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을 건널 준비 (여호수아 3:1-6)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이야기한 바와 같이 "홍해를 마르게 했다" 고 하는 것(2:10)은, 가나안 족속들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두려움이 되었었다. 가나안 족속에게 있어서 요단은 국가의 중요한 방어선이었으므로, 요단강이 홍해처럼 길을 열어 줄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은 공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일을 기대했는지 어떤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일을 기대했는지 어떤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따금 "사람들의 생각 밖의 것을 이루어 주셨다" (사 64:3). 이제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엿보게 된다.
Ⅰ. 이스라엘 족속은 "요단 강가에 와서 거기서 유숙했다" (1절). 아직 이들이 어떻게 요단을 건너게 될 것인지는 이야기되어지지도 않았고, 또 요단을 건너게 될 아무런 장비도 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명령이 내려오자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1:11).
우리도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난관이 예견된다고 해도, 그 난관에 부닥칠 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통해서도 우리들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계속 나가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밀고 나가자.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데 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자.
이 그리하여 진에서 여호수아는 이들을 이끌어 나갔다. 후에 다른 기회에도 언급되어지지만, 그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사실이 특히 주목되고 있다(6:12; 17:16; 8:10). 이것은 여호수아가 안일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매우 사랑했으며, 이 맡겨진 일을 감당해 나가는 데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큰 일을 이루어 내려고 하는 사람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궁핍이 덮치도록 하지 않으려면 잠을 사랑하지 말라. "
여기서 여호수아는 자기 아래에 있는 관리들에게도 좋은 본을 보여 주며, 계속적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 나가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것을 가르쳤다.
Ⅱ. 백성들에게 법궤를 따르도록 지시했다. 관리(유사)들더러 백성들 가운데 돌아다니면서 이 지시를 전달하라고 했다(2절).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무엇을 하며, 무엇을 따라야 할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1.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하는 법궤를 의지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의지였으며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시각적인 표적이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은 사라진 것 같다. 아니면 그것은 법궤 위에 떠 있었거나 혹은 두 가지 심지어 인도를 모두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법궤는 존귀로운 것으로 추앙 받고 영광의 보루가 되었다.여기서 법궤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계약을 맺은 하나님이라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줄 것이 있었겠는가? 그것은 "계약의 궤" 였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악한 세력도 겁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들과 가까이 하시며 함께하시며 앞서 가셨다. 이와 같이 인도를 받고 보호를 받는 사람들에게 또 무엇이 부족했으랴! 과거에는 법궤가 진 가운데서 이동되어졌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안식처를 찾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그리고 그 땅을 얻게 해 주려고 앞장서서 나갔다(민 10:33).
법궤 안에는 십계명의 돌판이 있었고 법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는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의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의 가나안으로 인도함을 받을 사람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들의 인도자로 삼고(" 만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영생에 이르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구하면서" 그 위대한 화해자를 눈앞에 두어야 한다.
2. 백성들은 자기들 앞에서 법궤를 운반해 갈 목적으로 임명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믿어야 했다. 교역자의 일은 생명의 말씀을 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표지가 되고 그의 능력과 은혜의 도구가 되는 규례들을 다루는 일을 맡아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 앞장에서야 한다.3. 백성들은 법궤를 따라야 한다.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
(1) 법궤를 저버리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으로서 좇으라. 하나님의 법궤가 어디 있든지 우리도 거기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떠나면 우리도 떠나서 그 뒤를 따라야 한다.
(2) 법궤의 인도를 전적으로 만족하게 수락하는 사람답게 좇으라. 그것은 언제나 최선의 목적을 향한 최선의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주를 따르리이다. "이것만이 전 관심사가 되어 법궤의 움직임을 보고 절대적인 신으로 그것을 따라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도 말씀의 규례를 따르며 모든 것에서 성령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지금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것과 같은 평화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움직이는 한 그들을 따라가야 하지만, 그러나 절대로 더 이상 나가지는 않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역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같이, 우리는 그 교역자들을 따라야 한다.
4. 법궤를 따름에 있어서 그들은 "거리를" 유지해야만 했다(4절). 아무도 법궤로부터 1천 야드 이내에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1) 그들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와 존경을 표시하고, 친밀한 관계 때문에 경거망동이 생겨나지 않도록 했다.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한 이러한 명령은 어둠과 속박과 공포의 구약 시대에는 있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담대하게 가까이 나간다.
(2) 또한 이 일은 법궤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서, 무장군인들에 의해 경호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도리어 법궤가 그들을 보호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비무장의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반 마일이나 뒤에 군사들을 따라오게 한 것은 원수들에 대한 얼마나 고상한 도전이며, 이것을 운반해 가는 제사장들이나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만족스러운 안전이었겠는가!
(3) 그래야 그 뒤를 따르는 자들이 더 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즉 법궤를 봄으로써 멀리서 길을 찾아 따라갈 수가 있었다. 만일 이들이 가까이서 가도록 허락되었더라면 그들이 이 법궤를 둘러싸게 되고, 그렇게 되면 가까이 섰는 사람이외에는 아무도 길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리를 유지함으로 해서 그들은 모두 만족하게 법궤를 보았고 또 그것을 봄으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조건들이 이들의 용기를 위해서 취해졌다고 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 언제나 그랬었다. 그 길은 언제나 밟아 보지 못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 요단을 건너는 일은 더욱 그랬었다.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지나보지 못한 길을 통과해야 하는 비상한 사건들을 예견하며 준비해야 한다. 우리의 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길이라면 그것은 더욱 과거에 가 보지 못한 길이며 그 길은 더욱 무서운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한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 보지 못한 일에 부닥칠 때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때까지 소유해 본 일이 없는 그런 힘으로 우리들을 또한 덧 입혀 주실 것이다.
Ⅲ. 법궤와 함께 가기 위해서 자신들을 성결케 하라는 준비가 명령되었다. 거기에는 "내일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고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5절).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장엄하게 선포했는지를 살펴보라. 그가 "기사를 행하신다. "그러므로 경외하고 찬양하고 믿어야 한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일에 얼마나 잘 알고 있었는지 살펴보라. 그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미리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의 발견과 그의 은혜의 교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살펴보라. 우리는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법궤와 함께 가려고 할 때 해야 할 바이다. 하나님은 법궤를 통하여 우리들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우리는 다른 모든 염려를 떨쳐 버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에다 바치고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거룩한 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한다. 하나님은 비상한 은총의 표시를 내리시려고 하신다. 그러므로 명상과 기도로 자기들의 마음을 주의 깊게 살펴 이 일에 맞추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에게는 영광이 되고 자신들에게는 평안이 있게 된다.
Ⅳ. 제사장들에게는 법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 서서" 가도록 명령했다(6절).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은 규례적으로 레위인들의 일이었다(민 4:15). 그러나 이 중대한 시기에는 제사장들이 그 일을 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은 명령을 받은 대로 "법궤를 메는" 일을 했으며 "백성들 앞에 서서 가는 것" 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를 위험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메고 가는 법궤는 존귀와 보호의 법궤였다. 지금 우리는 법궤가 출발할 때 모세가 사용하던 기도를 생각해 낼 수 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소서" (민 10:35). 통치자들이 받는 명령은, 사역자들을 독려하여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을 하게 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사용해서 신앙을 촉진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또한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길에 앞장서서 가며, 그들앞에 놓여진 위험에 대해 주저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최악의 곤경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그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요단 강변의 설교 (여호수아 3:7-13)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호수아를 존귀하게 하시는 지를 볼 수 다. 이 놀라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여호수아가 그들의 통치자가 됨을 알리고자 하셨다. 또한 여호수아가 얼마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릴에 열심인가를 보여 주려고 하셨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귀를 받는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
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존귀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7,8절).
1.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기 전에, 속죄소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셨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은 위대한 영예였다. 하나님이 친히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여호수아를 안심시키며, 백성들 가운데서 그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2.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존귀하게 하려 하셨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와 함께 하며 그를 위로 할 것을 과거에도 말씀하신 일이 있다(1:5). 그러나 지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이 일이 여호수아를 존귀하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며, 하나님이 사용하시며, 하나님이 택한 사람은 진실로 위대하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존귀하게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존귀하게 해 주셨다.
경건한 통치자들은 높이 존경을 받아야 하며, 공공의 축복으로 알고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면 볼수록 더욱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홍해가 갈라짐으로 해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끌어낸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다에서 모세에게 세례를 받은 것" 으로 일컬어진다(고전 10:2). 그리고 그때에야 그들은 "모세를 믿어 주었다" (출 14:31). 그런데 지금 요단강을 갈라지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여호수아와도 마찬가지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확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몇 번이나 여호수아를 존귀하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통치자 모세의 후계자로서 그를 존귀하게 만드시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존귀하게 하신 곳이 요단강 언덕이었으며, 그곳은 또한 하나님께서 중보자 우리 주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신 바로 그 자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요한이 세례 주던 곳은 "통행의 집" 이라고 하는 벳사바라인데, 거기서 우리 주님이 세례 받으셨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선포되어졌었기 때문이다.
3.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직속 시종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8절). "너는 제사장들에게 명하라. "이것은 "너는 그들에게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알게 하고, 지키게 하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서, 권능이 나타나 요단 강물을 물러서게 하여(시 114:5, 6), 강물이 갈라지게 할 동안 그들을 요단강 언덕에 조용히 있게 하라" 는 것이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없이도 강물을 가르실 수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그들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백성을 가르치며, 필요시에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Ⅱ.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야기를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1. 여호수아는 주의를 환기시켰다(9절). "내게로 오라. 들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모든 자여 오라. 이제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전에 먼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그래서 말씀과 사건을 서로 비교해 보고, 서로 밝혀 주는 것을 깨달으라" 고 했다. 그는 그들의 성결을 요구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고 했다. 그것이 자신들을 성결케 하는 기본적인 방편이기 때문이다(요 17:17).2. 여호수아는 마침내 백성들에게 요단을 건너는 방법을 곧 요단 강물의 흐름을 멎게 함으로써 건너게 될 것임을 이야기한다(13절). "요단 강물이 끊어질 것이니라. "하나님은 급격하고 놀라운 서리로 수면을 얼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빙판 위로 건너가게 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자연의 힘에 의해서 이 나라에 때때로 심지어 있어나는 현상이었으므로(욥 38:30), 이 방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는 영광이 되는 일이 못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도 두려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강을 건너는 일은 일찍이 다른 곳에서는 유래가 없었던, 홍해를 가르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져야만 했었다.
기적은 여기서도 반복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시작하신 그 권능으로 그 구원을 또한 완성하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갈대아 역은 그렇게 읽었다. 7절). 곧 본질적이고 영원한 말씀이 모세에게서처럼 여호수아에게 있어서도 신실했었다. 물과 물을 가르고 덮였던 마른땅을 나타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계시를 받아 전해 주었던 그 창조의 사업을 기억나게 하셨을 것이다(창 1:6, 9). 그리고 그들이 지금 눈으로 봄으로써 그들이 과거에 읽었던 바를 깨달을 수 있었고,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이 바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시며, 자기들을 위해서 같은 능력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3. 법궤를 따르도록 이미 지시를 받은 백성들은, 여기서는 그 법궤가 그들을 앞서서 요단으로 들어가리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11절).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계약 궤는 이 백성들의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모세의 통치 기간동안에는 구름이 이들의 안내자가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의 통치하에서는 법궤가 안내자가 된다. 두 가지가 모두 하나님의 임재와 지배의 가견적(可見的) 표적이었다. 그러나 모세의 통치하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구름에 쌓인 것과 같이 베일에 가리워져 있었으나, 우리의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총은 베일이 벗겨진 계약궤로 나타나게 된다.
(2) "온 땅의 여호와의 언약 궤" 라고 불리워진다. 즉 "너희와 언약하신 너희 하나님, 그분은 온 땅의 주님이시며, 모든 나라와 모든 피조물을 명령하고 지배하고 사용하시며 통활하시는 권력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온 땅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들을 필요로 하시지도 않으며 너희들을 통해서 유익을 보실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그가 너희들과 계약을 맺은 것은 너희들의 명예이며 기쁨이다. 만일 그분이 너희들의 것이라면 모든 피조물은 너희들을 섬기게 되며 그가 기뻐하실 때 너희들을 위해서 이용될 것이다" 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찬양하고 예배드릴 때,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하나님으로 찬양과 예배를 들릴 때, 우리는 그가 "온 땅의 주님" 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를 경외하며 그를 믿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원문의 액센트를 살려 보다 강조적으로 이 본문을 "보라. 언약의 궤 곧 여호와의 법궤로다" 라고 읽는다.
(3) 법궤가 "그들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리라" 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한다고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그들 앞에서 가신다는 것,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가신다는 것만을 가르쳐 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요단강이라고 해도 법궤가 그들을 인도하기만 한다면 자신있게 모험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훈을 우리의 법도로 그의 약속을 우리의 의지로 그리고 그의 섭리를 우리들의 안내로 삼을 때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 아무리 큰 어려움에 부닥친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다" 라는 약속은 모든 자손들에게 확실하다(사 43:2).
4.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백성을 위해서 하시려고 하는 일에서부터 앞으로 더욱 해 나가실 일에 대한 보장을 말해 준다. 여호수아의 마음에 크게 차지하고 있는 일과 그리고 그에게 큰 만족을 줄 일을 먼저 이야기한다(10절). "그러므로 사시는 하나님이(참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이방의 죽은 신들 중의 하나와 같지 않으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심을 너희가 알리라. 비록 너희가 그를 보지 못하고 그를 형상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그는 너희들 가운데 계셔서 너희에게 율법을 주고 평안을 주시며 너희의 예배를 받으시는 눈이시다. 그는 너희 가운데 계셔서 지금 너희 앞에 서서 이 위대한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아니 그분은 틀림없이 가나안 족속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 내실 것이다. "따라서 요단강이 갈라진다는 것은 이들에게 몇 가지 의미가 있었다.(1)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표적이다. 만일 이들의 불신앙이 이들의 조상들처럼 많은 확실한 증거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 완악한 것이 아니라면, 이 일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 가운데 계심" 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조상들은 그들 앞에서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신 후에도 곧 뻔뻔스럽게도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니 계신가?" 라고 의심했었다(출 17:7).
(2) 가나안 정복의 확실한 보증이다. 만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들 가운데 계신다면, 그가 "가나안 족속을 너희 면전에서 쫓아내고 쫓아내실 것이다" (히브리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일을 하실 것이며, 완벽하게 하실 것이다. 무엇이 그를 방해할 수 있으랴. 강들을 나누시며 마르게 하신 그분 앞을 무엇이 막아설 수 있으랴. 방어선의 무너짐은 이미 가나안 모든 왕들의 파멸의 확실한 전조였다. 요단강도 물러서는데 어떻게 이들이 버틸 수 있으랴. 요단강의 통과를 막아 낼 용기 하나 없이 "능력의 야곱의 하나님" 의 접근에(시 114:7)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데 이후에 오는 일에 대해서야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여기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주는 확증은 너무나 확고한 것이므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일당 천의 용기를 주며 두 사람이 만명을 몰아 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40년 전에 지어진 모세의 노래에 대한 기억은 이들에게 굉장한 힘을 불러 일으켜 주었을 것이다. 이 노래에는 여호수아가 요단을 가를 것과 이 일이 가나안 족속을 몰아 내는 데 큰 영향을 행사할 것을 분명하게 예언해 주고 있다(출 15:15-17). "가나안의 주민들이 간담이 녹을 것이며 마침내 쫓겨날 것이다. 그들은 주의 백성들이 강을 건널 때까지 돌처럼 조용할 것이며 주께서 그들을 인도하사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라. "하나님이 자기 교회와 백성에게 나타내시는 영광스러운 모습은 우리의 믿음과 장래의 소망을 북돋아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완벽하기 때문이니라. "요단의 물결이 이들을 막을 수 없다면, 가나안의 세력도 이들을 물러서게 할 수 없다.
5. 한 지파에 한 사람씩 여호수아는 열 두 사람을 준비시킨다. 이들은 언제나 가까이 있어서 이후로 여호수아가 내리는 명령을 재빨리 받아야 한다(12절). 이 열 둘이 제사장을 시중든 것 같지는 않은데, 제사장들이 언약 궤를 메고 갈 때 이들이 함께 감으로써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목도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혹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부름을 받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4:4 이하).
마침내 요단을 건너다 (여호수아 3:14-17)
본문에는 요단강이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로 통과한 이야기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수사학적인 미사여구로 장식되어지지 않고 (금에는 색칠할 필요가 없다) 짧게 사실만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Ⅰ. 이 강은 일년 중 어느 때보다도 이 때가 가장 깊고 가장 범람했다(15절). 가까이 레바논 산의 눈이 녹아내려 강물이 불어나는 이 때가 바로 보리 추수때로 일년중의 봄이다. 이 때는 온 강둑에 물이 넘친다. 바로 이 때의 이 거센 물결이(하나님이 이 때만은 물이 넘쳐 나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고 또 다른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강울 건너도록 명하실 수도 있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사랑을 더욱 더 크게 나타나게 했었다.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에 부닥치는 방해물들도 모두가 놀라운 유익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은 또한 이것들을 극복하실 수도 있으며 또 극복하시리라는 것을 명심해 두자. 요단강이 벼랑까지 차거나 차고 넘치거나 간에, 전능하신 자는 이것을 마치 좁고 얕은 개울처럼 가르시며 그 바닥을 말리시는 일을 쉬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다.
Ⅱ. 제사장의 발이 물가에 닿자마자, 수문을 내리어 물을 막아버리듯이 물줄기가 즉시 멈추어 버렸다(15,16절). 그래서 위에 물은 불어나 쌓이고 역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물이 흩어진 것이 아니라 고이게 되어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물이 불어나게 되어 수마일 상류 쪽에 살던 사람들도 이 놀라운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고, 그후 오래도록 이 기억은 그들 가운데 남게 되었다. 아래쪽으로의 물은 물론 이 보이지 않는 수문이 닫혀짐으로 해서 저 멀리 아래쪽까지 강바닥을 마르게 했다. 이들이 홍해를 건널 때는 물이 양쪽으로 벽처럼 쌓였으나 여기서는 오른쪽 한쪽만 그렇게 되었다.
자연의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시면 자연의 과정을 바꾸실 수도 있으며, 그 성질을 변경시키실 수도 있고, 액체를 고체로 전환시키실 수도 있으며, "물을 바위 기둥처럼" 만드실 수도 있고, 반대로 "바위를 물기둥처럼" 만드실 수도 있어 당신의 뜻에 따라 사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시 114:5, 8 참조).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가 못하실 일이 무엇인가? 때때로 그는 "하수들로 땅을 쪼개시기도" 하시며(합 3:9), 때로는 본문에서처럼 땅이 없이도 하수를 나누시기도 하신다. 우리는 이 강하고 급격한 흐름이 별안간 억제되었을 때 "물결이 흉용하며 넘침으로" 산이 "요동하는 것 같이 되었고" (시 46:3),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가 이 많은 물결 소리보다도 더 힘이 있음을 스스로 나타내 보이실 때,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였다" (시 93:3, 4)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일과 관련해서 선지자는 "여호와여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라고 질문한다(합 3:8). 그러나 그것은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나오심이다" (합 3:13).
이 일에 비유해서 하나님께서 끝날에 복음의 교회를 위해서 하실 위대한 일들 가운데 큰 강 유브라데를 마르게 하여 "동방의 왕들의 길을 준비한다" 고 했다(계 16:12).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가 되었을 때, 모든 난관은 극복되고 "산들이 평지가 되어지며" (스 4:7), 강이 마르게 되는 것은, "여호와의 구속받은 백성이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들이 광야를 지나 순례자의 길을 끝마칠 때 죽음은 우리와 하늘 가나안 사이에 있는 요단강 같이 될 것이다. 언약 궤는 이미 그 사이로 우리들의 길을 마련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 그것은 죽음이다.
Ⅲ. 백성들은 "여리고를 향해 똑바로 건넜다."
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에 대한 대담성과 고귀한 도전의 실례가 된다. 여리고는 가장 튼튼한 성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감히 이스라엘이 몰려오는 것을 맞부닥칠 엄두도 낼 수 없었다.2. 요단강을 건너는 모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여리고는 아름다운 도시이며 그 주변은 놀라울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러한 곳을 자기들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는 전망을 가지게 되었을 때, 어떠한 난관도 그들로 하여금 그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가 없었다.
3. 이들의 도하를 지켜 본 원수들에게 공포와 혼란을 가중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기적의 광경이었다.
Ⅳ. "모든 백성이 건널 동안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 가만히 서 있었다" (17절). 물을 갈라놓는 바로 그 능력이 또한 물이 갈라져 있도록 하는 능력이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 궤를 강 가운데 두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지인 언약 궤가 이들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물은 다시 뒤덮여질 것이며 그들은 물 속에 장사되어 버릴 것이다.
1. 하나님이 일을 맡기실 때 산과 같은 물결을 자기 머리 위에 두고라도 그들이 자기들의 위치를 지키는 모험을 할 수 있는지 어떤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는 그 대담한 발을 내디디었던 것과 같이 그들은 또한 요단강 가운데서 끝까지 꿋꿋이 서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을 보호해주는 표지를 자기들이 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험의 시기에 온 교역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과 용기를 보여 주는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2. 이 일은 백성들의 믿음을 북돋아주는 것이었다. 이들이 그들과 크나큰 위험 사이를 가르시며 그들과 흉용하는 물결 사이를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게 될 때(갈라진 물결과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승리의 행진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물결이 그들을 내려 덮어 버렸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리 큰 위험 속에서라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위로를" 받게 된다(시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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