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라와 바락의 노래(1)(사사기 5:1-5)
앞 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기사(寄事)를 행하신 것을 읽었으나, 이제 여기에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찬미를 살펴보게 된다. 모든 세대의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를 칭송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Ⅰ. 노래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1. 그 노래는 매우 자연스런 기쁨의 표현이었다. "즐거운 일이 있는가? 노래할지어다" 거룩한 기쁨은 바로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찬미이며 또 감사이다. 하나님은 그의 안에서 즐거워 하는 우리를 통해 그리고 그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즐겨하신다. 그의 종들의 기쁨은 바로 그의 즐거움이며, 그들의 노래를 그에게 아름다운 가락이 된다.2. 노래는 위대한 사건들을 영구히 보존시킬 수 있고 그 지식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에게 노래를 전하고 부모는 자식들에게 전하여, 책이라는 매개체가 없던 시대이거나 또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 하나님의 일을 잘 알 수 있었다.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 145:4 이하).
Ⅱ. 드보라 자신이 이 노래를 지었는데, 그것은 7절에 "나 드보라가 일어났다" 는 귀절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첫 번째 귀절에서도 "드보라도 노래하였다" 라고 나타나 있다.
1. 그녀는 여 선지자로서의 그 재능을 잘 발휘하여 노래 가사를 지었고, 전편에 흐르는 그 가락은 매우 깨끗하고 고상했다. 또 그 표현법도 우아하여 이 훌륭한 배합 속에는 아름다움과 위엄이 들어 있었다. 어떠한 시도 이 거룩한 시와 비교될 수 없다.2. 우리는 그러나 승리한 이스라엘 군사에게도 이 노래를 배우고 부르게 함으로써, 한 여군주로서의 그의 권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그들에게 이 시를 배우게 함으로써 그녀 자신이 찬미를 받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한 것이 아니라 이 시를 통하여 자기와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 동참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싸울 때에 앞장섰으며 이제 감사드리는 일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Ⅲ. 이 노래는 싸움이 있었던 바로 그 날이 아니라 싸움이 끝난 직후, 감사의 날로 지정될 수 있었던 축제일에 불리워졌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찬미의 보답을 드리는데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은혜에 대한 감명이 생생할 동안 속히 찬미를 드려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 날 즉시 답해 드려야 하는 것이다.
1. 그녀는 전 백성의 할렐루야로 노래를 시작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혹은 문자 그대로 축복할찌어다)" (2절). 이 노래의 의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었으므로 이 귀절을 첫 부분에 내 놓고 있다. 이것은 주기도문에서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하는 첫 번째 탄원과 같이 그 다음에 오는 내용을 설명해 주고 거기에 방향을 인도하고 있는 대목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두 가지 일을 찬미하고 있다.(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오만하게 학대하던 이스라엘의 적을 벌하시어, 이스라엘이 받은 모든 상처들을 갚아 주셨다. "여호와는" 의로우신 하나님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심판에 의해" 원수를 갚아 주시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다.
(2) "백성들이 즐거이" 이 싸움에 "헌신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선한 일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한 일을 기꺼이하면 할수록 그 기꺼운 뜻과 행적에 더 많은 은혜를 받게 된다. 이 두 가지 일로 인하여 드보라는 노래를 지어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했다(13절). "나 곧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노래할 것이라." 비교할 수 없는 권세와 저항할 수 없는 권능을 가진 하나님 곧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는 모든 것을 교회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하신다.
2. 그녀는 이 세상에서 극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을 불러 그녀와 함께 찬미하고 그 찬미의 주제를 주목하라고 명령했다.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1) 그녀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한 분이 한 분 있으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느끼는 교만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게 했다. 또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며, 말이나 병거도 그들의 안전을 지켜 주기엔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2) 그녀는 그들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기와 함께 찬미하기를 바랐다. 또 벨사살 왕처럼 더 이상 헛된 우상을 섬기며 찬양하지 않기를 원했다. "벨사살은 금과 은으로 만든 신들을" (단 5:4). 그녀는 다윗 왕과 같이 그들에게 말했다. 그런즉 "방백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여호와를 경의함으로 섬길찌어다" (시 2:10, 11).
(3) 그녀는 시스라의 운명을 보고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지 말것을 경고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조만간에 그들이 행한 것을 갚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3. 그녀는 하나님이 이전에 행하신 일을 이번 일과 비교해 봄으로써 이 위대한 구원을 행하신 하나님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셨던 일을 미루어 보아 지금 그가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셨나이다" (4절). 이 말은 다음의 두 가지로 해석될 수가 있다.
(1) 그것은 그의 이스라엘의 적을 복종케 하고 정복하셨던 하나님의 권능과 정의를 나타낸다. 이러한 일은 하박국 3장 3,4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적 대신 교회의 적들을 멸하는 것을 이처럼 서술해 놓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돔 들에서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큰 공포와 두려움으로 시혼과 옥의 군대를 치시사 그들은 마치 땅과 하늘이 맞붙으려 한다고 생각케 함으로써 그들을 이스라엘의 말발굽 아래 굴복시키셨다. 그들은 자기의 주위 세계가 녹아 버리는 것과 같이 마음이 나약해져 버렸다. 위의 본문은 하나님의 엄위의 영광스런 출현과, 땅을 지키고 하늘을 태양 아래 있는 눈과 같이 방울져 내리게 하며 산을 녹일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의 놀라운 효능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시편 18편 7절과 비교해 보라.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 피조물도 방해할 수 없으며, 그 뜻이 모두 이루어지는 말에는 그를 거역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이 그 뜻 앞에 굴복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도울 것이다(사 64:1, 2 참조).
(2) 또는 그것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었을 때 이스라엘에게 그의 영광과 권세를 드러내신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때는 문자 그대로 "땅과 산이 진동하고 하늘이 새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 났었다. 이것을 신명기 33장 2절, 시편 68장 7,8절과 비교해 보라. 모든 왕들과 방백들은 드보라가 찬미한 신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이며, 그들이 경의를 표하던 그런 천하고 무능한 신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했다. 시리아역 주석은 이것을 율법을 내리는 일에 적용시켜, "산이 진동하였도다" 라는 귀절을 색다르게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다볼, 헬몬, 그리고 갈멜은 서로 분쟁하였다. 하나가 말하였다. '거룩한 권세를 내게 이르게 하라.' 또 하나가 말하였다. '아니다. 그것을 내게 이르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모든 산중에서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시내산에 이르게 하셨다." 아마도 내가 생각컨대 시내산은 돌이 많고 황폐한 산으로서, 별로 쓸모가 없었던 것 같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2)(사사기 5:6-11)
Ⅰ. 드보라는 야빈의 폭정 하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의 상황을 여기에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구원은 더욱 찬란하고 은혜스런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6절).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했던 "삼갈의 날부터" 현재 야엘의 날에(야엘은 이렇게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이르기까지 그 나라는 줄곧 이렇게 황폐하였다.
1. 상거래가 없었다. 백성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적의 기습을 막아줄 군사들이 없었고, 그들 사이에 있는 도적들과 강도들을 규제하고 처벌해 줄 법관이 없었으므로(파산하여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노상에서 약탈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든 상업은 중단되고 모든 공로(公路)는 사람들이 거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이전처럼 상인들의 마차 행렬도 없었다.2. 여행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어떤 명령이나 정부가 있었을 때에는 여행자들이 대로에서 안전할 수 있었고 도둑들은 샛길로 숨었으나, 이제는 그와 반대로 강도들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대로상에서 사람들을 욕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성실한 여행자들은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샛길로 걸어다녀야 했다.
3. 경작지가 없었다. 마을 주민들과 농부들이 일하기를 멈추었으므로 들은 황폐한 채로 내버려져 있었고 도적들이 끊임없이 약탈을 해갔으므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위협을 느끼는 집을 버리고 잘 방어된 성읍 속에 숨어 있었다.
4. 사법부도 없었다. 그들의 법정들이 있는 성문에서도 싸움이 있었다(8절). 그러므로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을 감히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었을 때였다(11절). 끊임없이 감행된 적의 기습은 치리자들의 권위를 떨어뜨렸고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아 갔으며 통치기능을 마비시켰다.
5. 성문을 출입할 수 있는 평화가 없었다. 통행하는 성문에는 적들의 횡포가 심했다. 뿐만 아니라 궁수(사수)들이 우물가에 나타나 물긷는 자들에게 공포를 주었다.
6. "4만명 중에 방패와 창을 지녔던 사람은 없었으므로" (8절). 그들은 정신적으로도 무력으로도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압제자들 때문에 무기를 지니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들 자신이 싸움의 기술을 무시하여 익혀두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또 비록 그들이 창과 방패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기술이나 마음이 없었으므로 내버려 두어 녹쓸어 못 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Ⅱ. 드보라는 그들이 이러한 불행에 처하게 된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해 놓고 있다. 즉 그것은 "그들이 새 신(神)들을 택하였기" 때문이었다(8절).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이처럼 적의 수중에 넘어 가게 된 것은, 그들의 우상 숭배 때문이었다. 저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한 분이신 주님이었으나, 그들은 이에 만족치 못 하였다. 그들은 더욱 많은 신들을 갖고자 했다. 그들의 하나님은 태고의 상재이시며 여전히 똑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께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마치 새옷을 좋아하는 아이들처럼 새 신들을 섬겨 새로 이름을 붙이고 새로운 영웅을 명부에 기록하고자 했다. 그들의 조상들은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택하였으나(수 24:21), 그들은 그 선택을 계속지키려 하지 않고 그들 마음대로 새로운 신들을 택해야만 했다.
Ⅲ.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시어 그들의 호소를 들어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를 중히 여겼다. 그녀 자신이 먼저 시작했다(7절). 민중의 화평을 교란시켰던 자들을 규제하고 처벌하며 백성들에게는 자기들의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기 위해" 마침내 나 드보라가 일어났다." 그러자 모든 것의 양상은 빨리 호전되었다. 먹이를 노리던 짐승들은 이 기쁜 빛이 비치자 그 행적을 감추었고, "사람은 다시 나와서 노동하며 수고하였다" (시 104:22, 23). 이처럼 그녀는 그 백성들에게 어머니가 되어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수고와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 밑에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다른 치리자들이 있었다(9절). 그들은 그녀처럼 백성들을 바로잡기에 힘을 기울였으며, 싸움이 터졌을 때 그들의 권위와 직책의 특권을 들어 출전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사움터에 나가 헌신하였다. 물론 "그들이 즐거이 헌신한" (2절) 태도는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치리자들에 대해 그녀는 "나의 마음이 그들을 사모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즉 "나는 진실로 그들을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은 영원히 내 마음을 얻을 것이며, 나는 결코 그들을 잊을 수 없으리라" 고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 그들의 영광을 자진하여 포기한 자는 갑절의 영광을 받을 자격있는 자들임을 기억하자.
Ⅳ. 그녀는 이 위대한 구원의 특별한 혜택을 입은 자들에게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10,11절). 백성들의 상황이 행복하게 바뀌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였을 때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말하게 된다.
1. 너희 "흰 나귀를 탄 자들" 즉 고귀한 귀족들은 말해야 한다. 그 지방에는 말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나귀는 아마도 우리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나귀보다 훨씬 좋은 품종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타고 있는 나귀의 빛깔로 사람들의 신분을 구별하였다. 이 흰 나귀는 드문 것이었으므로 보다 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귀한 신분을 지니고 있는 자들로서 압돈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들 수 있겠다(12:14). 이러한 자들을 이 구원으로 해서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자유를 얻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위를 되 찾았으므로 하나님을 찬미해야 할 것이다.2. "재판석에 앉은" 자들도 싸움의 칼이 자기들의 정의(재판)의 칼을 꺾어 버리지 않음으로 해서 자기들이 거기에 편히 앉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의 매우 귀중한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한다.
3. 길에 행하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오랜 동안 길거리에서 그들을 괴롭힌 강도들을 제거해 주셨으므로 이제 두려움 없이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주신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고, 믿음의 대화 속에서 함께 길을 가는 동료들에게 이것을 말하여야 한다.
4. 이제 그들의 우물은 빼앗기지도 않게 되었고 막히지도 않게 되었으며, 또한 물길러 갔을 때 적에게 잡힐 위험성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안전하고도 편하게 물을 길을 수 있는 사람들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해야 한다." 그들의 나라를 화평케 하고 모든 영광을 지켜준 것은 드보라나 바락의 행위가 아니라 "여호와의 일이었다." 이 일을 통하여,
(1) 오만한 하나님의 대적들에 집행하신 하나님의 정의를 볼 수 있다. 그 모든 여호와의 의로우신 행동이다. 심판의 보좌에 앉으사 의로우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분께 세상의 심판자로서의 영광을 돌리자.
(2) 공포에 떨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곧 "고을에 거하는 자들" 에게 베푸신 자비로움을 볼 수 있다(겔 38:11). 그들은 적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었고 극심한 고난을 받아 왔으며 큰 위험에 처하여 있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3)(사사기 5:12-23)
Ⅰ. 드보라는 그녀 자신과 바락을 선동하며, 그들을 격려해 주시고 적들을 크게 혼미시켜 그들에게 승리를 주심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그 승리를 최대한으로 엄숙히 축하했다(12절).
1. 드보라는 여선지자로서 그녀 자신이 열광적으로 노래를 지어 노래했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그리고 다시 "깰지어다, 깰지어다" 하고 반복한 것은, 이 일의 탁월성과 어려움을 암시해 주고 있다. 사실 이 일을 수행하는 데는 지극한 용맹과 사기가 필요했었다. 온갖 능력과 수완을 다 기울여야만 이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녀는 자신의 나약성과 이 일에서 위축되어 열의를 잃기 쉬운 기질을 잘 표현해 놓았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깨닫고 분기하여 해야 할 일임을 알자(시 108:2).2. 바락은 대장으로서 득의만면하게 이 일을 행해야 했다. "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비록 시스라의 군사들이 싸움터에서 모두 살해당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싸움이 끝났을 때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많은 적의 무리가 포로로 사로잡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이들을 사슬에 묶어 바락의 뒤를 따르게 하여, 그가 성읍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만났을 때 그의 승리를 더욱 빛나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짓밟은 것을 낙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들을 욕하고 그들 앞에서 자긍하던 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위대한 뜻에 이바지하기 위함이었다.
Ⅱ. 그녀가 이렇게 찬미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13절). 이 영광스런 승리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특히 드보라를 매우 위대하게 보이게 해 주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었다.
1. 이스라엘 백성은 숫적으로도 적고 또 보잘것 없는 백성들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권세있는 자들을 지배할 수 있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중 많은 사람들이 적에게 살해당하였고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그 가족들과 재산을 타국으로 피신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도움을 내리시어, 그들의 목을 조르고 있던 굴레를 벗겨 버렸을 뿐 아니라 그들의 압제자들을 쳐부수는 능력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 있는 한 그 수가 아무리 적더라도(하나님은 최악의 경우라도 한 사람의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 남게 하실 것이다). 거기엔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단 한 사람이 남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힘세고 유력한 자들을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2. 드보라 자신은 연약한 여성이었고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래로 남자에게 복종하도록 운명지어진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보다도 더욱 높으신 하나님께서 그녀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힘센 남자들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즐거이 그녀에게 복종하였고, 또 그녀로 하여금 가나안의 힘센 남자들을 이기게 하셨으므로 그들은 그녀가 지휘하는 군사들에게 패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계집종의 낮은 처지를 돌보셨다" "여호와는 나 여자로 힘센 남자들을 지배하게 하셨도다" 천하게 여겨지던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 "이것은" 실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이며, 우리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놀라운 일" 이 아닐 수 없다.
Ⅲ. 그녀는 이 위대한 일과의 관계에서, 여러 부류 사람들을 낱낱이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과 대적이 된 자들, 그들과 동조하여 싸운 자들, 그리고 중립을 지킨 자들 등이다.
1. 그들을 대적한 무리들. 적의 힘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힘이 크면 클수록 그들을 이긴 승리는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야번과 시스라는 이미 언급된 바 있었으나 여기에서 좀더 상세히 나타난다.(1) 아말렉은 야빈과 동맹을 맺고 그에게 도움을 보냈다. 에브라임은 여기에 아말렉에게 대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14절), 아마도 그들은 시스라에게 합세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해 오는 아말렉 사람들을 막거나 살해했을 것이다. 아말렉은 모압을 도와 이스라엘을 억압한 적이 있었으며(3:13), 이제는 야빈을 도왔다. 아말렉은 하나님의 백성과 불구대천의 원수였으며, "여호와께서 대대로 싸우리라고" 하신(출 17:16) 바로 그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위험스러웠다.
(2) 가나안의 왕들은 여호수아에게 패한 후로 다시 국력을 회복하여 야빈과 합세하고 그의 군세를 더욱 강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하솔의 왕에게 종속되어 있었을 때부터 이스라엘의 잔인한 원수였다(수 11:10). 이 왕들이 "와서 싸웠다" (19절).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으나 그들의 적들은 많은 왕들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이 동맹을 맺어 힘을 합하였을 때는 매우 엄청난 힘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던 이스라엘은 이 모든 적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이 왕들은 돈의 이들을 얻지 아니했다" 고 했다. 즉 그들은 돈으로 야빈의 군대에 고용된(돈으로 고용된 자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면 때때로 일을 그르친다.) 자들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스라엘을 멸하기 위해 나선 자들이었다. 시리아역 주석은 "은을 획득하여 부유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단지 이스라엘을 멸하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여겼다고 했다. 따라서 이들의 힘은 더욱 무서웠고 더욱 잔인할 수밖에 없었다.
2. 그들을 위해 함께 싸운 무리들. 이 위대한 업적을 도운 여러 지파들이 여기에 영광스럽게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의 영광 받으실 주된 분이시나 이 일을 위해 협력한 그들도 마땅히 칭찬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이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하늘이었다.
(1) 에브라임 지파와 베냐민 지파 - 드보라는 이 지파들 중 살았었다. - 는 그녀의 영향을 받아 분발하고 용감히 나가 싸웠다. 에브라임 지파내에 있었고 베냐민 지파와도 퍽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뿌리가 아말렉을 대적하였다(14절). 12장 15절에 보면 에브라임 땅에는 "아말렉산" 이라고 불리우는 산이 있다. 혹자들에 의하면, 본문의 의미도 그런 것이라 한다. 즉 그들은 그 귀절을 "아말렉에는 한 뿌리가 있었다" 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그 산에는 자기들의 압제자들을 저지하려는 사람들의 단호한 경의가 있었으며 그것이 이 문제의 뿌리였다는 것이다. 너희 베냐민을 뒤따랐도다, 비록 베냐민은 에브라임의 동생되는 지파였고 특히 당시에는 수로 보나 재물로 보나 그들보다 열등했지만 베냐민 지파가 앞장서서 행할 때 공동 목적을 위해 그들을 뒤따랐다. 만일 우리가 앞장설 만큼 대담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선한 사업을 위해 우리보다 열등한 자들이 앞서 갈지라도 그들을 비웃으며 뒤따르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에브라임 지파는 싸움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많은 군사들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지파에 속했던 드보라는 그들 가운데 이 일을 위해 온 성의를 기울이려는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이트 푸트 박사는 이에 대해 아주 색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는 이 내용이 에브라임 출신의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부수어 승리를 거두게 한 뿌리가 되어 왔으며(출 17장), 또 베냐민 출신의 에훗이 그 후 아말렉과 모압을 치는 뿌리가 된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 에브라임과 베냐민, 마길 (요단 건너편에 있는 므낫세 반지파) 그리고 스불론에 의하여 시작된 용기가 용사들에게 전달됨으로써 그들은 이 큰 기획을 위해 매우 크게 기여했다. 백성들이 오랫동안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였고, 또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었던 이런 불리한 상황속에라도 바락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1] 용기있는 자들은 이 일을 하기 위해 왔고, 마길에서도 "다스리는 자들까지" 도 내려왔다. 마길은 모세의 시대에 용맹하기로 매우 이름난 집안(민 32:39) 이었으므로, 그 용맹은 계속 전해 내려왔던 것 같으며, 그들이 국경지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2] 학식있는 재주 있는 자들도 있다. 스불론에서는 "저술가의 팬을 잡은" 자들이 왔다(한글 개역과는 다름 14절). 이들은 회람장을 돌려 명령을 전하고 군사들을 검열하여 보고서를 기록하는 일을 맡았던 자들이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청지기처럼" (벧전 4:10) 공중의 이익을 위해 몸과 마음을 기울여 봉사해야 한다.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학자들은 싸움의 기교보다는 학문에 더 뛰어난다 하더라도 이러한 일을 당하여 손수 무기를 들고 나섰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성숙함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블랙모어(Richard Blackmore) 경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을 하고 있다. 스불론의 서기관들과 학자들은 붓대를 놓고 칼을 휘둘렀다.
(3) 잇사갈 역시 훌륭히 도왔다. 비록 그 지파는 "안식을 좋게" 여겼다. 그러나 "어깨를 낮춰짐을 메었다." 이것이 그 지파의 특성이다(창 49:15). 그러나 그들은 야빈에게 조공을 드리는 굴레를 메기를 혐오하여, 이제 비굴한 안식보다는 대범한 수고를 택하였다. 또한 그 지파에서 모인 군사들은 얼마 안 되는 것 같으나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 바락과 함께 하였다" (15절). 아마도 이들은 이 긴급한 사태를 맞이하여 싸움의 전략에 많은 조언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방백들은 바락과 함께 손수 싸움터로 나간 것 같다. 바락이 걸어 갔다면, 그들은 그들의 명예나 안일을 생각지 않고 바락과 함께 걸어갔을 것이다. 그가 가장 위험한 계곡으로 들어섰다면, 그들은 스스로 바락고 함께 돌아다니며 그의 오른팔이 되어 충고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잇사갈 사람들은 "시세를 알고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대상 12:32).
(4)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모든 지파 가운데 가장 대담하고 적극적인 지파였다. 그들은 바락에 대해 특별한 우애를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야빈의 땅과 매우 근접해 있어 다른 어느 지파들보다도 더 무거운 속박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속 속에 살기 보다는 영예롭게 죽기를 원하여 하나님과 그들의 나라에 대한 경건한 열성을 품고 "들의 높은 곳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18절). 이렇게 영웅적인 용기를 갖고 있는 그들은 철병거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선한 목적을 위해서는 죽음에까지도 도전하였다.
(5) 하늘의 별들도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주었다(20절). 성좌의 위대한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에 따라 "별들이 그 다니는 길에서" 악의에 가득찬 "시스라와 싸워" 빗발과 천둥을 퍼부음으로써 시스라의 군대를 진멸하는데 기여했을는지도 모른다. 시리아역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하늘로부터 별들이 나오는 곳에서부터 시스라를 대적하는 싸움이 행하여졌다."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권능을 행하시어 하늘의 사자들로 하여금 시스라를 멸하는 돕도록 했다. 아뭏든 하늘에 있는 무리들은(여호수아의 말에 해가 멈춰섰던 것처럼, 별 무리들이 정지한 것은 아니고 그들의 궤도를 그대로 돌면서) 시스라와 대항하여 싸웠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적을 대항하여 싸운다. 아마도 별의 섬광에 말이 놀라 달리다가(22절), 말굽이 부러졌을는지도 모르며, 또 그들이 끌던 철병거가 오히려 그 주인들을 공격했을는지도 모른다.
(6) 기손강도 이스라엘의 적을 대항하여 싸웠다. 그 강은 그 곳을 지나 도망하려는 적의 무리를 휩쓸어갔다(21절). 보통 때는 그 강이 얕은 강이었고, 자기들 나라 안에 있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건널 길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큰 폭우로 해서 아마도 그 강물이 불어나 수심은 매우 깊어지고 물살은 세어져, 그곳을 건너려는 자들은 기운에 지쳐 건너가지 못하고 물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22절에 나타난 대로 "빨리 달리던" 말발굽은 부러지게 되었다. 기손강은 옛강이라 불리워졌는데, 그것은 고대 역사가들이나 시인들이 그것을 찬양하거나 묘사해 온 때문이거나 아니면, 그때 시스라를 멸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래전부터 예정해 놓으신 강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오래전부터 "옛못의 물" 을 만드셨다고 전해지고 있다(사 22:11).
(7) 드보라 자신의 영혼이 그들을 대적하여 싸웠다. 그리하여 그녀는 거룩한 환희를 부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 영혼아, 네가 힘있는 자를 밟았도다" (21절). 그녀는 전심을 다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킴으로써 이 전쟁을 승리에로 이끌었다. 또한 모세가 자기의 손을 들어 올리어 아말렉을 정복한 것과 같이, 그녀는 기도를 올림으로써 시스라를 전멸시키었다. 우리의 영혼이 거룩한 기도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한다면, 우리 영혼의 대적은 짓밟힌 것이며 우리들 앞에서 전멸할 것이다.
3. 이 큰 싸움에서 그녀는 이스라엘 군대를 도와야 할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돕지 아니한 중립자들을 지적하였다. 이스라엘 사람이라 불리우던 많은 사람들이 이 영광된 일을 야비하게 버리고 싸우기를 거절하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유다나 시므온 지파는 싸움터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참가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두 지파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싸움에 참가치 않은 자들은 마땅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의 낙인을 받아야 했다.
(1) 르우벤은 비겁하게 이일을 기피하였다(15,16절). 그는 오래 전에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하였고 또한 임종에 처한 자기 아버지의 유언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물이 끓음같이 요동하지만 그는 탁월치 못하리라." 이 르우벤 지파는 다음 두 가지 때문에 싸움에 출전하지 않았다.
[1] 그들의 분열, 그녀는 그들의 불화를 두번씩이나 언급하여 그들의 수치를 드러내었다. "르우벤의 분열 때문에" (또는 그 분열 속에는 개역과 다름) "깊은 생각이 있었다." 즉 "마음의" 감명과 탐색이 있었다. 르우벤은 요단강으로 인하여 가나안과 극 분리되어 있다는 - 이것은 실상 그들이 그 싸움에 열성을 다하는데 방해가 될 수 없다. 핑계를 내세우며 출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서로 갈라져 각자의 영예를 추구하고 위험스런 일은 피하려는 마음 때문에 이 불행한 사태에도 불구하고 서로 단합하지 못하였으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형제들과 협력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나머지 지파들과 의견을 달리하여 싸우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거나 실리적인 못된다고 생각하여, 출전하는 자들을 비웃으며 그들 자신이 참가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처럼 르우벤 지파가 형제애를 냉각시키고 그들 사이를 이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지파들은 우울한 생각에 잠겨 마음에 크게 살핌이 있었다. 우리의 형제가 우리들이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보고 우리에게 화를 내며, 그들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할때 그들이 냉담한 태도를 지닌다면, 우리는 슬프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그들은 세상 일을 핑계삼았다. 르우벤은 양을 돌봐야 한다는 구실로 싸움터보다 더 안전하고 포근한 "양의 우리 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양떼들의 우는 소리를" 듣기 좋아했고 또는 여기에 적혀 있는 대로 양치는 목자들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듣기 좋아했다. 르우벤은 군사들의 북 소리나 나팔 소리보다 이런 것을 듣고자 하였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고 안이함을 찾으려는 마음에서 자기들의 의무를 버리고 세속적인 일이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려 한다. 편협한 이기심을 지닌 자들은 하나님의 교회에 이익이 되는 것은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돈을 모으고 "각기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 (빌 2:21).
(2) 단과 아셀 지파도 똑같이 행하였다(17절). 이 두 지파는 해변가에 머물러 있었다.
[1] 단은 그의 배를 꼭 지켜야만 하는 양 "너희가 나를 용서해 주기를 바라노라" 하고 말하며 싸움에 협력하기를 거절하였다. 아마 단 지파는 바다에서 일하는 자기들을 육지에서 싸우기에는 적합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이 일을 모면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부 생활을 천직으로 삼는 스불론 사람들도 출전하여 열심히 싸워 주었다. 우리의 의무를 남에게 전가시키려 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용기와 결단력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아셀지파는 바닷물에 의해 갈라진 방파제 등을 수리해야 하며, 자기들의 토지가 침식되지 않도록 보수하여야 한다는 것을 핑계삼아 집에 머물러 있거나 배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렵고 위험하여 하고픈 마음이 없을 때는 극히 조그만 것이라도 핑계를 삼아 집에 머물러 있으려 하기 쉽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로스는 정죄를 받았고 거기에 거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선포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23절). 아마 메로즈라는 곳은 이 일이 벌어졌던 바로 인근 성읍에 위치한 어떤 도성일 것이다. 그 주민들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과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해 선한 싸움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야빈의 철병거를 두려워하고 그들의 안전을 지키려 한 때문에 그것을 잔인하게 거절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도움이 필요없었고 그들 없이도 충분히 그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태도를 기뻐하시지 않으셨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의 도움이 없어 이 일이 실패하리라 생각했었는지도 몰랐다. 따라서 "누가 하나님의 편인가?" 실지로 판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도우러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저주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대적되는 힘(암흑 왕국의 권세와 능력) 사이에는 결코 중립되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돕지 않는 자들을 적으로 간주 하신다. 이 저주는 만군의 대장이자 우리 주 예수 즉 "여호와의 사자" 에 의해(" 그가 저주하는 자들은 정말 저주받은 것이다") 선포된 것이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권능과 권세를 받지 못했으므로 저주를 내릴 수 없다. 당신의 선한 군사들에게 충분히 보답하시는 하나님만이 모든 비겁한 자들과 도망한 자들을 분명히 그리고 엄격하게 벌하실 것이다. 메로즈 성읍은 그 당시 중요한 곳으로서 많은 도읍이 기대되었던 성읍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마도 여호와의 사자가 저주한 이래로,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저주한 무화과나무처럼 시들고 타락해 버렸던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이후에 성서에서 그 성읍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4)(사사기 5:24-31)
드보라는 이 승리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Ⅰ. 이 일을 완성시키고 승리를 빛나게 한 또 하나의 여주인공 야엘을 칭찬하고 있다. 드보라는 전에 야엘이 권능을 행하게 되는 날 이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6절). 이것이다. 그녀는 때가 왔을 때 즉시 권능을 행한 야엘을 칭찬하였다. 그녀의 시는 이 끝부분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다. 그리하여 드보라는 24절부터 야엘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고 있다. 즉 야엘은 가나안의 왕과 화평을 지키느니보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복종하였고, 그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위급한 사태에서 마치 싸움터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처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 싸우시는 것을 보고 용감히 이스라엘을 위해 싸웠다. 그러므로 "야엘은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그 보잘것 없고 좁은 활동영역이라 하여도 장막 내에 임하는 것이 본분인 자들도, 그들의 능력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때 결코 그들의 상급을 잃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자. 장막에 거하는 야엘은 싸움터에서 활약한 바락과 마찬가지로 풍성한 축복을 얻었다. 드보라는 여기에서 두 가지의 큰 실망을 매우 훌륭하게 묘사해 놓고 있다. 이 실망보다도 더 인간을 당혹하게 하고 괴롭게 하며 부끄럽게 해 주는 것은 없다. 그 실망은 바로 죄인들이 당할 영원한 치욕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1. 시스라는 자기가 굳게 신뢰했던 친구에게서 숙적을 만나게 된 것이다.(1) 야엘은 그에게 친구로서의 호의를 보여 주었는데, 아마도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충동하여 그녀로 하여금 그를 배반하도록 지시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외에는 달리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25절). 그가 갈증을 채우기 위해 단지 물을 청했을 때, 그녀는 자기의 훌륭한 가사 관리를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우유를 주고" 또 "버터를 내어 옴으로써" 즉 (혹자들의 생각대로) 버터를 뽑아낸 우유 - 우리는 이런 것을 버터 우유라 하다. - 를 줌으로써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그에게 준 것은 우리가 크림이라고 부르는 버터가 든 우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우유가 어떤 것이었든 간에 그녀의 집에 두었던 가장 훌륭한 것을 그에게 제공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상 식탁에서 쓰는 그릇에 담지 않고 그녀가 갖고 있던 가장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시스라로 하여금 그녀에 대한 신뢰를 더욱 견고하게 해 주었고, 따라서 그는 안심하고는 깊이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2) 그녀는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적이 되었다. 이 일은 26,27절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1]야엘의 모습은 얼마나 훌륭한가? 그녀는 그렇게 오랫 동안 그의 강한 힘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이 오만한 (흠정역 난외에 있는 대로) 시스라를 망치질하여 재주조하며, "그의 백골에 있는 그의 죄악" 과 함께(겔 32:27) 그를 죽여 무저갱으로 보냈다. 그녀는 마치 그 장막의 막대기나 널판지를 박듯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26절에 보면 "그녀가 그의 머리를 쳤다" 고 했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가 그를 방망이로 친 후 그가 다시 일어날까 염려해 그가 지니고 있었던 칼을 뽑아 그를 죽인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머리를 잘라내야 할 이유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에 그런 일이 언급된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 귀절은 "그녀가 그를 쳐서 머리를 뚫었다" 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 거만하게 쳐들고 다니며,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계획을 고안해 내던 그 머리는 이제 야엘에게 안식처를 찾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못이 선한 의지에 의하여 그의 머리를 파고 들어갔다.
[2] 야엘의 발 앞에 쓰러진 시스라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해 보이는 것인가?(27절). 그는 여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쓰러졌다. 그녀는 그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방망이로 그를 쳤으므로, 그가 살려고 몸부림쳐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 거만한 자는 영예로운 침상에서 죽거나 번쩍거리는 칼날에 또는 강철로 된 화살에 맞아 영광스런 상처를 입고 싸움터에서 죽어간 것이 아니라, 단지 보잘것 없는 한 장막에서, 그것도 여인의 방망이에 맞아 수치스럽게 죽어 간 것이다. 이처럼 오만한 자의 운명은 수치로 끝난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행운이 그들을 결국 파멸로 이끈다는 하나의 생생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즉 행운은 죄인들에게 귀한 그릇에 우유와 버터를 담아 아첨하고 속살거려 그들의 마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나, 그것은 결국 그들의 머리와 마음을 비참하게 파멸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아첨은 치명적인 것으로 그들을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한다(딤전 6:9, 10).
2. 또 하나의 실망. 아들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기대하고 있던 시스라의 어머니는 그가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28-30절).
(1) 그녀는 그 아들의 승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고?" 그녀의 이 말은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의 성공을 매우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그의 영광을 보기 위해 기다릴 수 있는 인내성이 부족한 태도를 나타내 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성적인 연약한 마음으로 그 영광을 빨리 보기에 초조하여 늦게 오는 병거를 책망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녀는, 아들이 불행한 사태를 당해 그리도 자신만만하게 여기던 철병거도 버리고 도망해야 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채 아들이 늦어지는 것만을 불평하고 있었다. "그의 영광의 수레도 이제 그의 집의 수치가 되었다" (사 22:18). 우리는 일시적인 행운 특히 시스라의 어머니가 탐닉하고 있던 것과 같은 헛된 영광을 갈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욕정에 대한 집착과 조바심은 우리로 하여금 큰 편견을 갖게 하며 오류를 범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에 대해서는 이 같은 갈급한 심정으로 (" 예수 그리스도여 어서 오시옵소서")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녀는 아들이 마침내는 거대한 노획물을 가지고 돌아 오리라는 어리석은 확신과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지혜로운 시녀들도 그가 늦게 돌아올 만한 좋은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시리아역에 있는 대로" 그녀의 지혜로써") 거드름을 피우며 그녀 스스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틀림없이 그들은 뇌획물을 나누느라고 이렇게 시간이 걸리나 보다." 이처럼 노략물을 즐겨 취하려는 그들은,
[1]얼마나 어리석은가! 이 여자들은 그 군사들이 욕마인 여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자랑할 정도로 여성의 위치를 수치스럽게 하였다.
[2] 그들은 매우 유치한 자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스라가 채색옷을 화려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려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처녀에게서 약탈한 "수놓은 채색옷" 은 얼마나 멋있을까! 반복되어 있다. "양편에 수놓은 값진 채색 옷이리라" 고 하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상상을 즐겁게 해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수놓은 옷들을 시스라가 그의 어머니와 그 시녀들에게 선물해 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부귀와 명예와 즐거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에게 수치와 실망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서와 같이 당신의 적들이 가장 의기양양해 있을 때에 그들을 멸하시는 경우가 많다.
Ⅱ. 드보라는 하나님께 대한 다음과 같은 기도로써 이 노래를 모두 끝맺고 있다.
1.하나님의 모든 적은 멸망하기를 기도드렸다.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수치스럽게 그리고 비참하게 망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멸하기 위해 의기양양한 자들을 도리어 멸하시어 실망하게 해주옵소서. 시스라에게 행한것 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 (시 83:9). 우리는 비록 우리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원수들을 향하는 멸망을 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또 하나님의 어떤 대적들이 현저하게 패배하는 것을 우리가 볼 때는 더욱 용기를 얻어 하나님의 모든 적들도 망하도록 간구할 수 있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여선지자로서 드보라가 드린 이 기도는 때가 이르면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라는(시 92:9) 것을 예언한 말이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결코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며 버틸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님의 모든 친구들에게는 환희와 위안을 주십사고 기도드렸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뜻이 이 땅에서도 잘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은 해가 힘있게 돋음같이 하시옵소서.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빛나고 영광스럽게 되게 하시옵고 태양빛이 따갑게 괴롭힌다고 저주하는 그들의 적에게까지 그 힘이 미치게 해 주옵소서. 그들로 하여금 그 길을 달리기를 기뻐하는 장사처럼(시 19:5) 되게 하옵소서. 또한 그들은 안개를 몰아내는 햇볕처럼 더욱 더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게 하소서(잠 4:18)." 하나님을 성실히 사랑하는 모든 자는 그런 영예와 기쁨을 필경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우리 아버지 하늘에 있는 해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노래로 축하한 이 승리는 한 세대동안 이스라엘이 화평할 수 있었던 행복한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그 땅이 사십년동안 태평하였더라." 즉 이때부터 기드온이 일어날 때까지 이스라엘은 평온할 수 있었다. 만일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이렇게 평온 속에 있을때에도 스스로를 바로잡는 데 "게을리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면" 그들의 나라는 계속 태평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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