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잊은 이스라엘(사사기 3:1-7)
우리는 여기에서 가나안의 옛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1. 원주민들 중에는 연합된 부족을 유지하여 파괴되지 아니하고 남아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3절)." 블레셋 다섯 방백" 이다. 즉 아스돗, 가사, 아스겔론, 가드 그리고 에글론이었다(삼상 6:17). 이 도성들 중 셋은 부분적으로 는 이스라엘에게 정복되었다(1:18). 그러나 블레셋인들이 그 땅들을 다시 자기들의 것으로 복귀시킨 듯이 보인다(아마 그 후로는 서로 동맹을 맺어 강화된 다른 두 도성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 도성들은 어떤 원주민들보다도 더 이스라엘을 당황케 하였고, 사사시대 후기에 와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들은 다윗의 때까지 결코 완전히 탈환되지 못했다. 또한 특별히 가나안인들 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영토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시돈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레바논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히위 족속들이 있었는데, 그곳은 멀리 떨어져 외진 곳이며 그곳에서 그들은 아마 인근 몇 나라들 중 어떤 나라들에 의해 도움받아 유지된 족속 같다. 그러나 이런 부족들 외에,2. 그 땅 모든 지방 어느 곳이나 그 민족들 중에 산재해있는 족속들(5절) 즉 헷사람과 아모리 사람 등등이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어리석은 묵인과 관용 - 그것은 지나치고 오만한 것이었다. - 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 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권리가 아직 가나안인들에게 있어 이스라엘인들은 오히려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 단지 소작농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되었다.
이제 원주민들 중 이들 나머지들에 관하여 살펴보자.
Ⅰ. 하나님이 그들을 남겨두신 것은 얼마나 현명한 일이었던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르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남겨 두신 것은 앞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행위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른 해석이 첨가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행위로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된 이익을 위해 그들을 남겨 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그것은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그들이 전쟁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함" 이었다(1,2절).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단련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도이었다.
1. 왜냐하면 그들의 땅은 "심히 풍요하고 비옥하였고", 모든 종류의 음식들이 때때로 고생을 알게 되지 않으면 극도의 사치와 유약성에 빠질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투사들까지도 무기를 너무 오래 쓰지 않음으로 부드럽고 섬세한 여인들과 같이 부드럽고 나약하게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우유와 꿀만 대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피의 고난도 맛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질은 위대하고 선한 모든 일을 파괴시키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리한 것만을 추구하게 되고 마는 성질이다.2. 그것은 또한 그들의 나라는 수많은 원수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침략을 당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산업이 "무늬있는 매와 같았고 매들이 그를 애워쌌던" 것이다(렘 12:9).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변방에 침략이 있을 때 잘 막아내어,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영토를 확장할 수 있게 잘 훈련될 필요가 있었다. 전술은 체험을 통해 가장 잘 습득되는 법이다. 즉 이 체험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군사적인 훈련에 숙달되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은) 군사적인 기질로 그들의 정신을 고취하는 것이다. 항해사를 육성하는 것이 섬나라의 사업인 것과 같이,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 두셨다. 그래서 별다른 난관과 어려움 없이 그들이 저들을 대적하여 더 큰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준비시켰던 것이다.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 연습을 함으로써 말과 함께 달리 수 있게 하려고 했다" (렘 12:5). 이스라엘은 싸우지 아니하면 안 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은 고난을 견디어야 한다(딤후 2:3). 그래서 훌륭한 그리스도인 심중에 조차도 타락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를 입게 되고 전술을 익히며,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을 방어하게 되는 법이다. 학자 패트릭 주교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사" 라는 본문 2절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제공해 주고 있다. 즉 그들은 그들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열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웠다. 하나님은 전쟁을 하도록 그들의 손들을 가르치셨고 싸울 수 있도록 그들의 손가락을 훈련 시키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잃고 말았으므로 이제 하나님은 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싸우는 방법을 배우게 하셨다는 것이다.
Ⅱ. 이스라엘은 얼마나 사악하게 가나안 족속의 남은 자들과 혼합되었던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남겨두신 자들에게서 의도하신 일은 "이스라엘을 시험하는 것" 이었다(4절).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성실한 자들이 자기들을 우상 숭배로 이끄는 가나안 족속들의 유혹을 이기는 영광을 차지하기 위함이며, 어리석고 불성실한 자들이 드러나게 하여 그러한 유혹에 굴복한 자들에게는 수치를 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도 반드시 이단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고전 11:19). 이 시험의 결과 이스라엘은 악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1.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혼인하면 저들의 영예나 재산에 이득을 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통혼했다(6절). 그들이 이러한 혼인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혈통을 더 순수하게 하는 대신 더럽혔을 뿐이며, 그들의 재산도 증가시키는 대신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었다.2. 또한 그들은 그들과 더불어 우상 숭배도 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신들(6절), 바알들과 아세라들" (7절)을 섬겼다. 즉 그들이 예배드린 형상들이란 일종의 자연 그대로 있는 신단인 통나무에 새긴 상(像)들 이었다. 이와 같이 불균형적인 양립에 있어서는, 썩은 사과와 신선한 사과가 같이 놓여 있을 때 처럼 좋은 것이 나쁜 것을 개선하기를 희망하기 보다는 나쁜 것이 선한 것을 부패시키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 타당한 생각일 것이다.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었을 때는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은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들이 이런 새로운 친척들에게 만족하게 되자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게 되고 그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와 그들이 그분 아래서 어떤 의무를 이행해야 될까에 대해서도 모두 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아니하면 관심도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 세상의 모든 악이 시작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길을 그르쳤던" 것이다.
옷니엘의 통치(사사기 3:8-11)
우리는 이제 사사들의 개별적인 통치에 대한 기록을 읽게 된다. 그 중 처음이 옷니엘에 관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여호수아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옷니엘은 여호수아 시대에 이미 그의 명성을 드러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이야기는 그들의 순결성이 타락되어 그 결과로서 그들의 평화가 깨어지기 이전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직후에 일어난 일로 보인다. 신성한 연대기를 연구하는데 고심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단 지파의 우상 숭배 그리고 레위 지파가 첩을 학대한 일 때문에 베냐민 지파와 싸움 - 이것은 이 책 후미에서 언급되어 있긴 하지마는 옷니엘의 통치시대나 혹은 그 이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있다. 옷니엘은 사사이긴 했지만 "백성들이 자기들의 생각에 옳은 것" 을 행치 못하도록 막는 일을 하는 그러한 왕과는 같지 않았다. 옷니엘의 통치에 대한 이 짧은 서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Ⅰ.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 당한 고통(8절).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특수성의 울타리를 철거해 버리고 스스로 다른 민족들과 동일하게 되어 버리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당한 분노를 보이셨다. 그리하여 저들을 보호하고 있던 방책을 철회해 버리셨고 열국 앞에 노출시켜 버리시며, 보기 싫은 물건처럼 그들을 팔아 버리셨다. 그들에게 제일 처음 손을 댄 자는 구산 리사다임이었다. 그는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강 이라는 2대강 사이에 있어 "강들 가운데 있다" 라는 의미를 가진 메소보다미아라고 불리어지는 수리아 나라의 왕이었다. 이 왕은 전쟁을 좋아하는 왕으로서 자기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처음에 이웃에 있는 요단 건너편 두 지파를 침입한 것 같다. 후에 그는 점차로 그 나라의 심장부로 들어가 마침내 그들 모두에게 조공을 바치게 했고 엄하게 다스린 것 같다. 그리고는 군대를 그 나라에 주둔시킨 것 같다. 고된 일로 야곱을 억압한 라반은 이 땅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 땅은 이와 같이 거리가 먼 데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고난이 이러한 먼 나라에서 다가올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Ⅱ. 이러한 어려움 중에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옴. "그(하나님)가 그들을 치니" 그들은 이전 경홀히 여기던 "그를 찾았다." "이스라엘 자손들" 곧 민족 전체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9절). 처음에는 그들의 고통이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왕의 멍에쯤은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8년 동안 조공을 바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고 전에는 그들이 비웃던 나라에 눌려 부르짖게 되었다. 환락의 날에는 바알과 아세라에게 소리치던 그들이, 이제 고통 중에서는 그들이 반역했던 여호와께 소리치게 되었던 것이다. 저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공의로우심이 그들을 이런 고난 중에 끌어다 놓았던 것이며, 또 오직 여호와의 능력과 은총만이 여기에서 그들을 도울 수가 있었다. 고통이 그들로 하여금 전에는 거의 말 한마디 없던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소리치게 만들었다.
Ⅲ.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비로 그들을 다시 베푸신다. 곤궁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몰아 세웠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은혜스럽게도 구원자 혹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 구세주를 세우셨다.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구원자는 누구였나? 그는 옷니엘이었다. 그는 갈렙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역사를 본 전통있는 가문 중의 한 사람이었고, 의심할 바 없이 그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변치 아니하고 그 백성의 반역을 보고 은밀히 비통해 하던 사람이었으며, 그 민족의 슬픔을 구하기 위해 공공 앞에 나서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기다린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런 영예를 맡기셨을 때, 아마 그의 나이는 매우 많았을 때 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명을 맡기셨을 때에는 그의 노쇠가 그의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될 수 없었다. 그의 사명은 사람에 속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음도 아니다. 오직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다" (10절). 즉 그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는 영이요, 그것을 실행하게 하는 능력의 영이었다. 그래서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충만한 만족을 주게 되는 것이 그 일에 임할 옷니엘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었다. 시리아역에서는 "예언의 영이 그에게 머물렀다" 고 되어 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어떤 것이었나? 그는 먼저 이스라엘을 판단하여, 그들을 책망하고, 그들의 죄를 헤아려 보게 했으며, 그래서 그들을 개혁했다. 그 다음에는 싸우러 나아갔다. 이것이 옳은 방법이다. 원수 중에 가장 나쁜 원수인 집안에 있는 죄를 먼저 정복하라. 그리고 나면 밖에 있는 적은 훨씬 더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판자와 율법을 세우는 자가 되게 하라. 그러면 "그가 우리를 구원 하실 것이다" (사 33:22).2. 그는 어떤 훌륭한 성공을 했나? 그는 억압의 멍에를 깨뜨리는데 성공했고 또 억압자의 목을 꺾었음이 분명하다. 즉 "여호와께서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라는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 유다 지파 옷니엘은 "먹이를 움킨 젊은 사자 같았다."
3. 옷니엘의 훌륭한 역사에 대한 좋은 결과, 땅을 획득하지는 못했지만 그 땅에는 평화가 왔고, 개혁의 결실이 풍성했고 그 연수가 40년간 이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의무에 충실하였다면 그런 복된 삶이 영구적이었을 것이다.
에훗의 통치(사사기 3:12-30)
사사들의 업적을 말해 주는 본서 사사기에 나오는 그 다음 사사는 에훗이다. 여기서 그의 활동을 살펴보자.
Ⅰ. 이스라엘이 다시 죄를 범하자, 하나님은 새로운 압제자를 세우셨다(12-14절). 그들이 그렇게나 오랜 동안 이전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고, 옷니엘이 그들을 치리했을 때 그렇게나 분명하게 약속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자비를 그렇게나 많이 받은 후에 다시 그들이 악을 범했다는 것은 그들의 행악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을 겪은 후에 또 다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다니! 방부제와 진정제로 치료하고 모든 치료방법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붙어 살아 있는 질병이 있었던가? 그것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그들은 그들의 압제자에게서 위험에 처한 일은 없었고, 또한 그 왕국의 권세가 약화되어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옛 죄에 더욱 대담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는 채찍의 방법이 다양함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모압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셨다." 이 압제자는 이전 압제자보다 더 그들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더욱 불행스러웠을 것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회개의 방향으로 부르시기 위해 점차 강하게 접근 하신다. 이스라엘이 장막에 거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을 존속하고 있었을 때는 모압왕 발락이 강성하였지만 그들에게 패배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들 주위에 있는 여러 민족들의 신들 (아마 그들 중에 모압의 신들도 있었을 것이다.)을 섬기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모압의 다른 왕을 강성케 하셨고, 그는 악한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채찍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의 손에 힘을 주셨다. 모압 왕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손에 잡고 있는 막대기는 하나님의 진노였다" 그(여기서는 모압왕)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사 10:6, 7).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을 행했다. 아마 모압 사람들은 더 악한 행위를 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통 이 세상에서 당신 자신의 백성의 죄를 벌하시어 비록 육체는 파멸될지라도 영은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약하게 하고 모압은 강성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강자가 되었을 때에도, 모압 사람들이 비록 우상 숭배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압 사람들을 괴롭히라고 허용하지 않았다(신 2:9). 그러나 지금은 모압 사람들을 괴롭히라고 허용하지 않았다(신 2:9). 그러나 지금은 모압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치게 허락하셨고, 그들을 이스라엘 징계의 목적으로 강성케 하셨다." 오 하나님! 당신이 심판은 위대하고 깊도다." 모압왕은 그의 조력자로 암몬 족속과 아말렉 족속을 택하였다(13절). 이것이 그를 강하게 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그들이 어떻게 승리했나를 보아야겠다.
1. 암몬 족속과 아말렉 족속을 들에서 저들을 쳤다. "그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쳤다라고 했다" (13절). 먼저 정착해 있던 요단강 건너편의 지파들 - 이들은 저들과 국경을 같이했다. -을 쳤다. 또한 요단강 이쪽 편에 있는 지파들도 쳤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가 "종려나무 성읍" 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성은 여리고가 있는 지역 가까이에 세워진 한 요새였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불리어졌다(신 34:3). 모압 족속들은 이스라엘에게 굴레를 씌우고, 그들 본토와의 교통의 보존을 위해 요단강의 통로를 확보하려고 수비대를 여기에 파송했다. 이 종료나무 성읍이 적군의 손에 함락되기 전에, 렌 족속들이 그 성읍을 떠난 것은 잘한 일이었다(1:16).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기적으로 획득한 것을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얼마나 빨리 잃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2. 그들은 이스라엘을 부렸다(14절). 즉 그들은 이스라엘로 부터 공물을 강요했으며, 그 땅에서 나는 각종 과일이나 그런 것들 대신 돈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무시하여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들이 바알에게 드린 "포도주와 기름" 은과 금을 저들에게 배상케 하신 것이다(호 2:8).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마땅히 드려져야 할 것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으면, 그것은 차압되어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서 지불된다. 먼저번의 예속은 불과 8면만 계속했지만(8절), 후자의 예속은 18년간이었다. 왜냐하면 보다 작은 교회에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더 큰 고통을 보내시기 때문이다.
Ⅱ. 이스라엘이 다시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새 구원자를 세우셨는데(15절), 그 이름은 에훗이었다.
1. 그는 베냐민 사람이었다. 이 종려나무 성읍은 이 족속의 몫으로 배당된 땅이었다. 아마도 그 때문에 그들은 가장 큰 수난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멍에를 벗으려는 마음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연대기 학자들에 의하면, 기브아의 약함을 도우기 위하여 베냐민과 함께 출전했던 이스라엘의 싸움은 이 싸움보다 먼저 있었던 일이고 그 싸움 때문에 베냐민 지파의 장정은 600명으로 축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베냐민 지파가 모든 지파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지파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완전히 화해하신다는 표로서 그 지파에서 또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가운데서 강함을 세움 받게 된다는 것을 보이시며 또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신다는 것" (고전 12:24)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 구원자를 그들에게서 세우셨다.2. 그는 왼손잡이였다. 베냐민 지파에는 많은 사람들이 왼손잡이였던 것처럼 보인다(20:16). 베냐민이란 "오른손의 아들"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 중의 다수가 왼손잡이였다. 사람들의 본성이 항상 그들의 이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칠십인역(LXX)은 기록하기를 그는 양손잡이 즉 양손을 똑같이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소명받은 일에 잇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히브리 역본에는 "그의 오른손은 불능" 이었다고 한다. 이 말은 그는 질병이나 사용치 않은 때문에 거의 못쓰게 되었거나 전연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의 왼손만을 쓸 수 있었지만 전쟁에는 과히 적합치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가피하게 그는 자기의 칼을 거북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왼손잡이를 택하여 당신의 오른손잡이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그를 "당신을 위하여 강하게 하셨다" (시 80:17).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는 것은 그가 들어 쓰시는 도구들의 오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손이었다(시 44:3).
3. 우리는 여기에서 에훗이 모압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무슨 일을 행했는지를 볼 수 있다. 에훗은 압제자들의 죄악의 그릇이 가득하여져 이스라엘에게 은혜 베풀 시간이 되었을 때에, 압제자들을 멸망시킴으로써 압제당하는 자들을 구하였다.(1) 그는 모압왕 에글론을 죽게 했다. 내가 여기 말하거니와 에훗은 그를 "죽게 했다." 에훗이 살인을 하거나 암살을 범한 것이 아니다. 주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심판자요, 소명자로서 도저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는 원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 사람이라고 이 이야기는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1] 에훗은 그 왕에게 접근할 좋은 기회를 가졌다. 그는 슬기로운 행동의 사람이요 왕들 앞에 서기에 합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백성은 그를 뽑아 그들을 다스리는 자인 모압의 왕의 눈에 은총을 입기 위하여 온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그들의 공물을 바치게 되었다(15절). 이 공물은 본래 민카(mincha)라고 불리우는 것인데, 율법서에서는 하나님께 은총을 입기 위하여 드리는 제물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그들의 절기에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태만에 대한 벌로서 그들은 자기들을 미워하는 이교도 왕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에훗은 그가 의도하는 바를 숨기고 의심을 잘 감추기 위하여 상례적인 예식과 의무적인 존경의 예를 표하여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치러 갔다.
[2]처음부터 그는 에글론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이 그의 심중에 그 일을 심어 주셨고, 그 일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그에게 알게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계획의 합법성과 성공에 대해서 충분한 확신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 두 문제는 그로서는 충분히 의혹을 품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그것을 하라고 명하신 것이라고 확신했다면, 그는 그 일을 해도 가하다는 것과 또 마땅히 그 일을 해야 함을 확신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양심을 거스리거나 세상 사람의 의견을 거슬러서도 능히 우리에게 일을 맡기거나 중지 시키기 때문이다. 총을 꽂는 대검 길이 만한 반 야드 정도의 길이인 단검을 만든 그 준비행위에서 나타난다. 이 칼은 옷 속에 용히 숨길 수 있었다(16절). 아마도 왕 앞에 나갈 때는 칼을 차고는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 칼을 그의 왼쪽 손으로 빼기 쉽고 또 발각될 염려도 없게 하기 위해 그의 오른쪽 허벅다리에 찼다.
[3] 그는 그와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친밀해지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선물과 그에게 나타낸 경의로 그에게 환심도 샀다. 그가 음모를 실천한 방법을 관찰해 보자.
첫째로 그는 함께 한 동료들에게까지도 자기의 계획을 숨겼고 그가 마치 모압왕 궁정에 무엇을 두고 온 것처럼 하여 그 왕에게로 돌아갈 때도 그 동료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다(18절). 그 일을 실행하는 데는 다만 한 사람의 손만 필요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일에 참여했다면 비밀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렇게 용이하게 도피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둘째로 그는 길갈 근처 "형상을 새기는" (난외에는 이렇게 읽고 있다)에서부터 돌아왔다(19절). 여기서 말하는 길갈은 아마 여호수아가 세운 12개의 돌과 모압인들이 세운 돌이 있는 그곳일 것이다. 혹자는 이 우상들이 서 있는 광경을 보자 에훗에게는 에글론을 죽이고픈 분노가 일어났다고 본다. 그래서 만일 그런 광경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 계획을 당분간은 보류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아마도 그가 이러한 새긴 형상들이 있는 데까지 왔다가 돌아가서 에글론에게 자기가 어디서 돌아왔는지 말했기 때문에, 모압 왕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았는지도 모른다고 보다 쉽게 믿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세째로 그는 사사로이 들려 줄 이야기가 있다고 청했다. 여기에서" 서늘한 다락방" 이라 불리는 밀실에서 그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청했다. 그는 왕에게 은밀한 일을 고할 것이 있다고 말했고, 왕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물러 가도록 명령했다(19절). 그는 신탁을 통하여 어떤 사사로운 교훈을 받기를 기대했던지 혹은 마치 에훗이 이스라엘을 반역할 것 같이 여겨져 현 이스라엘 국가에 관한 정보를 얻을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외방 사람과 전혀 홀로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현명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파멸되기로 낙인된 자들은 얼이 빠지는 법이다. 그들의 마음의 눈은 총명을 잃게 된다. 하나님은 그들의 분별력을 파멸시키신다.
[4] 그와 단 둘이 있게 되자마자 에훗은 신속히 그를 해치웠다. 그가 안일과 사치를 탐닉하던 서늘한 다락방이 그의 사형 집행장이 되었다.
첫째로, 에훗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20절). 그 명령이란 칼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입의 심판은 물론 그의 손의 심판도 내리신다.
둘째로, 에글론은 하나님의 명예 경의를 표한다. 비록 왕이고 이교도의 왕이며 부유하고 권력이 있고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폭정을 베풀고 있으며 또 쉽게 일어서거나 오래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거북스럽게 비대하며 또 사사롭고 감시 하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어떤 명령을 듣기를 기대했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자리가 낮고 안이한 것이었던지 높고 위풍당당한 것이었던지 간에 그는 그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려고 했을 때는 일어섰다. 이것을 보아 그는 하나님은 자기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우는 많은 사람들의 불손을 부끄럽게 한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될 때에도 부주의한 태도로 관망하고 얼마나 그것을 소홀하게 대하는가? "하나님의 명을" 행하여야 할 소명을 받은 에훗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공언한다. 하나님께서 에글론을 일으켜 세우고자 한 것은 그 사명을 확인하고 처형을 용이케 하기 위함이었다.
세째로 그 명령은 그의 귀에 전달된 것이 아니라 곧바로 또 글짜 그대로 심장에 전달 되었다. 곧 필살의 칼이 그의 심장에 꽂혀 버린 것이었다(21,22절). 그는 지나치게 비대하여 항거하거나 수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사치하고 지나친 생활의 결과였을 것이다. 비대한 것이 위세당당한 것을 과시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때 하나님은 바로 그 상태를 통하여 그 위풍있는 체격이 다만 자신의 비극을 준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세속적인 안전과 어리석음의 한 상징이었다. 그의 심장은 온통 지방분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는 지방분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시 119:70; 17:10 참조). 에글론이란 송아지를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제물이 될 만한 살찐 송아지처럼 칼에 쓰러졌다. 그래서 분토가 나왔다는 것이 특기되어 있다(개역에는 없음). 이것은 이교만한 폭군의 죽음은 더욱 불명예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케 해 준다. 그는 그 자신의 몸에 관하여 너무나 사치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안일하고 정결하게 하려고 했으나, 이제 그는 자신의 피와 배설물에서 딩구는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제왕들을 멸시하실 수 있다. 에훗이 행한 이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명령을 받은 것이고 그를 처치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의 원수에게 복수하시는 합당한 방법이라고 인정된 것이며, 그런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세상에 나타내심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같은 일은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이와 같은 사명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와 같은 일에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께 욕되게 할 수 있는 것이며 악한들 중에서 가장 악한들을 후원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넣으라고 명령하셨을 뿐 그에게 그것을 다시 뽑으라고 명령한 사실을 볼 수 없다.
[5] 에훗이 처형하고 났을 때, 놀랍게도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도피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었다.
첫째로 폭군은 말 없이 쓰러졌다. 주위에 있는 그의 부하들에게 들릴 만한 어떤 비명이나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조용히 함정으로 들어와 숨을 거두었는가? 그것은 아마 그 자신의 비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세상에서 큰 소리로 쳤고," 살아서는 두려운 권세를 가졌지만" 죽을 때는 그 자신의 비대 때문에 죽음의 신음소리와 더불어 숨이 끊어진 것이다.
둘째로 이 복수의 영웅적인 집행인 에훗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진 자세로서 그 다락에 나오면서 문을 닫고 문을 잠구었다. 그리고는 전혀 어떤 낌새를 채지 못할 만큼 대담하고 아무 일 없었던 모습으로 그 수비구역을 통과했다.
세째로 에훗이 가고 대기실에 있던 신하들이 와서 다락문이 잠긴 것을 보고 왕이 쉬는 줄 알았으며 왕이 어떤 메시지를 듣고 편히 누워 자면서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여 그 일로 생각에 잠긴 줄 알았다(24절). 그러므로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왕의 잠에 방해를 주지 않을려는 그들의 배려로 인하여 왕의 죽음을 보복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적인 위풍을 너무 내세워 사람들과의 거리를 두게 될 때, 때때로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해가 될때까 있음을 알자.
네째로 신하들은 드디어 문을 열고 왕이 "참으로 영원한 잠이 들고 말았다" 는 것을 발견했다(25절). 이 비극적인 광경에 그들은 전율을 느꼈고 당황하였으며, 그들 자신들이 생각이 모자라 바로 문을 열어 보지 못한 것을 뉘우쳤다. 그리고 그 일을 자행한 자를 잡기 위해 추적자들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이미 그를 그 나라가 잡는다는 것은 절망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에훗은 이 일을 한 후 울창한 숲이란 의미를 가진 스이라는 곳으로 피했다(26절). 이 이야기에는 당시에 에글론이 살고 있던 곳이 어느 곳인지 말한 곳이 없다. 그러나 에훗이 요단강을 지났다거나 다시 건넜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는 것을 볼 때 에글론은 요단 건너편(서편)에 있는 모압의 점령지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길갈 근처에 있는 채석장은 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안주한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 위에 군림할 요새를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는 더 큰 장소에서 양과 같이 도살되기 위해 양육되고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2) 에훗은 모압왕을 죽이고 그들 가운데 있는 모압 사람들의 군대에 일대 혼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압제의 멍에를 벗겼던 것이다.
[1] 그는 모압 사람들의 본영에서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즉시 군대를 소집하였고 그 자신이 앞장섰던(27절). 그가 분 나팔은 실로 해방을 선포하는 희년의 나팔이었고, 억압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쁨의 소리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원수들이 부는 나팔소리 외에는 나팔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2] 그는 경건한 사람답게 이 모든 일을 신앙으로 행한 사람이었으므로 스스로 용기를 가졌고 모든 병사들에게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용기를 부어 주었다(28절).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즉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담대히 나아가자. 승리는 확실하다."
[3] 지략있는 장군답게, 그는 먼저 요단강의 여울들을 확보했다. 그래서 모든 길목에 강력한 수비군을 배치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땅 안에 있는 모압 사람들(에훗은 이들만 생각하고 있었다.)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그들 본국 사이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함이었다. 또 그들에게 어떤 경보가 들어가 도주하기로 하더라도, 그들이 그 쪽으로 도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그들이 싸우기로 작정했다면 그 쪽에서 원병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들이 자기들의 궁전이나 낙원과 같이 즐기던 그곳을 그들의 감옥과 같이 그 땅을 봉쇄했을 것이다.
[4] 그는 그들을 습격하여 그들 중 1만명을 칼로 베었다. 이 숫자는 아마 이스라엘을 속국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파견된 병력의 인원수인 것 같다(29절). 그러나 "한 사람도 피하지 못했다." 이들은 모압의 모든 군인들 가운데서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자들이었고, 모두 원기왕성하고 큰 몸집에 건장한 자들이었으며, 또 신체상으로 모든 것이 구비되었을 뿐 아니라 높은 사기도 가졌으며 용맹스런 자들이었다(29절). 그러나 그들의 강함과 용기도 하나님이 그들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실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다.
[5] 이 승리의 결과로 이스라엘 경내에서 모압의 세력은 완전히 붕괴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제 이 땅에서 압제자들을 말끔히 씻게 되었다. 그래서 "그 땅이 팔십년 동안 태평하였다" (30절). 우리는 그동안 선한 역할을 계속한 에훗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우상 숭배를 중단하고 이스라엘에게 어떤 개혁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80년 동안이란 그 땅의 평화는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가나안에서 얻을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에 비교한다면 무엇이 긴 시간이겠는가?
삼갈의 공적(사사기 3:31)
"팔십년 동안 그 땅이 태평했다." 고 하는 말은, 혹자에 의하면, 모압 사람들에 의하여 억압을 받던 요단 동편에 있는 땅을 주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본문상으로 보면 남서쪽에 있는 요단 이편쪽에도 그 당시에는 블레셋 사람들로 말미암아 피해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삼갈이 바로 그들을 대항하여 막아냈던 것이다.
1. 이스라엘에는 구원이 필요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이스라엘 을 구원했다" 고 했기 때문이다. 후에 드보라가 "너의 노래에서 아남의 아들 삼갈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5:6)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그들의 곤혹이 얼마나 컸던 가를 알 수 있다. 블레셋 변방에 있는 지방에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도로로 여행할 수 없을 만큼 약탈이 극심했었다. 그런 곳에는 위험이 컸고 약탈이 심하여 방비되어 있지 못한 마을에서는 감히 살아갈 수도 없었고, 다만 요새화된 성읍들 중에만 안전을 얻을 수 있었다.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삼갈을 세우셨다. 이 때는 에훗이 생존해 있긴 했으나 완전히 노쇠했을 때로 생각된다. 적군의 수효는 너무나 작았으므로, 그들 중 6백명을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소를 몰 때 쓰는 막대기로 그렇게 많은 적을 죽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막대기를 보습(a plough-share)이라고 하기도 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 땅을 약탈하려고 침략해 왔을 때, 아마 그는 보습으로 밭을 갈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은 그의 심중에 그들을 대항할 마음을 주시고 돌변적이고 강한 충동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칼이나 창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손 가까이에 있는 경작 도구들 중에서 어떤 것을 잡아 그것으로 상처 하나 없이 수백명이나 죽이고 일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을 보게 된다.
(1) 혈통, 교육, 그리고 직업이 비천하고 두드러진 것이 못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과 교회의 이익에 탁월하게 쓰이게 하실 수 있다. 성령을 넘치게 가지신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실 때 밭가는 사람들로도 사사와 장군으로 세우실 수 있고, 어부를 사도로 세우실 수도 있다.
아무리 약한 무기라도, 하나님이 그 팔을 지휘하시고 힘주시면 조금도 문제될 바가 없다. 소 모는 막대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골리앗의 칼보다도 더 강해지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능력의 탁월함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이러한 비천한 도구를 통하여서도 역사 하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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