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사기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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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입다의 최후(사사기 12:1-7)

Ⅰ.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가 암몬 족속을 치러 갈 때 자기들에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1절) 그들이 그 승리와 전리품을 나누는 일에 동참할 수 없게 되었다는 조리에 맞지 않는 이유를 들어,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교만은 분쟁의 근거이다. 교만에서는 분쟁만이 생긴다. 교만한 자들은 자기들 곁에 있는 모든 영예를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누가 시기를 참을 수 있겠는가?"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도 똑같은 일로 싸움을 걸었다(8:1). 기드온은 입다와 마찬가지로 요단 건너편에 있는 므낫세 지파의 출신이었던 것이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둘다 요셉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다른 지파들보다 더욱 가까운 혈족관계에 놓여 있었으나, 그 둘은 다른 지파들보다 더욱 서로를 질투하고 있었다.

야곱은 축복 때에 손을 바꿔 놓아 에브라임을 우위에 두었고, 그래서 나중에 그들은 열 지파의 나라를 기대하기까지 되었다. 다윗의 집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 후 에브라임 지파는 그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약속된 영예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므낫세에게 잠시라도 영광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것을 몹시 싫어했다. 서로 사랑하고 화목해야 할 친족들끼리 싸움과 불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퍽 불쌍한 일이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 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품은 분노는,

1. 이치에 맞지도 않고 부당한 것이었다. 그들이 들고 나온 이유는 "어찌하여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는 그럴 듯한 것이었다. 그러나 입다를 우두머리로 세운 것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아니라 길르앗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요청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들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 싸움에서 졌다면 그는 당연히 그들의 책망을 받을 만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암몬 사람들이 행복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되어 일이 잘 끝났으므로, 비록 그가 그들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책망 받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2. 그것은 잔인하고 포악스러웠다. 그들은 요단을 건너서 길르앗에 있는 미스바까지 소란을 피우고 왔다. 거기는 입다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와 그의 집을 불사르기 전에는 결코 자기들의 분노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맹렬한 분노는 저주받으리로다." 타당한 근거도 없는 분노가 흔히는 아주 격려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입다는 이스라엘의 적을 물리쳤으니 그들은 마땅이 그에게 축하하러 와야 했으며, 그가 행한 훌륭한 일에 대해 모든 지파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어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훌륭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댓가를 받지 못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더우기 이제 입다가 그의 딸을 잃는 재난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들은 그에게로와 그를 조위하고 위로했어야 했다. 그러나 야비한 자들은 고통을 겪고 있는 자를 괴롭힘으로써 낙을 삼는다. 이 세상에서는, 한 재난이 끝이고 또 다른 재난의 시작이 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가지 어려움을 몰아 내었다고 하여 뽐내어서는 안 된다."

Ⅱ. 입다는 그 자신을 열심히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기드온처럼 그들의 화를 누구러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에게 그랬던 것보다 더욱 포악스러워졌다. 기드온처럼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입다는 그들이 노여움을 품든지 말든지는 상관치 않고,

1. 그 자신의 정당성을 해명했다(2,3절). 그는 그들이 그와 다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즉,

(1) 그가 그 싸움에 나간 것은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암몬 사람들로 해서 몹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그의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2) 비록 입다는 그들을 부를 필요도 없었고 또한 그들에게 존경을 표할 책임도 없었지만, 그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그와 함께 싸워줄 것을 요청했을 때 그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내가 너희를 불렀으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 하였도다" (2절). 그들이 그를 책망한 이유가 진실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툴 만한 타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그가 그들에게 요청했을 때 그들이 그것을 거절했다는 것은, 그가 충분히 책잡을 만한 일이다. 이처럼 많은 죄를 범한 자가 소란스럽게 결백한 자를 책망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3) 그 전쟁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동정했어야 했다. "나는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극히 미약한 군대를 이끌고 싸워야 했으므로 이 극심한 위험 속에 내 생명을 걸어야 했다" 고 말했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이 영예는 정말 귀하게 얻어진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결코 시기해서는 안 되었으며 그들 가운데 이것을 얻기 위해 그렇게 멀리 떠나려는 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4) 그는 그 영광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그것을 모두 하나님께 돌렸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도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 즐겨 나를 쓰셨거늘, 너희들이 왜 그것을 성내느냐? 너희는 나로 더불어 싸울 만한 이유를 갖고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보잘것 없는 나를 쓰셨으니, 너희들이 나를 시기하는 것은 실상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 아니냐?"

2. 입다는 기드온처럼 그들을 달래지는 못했지만 그의 정당한 대답을 듣고도 그들이 분노를 거두지 않았을 때, 그는 이스라엘 사사의 권세로 칼을 뽑아 그들의 무례함을 징벌하고 그 자신을 그들의 분노에서 방어하려고 했다.

(1)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 뿐만 아니라 그를 옹호하는 그의 이웃이나 친구들가 싸웠으며, 추악한 말로 그들을 욕하였다(4절).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을 경멸했다. "요단 건너편에 살고 있는 너희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에서 도망해 온 자들이다. 너희는 요셉의 지파들 중 쓰레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에브라임은 그 우두머리이며, 이것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너희들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너희 이웃들은 너희가 쓰레기보다 못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너희 형제로부터 도망해 온 부랑자들로 이 구석까지 굴러 들어왔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고 했다. 길르앗 사람들은 틀림없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으며, 그들이 입다를 세워 암몬을 쳤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보다도 그들을 이 때에 더욱 높이 평가해 주어야만 하지만, 그들은 길르앗 사람들을 야비하고 부당하게 "도망한 자" 라고 불렀다. 사람이나 나라를 비난하는 것은 나쁜 일이며, 더우기 표면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하여 그들을 얕잡아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분쟁은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남을 헐뜯고 야비하게 칭하는 것은 커다란 재앙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혀는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며" (약 3:6)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혀를 그릇 사용하는 자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시 64:8). 만일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들을 "도망한 자" 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렇게 큰 유혈극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극악한 말로 분노를 자극했다." 이것이 커다란 화근의 원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 에브라임 사람들의 모욕은 길르앗 사람들의 피를 치솟케 했으며, 그들의 우두머리를 입다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분노를 위해서도 꼭 복수를 해야 했다.

[1] 그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을 들고 몰아내어(4절), 무례한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쳐죽이고 패주시켰다.

[2] 그들은 또한 도망하는 자들을 쳐죽여 완전히 보복했다(5,6절). 에브라임 사람들보다도 요단의 지리에 밝은 길르앗 사람들은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어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강을 건너도록 유인하여 쳐죽이도록 명했다. 여기서 길르앗 사람들은,

첫째로 에브라임 사람들을 멸하는 데에 매우 가혹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그 형벌은"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들판에서 패주할 때 그 도망하는 자들까지 가혹하게 쳐죽일 필요는 없었다. 언제까지나 칼로 피를 흘릴 것인가? 입다의 이러한 행위가 칭찬받을 만한 것이었는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둘째, 그들은 빈틈이 없어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히브리문자 v(쉰)을 s(사멕)처럼 발음하는 그 지방 특유의 사투리를 지니고 있어서, 다른 지방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들리는 이 발음을 결코 고칠 수가 없었다. 사람은 모방에 의해 언어를 배운다. 그러므로 처음에 sh 발음 S 발음을 사용하던 자들의 - 그 발음이 더 간결하나 더 고상하게 들려서이든 간에 - 자식들은 그들을 따라 같은 식으로 발음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봐서 에브라임 사람을 구별할 수 있었다. 우리들도 발음을 보고 사람들의 출신 지역을 알아 맞힐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너희 말씨가 그것을 증거하는도다." 이처럼 에브라임 사람들도 발각되었다. 만일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 사람이라 생각되는 자를 만났으나 그들이 그것을 부인하거든 쉽볼렛이라 말하거든 그가 에브라임 사람이 틀림없으니, 즉시 죽여 버리도록 했다. 쉽볼렛은 강 또는 냇가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쉽볼렛 즉,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부탁하라." 이렇게 해서 잡혀 죽은 에브라임 사람 수는 4만 2천이었다(6절). 그리하여 그 지파의 폭동은 진압되었다.

3. 이제 우리는 이 교만하고 성내기 잘하는 에브라임 사람을 벌한 사건 속에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볼 수 있다.

(1)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들 지파의 명예에 큰 자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그들의 나라를 부끄러워해야 했던가!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고 물음을 당했을 때, 그들은 그 어느 지파의 사람들보다도 더욱 그것을 숨기려 하였다.

(2) 그들은 분에 차서 요단을 건너와 입다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위협했지만, 이제 그들은 비겁하게 몸을 움추려 요단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영영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3) 그들은 길르앗 사람이 이렇게 먼 곳에 자리잡게 된 불운을 비웃었으나 이제는 그들이 쉽볼렛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결점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4) 그들은 길르앗 사람들을 "도망한 자" 라고 조롱했으나 이제 그들이야말로 정말 도망하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히브리어로 그 단어는(5절) 도망하는 에브라임 사람을 일컫는 뜻을 나타내나, 전에 그들은 "도망한 자" 라는 말을 길르앗 사람들에게 붙였었다. 다른 사람에게 부당하게 비난을 퍼붓는 자들은 그들이 마땅히 그 비난을 되돌려 받게 될 것이다.

Ⅲ. 여기에서 입다의 통치는 끝나게 된다. 그는 단 6년 동안만 이스라엘의 사사를 지내고 죽었다(7절). 아마도 그는 그의 딸의 죽음을 너무 상심하여 빨리 죽게 되었는지도 모르며, 그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기며 죽어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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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의 후계자들(사사기 12:8-15)

우리는 이제 이스라엘의 사사 세 사람의 짧은 통치경력을 훑어 보게 된다.

첫번째 사사는 7년간, 두번째는 10년, 세번째는 8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진다" (잠 28:2). 그리하여 선한 사람들이 채 일을 해내기도 전에 물러나게 된다.

Ⅰ. 베들레헴의 입산은, 성경에서 단 한번만 언급된(수 19:15) 스불론 태생의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성읍인 유다 베들레헴의 출신일 것이다. 그는 단지 7년만을 사사로 지내었으나, 그가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의 수로 미루어 보아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는 그 가족들의 번성과 타국과의 많은 결탁으로 그의 공덕을 더 높이 쌓아 올렸을 것이며, 입다처럼 사람들에게 뽑히어서든가 아니면 기드온처럼 직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의 특별한 점으로는,

1. 그가 모두 60명에 달하는 자손들을 가져 대 가족을 이루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그는 베들레헴을 번성시켰으며, 그가 태어난 바로 그 성읍은, "하늘의 별" 과 같은 영적인 씨앗을 배태하기로 되어 있는 곳이었다.

2. 그는 아들 삼십과 딸 삼십을 두어,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가지게 되었는데 자식을 둘 가진 자도 아들과 딸을 똑 같은 비율로 두기 힘들거늘 그는 이렇게 많은 자손들 가운데서도 슬기로운 선견지명으로 아들딸의 비율을 똑같이 하여, 이 땅 위에 후손들을 번창시킬 수 있는 남녀의 수를 적합하게 해 놓았다.

3. 그는 그들을 모두 결혼 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의 딸들은 타국으로 시집 보내었다. 즉 그는 통속 라틴어 해석대로, et maritis dedit - 그들을 위해 남편들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그는 그 교환으로 그리고 그의 이익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그의 아들들을 위해 타국에서 여자 삼십을 데려왔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주어야 할 일 세가지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아들로 하여금 율법을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며, 그에게 일거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고, 또 아내를 구해 주어야 한다. 입산의 가족과 그의 바로 윗 선조인 입다 사이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입산은 육십명의 자식을 모두 결혼시켰으나 입다는 단 하나의 무남독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딸을 죽어 버렸거나 아니면 결혼하지 아니한 채로 일생을 마쳤다. 사람이 번성하거나 멸하는 것은 모두 여호와께 하시는 일이다.

Ⅱ. 그 다음에는 가나안 북쪽에 있고 스불론 사람 엘론이 사사가 되어 법을 다스리어 잘못된 것들을 시정했다. 그는 10년간 이스라엘을 축복되게 다스리고는 죽었다(10:11, 12). 라이트푸트 박사는 엘론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40년간의 속박이 이미 시작했고(18:1), 그 때 즈음해서 삼손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북쪽에서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은 가끔 국경을 넘겨다 보며 침입할 기회를 노렸는지도 모른다.

Ⅲ. 엘론에 이어 에브라임 지파의 압돈이 사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여호수아 시대 이래로 별 주목을 끌지 못하던 에브라임 사람들이 명성을 다시 얻기 시작했다. 아비멜렉으로 인하여 세겜 사람들은 에브라임 지파에 상당한 수치가 되었다. 압돈은 많은 후손들로도 유명했다(14절). 그는 아들 40과 손자 30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들이 다 성장할 때까지 살았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사사로서 그리고 관직에서 일하는 자로서 혹은 뛰어난 인물로서 인정을 받아 모두 어린 나귀 70필을 탈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손자들까지도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이라 하겠으나, 이스라엘의 평화를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을 침입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례대로(왕하 23:17) 사사들 기념비를 세워 그들이 행한 업적을 확고히 해 두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사도 바울도 다윗에 대하여 "그의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 2:29)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그들은 사사들이 묻힌 그것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그것을 세웠으나, 이것은 오히려 세속적인 영광을 높이 평가하려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자만은 헛된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 신적인 존재였던 사사들은 이렇게 평범하게 죽어 갔으며, 그들의 모든 명예는 먼지로 화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사들의 일은 특별히 언급되어 있으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일에 관해서는 거의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다. 더우기 대제사장 비느하스(20:28)에서 엘리에 이르기까지 무려 250여년 동안 그들의 일이나 업적은 나타나 있지 않으며 단지 그 시대의 훌륭한 제사장들의 이름만이 열거되어 있을 뿐이다(대상 6:4-7; 스 7:3-5).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에서 영광스럽게 소개되고 비유되던 제사장들의 강력한 탁월성이 왜 이렇게 장기간 동안 드러나지 않았는가? 물론 그것은 제사장들의 직책을 하나의 상징이며, 그것에 의해 표상되는 원형(原型)인 영원한 제사장,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영광에 비해 그들의 것은 극히 미약한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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