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두 지파 반 (여호수아 22:1-9)
전쟁이 끝나자 그것도 영광스럽게 끝나자 사려있는 장군인 여호수아는 자기 군대를 해산시킨다. 그는 절대로 전쟁을 업으로 삼지 않는 장군이므로 군대들을 귀향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정복한 것을 즐기게 하고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한다. 특별히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자기들의 군대로 다른 지파들을 도와야 한다는 조건으로 모세로부터 요단 저편을 기업으로 얻은 이들 따로 떨어진 지파들의 군대는 그들이 약속한 대로 가나안의 정복을 도와야 했다(민 32:32). 그리고 이 원정의 초기에 여호수아와 약속을 새롭게 했었다(수 1:16). 이제 그들은 그 계약을 이행했으므로 여호수아는 공개적으로 그리고 엄숙하게 실로에서 이들의 책임 이행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 일이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땅이 분배된 후에 이루어진 것인지 혹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전쟁이 끝난 후에 그리고 땅이 분배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인지(왜냐하면 땅을 정복하는 일 이외에 땅을 분배하는 일에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 없었을 것이고 또 이 일은 이들 지파의 누구도 위원으로 선택되지 않았고 단지 열 지파의 대표들만으로 이루어졌었기 때문이다. 민 34:18 이하) 알 수는 없지만 이 일이 실로에 사령부를 설치할 때까지는 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2절). 그리고 그들이 길갈에서 옮기기 전에 땅이 분배되기 시작했었다(9:6).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군대는 가나안 전쟁 동안에 전위 부대의 역할을 했을 걸로 생각된다. 그리고 때로는 휴전 기간 동안에, 그리고 군대가 겨울 병영에 퇴거해 있을 동안에 적어도 이들 중에 얼마는 요단을 건너갔을 걸로 생각된다. 그것은 자기 가족을 방문하고 개인적인 일을 보살피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마도 이들은 집에 머무르고 보다 더 일을 잘 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들 대신에 파견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 두 지파와 반 지파의 병력의 수는 언제나 전체로 40,000을 유지했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자의 위치에서 싸웠었다. 그리고 지금 전체로 제대령을 받게 된 것이다. 비록 가족에 대한 애정과 가사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오랜동안 집을 떠나 있음으로 해서 그들의 귀향을 간절히 사모하게 했을 테지만 충성된 군사들같이 그들은 자기들의 장군으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까지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의 집이 아무리 사모된다고 해도[이것은 홀(Hall) 감독의 설명인데]우리는 우리의 전쟁이 완수될 때까지 이 땅위에 머무르며 만기 제대를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철거의 때를 지례 걱정해서는 안 된다.
Ⅰ. 여호수아는 이들을 "자기들의 기업의 "땅으로 돌려 보낸다(4절). 자기들의 기업을 가장 먼저 할당 받았던 자들이 맨 나중에 그것을 향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업의 할당을 제일 먼저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들이 이들보다 먼저 기업을 누렸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그래서 뭔가 거기에 평등이 있게 된다.
Ⅱ.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보수를 지급하고 해산시킨다. 자비량으로 전쟁에 나가는 자가 누구인가? "너희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라" (8절). 비록 그들이 도와서 점령한 모든 땅이 다른 지파들에게로 돌아가야 된다고 해도 자기들의 탈취물만은 각자가 가져야 한다. 그리고 또 그렇게 했었다. 이것이야말로 군인이 기대할 수 있는 보수의 전부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비량으로 가나안의 모든 전쟁을 치르어 왔기 때문이었다. "가라" 고 여호수아는 말한다. "너희들 장막으로" 즉 "너희들 집으로 돌아가라" 고 말한다. 여호수아는 집을 "장막" 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광야에서 장막을 사용해 왔었다.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 가장 튼튼하고 화려한 집도 위에 있는 우리들의 집과 비교해 볼 때 조잡하고 불안정한 장막 이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촌락의 노략물인 가축 뿐만 아니라 성읍의 노략물인 은과 금의 많은 재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1. "너희들이 뒤에 남겨두는 형제들로 하여금 너희로 충분한 몫을 가지게 하고 어떠한 공제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는 선한 말을 듣게 하라. 그리고 너희들이 손해를 보았다고 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2. "너희들이 찾아가는 형제들로 하여금-그들은 너희들의 소유를 굳게 지킨 자들인데-노략물의 얼마를 나누어 갖게 하라. 미디안 전쟁에서 탈취한 것을 나누어 가진 것처럼 (민 31:27) 그 노략물을 너희 형제와 나눌
지니라." 이처럼 오랫동안 너희들을 기다린 너희 형제들로 하여금 너희가 집으로 돌아가거든 너희들 때문에 이익을 보도록 하라."
Ⅲ.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굉장히 명예스러운 명성을 주면서 해산시킨다. 비록 이들이 한 일이 당연한 일이었고 약속의 이행이었으며 그들이 당연히 해야 될 의무를 한 것 뿐이었지만 여호수아는 이들을 높이 칭찬한다. 그들이 약속을 이행했으므로 책임을 말소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한 선한 봉사를 높이 칭찬한다. 물론 이스라엘이 이 땅을 소유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그의 능력 때문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들의 활과 칼을 형제들을 위해서 사용한 이 형제들에게 마땅히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찬양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도구들도 전적으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는 여기서 그들을 칭찬한다.
1. 자기들의 지휘관에게 언제나 순종한 데 대하여(2절). 모세가 죽었을 때도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에게 준 명령을 기억하고 지켰다. 그래서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여호수아가 내리는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순종했으며 그가 지시하는 대로 가고 오고 그리고 행동했었다(마 8:9). 지휘관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도 군인에게 있어서는 칭찬할 만한 것이다.2. 이들이 자기 형제에 대해서 가진 지속적인 애정과 지지에 대하여. "너희가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라고 했다. 얼마나 오랜 기간인지는 말하고 있지도 않고 또 어느 곳에서도 기간에 대한 확실한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칼비시우스(Calvisius) 나 혹은 다른 몇 분의 우수한 연대기 학자들의 계산에 따른다면 그 땅을 정복하고 분배하는 데는 약 6,7년의 작업이 따랐을 것이라고 한다. 이토록 장기간을 이들 분리된 지파들은 자기들 진지에 머무르며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봉사를 해 주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일에 참여하고 그 이익에 관계된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을 주시고 그래서 그들과,안식할 수 있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명예가 될 것이다.
3. 이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 그 충성에 대하여. 그들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대한 의무만 다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이것이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것인데 잘 인식하고 있었다. "너희가 그 책임을 지켰다" 라는 말인데 환언하면 "너희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스라엘을 봉사하는 일을 계속했다는 이 특별한 경우에서 뿐만 아니라 전체로 너희들 진영에서 종교 생활을 하는 일에 있어서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주의깊게 그리고 성실하게 지켰다. 그것은 군인들 가운데서는 보기드문 탁월한 일이었으며 마땅히 칭찬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Ⅳ.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선한 권면을 하면서 해산시킨다. 그는 이들에게 땅을 경작하라든가 이들의 성읍을 강화하라든가 이제 이들이 전쟁과 승리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변경을 침략해서 땅을 넓히라든가 하는 것을 권면하지 않고, 힘있게 엄격한 경건의 생활을 유지해 나갈 것을 권면한다. 이 권면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경건의 권면이었다(5절).
1. 전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크게 삼가 명령과 율법을 행하라" 는 것이다. 명령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 명령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연히 소유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부지런히 조심하지 않으면(우리는 곁길로 나가기가 너무나 쉽고 또 우리의 영적 원수들은 우리를 곁길로 나가게 하려고 너무나 애를 쓰고 있으므로), 그것은 바로 되어지지 못할 것이다.2.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는 존재들 중에 최선의 존재이며 친구들 중에 최상의 친구가 되시는 분이시다. 이 원칙이 마음을 다스리며 이 원칙이 맥박의 원천이 되는 한 끊임없는 관심과 성실한 말씀으로 "그의 길을 따라" 행하며, 비록 길이 좁고 비탈길이라고 해도 하나하나의 사례 때마다 어떠한 형태의 대화에서든 간에 "그의 명령을 지키며", 어느때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온 마음을 다하여 그에게 친근히 하며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그를 섬기고 그를 영화롭게 하며 인간들 가운데 그의 나라를 이루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이들에게 주어진 권면은 우리들 모두에게도 주어진 선한 권면이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 일을 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Ⅴ. 여호수아는 이들을 축복하고 해산시킨다(6절). 특별히 므낫세 반 지파에게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인이기 때문에 다른 두 지파에게서 보다 뭔가 더 가까운 친근감을 느꼈거나 아니면 이들 반 지파가 자기들의 반 지파를 뒤에 남겨두는 것 때문에 더욱 떠나기 싫어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주 작별 인사를 하면서도 뒤에 또 남아서 두 번째의 해산과 작별을 가졌다(7절). 여호수아는 친구로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하는 일들을 하나님의 은총에다 부탁했었다. 혹자는 이러한 여호수아의 축복은 그들의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바는 여호수아가 예언자로서 그의 교훈을 통해서 예언자의 보상의 한 부분을 이들에게 수여했을 때(5절) 그가 이들을 위해서 드린 바로 그 기도뿐이 아니라 그의 축복은 권위를 인정받은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Ⅵ. 이와 같이 해산함으로써, 그들은 한꺼번에 "자기들의 기업의 땅" 으로 돌아갔다(9절). 이들이 요단강을 건너는데는 나룻배가 마련되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가정의 가장들은 때로 가족으로부터 떠나 있을 오래도록 떠나 있을 기회가 있다고 해도 객지에서의 일이 끝나면 자기들의 집이 있는 곳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며 새장을 나온 새처럼 거기서 방랑해서는 안 된다.
요단 동편의 제단 사건 (여호수아 22:10-20)
Ⅰ. 본 대열을 떠나 요단강 동편으로 떨어져 나온 지파들은, 자기들이 비록 가나안 땅은 떠나 왔더라도 가나안에 있는 자기 형제들의 신앙만은 고수하려고 열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게 또한 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에서 온전히 떨어져 나간 이방인의 아들들이" (사 56:3) 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그들은 요단 강변에 큰 제단을 세우고 자기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증거를 삼고 또한 여호와의 "제단에 참여하는 자로서" 증거를 삼으려고 했었다(고전 10:18). 그들이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10절) 그들은 두 지파와 반 지파의 불멸의 명예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것은 가나안 전쟁에서 세운 공적과 자기 형제들에게 이루어 놓은 봉사를 어떻게 계속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영교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교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증명하고 증거로 남겨두고 영속시킬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집으로 간다는 것 때문에 기쁘기도 했지만 또한 하나님의 제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가고 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섭섭하기도 했고, 그들 중의 얼마가 이 일을 처음 제안했을 때 그들은 지체없이 이 제단을 건립하고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다른 지파와의 친교를 유지시켜 주는 교량으로 삼았다.
어떤 이들은 이 제단을 그들이 생각날 때마다 실로에 갈 수 없을 때에 강 넘어 보이는 실로에 있는 제단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요단강의 가나안 땅쪽 베냐민 지파의 기업에 세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제단을 강 이편 자기들 쪽에 세웠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들이 남의 땅에 허락도 없이 제단을 쌓는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가나안 땅의 맞은 편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또한 이들이 자기들 가운데 제단을 쌓지 않았더라면 제사의 목적으로 이 제단을 만들었다는 어떤 의심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제단은 참으로 무죄하게 정직한 생각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악의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였고 자기들의 형제들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만일 그들이 이 일을 하기 전에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논해 보거나 혹은 최소한 자기 형제들에게 이 목적을 알리거나 혹은 후에 이 제단을 치워 버리려는 그들의 질투를 막기 위해서 했던 자기들의 제단에 대한 설명을 미리 그들에게 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이들의 열심은 칭찬할 만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사려있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의도한 이런 목적을 위한 제단을 세우는 일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의논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실성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이 경솔함 때문에 비난 받았다고 하는 것을 찾아보지 못한다. 하나님은 경건한 열심의 결점을 간과해 주시며 인간도 또한 간과해 주어야 한다.
Ⅱ. 하나님의 명예와 실로에 있는 제단을 위한 다른 지파들의 거룩한 질투. 이러한 제단을 건축한데 대한 전갈이 즉시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전달된다(11절).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에서만 모든 희생을 드리도록 요구하는 그 율법이 얼마나 엄격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알고 있는(신 12:5-7) 그들이기 때문에 다른 제단을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최근에 자기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 마련하신 장소의 선택에 대한 모욕이며 어떤 다른 신을 예배하려고 하는 직접적인 의도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1. 이들의 의심은 너무나 타당한 것이었다. 그것은 일견해서 악하게 보이는 것이요, 실로에 있는 제단에 대한 경쟁물로서 세워 놓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제단을 세운 것이 거기에 희생을 드리겠다는 의도는 강렬하게 암시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우상숭배를 이끌어 들이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예배를 완전히 저버리게 할 수도 있었다. 이 일은 너무나 큰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불을 지르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제도에 대해서 질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숭배로 보이든가 혹은 그렇게 인도하게 되는 것은 무엇이나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2. 이러한 의심쩍게 보이는 것에 대한 그들의 열심은 아주 칭찬할 만하다(12절). 그들은 이들 지파들이 요단강에 의해서 그들과 갈라지면서 자신들을 하나님과 갈라놓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것이야말로 자기들에게 끼칠 수 있는 최대의 상해라고 생각하고 만일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제단은 방어하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놓으며 이러한 반역을 정벌하고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군대라도 동원하고 이러한 악영향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보다 더 부드러운 방법으로 되지 않는다면 자기들의 몸에서 썩은 부분을 짤라 내버릴 각오까지도 비치었다. 그들은 모두 모였다. 실로가 그들의 회합의 장소였다. 이 일은 그들이 지금 모인 곳에서 최근에 주신 하나님의 헌장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결심은 마치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전심함으로써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신 33:9) 제사장의 나라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만일 이 사실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며 그들을 대항한 반역으로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이들과 싸우러 올라 가려고" 했었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뼈중의 뼈이며" 광야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지내왔고," 가나안 전쟁에서 그들을 도와주었다고 해도 그들이 만일 어떤 "다른 신을 섬기게 된다면" 그들은 이들을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사신숭배의 자손으로서 원수처럼 다루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신 13:12 이하). 그들은 최근에 칼을 집에 꽂고 전쟁의 위험과 피로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휴식에로 들어가긴 했지만 우상숭배와 우상숭배를 향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키고 없애 버리며 보복하는 데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기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는 편을 택했었다. 그것은 용기 있는 결단이며 자기들의 종교에 대한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스스로가 이 종교의 실천에 근면하고 신중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의 부패는 숙취하여 만성을 주장하기 전에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여 처리해 버려야 한다.
3. 이러한 열렬한 결단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있어서 이들의 사려도 마찬가지로 칭찬할 만하다. 이러한 종류의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라" 고 (신 13:14)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래야 자기 종교를 올바르게 만든다는 구실로 형제에게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여기서 자기들의 군대를 보내어 전쟁을 치르지 않고 먼저 사절들을 보내어 이 일에 대한 시비곡직을 알아보기로 결심한다. 이 사절들은 각 지파의 제일 높은 족장 한 사람씩과 그리고 이들의 대장으로 대변자가 될 비느하스였다(13,14절).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열심은 "지혜의 온유함" 에 의해서 절제되고 인도되며 다스려졌다.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악을 미워하시는 그분은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벌하지 아니하시고 먼저 "내려가셔서 알아 보기를" 원하신다(창 18:21) 어떠한 범죄의 경우에라도 공평하고 관심있게 알아본다면 많은 불행한 투쟁들이 예방될 수 있을 것이며 재빨리 치료될 수 있을 것이다. 잘못과 오해를 인정하고 오해 된말과 행동을 진실의 빛에서 살핀다면 사적인 혹은 공적인 여러 분쟁들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며 복된 결말을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4. 대표들이 이 일을 처리한 방법은 이 일에 관심을 두었던 회중들의 생각과 정신을 충분히 충족시켜 주었으며 열심과 사려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1) 이들이 자기 형제들에 대하여 제기한 고발은 굉장히 큰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열심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실로에 있는 회중들의 분노를 정당화시키고 이 가상된 범죄자들이 스스로 결백을 나타내도록 각성시키려는 의도 이외에 어떤 다른 구실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자기들의 심판을 연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최소한 완화시킬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여기서 하는 것처럼(16절) 이 제단의 건립이 "이스라엘 하나님께 대한 범죄" 로서, 사병이 자기 대장에게 대한 반역과 같은 무시무시한 범죄로(" 여호와를 쫓는데서 떠나서"), 그리고 신하가 자기 왕에게 대한 반역과 같은 죄로 (여호와를 거역하고저 하느냐?) 간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이 고발을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이 퍽 다행이다. 무죄한 자가 이와 같이 잘못 전해지고 비난을 받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못된다. "그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나를 비방하였나이다."
(2) 이들이 자기 형제를 고발한 그 죄악의 흉악성은 약간 부자연스러운 데가 있다. "브올의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이냐?(17절) 아마도 이 말이 여기에 언급된 것은 이 일의 수석 대표인 비느하스가 당시의 사건에서 유명하게 되었기 때문(민 25:7)이기도 하고, 또한 이들이 지금 그때 범죄가 이루어졌던 바로 그 장소인 요단강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일거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 있었던, 우리가 목격자가 된 "불경건하고 불의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실례를 기억하고 선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는 이들에게 브올의 죄악을 상기시켜 주었다.
[1] 그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자아내는 아주 큰 죄로 생각게 했다. 이 제단의 건축은 사소한 일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이 브올의 죄악만큼이나 나쁜 범죄를 이끌어 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아주 초창기에 분쇄되어 버려야 한다. 과거에 저질러졌던 큰 범죄의 기억은 우리들로 하여금 아무리 작은 범죄의 기회나 실마리에 대해서도 정신을 차리고 경계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범죄의 길은 내리받이 길이다.
[2] 전체 회중이 형벌을 받은 죄악임을 기억나게 했다.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그 재앙으로 하루에 24,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 이것이면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또 다른 재앙을 우리들에게 불러들이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심판의 칼 끝을 향해 달리는 우상 숭배의 제단에 그토록도 광분하고 있는가? 우리의 진영이 아직도 그때의 범죄와 형벌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오늘까지도 그 죄에서 정결함을 얻지 못하였고 상흔이 남아 있지 않은가?" 기억이 살아났다.
첫째로 "죄의 오염에 대하여. 우리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너무도 우상 숭배에 잘 기울어지기 때문에 만일 너희들이 또 다른 제단을 세운다면 너희들이 다른 신을 예배하려고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그들은 곧 그것을 우상 숭배의 기회로 삼게 될 것이다. "
둘째로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또다른 죄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다면 그는 금송아지 범죄의 경우에 경공하셨던 것처럼(출 32:34) 우리에 대하여 브올의 죄악을 기억하실 것임이 너무나 두렵고 당연하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감히 하나님의 보복의 잠자는 사자를 깨우려 하는가?" 사람들이 자기들의 과거의 죄를 적은 것으로, "너무 적은 것으로" 생각하고 죄에다 죄를 덧붙여 범하고, "진노의 날을 위해서 진노를 쌓는다" 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위험한 짓임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그런 서들은 지난날로 족하다(벧전 4:3).
(3) 이 문제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염려를 이토록 절실하게 제시하는 그 주장은 아주 타당하다. 그들은 자기 방어의 필요에서나 자기 보존의 율법에 따라서 이 일에 같은 책임을 지고 있다. "만일 너희들이 오늘 하나님을 거역하면 내일 그의 심판이 아간의 경우와 같이 온 회중에게 내릴지도 모른다(18,20절). 범죄는 아간이 했지만 우리모두가 그것 때문에 벌을 받았었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교훈을 받아야 한다. 또 하나님의 그때에 하신 것은 다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토록 많은 너희 무리의 죄악을 목격하고도 그거를 벌하지 않는다면 그가 우리에게 그렇게 진노하실 까봐 두렵다. "대중의 안전을 공정하게 다루는 공공의 평화를 맡은 사람들은 죄악이나 불경적인 사건을 억제하고 막아야 한다. 죄를 묵인하여 그 죄악이 온 나라에 퍼지고 그 집단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지 않도록 자기들의 힘를 사용해야 될 책임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잘못할 때 우리가 그의 죄를 짓지않기 위해서는 온 마음으로 그를 견책해야 될 책임이 있다(레 19:17).
(4) 이들이 제시하는 제안은 아주 공정하고 관대한 것이다(19절). 만일 자기들이 소유한 땅이 제단이 없기 때문에 불결하다고 생각되거나 또는 제단이 없어서 마음이 편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실로에 제단과 맞설 또 다른 제단을 세울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장막이 있는" 땅으로 건너와 같이 정주하게 되는 것을 환영할 것이며 또 그들을 위해서 기꺼이 살 곳을 마련해 주겠노라고 했었다. 이들은 분열을 막으려는 성실하고도 참으로 경건한 열심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들의 형제들이 분리된 제단을 쌓아야 하는 기회를 가지게 하기보다는-비록 이러한 구실은 여기서 생각되는 바와 같이 아주 희박하고 또 오해에 근거한 것이기는 하지만-하나님께서 제비뽑아 그들에게 주신 그 땅의 상당한 부분을 나누어 가지며 같이 이해하고 자기들과 함께 살자고 제의했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이다.
제단에 대한 해명 (여호수아 22:21-29)
우리는 여기에 분리된 지파의 족장들과 두령들이 이들 대표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총회로 모였거나 아니면 귀향 중이던 군대가 아직 집단으로 진영에 머무르고 흩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모임이야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은 두 지파와 반 지파를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것이었고 충분한 사려를 지니고 있었다. 열지파의 따뜻한 충고에 대해 그들은 아주 정당하고도 순수한 답변을 한다. 그들은 이들의 정죄를 반박하지도 않고 이들의 불공평한 처사와 위협적인 불친절에 대해서 비난하지도 않으며 또 이들의 경솔하고도 성급한 질책을 나무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분노를 자극시키는 과격한 말들" 을 일체 피하고 분노를 가라앉히는 유순한 대답을 한다. 그들은 이들의 판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고 자기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겠노라고 주장하지도 않으며 또한 자기들의 일에 대해 참견하지 말라고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들이 한 릴에 대한 진정한 의도를 거리낌없이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자기들이 쓰고 있는 오명을 벗어나며 자기 형제들의 입장을 재천명하고 사건을 설명하며 이 문제를 진리의 빛에서 해결한다. 그것은 그들이 꼭 해야 될 필요가 있는 일들이었다.
Ⅰ. 그들은 이 제단이 희생이나 제사에 사용될 어떠한 의도에 대해서도 엄숙하게 부정한다. 또한 이 제단은 실로에 있는 제단과 경쟁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실로에 있는 제단을 버리려고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제단의 모양과 형태로 이 제단을 세웠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을 종교적인 사용에 바치지 않았고 또한 성별의 예전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 제단이 그러한 어떤 용도로 고안된 것이라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이 변명에 대한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서 여기서는
1. 이 일에 관해서 하나님에게 엄숙하게 호소하는 것으로 변명의 출발을 삼는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또한 자기 형제들을 만족시킨다(22절).(1)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와 존경이 이들의 변명의 말속에 나타난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라." 이 말은 차라리 "신들 중의 신이신 여호와, 신들 중의 신이신 여호와, 그가 아신다" 라고 읽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자존하심과 자족하심을 나타내 보여준다. 그는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과 어떤 능력이든 간에 심지어 "신들" 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들까지도 지배하시는 주권과 통수권을 소유하신 분이시다. 이 간단한 신앙 고백이 자기들에 대해서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예배하려고나 한 것처럼 생각하는 자기 형제들의 의심을 없애주고 제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이 하나님을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는 이와 가리킨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언제나 경건한 진실함으로 하고 그의 이름을 말할 때 언제나 엄숙한 자세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아신다" 라고 경솔하고 사려없이 하늘을 향해서 내뱉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히 사용하지 않도록 두려워해야 마땅히 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바람직하지 못한 언사이다.
(2) 이들은 자기들이 호소하는 문제에 있어서 성실한 확신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신들 중의 하나님을 논증한다. 확실히 그의 판단은 "진리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죄 있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두려움이 되고 정직한 자들에게는 기쁨이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제단을 세운 것이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에 대항하고 도당을 만들어 새로운 신이나 예배를 드리기 위한 반역이나 혹은 범죄라고 한다면"
[1] "그것은 여호와께서 아시나니(22절). 그는 마음의 생각과 뜻을 완전히 아시는 분이시며 특별히 우상 숭배에로 기울어지는 모든 생각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시 44:20, 21). 이것은 그 앞에서 특별한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신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술책을 쓰더라도 그에게 이것을 숨길 수가 없다. "
[2]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것이다. "청결한 양심만이 만릴 어떤 패역함이 있다면 그거를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와 같이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명심해 두자.
첫째로 우리가 종교에서 그리하여 하는 모든 것에서 그가 마음을 아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성실을 인정받기 위해 아주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사람의 힐난을 받을 때, 우리의 성실에 대해서 겸허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다면 그것은 퍽 위안이 되는 일이다(고전 4:3, 4 참조).
2. 자기 형제들에게 정중한 변명을 했다.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하늘의 기록과 마음의 증거가 원칙적으로 우리들에게 확신을 준다고 해도 이러한 것 이외에도 우리는 우리의 성실을 의심하는 형제들에게도 만족을 줄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성실이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그 열매를 보아서 이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특별히 비록 우리들을 오해하기는 하지만 열 지파가 여기서 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을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3. 자기들이 죄인으로 의심받은 그 일에 대한 정중한 부인과 거절. 다음의 말로 그들은 변명을 끝맺는다(29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고 명하셨도다(개역과는 다소 다름). "우리가 번제를 위하여 이 제단을 쌓는다면, 그것은 여호와께 패역하려 함임을 우리도 아노라. 그러나 우리는 그 생각조차도 가증히 여긴다. 우리는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도 못지 않게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에 대하여 큰 가치와 경외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제단에 속하며 변함없이 그 제단을 받들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다. 우리도 너희들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순수성과 교회의 일치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만큼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여호와를 좇음에서 떠나려 한다고 생각함은 당치도 않은 이야기이다. "
Ⅱ. 그들은 이 제단을 건립하게 된 자기들의 참된 의도와 뜻을 충분히 설명한다. 우리는 이들이 자기들의 의도한 바를 참되게 표현하고 있으며 후에 이 뜻을 완화시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믿을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그들이 요단 저편의 땅을 요청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들이 그때 비록 모세 자신에 의해서까지 오해를 받는 불행을 겪었지만 그들은 아주 정직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의 변명을 들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지는데 그들은 이 제단의 건립이 자기 형제들과의 분리나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과의 결별을 이루는 것과는 전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정반대로 이 제단은 실제로 자기 형제들과 그리고 하나님의 제단과의 교통에 대한 보증과 유지를 위해 의도되어진 것이며, "여호와 앞에서 제사를 드리며" (27절), 또 그렇게 하는 것을 계속하려고 하는 결심의 표시였다고 했다.
1. 그들은 자기들의 후손이 이와 같이 회막과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스라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대접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24절). 그래서 이런 일에 대한 공포심에서 이 일이 저질러 졌으며,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은 그들이 이런 변명을 늘어놓아 안도감을 찾기전까지 그들이 처해있던 마음의 크나큰 번민과 염려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그들이 귀향할 때에(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이 일을 미리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랬었더라면 그들이 이 목적을 여호수아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들 중의 몇몇이 이 문제를 거론하게 되자 나머지 사람들도 곧 이 일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마음 속에 후세대에 생겨날지도 모르는 우울한 생각, 즉 자기들의 자녀들이 다른 지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제단과 거기에 드려지는 제사에 대해 아무 관계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간주될 모습을 그려보게 마찬가지로 회막에 기꺼이 참예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후손들이 이러한 관계를 거절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거리상의 이유로 그리고 언제나 왔다 갔다 하기가 용이치 않은 요단강의 위치로 인해서 매년 세 번의 축제때마다 다른 지파들처럼 그렇게 여럿이 그리고 빠짐없이 참여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그들의 교회에서 대수롭지 않은 교인들로 간주될 것이며, 점차로 전연교인이 아닌 것으로 거절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자손이(이들은 자만심에서 제단의 특전을 전유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 자손으로(이들은 이 특전을 마땅히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신경을 쓰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 것이다" 고 염려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공중 예전에서 단절되는 자들은 신앙을 아주 잃기 쉬우며 점차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을 그만 두게 될 것이다. 비록 경건의 형식과 고백이 생명과 능력이 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켜지기는 하지만 그 생명과 능력이 형식과 고백이 없이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여러분들이 은혜의 수단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곧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2) 하나님의 예전에서 위로와 은덕을 찾은 사람들은 자기 자손들에게도 이런 자산이 계속 유지되고 영속되기를 갈망하며, 자기자손들이 후에 "여호와를 따르는 것을 그만두거나" 혹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의 모든 예방책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그들이 세운 계획(26-28). "그러므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제단에 대한 관심을 공고히 하고 이것에 대한 자격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리가 말하기를 너희와 우리사이에 증거 되게 하기 위하여 한 단 쌓기를 예비하자 하였노라." 그래서 자기들의 관리 범위내에 한 모조 제단을 소유함으로 해서 본 제단의 특전에 대한 자기들의 권리를 입증하려고 했었다.
이 제단을 보고 그것이 희생과 번제에 결코 사용되지 않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제단이 무슨 의미로 여기 있는 가를 질문하게 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이 제단은 분리된 지파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그들이 다른 형제들과 같은 교우이며, 여호와의 제단에 대해 공동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표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대답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위대한 제단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최선의 증거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그의 성령의 모범과 그에 대한 우리의 준봉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몫을 가지면 끊임없이 그를 따르려는 우리의 열심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
제단 사건의 진정 (여호수아 22:30-34)
우리는 여기서 이 논쟁의 선한 결말을 보게 된다. 만일 양쪽이 다같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마찬가지로 평화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면 악한 결말을 만들어 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과 지혜가 결핍된 종교에 관한 싸움은 때로는 조정하기가 가장 어렵고 가장 난폭한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양쪽의 논쟁은 그 사실이 잘 설명되고 논증되었을 때 스스로가 잘 이해하게 되는 기쁨이 되었고 다툼은 곧 해소되었다.
Ⅰ. 대표들은 분리 또한 지파가 자기들이 이 제단을 쌓은 데 대한 의도의 무죄성을 단언했을 때 굉장히 기뻤었다.
1. 대표들은 이 단언에 대한 이들의 성실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들이 희생과 번제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믿을 수 있느냐? 이 제단이 결코 그렇게 사용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무엇이냐?" 라고 묻지 않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 "사랑은 최상의 것을 믿으며 소망한다. 사랑은 어떤 거짓말도 싫어한다.2. 그들은 이러한 행동에 대한 경솔성이나 의논이 없었음을 나무라지 않았다. "만일 너희들이 이러한 좋은 의도로 이런 일을 하려고 하면 여호수아나 엘르아살에게 의논해 보든가 아니면 최소한이 일을 말리는 정도의 존경심이라도 가졌더라면 이러한 파견의 고통과 대가는 치르지 않았을 텐데" 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설사 생각이 좀 모자란다고 해도 선한 일이면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이해되고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그들은 한때 이들이 유죄로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입증하려고 더 이상 수탐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기들의 오해가 고쳐지는 것이 기뻤고 또 그것을 시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교만하고 괴팍한 마음은 한번 자기 그리하여 제에게 대하여 부당한 비난을 하게 되면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분명히 입증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집하고 절대로 그 생각을 철회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대표들은 결코 편견이 없었고 자기 형제들의 해명은 그들을 기쁘게 해주었다(30절). 특별히, 되어진 릴이 하나님의 제단에 대한 무관심의 의도와는 전연 관계없고 도리어 열렬한 애정의 결과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이들의 무죄를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 보았다.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에 손에서 건져 내었느니라." 즉 "너희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던 바와 같이 우리가 미워하는 죄를 범함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 빠뜨려 그의 심판대에 서게 하지 않았다" 는 것이다.
Ⅱ. 회중들도 자기들의 대표가 그들의 형제들이 한 일에 대한 해명을 보고했을 때 굉장히 만족했었다. 그들은 이 결말을 들을 때까지 최소한 대표자들만이라도 같이 모여 있었던 것 같다(32절). 그리고 그들이 사건의 진상을 알았을 때 그들은 즐거워했고(33절) 그리고 "하나님을 송축했다. "" 우리 형제들의 종교에 대한 지조와 경건의 능력에 대한 열심과 신앙과 사랑으로 "성령의 일치" 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것으로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생긴다고 해도 그것들은 우리가 아주 기쁘게 만족해야 될일들이며 우리의 기쁨과 감사를 만들어내는 일들이 되어야 한다. 그런것들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되고 우리에게는 위안을 주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만족하게 된 그들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자기 형제들에 대하여 계획했던 전쟁에 관한 생각은 말끔히 없애 버린 채 우리 생각에는 다음 축제 때 그들이 실로에서 만나게 되기를 희구했을 것이라고 본다.
Ⅲ. 분리된 지파들도 만족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염려했던 그런 일이 비록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제단에 대한 이러한 모범을 자기들 가운데 보전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와 족장들은 이것이 우상 숭배를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바라는 그만큼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상 숭배의 기회가 되 수도 있는 충분한 염려의 이유도 되기는 했지만, 그들의 취향을 인정하고 그것을 헐어 버리도록 명령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강한 자들이 약한자들의 약점을 져주었다. "그들이 관심을 두었던 것은 이 제단이 실로에 있는 제단과 가지는 교통에 대한 증거를 의도하는 것뿐아니라는 것을 설명했을 때 이 설명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러한 제단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당시의 관습에 따라 행해진 것이었다(34절). 그들은 이 제단을 엣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증거" 란 뜻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에 대한 증거이며 그들이 여타 지파와 가지는 "여호와 그만이 하나님이시라" 고 하는 동일한 공동 신앙의 일치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자기들의 후손에게 순수하고 온전한 종교를 물려주려고 하는 관심의 증거이기도 하며 만릴 그들이 하나님을 잊고 그를 따르는 데서 돌아선다면 그들을 대항하는 증거가 되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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