 21 참조). 자녀들의 양육을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할 때 그 양육은 성결되어진다.
엘가나는 해마다 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올라갔다. 특별히 그는 그의 맹세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올라갔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 그의 맹세는 한나의 맹세와는 별개의 것이었으며,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한나를 통해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면 시행하고자 하였던 맹세였을 것이다(21절). 그러나 한나는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기를 원했으면서도 남편에게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해마다 삼대 절기에 반드시 성전에 올라가야 하는 의무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성전에 올라가던 관습이 있었더라도, 한나는 이번에는 성전에 올라가지 않기를 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 아이를 양육하는 일에서 잠시라도 손을 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잠시라도 젖을 빠는 아기를 잊을 수 있을까?" 한나는 잠시라도 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만일 집을 잠시라도 떠날 수 있었다면 서슴지 않고 실로에 올라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고 희생을 원하지 않으신다. 어린 아기를 키우기 위해 공중 예배에 참석치 못하는 사람들은 이 한나의 경우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 눈을 하나님께 돌리는 가운데 집에 머물러 아기를 돌봐주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을 수 있으며, 그 은혜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2. 한나는 아기가 커서 실로에 데리고 갈 수 있을 때까지 만이 아니라, 가서 거기에 그대로 둘 수 있으리만큼 클 때 까지는 실로에 올라가지 않기로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한나는 아이를 한 번 거기에 데리고 가면 다시는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맹세한 것을 꼭 지키기로 단단히 결심한 사람들이라도 그 맹세의 실천을 연기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찾아낼 수가 있다. "만물은 제철에 아름답다." 짐승들은 한동안 어미와 함께 있은 이후에야 제물로 열납될 수 있다(레 22:27). 과일은 익었을 때가 가장 좋다.
엘가나는 한나의 제의에 동의하였다(23절)."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라" 고 말했다. 엘가나는 한나의 뜻을 가로막지 않고 전적으로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여 주었다. 짐을 함께 지는 자들이 짐을 질 때에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 주며, 상대방에게 자기를 맞추어 가며, 특히 경건과 사랑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은 보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엘가나는 자기의 기도까지 덧붙였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다시 말하면 그의 기도는 이런 뜻이다. "하나님이여, 이 아이를 어린 시절의 위험에서 지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에게 자녀를 주심으로써, 당신께서 우리의 엄숙한 맹세를 열납하심을 보여주셨듯이 이제 때를 따라 이 맹세가 실현되며 완성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그의 자녀들을 성실하게 봉헌한 사람들은 안심하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다짐할 때 하나님 역시 이를 다짐하는 말씀을 공고히 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Ⅳ. 아이를 성결하는 예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우리는 그 아기가 보통 다른 첫 해에 난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눅 2:22, 23), 난지 사십일 만에 여호와 앞에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기사가 기록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떤 별다른 점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젖을 떼게 되자 여호와 앞에 나가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젖을 떼자 마자 여호와 앞에 나갔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세살 때쯤이라고 본다. 유대인들은 보통 세살 때까지 어머니의 젖을 먹는다고 한다. 한나는 그를 양육하여 젖을 떼기까지 기다렸다고 한다(23절).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아이가 모든 어린아이의 일을 면할 때, 즉 열덟살 이나 열살 정도에서 그런 일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사무엘과 같은 특별한 어린이는 불과 세살에, 제사장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러 성전에 갔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이가 어리더라" 는 말이 있다(24절). 그러나 그는 나이에 비해 영리하였기 때문에 조금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나 일찍부터 신앙적일 수는 없다. "어린이는 어린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사람들은 그 말을 그가 배울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라고 읽는다.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사 28:9)라는 말씀이 있다. 한나는 어떻게 그의 아들을 바쳤는가 보자.
1.한나는 희생의 제물을 가지고 갔다. 그 제물은 수소 셋과 소재의 제물이었다(24절). 어린 아이의 나이 하나에 수소 한 마리였을는지 모른다. 아니면, 한 마리는 번제, 또 하나는 속건제, 그리고 또 하나는 화목제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한나는 결코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혔다고 생각하거나, 이 죽은 제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산 제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계약은 희생을 통해서 맺어진 것이다.2. 기도에 응답하여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나갔다. 이것을 한나는 엘리에게 표시하였다. 왜냐하면 엘리는 한나에게 희망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기 때문이다(26,27절).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기도하여 얻은 것을 이제 그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께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나의 주여 당신은 나를 잊으셨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 앞에 기쁜 얼굴로나타난 저는, 삼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울며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바로 기도하여 얻은 아이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이처럼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완전히 성공한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살아 있는 증거가 들어 있다.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증거하는 자입니다(시 66:16-19 참조). 이 자비와 이 위로를 위해 나는 기도하였고, 여호와께서 나의 간구에 응답하셨나이다" (시 34:2, 4, 6 참조). 한나는 엘리에게 그가 전에 그녀에게 대해 가졌던 의심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한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이 심한 책망을 하였던 그 여자입니다. 이제 당신은 내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의로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약점이나 실수 때문에 그들을 책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스스로 회개할 줄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시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3. 한나는 이 아이에게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이권을 모두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바치기로 하고 나갔다(28절). "나는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한나는 드린다는 말을 거듭해서 말했다. 결코 그 약속을 어기지 않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를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라는 말에서 "드린다" 는 말이 "빌려드린다-lend" 는 말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보통 우리가 빌려 주었던 것을 되찾듯이 그를 하나님께로 부터 다시 찾고자 하여 그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빌려 드린다" 는 말은 20절에서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것이다" 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나가 말하고자 한 뜻은 곧 "내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것이며 이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나이다" 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무엘이란 이름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나이다." 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무엘이란 이름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것" 이란 뜻과 동시에 "하나님께 드린 것" 이란 뜻이 아울러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1)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대상 29:14, 16).
(2) 이 기사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은 모두 하나님께 빌려드린 것이 된다. 그리하여 빌려드린 것이니만큼, 우리가 그것을 찾든 찾지 않든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다. 더우기 많은 이익을 붙여서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이며, 가난한 자에게 준 것은 더욱 크게 보상을 받는다(잠 19:17).
우리가 세례를 통해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께 바칠 때 우리는 먼저 그 자녀가 엄연히 하나님께 속한 자녀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의 자녀임을 알아야 한다.
한나는 그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되, 어느 한 동안이 아니라, "그의 평생을(durante vita)" 여호와께 나실인으로 바친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결혼 계약과 같은 그런 계약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평생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하며, 결코 하나님을 버려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어린 사무엘은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이상의 일을 하였다.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그 아이가 기도하였다" 는 말씀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틀림없이 보통 이상의 아이였을 것이다(우리는 어린 아이들이 매우 어렸을 때부터 종교적인 소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 아이를 성별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거룩한 일을 위한 준비를 시키며, 훈련을 시켰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일찍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배워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예배드리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아이들이 예배드리게 하여야 한다. 그들이 이를 위해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이를 용납하시사 그들에게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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