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사기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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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삼손의 횃불(사사기 15:1-8)

Ⅰ. 삼손은 자기를 불쾌하게 한 여자였지만 그의 아내에게 돌아갔다. 그가 분노를 식히고 다시 찾아갔을 때는 그는 아마도 그녀가 다른 사람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며, 그때 그는 염소새끼를 가지고 그녀를 찾아갔다(1절). 이 염소 새끼는 진귀한 선물은 아니었으나 화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서로 다투었을 때는 화해한다는 표적으로 이렇게 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염소 새끼를 가져와 그녀와 함께 음식을 먹으며 다시 화해하고 친구가 되고자 하였다. 불쾌한 일을 당한 쪽은 삼손이었으므로, 먼저 그 여자쪽이 화해를 표하고 이렇게 했어야 옳은 일이었지만 삼손은 너그럽게 자기가 먼저 행했다. 가까운 처지에 서로 다투었을 때에는, 서로의 화해를 위해 먼저 상대방을 용서해 주고 그가 나에게 준 상처를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좋은 방법이다.

Ⅱ. 삼손은 거절당했다. 장인은 그녀를 만나보지 못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결혼시킨 것은 바로 장인이었기 때문이었다(2절).

1. 장인은 자기의 잘못을 변명하려고 애썼다. "나는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생각하였노라." 나실인 삼손이 블레셋 사람과 같은 기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매우 큰 잘못이었다. 단지 삼손이 그의 아내에게 화를 내고 그의 아버지 집에 잠시 돌아간 것을 보고, 그를 의심하여 그가 그의 아내를 심히 미워했다고 결단 내리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말은 장인이 삼손에게 준 상처에 대한 사과의 말 전부였다. 그리하여 그는 강탈자들을 후원하기 위해서 극악의 질투를 내어 뱉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는 남들이 악을 계획하고 있는 줄로 알았노라" 고 말하여 악을 저지르는 것을 지원해 줄 수는 없다.

2. 그는 자기의 작은 땅을 줌으로써 잘못을 보상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그녀가 잘 생겼기 때문에 삼손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삼손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도외시하여, 한 딸은 결혼시키고는 그 딸을 곧 다른 자에게 주며, 한 남자에게 딸을 준 후, 그 다음 주에는 그녀의 동생을 그에게 주려 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참람한 것인가! 그는 장인의 제의를 비난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내의 여형제를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레 18:18).

Ⅲ. 삼손은 그를 모욕한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수를 했다. 그가 그것을 자기에게만 가해진 모욕으로 생각했다면 그는 그의 적수를 찾아가 그와 장인만을 징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자신을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그에게 준 모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들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에 그를 모욕하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을 혼내줘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하는 일이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3절).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삼손은 그의 아내와 화해하기 위해 그의 할 바를 다했으나, 그녀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그의 분노를 터뜨린다 해도 그들은 그를 비난할 수 없었다.

불화가 생겼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없애기 위해 우리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어떤 결과가 오든 우리로서는 비난받을 것이 없다. 삼손이 그들을 복수한 방법은 곡식밭에 불을 놓아 그 나라를 황폐하고 메마르게 하는 것이었다(4,5절).

1. 그가 복수하기 위해 취한 방법은 매우 이상한 것이었다. 그는 150쌍의 여우를 짝을 지어 꼬리를 나무토막으로 묶고는 이 나무토막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이 여우들은 피신처를 찾기 위해 곡식밭으로 뛰어들었고 곡식 밭에는 불이 당겨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곡식밭은 순식간에 불이 붙고 사람들이 미처 불을 끌 수 없었다. 그 일이 밤에 행해진 일이라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을 구하였으나 그것을 할 만한 용기를 지닌 이스라엘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일이 방해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단지 한 장소에서 한 번에 일을 행했다. 삼손은 그가 무슨 일을 하든 하인이나 병사와 같은 사람을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는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동조자로 여우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삼손을 교활하고 악랄하게 속였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교활한 여우와 횃불의 재앙을 받게 되었다. 이런 전략은 가끔 교회의 적들과 비유되기도 한다. 즉 그들은 그들 내에서도 서로 다른 관심과 목적을 갖고 있어 서로 반대의 길을 가려고 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그르치거나 그 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저주스러운 일을 하기 위해 가끔씩 서로 불타는 나무로 그들의 꼬리를 묶는다.

2. 여기서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준 피해는 매우 컸다. 그때는 밀을 거둘 때였으므로 마른 짚단에 붙은 불은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태워버렸다. 이리하여 아름다운 피조물들이 황폐케 됐다. 그러나 적개심에 의한 행동으로 합법적인 파괴가 자행되는 곳에서는, 마초까지도 당연히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간주해야 한다. 삼손이 그들의 곡식을 없애버렸다면, 그들의 생명이 또한 위태로와졌을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있다. 블레셋이 다곤 신을 위하여 준비했으며, 그 신에게 소재물로 드려질 "그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은 때가 되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번제물이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Ⅳ.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간교한 아내와 장인에 대해 격분했다. 그의 아내와 장인의 잘못으로 삼손이 노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블레셋 사람의 무리는 그들을 불살라 죽였다(6절). 아마도 그의 집을 불살라 그들을 죽였을 것이다. 그들은 감히 삼손을 공격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이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더욱 정의롭게 삼손을 화나게 만든 그의 아내와 장인에게 복수를 하였다. 그러나 삼손은 그 스스로가 친족으로서의 예의를 지켜 그들에게 복수하려 하지 않았다. "복수하는 일은 누구에게 속하는지" 를 보라. 배반하는 자는 배반으로 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심판에 의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지신다." 특히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적을 자기네들끼리 분쟁을 일으켜 복수하도록 만드신다. 야비한 블레셋 사람이 배반한 자를 불살라 죽였을 때 "의인은 악인이 보복을 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을" 것이다(시 58:10, 11). 이와 같이 "사람의 분노는 장차 하나님을 칭송하게 될 것이다" (시 76:10). 블레셋 사람들은 만일 삼손의 아내가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내어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의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위협했다(14:15). 그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들에게 아첨함으로써 남편을 배반한 그녀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가 두려워하고 죄를 범하고서라도 모면하려던 바로 그 블레셋 남자들이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를 불살라 죽였다. 부당한 방법으로 재앙을 피하려는 자는 도리어 화를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명을 구하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Ⅴ. 이 때 삼손은 또 이들의 혈족을 쳐죽여서 이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7,8절). "너희가 그들에게 이같이 행하여 나를 위하는 것 같이 보이려 하나, 그것으로 너희에 대한 내 복수심을 없애지 못하리라." 또 "너희가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너희로부터 받은 모욕을 잊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요 너희가 이스라엘에 대해 잘못을 저질렀으니 나는 너희에게 원수를 갚으리라. 또한 이스라엘이 너희로부터 풀려나고 너희가 못된 짓을 하지 않을 때 나도 그치리라." 그래서 그는 원의의 글자 그대로 "그들을 엉덩이와 허벅지로 크게 쳤다." 우리는 그가 그들에게 준 상처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크게 도륙하였다고 번역해 놓았다. 절름대는 말처럼 이들이 절름발이가 되었거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뭏든 이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삼손은 이들을 전력을 다하여 쳤으므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그의 손이나 팔로 치지 않고 엉덩이와 허벅지로 그들을 쳤다는 것은, 전력을 다하여 치고 발길질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렇게 그들을 모욕하였으며 "노함을 인하여 그들을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짓밟았다" (사 63:3). 그런 후 그는 에담 바위 꼭대기에 있는 안전한 곳에 피신하여 그가 행한 행동에 대해 블레셋 사람이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를 살피고 있었다.

 

15:2 없음.

 

15:3 없음.

 

15: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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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없음.

 

15:8 없음.

 

15:9

유다 사람에게 붙잡힌 삼손(사사기 15:9-17)

Ⅰ.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맹렬히 추격받고 있다. 삼손이 전에 그들을 쳐죽인 것보다 더욱 엄청난 힘을 갖고 그들은 쫓아왔다. 삼손이 이쪽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유다에 삼엄하게 진을 치고서 삼손을 찾고 있었다. 이 때 블레셋 사람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다인들이 이것을 보고 그들에게 와 유다 지파는 그들에게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고 그들을 잘 받들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하고 물었을 때, 그들이 여기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은 단지 삼손을 잡기 위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큰 자나 작은 자를 대항하여"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들에게 행한대로 그에게 행하여" 즉, "눈은 눈으로" 갚으라 했듯이, 그가 한 것처럼 그들도 그의 엉덩이와 허벅다리를 침으로써 이스라엘을 심판하러 온 것 뿐이라(10절)고 말했다. 그들은 삼손 한 사람을 잡기 위해 군대를 보냈었다. 그 까닭은 삼손이야말로 바로 한 군대와 같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삼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잡으려 할 때도 많은 무리들이 왔었다. 그러나 그 때는 정한 시간이 되었으므로 그 10분의 1의 인원으로 충분 했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굴복하지 않으시면 그들의 열배의 인원이 와도 그리스도를 잡는 일은 불가능했었다.

Ⅱ. 유다 지파는 야비하게 삼손을 배반하고 그를 넘겨주었다(11절). 이들은 유다 지파의 출신이었던가? 그 용맹스러운 지파들 중에 섞여 있는 타락한 족속들! "유다 지파의 사자" 를 그들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었다. 아마도 삼손이 그들의 지파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들은 그를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단 지파 사람에 의해 구원되기보다는 차라리 예전대로 블레셋 사람의 지배 아래 있으려 했다. 가끔씩 교회는 이러한 시기와 거짓된 영예로 해서 그 구원을 방해받곤 했다. 더우기 이들은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어찌되든 삼손과 같은 사람을 그들나라에서 몰아내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만일 이들이 죄와 고통 속에서 비겁해지거나 무기력해지지 않았다면 이 기회를 잘 이용하여 블레셋 사람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이 예전의 슬기와 용맹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었다면 삼손과 같이 용맹한 자를 선두로 해서 그들의 자유를 찾기 위해 한번 대담하게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쓰레기 같은 신을 숭배할 정도로 음부까지 스스로를 낮추었으며(사 57:9), 자신을 더럽히면서까지 굴욕적인 지배에 복종하였다. 죄는 사람의 정신을 빼어버리고, 얼빠지게 만들며, 눈을 멀게 하여,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게 한다. 삼손은 모세와 같이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여" (행 7:25), 그 나라의 국경으로 가서 일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다 지파인들은 삼손을 자기들에게서 쫓아내고,

1. 그가 블레셋 사람에게 행한 일이 유대 민족에게 큰 상처를 준 것처럼 그를 마구 비난했다. 자기 나라를 위하여 훌륭한 일을 행한 자는 이처럼 때로 비난받기도 한다. 우리 주 예수도 많은 선행을 행하셨지만 그 댓가로 돌던짐을 당하셔야 했다.

2. 유다인들은 그에게 와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잡기를 원하니 그를 그들에게 넘겨주어야 겠다" 고 말했다. - 속박받기를 좋아하고, 지배하는 자들에게 아첨하는 이 자들은 얼마나 비겁하고 배은 망덕한 인간인가! 이처럼 유대인들은 로마 사람들이 그들의 나라를 빼앗으로 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핑계삼아 우리의 구주를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삼손을 만난 유다인들은 못된 노예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채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 항의의 말을 퍼부었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들은 자기들이 블레셋 사람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고 자기들이 먼저 "스스로를 악행에 팔아 넘기지 아니했더라면 "블레셋 손에 넘어가게 되지도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Ⅲ. 삼손은 그의 백성의 권고에 온순하게 복종하여 분노하고 있는 적의 수중에 넘겨졌다(12,13절). 그러나 삼손이 유다인 3,000명을 처치하여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쉬웠겠는가? 그리고 아무도 그를 잡을 수 없었고 또한 그 누구도 그에게 감히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항복했다.

1. 이러한 그의 태도는 커다란 힘과 용기를 지닌 자로서 그의 지극한 온화함을 보여준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마음을 잘 통제하던 자이므로 적을 정복하는 법 뿐만 아니라 적에게 항복하는 방법까지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2.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지게 됨으로써 삼손은 그들을 죽일 기회를 갖게 되었다.

3.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 그는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항복하고 "도살자에게 가는 양" 처럼 순순히 따르는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에게 행한 자기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그들이 먼저 시작했으므로 내 행동은 정당하고 그들은 내게 보복할 이유가 없노라." 삼손은 유다인들에게 자기가 그들의 손에 넘어 가더라도 자기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그들을 치게 될 것이다. 자기로서 그런 일을 지극히 싫어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약속을 했다(13절). 그래서 그는 항복했다. 그러나 삼손을 배반한 유다인들은 실질상 그를 죽인 살인자였다. 유대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삼손을 죽이려 하진 않았지만 그를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그보다 더 나쁜 일을 하고 있었다. 유다인들은 이 블레셋 사람이 그를 그냥 죽이지 않고 그를 욕하고 심하게 괴롭혀 죽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이 유다 사람들도 아마 삼손이 그의 힘으로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유다인들에게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좀 더 신중히 생각했더라면 그들이 삼손을 선두로 블레셋과 싸워서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Ⅳ. 삼손이 두 줄로 꽁꽁 결박되어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졌을 때에 그는 그들을 잘 처치했다. 삼손이 그들에게 끌려왔을 때, 그들은 그들의 승리를 기뻐하고 그를 욕하였고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질렀다" (14절). 만일 유다인들이 삼손을 결박한 것처럼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을 결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삼손을 활로 쏘아(그들의 궁수가 사울에 그러했듯이) 그를 즉시 죽였을 것이고 이렇게 그를 맞아 소리를 지르거나 삼손이 여유를 가질 만한 시간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삼손이 끌려온 것을 보고 모든 승리는 그들의 것인양 소리쳤지만,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시어" 강하게 임하시어 그에게 특별한 힘과 결단을 주셨다. 그리하여,

1. 그는 곧 속박된 것을 풀었다. 그가 첫번 움직였을 때 두가닥의 새줄은 끊어져 그의 손에서 (원래의 단어의 뜻처럼) "녹아 버렸다." 이것을 본 블레셋 사람들은 물론 공포와 놀라움에 질렸을 것이며 그들의 외침은 비명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여호와의 성령의 권능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 팔 위의 줄이 풀어졌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자유함이 있으며" 이렇게 하여 자유함을 얻은 자는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다. 이것은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었다. 부활에서 그리스도의 사망의 결박과 줄을 풀었고, 나사로의 경우와는 달리 수의가 그대로 남아 있지 않고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전능하신 구주께서 사망의 권세에 결박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삼손은 그를 보고 잡은 것을 기뻐하여 소리치던 암흑의 권세를 이기게 되었다.

2. 삼손은 그를 조롱하여 모였던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쳐부수었다(15절). 삼손은 무기로는 나귀의 턱뼈 밖에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해낸 일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가! 그는 그것으로 무려 1천명을 죽였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잘 이루어졌다.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라" (수 23:10). 나귀의 턱뼈는 손에 쥐기에도 불편한 것이었으며, 손에서 빠져 버리기도 쉬운 것이었다. 또한 그리 튼튼치 못하여 얼마 안가 부러져 버릴 것이었지만, 그것은 끝까지 견고하게 남아 있었다. 만일 전에 그가 잡은 사자의 턱뼈를 무기로 삼았다면 그것은 나귀의 것보다는 훨씬 튼튼하고 좋은 무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잘것 없는 짐승의 뼈를 갖고서도 그는 놀랍게"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쳐부술 수 있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권능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다윗의 한 용사는 즉석에서 3백명의 블레셋 사람을 죽였으나, 그는 무기로 "창을 갖고" 있었다(대상 11:11). 또 한 용사는 손이 피곤하여 칼을 휘두를 수 없을 때까지 블레셋 사람을 쳤다(삼하 23:10). 그러나 이들은 삼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해내기에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어려운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임하였는데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용맹스럽게 행할 수 있다." 그가 싸울 때 유다 사람들이 그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홀로 포도밭을 밟아야 할" 자의 한 모형이 되어야 했었다.

Ⅴ.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무찌른 후 유다 사람은 그를 축하마저 해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혼자 그 자신의 승리를 자축했다. 그 후에 사울이 승리했을 때 그를 환영하였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딸들이 나와 "천명이나 쳐부순 삼손을" 축하해 주지 않았으므로 삼손은 짧은 노래를 지어 그 자신이 노래하며 자축했다. 그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귀의 턱뼈로 한더미 두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명을 죽였도다" (16절). 히브리어 rA~x](chamor)는 나귀와 더미(heap)의 두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훌륭한 말의 기교로서 블레셋 사람이 나귀처럼 쉽게 패배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는 "턱뼈를 들어올렸다" 는 뜻으로 라맛 레히라는 블레셋 사람에게 치욕적인 이름을 그곳에 남겨 두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나귀의 턱뼈를 가지러 가지 않고 싸움이 끝나자 그것을 버렸다. 값있는 유물이 되기에는 너무도 하찮은 것이었다.

 

15:1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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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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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 없음.

 

15:18

구제된 삼손의 갈증(사사기 15:18-20)

Ⅰ. 큰 일을 하고난 후 삼손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는 심히 목마르게 되었다" (18절). 큰 일을 하느라고 열을 냈던 그가 이렇게 갈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너무도 열중해 있었으므로 그 자신을 잊고 있었으나, 일이 끝나고 잠시 쉬게 되었을 때 그는 지독히 심한 갈증을 느껴 기절할 지경에 이르었다. 그가 싸울 때 하나님의 손이 특별히 돌보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아마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삼손이 그 자신의 힘과 위대한 성과를 자랑하지 않게 하고 그 자신이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평범한 인간이기에 어떤 고통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셨을 것이다. 조세푸스의 의견에 따르면, 그것은 삼손이 승리를 거둔 후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이 얻었다고 생각하고는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하며 자만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징벌하신 것이었다. 이제 그가 심한 갈증으로 죽게 되었을 때 그가 이긴 것은 그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손과 팔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의 피를 흠뻑 마셨으나, 그 피로 인간의 갈증을 채울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의 명령에 의해 그 가까이에는 물이 없었고 또 그는 너무 지쳐서 물을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 그가 일을 끝낸 후, 유대 사람은 그에게 준 상처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그러했듯이 "떡과 술을 가지고" 그에게 왔을 것이나, 그들은 삼손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라는 것은 거의 생각지도 않았다. 이와 같이 위대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도 때로 커다란 곤경이 닥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도 "나는 목마르다" 하고 호소하셨다.

Ⅱ. 그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자만으로 해서 하나님을 잊고 있는 자들도 그들의 기도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요청하는 수 밖에 없게 되는 때가 있을 것이다. 고통은 때로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내려진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두 가지 일을 탄원하고 있다.

1. 그는 최초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권능에 대한 체험을 말하고 있다.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아옵나이다."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했다는 것을 말한다. "주여 당신의 일을 행한 불쌍한 당신의 종을 돌봐주시지 않겠나이까? 나는 당신의 것이오니 나를 구하여 주소서." 그는 그의 승리를 구원, 위대한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만일 하나님이 그를 돌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블레셋 사람을 이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붙잡혀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승리를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자만에 젖어 있던 마음을 고쳐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러 한 곤경에 처해 그것을 탄원했다.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에 대한 지난 날의 체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기도로 구하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탄원이다. "주여 이전에 우리를 구해 주시던 주께서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구해 주시지 않겠나이까?(고후 1:10). 주께서 이렇게 큰 일도 행하셨으니 그보다 작은 일인들 행하시지 않겠나이까?(시 56:13).

2. 그는 자기가 이제 적에게 잡힐 위험에 있음을 탄원하고 있다. "만일 내가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게 되면, 그들은 의기양양하여 아스글론의 거리와 가드에 가서 그것을 말할 것이옵니다. 주의 용사가 이렇게 쉽게 할례 받지 못한 자에게 붙잡히게 되면 하나님께 영예롭지 못한 일이 아니겠나이까?" 가장 훌륭한 탄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찾기 위한 탄원이다.

Ⅲ. 하나님은 그에게 시기에 알맞은 위로를 주셨다. 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뼈에서 나온 것이나 혹은 땅에서 나온 물을 그 턱뼈에 담아 그에게 주셨다(19절). 하나님의 일을 위한 무기로 삼았던 그 턱뼈를 하나님의 노고를 보답해 주기 위해 그의 갈증을 채워주는 도구로 만드셨다. 그러나 나는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레히의 한 웅덩이를 터치셨다." 이 장소는 그가 턱뼈로 싸웠기 때문에 레히라고 불리웠으나, 그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도 이곳은 레히로 불리워지고 있었다(9,14절). 그리고 그곳에서 - 그곳이 들어 있든 혹은 언덕이나 밭이었든지 간에 - 하나님은 갑자기 물줄기를 터치시어 때맞게 그에게 물을 주시고, 그 곳에서 흘러나온 풍부한 물이 그 후에도 계속 나와 하나의 우물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이 물을 마시고 기운을 회복했다. 이러한 일을 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 충족한 물을 내려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응답하시어 높은 산에 강을 여시는 것(사 41:17, 18)을 볼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간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Ⅳ. 이런 일을 기억하여 삼손은 그 우물을 엔학고레, 즉 "그의 외침에 응답한 우물" 이라 이름붙여, 갈증으로 소리쳐야 했던 일과 그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다 같이 기억하도록 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그의 외침에 응답한 우물" 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삼손은 그의 힘과 승리를 나타내기 위해 라맛 레히 - 턱뼈를 들어올렸다. - 라는 이름을 그곳에 붙였지만 여기에 그는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의지했던 일을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을 붙여 놓았던 것이다.

Ⅴ.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삼손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다(20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삼손을 배반하긴 했지만 그들은 드디어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싸우게 하셨지만, 이제 그들은 삼손을 인정하고 그를 그들의 사사로 받들게 되었다. "건축자들이 내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

" 블레셋 사람의 때에" 이스라엘이 지배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비참한 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다. 비록 그들이 다른 나라 사람에게 억압받긴 했지마는 이제 사사가 나타나 그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멸망에서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내려진 축복이었다. 사사들이 다스리는 풍습대로 삼손은 2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본 장에 있는 삼손의 통치의 시작과 다음 장에서 나오는 통치의 끝을 제외하고는 그의 통치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적혀져 있지 않다.

 

15:19 없음.

 

15: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