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민족적 할례 (여호수아 5:1-9)
그들이 장막을 쳤던 여리고 평야에 펼쳐진 수많은 이스라엘의 진들은 장관을 이루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누가 야곱의 티끌을 셀 수 있으랴!" 오래도록 "광야에 있던 교회가 이제 광야로부터 나아와, 그 사랑하는 자에게 기대었고, 아침과 같이 나오며, 달처럼 어여쁘고, 태양처럼 밝으며, 깃발을 든 군대처럼 위용을 지니고 있도다." 이들이 원수의 눈에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던가는 1절에서 이야기되어지는 바와 같다. 또한 애굽의 수치를 떨쳐버린 이 이스라엘이 자기 친구들의 눈에 얼마나 아름답고 밝게 보였던가 하는 것은 그 다음절에서 이야기되어지는 바와 같다.
Ⅰ.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요단 통과로 인해 가나안 족속들이 공포에 쌓이게 되었다(1절). 요단 통과의 소식은 곧 사방으로 퍼져나갔는데 그 소식은 가나안의 모든 왕들과 나라들에게 있어서는 기적이기보다는 경악이었다. 바벨론이 함락되었을 때 "한 보발군이 달려가 다른 사자를 만나" 전국 방방곡곡에 그 놀라운 소식을 전한 것과 같다(렘 51:31).
우리는 여기서 이 소식이 이 땅의 왕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듣게 된다. "이들의 마음이 불 앞의 초와 같이 녹아 내렸고 정신을 잃었다" 고 했다. 사실 백성들의 마음은 일반적으로 벌써 옛날에 (라합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2:9) 기가 질려 있었으나 이들의 왕들은 이때까지는 그런 대로 상당한 사기를 유지해 왔던 것 같다. 따라서 많은 인구와 튼튼한 성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침입자들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저희들끼리 다짐해 왔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을 건너게 되고 자기들 나라의 방어선이 뚫어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하나님이 분명히 이들 편에 서서 싸우고 있다는 기적적인 일에 접하게 되었을 때 이 왕들도 역시 혼비백산이 되어, 과거의 주장을 포기하고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1. 이들이 두려워하게 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스라엘 그 자체도 무시무시한 집단이려니와 그보다 더한 것은 절대 능력의 신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이었다. 요단강도 이들 앞에서 물러났다면 무엇이 이들을 막을 수 있을까 보냐!2.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공포를 집어넣어 절망케 했던 것이다. "내가 나의 두려움을 너희들 앞에 보내겠다" (출 23:27). 하나님께서는 "공포가 없는 곳에서도" 악인들을 두렵게 하실 수 있거든(시 53:5), 이토록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 곳에서야 더욱 더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영혼을 지으신 분은 자기가 원하실 때 자기 칼을 그 영혼에게 가까이 갖다 대실 수도 있으며 공포로 그 영혼을 죽일 수도 있다.
Ⅱ. 이 일은 할례 받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할례할 기회를 주었다. "그 때에" (2절), 즉 이들 주변의 나라가 경악 속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이 때는 원수의 나라 안에서라고 해도 안전했을지 모른다. 원수들의 마음이 녹아 내렸고 손이 결박당해 있었으므로 그들은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이 크게 고통 중에 있을" 때 세겜 족을 덮친 것과는 달리, 이 기회를 그들이 이용할 수가 없었다. 여호수아는 이 때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두뇌로 이 때에 전반적인 할례를 명령했다면 그는 몰지각한 인간으로 낙인을 받았을 는지도 모른다. 일 그 자체가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이성의 안목에서 볼 때 이 때는 적합한 때가 못 되었고 또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일을 하도록 명령하셨다면 그것을 "혈과 육으로 더불어 의논해" 서는 안 된다. 이 일을 하도록 명령하신 분이 틀림없이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며 그들을 지원해 주실 것이다.
1. 이 일괄적인 할례가 있었던 때.(1)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할례를 받았다(5절). 이들이 애굽에서 평화롭게 살았을 때는 틀림없이 난 지 팔일 만에 율법에 따라 자녀들에게 할례를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압박을 받기 시작하고 특히 남자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이 할례 규례의 실행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대부분이 할례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들을 위해서 일괄적인 할례가 베풀어져야 했었다. 이 할례가 베풀어지게 된 것은 라이트푸트(Lighfoot) 박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삼일간의 어두움의 시기이거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일년 후 시내 산에서 엄숙하게 두 번째 유월절 양을 먹던 바로 직전일 것이다(민 9:2). 그것을 일괄적인 할례로 본다면 이번에 있는 이 일괄적인 할례는 두 번째의 것이 될 것이다(2절). 그러나 학자 마시우스(Masius)는 할례의 규례가 처음생길 때 아브라함의 가족이 받은 할례를 일괄적인 할례로 본다(창 17:23). 일괄적 할례의 첫 번째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의 확증이었고, 이 두 번째는 이 약속의 성취에 대한 감사의 축제였다.
(2) 그러나 "광야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불복종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 아래 있었다. 이 선언은 자주 반복되어지는 것이다(6절). 그 세대 중에 아무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분노의 선언이 있는 그 운명적인 날 이후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할례를 받지 못했었다.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로 태어나는 모든 남자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하시지 않았던가?(창 17:9-14) 이것은 영원한 계약의 표징이 아니었던가?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즉 첫 유월절 후에 곧 발표된 이 절기에 관한 영원한 법률이 제정되어졌을 때도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이 절기에 참례할 수 없으며 이방인과 같이 간주하라고 하는 한 구절이 그토록도 강렬하게 선언되어지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모세의 통치하에서 삼십팔년 간이나 자녀들을 낳으면서 무할례 상태로 버려두었다고 하는 것은 설명될 수가 없다. 이러한 큰 부작위(不作爲)는 막연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볼 수밖에 없다.
[1]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할례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생략되어졌다고 주장한다. 할례는 원래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을 구분하기 위한 표지로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는 다른 민족들과 완전히 분리되고 있었고 또 그들과 뒤섞일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할례를 주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2]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는 할례의 개념을 의무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계약에서는 할례에 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세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요 7:22) 생겨난 것으로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특별한 표지로 주어진 것이다(창 17:8).
[3]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있을 동안에는 거처를 자주 옮겨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비정착 상태를 감안해서 하나님께는 이 규례의 준수를 간과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이 할례를 받은 후 고통을 느끼는 얼마 동안은 쉬어야 하며 이때 마구 움직이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럴 듯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시는 분이지 희생을 원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이 주장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것이 만족한 답변이 못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때로는 이들이 한 곳에서 일년 가까이나 머물기도 했고(민 9:22) 또한 아이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이동을 하더라도 이들을 따뜻하게 잘 싸서 편안하게 나르면 해를 받지 않을 수도 있으며 더욱이 이 일은 임신한 어머니나 해산한 어머니가 누워 쉬어야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 민족의 계속적인 불신과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징이었을 거라고 본다. 할례는 우리가 전에 살펴본 자와 같이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의 표지였다. 족장들이 자기들의 자손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이 아름다운 땅에 대한 소망의 믿음에서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온 전사들에 대해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하고 절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그것을 보지도 못할 것이라고(이러한 선언은 6절에서도 반복되어 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 선언에 대한 계속적인 기억을 위한 것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셨을" 때 이 선고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할례는 금지되어졌다. 이것으로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할례를 예로 삼았던 약속의 은덕을 절대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 명확하게 표현되어지게 된 것이다.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고로 계약을 파기했을 때 하나님이 진노하사 계약의 돌판을 파괴시켜 버리는 것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선언에서는 이 일에 대한 법적인 금지가 나타나 있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민수기 14장 33절에는 이 일에 대한 암시가 있는데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을 질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자녀들은 할례를 받았을 것으로 본다. 이들은 이 형벌의 선언에서 제외되어져 있었으며 특별히 갈렙에 대해서는 "그가 밟는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고 말씀하셨다(신 1:36). 이것은 할례가 지니고 있었던 바로 그 약속이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여기서 자기 가족에게가 아니라 전체 회중에게 할례를 명령한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이 위대한 규례가 거의 40여년 간이나 이스라엘에게서 생략되었던 것 같다. 이 사실은 할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도, 영속적인 의무도 아니며 그것은 이토록 오래 연기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때가 차면 폐지되어져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2. 이 일괄적인 할례를 하도록 여호수아에게 내려진 명령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는 것이었다(2절). 왜 이러한 명령이 지금 내려졌는가?(1) 예표로 세워졌던 할례의 약속이 이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무사히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 "그러므로 이들의 조상들이 불신하고 그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 약속의 진리를 이들이 소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2) 38년간이나 할례가 연기되었던 그 위협의 기간이 만기되었기 때문이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입었다" (사 40:2). 그러므로 이제 계약의 표지가 다시 회복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일이 좀더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왜 이 일이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야에 몇 달간 쉬고 있을 동안에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왜 이 일이 모세의 애곡 30일 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왜 이 일이 가나안 점령의 과정이 어느 정도 성취되고 거기서 거주지를 정하고 요새를 세우며 진영을 강화할 때까지 좀더 연기되어지지 않았는가? 왜 이 일이 요단을 건넌 바로 그 이튿날 이루어져야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40년이 끝나고 이들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를 최적기로 보신 것이다. 그것은 인간 지혜의 주장들을 뒤엎으시는 지혜이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진영이 전쟁의 규례나 규율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여기서 보여주시려 하심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렇게 노출시킴으로써 이들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크게 나타내셨다. 그들이 행동해야 할 바로 그 때에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드심으로써 보여주신 이 위대한 보호의 본보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자기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신뢰를 선포하는 것이 되었고, 반대로 적들에게는 이들의 척후병들이 되어지는 일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이 땅을 주시는 표시라는 그 의미까지 전달하게 되었을 때 더욱 더 공포를 증가시켜 주게 되었을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이 부닥치는 위험에 맞서서 이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이들과의 계약을 더욱 확증시켜 주시려 하심이다. 이 확증은 불문가지의 승리와 성공의 확증을 주며 약속의 땅에 대한 완전 소유의 확증을 주었다.
[3]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과 또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하는" 모든 일에서는 그의 사랑을 믿고 우리 자신을 "산 제물" 로 바치면(여기서는 할례의 피가 이것을 의미한다). 그 때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려 하심이다.
[4] 이토록 오랫동안 폐지되었던 할례의 부활은, 광야에서 간과되어 왔던 다른 제도들의 준수도 부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할례를 하라고 하는 명령은, 모세가 이들에게 그들이 "요단강을 건넌" 다음에는 "광야에서" 하던 것처럼 해서는 안 되며 보다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명령을 (신 12:8) 기억나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들이 들어가는 "당에서" 지켜야 할 명령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 속에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신 6:1; 12:1).
[5] 여기서 이야기되어지는 이 "두 번째의" 할례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복음의 휴식에 들어가게 될 때 할례를 받는 영적 할례의 모형이다. 학자인 피어슨(Pierson) 감독의 말에 따르면,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지시를 따라 행하여진 이 할례는 율법에 명령된 육체의 할례와는 다른 할례 즉 "그리스도의 할례" (골 2:11)로 불리워지는 "마음의 할례" (롬 2:29)의 장본인인 참된 할례자로서의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3. 백성들은 이 명령에 순종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3절). 여호수아가 한 것이 아니라, 할례를 하도록 명령하고 그 실행을 보살폈다.
할례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에 의해서 행하여져야 할 필요가 없었고 누구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실행되었을 것으로 본다. 시내산에서 백성을 계수할 때 20세 이하이었고 그래서 죽음의 선고를 받지 않았던 모든 자들은 할례를 받았다. 그들에 의해서 나머지 모든 백성들은 짧은 기일 내에 모두 할례를 받았을 것으로 본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모세를 청종하듯이 여호수아에게도 청종할 것을 약속했었다(1:17). 그리고 여기서 그들은 이 고통스러운 제도에 복종함으로써 자기들의 약속 이행을 실증했다. 그리고 할례 때문에 모세를 피의 남편으로 불렀던 십보라와는 달리, 이들은 여호수아를 피의 통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4. 이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 할례가 이루어진 장소에 한 이름이 붙여졌다.(1) 곧 "할례산" 이라 불리워졌다(3절). 잘려나간 포피를 한데 모아 흙으로 덮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들이 작은 언덕을 이루게 되었던 것 같다.
(2) 길갈이라고 불리워 졌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치워 버린다" 는 것을 의미한다. 곧 "내가 오늘밤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부터 굴러 가게 하였다" (9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명예에 대해서 열심이시다. 하나님 자신의 명예가 거기에 너무나 크게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어떠한 수치를 당하든 간에 그것은 틀림없이 굴러 떠나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일어나는 모든 혀들을 정죄하실 것이다.
[1] 이들의 할례는 애굽의 수치를 떨쳐버리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체에 계약의 징표를 지님으로써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로 태어나게 된 자들이다. 그러므로 애굽에서의 지낸 노예 신분의 수치가 제고되었다. 그들은 애굽의 우상 숭배에 더럽혀져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수치였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할례를 받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헌신하기를 소망한 이상, 애굽을 사랑하던 수치는 벗었다.
[2] 이들의 가나안 무사 도착이 또한 애굽의 수치를 사라지게 해 버렸다. 왜냐하면 이 일은 애굽인들이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출 14:3)라고 하던 그 모욕적인 주장을 침묵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기나긴 광야의 방랑은 그들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승리로 가나안에 들어온 이상 그 수치는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심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때 그는 적들의 모욕을 침묵시키실 뿐만 아니라 이 모욕을 저들에게로 돌아가게 하신다.
가나안에서의 첫 유월절 (여호수아 5:10-12)
가나안 사람들은 매우 놀랐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자기들의 대적 이스라엘인들의 행동을 관찰했다면 그들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군인들이 전장에 나서게 되면, 그들에게는 모든 종교적인 규례들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하기가 쉽다(실제 이들은 그렇게 할 시간도 없고 생각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종교도 행위를 하나씩 하나씩 펼쳐 나간다. 따라서 후에 또 다른 여호수아에 대해서 이야기되어지는 바는 실제로 이 사실을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 즉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슥 3:8). 또한 여호수아는 실제로 올바른 방법을 취했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끝마감도 잘하게 된다.
Ⅰ. 율법에 지정된 때에 따라 "첫달 십사일" 에, 이들이 할례를 받은 바로 그곳에서, 유월절이 엄숙하게 지켜졌다(10절). 이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동안에는 이 규례를 지키는 데서 오는 유익과 안위를 거부당했고, 그것이 더욱 하나님의 싫어하심의 징표가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선고가 취소되기를 구한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시 90:15),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때가 지나가게 한 후 다시 이들을 위로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이 기쁨의 규례가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왔으니,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의 놀라운 사역들을 기념한다고 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은혜의 마무리는 그 은혜의 시작의 때를 마음에 기억나게 해 주어야 하며 한낮의 때에도 그토록 오랫동안 여명이 오기를 기다리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엄숙한 유월절은 바로 엄숙한 할례 이후에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이 회개할 때 그는 곧 "떡을 떼어" 나누게 되는 것이다(행 2:41, 42). 그들은 유월절을 여리고 평지에서 지켰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들을 에워싸고 격분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어떠한 동요도 일으킬 수 없었다. 이와 같이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절기를 지킬 때는 자기들의 땅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의 보호를 받도록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시는 실례를 미리 보여주시었다.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출 34:24). 그가 지금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 것이다" (시 23:5).
Ⅱ. 이스라엘 진영이 "그 땅의 곡식으로" 양식을 삼게 되자, "만나가 끊어졌다" (11,12절). 만나는 이들에게 필요할 때 베풀어진 놀라운 은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광야 신분의 표시였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음식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비록 천사의 음식이라고 해도 물론 가벼운 음식이라고 불평 할 것은 아니지만 이들에게 있어서 그 "땅의 곡식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이것을 갖추게 된다.
1. 여리고 성안으로 피난한 시골 백성들은 자기들의 곳간과 들판들과 거기 쌓인 모든 것들을 버려둔체 달아났었다. 이것은 이 많은 군대의 생계를 도와주었고, 또한 매우 때맞은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1) 유월절 후에 이들은 "무교병의 절기를" 지켜야 했는데 먹을 것이 만나밖에 없었을 때 그들의 양식이 없었더라면 규례대로 행동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이 절기가 일시 중단되어졌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가나안 족속의 곳간에서 이 절기를 지키기에 풍부한 많은 묵은 곡식들을 찾아 낸 것이다. "죄인들의 재물은 의인들을 위해서 묵은 곡식들을 찾아 낸 것이다." "죄인들의 재물은 의인들을 위해서 쌓아 놓는 것이며 이것을 쌓는 사람들도 자기들이 준비하는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거의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유월절 안식 후 이날에 이들은 "여호와 앞에 첫 열매의 곡식 단을 흔들어야" 했었다(레 23:10, 11).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실 땅에 들어갔을 때" 하도록 특별히 명령되어진 제사였다. 이 일은 바로 그 때가 곡식들이 자라고 익어 갈 무렵이었으므로 "그 해 그 땅의 열매" 로 준비되어 질 수 있었다(12절). 이와 같이 해서 이들은 "선한 청지기 같이 곡간에서 묵은 곡식과 새 곡식을" 잘 꾸려내게 되었다(마 13:52).
이 아름다운 땅의 열매가 자기들의 손에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곧 이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만들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하신 바에 따라서 이것들을 사용해서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보라 모든 것이 깨끗했고" 그들에게 "만족한 것들이었다."
칼빈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여기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랑할 동안에도 매해 유월절을 지켰으며 무할례자들에게 유월절은 면제해 주었으나 다른 희생들은 드리도록 허락하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모스 5장 25절을 인용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죽음의 선고가 내린 후로는, 가나안에 들어 올 때까지 어떠한 제사도 드리지 않았으며 따라서 유월절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본다. 아무튼 이 선고 이후로(민 14:) 희생에 관한 율법은 (민 15:), "너희가 너희의 안주 할 땅으로 들어가게 되거든" 이렇게 이렇게 할지니라 하는 식으로 시작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2. 이들이 "그 땅의 묵은 곡식을" 먹게 되자 곧 만나가 끊어졌다고 하는 사실은 중요하다.(1) 이것은 만나가 눈이나 우박과 같이 우연적이거나 자연적인 현상에 의해서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의 특별한 계획에 의해서 내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내렸었고, 그리고 필요로 하는 동안만 계속 되다가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2) 식량이 일상적인 방법으로 얻어질 수 있을 때는 어떤 초자연적인 공급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공과에 따라서 이들을 다루셨다면 이들이 만나를 하찮은 음식으로 불렀을 때 중단시켜 버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이것을 필요로 하는 한, 비록 그들이 이 만나를 업신여겼어도 하나님은 계속 내려주셨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만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비록 이들 중에 더러는 만나를 더 원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중단시키셨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아버지이셔서 자녀들의 필요를 아셔서 은사로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규례와 말씀은 영적 만나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광야에 사는 자기 백성을 먹이신다. 비록 때로는 강제적이 될 때도 있지만 우리가 이 땅 위에 사는 한 이것들은 계속되어진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가 하늘의 가나안에 이르게 될 때 이 만나는 그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 (여호수아 5:13-15)
우리는 이 때까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종종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보아왔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이 그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읽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부닥치는 역경이 커지자, 거기에 비례하여 그에게 주어지는 격려도 커진다.
Ⅰ. 여호수아가 환상을 보는 은혜를 받은 때. 그것은 여호수아가 할례와 유월절을 아주 엄숙하게 지킨 바로 직후였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에게 알려 주셨다. 우리들도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그의 거룩하신 규례들을 근면하고 성실하게 지켜 나아가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여호수아가 이 환상을 본 장소. 그곳은 "여리고 곁" 이었다. 그러나 말하자면 그것은 "여리고에서" 였다. 아직까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믿음과 소망으로 혹은 생각과 기대에서 볼 때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마도 이 일은 여리고 도성 바로 가까운 여리고 들판이었다고 본다. 이 사건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여 아주 단독적으로 위험에 대한 공포도 없이 나섰던 것이 틀림없다. 흑자는 여호수아가 거기서 명상과 기도 중에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따금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다. 혹은 여호수아는 거기서 여리고 도성을 살펴보며, 그 도시의 성채와 어떻게 이 도시를 공격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지시하실 때 어떻게 접견할 것인지 속으로 당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주신다. Vigilantibus non dormientibus succrritlex-법은 잠자는 자가 아니라 깨어 있는 자를 도와준다.
Ⅲ. 그 환상의 내용. 여호수아도 사려 있고 사색적인 사람들이 늘 하는 것처럼, 눈을 아래로 주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까운 거리에서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아주 놀랬을 것이며 그래서 눈을 치켜 뜨게 되었고 그의 명상에 전환이 왔다(13절). 그는 여호수아에게 사람으로서 나타났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인물로, 일단 주의를 기울이기에 알맞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다.
1. 우리는 그가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과거에도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이따금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신적 존귀를 돌렸고, 그는 또한 그것을 수락했다. 피조된 천사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여호와로 불리워진다(6:2).2. 그는 여기서 "손에 칼을 뽑아든" 군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장막에 있었던 아브라함에게는 여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고, 전장에 있는 여호수아에게는 무사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신앙이 기대하고 갈망하는 바가 되어 주신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칼을 뽑아드셨다.
(1) 그것은 여호수아가 참여하고 있는 전쟁을 인정해 주며 그 전쟁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살육 의 임무를 맡기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주권자가 칼을 뽑는다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며 부하들도 역시 싸우라고 허락해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칼을 뽑으실" 때 칼을 뽑는 것은 잘 하는 일이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깃발을 주시사 진리를 위해 달게 하신다" (시 60:4).
(2) 여호수아를 힘있게 전쟁을 수행해 나가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손에 뽑힌 칼은 그를 힘입어 용감하게 싸울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고 구원해 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칼은 사방으로 움직인다.
Ⅳ. 여호수아가 그에게 다가가서 물은 대담한 질문. 여호수아는 하인을 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은 우리편입니까? 우리의 적의 편입니까?" 이 질문은 만일 그가 자기들 편이라면 환영하고 적들의 편이라면 그와 싸울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다음 사실을 의미한다.
1. 여호수아의 큰 용기와 결심이다. 그는 이 급작스럽게 나타난 모습에도 주춤하지 않았고, 그가 본 자의 용모에 틀림없이 나타났을 그 위엄과 용맹에도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장군처럼 침착하게 그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내라고 명령하시었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그는 실제로 그랬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그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은혜로 성취되게 하신다.2. 그 백성과 그들의 처지에 대한 여호수아의 지극한 관심이다. 여호수아는 너무나 열심히 자기 백성의 유익에 전념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서는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친구와 적을 대뜸 구별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호수아가 그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대항하고" 그에게 도전하기 위해서 오는 골리앗과 같은 적으로 의심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때로는 우리를 크게 위해 주는 사람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하기가 쉽다.
그 질문은 명확하게 이스라엘 족속과 가나안 족속, 그리스도와 바알세불 사이의 한편을 강요한다. 그것은 중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해치는 자다."
Ⅴ. 자기 자신을 설명한 말(14절). "너희의 적의 편이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나는 지금 왔노라." "너희들의 친구로서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군대 사령관으로 왔다." 옛날에 있었던 마하나임(창 32:2) 즉 두 개의 군대가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다. 하나는 가나안에 들어 갈 준비가 된 이스라엘 민족의 군대이며 또한 군대는 거기서 이들을 보호해 줄 천사의 군대였다. 그분은 바로 이 양군대의 대장으로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고 천사의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를 돕도록 명령하신다. 이 일에다 비유해서 볼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 으로(히 2:10) 불리워질 수도 있으며 "백성들의 지도자와 사령관" 으로(사 55:4) 일컬어질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대장을 소유한 백성들은 승리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금 군대를 열병하고 그들에게 새 힘을 주며 여리고를 점령하는데 필요한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 대장으로 오시었다.
Ⅵ. 이분이 어떤 분인지 알았을 때 여호수아가 보인 큰 존경. 여호수아는 이 분이 말씀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직감적인 암시에 의해서 이분이 신적 인물이며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1. 여호수아는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즉 여호수아는 "자기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했다." 여호수아 자신도 이스라엘 군대의 장군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위에 여호와의 군대의 대장으로서의 임무를 받은 이 낯선 사람에 대해서 전적으로 질투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분의 주장을 논박하지 않고 도리어 기꺼이 자기의 사령관으로 이분에게 복종했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하나님께 대한 태도는 겸허하고 경건해야 될 것이다.2. 여호수아는 그에게서 명령과 지시를 요청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 여호수아의 먼젓번 질문이 용감하고 군인다웠던 것만큼이나 지금 그의 질문은 경건하고 성자다운 것이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일을 다루어야 할 때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절대로 여호수아의 위대성을 꺾어 놓는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면류관을 쓴 머리라고 해도 "왕의 왕" 이 되신 주 예수님의 보좌 앞에서는 아무리 낮추어도 지나치게 낮아질 수가 없다(시 2:10, 11; 72:10, 11; 계 19:16).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가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에 가지는 관계는 그리스도는 그의 주님이 되고 그는 그의 명령을 받는 종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대장이시고 그는 그의 분부하시는 바를 행하는 휘하의 졸병이다(마 8:9).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모든 순종의 근원은,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을 종으로 겸손하게 바치는데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시 16:2).
(2) 이러한 관계를 이루는 질문이 있다. "나의 주여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알려고 하는 간절한 열망과 그 뜻을 기꺼이 이행하려고 하는 결심과 각오를 내포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자신을 하급 장교로 세우고 명령을 받는다. 이러한 마음의 태도는 그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적격 인물이 됨을 보여준다. 최선의 명령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순종할 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Ⅶ. 이 신적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경외의 표시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15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이것은 경외와 존경의 표시였다(이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모자를 벗는 것으로 의미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계속되는 한 그곳을 거룩하게 그리고 존귀하게 하는 태도를 지닌다는 표시였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우리가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밟는 땅까지도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도 이 신적 인물에 대해서 경외를 보여야 했고 그분이 서 있는 땅을 그의 더러운 발로서 밟아서는 안 되었다(전 5:1). 내적 경외의 외적 표현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경외는 우리가 엄숙한 율례를 따라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마다 언제나 요청되는 바이다. 패트릭(Patrick) 감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실 때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주셨던 명령도 바로 이러한 명령이라는 사실을 주목한다(출 3:5). 그분은 이 명령을 통해서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여호수아도 친히 함께 해 주겠다고 한(1:5) 최근의 약속에 대한 신앙을 확증시켜 주신다. 모세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을 때 그 땅을 거룩하게 했었고 여호수아도 그렇게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여리고 성의 함락에 관해 여호수아에게 전하려고 하셨던 지시들을 받으라고 준비시킨다. 이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이스라엘이 이 성을 소유하도록 돕기 위해서 지금 오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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