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사기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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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아비멜렉의 반란(사사기 9:1-6)

우리는 여기에서 아비멜렉이 권세를 얻어 위대하게 되기 위해 어떠한 술책을 썼는가를 읽게 된다. 아마도 그의 어머니는 그가 야망을 품도록 충동했을 것이며, 그의 아버지의 명성이 이 일을 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그가 아버지를 계승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 외에는 그의 자만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없었으나,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라" 고 선언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이 영예를 취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나서야 했을 때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는 그의 야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 일을 행하였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Ⅰ. 그는 매우 교활하게 자기 어머니의 친척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세겜은 에브라임 지파의 중요한 성읍이며, 이곳에 여호수아는 그의 마지막 총회를 개최하였었다. 그 성읍에는 그의 어머니의 친척들이 살고 있어 그들을 설득시키는 일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 생각하며, 아비멜렉은 그 성읍을 이용하기로 계획했다. 아무도 그를 공로자로 보지 않았으므로, 그는 누가 자기를 추천해 줄 만한 업적도 없는 자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 스스로 의견을 꺼냈다. 만일 그 자신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이러한 자를 왕으로 만들려고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1. 그는 감언이설로 그들을 설득시켜 그를 지지하도록 했다(2,3절). 기드온은 70명의 아들을 남겼으며, 훌륭한 인물이었고, 유리한 관심을 주었다. 그래서 그는 그 아들들에게 아버지가 자기들의 손에 물려준 권력을 단합하여 지키며, 이스라엘을 다스리자고 야비하게 제언했다. 그는 "너희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보다는 한 사람을 왕으로 섬기는게 낫다. 나라의 일은 단 한 사람이 다스려야 잘 운영된다" 고 말했다(2절).우리는 기드온의 아들들이 아비말렉의 말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뜻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그들은 모두 그들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시리라" 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둘러대었다.

악한 일을 계획하는 자는 흔히 다른 사람도 악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나 의심한다. 그는 그의 친족들의 관심을 그에게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verbum sapienti - 현명한 자에게는 한 마디로 족하다.)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임을 생각하라." 그의 이 계획은 잘 들어맞았다. 세겜이 이스라엘의 중심지이며 훌륭한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던 세겜의 지도자들은 "그에게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는 우리 형제이며 그가 출세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유리하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2. 그들은 그의 설득에 넘어가 그에게 돈을 주었다. "그들은 은 칠십개를 내어 그에게 주었다" (4절). 이것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들은 바알브릿 묘에서 이 돈을 꺼내 주었다. 그들은 이 우상을 존경하여 그것에 의해 보호받기 위해 돈을 거기에 기탁했거나 아니면 그들이 더욱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신에게 물질을 바쳤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그 우상에게 바쳐진 돈을 가져가는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는 것을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3. 그는 군사들을 모았다. 그는 일을 하기 위해 그 나라의 건달 부랑자들과 자기처럼 방탕하고 경박한 자들을 고용했다. 그는 이러한 자들밖에 구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이들이야말로 그의 일을 하기에는 적합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Ⅱ. 그는 자기 형제들을 잔인하게 처치했다.

1. 그가 이 오합지졸들과 행한 첫 번째 일은 그의 형제들을 한꺼번에 죽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칠십명의 형제들 가운데 도망친 한 명만 제외하고는 한 반석 위에서 공공연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모두 살해했다. 이 잔인한 비극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1) 인간의 탐욕이 지니고 있는 권능이다. 그것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어 버린다. 또한 탐욕의 권능이 어떻게 인간의 자연스런 애정의 모든 유폐와 양심의 줄을 끊어 버리고, 가장 거룩하고 귀하고 값진 것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시킨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잔인한 데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2) 가문과 영예가 빠질 수 있는 위험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기드온과 같이 위대한 사람의 아들들이었으므로, 아비멜렉의 시기를 받았다. 그런데 사마리아에서 살해당한 아합의 아들 수도 이와 똑같았다(왕하 10:1, 7). 귀족들은 자기들의 형제가 하나라도 살아 남아 있는 한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높은 지위를 부러워하거나 우리의 천함을 불평할 필요가 없다. 낮은 위치에 있을수록 더 안전하다.

2. 이러한 식으로 아비멜렉은 출세할 기회를 마련해 놓았으며, 세겜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택하였다(6절). 그들은 자기들이 왕을 택하여도 되는지 또 누구를 왕으로 택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 의논하지 않았다. 비록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했을지라도, 그들은 제사장이나 다른 성읍과 다른 지파의 형제들에게 상의하지 않았다(22절).

(1) 그러나 세겜 사람들은 그들만이 유일한 백성이요, 또 그런 일을 할 지혜를 독점하고 있는 듯 이렇게 모든 일을 처리했다. 즉 그들은 그가 형제들을 죽이도록 선동하고 또 그 일을 도왔으며(24절), 그리고서 "그로 왕을 삼았다." 세겜 사람들(즉, 그 성읍을 다스리는 주요 인사요 우두머리들)은 밀로의 집(곧, 공통의 회요 가득찬 집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에 모여 그들의 백성으로서 이렇게 잔인한 살인을 한 아비멜렉을 징벌했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무엘하 5장9절과 열왕기하 12장20절에서 밀로의 집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회의 장소, 그리고 다윗의 성읍에 대하여 읽은 적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를 왕으로 삼았다." Pretium sceleris tulit hic diadema - 그의 악의는 왕관으로 보상되었다. 이렇게 피 속에서 왕국을 세운 왕으로부터 그들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2) 그외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일을 묵인해 둘 정도로 어리석었다. 그들은 이러한 횡포도 막지 못하였고, 기드온의 아들들을 보호할 줄도 몰랐으며, 또 그들의 죽음을 보복해 주지도 못했다. 단지 그들은 그들의 믿음과 함께 이성(理性)이나 영예와 자유에 대한 모든 감각, 의로움과 감사함을 몽땅 잃어버린 사람들 모양 이 잔인한 폭군에게 순순히 복종하였다. 그들의 선조들은 레위인의 첩이 살해당했을 때 얼마나 용맹스럽게 보복했던가? 그러나 이들은 기드온의 아들들의 복수를 감행하지 못할 정도로 비참하게 타락해 버렸다. 그들이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 때문이었다(8:35), "또한 그들은 여룹바알이라 하는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다."

 

9:2 없음.

 

9:3 없음.

 

9:4 없음.

 

9:5 없음.

 

9: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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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담의 비유(사사기 9:7-21)

우리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사악한 공모를 규탄하는 단 한 사람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 그를 잊어버리고 의로운 처벌을 내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를 얻게 되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이 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 주시고 이 끔찍한 재난을 더 이상 번지지 않게 하시려는 표시이기도 했다. 기드온의 아들들이 살해당할 때 특별한 섭리에 의해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기드온의 제일 어린 아들 요담만이(5절) 명확한 이성(理性)을 지니고 있었으며 여기 씌어진 그의 연설은 그의 뛰어난 독창력과 슬기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요담을 볼 때 우리는 기드온의 아들들이 살해당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요담은 그의 형제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다른 성읍에서 군사를 양성시킨다거나 아비멜렉과 경쟁하여 그 자신을 내세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기드온의 아들들이 다스리려고 한다는 선동자의 말이(2절) 근거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단지 그는 세겜 사람들에게 신실한 책망과 치명적인 결과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는 축복의 산 그리심의 꼭대기에 올라가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 때는 마침 어떤 일로 세겜 사람들이 그 산 아래 모여 있어(조세푸스에 의하면 이들은 제전을 거행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귀를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Ⅰ. 그의 말은 처음부터 매우 엄숙했다. "세겜 사람들아 나를 들으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이 너희를 들으시리라" (7절).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자 하며 그에게 응낙되길 바란다면 내 말을 참을성 있게 그리고 공명정대하게 들으라." 하나님이 그들이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원하는 자는 분별을 갖고 성실한 책망과 그릇된 것을 호소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잠 28:9).

Ⅱ. 그의 비유는 매우 창의적인 것이었다. 즉 나무들이 그들을 다스릴 왕을 뽑게 되었을 때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에게 요청을 했으나 그들은 모두 지배하기보다는 섬기기를 그리고 다스리기보다는 선한 일 행하기를 즐겨 그 지위를 거절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이 요청을 받았을 때 이 헛된 영광을 뽐내며 응낙했다는 것이다. 비유를 들어 가르치는 것은 고대의 방법이나 매우 유익하며, 책망을 줄 때는 더욱 그러하다.

1. 여기에서 그는 기드온과 그 이전의 사사들의 겸손을 칭찬했으며, 아마도 다스리는 직책을 취하지 않은 기드온의 아들들의 겸손함도 칭찬했을 것이다. 그들은 왕의 권력이나 직책을 얻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지혜롭고 선한 자들은 위대한 직책을 맡으려기보다는 유용한 인간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1) 나무들에게는 왕을 선택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즉 그것들은 모두 "여호와가 심으신 나무였기" 때문에(시 104:16) 그가 돌보아 주실 것이었으므로, 왕을 뽑을 필요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그들을 다스릴 왕이 필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왕이셨기 때문이다."

(2) 나무들 중에서 왕이 되기를 요청받은 나무들은 눈으로 보는 것과 그늘을 위해서만 있으며, 잘려 나간 후에나 유용하게 쓰이는 삼나무나 고고한 소나무가 아니라 포도나무나 감람나무와 같이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었다. 백성들의 공익을 위해 좋은 열매를 맺는 자들은, 겉으로 두각을 나타내려고 애쓰는 자들보다는 지혜로운 모든 자들로부터 마땅히 영예와 존경을 받는다. 어떤 자들은 선하고 유익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죽으려고도 한다."

(3) 이 열매 맺는 나무들이 그 요청을 거부한 이유는 모두 같았다. 감람나무는 "내가 어찌 내 기름을 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말했고(9절), 포도나무는 "내가 어찌 포도 열매를 버리고 가겠는가?" (13절) 나는 그것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왜냐하면 기름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제단과 인간의 식탁에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화과나무는 "나의 단 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11절)하고 거절했다. 우리는 이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 다스리는 일은 매우 많은 수고와 관심을 요하며, 다스리는 자는 그들을 위해 아래 위로 움직이며 완전히 일에 몰두해야 한다.

[2] 백성들의 신뢰와 권한을 맡은 자는 자기의 모든 편리와 이익을 제쳐놓고 사회의 유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무화과나무는 달콤한 휴식과 달콤한 대화나 명상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요동하며" 항상 피곤하도록 일해야 한다.

[3]영화와 권위를 얻으려는 자는 그들의 기름과 열매를 잃을 큰 위험 속에 있게 된다.

2. 그는 아비멜렉을 가시나무와 엉겅퀴에 비유하며 그의 우스꽝스러운 야망을 폭로시켰다(14절). 그는 세겜 사람들을 그에게 왕위를 제안한 나무들로 비유했다.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그는 아마도 아비멜렉이 그 자신의 탐욕보다는(2절) 세겜 사람들이 그에게 다스리도록 요청한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그것을 응낙한 것은 징벌당해야 마땅했다. 가시나무는 보잘 것 없는 나무로서 나무들 축에 제대로 끼지도 못하는 것이며 쓸모도 없고 열매도 없는 나무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남을 할퀴어 상처를 입히고 화를 끼친다. 그리하여 그것은 저주 속에서 자라나 결국 불에 던지우게 된다. 아비멜렉은 바로 이와 같은 자였으나, 그는 모든 나무에 의해서 왕으로 뽑혔다. 더우기 이 선출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이구동성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우매자가 크게 높은 지위를 얻고" (전 10:6) "악인이 횡행하더라도" (시 12:8), 또한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올바른 선택을 못하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왕으로 뽑힌 가시나무는 그가 그 직위를 허락해도 좋은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마치 그가 다스리기 위해 태어난 자인 것처럼 당연히 그들이 그를 뽑게 되어 있는 것처럼 즉시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가 "얼마나 헛된 말로 뽐내며" 그의 충성스런 부하들에게 말하는가를 보라. "너희들은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15절). 이 얼마나 쉬기 좋은 그늘인가! 이것은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로" 비유된(사 32:2) 통치자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그의 그늘에 피하려 한다면 가까이 올 때에 긁히우고, 이롭기보다는 더욱 해롭기만 할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재능을 자랑한다. 또한 그는 자신만만하게 그들을 위협했다. 만일 너희들이 내 말에 복종치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Ⅲ. 그의 호소는 매우 진실되고 솔직했다.

1. 그는 그들에게 행한 그의 아버지의 업적을 상기시켰다(17절). 즉 그는 기드온이 생명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그들을 위해 싸운 지대한 공훈을 들추어냈는데, 실상 그들이 이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었다.

2. 그는 그들이 그의 가족들에게 친절을 베풀지 아닌 한 것을 공격했다. 그들은 "기드온에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하지" 않았다(16절). 위대한 업적은 때로 매우 부당한 댓가를 받게 되며, 애굽 사람들 사이에 있었을 때의 요셉과 같이 그 후손들은 특히 올바른 보답을 받지 못한다. 기드온은 많은 아들을 남겨놓아 그의 이름과 가문을 영예롭게 하였으나, 그들은 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가 또한 그들은 "여종의 아들" 로서 기드온의 이름과 가문을 더럽힌 아비멜렉에게 경의를 표했고, 더우기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러한 일로 해서 그들은 기드온에게 매우 큰 치욕을 돌렸다.

3. 그는 그들이 잘 행한 것인지 아닌지는 사건의 결과에 따라 판단해 보라고 했다. 그는 이것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호소한 것이다.

(1) 만일 그들이 오랫동안 번영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잘 행한 댓가라 할 수 있었다(19절). "만일 너희들이 기드온의 집에 대하여 행한 것이 정당한 것이면 너희는 새로운 왕과 더불어 잘 되리라."

(2) 그러나 요담의 말대로 그들이 잔인하고 사악한 일을 행했다면 그들은 결코 번성하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20절). 따라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 공모하여 악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들은 서로 파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우리가 나쁜 일을 행하고 잘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요담은 그들에게 이러한 저주를 퍼붓고 재빨리 그의 몸을 숨겼다(21절). 그가 붙잡히지 않은 것은 그가 너무 빨리 도망하여 그들이 잡을 수 없었거나 아니면 그들이 더 이상 살인하는 죄를 저지르려 하지 않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비멜렉이 두려워 멀리 떨어진 으슥한 곳으로 도망하여 살았다. 가문과 교육이 훌륭한 자들이라도 자기들이 언제 어떠한 위기를 맞게 될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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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알의 반란(사사기 9:22-49)

아비멜렉은 3년간 아무 혼란 없이 통치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리거나 그의 나라를 위해 봉사한 것이 아니라 왕의 이름과 권한을 즐겼을 뿐이었다. 더우기 세겜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곳 사람들도 그에게 존경을 표해 주었다. 아마도 그들은 왕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를 기뻐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악한 자의 승리는 길지 못하다.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년 내에 모든 영화가 능욕을 당하여(사 16:14) 먼지로 화하리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손으로부터 이 사악한 일에 협력한 자들을 파멸시키는 심판이 내려졌으니, 원수갚은 것이 그분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셨다" (23절). 즉 그들은 서로를 시기하고 해하였다. 아비멜렉은 자기를 받들어 준 자들을 무시했으며, 그들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자기의 사욕을 채우기에 바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의 통치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그의 처사를 비난했고, 그의 과중한 세금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서로 불화하게 하여 큰 재난을 입도록 "악한 영" 을 보내셨다. 이 악한 영은, 하나님께서 묶어 두시나 때로 이러한 일을 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저들 속의 정욕이 곧 악한 영들이다. 그것들은 인간 심령 속에 자리잡고 있는 마귀들이다. 그것으로 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이렇게 움직이셨으므로 하나님께 "그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악의 저작자는 아니시지만, 인간의 죄악 자체가 인간에게 형벌이 될 때면 그 형벌은 곧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르을 싸우게 하셨으니, 그것은 그들이 기드온의 아들들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포악한 일을 갚되, 그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 그 형제를 죽이게 한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하셨다" (24절).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유념하자.

1. 조만간에 하나님께서는 무죄한 피를 흘린 일을 살피시어 그 일을 행한 자로 하여금 그 댓가로 그 피를 마시게 하실 것이다.

2. 죄악이 행해졌을 때 주범은 물론 그 일을 도운 종범자들까지도 벌을 받게 되는 법이다. 아비멜렉이 비행을 본 세겜 사람들은 이 피흘리는 일에 가담했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기까지 했으니, 그들도 마땅히 그와 함께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3. 사악한 일을 공모한 자들은 자기들끼리 대적하여 파멸하게 된다. 피 흘려 얻은 것은 결코 오래 갈 수 없는 법이다.

Ⅰ.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거의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의 태도가 돌변하였다.

1. "그들은 그(아비멜렉)를 배반하였다" (23절). 그러나 그들이 그를 택함으로써 지은 죄를 뉘우쳤다고는 씌어져 있지 않다. 만일 그들이 그를 왕으로 택한 일을 후회하여 그를 버리기로 한 것이라면 퍽 칭찬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오만과 시기로 인하여 그렇게 태도가 급변했던 것이다. 즉 그를 세운 자들이 제일 먼저 그를 배반하고 버린 것이다. 기드온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자가 아비멜렉에게 충성치 않는다는 것은 퍽 당연한 일이다. 기드온의 업적과 같은 큰 일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자가 어찌 다른 일에충성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을 배반하도록 유혹한 장본인들은 그들도 후에 배반당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임을 기억하자.

2. 그들은 아비멜렉이 아루마에 있는 시골집을 묶고 있을 때, 그를 잡기로 계획했다(41절). 그리하여 그가 그 마을로 오리라고 기대하고 "사람들을 매복시켜 그를 엿보게 했다" (25절). 이렇게 그를 왕으로 만든 자들이 이제 그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매복해 있던 자들은 그가 나타나지 않자 그곳을 지나는 나그네를 겁탈하는 행위를 했다. 이러한 일로 해서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자기들을 강도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고 느끼게 하고 점점 불안해지게 하였다.

3. 그들은 가알을 후대하고 그로 하여금 아비멜렉을 대적할 우두머리로 삼았다(26절). 가알은 종이라는 뜻을 지난 에벳이란 자의 아들이었다. 그 이름은 아마도 그의 천한 부분을 나타낸 것으로, 아비멜렉의 어머니가 여종이었듯이, 그는 아버지 편이 종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에 또 하나의 가시나무가 나타나 아비멜렉과 겨루게 되었다. 우리는 이 가알이라는 자가 본래 가나안 사람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겜 사람들로 하여금 야곱의 시대의 이 성읍의 방백이었던 하몰 사람들을 섬길 것을 권유하였기 때문이다. 가알은 매우 야망이 큰 자로 그들이 아비멜렉과 싸우려 할 때 그들의 일을 훌륭하게 처리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들의 발들에 있는 불을 꺼 주었고, 그들은 "그를 의뢰했다."

4. 그들은 모두 아비멜렉을 저주했다(27절). 그들은 아비멜렉이 그들 가까이에 있지 않은 것을 알고 매우 기뻐했으며, 이제 새로 나타난 지도자가 그를 몰아내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그들은 추수절 제전을 거행하기 위해 그들의 "신당에 들어가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했다." 그리하여 식탁에서 그리고 술마시는 좌석에서 그를 욕했을 뿐만 아니라, 제단에 제물을 바치며 그들의 우상이 그를 멸해 주기를 기도했다. 그들은 이전에 그곳에서 환성을 지르면서 그의 번영을 위해 축배를 들었고, 그를 세우기 위해 그들의 그 신당에 있던 돈을 꺼내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바로 그 곳에서 그를 저주하고 그가 멸망하기를 간구하였다. 이때, 만일 그들이 그 왕과 함께 그들의 우상을 버렸다면, 그들은 더 번성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한, 파멸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몰아낼 수 겠는가?

야망을 가진 자는 "권력을 경멸하고 권위를 모독했다." 가알의 목표는 세겜 사람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폭군을 바꾸는 것이었다. "아하,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다면! 내가 무엇을 할꼬! 나는 아비멜렉과 겨루어 그 왕관을 차지하리라." 그리고서 그는 그의 친구들을 스불에게 보내어 언제든지 그가 원할때면 그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노라는 말을 전했던 것 같다. "네 군대를 더하고 나오라. 이 모든 일을 칼로 결정하자." 이 말은 이미 아비멜렉에 대해 혐오를 느끼기 시작한 세겜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양심이 없는 자는 지조도 없는 법이다.

Ⅱ. 아비멜렉은 그의 전 군사력을 동원시켜 순식간에 그들을 멸하였다. 이제 그들이 어떻게 패배했는 가를 단계적으로 살펴 보자.

1. 세겜 사람들의 계획은 그 성읍의 통치자로서 그의 심복인 스불에 의해 아비멜렉에게 전달되었으며, 스불은 아직도 그에 대한 충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스불은 이 소식을 듣고 "노하였으며" (30절). 가알이 자기를 무시하는(28절) 소리를 들었을 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만일 가알이 이런 와중 속에서 스불을 칭찬하고 옹호해 주었다면, 가알은 그를 유리하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불은 가알의 이러한 태도에 노하여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대항하려 한다는 소식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31절). 배반자들은 가끔 그들 무리 가운데서 배반당하며, 왕에 대한 저주는 때로 이상하게 공중에 나는 새에 의해 전해진다. 그는 아비멜렉이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곧 성읍을 치러 가도록 신중하게 충고했다(32,33절). 그는 밤에 몰래 그의 군사들을 데리고 잠입해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으며, 아침에 그 성읍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이용하여 최대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성읍의 장관이 이렇게 그들의 적을 직시하고 있는 한 어떻게 세겜 사람들이 일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것을 알고서도 그에 대해 무관심했다.

2. 아비멜렉의 심복인 스불은 그들의 파벌의 주동자인 가알을 배반함으로써, 가알은 스불에게 비참한 조롱을 받은 셈이다. 아비멜렉은 스불의 충고에 따라 밤에 그의 군대를 이끌고 세겜을 치러 내려오고 있었다(34절). 가알은 아침에 "성문 입구에" 나와 이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성읍의 통치자인 스불이 자기의 친구였던 가알을 거기에서 만났다. 가알은 아비멜렉과 그의 군사들이 성읍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았다(36절). 또 그들이 자기와 함께 서 있는 스불에게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스불이 이들을 이 성읍에 보내었고 이제 스불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를 보라" 가알이 말했다. "저 산에서 우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 사람들의 무리가 아니냐?" 가알이 그곳을 가리키며 이렇게 묻자 스불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아니다. 네가 잘못 본 것이다. 네가 군사들로 착각한 것은 단지 산 그림자일 뿐이다. "그가 이렇게 그를 속인 것은,

(1) 그를 희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우둔한 자로서 그가 계획한 일에도 매우 적합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불의 말에 쉽사리 속아 넘어갔으나, 이제 그의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며 그 그림자와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2) 그를 지체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즉 아비멜렉의 군대가 다 내려올 때까지 이야기하면서 그를 붙들어 놓음으로써, 아비멜렉을 유리하게 하려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이 단지 산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말에 속아 넘어갔던 가알은(이 성읍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에발산이었거나 그리심산이었을 것이다.)성읍를 향해 급히 달려오고 있는 두 무리의 군사들을 발견하고는, 그가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 스불은 가알이 며칠 전 아비멜렉을 경멸했던 일을 꾸짖으며 그를 조롱했다(38절)."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말렉이 누구관대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거만하고 무례한 자들은 흔히들 갑자기 그들의 주장를 변경시키며 그들이 경멸했던 자들를 두려워한다. 자신만만하게 아비멜렉에게 도전하면서 "네 군대를 더하고 나오라" 로 말하던 가알은 이제 스불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네가 용기 있으면 "이제 나와 싸우라." 오만한 자가 이렇게 모욕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 아비멜렉은 마을에서 몰려나온 가알의 군대를 물리쳤다(39,40절). 스불의 책망에 위축되어 생각했던 것보다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가알은 적은 군사들을 이끌고 아비멜렉을 치러 가긴 했지만 곧 패하여 다급하게 성읍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 때 세겜 사람들의 피해는 매우 컸다. 많은 사람들이 상하여 엎드러졌다. 이것은 폭동의 결과이며, 무사려한 무리들은 영광스런 성공을 약속하는 자들에 의해 때로는 이렇게 치명적인 올무에 걸려들게 된다.

4. 스불은 그날 밤 가알과 그를 좇은 세겜 사람들의 무리를 그 성읍 밖으로 쫓아내었고(41절), 가알은 그가 온 곳으로 돌려보냈다. 그 성읍 사람들의 대다수는 여전히 아비멜렉을 싫어하였지만, 이 이야기의 뒷부분에 나타난 것처럼 기꺼이 가알과 헤어지려고 하였으며 가알을 추방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비록 큰 소리치긴 했지만 막상 일을 당했을 땐 형편없이 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그 일에 적합한 인물인가 하는 것을 그 일의 성공으로 측정하며, 일의 진전을 보지 못한 자는 그 일을 잘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단정지워진다. 세겜 사람들은 가알을 이제 신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남을 몰아내려던 그가 오히려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알이 쫓겨난 후에" 는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의 소식을 더 들을 수가 없다.

5. 다음 날 아비멜렉은 그 성을 공격하여, 그들이 자기를 배반한 것을 이유로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 아마도 아비멜렉은 그들의 주동자였던 가알이 쫓겨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비멜렉이 이 사실을 알고 자기들에게 만족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너무 중한 것이어서 이것으로 속죄될 수 없었으며 아비멜렉의 분노가 이 조그만 복종으로 가라앉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아비멜렉 군사의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불에 의한 것이었다. 이 일로 해서 세겜 사람들의 힘이 약해졌으므로 그는 이 기회에 일격을 가하여 그들의 배반을 효과적으로 징벌하려 했다.

(1) 그는 세겜 백성들이 "밭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42절). 어떤 학자들은 이들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 위해 혹은 포도의 추수로 그들의 수확을 끝내기 위해(27절) 밭으로 나갔으며, 이것으로써 그들은 피해를 입지 않고 여지껏 안전하게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물러갔으므로(41절), 그들은 이제 그로부터 피해를 입은 위험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갑작스런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것은 평화와 안전만을 추구하던 자들이 갑자기 파멸하게 된 한 예가 되었다. 또 어떤 학자들은 그들이 싸움터로 나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비록 가알이 쫓겨나긴 했지만 그들은 무기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아비멜렉과 다시 겨를 태세를 취하였으며, 여기에서 그 전에 잃었던 것을 다시 복귀하려고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다.

(2) 아비멜렉은 그 자신이 완벽하게 그들과 성읍간의 통로를 차단시켜 놓았다. 즉 한 떼는 "성문 입구에 서서(44절) 그들이 성읍으로 후퇴하거나 성읍으로부터 어떤 구조도 받을 수 없도록 했고, 두 떼는 단단히 칼로 무장된 자들로서 밭에 있는 모든 자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죽였다." 우리가 일하러 나갈 때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읍에나 밭에나 모두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리고 나서 그는 하늘에 닿을 듯한 분노로 그 성읍을 쳐들어갔다. 비록 그곳은 그가 태어난 곳이기는 했지만 그는 모든 백성들을 죽이고 건물을 부수어 그곳을 파멸했고 그곳이 영원히 황폐하길 바라는 증거로 그는 거기에 소금을 뿌렸으며, 그곳을 배반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남기려 하였다. 그러나 아비멜렉의 저주는 그곳을 영원히 황폐케 만들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후에 다시 재건되었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곳으로와 르호보암을 왕으로 모신 중요한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왕상 12:1). 그러나 이곳은 아비멜렉에게 있어서 좋지 않은 전조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무시한 세겜 사람들을 벌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인 자들을 벌하려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들을 사용하시어서 당신의 일을 하게 만드신다(사 10:6, 7). 인간들은 자기들을 영예롭게 하려고 계획하지만, 항상 영광을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6. 우상의 신당에 들어가 굳게 문을 잠그고 숨은 사람들은 모두 바로 거기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세겜 망대의 사람들" 이라 불리워졌으며(46,47절). 그 신당은 그 성읍에 속하는 것이었으나 마을의 중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성읍이 파멸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신당으로 몰려들어가, 그들의 우상의 보호 아래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신의 이름으로 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물며 믿음을 가진 우리들이 우리의 일생을 여호와의 집에 거하려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환난의 날에 우리를 그 장막 은밀한 곳에 숨기시며" (시 27:5)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이기" (잠 18:10)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안전하리라 믿어 뛰어 들어갔던 그 우상의 은신처는 올무와 함정이 되었다. 즉 그것은 거짓된 은신처였다. 이들이 모두 그 속에 감금되었을 때 아비멜렉은 쾌재를 부르며 그의 잔인한 계획대로 즉시 그곳에 불을질렀다. 그리하여 둥지에 모인 새들은 그의 명령에 따른 군사들에 의해 모두 불에 타죽게 되었다(48,49절). 그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부하들에게 그가 하는대로 따르라고 명했다. "나를 보고 나의 하는대로 하라" (7:17).그는 기드온과 같이 훌륭한 대장이 된 것처럼 그의 군사들에게 명확한 지시를 내렸으며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다. "너희는 나의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저쪽으로 가지 말고 이리로 오라." 그리스도의 군병들은 이처럼 그들의 행실을 본보기로 남에게 가르쳐야 한다(빌 4:9). 그와 그의 군사들은 망대 근처에 있는 나무가지들을 찍어내어 그것을 신당의 기둥 아래 모아놓고 거기에 불을 지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불사르거나 연기로 질식시켜 죽였을 것이다. 인간은 어쩌면 이리도 사악하게 서로를 멸하는 것인지! 이러한 잔인성은 그들의 욕정에서가 아니면 또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세겜의 망대에 숨었던 사람들은 밀로의 집에 있었던 바로 그 자들이며, 요담의 저주가 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밀로의 집에 있던 자들도 삼키었다(20절). 이 때 약 1천명의 사람들이 불에 타죽었으며, 아마도 이중 많은 사람들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의 분쟁에는 무관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내란에서 그들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처럼 폭동을 일으키는 자들은 "죄악을 범한 자들만을 멸하지 않고" 무죄한 사람들에게까지 같은 재앙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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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멜렉의 죽음(사사기 9:50-57)

우리는 아비멜렉의 손에 의해 세겜 사람들이 완전히 파멸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사악한 일을 주동했던 바로 그가 파멸할 차례였다. 데베스는 자그마한 성읍으로서 세겜에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부족 마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반란 그 일에도 협력했을 것이다.

Ⅰ. 아비멜렐은 이 성읍도 멸하려 하여(50절), 그곳 사람들을 그 마을에 있는 성으로 몰아넣었다(51절). 그리고서 그는 바알브릿의 견고한 신당을 멸하였으니 이 성도 틀림없이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이 데베스의 신당이 다른 것들과는 달리 그에게 보복을 가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 성에 불을 놓아 적어도 성문만큼은 태워 버리려고 하였다(52절). 하나의 성을 황폐케 하는 데 성공한 자는 또 다른 성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일은, 후에 포위한 성벽에 근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려주는데 인용되었다(삼하 11:20 이하).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파멸시키고자 하는 자들은 정신을 혼미케 하신다.

Ⅱ. 아비멜렉은 그 성을 공략하는 도중에 맷돌짝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57절).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비록 그가'세겜 사람들과의 싸움에서'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그로 하여금 살지 못하게 하셨다" (행 28:4). "악은 죄인을 좇으며," 그가 승리하여 안심하고 있을 때도 그를 뒤따른다. 우리는 데베스가 세겜과 비교할 때 매우 보잘 것 없는 성읍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큰 성읍을 정복한 아비멜렉은 데베스쯤은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 성읍을 정복한 후 그 성을 다루는 일은 더욱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을 쳐부수지도 못한 채 오히려 거기에 그의 명예와 함께 묻히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권세있는 자들" 은 때때로 극히 약하고 보잘것 없는 자들로 해서 당황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남을 해하고 만족하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거룩한 섭리를 볼 수 있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을 징벌할 몇 가지 이유를 갖고 있었으며, 그는 그것을 재치있게 행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데베스를 멸함으로써 그의 분노를 만족시키려 했을 때 그는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진실로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 아비멜렉의 죽음에서는 다음 세 가지의 형편이 주목해 볼 만한 일이다.

1. 그가 그의 형제를 "한 반석 위에서" 죽인 것과 같이, 그 자신도 하나의 돌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2. 그의 두골이 깨어졌다. 즉 왕관을 탐내어 그것을 쓰고자 죄악을 저지른 그의 머리 위에 보복이 내려졌다.

3. 그 돌은 한 여자에 의해 던져진 것이었다(53절). 그가 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으나, 누가 그것을 던졌는지를 그가 목격하게 된 것은 커다란 수치였다. 시스라는 여인의 손에 죽었으나 그 자신은 그것을 몰랐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그 돌이 한 여인이 던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그의 숨이 끊어지기 전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그가 한 여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수치스러운 사실이었다.

(1) 그는 이렇게 수치스런 상황에서도 어리석은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의 영혼이 장차 어찌될는지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 기도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손상된 체면을 무마시키기에 급급했고, 그의 부수어진 두골을 미봉해 놓으려 하지 않았다. "오, 아비멜렉과 같이 강한 자가 여인에게 죽었다 말하지 말라!" 아비멜렉은 죽었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은 강하게 살아 있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헛된 영광을 지키려는 기질은 변함이 없었다. Qualis vita, finis ita - 그의 생애가 어떠함같이, 그의 죽음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죽게 하여 그의 잔인함을 벌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자존심도 또한 벌하셨다.

(2) 이 굴욕을 피하기 위해 그는 어리석은 제안을 했다. 그는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가 여인에게 죽었다고 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부하를 시켜 자기를 찔러 죽이게 했다. 그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여인에게 죽임을 당한 일이 감추어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죽음을 더 더럽힐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으로 해서 자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부하를 명하여 자기를 죽이게 했다는 것보다는 "여인이 그를 죽였다" 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두가지 일로 해서 끊임없는 치욕을 받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아비멜렉의 일이 그의 역사의 어떤 이야기보다 더욱 뚜렷하게 후손들에게 기억되어져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요압은 자기가 "성에 가까이" 간 일에 대해 다윗이 자기를 책망할 것을 예상하고는, 아비멜렉의 이 일을 인용했었기 때문이다(삼하 11:21). 죄된 방법으로 수치를 감추려 하다 보면,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영원히 기념하게 되고 만다.

Ⅲ. 결국 아비멜렉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 이스라엘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고 내란은 끝나게 되었다. 따라서 아비멜렉을 따르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다" (55절).

2.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영광을 더하게 되었다(56,57절).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으며", 요담의 저주도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유 없는 저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라.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항상 영광되게 하시며, 모든 인간들에게 피는 피로써 보복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심판으로 알려지시며, 악인은 자기 자신이 만든 함정에 걸려든다." 사악함은 잠시 번성할 뿐 영원히 그 번성을 지속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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