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입다(사사기 11:1-3)
우리는 앞 장에서 길르앗 사람들이 모여 내장을 뽑기 위해 의논하면서 암몬 자손들을 치러 나갈 때 그들의 군사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자를 길르앗 주민의 우두머리로 앉히겠다는 결의를 했음을 읽었다. 이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그 일을 행한 댓가로 이렇게 큰 위로를 약속해 줄 만했다. 이제 모두들 이 일을 해내기에 가장 적합하고 용맹스러운 자로서 입다(Jephthah)에게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그는 세 가지 불리한 점을 갖고 있었다.
1. 즉 그는 "기생의 아들" 이었으며(1절), 곧 "다른 여자의 아들" 로(2절) 그의 어머니는 아내도 아니었고 첩도 아니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이방인이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조세푸스는 그를 "어머니 혈통에 의하면 타국인" 이라고 부르고 있다. 유대 사람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일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그에게 수치스런 일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영예로운 일을 행하여 남의 모범이 되는 한 부모나 가문의 불운 때문에 비난 받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기생의 아들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영광스러운 가문의 자손들처럼 환영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또 하나님께 기꺼이 바치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입다는 율법서 속에서 자기가 치러 가는 그 암몬 족속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 는 오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읽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바로 그 부문(신 23:2, 3)에서 자기와 같은 사생자(私生者)도 총회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은 능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율법이 - 다분히 그럴 가능성이 크다 - 금지하고 있는 것은 음행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근친 상간의 결과로 태어난 자만을 뜻하는 것이라면, 입다는 율법을 범하는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2. 그는 형제들에 의해 그의 나라에서 쫓겨났다. 그의 아버지의 적출자들은 엄격한 율법을 내세우며 그를 그곳에 거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이들이 좀더 주의 깊게 그의 뛰어난 재질을 살필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가 천부의 재능을 갖고 태어난 자로 그의 가문의 유력한 힘이며 자랑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가 서자라는 사실을 별로 중시 여기지 않고 그를 그들의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2절). 아무도 이 버림받은 젊은이가 이스라엘을 구하고 사사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그가 세우시려는 자를 낮게 만드시며,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머릿돌이 되게 하신다." 요셉과 모세와 다윗은 모두 이스라엘의 뛰어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큰 직책을 맡기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3. 그는 쫓겨나 천민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3절). 그는 형제들에게 몰려났으나, 그의 훌륭한 영혼을 지닌 자였으므로 결코 애걸하지 않고 그 자신의 힘으로 살아갔다. 이 때에 곤경에 처한 자들은 이러한 그의 용감한 태도에 감명 받아서 그의 아래 모이게 되었다. 본문에는 이들을 "잡류" 라고 표현했으나, 이들은 그들의 재산을 잃고 생활에 허덕이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입다와 힘을 합하여 약탈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들짐승들을 잡아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그리고 아마도 이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들을 침입하려는 기회를 찾고 있으나, 어떤 이유로 해서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뭏튼 바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할 자였다. 그 백성들은 우상 숭배로 가증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과 그 계약을 저버린 이방인이 되었으므로, 비록 그들이 회개는 했을지라도 사생자이며 추방당한 입다를 세우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굴욕을 느끼게 하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셨다.
존귀하게 된 입다(사사기 11:4-11)
Ⅰ. 이스라엘의 자손은 암몬 사람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하였다(4절). 아마도 이것은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친" (10:17) 사건을 다시 언급한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라는 귀절은 입다가 쫓겨난 직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입다는 쫓김을 당한 치욕을 겪은 며칠 후에 그는 다시 영예롭게 불리움을 받았다.
Ⅱ. 장로들은 입다에게로 와 그의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서면을 부탁하거나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부탁하지 않고, 그들 자신이 직접 와서 그를 데리고 가려 했는데, 그것은 그가 거절하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또 사정이 급한 만큼 조금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전하는 말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6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큰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그 이외에는 찾아 볼 수 없었고 또 실상 그들 자신은 이 일에 적합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입다가 용맹한 자로 칼에 잘 훈련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이일을 행해야 할 자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가 계획하고 계시던 자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고 그들을 어떻게 고통 속에서 빛나는 자들로 드러내시는가를 보라. 만일 입다가 그 형제들의 불친절로 인한 전환점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는 무사의 자질을 시험해 연마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그 자신이 유명한 인물이 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먹는 자에게서 먹을 것이 나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여 진을 쳤다(10:17). 그러나 대장 없는 군대는 머리 없는 몸과 같았으므로, 그들은 "우리가 싸울 수 있도록 당신이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고 그에게 요청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통치기구의 필요성을 본다. 비록 그들이 이 일에 열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지휘할 대장 없이는 싸울 수 없는 것이다. 8마찬가지로 모든 사회에는 다스리는 자와 복종하는 자가 있으며,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주인이 되려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호의를 베룰어 주도록 겸손하게 요청해야 한다. 통치기구, 특히 선한 통치기구 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있기를!
Ⅲ. 입다는 그들의 청을 거절했다.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지 않았느냐?" (7절) 입다에게 온 장로들 중에는 그의 형제들이나 혹은 그의 형제들이 그를 괴롭힐 때 함께 그를 모욕했던 장로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장로들의 직분은 "가난한 자와 고아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시 82:3, 4) 그를 추방하는 죄를 저질렀으므로, 그가 그들을 이렇게 책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치리자들은 피해받은 자를 보호해 줄 권한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이 고통 중에 있는 자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너희가 나를 미워 하여 쫓아내었으니 내가 어찌 너희들의 제안이 진실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으며, 어찌 너희들은 내가 이일을 하리라 기대하겠는가?" 그러나 입다는 매우 기쁘게 그의 나라를 위해 일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에 그에게 행한 불친절을 기억하게 하여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또 앞으로 그들의 직무를 잘 이행하도록 일깨워 주었다. 요셉도 그 자신을 형제들에게 알리기 전에 이처럼 그들의 교만을 꺾었다. 그런데 길르앗 사람들과 입다 사이의 경우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와 대체로 비슷했다. 그들은 우상 숭배로 해서 하나님을 버렸으나 그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자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했다. 그 때 하나님은 그가 그들의 청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으나, 은혜롭게 그들을 구원해주셨다. 입다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선한 자들을 무시하나 그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는 하나님의 자비와 선한 자들의 도움을 바라게 된다.
Ⅳ. 그들은 긴박한 형편에 있었으므로 그가 그들의 제안을 응낙해 줄 것을 재촉했다(8절). "우리가 전에 네게 행한 그릇된 일을 속죄하고 회개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제 우리가 너를 다시 찾아와 우리가 모욕하였던 만큼 너를 영예롭게 해주려 하노라." 이 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1. 아무리 비천한 자라도 경멸해서는 안되며, 우리를 이롭게 하지 못하는 자라고 그를 해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고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금은 그렇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들이 필요하게 되고 또 그들의 은혜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자도 우리의 적으로 만들지 않는 지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 고통에 처하여 이처럼 그를 우리의 친구로서 필요하게 될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2. 위대한 사람은 비록 경솔하고 나쁜 대접을 받더라도 용기를 가져야 됨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온화하게 즐겁게 그 억울한 일을 견디며, 하나님께서 이 어두움을 밝혀 주시도록 맡겨야 한다. 풀러(Fuller)는 그의 저서'비스가산의 전경'에서 이 이야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한 시대의 덕은 스스로 자기의 존귀를 가져오나니, 덕을 증오하던 것들도 덕을 필요로 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덕의 존귀가 더욱 빛나게 되리라.
Ⅴ. 그는 그들과 협정을 맺었다. 그는 전에 그들이 그에게 행한 모욕을 책망 했으나 그들이 회개한 것을 알았을 때, 매우 훌륭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그는 그 사실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를 모욕한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으므로(10:16), 입다 역시 용서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을 신뢰할 수 없을 만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앞날을 위하여 현명하게 그들과 협정하는 것이 신중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 그는 그들에게 신중한 질문을 던졌다(9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하시기 위해 암몬 사람의 지배를 받게 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그의 성공을 자신있게 확신하지 않고 그의 말에 "만일" 이라는 뜻을 넣었다. 그는 그 자신 스스로 확신하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즉 그는 그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싸움의 중재자이며 승리를 부여해 주시는 하나님을 우러러 보게 하시 위해 만일 그가 이기는 경우, "그들을 그의 손에 붙이시는 것은 여호와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어 내가 승리하여 돌아온다면 분명 내가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너희를 구원하면 하나님 아래 있는 내가 너희를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기를 바라는 자도 이와 똑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만일 그리스도가 너를 구원하신다면 너는 기꺼이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받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분은 너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너를 행복하게 해 주신다면, 너는 그분을 거룩하게 섬길 것인가? 만일 그분이 너를 도우신다면 너는 그분을 너의 대장으로 삼겠는가?"2. 그들은 즉시 그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주었다(10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반드시 행하리이다. 싸움에서 우리를 지휘해 주고 또한 싸움이 끝나도 우리를 다스려 주시오." 그들은 더 깊이 생각해 볼 시간도 없었다. 이 문제는 분명 토의해 볼 필요가 있었으나, 워낙 긴 급한 사태였기 때문에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뽑은 자를 위해 이 약속을 확실히 해 줄 권한이 있었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라" 는 말로 맹세하였다. 그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진실된 마음을 살피시고 후에 그것을 어기게 되면 벌해주실 것을 탄원했다. 그리하여 그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하나님께서 듣는 자가 되셨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간의 계약에 대해 비준이 이루어졌으며, 후에 "입닥가 사사가 되었다" (12:7)는 대목으로 보아, 모든 이스라엘이 이 일에 동의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입다는 그들과 함께 백성들이 모인 곳으로 갔으며(11절) 그곳에서 백성들이 동의하여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으로 삼았다." 즉 백성들과의 협정이 비준되었으므로 그는 이제 그들 장관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머리가 되었다. 입다는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영예를 얻고도 그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던지려 하였다(12:3). 하물며 그리스도께서 "이긴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해 주신 우리가 그리스도 안의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당한다 해서 낙심에 잠길 필요가 있겠는가?
Ⅵ. 입다는 이 중대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경건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는 미스바에거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께 고하였다" (11절). 즉 그는 곧 성소로 들어가 그 직책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또 그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지 기도로써 하나님께 의논했다.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 없이는 어떠한 일도 하려 하지 않았고 그 자신의 지식이나 용기는 신뢰하려 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과 그의 은총에 모든 것을 의탁하려 하였다. 그는 이 일에 대한 그의 생각과 근심들을 하나님께 모두 아뢰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자유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주여 백성들이 나로 그들의 머리를 삼았나이다. 당신께서 이 선택을 확인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당신의 아래서 또 당신을 위하여 백성들의 머리 됨을 승인해 주시겠나이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평하신 것은 단지 "저들이 왕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않았다" (호 8:4)는 것이었다. "주여", 입다는 말을 계속했다. "나는 당신의 허락 없이는 그들의 머리가 되지 않겠나이다. 당신께서 원치 않으신다면 결코 다스리는 직책을 맡지 않겠나이다." 만일 아비멜렉이 이렇게 했다면 그는 번영했을 것이다.2. "주여, 저들이 나로 앞세워 암몬 사람들과 싸우게 하기 위해 나를 그들의 장관이 되게 하였으니 이제 당신께서 함께해 주시렵니까? 당신께서 제 앞에 서 주시지 않으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저를 여기에 세워주지 마옵소서. 주여, 이 일이 제게 타당하다는 것을 알려 주시옵고 제가 이 일에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옵소서." 모든 사람들이 특히 위대한 사람들이 이렇게 하기란 퍽 드문 일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은총을 간구하고 그의 조언을 청하며 항상 그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며,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번영하게 될 것이다. 입다는 이렇게 기도로 그의 출정의 문을 열었다. 이처럼 경건하게 시작된 것은 영광스럽게 끝날 수 있을 것이다.
결렬된 화평조약(사사기 11:12-28)
이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입다와 암몬 사람들의 왕(그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이 여기에서 담판을 하고 있다. 입다는 가능하다면 두 나라가 피흘리는 싸움을 하지 않고 협상으로 화해하려 하고 있다.
Ⅰ. 입다는 이스라엘의 권세를 지난 자로서 이스라엘을 침입해 온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서 그가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왜 네가 내 땅을 치러 왔느냐?(12절) 만일 내가 먼저 너의 땅을 치러 갔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와 싸울 충분한 이유가 된다. 어떻게 무력을 무력으로 대적치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나는 네 땅을 침입하지 않았거늘 너희가 왜 이렇게 악의를 품고 내 땅을 치러 왔느냐?" 이 정당한 항의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1. 입다는 비록 용맹하고 유력한 자이긴 했지만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먼저 평화롭게 화해하기를 원했다. 만일 그가 침입자들 이 말로 설득하여 돌아갈 수 있었다면 그는 칼로써 그들을 몰아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왕의 마지막 방편이며, 어떤 방법으로도 사태를 수습할 때까지는 피의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규칙은 율법에 의해서도 존중되어야 한다. 싸움의 칼과 마찬가지로 정의(재판)의 칼도, 대적하는 무리들이 서로를 부드러운 방법으로 이해시키고 여러 가지 수단으로 화해를 시도해 보기도 전에 쓰여져서는 안 된다(고전 6:1).2. 평등의 원리에 밝은 입다는 의롭지 않은 일은 행하고자 하지 않았다. 만일 이스라엘이 암몬 자손을 해하였다면, 그는 곧 암몬 사람들의 권리를 회복시켜 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들이 이스라엘을 침입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피해를 가한 것이 분명하다면, 그는 이스라엘의 권리를 보호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정의감이 우리를 안내하고 다스리도록 하여야 한다.
Ⅱ. 암몬 왕은 입다의 요청에 따라서 이 일에 대한 그의 이유를 늘어 놓았는데, 이것은 그가 이스라엘에 침입해 들어오기 전에 알렸어야 하는 것이었다(13절), 그가 내놓은 이유란 "이스라엘이 오래 전에 내 땅을 빼앗았으니, 이제 그것을 찾아야겠다" 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암몬 사람이 이스라엘을 침입한 것은 그들이 전에 에글론과 더불어 행했던 것처럼 (3:13), 단지 그 나라를 더럽히고 약탈하여 그들의 배를 불리자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에글론 밑에서 행했을 때는 비록 이유가 뚜렷하였을지라도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지 않았었다. 그러나 입다가 이 싸움의 이유를 물었을 때 그들은 수치스럽게 사실 그대로의 의도를 밝힐 수는 없었으므로 진부한 역사적 사실를 들추어 그들이 침입한 일을 정당화 하려 했다. 아무리 나쁜 일을 한 사람이라도 저들의 정의의 양심에는 한가닥 가책이 남아 있어서, 자기들은 옳은 일을 행했다는 듯이 꾸민다. "그 땅을 다시 돌리라" 고 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부를 취할 때 어떠한 모호한 변명을 내세우는가를 살펴 보라.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던 것도 때로는 우리의 의심을 사게 되며, 또 우리의 손아귀에서 빠져 달아나기도 한다. 그러나 하늘의 가나안에 도달한 자는 그 나라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심문당한 다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Ⅲ. 입다는 그들의 요구가 매우 부당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즉 암몬 사람들의 현재 르우벤과 갓 지파가 소유하고 있는 아르논과 얍복 사이의 땅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그의 나라의 역사를 밝히 알고 있던 입다는 다음와 같이 설명해 주었다.
1. 이스라엘은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로부터 땅을 빼앗은 일이란 없었다. 그는 이 두 부족을 함께 놓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롯의 자손들로서 서로 형제였고 서로 이웃에 살고 있었으며 그모스라는 공통되는 신을 섬기고 있었고, 또 아마도 같은 왕의 지배 아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스라엘이 앗아 갔다고 주장하는 땅은 모압이나 암몬 사람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들을 간섭하지 말고) 그들로부터 아무것도 취하지 말라는 명령를 받아 그것을 종교적으로 잘 지키고 있었다(신 2:9, 19). 아모리왕 시혼이 그것을 다스리고 있을 때에 정당하고 영예롭게 그것을 얻었다. 역사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이 그 나라로 오기 전에 아모리 사람들이 모압과 암몬 사람들로부터 이 땅을 취하였다면(민 21:26; 수 13:25) 이스라엘은 거기에 대한 심문을 받을 필요도 없으며, 대답해 줄 필요도 없었다. 암몬 사람들이 그들에게 그 땅과 권리를 빼앗긴 것이라면 이스라엘은 암몬 사람에게 되돌려 줄 의무도 없었다. 그들의 일은 그들 스스로가 정복하는 것이지 결코 남이 해 줄 일이 아니었다. 그의 첫번째 해명은 그것은 "범법적 죄과가 아니다" 라는 점이었다.2. 이스라엘은 저주받은 가나안의 후손(이들은 아모리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창 10:16) 이외에는 그 어느 나라의 땅도 침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에서의 자손인 에돔 사람들의 땅이나 롯의자손인 모압 사람들의 땅을 지나 오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16절), 제일 먼저 에돔 왕에게 그 후 모압 왕에게 그들의 나라를 지나 가도록 허용해 줄 것을 부탁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이에 매우 불쾌하고 화난 이스라엘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에돔과 모압 땅을 돌아갔을 뿐 결코 국경안을 지나가지는 않았다(18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자들은, 그 댓가의 위안을 얻을 것이며, 부당한 비난에서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음을 잊지 말자. 그리하여 "후일에 우리의 의가 표징이 될 것이며 "(창 30:33),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을 것이다" (벧전 2:15).
3. 아모리 족속의 시혼 왕이 그들을 처들어 오자 그들이 아모리 땅을 빼앗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싸움을 건 자는 시혼 왕이었고 이스라엘이 아니었다(19,20절). 그들은 아모리 왕에게 그 땅을 지나게 해달라고 탄원하면서 그들이 그곳을 조용히 지나 가기만 할 것을 약속했다. "우리를 용납하여 우리 곳에 이르게 하라. 우리는 지금 우리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려 할 뿐이지 결코 여기에 머무를 생각은 없다" 고 했다. 그러나 시혼은 에돔과 모압 족속과 같이 그들의 정중한 부탁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것을 허락 했다면 이스라엘이 다른 길로 갔을는지 누가 아는가?) 그의 군사를 이끌고 와 이스라엘을 치려 했다(20절). 즉 그는 그들을 그의 땅에서 몰아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칼로 죽여(민 21:23, 24) 완전히 멸하려 했다(20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마땅히 그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맞서서 싸워 그의 군사들을 패주시켰고, 결국 그의 땅을 점령하게 되었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이 땅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이 땅에 권한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이 전에 아모리 사람이 살았던 땅이므로 암몬의 영토이며, 암몬 사람들이 그것을 소유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21,22절).
4. 입다는 이 땅이 이스라엘의 것이며, 이스라엘이 다스릴 권한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23,24절). 그들의 땅을 빼앗은 것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들은 오랫동안의 행진에 지쳐 있었으므로 그렇게 빨리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그것을 충만케 하시는 만 백성의 왕,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 즉 아모리 사람들이 소유한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특별히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시어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대적하여 선을 행하게 했다. "내가 시혼 땅과 그 땅을 네 손애 붙였다" (신 2:24).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불리한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여 아모리의 땅을 다스리게 하셨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땅을 모압이나 암몬에게 다시 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매우 귀하게 여기므로, 그것을 그리 쉽게 줄 수 없다." 그는 이 진술을 확증하기 위해 그 사자에게 논쟁을 벌였다.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과 그들이 신들이 이것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신에게 이 일을 물어 보도록 했다. 입다는 그모스를 신이라 생각하지 않고 단지 너희의 신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모스를 숭배하는 자들은 이 쓰레기 신들이 아무 일도 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그들이 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것이라." (호 2:12)(사사기 16장 24절을 참고하라) 때문에 그들의 신이 준 땅을 굳게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거늘 우리는 그럴 수 없겠느냐?" 암몬 사람들은 그들이 아모리 땅을 차지하게 한 것은 그들의 그모스 신이 도운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실상 그것은 신명기 2장 19,21절에 나타났듯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주신 것이었다. 입다는 말했다. "자 이제 우리는 너희가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대한 정당한 권한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영예와 경의의 표시로 그가 주신 것을 취할 뿐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고 그를 위해 지키고 또 하나님이 요구 하실 때는 그것을 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소유하도록 했을 뿐이며 그것을 즐기도록 하시진 않았다. 그것을 즐겨야 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5. 입다는 규정을 진술했다.
(1) 그들이 제일 먼저 쳐들어 왔을 때, 그들은 그들의 권한을 주장하기 위해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25절). "그 당시 아모리 사람에게 많은 땅을 빼앗긴 모압의 왕은 발락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곳을 점령한 일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누구보다도 그가 제일 먼저 우리를 꾸짖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잠자코 있었으며 결코 이스라엘과 싸우기를 요청해 오지 않았다." 모압 왕은 그 땅을 아모리 사람에게 빼앗긴 것은 정당한 싸움의 결과였으므로 그것을 결코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있었고 또 이스라엘이 정정당당하게 아모리 사람들에게서 그 땅을 빼앗았다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왕은 남은 땅을 지키는 데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였으며 잃은 땅에 대해서는 결코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민 22:2, 3 참조). "그 때 너희 왕도 하나님의 뜻을 묵인해 주었거늘 이제 너희가 그것을 어기려 하느냐?"
(2) 지금까지 저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조금도 그들의 방해를 받지 않았었다(26절). 입다는 그 땅이 그들의 소유로 약 300년 간이나 보존되어 왔으며, 암몬 사람들도 그동안 이것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이스라엘을 억압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고 있을 때도 역시 그렇게 했다(3:13, 14)는 것을 진술했다. 처음에는 이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권한이 확실치 않았으나 여러 세대를 지남에 따라 암몬 자손들은 영원히 그곳에 대한 권리를 잃게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문제시되지 않던 권한은 더 이상 논의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 된다.
6. 이 논쟁에서 입다는 그 자신과 이 일이 정당하다는 것을 밝히고 (" 나는 권한이 없는 땅을 취하려 하거나 계속 갖고 있으려 하여 죄를 짓지는 않았다. 만일 그러했다면 나는 즉시 그것을 반환해 주겠다"), 암몬 사람들을 책망 하였다. "네가 나를 쳐서 악을 행하여 번영하고자 하는도다" (27절). 분명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세력을 키우고 번영하던 때 (사사들의 시대에 이러한 때가 있었다.)에 이웃 나라를 언짢게 하거나 성가시게 굴지 않았으며, 또 그들을 억압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은 보복하기 위해 혹은 종교를 전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침입하지 않았다.) 그들과 싸울 기회를 찾던 암몬 왕도 300년을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이 남을 해하지 않고 결백하며 남의 비난을 들지 말아야 한다.
7. 이 논쟁을 끝내기 위해, 그는 그 자신을 하나님과 그의 칼에 맡기고 암몬 왕과 싸우기로 했다(27,28절).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판결하시옵소서." 입다는 하늘과 땅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일을 판결해 주시기를 엄숙히 선언했는데, 이것은 암몬 사람들로 하여금 타당한 이유로 설복시켜 싸우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거나 아니면 그래도 그들이 계속 싸우려 할 때 그들을 진압하려는 그 자신을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싸움은 이 세상의 모든 불화를 다스리시는 심판자인 하나님께 호소하는 방법이다. 만일 누구에게 권한이 있는 것인지 잘 모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결정해 주시도록 요청해야 한다. 그러나 그 권한이 분명히 드러났을 때에도 그것을 거절하고 침입해 오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것을 옹호해 주시고 그릇된 것을 벌해 주시도록 청해야 한다. 정의(법정)의 칼은 율법을 무시하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위한 것이라면(딤전 1:9), 전쟁의 칼은 법을 무시하고 복종하지 않는 군왕들이나 국가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울 때에도 하나님을 염두에 둬야 하며 그가 의롭지 못한 일을 옹호해 주길 기대하는 것은 극히 위험스런 일이다. 암몬 자손의 왕은 입다의 해명에도 또 그의 호소에도 동요됨이 없었다. 18년 동안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10:8) 약탈의 쾌감을 맛본 그는 이제 또 그들을 부유하게 만든 과일 나무의 주인이 되려는 욕심을 품게 되었다. 또한 남을 멸하는 데 익숙해진 그는 입다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암몬 족속과의 전쟁(사사기 11:29-40)
입다는 여기에서 영광스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또 한편, 입다는 그의 경솔한 맹세로 해서 고통 속에 괴로와하게 된다.
Ⅰ. 입다의 승리는 분명한 것이었으며, 그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밝게 드러내어 그의 탄원과 하나님의 의로우신 뜻을 이루었다.
1. 하나님께서 그에게 훌륭한 영을 주셨으므로, 그는 매우 용맹스러워졌다(29절). 그 백성들이 만장일치로 그들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입다를 뽑은 후에 입다는 정당한 이유를 내세워 암몬 왕에게 화해를 제안하였으나, 그 왕은 단호하게 거절해 버렸다. 그 때에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다. 입다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용감하고 슬기로와졌으며 그의 백성의 적에 대한 거룩한 열의가 더욱 불붙듯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의 임무를 확신시켜 주었으며 그에게 그 일의 성공을 약속하셨다. 이렇게 분명한 말씀을 들은 그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담하게 전장에 나아갔다. 그가 적진을 향해 나아 왔다는 사실이 특기되어 있다. 아마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비상한 분별력을 주심으로써,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전략적인 진영을 택하였을 것이다. 열심히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의로운 길로 가게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2. 하나님은 그에게 훌륭한 승리의 기회를 마련해 주셨으며, 그는 그것을 대담하게 활용했다. "여호와께서 암몬 사람들을 그의 손에 붙이시어(32절)" 의로우신 심판을 내리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결코 굴하지 않는 전투력을 지니게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과 싸우시는 분은 "보좌에 앉으시어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다. 입다는 그에게 주어진 호기를 놓치지 않고 잘 이용하여 드디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즉 그는 그들의 전사들을 패주시키기 위해 그들을 성읍으로 추격하여 무기를 가진 자들을 모두 칼로 쳐 죽이니 그들은 결국 이스라엘군들과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33절). 그러나 여호수아가 그 저주받은 백성을 완전히 멸한 것과는 달리 입다는 그들을 전멸시킨 것 같지는 않으며 비록 그들이 이스라엘 그들의 지배국이 된 것처럼 아첨했을지라도 그는 그 자신을 그들의 지배자로 받아 들이도록 요구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목표했던 것은 그들이 완전히 이스라엘에 항복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해하려 할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방어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해할 권리는 없는 법이다.
Ⅱ. 입다는 아주 우둔한 맹세를 했다. 마치 구름낀 날씨와 같았다. 그는 이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집에서 나오면서,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승리하게 해주시면 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 집에서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하는 사람이 누구든지 또 무엇이든지 그것을 번제로 바치겠다는 기도를 함으로써 비밀스러운 엄숙한 맹세를 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가 승리를 거두고 이 기쁨 소식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반갑게 맞아준 것은 바로 그의 외동딸이었다. 이 일을 당하여 그는 매우 당황했으나 이미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 자신의 불운을 애통하는 기간을 가진 후에 아버지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복종하였다.
1. 이 이야기에서 배워야 할 몇 가지 일들이 있다.(1) 진실되고 깊은 믿음을 가진 자들 가운데에도 때로 불신과 의혹이 일어날 수 있다. 입다는 그의 성공을 확신할 근거를 충분히 갖고 있었으며, 특히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승리를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일을 행해야 하는 순간 그는 주저했으며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30절) 내가 이렇게 행하겠노라를 맹세를 했다. 이제 그의 맹세로 해서 그가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은 그의 약한 믿음과 그가 하나님께 귀한 것을 바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2)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바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합당한 봉사를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나,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의 댓가로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그리고 우리를 이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경의로서 나타내어야 한다. 이러한 희귀한 맹세는(레 27:2)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자기 민족의 이익을 구하고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좀더 열심히 하려는 뜻을 솔직하고 분명히 나타내려는 것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3) 우리는 이러한 맹세를 하는 데 있어서 좀더 깊이 생각하고 좋은 충고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원한 후 양심의 갈등으로 혼돈 속에 빠져,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전 5:2-6) 말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또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성급하게 "이 물건이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된다" (잠 20:25). 그러므로 우리는 서원하기 전에 잘 살피고 필요한 조건과 제한해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어 양심의 갈등을 막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입다의 경솔한 맹세를 우리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신 23:22 참조).
(4) 우리가 하나님께 엄숙히 맹세할 것은 그것이 아주 힘들고 우리에게 슬픈 것이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며, 또 합당한 일이면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입다처럼 맹세한 것은 강력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내가 여호와께 입을 열어 엄숙히 서원했으니 이제 내가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35절). 즉 "나는 이제 내 자신이 한 맹세를 취소하기에는 이미 늦었으며, 그 무엇이든지 그것을 감히 없앨 수도 없고, 또 나로 하여금 그것을 포기하도록 할 수 없다." 그 물건이 나의 것이었을 때에는 "내 임의" 로 할 수 있었으나(행 5:4), 이제는 그렇지도 않도다. 내가 "서원하였으니 갚아야 한다" (시 76:11). 우리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맹세를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함받은 은총을 입었을 때 우리는 죄악을 강하게 대적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강한 노력과 함께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실행해야 한다. 내가 맹세했으니 나는 그 일을 해야 하며 또 곧 행하리로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조롱하지 않게 하라."
(5) 자식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들의 부모들에게 온순하게 그리고 기꺼이 복종해야 하며, 특히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한 경건한 결정에 잘 순응하여 그 가정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 비록 그것이 힘들고 가혹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해야 한다. 마치 레갑 족속이 그들의 선조 요나단의 명을 지켜 믿음 가운데 술을 마시지 아니 하였으며, 여기에 나오는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맹세를 지켜 드리기 위해 또 하나님과 그녀의 나라를 영예롭게 하기 위해 기꺼이 그녀 자신을 제물로 헌신했던 것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36절). 아버지는 나를 귀히 여기시나 그보다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셔야 하나이다." 아버지는 딸의 서원을 취소하거나 허락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민 30:5), 딸은 아버지가 한 서원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제 5계명을 더욱 확고히 하는 일이 된다.
(6) 우리는 친구의 재난을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가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애곡하러 갈 때, 그녀의 처녀 친구들은 그녀와 함께 가서 애곡해 주었다(38절). 그녀가 사귀었던 이 같은 연령의 친구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 매우 기뻐해 주었을 것이며 이제 그녀가 이 무서운 재난을 당하자 그들은 다시 그녀와 함께 산에 올라가 그녀의 슬픔을 매우 애통한 마음으로 같이 나누었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기뻐할 뿐 우리가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울어주지 않는 친구는 친구의 자격이 없다.
(7) 비록 경솔하고 잘못된 것이었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영예롭게 하려는 대담한 열의는 영구히 기억될 만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아버지를 위하여 원수를 갚으셨으므로(36절), 그녀의 목숨조차도 아끼지 않은 영예로운 입다의 딸을 기억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딸들이 매년마다 의식을 행했다는 것은 퍽 좋은 일이다. 여자들은 싸움에 참가하거나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금해져 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대담하게 자기를 희생시킴으로써 (아마도 그녀는 아버지가 "너는 나를 참담케 하였다" <35절>고 말하며 그의 서원함을 얘기했을 때 그녀가 헌신해야겠다고 결심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승리를 거두게 해 주신 감사로 그녀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를 꺼리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큰 일을 위해 그녀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그녀는 사람들의 속죄를 위한 제물로서가 아니라(이 영예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그 백성들에게 내리신 은혜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제물로 그녀를 바치는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8) 우리는 입다의 일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는 오늘의 환희가 돌연 슬픔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오늘의 이 기쁨이 계속되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기뻐하되 항상 슬픔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2. 이 이야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점들이 몇 가지가 있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자세한 것은 풀(Poole) 영문 주석판에 맡기고, 나는 여기서 간단히 몇 마디만 얘기하기로 하겠다.
(1) 입다가 그의 맹세대로 그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1] 어떤 학자들은 입다가 서원한 말의 문맥으로 보아 그가 그의 딸을 번데로 바쳤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며, 그녀를 "여호와께 돌리겠다" 는 문맥으로 보아 그녀로 하여금 결혼을 하지 않게 하고 오로지 일평생을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게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은 그녀가 "그녀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다" (37,38절)는 귀절과"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였다" (39절)는 귀절에 그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녀를 제물로 바쳤다면 그녀가 애통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녀가 죽게 된 일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것을 기쁘게 여겨 기꺼이 그렇게 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녀의 아버지의 무남독녀로서 그녀가 결혼하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재산이나 명예를 상속할 혈통이 끊어지게 된 그 불행한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입다가 그녀 이외에 아무런 자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34절)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입다가 그의 맹세를 회피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자든 남자든 결혼하지 않은 자가 결혼한 자보다 더욱 거룩하다거나 하나님의 일군으로 더욱 합당하다는 율법이나 풍습을 구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제사장이나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러한 전통은 없었다. 여자 예언자였던 드보라와 훌다는 모두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녀가 단지 결혼하지 않는 일에만 입다의 맹세가 한정된 것이라면 그녀는 두 달이라는 기간 동안만 애곡하기보다는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그리하여야 했을 것이다. 아니라 그녀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슬픈 이별을 고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40절의 내용, 즉 이스라엘의 여자들이 해마다 네 번씩 그녀를 위해 애곡했다는 귀절에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 그러므로 우리는 입다가 그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는 의견이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입다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자에게 내린 율법 ("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 찌니라." 레 27:29)을 그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줄로 잘못 알았기 때문에 그의 딸을 바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일을 기억하여 위로받고,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려 한다면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신 것처럼 그에게도 사자를 보내어 그 일을 정지시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아마 이러한 생각이 입다로 하여금 더욱 담대하게 행할 수 있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해하도록 허락했다 할지라도 그를 해하여서는 안 된다." 입다는 분노나 악의로 행해진 것이 아니면 살인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의 선한 목적이 이 나쁜 행동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가 맹세를 한 이상, 그 맹세를 깨뜨리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딸을 죽이는 편을 택하였으며, 하나님의 섭리가 그의 딸로 하여금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하도록 하였다고 생각했다.
(2) 그러나 입다가 그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고 할 때 그것이 잘한 일인지는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1] 입다의 딸은 그에게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매우 귀한 자식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행위를 잘한 일이라고 정당화하는 학자들도 있다. 입다는 히브리서 11장 32절에서 믿음으로 위대한 일을 행한 훌륭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행한 위대한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입다가 두 달 동안이나 생각하고 상의하여 신중히 행한 일이었다. 또한 입다는 그 일로 해서 영감을 받은 저작자에 의해 비난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 행위가 아버지의 권위를 높이 세우긴 했지만 어쨌든 이 일을 정당화하기는 퍽 힘든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한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또한 우리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그의 일상생활은 훌륭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어떤 학자는 이 일을 위대한 제물로 바쳐지셨던 그리스도의 일에 비유하고 있다. 즉 입다의 딸이 처녀였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깨끗하고 결백하였으며 우리를 위해 저주받으시고 그의 아버지에 의해 제물로 바쳐졌다. 또한 그리스도는 입다의 딸같이, 하나님께 복종하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소서" 하고 말씀하셨다.
[2]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입다가 경솔하게 맹세하고 그릇된 일을 행했다 하여 그를 비난하고 있다. 그는 그의 맹세로 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제 6계명을 어겼다. 하나님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것은 실상 라이트푸트의 의견대로 몰록 (고대 페니키아 사람들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고 섬기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 영감을 받은 저자들도 사실 입다가 그의 딸을 제물로 바쳤는지는 잘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 후에 자기의 자손들을 제물로 바치려는 자들도 확실한 위안을 받을 수가 없다. 이러한 입다에 대한 일과 제물을 바치는 그 밖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학자들도 의혹 속에서 잘 규명해 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이야기로 혼돈을 초래할 필요가 없으며 단지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만으로도 층분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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