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사사기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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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책망(사사기 2:1-5)

이스라엘은 그들을 행복의 길로 이끌고 또 보존시키기 위하여 단 한번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보내어진 율법을 소유하게 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언제든지 정도(正道)에서 이탈할 때에는 그 때마다 바른 길로 오라는 교훈과 책망을 주는 하늘로부터 오는 특별한 메시지를 가졌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이었다.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고 읽을 수 있는 기록된 말씀 이외에도, 그들은 "이것이 길이다" 라고 그들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종종 들었다(사 30:21).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시는 방법이 여기에서 비로소 시작되고 있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게 되자 예언자들의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시험받게 된 것이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앙에 냉각해졌을 때에 들려졌던 대단히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를 보게 된다.

Ⅰ. 설교자는 예언자도 아니고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비느하스도 아니고 "여호와의 사자(천사)" 였다(1절). 복음의 사역자도 사실상 "교회들의 사자" 라 불리운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결코 여호와의 사자들이라고 불리우지 않았다. 의심할 바 없이 여기서 말하는 천사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자(messenger)였다. 이러한 특별한 사자들은 이 책에서는 기드온과 삼손과 같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들을 세우는 일에 기용되었음을 자주 본다. 여기에 또한 사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는 선한 직능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설교를 행함으로써 한 사사가 나타나 있다. 그들로 하여금 죄와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보내어진 이 특별한 사사는, 가능하다면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마음 쏟지 않는 그 백성에게 이 메시지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쏟도록 그들에게 명령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석학 패트릭 주교는 이 사자가 어떤 피조된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장의 대장 즉 하나님 자신과 같은 분으로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사자와 같은 계약의 천사라는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얘기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니고서야 그 누가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했다" 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후에 그들에게 가나안 사람들과 혼합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말을 유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한 천사처럼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을 통하여 그들에게 똑같은 경고를 되풀이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종들은 멸시했을지라도 그의 아들은 존경할 것이다. 여호수아의 이 사자는 길갈에서 올라 왔다고 말하는데, 아마도 그는 지상 위를 걸어온 것이 아니고 천사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왔듯이 하늘 공간을 빠르게 날아서 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걸어왔든지 날아왔든지 간에 그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길갈로부터 온 것으로 보인다. 길갈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 오랫동안 그들의 본 진영이 되어 있었고 거기서 할례의 계약이 새롭게 되었으므로(미 6:5), 그가 길갈로부터 옴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사실이 그들에게 기억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과 들은 것" 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확고하게 해주는 경고가 될 것이다(계 3:2, 3).

Ⅱ. 이 설교의 대상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 이었다(4절). 위대한 설교자의 위대한 대중! 그들은 어떤 중대한 원정을 위한 각 지파의 연합군을 파병키 위해 회집되었든가 그렇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회합의 장소는 그들이 매년 세번씩 모두 함께 모이는 회막이 있는 실로가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제도적인 제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참예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회막문에 그의 선물을 받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 장소는 보김이라고 불리어졌다(1절). 왜냐하면 그 장소에는 그 때의 필요에 따라서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이다. 모든 이스라엘인에게 여기서 주어진 책망과 경고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그들 모두에게 들려진 것이다.

Ⅲ. 그 설교 자체는 짧았다. 그러나 대단히 함축적이었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들에게 다음의 몇 가지 내용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1절). 그는 노예와 고역의 땅인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고 휴식과 자유와 풍요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친절하였고 그들의 열조에게서 원한 맹세에 신실하였고, 그리고 그의 능력에 대하여 그와 같은 실증을 보여 주었는데도 만일 그들이 그것을 불신했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며, 그와 같이 그들을 돌보았는데도 그들이 그것을 포기해 버렸다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하신 것이다. 곧 "내가 말하노니 나는 너희와 맺은 나의 언약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것은 임의로 저버리거나 다른 백성과 그 위치를 마음대로 바꾸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충실하다면 그는 결코 그들에게 변함없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과 맺은 계약은 그들편에서 파괴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결코 파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했다.

3. 하나님께서 타당하고 합리적인 요구를 그들에게 하셨다(2절). 그들이 하나님과 계약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과 원수인 가나안 사람들과 영합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제단을 세웠으므로 가나안의 단은 헐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게 될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4. 하나님이 가장 강하게 주장하신 바로 그 일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였는가? 그들은 복종치 않았다. 즉 너희는 이 하찮은 일에도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 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계약과 그 계약 안에서 이뤄진 그들 서로 간의 동맹을 멸시하고, 우상 숭배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우호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성단과 마주 대하여 이방 신단들을 세워도 그것을 묵과했던 것이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너희는 이런 잘못에 대하여 어떤 합당한 설명을 할 수 있는가? 너희를 위해 무슨 변호를 할 수 있으며 무슨 변명을 갖다댈 수 있느냐?" 하나님과의 교제를 포기하고 어두움의 무익한 일들과 함께 한 자들은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곧 다가올 심판의 날에 자신들을 위해 할 말을 전혀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5. 이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어떤 고통을 각오해야 했던가?(3절). 그들이 그들 가운데 가나안 사람들을 용납해 둔 것은,

(1) 가나안인들에게 승리의 기회를 줄 것이다. "너희가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하므로 나도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하리라" 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들의 죄가 그들의 벌이 되었다. 그들이 욕심과 부패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상실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서 떠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우리가 악마에게 저항하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이 악마를 우리의 발 아래 두시게 하실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2) 그것은 그들에게 계속적 괴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어, 너희가 어디로 돌아 눕든지 너희에게 상처를 주리라."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과 동맹을 맺고 하나님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3) 그것은(이것이 최악의 사태이다.) 그들에게 끊임없는 시험이 될 것이요, 그들을 죄로 이끄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들의 신들이(시리아역은 그들의 가증한 것들이라고 했다.)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즉 너희는 비참하게도 그들에게 이끌리어 뒤얽히게 되고 그것이 너희의 파멸이 될 것이다." 라고 혹자들은 해석한다. 죄에 접근하는 자들은 반드시 죄에 빠지게 되고 거기서 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흔히 사람들의 죄가 저들 스스로에게 형벌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을 등지는 완고한 자들의 "앞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다.

Ⅳ. 이 설교의 성과는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그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 울었다" (4절).

1. 그 천사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해서 말해 주었고, 그들은 그것으로 인한 저들의 슬픔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죄의 고백의 소리를 높였고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배은망덕에 대하여 소리치며 울었는데, 그것은 자신에 대하여 수치를 느끼었음과 동시에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그들의 이성과 그들의 유익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2. 그 천사는 그들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고 그들은 거기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어 줍시사고 기도했고, 그 진노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울었다. 그들은 이 경고로 인하여 완고히 굳었던 마음이 풀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 말씀에 두려워 떨고 감히 내세울 말이 없게 되었다. 이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이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는 표가 되었다. 눈물 없이 성서를 읽을 수 있다는 자들은 놀라운 죄인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하지 못했다. 그들은 울었다. 그러나 그들이 개심하여 집으로 돌아가 모든 우상 숭배의 유물들과 그들 가운데 있는 우상 숭배자들을 파멸시켰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가 없다. 많은 완악한 사람들은 저들이 새로운 모양을 입기 전에 먼저 말씀으로 녹아들고 만다. 그러나 이 전체적인 울음은,

(1) 그 장소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5절). 그들은 그곳을 보김 즉 우는 자들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우리들의 종교적 회집에 붙일 수 있는 좋은 이름이다. 그들이 하나님과 밀접히 지내고 그들의 의무에 충실했다면 노래 소리만이 그들 회중에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에 거기에는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2) 그 설교는 어떤 엄숙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단이 있는 실로에 모였기 때문에 (이것은 상상이지만) 거기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렸다. 그들은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시고 그리고 그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그들 자신들을 바친다는 표시로, 또한 다만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계약을 세우기 위하여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이야기의 결과에 비추어 볼 때, 우상 숭배의 뿌리는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 다 뽑힐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없음.

 

2:3 없음.

 

2:4 없음.

 

2:5 없음.

 

2:6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사사기 2:6-23)

이 본문의 시작은 여호수아의 통치 기간과 그의 죽음과 매장에 있어서 그 백성이 보여준 아름다운 일들에 대한 이미 나왔던 이야기의 단순한 반복이다. 이 이야기는 본장의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의 길잡이로 나와 있을 뿐이다. 본 장의 이야기는 그들의 타락과 패역을 말해 주고 있다. 그 사자는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우상들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예언했었다. 이제 이 역사가(신명기 저자)는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고 있고 또 그것을 더욱 분명히 나타내기 위하여 그 앞에 있었던 몇 가지를 회고하고 다음 사실에 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1. 가나안 땅에서의 그들의 행복한 정착에 대하여 여호수아는 그들의 땅을 분배하여 조용하고 안전하게 소유하게 하도록 각기 해산케 했다(6절). 그는 모든 족속에게 뿐 아니라 모든 개인도 각자 그 자신의 축복으로 받은 기업으로 돌아가게 했다.

2. 그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계속하여 두려워하고 믿었다(7절).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한 그 선한 결심을 지속하고서 그들의 기업이 되는 땅으로 가는 동안은 그러했다. 즉 그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고 좋은 교훈을 주며 그들 가운데 잠식해 들어오는 부패를 책망해 주고 막아주던 선한 지도자들이 있던 동안, 또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으로 이끄실 때 그들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나게하는 그런 지도자들이 있는 동안은 그 선한 결심을 잘 지켜 나갔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사(奇事)들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을 믿게 되었고 자기들을 위해서 그토록 영광스러운 현현을 보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유를 충분히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는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3. 그 백성들의 종교적 문제에 결정적 타격을 준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례에 대하여(8,9절) 그들이 그에게 입은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존경을 표하였다. 그래서 그를 딤낫 헤레스에 장례지냈다. 본문에는 여호수아서와는 달리 - 거기에서는 딤낫 세라로 불리었다. - 불리우고 있는 것이다. 헤레스란 태양을 의미하는데,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그의 무덤 위에 있는 한 상징이며, 그것 때문에 태양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또한 태양처럼 끊임없이 빛나는 그의 말을 기억하여 붙였다고도 한다. 몇몇 유래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그 당시 사람들이 태양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했음을 두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릴 위험이 있었다고 본다. 또한 여호수아에게 영예를 돌리기 위해 태양의 상이 허락될 수 있었을까도 의문이 적잖게 간다.

4. 새로운 세대가 남에 대하여(10절) 몇 년의 세월이 지나간 당시의 모든 세대는 죽고 그들의 아름다운 교훈과 본보기들은 죽고 그들과 함께 장사되어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 자손들이 나왔으며 그들의 온갖 교육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종교에 대하여 별다른 인식도 없고 관심도 빈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신 바 그대로 그를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여호와를 바르게 알았더라면 그를 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세상일에 심취하였다. 그래서 세상일에 뜻을 두었고, 안일과 사치로 육신의 소욕에 이끌리어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종교를 명두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나 용이하게 거짓 신들과 가증스러운 그들의 미신으로 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사시대 동안 여러가지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여러가지 일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전해주게 되었고, 그리하여 동일한 내용을 동일한 순서로 반복했던 것이다.

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저버렸고, 오직 그에게만 돌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가나안 족속들의 쓰레기 같은 잡신들에게 돌리게 되었다. "오, 하늘이여 이 일로 인하여 놀랄지어다. 오, 땅이여" 어느 민족이 그렇게 잘 먹여주고 잘 교훈한 하나님, 능력이 무한하시고 흠없이 순결하시며 다함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또 그렇게나 다른 경쟁자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선하거나 악할 수도 없을 나무, 돌과 같은 그런 물건과 바꿀 민족이 어디 있겠느냐?(렘 2:11, 12). 이렇게나 어리석고 배은망덕하고 패역한 예는 결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여기에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가 살펴보자(11-13절). 전반적으로 보면, 그들은 그 이상 더 악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그런 악을 행하였다. 즉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그들 자신들에게도 그 이상 더 해독이 될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의 악을 행하였으며, 또 그 악행을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하였다. 모든 악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다른 신을 섬기는 죄를 특별히 주목하신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 그들은 "여호와를 버렸다" (12,13절). 이것은 예레미야 2장13절에 나타난 2대 악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계약으로 여호와와 결합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반역적으로 남편을 저버리는 아내와 같이" 하나님을 저버렸다. 시리아역은 이것을 말하기를, "그들은 여호와 예배를 저버렸다" 라고 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 예배를 저버린 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자신까지도 저버린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요, 그들은 그의 집에서 태어났고 또 그러므로 그를 섬겨야 한다는 그 사실과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고" "그들의 굴레를 풀어 주셨다. "는 점에서 그들 역시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이 저들의 죄악상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이다.

2.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저버렸을 때, 그들이 "하나님이 없다" 라고 하는 어리석은 무신론자들이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이다. 신(神)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많은 것들이 순수한 본성에 기억나듯이, 부하 잡다한 우상에게 나타나게 된다. 이스라엘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특별한 선민이 되는 영예를 가졌고, 존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들 주위에 있는 백성들의" 신들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의 특권에 비해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들은 남신과 여신 곧 바알과 아스다롯을 태양과 달, 즉 쥬피터와 쥬노를 향하여 단을 세웠다. 바알림은 주(主)들을 의미하며 아스다롯이란 축복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이 양자는 둘다 복수(復數水)를 나타내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이 한 분이신 여호와를 버렸을 때 그들은 화려한 공상이 신들을 다수화하기를 좋아 하듯이, 많은 신들과 많은 주인들(lords)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무엇으로 신을 삼든지 간에, 그들은 그 신들을 섬겼고 그들에게 영광을 돌렸으며 그들에게서 은혜 받기를 구했던 것이다.

Ⅱ.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노를 발하셨고,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었다(14,15절). 그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요 자신의 명예로운 이름에 진실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진노하셨다. 그들의 패역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이 취하신 방법은, 유혹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했더라면 위대하고 행복하게 되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을 저버림으로써 그만큼 더욱 비참하고 비천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승리의 행운은 그들을 저버렸다.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린 후에는 전에 그들의 정복이 확실했던 만큼 그들이 손에 칼을 들 때마다 패전이 분명하였다. 그 전에는 그들의 적들이 그들 앞에 나서지를 못했고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에서나 여호와의 손이 그들을 보호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이 냉담해졌을 때, 하나님은 당신의 은총을 도말하셨다. 그래서 그들의 성공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원수들을 더 이상 몰아낼 수 없게 되었다. (3절). 그 땅을 사수하는 데에도 급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완전히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자, 그들을 치는 전쟁이 즉시 일어났고,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적을 당해낼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일단 알고 고백했다가 다시금 저버린 자들보다는 오히려 당신을 전혀 알지 못한 자들에게 성공을 주시려 하신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다" (사 63:10).

2. 그러자 힘의 균형도 깨어져 그들에게 불리하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그들을 압제하거나 노략질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넘기셨다. 즉 우리가 팔아버린 물건을 처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아낌없이 그들을 넘겨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그를 반역할때는 당신 자신의 특별한 선민까지도 그냥 두시지 아니하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보존키 위해 귀한 사려에 근거하여 그 일을 단행 하셨던 것이다. 배신으로 인하여 임한 하나님의 영광의 침해에 대한 보상은 저들의 고난을 통하여서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한 빚진 자들(마 18:25)이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팔아 버리셨다. 그들의 형벌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1) 그들이 행한 바대로 보응 받았다. 그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민족들 중 가장 비천한 민족들의 신들까지도 섬겼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 주위에 있는 민족들의 왕들, 즉 가장 비천한 왕들까지도 섬기게 했다. 바보의 동료가 된 모든 자는 마땅히 모든 동료들에 의하여 바보로 여겨지는 법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어떻게 응답되었나? 계약을 맺은 그들 앞에는 축복과 생명과 더불어 저주와 죽음을 두겠다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맹세하신 것과 같이, 하늘의 손은 그들을 저버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발견한 자들은 거기서부터 그는 그의 경고에도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능히 추론해 낼 수 있을 것이다.

Ⅲ.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곤고를 당할지라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어 구원 하시었다. 저들이 당하는 고통은 그들의 죄에 대한 벌이요, 또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이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 고통 중에서 구원함을 받았다(16-18절).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1. 구원의 길로 저들을 인도하심. 그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서 온 것으로, 그 근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안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뉘우친 것이" 아니라 (17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아니하고 죄를 계속 범했다.)" 저들이 괴로와함으로 써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신음은 저들의 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서 영원히 멸망 받아야 마땅하며, 또한 오늘날은 하나님의 인내의 날이 요 우리에게는 시련의 날이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진노를 다 발하시지는 않음이 사실이다. 공의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어야 하겠지만,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런 일을 행하실 수가 없었다.

2. 그들의 구원의 도구.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천사들을 보내시지 않으셨고, 또한 그들의 조력을 위해 어떤 외국의 세력도 끌어 들이지 아니 하시고, 때에 따라서 그들 자신들 중에서 사사들을 세우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어 부르셨으니,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구원해야 할 사명과 놀라운 성공으로 관 씌우신 위대한 사명에로 부르신 자들이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세우셨을 때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구원자들이 되었다.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교회가 가장 깊은 타락과 곤고를 당할 때에, 하나님은 교회를 거기에서 구원하고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울 어떤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2) 공적인 사명에 유용한 사람을 시기에 합당하게 일으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그들에게 행동하고 모험할 수 있는 기백을 주신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 국가에 주시는 모든 축복은 하나님의 선물로 간주 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그는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임재를 허락하시어 그가 세우신 자들에게 그는 함께 하실 것이다.

(4) 한 나라의 사사(재판자)들은 그 땅의 구원자들이다.

Ⅳ. 타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개선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사들에 의해서도 돌아서지 않았다(17-19절).

1. 그들의 사사들이 그들과 함께 있어 개혁사업에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에게는 "사사를 청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로 그 때에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았고" 우상에 미쳤으며 완고히 치우쳐 타락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혼인한 관계였지만 혼인계약을 파기하였으며, 이들 신들을 쫓아 음란에 빠졌던 것이다. 우상숭배는 영적인 간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도덕하고 천박한 것이며 불성실한 것이다. 그들은 돌아서기에는 너무나 완고하며 오직 거기에 골몰해 있을 뿐이었다.

2. 개혁의 시기에 바른 길로 가기 시작하던 그들도 다시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옛날과 같이 여전히 악하여졌다. 그들은 그들의 경건한 열조가 행하던 그 길을 떠났다. 그것도 그들의 열조의 선한 전승과 그들 자신의 좋은 교육의 영향에서 새 출발을 한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경건한 조상을 가진 악한 자녀들이 그와 같이 행하였으므로, 그들에게는 책임이 그만큼 클 것이다.

" 사사가 죽은 후에는 우상 숭배를 막고 있던 뚝을 터놓은 것 같아서 우상 숭배의 홍수는 다시 넘쳐 흘러 그들은 더욱 파괴하여졌다. 그래서 개혁을 지향하던 때보다 그 다음 세대가 더욱 악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19절)" . "그들은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조상들을 능가하였고, 속되고 불경한 의식을 창안하였다. 곧 저들은 개혁자들의 길과는 모순되는 길을 걸었다. 그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고, 가장 추악한 우상 숭배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가장 야만적인 자들에 대해서도 혐오를 가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완고한 길에서 한 걸음도 돌이키지 않았다. 이미 알고 고백했던 하나님의 선한 길을 저버린 사람들은 흔히 죄에 대하여 아주 대담하고 파격적이어서 그들의 심정은 극도로 완악해지게 된다.

Ⅴ. 이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결심은 그들 위에 계속 채찍이 머물게 하시었다.

1. 그들의 죄는 가나안 족속들을 남겨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계약과 그들에게 준 계명을 멸시하고 파괴하면서 행한 일이었다(20절).

2. 그들의 벌은 그들이 남겨 두었다. 그 가나안 족속이 저들에게 대한 채찍이 된 것이었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은 모두 여호수아의 손에 맡기시지는 않았다(23절). 우리 주님께서도 "권세와 권능을 쳐부수셨으나" 처음부터 완전한 승리를 하시지는 않았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모든 것이 주님에게 굴복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 땅에 가나안 족속들이 남아 있었듯이, 교회에는 사탄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여호수아는 영원히 살아 있다. 마지막 심판날에는 그의 완전한 정복이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가나안 족속을 치는 일이 오랜 기간 동안 별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섞이게 되었고 그들과 친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을 추방하지 않으려 하셨다(21절). 만일 그들이 자기들과 함께 거할 만큼 친밀한 자들이 있거든 그리 하도록 버려두라. 그리고 거기로부터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게 하라. 하나님은 그들의 미혹을 택하여 주실 것이다(사 66:4).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부패한 욕심과 정욕을 좋아하며 거기에 빠지게 되고 그런 것들을 억제하기보다는 조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파멸해 이르는 죄의 세력에 그대로 버려 두신다. "그리하여 그들의 운명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그것은 그들 자신이 택한 것이다." "그들(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를 시험하기 위해 남겨진 자들이다(22절).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알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시험하려고 한 것이었다.



(1)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 앞에 내놓은 우상 숭배에 대한 유혹을 저들이 이길 수 있나 없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길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었다(신 7:4).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다. 내가 너희를 시험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시험한 결과 그 유혹자들의 매력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강력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거짓되며 사악한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슬픈 체험을 통하여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참이었는가를 감지한 후에야 그것을 믿게 된다.

(2) 남아 있는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주는 괴로움과 그들이 야기시키는 괴로움을 그들이 선용하여 그것을 통해 죄를 뉘우치고 겸손해져서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 본분을 다할 수 있는지 없는지, 또 그들로부터 오는 계속적인 경고를 받음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고 거역하기를 두려워하는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2: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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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없음.

 

2:23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