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을 진정시킨 기드온(사사기 8:1-3)
이스라엘의 적 미디안 사람들이 항복하자마자, 과격한 성격을 지닌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기드온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이 때 만일 기드온이 큰 지혜와 관용으로 그들을 즉시 제지시키지 않았다면 의외로 큰 싸움이 터져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적장 오렙과 스엡을 잡아 기드온에게 가지고 왔을 때 그들은 기드온의 성공을 축하하고 자기들이 해야 했던 그 일을 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에게 화를 내며 그와 다투려 했다.
Ⅰ. 그들의 트집은 매우 불평스럽고 부조리한 것이었다.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1절) 에브라임은 므낫세의 형제이다. 므낫세는 기드온의 혈족이었으며, 야곱과 모세의 큰 축복을 받았다. 그러므로 에브라임은 므낫세가 그를 능가할까 보아 매우 시기하고 있었다. 이처럼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서로 분쟁하는 것에 대해, 이사야 9장 21절에 언급되어 있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 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다(잠 18:19)." 그러나 그들이 기드온과 다투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들은 기드온이 미디안을 공격하러 갈 때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성내었다. 왜 그들은 주동자로 부름받지 못했는 가고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선두에 서는 영예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 기드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해야 했다. 그는 그 영예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으며 또 그것을 탐내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돌렸다. 그러나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 거룩한 댓가를 차지하려" 그와다투었다."2. 왜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 일을 자진해서 행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그들의 적이 그들의 나라를 치기 위해 일어섰다는 소문을 들었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정식으로 요청을 받지 않았다 해도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마땅히 그 싸움에 참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의 백성들을 위해 이 실질적인 수고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보다 그들 자신이 이 영예를 차지하려 했다. 드보라 시대부터 이러한 에브라임의 뿌리가 있었다(5:14). 그런데 왜 이제야 그것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그 싸움 자체가 그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기드온의 요청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3. 기드온은 그들을 부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면목을 세워주었다. 만일 그가 그들을 불렀다면 그들은 대부분 겁에 질려 되돌아 갔거나 아니면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어 면직당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드온이 그들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치욕을 면할 수 있었다. 비열한 자들은 위험한 고비가 지났을 때 매우 용감해지나 이 위험한 일을 해낼 용기도 없으면서도 명성을 얻으려 한다.
Ⅱ. 기드온의 대답은 매우 평온하고 온화했으며, 자기를 변명하기 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었다(2,3절). 그가 그들에게 답변한 태도는 다음과 같다.
1. 극히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그가 받은 모욕에 대해 분개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태도에 노한 말을 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부드럽게 그들에게 조리에 맞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미디안을 이긴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감정을 잘 극복한 것으로서 참된 영예를 받을 만했다. "성내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도 낫다."2. 매우 점잖고 겸손하여, 기드온 자신보다도 그들을 더 높게 평가해 주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즉 적의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죽인 에브라임 사람들이 제일 처음 공격을 제시한 기드온보다 더욱 영예로우며 나라에 더 큰 공헌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교회의 적을 멸하는 일은 포도송이를 거두는 것으로 비유된다(계 14:18). 기드온은 여기에서 포도송이를 모든 자기보다 포도송이를 따낸 그들이 낫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승리를 하기 위해 싸우는 과정이 종종 승리의 획득보다도 더욱 영예롭고 중대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에브라임을 인정해 주기보다는 그들 자신이 자기들의 용기와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비록 기드온은 그들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해 자신의 공적은 낮게 평가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씌워준 화관을 결코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너희 많은 군사들이 그 큰 인물들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니 겨우 300명의 군사를 지닌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용감한 일에 비교가 되겠느냐?" 고 했다. 이러한 기드온의 태도에서, 우리는 자기 부정의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1) 겸손한 태도는 다른 사람의 시기를 제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때로 의로운 일을 한 자가 시기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전 4:4). 그러나 그 일을 행한 자가 그것을 자랑하지 않을 때는 시기를 받지 않게 된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자들을 그 여러 훌륭함에서 끌어 내리려 하는 자는 정말 사악한 자이다.
(2) 그것은 또한 분쟁을 끝맺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 교만에서는 다툼만이 일어날 뿐이기" 때문이다(잠 13:10).
(3) 위대한 일을 행한 자가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가장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 일이다. 기드온의 승리는 그의 겸손을 크게 드러내었다.
(4) 겸손한 자들은 "그들 자신보다 남을 더 존중하고 서로에게 영예를 돌리기를 즐긴다."
그러면 이제 이 쟁론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을 그들의 대장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이 영예롭게 하신 자로서 그를 마땅히 존경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매우 저속한 말투로 극히 우스꽝스러운 것을 트집 잡으며 그들의 분노를 터뜨렸다. 몹시 화를 낼 때 이성(理性)은 침착하게 된다. 그러나 기드온의 "유순한 대답은 그들의 분노를 쉬게 했으며" (잠 15:1), "그에 대한 그들의 노가 풀리었다" (3절). 즉 그들은 기드온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었으나 기드온의 침착한 태도가 그것을 서서히 식혀 주었다. 아무리 위대하고 선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받드는 자들의 어리석음과 불친절한 행위 때문에 그들의 인내를 시험당하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이상한 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미디안을 추적하는 기드온(사사기 8:4-17)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게 된다.
Ⅰ. 기드온은 용맹스런 대장으로서 남은 미디안 사람들을 추격하여 강타를 가하였다. 먼저 많은 수의 적군들을 살해했다. "칼은 든자 12만명이 죽었다" (10절). 기드온의 군대는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해치웠으며,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손쉬운 먹이였다. 그러나 일반 군사들보다도 도망하기 쉬었던 두 미디안의 왕들은 1만 5천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에브라임 사람들이 길을 막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 자기 나라로 돌아왔던 것 같다. 기드온은 만일 그들을 도망치게 한다면 그의 임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그곳에서 쫓아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을 이 세상에서 쫓아내려고" (욥 18:18) 하였다. 이러한 결심 때문에 그는 단호하게 그들을 추격하였고 마침내 그 일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 그의 굳은 결의는 매우 훌륭했다. 그는 지극히 불리한 조건과 저조한 사기 속에서도 자기의 뜻을 실행했다.(1) 그는 단지 300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있었으나 이제 그들은 나팔과 횃불 대신 칼과 창을 들었다. 하나님은 "이들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리라" (7:7)고 말씀하셨으며, 기드온은 이 약속을 굳게 믿고 단지 300명의 군사들만 데리고 있었다(4절). 이 약속의 말씀으로 해서 그는 수천명의 힘보다 이들 300명의 군대에 더 많은 기대를 걸었다.
(2) 그들은 "비록 피곤하나 그를 따랐다." 즉 그들이 일을 행하느라고 지칠 대로 지쳤으나, 그들은 아직도 적을 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리 영혼이 싸울 때에도 우리의 힘이 극히 미약하긴 하나, 이처럼 우리의 권력을 다해야 하며 비록 피곤하나 싸우는데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다.
(3) 비록 자기의 동족들이 기드온을 낙담시켰으나, 그는 열심을 잃지 않고 아직 다하지 못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 계속 진격했다. 만일 우리를 도와야 할 자들이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우리는 의무 이행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비난과 경멸을 묵살할 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모른다.
(4) 그는 "장막에 거한 자의 길" (11절)을 통하여 먼 길을 행진했다. 그것은 그가 그곳 사람들이 성내에 있는 마을 숙곳이나 브누엘의 사람들보다 친절하리라고 기대한 때문이거나 (도시보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대체로 더 관대하며 인정이 많다), 아니면 적군들이 기드온 군사가 그 길로 들어오리라고 조금도 기대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보다 갑작스런 기습작전을 도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리라. 결국 그는 승리를 완수하기 위하여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로소 그는 자기의 군사 300명이 배고픔과 갈증과 고통을 잘 참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유리한가를 알게 되었다. 여기서 "적군이 안연히 있었다" 는 귀절로 보아, 그는 전처럼 밤에 적군을 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죄인들의 방심은 그들을 파멸시키며, 경계하고 있지 않을 때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2. 그의 성공은 선한 일을 하는 자들의 결의와 근면에 큰 격려가 되었다. 그는 적군을 무찔렀으며(11절), 두 왕을 사로잡았다(12절). 사악한 자들에게는 뜻하지 않고 때에 두려움을 만나리라.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을 피하여" 달아나는 자는 오히려 그리고 달려가 엎드러질 것이다. "그가 철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쏘아 꿸 것이니라" (욥 20:24). "재앙이 죄인을 추적하는 "연고니라.
Ⅱ. 의로운 사사로서의 기드온은 무례하고 못된 이스라엘 사람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징벌하였다. 그들은 모두 갓 지파에 속한 백성들로서 요단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1. 그들의 범죄는 중대했다. 기드온은 극히 미약한 수의 군사로 이스라엘의 공통된 적을 추격하여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하였다. 그의 대열은 먼저 숙곳을 지나 브누엘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을 지날 때 방백들이 그를 정식으로 환영하며 그의 승리를 축하해 준다거나 성읍의 주요 인사들이 영접을 하거나 그의 군사들을 돕지 못한 것을 사과한다거나 하는 일들을 기대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그는 단지 굶주린 그의 군사들을 위해 필요한 식량을 제공해 줄 것을 매우 겸손히 간청했다. "청컨대 부디 나를 따르는 자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5절). 길 가는 나그네가 이런 부탁을 한다 해도 들어 주어야 하거늘, 이 자들은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은 진실한" (계 17:14) 군사들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이 매우 영예롭게 한 자들로 그들의 나라를 위해 큰 공을 했고 지금도 그 일을 수행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승리를 거둔 공로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 형제들은 그들을 위하여 마땅히 필요한 것을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숙곳의 방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존경할 줄도 몰랐다." 이유는 이렇다.(1) 그들은 하나님을 경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세우신 기드온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를 모욕하고 희롱했으며 그가 이미 이루어 놓은 영예로운 성공을 무시하였고, 지금 하려는 일을 방해하면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미디안의 남은 군사들을 보고서 그 군사들이 그를 잔인하게 대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비와 살문나(Zalmunna)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느냐?" 그들은 기드온의 빈약한 군사수를 보고서 결코 그가 그들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2) 그들은 그들의 형제들에게 조그마한 동정심마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믿음은 물론 사랑도 결여되어 있어, 기진맥진한 자들에게 떡 한 조각도 주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들이 방백인가? 이렇게 타락하고 사악한 자들을 이스라엘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이들은 물론 바알 숭배자이며, 미디안은 이롭게 하는 자들이었다. 브누엘 사람들도 기드온의 요청에 똑같은 대답을 했으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 (8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 그들의 죄악에 대해 기드온이 형벌을 경고한 것은 매우 정당한 일이었다.
(1) 그는 그들을 즉시 처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적을 추격하는 그로서는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는 그들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하는 일을 성공시키고 돌아와 그들을 더욱 부끄럽고 당황하게 만들기 위한 때문이었다.
(2) 그러나 그는 그가 어떻게 벌할 것인가를 말해 두면서(7,9절), 하나님이 그를 도와 그가 꼭 성공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만일 그들이 조금만이라도 분별력이 있었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그것을 속죄하기 위해 그 후에라도 곧 그에게 식량을 보내 주었을 것이며, 만일 그들이 그렇게 했다면 그는 물론 그들을 용서해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형벌을 경고하시며 회개하도록 재촉하시나, 악인들은 "닥쳐올 진로를 피해 달아나려 한다."
3. 그들이 경고를 무시하였으므로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매우 정당한 것이었다.
(1) 숙곳의 방백들이 제일 먼저 형벌을 당하였다. 기드온은 그곳에 77명의 방백들과 장로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들의 이름과 거처를 문서에서 발견했다(14절). 그들은 그가 미디안 사람들을 거의 잡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놀랍게도 그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 이제 그의 300명의 군사는 재판장들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방백들을 포위하고 그들을 사로잡아 기드온 앞에 포로로 데리고 왔을 때, 그는 "이자들은 내가 결코 승리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여 내 청을 모두 물리쳐 버렸다" (15절)고 했다. 또한 그는 그들을 가시와 찔레와 형벌을 주었으나 죽이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외에도,
[1] 그는 그들의 몸을 가시와 찔레로 고통당하게 했으며, 그들의 "살을 찢었다" (7절). 남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는 이렇게 무자비하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 아마도 기드온은 그들의 마음이 약하고 겁이 많아서, 자기 군사들의 거칠고 단호한 행동을 비웃고 있었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그들의 나약함 때문에 그들을 이렇게 괴롭혔다.
[2] 그는 그들을 훈계했다. 이렇게 고통을 줌으로써 그는 숙곳 사람들을 징벌했다(16절). 그는 그들을 죽이려 하지 않고 이렇게 훈계로써 그들을 바로잡아 그들로 하여금 장차 지혜롭고 더 나은 자기 되게 하려 했다. "그는 그들을 알도록 하였다" (문자적 의미로 그러하다). 즉 그는 그들이 자기 자신들과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과 또 자기들의 의무를 알도록 인식시키고, 기드온이 누구인지 알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화관을 씌워 주신 이 승리를 통해서도 기드온이 누구인가를 알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가시와 찔레로 고통을 당할 때에야 비로소 그전에 깨닫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징벌과 책망으로 단련시키고 가르치심으로써 지혜롭게" 해 주시며, 이렇게 하여 올바로 되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귀를 열어 훈계를 듣는다." 우리의 거룩한 구세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히 5:8). 모든 사람들도 "찔레에 찔리고 가시에 아파하며 살을 찢기더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나를 깨닫게 하시니, 내가 그 안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2) 다음은 브누엘 사람들이 화를 당하였는데, 물론 그들은 어떤 타당한 이유로 해서 숙곳 사람들보다 더 가혹한 벌을 받은 것 같다(17절).
[1] "그는 그들의 망대를 헐었는데" 그곳은 그들이 신봉하고 영광을 돌렸던 곳이었다. 그리하여 아마도 그들은 미디안 사람들을 쫓기보다는 그들 자신의 안이를 찾으며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을 비웃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만으로 해서 파멸해 버리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
[2] "그는 그 성읍 사람들을 죽였다." 그러나 그가 죽인 자들은 단지 그를 모욕한 사람들뿐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방백들이나 장로들은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성읍의 가장 무례하고 야비한 자들만 죽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위협만 가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브누엘의 사람들을 징벌하였다" 고 했다.
미디안의 두 왕의 죽음(사사기 8:18-21)
여호와의 집에서 시작된 심판은 이스라엘 사람들인 속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징계했으나, 그것만으로 모든 심판이 끝나지는 않았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왕들을 잡아 그의 승리를 입증하였으나, 이제 그는 이들을 심판해야 했다.
1. 그들은 얼마 전에 다볼산지에서 기드온의 형제들을 살해하였음이 드러났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미디안 사람들을 피하여 산에 있는 굴 속에 숨었을 때(6:2) 이 두 왕은 그들을 찾아내어 잔인하게 죽여 버렸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그들이 죽인 자들은 어떠한 자이더냐" (18절)고 물은 것은, 그가 그 일을 이제야 물어볼 정도로 형제들의 살해에 무관심했었다든가 아니면 이 거만한 왕들이 그것을 숨기려 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살해한 일을 자인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하여 그들의 처벌을 더욱 정당하게 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죽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비록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긴 했지만 지금의 이 기드온의 표정처럼 그들도 놀라운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큰 일을 위해 태어난 왕자 같더라" 고 했다.2. 그들이 살해한 것을 자백한 이상 기드온은 오렙과 스엡을 죽였을 때 처럼 (7:25) 그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혈연관계상 원수를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 을 선정하여 그들을 죽이도록 했다. "그들은 내 형제이도다" (19절).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기드온은 구태여 그들을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피흘린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통곡하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으로 그들을 복수해야 했다. 그들이 왕이긴 했지만 그에 의해 그들의 피가 흘려져야만 했다. 그들은 얼마 후에 이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살인자는 거의가 모두 이 세상에서도 벌을 받게 된다.
3. 이 일은 곧 기드온 자신의 손을 통해 수행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혈육상 원수를 갚아야 할 자" 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가까운 핏줄인 그의 아들을 택하여 (왜냐하면 그의 아들도 또한 살해당한 자들의 친척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죽이도록 했다(20절). 기드온은 아마도 그의 아들이 이러한 의로운 일을 담대히 행하도록 훈련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1) 이 소년은 그 자신이 이 일을 하기를 꺼려했다. 비록 그들은 아무 반항도 못한 채 죽게 되어 있었지만 "그는 아직 어려서" 이러한 일에 익숙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워 하였다. 용기는 항상 혈통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2) 그 죄수들은 기드온이 그들을 죽여주기를 원했기(21절) 때문에 그들을 죽여야 한다면 기드온 자신의 손으로 죽여 달라고 애원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영예롭고 편했다. 왜냐하면 기드온의 센 힘으로 그들을 좀더 빨리,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이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니 기드온의 성숙된 힘을 뜻하는 것으로써 그들은 "너는 지금 센 힘을 갖고 있다. 그 소년이 그 일을 하기엔 아직 이르다. 그러니 네가 우리를 죽여다오" 하고 부탁을 한 것이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그들이 성인이 된 후에 좀 더 큰 힘으로 일해 주기를 기대된다. 그리하여 기드온은 그들을 재빨리 죽이고 "그 약대 목에 꾸몄던 달 형상의 장식을 취하였다." 이 장식은 아마도 그들의 충성이나 우상 숭배를 나타낸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알 신이 해로 상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세라는 달로 상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모든 장식을 떼어 버렸다(26절).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여느 사람처럼 자기의 유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왕의 파멸과 두 방백(7:25)의 죽음은, 오랜 후에 교회의 적을 파멸시키는 전례로서 언급되었다. "저희 귀인으로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저희 모든 방백으로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시 83:11). 그리하여 이들을 그들처럼 죽게 하소서.
기드온의 겸양과 우행(사사기 8:22-28)
Ⅰ. 기드온이 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후 백성들은 그에게 그들을 다스려 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매우 겸손하게 이것을 거절했다.
1. 그들이 그에게 그것을 요청한 것은 올바른 일이었다.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였으니 우리를 다스리고서" (22절)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수고를 기울였던 그가 이후로부터 당연히 그들을 다스릴 권한과 영예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한 자가 이후에 그들을 다스리는 것이 퍽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켜 보자. 그는 우리를 가장 사악하고 위험한 우리 영혼의 적의 손아귀에서 우리를구원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우리를 다스리셔야 한다. 하늘에서 큰 신임을 얻고 이 세상에서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훌륭한 통치자가 우리에게 또 있는가? 우리는 구원받았으니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눅 1:74, 75).2. 기드온이 그들의 청을 거절한 것은 영예로운 일이었다. "나는 너희를 다스리지 않겠다" (23절). 그가 행한 것은 그들을 섬기려 한 것이었지 다스리기 위해 한 일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 자신이 위대해지고 명예를 얻으려고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을 안전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려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이 권세를 탐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그의 자손에게까지 물려 주려는 욕심도 없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나 죽은 후에나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특별히 그의 성령을 보내시어 너희를 다스리실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그는 겸손하여, 그 자신과 그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행한 훌륭한 일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댓가를 받았으므로 다스리는 영예를 누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훌륭한 자로 하여금 너희를 다스리게 하라."
(2) 그는 신앙심이 강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스려서 주실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며 다른 백성들처럼 왕이 다스리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그의 공적을 미끼로 그를 그들의 통치자로 삼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피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드온은 결코 이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한 자는 하나님께 돌려야만 하는 영광을 그 자신이 받으려 하지 않는다.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고전 1:13).
Ⅱ. 기드온은 노략물로 에봇을 만들어 숭리를 기념하려는 변칙적인 열심이 있었다.
1. 그는 그들에게 노획품으로 얻은 귀고리를 그에게 주도록 요청했는데, 이러한 장식품들은 살해당한 자들 가운데서 많이 있었다. 그가 그것을 요구한 것은 그 물건이 가장 좋은 금이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사용하기에 퍽 알맞은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거나, 또는 그들이 이 금귀고리를 미신적인 의미로 해서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금송아지의 형상을 만들기 위해 금을 요구했던 아론처럼(출 32:12) 기드온도 그것을 요구했다(24절). 그는 그에게 다스리도록 요청한 자들이 금귀고리 주기를 거절하지는 않을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요구했을 때 그들은 그것을 내주었다(25절).2. 그도 또한 자기 몫으로 되었던, 미디안 왕들에게서 취한 전리품도 내어 놓았다(26절). 그들은 가장 훌륭한 노략품으로 "수놓은 채색옷" 을 얻었었다(5:30).
3. 이것으로 그는 에봇을 만들었다(27절). 그것은 기드온 사사의 성읍에 이 거룩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그럴 듯한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신성한 의복인 에봇을 만든다는 것은 퍽 경솔한 처사였다. 나는 훌륭한 사람의 행동은 될 수 있으면 좋게 보려는 자로서 기드온의 행실 역시 좋게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가 보통 그러하듯이(호 3:4), 에봇과 함께 드라빔을 갖고 있지 않았나를 의심하게 된다. 또한 그는 이미 전에 거룩한 일을 행하기 위해 단을 쌓았으나 앞으로도 계속 여기에 제물을 드려 의심스러운 일들은 신탁으로 상의하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스펜서(Spencer)박사도 이와 같은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각 지파는 각자 통치 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또한 자기네 지파의 종교를 갖고자 했다. 사사기 전체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실로와 거기에 있는 법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된 곳이 없다.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그럴 때도 있지만, 주로 인간들의 범죄로 인하여서, 오직 한 제단에서만 예배를 드리도록 규정해 놓은 그 율법은 초기에도 후대보다는 기대만큼 그렇게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후대에는 지극히 선한 왕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도" (우상 숭배의) 산당이 제거되지 않았다" 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는 율법은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 지극히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즉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드온은 그의 무지와 경솔함 때문에 비록 선한 의도였을지라도 에봇을 만드는 죄를 범했다. 실상 실로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에브라임에 있었으나, 그 지파 사람들이 그에게 잘 순종하지 않으므로(1절), 그는 아마 신탁할 일이 있어도 그곳에 잘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집 옆에 그러한 것을 두려 했을 것이다. 아무리 이 일이 선한 뜻에서 행해졌다 할지라도, 또 처음에는 별로 해를 끼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세월이 흐름에 점차,
(1) "이스라엘은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과 제사장을 버리고 새로운 변화를 즐겨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으며, 에봇을 섬기는 사례까지 벌어졌다. 더우기 그것을 기드온과 같은 훌륭한 자가 세웠다 하여 점점 그것을 존경하는 마음이 지나쳐 미신적인 신앙의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훌륭한 사람이 한발 잘못 딛은 길을 많은 사람들이 따라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의 시작, 특히 우상 숭배나 옳지 못한 신앙은 "물줄기를 터놓은 것과 같으며", 그 예는 로마 교회의 치명적인 타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에 물들기 전에 그것을 떠나야 한다."
(2) 기드온이 말년에 여호와의 집을 열심히 섬기지 않고 그의 집에 제단을 쌓은 것은 그에게 커다란 올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것은 그를 죄악으로 이끌었으며, 그의 후손들까지도 파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Ⅲ. 기드온은 직책을 맡을 동안 이스라엘을 평온히 다스렸다(28절). 그들에게 그리도 귀찮게 굴던 미디안 사람들은 이후로 그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기드온은 왕의 권능과 영예를 받으려 하지 않았으나 그는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그의 백성을 위해 훌륭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40년 동안 그 땅이 태평하였다." 이때까지 이스라엘의 세월은 사십년을 단위로 계산되었다. 옷니엘은 40년간, 에훗은 80년간 즉 40년간을 두 번, 바락도 40년간 사사를 지내었으며, 기드온도 역시 40년간 다스렸다. 또한 그들은 40년간을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다. "사십년간 나는 이 세대와 더불어 슬퍼하였도다" (겔 4:6). 이 후에도 엘리는 40년간 (삼상 4:18), 사무엘과 사울도(행 13:21), 다윗과 그리고 솔로몬도 각각 40년간 다스렸다. 40년은 약 한 세대이다.
우상에게 돌아간 이스라엘(사사기 8:29-35)
여기에서 기드온의 이야기는 끝난다.
1. 그는 이제 평민으로 돌아가 살았다(29절). 그는 그의 위대한 업적을 자랑하지 않았으며 궁전이나 성에서 살려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고, 그가 명성을 얻기 전에 살았던 그의 집으로 돌아가 거했다. 이처럼 용감한 로마인들도 급한 싸움이 터졌을 때 농사짓던 것을 내던지고 싸움터로 달려와 군사들을 지휘하였으나, 그것이 끝났을 때는 집으로 돌아가 다시 밭일을 했다.2. 그의 가족은 번성했다. 그는 여러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서 70명의 아들을 가지게 되었다(30절). 그리고 첩에게서 난 아비멜렉 (나의 아버지는 왕이란 뜻을 지님.)이라 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으며 (31절), 그로 해서 그의 가문은 몰락해 버렸다.
3. 그는 장수하다가 영예롭게 죽었다. 그는 하나님과 자기 나라를 섬기는 날 동안 오래 살았다. 누가 더 이상 오래 살기를 원하겠는가? 그는 "그의 아버지 묘실에 장사되었다."
4. 그가 죽은 후 백성들은 타락해 버렸고,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갔다.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제재하던 그가 죽자마자 그들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게" 되었다(33절). 그들은 기드온이 불법으로 만들어 놓은 에봇을 제일 먼저 섬기기 시작하였고(27절), 이제는 또 다른 신을 위하였다. 거짓예배는 거짓 신을 불러온다. 그들은 이제 바알브릿(Barlberith)이라 부르는 새로운 신(여신이라는 의견도 있다.)을 선택했다. 어느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브릿 브리루스와 같은 이름으로, 페니키아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던 지명이라 한다. 바알브릿은 계약의 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이것을 숭배하던 사람들은 여기에 계약을 덧붙여 놓음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이루어졌던 계약을 모방하려 했을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그들은,
(1)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억지 않았다. "그들이 전에 우상을 섬기므로 하나님이 이를 벌하시기 위하여 미디안 사람들에 손에 붙이셨으나,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다시 불러들여 "그들을 적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심판과 은혜들을 모두 기억하지 않았고 그들이 받은 감명을 모두 잊어버렸다.
(2) 기드온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35절). 기드온이 그 백성들의 선조로서 "이스라엘에 선한 일을 많이 행하였으나", 그들은 그가 죽은 후 그의 가족들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을 준 친구나 은인들에게 감사해야 하며, 그들이 죽었을 때라도 그 감사를 그 가족들에게 돌려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기드온의 가족에게 이러한 친절을 보여 주지 않았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장(章)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을 잊은 자가 그 친구를 잊어 버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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