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의 2차 고별 설교 (1) (여호수아 24:1-14)
여호수아가 전 장(前章)에서 "나는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거니와" 라고 말했을 때, 이스라엘에게 한 엄숙한 부탁에서 그의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예기했던 것보다 더 오래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며 그의 힘을 새롭게 하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유익울 위해서 선용하려고 했다. 그는 "나는 이미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니 그것으로 다 된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더 오랜 삶이 허락되었을 때, 그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그들이 하나님께 전심하도록 할 수 있는 일을 더 하려고 했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일을 다했다고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우리의 날들을 연장해 주신다면 우리는 할 일이 아직 더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총회는 전 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 들로 이루어졌었다(1절). 그러나 이 총회는 전 장의 것보다 뭔가 더 엄숙했다.
Ⅰ. 그들의 모임이 지정된 장소는 세겜이었다. 이 곳이 실로보다 여호수아에게 더 가까이 위치했었다. 따라서 지금 노쇄하여 여행하기 어려운 여호수알르 위해서 보다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 백성과의 계약의 첫 번 체결자였던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와서 정착한 곳이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곳이었으며(창 12:6, 7) 그 가까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으며 여기서 백성들은 처음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했었던 곳이었기(수 8:30) 때문이기도 했었다. 이 곳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과 맺은 약속과 자기들 스스로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생각나게 해 줄 수 있는 곳이었다.
Ⅱ. 그들은 이 총회에서 여호수아 앞에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나타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에로 나아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생각으로 엄숙한 종교적인 의식을 갖추고 모여들었다. 아마도 이 의식은 기도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어떤 주석 학자들은 이런 큰 기회에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을 시켜 세겜으로 법궤를 메고 와서 자기들의 회의 장소에 설치하도록 명령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들의 말을 빌면, 세겜은 실로에서 약 10마일 거리이며, 그 당시 그렇게 설치된 법궤가 세겜에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성소" 라고 불리워졌다는 것이다. 이 일은 제전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거기에 참여하는 백성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어떤 감각적인 현현을 보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그리스도께서도 그 가운데 계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에 하나님도 계셨으리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현신(現身)하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Ⅲ.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언자의 말로 그들에게 이야기했다(2절). "여호와의 말씀에, 여호와 곧 위대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너희의 계약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듣고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자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 사자가 위대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돋보이게 할 수 없고 그 사자의 천박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소시키지도 못한다. 여호수아의 설교는 교리와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1. 교리적 부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그들의 선교들을 위해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옛날의 기사들을 다시 열거하신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했다." 그들은 이러 이러한 일이 이루어졌다라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행하셨다라는 것까지 알고 묵상해야 한다.여기에 기록된 것은 기사(奇事)들의 연속이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더 많은 이야기들을 언급했겠지만 간결하게 하느라고 여기서는 생략되어졌을 거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데아 우르에서 인도해 내셨다(2,3절). 아브라함과 그의 조상들은 거기서 다른 신들을 섬겼었다. 그곳은 학문으로는 훌륭한 곳이었지만 우상을 섬기는 나라였었다. 어떤 이들은 그 곳이 우상의 발상지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었다." 아브라함 그는 후에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천국의 위대한 총아가 되었는데 그도 우상숭배 속에서 양육을 받았고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그를 불 가운데서 끄집어 낸 막대기 같이 끌어낼 때까지는 그런 가운데서 살았었다. 그들로 하여금 우상의 반석에서 자기들이 빚어져 나왔음을 기억하게 하고 그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무상의 은총의 기적으로 떠나온 그 죄악으로 퇴보하지 않도록 하라. "내가 그를 이끌어 냈다"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 죄많은 나라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는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사도에 따르면,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한 본보기를 이루었다(롬 4:5).
(2) 하나님은 그를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사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그를 그 땅에서 지금 그들이 있는 세겜으로 인도하사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의 씨를 번성케 하시고(그는 열 두 방백을 낳았다) 마침내 그에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사 그를 통해서 그의 씨를 번창케 하시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 두 아들을 가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위하여 세일 산에 기업을 마련하시고 가나안 땅은 전적으로 야곱의 자손을 위하여 남겨 두셨으며, 에서의 후손이 이것을 나누어 갖자고 주장할 수 없게 하시었다.
(3) 그는 높은 손으로 야곱의 후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5,6절) 홍해에서 바로와 그의 군대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시었다(6,7절). 똑같은 물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수호자가 되었지만 애굽인들에게는 무덤이 되었다. 이것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 이야기에서 그들이 당황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을 쏟아 놓았지만(출 14:11, 12), 여기서는 그것을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 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기도하는 그들을 받아 주시고 그와 다투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간과해 주셨다.
(4) 그는 이들을 광야에서 보호해 주셨다. 본문에 따르면 이 광야에서 그들이 "방랑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한 것으로" (7절) 되어 있다. 그들의 모든 움직임을 현명하게 지도하시며 그들을 너무나 안전하게 지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광야에서도 마치 성벽 있는 마을에 살고 있는 것같이 안전한 거주지를 향유했었다.
(5)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요단강 저편 아모리 족속의 땅을 주시었다(8절). 거기에 그들을 대적하는 발락과 발람의 음모를 무너지게 하심으로써 발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들을 저주할 수 없었고 자기가 계획했던 대로 감히 싸우려고 하지도 못했다. 그가 그렇게 계획했었기 때문에 성경은 그가 싸운 걸로 이야기하고 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그의 혀를 돌려 놓으신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두드러짐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로 이야기된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지금도 그렇고 또 그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두움의 세력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정신까지도 지배하시는 그의 주권을 증명하시었다.
(6) 하나님은 이들을 안전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가나안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가나안 족속을 그들의 수중에 붙이시었다(11절).
" 왕벌을 그들 앞에 보내사" 그들이 실제로 원수들과 싸움에 임했을 때 왕벌의 독침으로 원수들을 괴롭히고 또 이것들의 요란한 소리로 그들을 두렵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손쉬운 노략물이 되었었다. 이 무시무시한 벌떼들은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과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나타났고 그 후로 다른 전쟁에서도 계속 그러했었다(12절).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기로 미리 약속하시었다(출 23:27, 28 참조). 여기서 여호수아는 이 약속이 성취되었음에 유념하고 있다(출 23:27, 28; 신 7:20). 이 왕벌들은 이스라엘의 무기보다도 더 원수들을 괴롭혔음이 틀림없고, 따라서 여호수아는 너희 "칼이나 너희 활로써가 아니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순수한 여호와의 행위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지금 아름다운 땅을 평화스럽게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노동의 결실을 가지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2. 이러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의 적용으로 그의 사랑에 대한 보답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며 그것이 계속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14절). 그러므로 이제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1) "여호와 즉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경외하라(호 3:5). 이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를 노하게 하는 일과 그의 선하심을 빼앗기는 일을 두려워하라. 그의 위엄에 대한 경외와 그의 권위에 대한 존경과 그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과 그리고 너희를 향하여 끊임없이 살피시는 그의 관심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라" 고 했다.
(2) "이 원칙을 끊임없이 실천하며 종교적인 예배의 외적 행위로나 너희의 모든 대화에서 언제나 순종의 증거를 보임으로써 그를 섬기라. 그리고 이것을 곁눈질하지 말고 정직한 마음으로 성실과 진정으로 하고, 그리고 내적 충동과 외적 표현이 서로 일치될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중심의 진실이라" (시 51:6).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이간시켜 놓는 것이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3) 갈대아인이나 애굽인들의 우상과 같은 "이상한 신들을 버리라." 이런 것들은 대부분이 하나님을 저버리게 하는 위험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부탁이 반복되는 걸로 봐서(23절) 그들이 비록 이 우상들을 섬기지는 않지만 자기 가족의 가보로서 그들 선조 때로부터 자기들의 수중으로 전수되어 온 이러한 불결한 신상의 그림이나 조각품들을 은밀하게 골방에 숨겨두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있었음이 틀림없는 것 같다. 여호수아는 간절하게 그들에게 이것을 버릴 것을 강권한다. "그것들을 부수어 버리라. 그것들을 깨뜨려 버리라. 그래서 그것들을 섬기는 유혹을 받지 않게 하라." 야곱도 자기 가족들에게 바로 이 장소에서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었다.
그들이 가진 작은 신상들을 그에게 주었을 때 그는 그것들을 "세겜 곁 상수리 나무 아래 묻어버렸다" (창 35:2, 4). 상수리 나무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데(26절) 그것이 동일한 "상수리 나무" 인지 혹은 같은 장소에 있는 다른 나무인지 알 수가 없다. 우상숭배의 상수리 나무도 있었듯이 이것을 "개혁의 상수리 나무" 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호수아의 2차 고별 설교 (2) (여호수아 24:15-28)
여호수아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도록 한 이 계약보다도 더 잘 체결된 계약이나 혹은 더 좋은 결과를 낸 계약은 세상에 없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다룬 그 태도는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데 대한 온갖 의무들, 특별히 선택과 계약의 의무를 그들에게 부과시키는 일에 얼마나 진지했으며 마음을 깊이 쏟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Ⅰ.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선택한다면 그들에게 어떤 의무가 부과될 것인가? 여호수아가 여기서 백성들로 하여금 선택하게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든 섬기지 않든 아무런 관계가 없다든가 혹은 그들이 임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결단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들의 종교 생활의 견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두 가지 일을 하게 한다.
1.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그리고 이지적으로 자기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합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는 그 의지의 천부적인 자유에서 빛날 수 있으며 그 의지의 자랑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 자유로 선택한 것에는 즐겨 따르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므로 예배가 우발적인 일이거나 우리에게 강요된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1) 따라서 여호수아는 이 일을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게 한다(15절).
[1] 여기서 여호수아는 이 선택을 위한 후보자를 내세운다. 한쪽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다른 한쪽은 자기 조상들로부터 전수 되어온 그리고 어쩌면 옛날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섬기고 싶어할지도 모르는 자기 조상들의 신들이거나 혹은 "그들의 이웃들" 즉 "그 땅에 거하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 이었다. 이들은 그들과 친교를 좋아하거나 그들에게 친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정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파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 여호수아는 그들 가운데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가운데는 세상과 정욕에로 기울어져 종교에 대해서 편견과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부정하고 정욕을 억제하며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며 어렵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견습의 위치에 있을 경우에는 그 길에 약간의 난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 도리어 적합하다. 그렇지 않다면 시련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만다.
[3] 여호수아는 이 일을 그들 스스로에게 맡긴다.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오늘 택하라. 지금 바로 그 문제가 너희들 앞에 명백하게 놓여져 있다. 빨리 그것을 판단하라. 그리고 망설이지 말라." 엘리야는 이보다 오랜 후에 여호와와 바알 사이의 논쟁에 대한 결단을 자기가 접하고 있는 백성들의 양심에 의뢰했었다(왕상 18:21). 여호수아가 여기서 이 문제를 결단하도록 제기한 데는 두 가지가 분명하게 암시되고 있다.
첫째 우리 각자가 진지하고 사려깊게 우리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공정하게 스스로 따져보고 그것을 저울에 달아보며 그리고 나서 우리가 그것에 대해 참으로 진실과 선을 발견할 때에 결단해야 한다. 우리가 진지하게 경건의 생활을 결단할 때는, 우리가 그 외의 다른 길을 모르기 때문에가 아니라 우리가 깊이 탐구한 후에 실제로 그보다 더 좋은 길이 없기 때문에 결단해야 한다.
둘째로 종교는 너무나 자명한 이유와 의(義)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택하든 거부하든 개인의 자유 사상에 따라 하도록 개인에게 일임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진가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사려있는 사람은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그 스스로가 결정을 내릴 정도로 너무나 명료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택하게 함으로써 이토록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을 때 그들 가운데 대답을 하기 전에 생각해 볼 시간을 원한다든가 혹은 친구들과 의논해 볼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구실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지 어떤지 알아 보려고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일 이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는 그들을 따로 세우고 나머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을 피하도록 경고하려고 했을는지도 모른다.
[4] 여호수아는 자기 자신의 결단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선택을 지시한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너희들이야 어떻게 하든,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나는 너희들 모두가 한 마음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서 그는
첫째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결단한다. "나는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아무리 위대한 사람에게라도 면제되지 않는다. 신앙적이 된다는 것은 왕들이나 명사들을 위축시키거나 경멸당하게 한다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것은 도리어 그들의 최대의 존귀이며 그들에게 가장 찬란한 영광의 면류관을 덧입혀 주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적극적인지 살펴보라. "나는 하나님을 섬기겠노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의 계약에 속박시키는 것은 절대로 우리들의 자유에 대한 방해가 아니다.
둘째로 그는 자기 집을 위해서, 즉 자기 가족과 자기 자식과 그리고 자기 종들, 즉 직접 자기의 눈과 관심 아래 또 자기의 관리와 영향 아래 있는 그런 자들을 위해서 결단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통치자요 재판자였다. 그러나 그는 피할 수 없는 공공 업무에 대한 자기의 열심을 자기 가족 종교에 대한 태만의 구실로 삼지 않았다. 통치자나 교역자로서 많은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자들은 자기 가족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딤전 3:4, 5). "나와 내 집은" 하나님을 섬기겠노라.
1. 이것은 "나는 빠지고 나의 집만이" 라는 말이 아니다. 그는 자기는 하지 않고 자기 가족만 그 일에 종사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자식이나 종들이 착하게 되기를 원하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그렇게 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로 천국에 가게 하기를 원하면서 스스로 지옥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2. 나의 집은 빠지고 나만이" 라는 말도 아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집안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집안에서는 그의 권위가 보다 크고 보다 직접적이며 거기서는 그가 임의로 지배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많은 사람을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그 마지막 부분에까지 우리의 노력을 펼쳐나가야 한다. 우리가 만일 그 땅을 개혁할 수 없다면 우리의 장막 주변에서라도 악을 멀리 제거해야 할 것이다.
3. "내가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 나의 가족" 이라는 말이다. 다른 일들을 지도하고 통치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앞장서야 하고 최선의 일을 선행해야 한다.
셋째로 그는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지 간에 이 일을 하기로 결단한다. 비록 이스라엘의 온 가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게 된다고 해도 여호수아와 그의 가족은 변함없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친근히 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한 사람들은 혼자라는 것 때문에 염려해서도 안 되며 군중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저버린다고 해서 개의해서도 안 된다. 천국을 향해서 결심한 자들은 기꺼이 강물을 거슬러 헤엄쳐야 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한다.
(2) 이 일이 이와 같이 선택하도록 놓여지자 그들은 즉시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그리고 지성적인 선언을 통해서 모든 경쟁자들 (그것이 어떠한 경쟁자이든 간에)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편으로 결단한다(16-18절).
[1] 그들은 자기들에게 그토록 위대한 축복이 되어온 이 위대한 한 인간의 본보기의 감화를 받아 여호수아의 결단에 자기들도 동의한다(18절).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이 종교에 열심히 있다면 자기 아랫 사람들에 그리고 대한 그들의 영향으로 그들이 얼마나 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라.
[2] 그들은 하나님을 배신한다는 생각에 경악한다(16절).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 하오리라." 이 말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두려움과 증오를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나 우리의 자손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일 조금이라도 이러한 생각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건 정의와 은총과 명예를 완전히 상실당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떠나게 하는 온갖 유혹에 대항해서 분발해야 한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3] 그들은 자기들의 선택에 대해 아주 실제적인 이유를 내세운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순전히 여호수아에 대한 묵종에서가 아니라 이 일에 대한 당위성과 공정함에 대한 충분한 확신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이것을 선택한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사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들인, 자기들을 위해서 행하신 그 위대하고도 너무나 친절한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서였다(17,18절). 이와 같이 그들은 스스로가 여호수아의 설교를 반복하며 이러한 취지에 따른 그들의 성실한 순종을 표현한다.
둘째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는 관계와 그리고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의 관계를 생각해서였다.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18절). 그는 자비롭게도 스스로 우리와 약속을 맺으셨으며 또한 우리도 엄숙히 맹세함으로 그와 약속했습니다."
2.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확고부동하게 자기들의 종교를 받들고 그리고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 위해서 온 마음을 쏟아 놓게 한다. 이제 그는 그들이 선한 마음을 품게 되자, 할 수 있는 한 정해진 곳에 못이 박혀 있도록 하기 위해 그 못을 계속 두드려 머리까지 때려 박는다. 단단히 단속하면 잃는 법이 없다.(1) 이 일을 하기 위해서 그는 그들 앞에 종교의 역경과 그리고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는 것을 설치한다(19,20절). "너희가 그를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 말에 따르면,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들이시다" 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의미해 준다. "거룩, 거룩, 거룩" 은 거룩하신 아버지, 거룩하신 아들, 거룩하신 성령을 의미한다. "그는 너희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다." 그리고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면 너희에게 화를 내리실 것이다." 여호수아가 여기서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비실제적이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려고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1] 그러나 그는 여기서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들의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자기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떠나도록 유혹하는 유혹자들의 제안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 것 같다. 유혹자들은 하나님이 완고한 주인이며 그가 요구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며 그는 결코 기뻐하지 않는 신이며 또한 기분 나쁘시게 되면 달랠 수도 없고 복수심이 강열한 분이 되신다고 본다.-그래서 그는 오직 자기만을 경배하도록 강요하며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털끝만치의 친절도 보이지 못하게 한다.-그리고 이런데서 그는 다루기가 쉽고 거룩하지도 질투하지도 않는 다른 나라의 신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신이라고 하는 등등의 교묘한 말을 가지고 유혹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실제로 당시 유대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의견 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사실이것은 역사 이래와 언제나 그렇게 해 온 사탄의 술책인데, 사탄은 우리의 첫 조상에게도 하나님과 그의 율법은 사납고 혹독한 것이라고 왜곡시켜 유혹했다. 여호수아가 이런 말을 하는 그의 태도와 목소리에서 이것이 반대 의견을 의미하는 것임을 그들로 지각하게 하고 이 반대 세력에 대해서 그들이 어떻게 자기 위치를 지킬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혹은
[2] 그는 이와 같이 해서 백성들에게 자기의 경건한 질투와 비록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그를 섬김에 대한 열심을 고백하기는 했지만 후에 물러설지도 모른다는 그들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표현하며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이 일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며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들로 깨닫게 하려고 했던 것 같다. 혹은
[3]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과 얼마나 엄격한 계약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지 앉아서 그 대가를 따져봄으로써 이 일의 최악의 경우를 알게 한다. "너희가 너희 모든 다른 신들을 버리지 않으면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 그는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분이시며 절대로 경쟁자를 허용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버린다면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너희들은 이 일보다 더 좋은 것을 안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도 "그의 멍에는 쉽다" 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하여 주시면서도 그러나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태만하고 지각 없이 굴게 될까봐 또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해서 우리가 단순히 찾는 것뿐만 아니라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한다면 너희는 하나님과 경쟁되는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너희 자신의 어떤 의로도 너희 잘못을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의와 힘은 여호와에게만 있나니 이스라엘 자손을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사 45:24, 25).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능력의 모든 신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목적은 의미가 않을 것이다. 혹은
[4] 여호수아는 그들 앞에 놓여져 있는 이 외관상의 난관들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결단을 더욱 공교히 하고 그들로부터 보다 확실하고 엄숙한 약속을 얻어냄으로써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 신실해지기를 원했다. 그가 백성들로부터 이러한 약속을 이끌어 낸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간절하게 이 일에 집착하고 보다 굳게 이 일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 이러한 종교의 역경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확고부동한 결단과 이 종교에 대한 성실을 선언한다(21절).
"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우리는 그가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종들로 하여금 자기만을 예배하도록 구속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를 더 나쁜 분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그는 자기를 저버리는 자들을 소멸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그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그를 섬길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떠나며 그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는 어떤 강권도 참고 들을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룻 1:16).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은 이 결단에 해석을 덧붙여 반복한다(24절).
"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종으로 불리워지며 그의 종이 옷을 입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종교가 모든 일에 우리를 지배할 것이며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리이다." "우리가 만일 그가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헛되이 주와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눅 6:4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부과한 의무에 대해 그들이 응답한 이 마지막 약속은(23절) 견인을 위해 다음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1] 그들이 자기들의 "창조자를 자기들의 남편으로 삼기로" 결단하므로, 다른 애인을 일체 버리고 이방 신들의 화상과 유물들을 모두 버리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음성에 복종할 것을 약속했다.
[2] "자기들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께 전념하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애정만을 지키도록 마음을 다스리겠다고 했다. 이러한 조건에 그들이 동의했다. 또한 여호수아가 이 협정을 설명함으로써 그들은 그 협정을 확정 짓는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겠나이다."
Ⅱ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이와 같이 신중한 선택으로 이루어지자 여호수아는 그들과 엄숙한 계약을 체결한다(25절).
모세는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이 계약을 두 번 인준했는데 한 번은 시내산이고(출 24:) 한 번은 모압 평지였다(신 24:1). 여호수아도 마찬가지로 이 일을 한 번 했었고(8:31-)그리고 지금이 두 번째이다. 여기서는 계약이 "율례와 법도" 라고 불리워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것이 지니는 위력과 그것에 대한 의무의 지속성 때문이며, 또한 이것이 하나의 계약에 불과하지만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체결했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계약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여호수아는
1. 그들 자신을 증인으로 부른다(22절).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이 날의 의식을 결코 잊지 말라고 다짐한다. 만일 이후로 그들이 이 계약을 파기한다면 그들이 지금 한 이 약속과 고백은 분명 그들을 향한 심판으로 나타나서 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확신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이 일에 대해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라고 동의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게 거짓을 저지른다면 우리 입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다.2. 여호수아는 이것을 기록하고 우리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거룩한 경전에 이것을 끼워 넣는다.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율법책에 기록했다" (26절). 그래서 그 원본은 법궤 옆에 두고, 그리고 아마도 몇 부를 복사해서 각 지파에서 족장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기록되어짐으로 해서 하나님의 명령과 자기들 스스로의 약속에 따른 종교에 대한 책임이 함께 기록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3. 그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것은 이 기록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 것이었다(26,27절). 그는 이 계약의 기념비로서 "큰 돌을 취하여 상수리 나무 아래 세우고", 아마도 (돌들이 말하게 되는)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돌 위에 비문을 새겼을지도 모른다. 마치 이 돌이 그들 중의 몇몇 사람처럼 계약의 참뜻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 돌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들었다" 라고 여호수아가 말한 것은, 은근히 백성들의 완악함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지금 되어진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오래오래 이 사실에 대한 기억을 유지해서 그들의 우둔과 경솔을 책망할 것이며 그들을 고별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일이 타결되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귀인들의 총회를 해산시키고(28절)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이토록 그가 할 일을 만족하게 잘 냄으로써 그는 자기 영혼을 구원했다. 만일 그들이 망한다면 그들의 피는 각자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
여호수아의 죽음 (여호수아 24:29-33)
이 책은 승리로 시작해서 모든 사람의 영광을 얼룩지게 하는 장례식으로 끝난다. 우리는 여기서
1. 요셉의 장례를 본다(32절). 그는 애굽에서 200년 전에 죽었다. 그러나 "그의 유해에 관한 명령이 내려졌다." 그의 유해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무덤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애굽으로부터 유해를 채운 관을 메고 나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계속해서 이것을 메고 왔으며 (아마도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두 지파가 이 유해를 특별히 맡아 보살폈을 것이다) 이것을 가나안이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 자기들의 진영에 두었다가 이제 마침내 그의 조상이 그에게 준 세겜 근처의 땅에 매장하게 되었다(창 48:22). 아마 이 기회에 여호수아는 요셉의 관을 무덤에 장례지내는데 온 이스라엘이 참석하도록 세겜으로 불러 모았을런지도 모른다(1절). 그리고 본 장에 나오는 설교는 바로 여기서 한 요셉의 장례 설교와 자기의 고별 설교일지도 모른다. 만일 이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 해에 이루어졌다면 이 때에 그는 자기의 죽음이 임박해 있음을 잘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이 때에 그는 그의 유명한 조상 요셉이 죽을 때의 나이와 동일한 "110세" 였다(29절. 창 50:26 과 비교하자).2.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례(29,30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알 길이 없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약 17년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의 연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약 27년 혹은 28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여기서 "여호와의 종" 이라고 불리워지는데 그것은 바로 모세가 죽었을 때에도 주어졌던 동일한 칭호였다(1:1). 비록 여호수아가 여러 면에서 모세보다 못하기는 하지만 이 칭호에 있어서는 모세와 동일했었는데 그는 자기 일에 관한 한 하나님의 근면하고 신실된 종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자기의 두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한 사람과 동일한 인정을 받았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여!"
여호수아의 장례지는 "지진" 이란 뜻이 있는 "가아스 산의 북편이라" 했다. 이 위대하고 선한 사람 여호수아의 장례 때에, 마땅히 슬퍼해야 될 이스라엘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우매를 견책하여 이 산이 진동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었다고 유대인은 말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에도 땅이 흔들렸다.
학자인 패트릭 감독은 모세와 아론의 경우와 같이 여호수아를 위한 애곡의 날들이 지켜진데 대한 기록이 전연 없다고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 그는 성 히에롬(Hierom)이나 기타의 교부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어떤 신비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과 불멸이 오늘날과 같이 빛 속에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던 율법아래서는 자기들의 친구들의 죽음을 애곡하거나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이 하늘나라를 여셨으니 우리는 오히려 기뻐할 뿐이다.
3.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과 장례. 그는 아론이 모세와 같은 해에 죽은 것처럼 여호수아와 같은 해에 죽었을 것으로 본다(33절). 유대인들은 엘르아살이 죽기 직전에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여호수아가 했던 부탁을 그들에게 다시 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속한 산에 매장되었다. 그 땅은 그의 아버지에게 속했다가 유산으로 그에게 전수된 것도 아니고 또한 제사장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소유하고 있던 땅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혼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졌거나 혹은 제사장에게 굉장히 사랑을 베푸는 어떤 경건한 이스라엘인이 주택을 짓고 살라고 그에게 아낌없이 기증한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본문에 그 땅을 "그가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장사지냈다.4. 이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상황(31절).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동안은 그의 관심과 영향하에서 그들 가운데 종교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와 그의 당대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는 곧 종교가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한 지도자가 버티어 나가는 힘은 큰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항상 함께 하시며 "세상 끝날까지도" 함께 해 주실 복음의 교회는 얼마나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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