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안의 침입(사사기 6:1-6)
Ⅰ. 이스라엘은 다시 죄를 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 (1절). 불에 덴 아이는 불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생각이 모자라는 이 사악한 백성들은 전에 우상 숭배로 인하여 쓰라린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이 잠시 벌을 멈추는 동안 다시 그 죄악으로 돌아갔다. "이 백성들은 완악하고 반항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큰 사랑을 감사히 여기거나 영예롭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가 악인들의 마음과 생활을 바꾸시지 않을 것이다.
Ⅱ. 이스라엘의 고통은 반복되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즉 모든 죄악에는 고통이 따르며, 모든 어리석음에는 불행이 동반된다. "하나님은 사특한 자에게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며" (시 18:26), 그를 거역하는 자를 대적하실 것이다(레 26:21, 24). 이제 이스라엘은 다시 고통에 처하게 되었는데,
1. 그것은 매우 보잘것 없는 적의 손에 의한 고통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으나, 이들은 이드로가 살던 남쪽에 있는 미디안 사람들이 아니라 모압과 합병된(민 22:4), 동쪽에 있는 미디안 사람들로서 매우 무식한 미개인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경멸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이 왕이나 방백이나 대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읽을 수가 없고, 단지 이스라엘을 친 무리는 훈련되지 않는 폭도들이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더욱 비참한 사실은, 그들은 전 날에 이스라엘에게 굴복하던 백성이었으나(민 31:7 을 참고하라), 그 뒤 거의 200년이 지난 후에는 그들의 남은 무리가 힘을 증강시켜 이스라엘을 몹시 괴롭힐 정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은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들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셨다" (신 32:21). 아무리 비천한 피조물이라도 위대한 창조주를 대적한 자들을 징벌하는 데에는 이용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지배를 받아야할 자가 우리에게 반항하고 복종하지 않을 때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그렇게 행하지 않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2. 미디안은 엄청난 기세로 일어났다(2절). "미디안의 손이 그들을 이겼다." 즉 오직 그들의 많은 무리의 힘으로만 이길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할 것을 약속해 주셨었다. 그러나 그들이 죄악을 행함으로써 그들의 성장은 중단되고 수효가 감소되었다. 그대신 그들보다 훨씬 미약했던 그들의 적이 번성하게 되었다. "메뚜기떼처럼" (5절) 침입해 온 이들은 싸움터에 나오기 위해 정식으로 모인 군사들이 아니라, 그 나라를 약탈하여 배를 불리기 위해 여기저기서 모여든 약탈자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사악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대적할 기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약탈자의 무리로 이루어진 미디안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은 비참한 황폐를 맛보아야 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은 감금당하거나 혹은 구멍과 굴에 몸을 숨겼다(2절). 그들이 싸우기보다는 도망하려 한 것은 단지 그들 자신의 소심함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것은 죄의식의 결과로서 그들은 나뭇잎에도 놀라게 된 것이요, 또한 하나님을 배신한 자들에게 내린 정당한 형벌 때문이었다. 죄악만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워 주셨을 것이지만, 배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시사 그들에게 공포감을 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스라엘이 그들을 치러 일어섰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심령은 선할 일뿐만 아니라 큰 일도 할 만한 용기를 잃고 만다. 죄악은 인간의 사기를 저하시키며, 구멍과 굴로 숨게 한다. 그러나 대장이나 힘센 자가 바위와 산으로 와서 숨은 자들을 곧 찾아낼 그 날이 올 것이다.
(2) 이스라엘은 형편 없이 황폐해졌다(6절). 미디안 사람들과 또 노략과 약탈로 살아가던 동쪽에 거하는 다른 부족들(욥을 약탈하던 사바와 갈대 사람들보다 오래 전의 해적들)은 서로 힘을 합하여 자주 가나안을 침입했다. 왜냐하면 이 풍성한 땅은 그들에게 큰 유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40년 간 사치와 게으름 속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은 쉽게 그들의 먹이가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치러와(9절) 진을 치고(4절) 가축들 특히 상당한 수의 나귀를 데리고 왔다(5절). 그리고서 이들은 곧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고 그 나라 중심부를 꿰뚫고 지나 서쪽편에 있는 가사에 이르려 했다(4절).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씨뿌릴 때는 홀로 놓아 두고 추수할 때가 다가오자 이곳으로 몰려와 곡식이나 풀들을 모두 긁어 갔으며, 이들이 양과 소를 몰고 갈 때는 이스라엘이 먹을 양식도 남기지 않고 다 휩쓸어 갔다. 단지 남긴 것이라고는 몰래 숨을 수 있는 구멍과 굴 뿐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저들의 죄를 벌하심 속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과 십일조를 드려 영광 돌려야 했으나 이것을 소홀히 하였으며,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바알 신에게 바쳤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당연히 적으로 하여금 "그 시절에 그들의 곡식들을 거두어 가게 하셨다" (호 2:8, 9).
[2]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떠난 결과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가셨을 때, 모든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재난만이 닥치게 되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 그들은 다른 백성이 씨뿌린 것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다(수 24:13; 시 105:44). 하여금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씨뿌려 놓은 것을 다른 백성이 거두어 가게 하셨다. 우리도 이처럼 우리 나라를 평화롭고 고요한 가운데 "우리의 손으로 수고한 것을 먹을 수 있게" 해 줍시사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자.
Ⅲ. 드디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게 되었다. 이들은 7년 동안이나 미디안에 점령하였으며(1절), 우리는 이들의 비참함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구조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자 그들을 멸망케 하고 아무 도움도 못 주는 바알 신을 원망하면서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반드시 이기신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 앞에서 굴복하거나 파멸해 버린다.
부르짖는 이스라엘(사사기 6:7-10)
Ⅰ. 드디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돌아와 울부짖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 셨다. 그들이 번영했을 때는 하나님을 돌보지 않고 그를 대적하는 행위를 하였으나, 이제 극심한 곤경에 처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에게 돌아와 울부짖으며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로하려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용서해 줄 준비를 하고 계시며, 빨리 그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시고 항상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돌아와 회개할 때에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시 103:4).
Ⅱ.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가?
1.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구원하시기 전에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했다(8절). 이 선지자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는 1장 2절에서와는 달리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어떤 엄숙한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혹은 다른 일로 해서 총화로 모이게 되었을 때, 이 선지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와 이 소식을 전달했는지 아니면 그가 성읍마다 또 지파마다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전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그들이 하나님께 울부짖을 때 그들의 죄를 깨달아 그것을 슬프고도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자백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그들의 고통을 불평하도록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청했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을 훈계하셨고 그들을 구원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다음을 유의하자.(1) 만일 하나님께서 은총으로써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려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곧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병든 자에게 선지자나 해석자를 보내실 때에는 "그에게 정당히 행할 것을 보이시고 그를 긍휼히 여기어"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욥 33:23, 24).
(2)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 주시고, 신실한 사역자들을 어떤 나라에 보내어 주신다는 것은 좋은 전조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하시려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증거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께로 돌이키신 후에, 당신의 얼굴 빛을 비추이신다(시 80:19).
2. 우리는 이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에 가져온 소식의 제목을 알 수 있다.
(1) 선지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셨던 큰 일을 말해 주었다(8,9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즉 그들은 자기네들이 섬길 신이 없어 섬길 신을 찾는 사람들처럼 "열방의 신들을" 숭배했으나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분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줄 수도 없고 또 보호해 주시지도 않는 분인 것처럼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섰으므로,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여 주셨는지를 들어야 했고 그 은혜가 이 감사할 줄 모르는 자손에게까지 내려 왔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1]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거기에서 빈곤과 노역의 고통을 영원히 받게 되었을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을 학대하는 모든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내셨다." 즉 이것은 지금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자비가 부족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 죄악 때문이며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기 전에는 그들을 구원하시지 아니 하시겠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
[3]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이 기름진 땅에서 평온히 살도록 해주셨다. 이것은 그들의 죄악을 부채질했고, 거기에 대한 감사의 태도마저 잃어 버리게 했고, 한편으로는 왜 그러한 고통 속에 처하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게 하고 그의 의로우심을 알게 해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친절하시다는 말을 결코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잘 해주시려 했던 모든 것들을 입증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만일 그들에게 재난이 닥쳤다 해도 그들은 스스로 감수해야만 했다.
(2) 그 선지자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기대가 가벼운 것이요, 공정한 것임을 보여 주셨다(10절).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는 이 존귀한 은혜아래 거하며 아모리 사람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다시 말해서 "그들을 섬기지 말고 경의를 표하지도 말라. 그들이 너희를 해할까 두려워하여 그들을 섬기지 말라. 내가 너희 하나님일진대 누가 너희를 해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되 그들은 결코 두려워 말라."
(3) 선지자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항한 것을 꾸짖었으며,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들을 나무라셨다. "그러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이 책망의 말씀은 짧지만, 매우 함축적인 것이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모든 악의 근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재앙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은 노한 음성으로 그들을 책망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것으로 그들을 회개시키고자 했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 우리의 죄가 매우 사악함을 깊이 통탄 할 때에야, 우리의 회개가 의롭고 순수한 것이 될 수 있다.
기드온의 소명(사사기 6:11-24)
선지자의 설교가 사람들에게 얼마만한 감동을 주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으나, 우리는 그것이 훌륭한 효과를 거두어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적어도 회개하고 마음을 바로 잡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후에 곧 기드온으로 하여금 미디안을 차도록 하나님께서 명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여명의 빛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Ⅰ. 이 임무를 행할 사람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었다(14절). 그의 아버지도 아직 살아 있었으나, 이 영예는 그의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그 집안에서 바알 신을 숭배했기 때문이었다(25절). 그러나 그의 아들은 자기의 힘을 다하여 그것을 반대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아비에셀 가문의 태생으로서 가나안에 있는 므낫셋반 지파에 속한 자였고, 그 지파의 장자의 집안이었다(수 17:2). 이제 억압으로 가장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던 이 지파에서 사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Ⅱ. 그에게 이 임무를 맡긴 자는 "여호와의 사자" 였다. 그런데 이 사자는 피조물 천사가 아니라, 패트릭 주교의 해석대로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요 영원한 말씀이시며 천사들의 주(主)이신 바로 그분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어떤 중대한 사명을 띠고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나타나셨으니, 그것은 그가 때가 되어서 행하실 일의 한 전조를 보이신 것이요, 그 때 그는 기꺼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던 것이다. 본문에는 이 천사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로 불리워지고 있으며(14,16절).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1. 이 신성한 분이 이제 기드온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면 어떻게 기드온을 만났는지 살펴보기로 하자.(1) 기드온은 조용한 곳에서 줄곧 혼자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분요함과 떨어져 조용한 곳에 있을 때,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룰 수 있다.
(2) 그는 "막대기" 를 들고서(우리는 내용에서 이러한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겠다.)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 밀을 타작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소회향이나 대회향을 떨어내는 데 쓰이는 막대기로(사 28:27) 이 일을 해냈을 것이다. 비록 그가 훌륭하고 또 "큰 용사" 이긴 했지만, 이러한 농군의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자신의 권위가 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많은 종들을 가지고 있었으나(27절), 결코 그 자신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우리가 성실히 우리의 일에 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기쁜 소식은 양떼를 지키고 목자들에게 임하였었다. 기드온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낚시질하는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 그가 부르심을 받아 큰 일을 하리라는 표징이 되었다. 즉 그가 곡식을 타작하는 것처럼 미디안 사람들을 타작하게 되리라는 것을(사 41:15) 나타내고 있었다.
(3) 그는 곤궁 속에 있었다. 그는 타작 마당에서 편히 밀을 타작한 것이 아니라 미디안 사람들에게 들킬 것을 염려하여 구석진 곳에 있는 "포도주 틀에서" 몰래 타작하고 있었다. 그는 백성들의 참상을 그 자신 스스로도 나눠 겪고 있었으며, 그가 그 백성에게 지워진 굴레가 너무 무겁다는 것을 통렬히 느끼고 있을 때, 천사는 그로 하여금 미디안을 칠 것을 알리기 위해 그에게로 왔다. 하나님의 백성이 큰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위로를 보내 주시는 때이다.
2. 이제 우리는 그 천사와 기드온이 어떤 말을 주고 받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데 기드온은 자기에게 온 자가 선지자일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가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사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1) 그 천사는 정중히 그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12절). 그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 고 불렀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기드온이 전력을 다해 곡식을 타작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는 "열왕들 앞에 설" 자였다. 극히 적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 일도 잘 다스릴 수가 있다. 기드온은 용감하고 활발한 정신을 가진 자였으나 그 시대의 죄악으로 해서 어두움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리라" 혹은 시리아역의 해석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너를 도우리라" 하는 말과 함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말씀으로,
[1] 그는 기드온에게 할 일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우리의 일을 도우실 것이다.
[2] 그는 이 일을 행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을 약속하면서 기드온을 격려해 주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어 너를 인도하고 힘 주실 것이며 또한 도와주실 것이다."
[3] 그는 기드온에게 성공을 확신시켜 주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면 누가 우리를 이길 수 있으리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되며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은 크게 번영할 것이다. 기드온은 큰 용사였으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사람이든 큰 용사가 능히 되게 할 수 있으며, 어느 때라도 사람을 용감하게 해 줄 수 있다.
(2) 기드온은 이 기쁜 말에 대해 매우 우울한 대답을 들려 주었다(13절).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이 귀절을 시리아 역은, '여호와의 세키나에 우리의 도움이 있는가?'라고 했으니,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에서 오는 도움을 뜻한다.)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미디안의 침입으로 해서 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왔으며, 밀을 타작해도 이 포도주틀에 와서 몰래 해야 할 정도로 모든 것은 비참하고 처절하나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 준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그 사자가 들려 준 말은 기드온 그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는 그의 용맹함을 칭찬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또 그 사자에게 자신있게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가 곡식을 타작하며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때도 그의 분주한 머리와 용감한 가슴은 줄곧 미디안을 쳐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로 가득차 있었으며, 때마침 하나님께서 이 용감한 계획을 보고 그를 부르시어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자신의 힘과 용기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는 듯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해 준 사자의 말에 의해서만 모든 위안을 얻으려 했다. 그 사자가 그에게 특별히 해 준 말을 살펴보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리라." 그러나 그는 이 말에 대해 "만일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하는 말로 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간청하였다. 지금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혼자 독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으며, 수천명의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임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 공공의 유익을 도모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을 매우 기쁘고 영예롭게 생각한다. 기드온은 큰 용사였지만 믿음이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다.
[1]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 "왜 이 모든 일이('모든 일이'라는 것은 결코 적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에 어긋나는 섭리를 이해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두자.
[2] 그들의 구원의 지연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우리의 조상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그 능력으로 왜 우리를 미디안에게서 구해주시지 않으시나이까?" 그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을 몰수 당했을지라도, 그의 조상들에게 베푼 이적을 그들에게 베푸시지 않아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는 듯 또는 하나님이 이전에 그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지혜와 권능과 선한 의지를 의심하는 듯 그는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바로 그의 약함이었다. 우리는 교회가 형성단계에 있고 어떤 중대한 진리가 안정되는 단계에 있었던 기적을 그 형성과 안정이 완성된 다음에도 계속 일어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더우기 우리가 타락하고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는, 그를 섬기고 그의 뜻을 잘 행하였던 우리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이적은 결코 재생되지 않을 것이다. 기드온은 이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들 스스로 죄악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 것이며"
둘째 그들이 우상을 좇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으나, 이제 한 선지자를 보내시어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표정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3) 그 사자는 기드온에게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임무를 준다는 것과 그에 대한 성공을 확신해 주면서 그의 항의에 대해 효과적으로 응답해 주었다(14절). 이제 그 사자는 여호와라 불리웠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의 사신으로서가 아니라 권능을 가진 자로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기드온에게는 그의 모습이 무엇인가 특별한 점이 있었으며, 매우 은혜로웠다. 즉 그것은 "정직한 자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얼굴" 이었다(시 11:7). 이것을 보고 기드온은 두려움에 잠시 말문이 막혔으나, 잠시 후에는 그의 저조한 사기를 소생시켜 주었다. 그는 기드온을 자세히 바라보고는 기드온이 던진 물음에 미소지었다. 그는 직접적인 대답을 들려주지는 않았으나 이 간단한 대답 속에 있는 그의 능력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런 질문을 던진 기드온을 부끄럽게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대하듯 하는(눅 22:61) 말씨였고 전능한 표정이었다. 때문에 기드온의 마음엔 이상하게도 빛과 생명이 흘러들어 왔으며,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온유한 느낌이 그를 감동시켰다.
[2] 그 표정에는 기드온에게 말한 것 이상이 나타나 있었다.
첫째로 그는 기드온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일어설 것을 명했다. 이러한 자는 백성중 극히 소수에 속하는 자이나 이제 하나님은 억압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시어서 기드온을 세워 주었다. 그러므로 이제 기드온은 이런 말씀을 들어야 했다. "네가 바로 그 자이다. 가서 네 힘을 의지하라. 지금 밀을 타작하던 힘을 좀 더 귀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라. 나는 너를 사람들을 타작하는 자로 만들어 주겠다." 아니 그보다 "너는 이 광경으로 인하여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부여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권능을 부여해 주셨으므로 그는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유력한 왕자였고 군주였다. 하나님은 그의 사업에 합당한 자를 꼭 그리고 언제나 불러 주신다. "가라, 그러나 네가 타고난 힘이나 용맹성을 의지하지 말고 이제 새로 이 네 힘을 받았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가라. 하나님의 힘은 네 자신의 힘을 강하게 해 주시리라."
둘째로 그는 기드온의 성공을 확실히 약속해 주었다. 이것은 기드온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다. 즉 그는 그가 이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해도 좋았다. 그것은 그 자신에게 치욕을 주거나 백성들에게 손상을 입히진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를 영예롭게 해주고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네가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라."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구하는 영광스런 도구가 될 뿐 아니라 "너희 조상들이 네게 들려준" 이적을 증거하라. 기드온은 그에게 부여된 이상하고 놀라운 권능에 매우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가 들은 것을 믿어야 할지 망설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사자는 testa meipso 그 자신의 권위에 호소하여 그의 임무를 비준해 주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긴 설명이 필요없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모세에게 말한(출 3:14) - 나는 하늘과 땅에서 모든 능력을 갖고 있는 자며 특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 임무를 부여해 줄 권한을 가진 자이다. - 바로 그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4) 기드온은 이 명령에 대해 겸손히 거절하였다(15절).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리이까?" 이러한 그의 태도를 분석해 보기로 하자.
[1] 그는 하나님과 그의 힘을 믿지 못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록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더라도 그가 이스라엘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진실된 믿음도 때로 약해질 때가 있으나 이것은 거절되기보다는 오히려 격려되고 강화된다. 또는,
[2] 그는 어떻게 이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고 볼 수 있다. "주여 나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온갖 어려운 일을 다 해보았나이다. 만일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면 당신께서 나를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를 기대해야 하며, 또 찾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는,
[3] 기드온이 겸손하고 소심하여 극기하는 자였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사자는 그를 영예롭게 했으나 그는 자기 자신을 매우 낮게 평가했다. "나의 집안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비교적 가난하며(그의 집은 미디안에 의해 그 어느 집보다 더욱 황폐해졌을 것이다),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어떤 명예나 세력을 갖고 있지 못하는 제일 작은 자니이다. 그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나이까? 나는 그 일을 하기에 전혀 헙당치 못하며 그런 영예를 받을 가치도 없나이다." 하나님은 때로 인간이 보기에도 극히 미약한 자를 선택하시어 큰 일을 시키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 드러내시기를 즐기신다.
(5) 그는 이 거절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리라는 약속을 다시 들려 주었다(16절). "네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코 이 일을 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실지로 이러한 것들을 때때로 사람들이 큰 일을 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에겐 영예와 재산이 부족이다 보충되어 질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여 너를 인도하고 힘을 주어 성을 얻게 하리라. 비록 네가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너는 충분한 군사들을 얻게 될 것이며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 즉 그들이 단 한 사람인 것처럼 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쳐부수리라. 수천명의 미디안 사람들을 단 한 사람의 목처럼 쉽게 쳐죽이게 하리라.
(6) 기드온은 이 사명에 대한 확신있는 믿음을 갖고자 했다. 그는 경솔하게 어떠한 일에 뛰어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도 찬양을 위해서는 다분히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또한 그는 자기의 능력 이상의 모험을 강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그에게 많은 모험을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그는 자기의 사명이 지니는 권위를 스스로 확증하고 싶었고, 자기에게 그런 권위를 맡긴 자가 누구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그는 이 신적인 분의 정체를 간절히 알고 싶어 했다.
[1] 자기에게 한 표징을 보여줄 것을 요청했다(17절). 그리고 자기가 받은 사명이 하나님의 섭리의 하나로 된 것이라면, 당연히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자연의 한 과정을 통하여 그 사실을 입증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당신께서 나에게 얘기해 주신 것이 진실되다는 표징을 보여 주시옵소서." 이제 성령의 인도 아래 살아가는 우리는 기드온처럼 눈에 보이는 표징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만일 우리가 주께 은혜를 얻었으면 우리 마음에 표징을 보이시도록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그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시어 믿음의 사업을 완성시키실 것이며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해 주실 것이다.
[2] 그 사자는 기드온의 청을 허락하였고 기드온에게 그와 함께 좀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18절).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은, 기드온처럼 "부디 이곳을 떠나지 마시옵소서" 하고 청하면서 그것을 좀 더 오래 지속하고 싶어할 것이다. 기드온이 그에게 기다려 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 낯선 자를 위해 식사를 대접하려는 뜻에서 였다. 기드온은 그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대접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에 집이 그에게 적합지 않거나 혹은 이 낯선 자와 조용히 둘이만 있으려한 때문이었거나 (그러므로 그는 하인을 시켜 그것을 가져오게 하지 않고 자신이 간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조상 아브라함도 사자들을 대접할 때 그의 처소에서 하지 않고 나무 아래에서 한(창 18:8) 것을 본받아 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자가 식사를 위해 기다려 줄 것을 약속하자, 그는 급히 서둘러 그의 식탁을 위해 이미 삶아 놓은 염소새끼 하나를 소쿠리에 담고 또 국을 양푼에 담아 함께 가져왔다(19절). 여기에서 기드온은,
첫째로, 이 낯선 자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하려했다. 그는 대장이 되는 일에 있어서는 그의 집안의 가난함을 내세웠지만(15절), 그를 환대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러지 아니하였다. 미디안 사람들이 그에게 물건을 별로 남겨두지 않았지만, 그는 기꺼이 그의 친구를 위해, 특히 하늘에서 온 사자를 위해 후하게 대접하는 것을 즐겼다.
둘째로, 기드온은 이 특별한 자가 누구인가를 시험해 보려 하였다. 그가 가져온 것은 예물(선물)이라 불리웠으나(18절), 소제를 가리키는 말과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기드온은 이 거룩한 자가 그 물건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단어는 두 가지 뜻, 즉 예물과 소제의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기드온은 이 염소 새끼가 식사로 쓰이는지 아니면 소제로 쓰이는지에 따라 그를 판단하려 하였다. 즉 만일 그가 이것을 그냥 고기로서 먹는다면 그는 선지자일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서 증명된 대로 사자임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7) 그 사자는 그를 대접하기 위해 기드온이 정성껏 차려놓은 음식에 표징을 주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감사하는 표징으로 무슨 일을 행할 때 그 댓가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어 우리 마음에 평온과 만족을 깃들게 해 주신다. 그 사자는 기드온에게 고기와 떡을 딱딱하고 찬 바위에 꺼내어 놓고 거기에 국을 붓도록 지시했다. 만일 그가 뜨거운 것을 가져 왔더라도 곧 식었을 것이다. 기드온은 사자가 그렇게 명한 것은 그의 성의를 무시한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표징을 주려 하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만족해 하며 "기드온은 그대로 행했다" (20절). 그러자,
[1] "그 사자는 고기를 불살라 번제가 되게 했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게 하다." 이것으로써 그는 고기를 먹는 사람이 아니라, 제물로 영광을 받고, 때가 오면 그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2] 그 사자는 제물을 불사르기 위해 반석에서 불이 나오게 했다. 그리고 우리가 부싯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는 것처럼 바위를 두드려 얻은 것이 아니라 지팡이 끝을 가볍게 바위에 내밀어서 불을 일으켰다(21절). 이 표징으로 기드온은 "그가 주께 은혜를 얻었다" 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세와 엘리야게에 하셨던 것처럼 공적으로 하늘로부터 나오는 불로 제물을 태우심으로써 또 비공개적인 것으로서는 기드온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땅에서 나오는 불로 태우심으로써 그가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모두 동등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 사람을 용납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므로 기드온은 그의 임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그와 그의 군사가 바위에서 나오는 불처럼 미디안 사람들을 태우고 두렵게 하여 그 싸움에서 이기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3] 그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사람처럼 걸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영으로서 곧 사라져 버렸다. 이것으로써 기드온은 그가 바라던 모든 표징을 얻은 셈이다.
(8) 기드온은 그에게 앞으로의 할 일을 말해 줄 사자의 표징으로 그의 믿음을 확고히 한 것은 사실이나 이제 그는 그것으로 매우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롭게 그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 주셨고 그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셨다.
[1] 기드온은 절박한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22절).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그리스도의 두 제자들도 그리스도가 사라지셨을 때까지 그들이 대화를 나눈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눅 24:31)" "슬프도다, 주 여호와여!" 나는 이제 마지막이니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왜냐하면 내가 "야곱처럼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고 탄식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을 본 후 그의 생명이 보존될 것인지를 걱정하였었다(창 32:30). 인간이 죄를 저질러 하나님의 분노와 저주를 산 이래로 하늘에서 온 사자는 인간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다. 그러므로 기드온은 이것이 결코 좋은 전조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낯선 저 세상의 영들과 실지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기드온은 매우 낙심했다.
[2] 하나님은 그에게 안심하도록 말씀하셨다(23절). 그것은 기드온에게 치명적인 것일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다. 여호와는 이미 떠나셔서 보이지 아니하셨다(21절). 그러나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은 믿음 가운데 살아 계실 것이며 그 믿음은 말씀으로 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그에게 들리는 목소리로 (패트릭 주교의 해석대로) 격려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 "안심하라. 모든 것은 잘 되었으니 흡족히 여기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너를 쓰시려는 자는 결코 너를 죽이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죽지 아니 하리라." 하나님은 이처럼 그의 말씀과 임재를 두려워하며 떠는 자들을 진정시켜 주시며, 그의 권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시켜 주신다.
3. 기드온은 그 환상을 기념으로 남겨 두기 위해 제단을 쌓았다. 사자가 기드온을 용납한다는 것을 표징하기 위해 제물을 바위 위에 놓았을 때는 제단이 필요없었다. (왜냐하면, 사자의 지팡이는 제단 없이도 그 예물을 충분히 신성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 환상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제단을 쌓을 필요가 있었으며, 거기에 기드온은 여호와 살롬, 즉 "여호와는 평강이라" (24절)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1)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6장13절과 비교해 보라. 우리의 중재자이시고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 적용되었다. "의로우신 주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라" (엡 2:14). 또는,
(2) 하나님이 그에게 들려주신 말씀의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괴로움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내게 안심하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다." 또는,
(3)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근거로 한 그의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평화를 보내 주셨다." 즉, 그가 현재 고통 속에서 괴로와하고 있을 때 안식을 찾게 하셨다.
훼파된 바알 제단(사사기 6:25-32)
Ⅰ. 기드온은 그의 아버지의 집을 다스려 바로 고쳐 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25,26절). 사자를 보내시어 하나님과 기드온 사이에 개설된 교통은 또 다른 방법으로 유지되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 일로 머리가 가득 찼던 바로 그날 밤 (아마도 기드온은 그 후로 계속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을 것이다.) 꿈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러 저러한 일을 행할 것을 이르셨다." 하나님이 찾아 주신 것을 매우 감사히 여길 때, 하나님은 다시 은혜를 가지고 찾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기드온에게 이르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1. 기드온의 집안을 위해서나 그 마을 전체를 위해서 그의 아버지의 것으로 보이는 바알의 제단을 부수도록 명하셨다. 우리는 우상 숭배의 주동인물 집안에서 개혁할 자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권능과 또 거기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자를 뽑으시는 그의 은총의 망극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기드온은 우상들의 제단을 섬기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것을 모두 헐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즉, 홀(Hall) 주교의 견해대로 하나님께는 그들의 제단에 봉헌하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멸하는 것이 합당했다. 하나님은 미신의 표적물을 먼저 부순 후에야 그의 일을 명하신다. 그는 "단 곁에 있는 아세라 나무 를 찍어내야" 했으며, 그것은 어린 나무들로 그곳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것이었다. 패트릭 주교는 숲속에 있는 형상이라는 말은 아스다롯 (숲이란 말의 원어는 아세레이다.) 형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런데 제단곁에 그 형상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2. "그의 하나님 여호와" 를 위하여 한 제단을 건립할 것을 명하셨다. 이것은 아마 기드온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위해 비문을 만듦으로써 그 백성들에게 경고하려 한 것인 것 같다. 하나님이나 이스라엘을 위한 것일지라도, 특별히 번제나 제물을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쌓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당신의 율법에 스스로 얽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그것을 금하였는데도 쌓았다면, 그는 실로에 있는 제단을 경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일을 할 의무와 명예를 지니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견고한 성위에" 가서 단을 쌓으라고 했는데 아마도 그곳은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난 곳이었거나 이미 쌓아 놓은 제단 옆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급히 서둘러 만들지 말고 특정한 때에 필요에 따라 제단을 세우던 때의 옛 율법에 따라, 조각난 돌위가 아니라 흙 위에("규례대로" 라고 난외에 나타나 있다.) 경건하게 쌓아야 했다. 본문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한 그 경고한 성을 나타내는 단어는 미디안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구하려는 어떤 요새를 쌓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바알의 제단이 그 위에 있게 되면 그것은 더욱 요새화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광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책이기 때문이다. 이 제단 위에,
(1) 기드온은 두 마리의 황소를 번제로 바쳐야 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아버지의 "어린 숫소와 칠년된 둘째 숫소" (개역과 다소 다름)를 취하여 드려야 했다. 여기에 와를 곧으로 해석하는 것은 별로 적합한 내용이 못되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어린 숫소는 기드온 자신을 위해, 그리고 두번째 것은 그가 구원해야 할 "백성들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미디안 사람들을 치러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이렇게 화해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위대한 제물로 죄를 용서받기 전에는 결코 자비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숫소들은 바알 제단에 바쳐질 것임이 틀림없으나, 이처럼 더 나은 일에 사용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무장한 용사" 가 정복되고 넘어지게 되자, 노략물을 나누는 그 용사보다 더 강한 자가" 바알을 위해 준비되었던 "모든 것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권리로 여는 자는 와서 그에게 그 권리를 바치라.
(2) 바알의 상과 그 제단을 장식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불살라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제단을 위한 연료로 사용되어 졌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세워진 것은 파멸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그 파멸로 인해 영광받으실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이 일을 명하신 것은,
[1]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싸움터로 나가기 전에 그의 믿음을 입증해 보일 필요가 있었으며 또한 그것으로 그의 용맹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2] 이스라엘을 개선시키는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죄악을 없애지 않고서 어떻게 죄악의 결과인 고통을 끝나게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위대함을 보여준 기드온의 이러한 행동은 모든 성읍과 지파가 본받아 바알제단을 함께 부수어야 했다.
Ⅱ. 기드온은 이 거룩한 환상에 복종하였다(27절).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지휘하는 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순순히 복종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처럼 먼저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낸 후 그들의 적에게서 구원해야 했다.
1. 기드온은 그가 신뢰하는 종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리는 그들이 기드온처럼 성실한 사람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바알에게 절하는 것을 싫어했으므로" 기드온이 바알의 제단을 부수는 것을 도와주었다.2. 그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 아버지의 숫소를 하나님의 번제로 바치는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일을 하도록 특별히 명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보다 숫소에 대해 더욱 큰 권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의 죄를 막을 수 있는 큰 친절이 되기 때문이었다.
3. 그는 이 일로 해서 그의 아버지의 분노와 이웃 사람들의 악의를 초래할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키 위해 "부모에게 내가 그를 보지 못하였다" 고 말한 레위인에 대한 칭찬(신 33:9)을 기억하면서, 기드온은 그 일을 행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확신할 수 있는 한 그는 사람들의 분노가 두렵지 않았다. 그것을 명하신 이가 그를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4. 그러나 이 일이 행하여진 후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이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신중하게 밤을 택하여 했으므로 이 신성한 행위는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자마자 즉시 그 날 밤에 이 일을 행하며 아침이 되기 전에 끝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Ⅲ. 그는 이 일로 해서 생명의 위험을 받게 되었다(28-30절).
1. 이 일은 곧 발작되었다. 기드온은 그것을 옮기려 하지도 않았고 또 숨겨질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성읍 사람들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알 제단에 와 아침 찬미를 드리며 그들의 신과 함께 그 날을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기드온처럼 참된 하나님만이 그들이 섬겨야 할 신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는 퍽 수치스런 행위였다. 따라서 바알을 섬기는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그를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2. 그 일을 행한 자도 곧 발각되었다. 엄중한 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기드온은 바알 신을 배격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를 의심하였고 곧 그것에 대한 확증을 얻게 되었다. "틀림없이 기드온이 이를 행하였도다."
3. 이 무례한 짓을 행한 자가 기드온이었다는 것을 발견한 이 타락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연히 그가 법에 따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아버지에게 (그도 우상 숭배를 지지하는 자였으므로 그들의 이 의견에 동의하였을 것이다.) 그를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네 아들을 끌어내라. 그는 당연히 죽어야 한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무서운 일인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죽어야 할 자는 바로 그들이거늘, 이 사악한 사람들은 불경하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처형하려 하였다. 이 얼마나 얼빠진 우상 숭배자들인가! 그들이 노했다고 생각하는 바알에게 숫소를 바치는 것도 부족해서, 이제 그 성읍의 용감한 젊은이를 이 쓰레기 신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말인가? 이 숭배자들은 얼마나 재빨리 박해자로 변하였는가를 보라.
Ⅳ. 기드온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이 박해자들로부터 구출될 수 있었다(31절).
1. 기드온을 대적한 자들은 제일 먼저 그에 대한 벌을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꼭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 그들 스스로가 우상 숭배로 인해 중한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회개하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대적하고 계실 때까지도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했다.2. 그러나 그 때 "요아스가 그의 편을 들었다." 그는 그 성읍의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정직한 사람을 보호해 주고 정당한 일을 지지하는 데에 큰 힘을 기울여야 하며 그들의 권한을 이렇게 쓰는 자만이 선한 것을 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 요아스는 바알의 제단을 섬기는 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파괴한 자를 옹호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인가?
[1] 그것은 그의 아들에 대한 부친으로서의 애정과 특히 그의 고결함과 용맹함 그리고 귀중함을 잘 알고 있고 아버지로서 그가 바알을 섬기는데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해서 결코 그를 나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들의 고결함을 지킬 만한 용기를 갖고 있지 못하나 자기의 순결을 사랑하고 그렇게 행하는 자를 존중해 줄 만한 양심을 갖고 있다. 요아스가 바알에 대해 마음을 쏟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그것보다 더욱 큰 것이었다.
[2] 또는 민중의 평화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폭도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자신이 이 폭동을 진압하려 하였다. "그 일은 심판하는 자에게 맡겨라. 사람들을 처형하는 것은 너희가 할 일이 아니라, 그 일을 다스리는 자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하라." 여기서 기드온은 우상 숭배자로서가 아니라 평화를 교란시키고 민중을 선동한 자로 취급 받고 있다. 이러한 명목으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바알을 위하는 자들처럼 다이아나(Diana) 신을 섬기기에 열심이었던 자들의 손에서부터 구출되었다(행 19:40).
[3] 또는 기드온이 행한 일이 잘 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버지 자신이 인정한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마도 그의 아들이 그 일에 대한 이치를 조리있게 밝혔거나 아니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은밀히 움직여, 비록 그가 형식적으로는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과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질적으로는 그들을 대항하도록 하였는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를 지지해 주는 자가 없을지라도 우리가 부름을 받았을 때 당당히 나서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우리를 돕도록 하실 수 있다. 우리의 임무를 충실히 한 후,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자.
(2) 요아스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역설하였다.
[1] 그들이 바알을 위해 쟁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살아 계시며 오직 하나이신 참된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짓된 신, 바알을 위해 쟁론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 여호와와 계약을 맺고 그를 알도록 가르침을 받은 너희보다도 조상때부터 바알을 섬긴 자들이 바알을 위해 쟁론한다는 것은 오히려 타당한 일이다. 너희가 바알을 섬김으로 해서 그리도 많은 불행과 재난을 겪었으면서도 아직 바알을 위해 쟁론하려 하느냐?" 죄악을 범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옹호하는 것은 더욱 사악한 일이라는 것을 유의하자. 특히 하나님을 섬겨야할 자들이 바알을 섬기고 또 그를 위해 쟁론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악한 일이다.
[2] 그들이 바알을 위해 쟁론할 필요가 없었다. 만일 바알이 신이 아니라면 그들은 바알을 위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한 만일 그가 신이라면 바알은 바알 자신을 위해 쟁론할 수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때때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 것과 같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바알을 모독한 자를 벌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바알로 하여금 "악이든 선이든 행하라" 는 정당한 도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나타난 결과에서 바알을 섬겼던 자들은 자신을 위해 복수할 줄도 모르는 바알에게 도움을 요청한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우기 후에 기드온이 놀라웁게 번영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바알의 무능력을 더욱 통감했을 것이다.
(3) 이 일로 해서 그의 아버지는 기드온에게 여룹바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32절). "바알이 쟁론하게 하라. 바알이 할 수 있다면 기드온과 쟁론하도록 하라. 바알이 그를 파괴한 자에게 스스로 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말하도록 하라." 이 이름은 바알에 대한 도전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이제 기드온이 바알을 섬기는 미디안을 치고자 무기를 들었으니 어디 바알이 그의 숭배자들(미디안)을 보호하는가 보자." 또한 그것은 기드온에게 영예로운 것이었으며 그의 군사들에게는 하나님의 보좌를 노리던 바알에 대항해서 하나님을 위해 싸울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산코니아돈(Sanchoniathon : 가장 오래된 고대 이교도 작가의 한 사람)이 소이 야오(여호와란 말에서 변질된 이름) 신의 제사장으로 일컬었던 여롬발루스 - 자기는 이 사람에게서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했다 - 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여룹바알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기드온은 여룹베셋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삼하 11:12). 그것은 주인을 뜻하는 바알이 부끄러움을 뜻하는 베셋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확증을 얻은 기드온(사사기 6:33-40)
Ⅰ. 이스라엘의 적군이 기습해 왔다(33절).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그리고 동방 사람들이 한데 모여 요단을 건너왔다. 그들은 자기들을 막고 있는 중요하고 유리한 통로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제 므낫세 지파의 중심부이며 기드온의 성읍에서 멀지 않은 이스라엘 골짜기에 진을 쳤다. 그들은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부수는 것을 보고 그와 쟁론하기 위해 또 이것을 구실로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이곳으로 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그들이 해마다 곡식들을 약탈해 갔듯이(3절) 그 해에도 추수기가 되어 기드온이 타작하는 것을 보고(11절) 그 곳에 진을 쳤다는 것이 더 타당한 이유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무서운 침입을 대적하기 위해 기드온을 세우셨다. 그들이 이렇게 침입했을 때 마다 별 저항을 받지 않고 많은 노획물들을 얻어갈 수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 일에 매우 애착을 느꼈고 또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악의 그릇이 가득하여져" 벌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약탈하기를 그만 두거나" 아니면 그들 자신이 "탈취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타작마당에 모인 곡식단과 같이" (미 4:12, 13), 기드온의 타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Ⅱ. 기드온은 적진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34,35절).
1. 하나님은 그의 영을 기드온에게 보내 주셨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어" 그를 영예롭게 해주시기 위해 갑옷처럼 싸 주셨다. 시리아역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보내신 견인한 영이 기드온을 감싸 주셨다" 고 했다. 기드온 자신이 힘센 용사였으나 아무리 힘과 용맹을 지닌 자라도 이렇게 큰 싸움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기드온에게 하나님의 갑옷을 입혀 주셨으며, 그는 오로지 이것에만 의지해야 했다. 즉 "여호와의 영이" 놀라웁게 "그에게 임하셨다."2. 기드온이 나팔을 불어 그의 백성들을 모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가 나팔을 불어" 용사를 모집하려 했을 때 아마도 그가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1) 아비에셀 사람들은 기드온이 바알 제단을 허물었다 하여 매우 노하고 그를 죽이려 하였지만, 이제 그들의 잘못을 깨닫고 용감하게 그를 도우려 했으며 그들의 대장으로서 기드온에게 복종했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 그를 좇았다" (34절). 이렇게 갑자기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들이나 박해자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이실 수 있다.
(2) 먼 지파들 특히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아셀과 납달리에 있는 사람들도 비록 기드온과는 낯설었지만 그의 요구에 응하여 우수한 군사를 보내주는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35절).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위험성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들의 이웃이 미디안에게 패하게 되면 그 다음 그들이 화를 당하게 될 것이므로 그들은 이 공동의 적을 물리치는데 서로 협력했다.
Ⅲ. 하나님은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의 믿음을 확고히 해주기 위해 기드온이 요구하는 표징을 보여 주셨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것을 청한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보다도 그의 군사들을 위한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이 때가 미디안을 칠 때인지 혹은 더 기다려야 할는지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1. 기드온은 표징을 요구했다(36,37절). "이것으로 주께서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내가 양털 한뭉치를 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의 땅은 마르게 하소서." 그 일의 취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주여 내가 믿사옵나니 나의 의혹을 주께서 풀어 주시옵소서." 그는 그 자신의 믿음이 약하며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 표징으로 그의 믿음을 완전하게 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능력과 자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기드온으로 하여금 그런 요구를 하게 하시고 표징을 보여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드온은 전번과는 반대되는 표징을 보여주실 것을 요청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언짢아하실 것을 염려하며 매우 겸손하게 사과드렸다. 왜냐하면 그의 이런 태도가 이미 여러번 확실한 표징을 주신 하나님께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변덕스럽게 의심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39절).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그는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할 만큼 대담했지만 그는 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롭게 친절을 보여 주셨지만 그의 실수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멸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시험하는 행위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에서 떠날 것을 명하셨을 때 그가 한 말은 기드온의 이 말의 전례가 되어 주었다(창 18:30, 32).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할 때 커다란 경의와 그의 진노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2. 하나님은 기드온의 청을 너그럽게 받아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연약하게 되었을지라도 온유하게 대해 주시며 결코 그들을 멸시하지 아니 하신다. 그리하여 연약한 갈대라도 꺾어 버리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불을 꺼버리시지 않는다. 기드온은 "양털이 젖고 땅은 마르는" 표징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양털은 아무리 적은 물기라도 다 흡수해 버리는 게 당연한 생태이니까 이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는 반박을 막기 위해 그 반대의 부탁을 드렸을 때 하나님은 역시 그 일을 행해 주셨고 이 일을 통하여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셨다" (히 6:17, 18).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끈질긴 호소에 져 주시며, 그들의 불만과 회의에도 족히 응해 주신다. 이러한 표징들은,
(1) 틀림없는 기적이었으므로, 그가 받은 임무를 충분하게 확증해 줄 수 있었다. 이슬은 "여호와에게로서 나오며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미 5:7)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소리를 들어 주셨다." 여호수아에게 태양의 진노를 변경시켜 주었듯이, 기드온에게는 이슬의 진로를 변경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의 섭리에 의한 것임이 드러났다. 나중에 일어났던 표징은 첫 번째 경우와 반대되는 것이며 기드온을 매우 만족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풀러 박사(Dr.Full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늘의 참된 기적은 놀라웁게도 안과 겉의 양면을 동시에 일치하게 한다."
(2) 그 표징은 의미 심장할 것이다.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은 미디안을 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은 양털과 미디안의 넓은 땅을 구별하실 수 있겠는가? 물론이다. 이 일로 하나님은 그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기드온은 거룩한 은총의 이슬이 그를 습격해도 괜찮을 것인가? 양털이 이슬을 흡수하는 일로 그에게 그것을 확신시켜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을 이슬이 되어주실 것인가? 보라, 모든 땅이 젖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양털을 유대민족을 상징하며, 때가 되었을 때 이 믿음의 땅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의 이슬로 이 땅이 젖게 되었고, 그 밖의 땅은 매마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광야의 풀과 같이" 메마르게 되었고, 열방은 "물 흐르는 동산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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