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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아이성 공격령 (여호수아 8:1,2)

여호수아 같은 지휘관을 둔 이스라엘은 너무나 행복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지휘관으로 모신 여호수아는 더욱 행복했었다. 여하한 난관이 생긴다고 해도 그는 자기의 물음이 응답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질문을 미리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너무나 가까이"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전략 회의를 소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호수아는 기로에 서 있었다. 아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준 충격의 소용돌이에서 여호수아는 아직 완전히 평정도 되찾지 못한 상태에서 과연 아무런 두려움도 떨림도 없이 전진해 나갈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이스라엘 진 가운데 또 다른 아간과 같은 사람이 있을지 누가 알랴!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 말씀하셨다. 이전처럼(5장) 칼을 뽑아든 전사의 모습으로 보여준 환상이든 혹은 판결 흉패로든 간에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저주받은 것,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죄를 참으로 진실하게 제거할 때 그 때에 우리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까지는 절대로 안 된다. 또한 기독교인이 그의 사역과 전장에서 어떻게 계속해 나갈 것인지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지시해 주셔야 그가 우리와 화해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진군하도록 격려하심.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1절). 이 말로 미루어 보아 아간의 죄와 그 결과가 여호수아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안겨 주었는지 그의 마음이 거의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내의 부패는 외부의 적대자들보다도 훨씬 더 교회의 인도자와 조력자들의 손길을 약화시키고 사기를 꺾어 놓는다. 반역적인 이스라엘 백성은 악질적인 가나안 족속보다도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낙담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의 원수의 파멸적 행위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바로 그 능력이 그들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행위에서도 지켜 주실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1. 하나님은 아이성에 대한 승리를 확신시켜 주시며, 그 성은 전적으로 그의 것이며 오직 여호수아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를 너희 손에 주었도다." 그것은 여호수아에게 그 성에 대한 권리와 소유를 모두 주셨다는 말이며 오직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뿐이었다(시 44:3).

2. 하나님께서는 백서들이 탈취물을 소유하도록 허락하신다. 이성의 노략물은 여리고성의 것들처럼 하나님에게 바쳐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성에서는 여리고성을 탈취할 때와 같은 범죄가 일어날 위험이 없었다. 금지된 탈취물을 훔쳤던 아간은 그의 생명과 전부를 잃었지만 바쳐진 물건에 대해 양심적으로 행동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순종에 대해 얼마나 빨리 아이성의 노략물로 보상을 받게 되는지 살펴보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바의 위로를 받는 길은 그가 우리들에게 금하시는 바를 삼가는 것이다. 자기를 부정함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먼저 하나님에게 응분을 돌리고 나면 인간들의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질 것이다(왕상 17:13).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 "아름다운 성" 으로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로 가득찬" 집들로 이끌어 들이실 때 그림의 떡처럼 모양만 보고 애태우라고 이끌어 들이신 것이 아니다. 여리고성의 것은 첫 열매로 받으시고 아이성과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의 손에 들어오는 모든 성읍들의 노략물들은 그들의 탈취물로 가지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Ⅱ.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아이성의 공격법을 지시하심. 이 일은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처럼 시간을 들여서는 안 된다. 이런 방법은 전쟁을 너무 오래 끌고가게 할뿐이다.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7일간을 끈기 있게 기다린 자들에게는 아이성은 하룻만에 주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아이성은 여리고성처럼 순수한 하나님의 행위로 기적에 의해서 점령되어질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들의 행위와 용기가 행사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역사하심을 만들었으면 이제 그들도 스스로 분발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1. 그들 모두가 탈취물을 취하는 일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참여자가 되도록 온 백성을 동원하라고 지시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전에 아이성을 공격할 때 소부대를 파견한 일에 대해 말없는 꾸중을 하셨다(7:4).

2. 성 뒤에 복병을 배치할 것을 지시하신다. 이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시지 않으셨다면 여호수아가 당시로는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은 그런 방법이었을 것이다. 비록 현재의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환상이나 음성이나 혹은 신탁에 의한 어떤 지시를 기대할 수 없다고 해도 공의회를 맡은 사람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사려있는 제도를 시행해 나간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그렇게 하신 걸로 인정해야 한다. 농부에게 지혜를 가르치시는 그분은 분명 정치가나 장군도 가르치신다.

 

8:2 없음.

 

8:3

아이성의 함락 (여호수아 8:3-22)

우리는 본 장에서 전략적으로 아이성을 치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여기에 사용된 전략은 정당하고 좋은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신 것이므로 우리는 다른 전쟁에서도 이와 같은 것은 정당하고 좋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협정이 위반된 것이나 약속이나 맹세가 파기된 것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일이 저질러지지 않았다. 협상구실이나 평화조약 따위의 구실을 만들어 이러한 유리한 전세를 얻어 낸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것들은 신성 한일들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장난 삼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차례로 서어브를 넣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었다. 진실이란 일단 약속되면 적에게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부채가 된다. 그런데 이 전략에서는 비진실이라고 할 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자기들의 계획 이외에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이 계획은 적이 감히 공유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 것도 속이지도 않았고 후퇴 이외에 아무것도 위조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후퇴라는 것도 공격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내린 당연한 혹은 필연적인 지령도 아니었다. 적들은 분명 감시병들을 두고서 성을 방어하도록 했어야만 했었다. 그들이 상식적인 사려만 있었더라도 자기들이 눈으로 추격하느라고 성을 무방비 상태로 버려두는 그런 모험을 감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백성들이 속기를 원한다면 속게 하라) 가나안 사람들이 그토록 쉽사리 속아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추격하느라고 전쟁의 모든 규칙과 합리적인 경영도 파기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들의 분노와 경솔을 이용해서 우세한 입장을 견지한다고 해서 조금도 나무랄 일이 못된다. 또한 이 일은 하나님께서 "거짓을 행하지 않는 자녀들" 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특성과도 절대로 모순되지 않는다. 본문의 이야기에 따라 아래의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Ⅰ.이 일을 효과 있게 성취시키기 위해서 선발된 숫자에 약간의 난점이 있다. 본문에 따르면(3절) "용사 30,000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라고 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성이 비워지는 순간 성을 놀라게 할 책임이 주어졌었다(4,7,8절). 그런데 그 후에 보면(12절), 여호수아가 "5,000명을 택하여" 성 뒤에 "복병으로 매복시켰다" 라고 되어 있으며, 이들은 성으로 들어가 성을 "불지르도록" 되어 있었다(19절).

1. 어떤 사람들은 복병으로 파견된 것이 2개 부대라고 한다. 즉 처음에는 30,000명을 보내고 후에 또 길목들을 지키고 서서 목숨이나 건지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서 혹은 처음 파견된 자들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5,000명을 더 보냈으며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사 전체를 데리고 노골적인 공격을 한 것이라고 한다. 석학 패드릭(Patrick) 감독도 "군사를 다 거느리고" (1절)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지고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2.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 앞에 진을 쳤을 뿐이며 그들 중에서 여호수아가 30,000명을 선발해서 행동 부대로 만들고 그 중에서 5,000명을 복병으로 매복하도록 파견했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숫자라야 발각되지 않고 행군할 수 있었을 것이다(더 많은 숫자는 발각될 가능성이 많으며 그렇게 되면 계획은 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25,000명을 데리고 여호수아는 공개적인 공격을 했다고 생각한다(Masius). 그러나 칼빈은 공격의 목적으로 30,000명을 데리고 있었고 이 30,000명 외에 5,000명을 복병 부대로 파견했다고 본다. 이들이 생각하는 바에 따르면 이 5,000명이 비록 구체적인 숫자는 12절에 가서야 명기되지만 성 뒤에 매복해서 기다리도록 "밤에 보낸" (3절) 바로 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이야기의 순서에서 이와 같은 외관상의 혼란을 인정한다면 복병은 5,000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뿐이었을 것이며 이 정도면 이러한 목적으로는 충분했을 걸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Ⅱ. 그러나 이야기의 줄거리는 아주 분명하다. 즉 파견된 부대는 성 뒤쪽으로 몰래 진격해 갔고 성 바른편 쪽에는(이러한 상황은 매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여호수아와 그와 함께한 부대가 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이성의 주둔 부대는 이들을 향해 사기충천하게 공격을 감행했고, 따라서 이들은 물러서고 또 물려서며 마침내는 교란된 모습을 드러내고 광야 길로 무질서하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아이성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눈치채게 해서 온 군대를 총동원해서 이스라엘 군대를 추격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계획은 적중되고, 복병으로 매복되어 있던 부대는 적기에 성을 장악한 후 여호수아와 그와 함께 한 부대에게 연기로 신호를 보냈었다. 이와 더불어 여호수아의 부대는 되돌아서서 추격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이성 사람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나 늦었었고 그들의 퇴로는 차단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살육 당했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사사기 20장 30이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래의 사실들을 찾아 볼 수 있을 줄로 안다.

1. 여호수아가 얼마나 용감한 지휘관인가 하는 것이다.

(1) 그의 행동과 사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성 뒤에 복병을 매복시키도록 힌트를 주셨다(2절). 그러나 자세한 명령을 내리는 일은 여호수아에게 일임하셨다. 그 일을 그는 아주 잘 해 내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지혜자로서 열 사람의 장군보다도" 더 능력이 있었다(전 7:19).

(2) 그의 관심과 근면(10절). 그는 시간을 잃지 않으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이 일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적 전투를 계속해 나가려는 사람들이 안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3) 그의 용기와 결단. 비록 이스라엘 족속의 한 부대가 아이 사람들 앞에서 패한 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두 번째 몸소 부대를 통솔하고 싸우러 나갈 결심을 하고 있다(5절). 그는 또한 장로의 몸으로써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그와 함께 이 공격에 가담하게 한다(10절). 이러한 여호수아의 모습은 적으로서의 그들과 싸우러 나간다기보다는 그들을 범죄자들로 심판하려 가는 모습과도 같다.

(4) 그의 용의주도함(13절). 그는 공격에 필요한 군대의 배치를 위해서 그리고 모든 것이 질서대로 움직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갔다. "석학 패트릭(Patrick) 감독은 여호수아가 이 일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하기 위해서 혼자 골짜기로 들어갔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5) 그의 견인.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향해서 그의 창을 내밀었을 때(18절) (이 창은 마치 모세의 지팡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있어서는 무섭고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결코 그 손을 내리지 않았다. 전투에서의 그의 손은 마치 중보의 기도를 드리던 모세의 손처럼 해가 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영적 원수들을 대적해서 손을 내민 사람들도 절대로 그 손을 돌이켜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가 전략으로 실행한 것은 그가 모형이 된 우리 예수님에게도 그대로 일치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마치 자기가 정복된 자처럼 해서, 즉 패배를 통해서 이겼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께서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떠나가셨을 때 마치 죽음이 그에게 승리하고 그와 그의 모든 관심사가 파괴되고 실패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그가 다시 소생하사 어둠의 권세들을 철저하게 소탕하시고, 발 뒤굼치에 상처를 받으심으로 뱀의 머리를 때려부수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전략인가!

2.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순종을 잘했는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명령하는" 바를(8절) 그들은 불평이나 원망없이 그대로 했었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 복병으로 잠복하도록 파견된 무리들은(이 두 도시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동맹하고 있었다) 위험한 지역에 처해 있었으며 만일 발각되는 날에는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은 그런 모험을 견디었다. 이스라엘 군대도 퇴각하고 도망치는 마당에서 그것은 창피스럽고 위험한 짓이었지만 여호수아에게 순종하며 그대로 했었다.

3. 아이성의 왕이 얼마나 얼간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1) 그는 척후병들을 통해서 성 뒤에 매복되어 있는 복병들을 찾아보지 않았다(14절).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자기들의 영화에 도움이 되는 것들도 분별하지 못하도록 눈멀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자기들을 노리는 복병을 알지 못하게" 하신 사건은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낸 한 실례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2)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자, 성을 지키거나 혹은 퇴로를 혹보하기 위한 군사 하나도 남기지 않고 온 군대를 동원해서 이들을 추격하게 했다(17절). 이와 같이 교회의 원수들도 때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자기들 스스로의 분노와 난폭 때문에 자멸하는 수가 있다. 바로도 이스라엘을 추격하는 데 정신이 팔려 홍해에 자기 자신을 던졌다.

(3) 전번 공격 때 이스라엘군 3,000명중에서 36명을 죽였다고 해서 지금 그가 싸워야 하는 이스라엘의 이 막강한 군대를 모두 죽여 없애버릴 것으로 생각했다(6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어리석은 자의 번영이 얼마나 스스로를 파멸시키며 스스로 파멸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 하나님께서는 아이성의 사람들을 바쳐진 물건에 손을 대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채찍으로 사용하시었었다. 이 일이 이들로 하여금 자만심에 부풀게 해서 이 무서운 침입자들로부터 자기들의 나라를 구원하는 영광을 차지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기들의 실수를 목격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하나님과 화해되었을 때 이들을 대항할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이스라엘을 꾸짖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 이들을 이용하셨을 뿐이며, 일들이 바로 되어지자 그 막대기는 불에 던져질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뜻은 이같이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이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도다" (사 10:5-7).

4.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치고 얼마나 완전한 승리를 얻었는가 있는 것이다. 각각 자기들이 맡은 일을 잘 해냈다. 양쪽으로 나뉘어 있던 이스라엘 군대는 약정된 신호에 의해서 서로서로 연락이 되었고 모든 일들은 계획된 대로 성공되었다. 따라서 승리를 자신했던 아이성 사람들은 자기들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대항할 힘도 달아날 곳도 없었다. 오직 자기들의 목숨을 침입자들에게 내어 맡기는 불가피한 운명 아래 놓이게 될 뿐이었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함성과 아이성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어느 것이 더 큰지 말하기는 어려울는지 몰라도 그토록 의기양양했던 그들이 이토록 어두운 절망에로 별안간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 넘쳐흘렀을 공포와 혼란이 어느 정도였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쉬울 줄로 안다. 악인의 승리는 잠간이다(욥 20:5). 그들이 "높아지는 것은 잠시뿐이며" 더 무서운 파멸과 몰락에 빠지게 될 것이다(욥 24:24).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모시지 않은 자들에게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쉽사리 파멸이 오는지 살펴보라.

 

8:4 없음.

 

8:5 없음.

 

8:6 없음.

 

8:7 없음.

 

8:8 없음.

 

8:9 없음.

 

8:1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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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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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 없음.

 

8:18 없음.

 

8:19 없음.

 

8:20 없음.

 

8:21 없음.

 

8:22 없음.

 

8:23

아이 성의 완전 몰락 (여호수아 8:23-29)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을 점령하고 승리를 거둔 내용에 관해 계속해서 읽게 된다.

1. 그들은 모든 것을 칼로 진멸했다. 들판에서뿐만 아니라 성중에서도 그렇게 했으며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도 그렇게 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24절).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이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와 같이 선고를 내리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심부름꾼일 뿐이며 하나님의 파멸의 선언에 대한 집행자들이었을 뿐이었다.

이 이야기에서만 단 한번 벧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이 사람들과 동맹을 맺은 걸로 나타나 있다(17절). 이들은 자기들의 왕을 모시고 있었으며(여호수아가 죽인 31왕들 가운데 벧엘 왕이 계산되어 있는 걸로 봐서) 아이 왕에게 속해 있지는 않았다고 해도(12:16)아이 성이 더 강한 성이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이웃의 손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 가담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우리가 생각건대는) 이들도 모두 진멸당했었다. 이처럼 자기들의 파멸을 막으려고 한 짓이 도리어 파멸을 더 빨리 촉진시켰을 따름이었다. 살육 당한 사람 전체가 12,000명으로 나와 있는데 이 숫자는 이스라엘 수만의 군대를 대항하기에는 상대가 안되는 집단이다.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자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신다.

여기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26절) "여호수아는" 살육 이 끝날 때까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다" (18절). 어떤 이들은 여호수아가 내밀고 있었던 그 창은 적을 진멸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를 격려하고 힘을 내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어떤 종류의 깃발이나 혹은 휘장이 그 창끝에 매어져 있은 걸로 생각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여호수아의 이러한 행동을 자기 부정의 실례로 생각한다. 그의 가슴에 끊어 오르는 용기의 불길은 그로 하여금 손에 칼을 잡고 앞으로 달려 나아가 열전을 감행하도록 자극했지만 그는 하나님에게 순종해서 깃발을 들고 선 보잘 것 없는 자리를 그대로 지켰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일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창을 내밀어서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대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지도했다.

2. 그들은 성을 약탈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노략물들을 마음대로 가졌다(27절). 이처럼 죄인의 재물은 의로운 자를 위해서 쌓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웃에서 얻은 노략물들을 그들은 광야에서 보살펴 준 회막을 짓는데 그 대부분이 바쳐졌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여기서 이자까지 붙여 도로 받게 된 것이다. 아마도 여기서 탈취한 노략물들도 모두 함께 모아져서 미디안족을 쳤을 때처럼 여호수아가 적절한 비율로 나누어주었을 것 같다(민 31:26 이하). 무질서하게 그리고 무법적으로 마구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와 공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그들은 아이성을 잿더미로 만들고 또 그대로 남아있게 했다(28절). 이스라엘은 아직 장막에 거주해야 한다. 그러므로 여리고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로 불태워 버려야 한다. 비록 이 성을 재건하는 자에게 따르는 저주는 없었다고 해도-우리가 오랜 후에 읽게 되는 아이성이 바로 이 도시가 아니라면-재건되지 않았을 걸로 본다(느 11:31).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 성에서 한번 패했기 때문에 도시의 폐허 속에 그 기억을 묻어 버리기 위해서 절대로 이 성을 재건하지 않았을 걸로 생각하기도 한다.

4. 아이성의 왕은 포로로 잡혀 와서 죽임을 당했는데 전사로서 전쟁의 칼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의의 칼에 의해서 악인으로 죽임을 당했다. 여호수아는 그를 목메어 달도록 하고 그의 죽은 시체를 아이성문에 던져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도록 명령했다(23,29절). 이토록 가혹하게 아이성의 왕을 다룬 데는 틀림없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짐작컨대 그는 소문난 악인이었고 아마도 이스라엘 군대의 첫 번 공격시에 그들을 물리친 일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그의 시체가 던져진 바로 그 성문에서 그는 재판 자리에 앉아 그가 그토록 자랑했던 그 위엄으로 수많은 불경스러운 짓들을 쌓아 올렸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불의의 판결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가 집행하시는 심판을 통해서도 자기를 나타내신다.

 

8:24 없음.

 

8:25 없음.

 

8:26 없음.

 

8:27 없음.

 

8:28 없음.

 

8:29 없음.

 

8:30

에발산에서 드린 제사 (여호수아 8:30-35)

우리가 여기서 읽게 되는 이 장엄한 종교의식은 가나안 전쟁 역사 가운데서 참으로 놀라운 무엇을 던져준다.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점령한 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다음 소식도 역시 마을을 점령하고 이 도시 저 도시들을 쳐들어가 승리를 얻고 그리고 그 나라의 심장부를 향해 전쟁을 수행해 들어가며 그들 스스로가 이 변방 성읍들의 주인이 되어 가는 그런 이야기들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여기서 너무나도 전연 다른 성질의 한 장면을 전개시킨다. 이스라엘 진영은 평원으로 집결한다. 그것은 적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희생을 가고 율법을 낭독하는 것을 듣고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아멘" 을 하기 위해서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은 적어도 10장과 11장에 나오는 승리를 획득한 다음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지도상으로 볼 때 세겜이 아이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는 하나(이들 두 산,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세겜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이 두 산이 있는 곳까지 깊숙히 정복해 나갈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이야기를 전위(傳位)시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 이야기가 이 곳에 있기 때문에 놀라운 실례가 되는 것이다.

1.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대한 이스라엘의 열심에 관하여 전쟁만큼 존귀한 것도 유쾌한 것도 혹은 보다 유익된 것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쟁만큼 승리를 보증해 주고 정착지를 마련해 주는데 더 필요한 일은 없었지만(이들은 칼로써 이길 때까지는 자기들의 집도 소유지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 관한 모든 일들은 정지시켜 두고 지정된 장소를 향해 긴 행군을 하고 그리고 거기서 그 예전에 참여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이 일을 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들은 비록 이 일을 연기할 여러 가지의 구실을 마련할 수 있었겠지만 할 수 있는 한 빨리 이 일을 해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착할 때까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연기시키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세상에 어떤 일도 우리로 하여금 꼭 필요한 한 가지 일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데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형통하는 길은 하나님과 같이 시작하는 것이다(마 6:33).

2. 이 일은 자기의 충성스러운 종들인 예배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의 실례가 된다. 비록 이들이 아직 정복되지 않은 원수의 나라 안에 있기는 하지만 야곱이 자기의 서약을 지키기 위해서 벧엘로 갈 때 바로 그들 성읍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던" (창 35:5)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할 때 그들은 안전했었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해야 될 일을 할 때 하나님은 그의 특별하신 보호로 우리들을 지켜주신다.

모세는 두 번이나 이 의식에 대해 분명히 명령을 내렸었다. 한번은 신명기 11장 29,30절인데, 거기서는 의식이 거행될 바로 그 장소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신명기 27장이하이다. 이것은 쌍무계약이었다. 그 계약이 지금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롭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이 땅을 점령하는 일에 용기를 얻어내게 되었고 또한 어떠한 조건으로 이 땅을 소유하게 되는지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순종의 의무를 새롭게 할 수 있었다.

Ⅰ. 이들은 제단을 세우고 하나님께 희생을 드렸다(30,31절). 이것은, 이 제사를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되는 한 중보자를 통해서 그리고 그 중보자 안에서, 하나님의 존귀를 위해 자신들을 산 제물로 바친다는 표시였다. 이 제단은 에발산에 세워졌는데 거기에는 저주가 내려졌었다(신 11:29). 이 일은 율법으로는 우리가 마땅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시며, 그리고 그의 중재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저주" 를 당하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들을 구속하시었다(갈 3:13).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고 하는 저주가 일컬어지던 곳에 제단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고 일컬어지게 된다(호 1:10). 에발산에서 선포되어진 저주들은, 만일 희생을 통한 속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즉각적으로 실행되어 졌을 것이다. 또한 이 제단에 바쳐진 희생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이미 획득한 승리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출 17:15). 지금 이들은 아이성의 노략물을 통해서 만족을 얻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의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또한 이들은 장래의 성공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은총을 탄원했다. 감사와 마찬가지로 간구들도 화해의 제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손을 대는 모든 일에 형통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행하시는 것이며 우리의 모든 길을 기도와 찬양과 의지함으로 그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들이 세운 제단은 율법에 따라 거칠고 다듬지 않은 돌이었다(출 20:25).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가장 평범하고 자연적이며 기교적이 아닌, 꾸밈이 없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술이 하나님의 작품에 아름다움을 더하지 못한다.

Ⅱ.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율법을 청취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하고 자기들의 제사가 수락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을 때 그는 이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리고 이들은 그 계약에 동의한다는 표시로 그 율법에 복종했었다. 이제 여기서는

1. 전체 계명에 대한 축소로서 십계명의 율법이 이스라엘 면전에서 돌 위에 기록되어졌다(32절). 이것은 법궤 속에 보관된 것처럼 돌에 새겨지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했었다. 마음속에 그 율법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대권이다. 이 돌들에는 회칠이 되었고, 율법은 그 회칠 위에다 기록되었다(신 27:4, 8). 이 율법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기록되어 졌는데 그것은 그들이 동의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 그리고 이와 같은 율법을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후손에게 영원히 남길 증거가 되고 그리고 만일 그들이 이 율법을 기억한다면 그들에게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으로 가지는 백성은 크나큰 축복을 받은 백성이다. 기록된 율법은 누구에게나 나타나 보여져서 만인이 보고 읽을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2. 율법에 대한 인준으로서의 축복과 저주들이 공중 앞에서 읽혀지고 백성들은 모세의 명령에 따라 "아멘" 이라고 대답했었다. (33,34절).

(1) 청중은 굉장히 많았다.

[1] 방백의 우두머리도 제외되어지지 않았다.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관들도 율법의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그 율법에 순종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축복이나 저주 아래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계약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백성들 앞에 서서 참여해야 한다.

[2] 아무리 불쌍한 이방인이라도 제외되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일반적인 귀화인들이 있었고 또 이 귀화인들 가운데 태어난 이방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계약 속에 들게 되었다. 이것은 개종자들에게는 격려가 되는 일이었고 훗날에 불쌍한 이방인들을 위한 복된 관용의 특전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는 것이었다.

(2) 각 지파들은, 모세가 지시한 바와 같이 여섯 지파는 그리심산을 향하고 여섯 지파는 에발산을 향하도록 자리를 잡았다. 언야궤는 이들 가운데 있는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것은 "계약의 궤" 였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빽빽하게 쓴 율법의 두루마리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 율법들은 돌들 위에 다시 복사되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했다. 계약은 명령되어지고 명령은 계약으로 되었다. 법궤를 메는 제사장들이나 혹은 제사장들을 시중드는 몇몇 레위인들이 백성들이 자리를 잡고 조용하도록 한 뒤에, 모세가 저들에게 전해 준 축복과 저주를 분명하게 선포했었고 그것에 대해 백성들은 "아멘" 이라고 응답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백성들을 축복하라" 고 한 것만 이야기되고 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의도하신 것은 축복을 위함 있었다. 그것이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것이다. 만일 그들 앞에 저주가 내렸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 때문이었다.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의 이 문제가 그들 앞에 명백하게 놓여져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실제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축복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을 이렇게 다루신 일이 없었다."

3. 명령과 금지들을 포함한 율법도 낭독되어졌다(35절).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서 낭독자가 되는 사람은 자기보다도 아랫사람이어서는 안된다고 여호수아는 생각한 것 같다. 이 본보기에 따라 칠년에 한번씩 지정된 엄숙한 율법의 낭독은(신 31:10, 11)왕이나 혹은 최고 통치자에 의해서 행해졌다. 율법의 총회적 공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여기서 알 수 있다.

(1) 모든 말이 낭독되었다. 아무리 작은 계율이라도 빠뜨리지 않았고 어떠한 복사본에도 축소되는 법이 없었다. 율법의 점 하나 획 하나도 간과되는 법이 없었다. 따라서 낭독할 때 시간이 모자란다든가 어떤 부분이 별로 필요 없다든가 혹은 낭독하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건너뛰는 법이 절대 없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신명기의 전책을 설교한 이후 오랜 주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다시 읽어야만 했었다. 하나님이 한 번 말씀하신 것을 두 번 듣고(시 62:11) 그리고 우리에게 전해진 것을 살펴보며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반복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2)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참여했다. "여자도 아이도" 모두 그들의 의무를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참여했었다. 가정의 주인 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아내나 아이들을 종교적인 예배를 위한 엄숙한 모임에 모두 참여하도록 데리고 나와야 한다. 배울 수 있는 자는 누구나 "율법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나와야 한다. 이방인들도 또한 참여했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비록 이방인으로 있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과 그리고 그의 거룩하신 뜻을 알릴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선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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