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신명기 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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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비스가 산상의 모세(신명기 34:1-4)

Ⅰ. 모세는 하늘을 향하여 위로 올라간다 . 곧 죽으려고 비스가산 꼭대기까지 올라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정해진 장소였던 연고이다(32:49, 50). 이스라엘은 모압 평야에 있는 평탄한 지면에 포진하고 있었는데, 모세는 거기서 명령에 따라 느보산에 올라가 비스가라 불리우는 그 산의 봉우리 곧 정상에 이른다(1절). 비스가는 그런 탁월한 것을 일컫는 총칭적 이름이다. 모세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비스가산 꼭대기까지 올라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의 생명의 마지막 날에도 그의 기력이 쇠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표시하는 것이다. 한 때는 모세가 자기 손들이 무거워 부축하는 사람들을 두었었지만(출 17:12), 이제는 그런 부축인이 없이, 아무도 "동반하지 않고 홀로" 그 고산의 정점까지 걸어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마치고는 여호수아 엘르아살 및 자기의 모든 친구들에게 엄숙하게 작별을 고하였을 것이다. 아마 이들은 산 기슭까지 모세를 모시고 갔으리라. 이 때에 모세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 한 산 기슭에서 자기 하인들에게 명령한 것과 같이 저들에게 지시하였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라. 나는 저곳으로 가서 죽으리라." 그들은 모세가 죽는 것을 목격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 이유는 저희가 그의 무덤을 알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과 관계없이, 그는 비스가 산정으로 올라 갔는데 그의 이 행동은 두 가지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1. 그가 기꺼이 죽으려 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기의 죽을 곳을 알았을 때 죽음을 피하기는 커녕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 가파른 산길을 즐겁게 올라갔다. 은혜로 말미암아 저 세상을 잘 알게 되고 그 세상과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온 자는 이 세상과 하직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2. 그는 죽음을 자기의 승천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사람의 영혼 곧 착한 자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위로 올라 가는데" (전 3:21), 이 영혼의 운동에 맞춰서 모세의 몸도 갈 수 있는 한도까지 위로 멀리 그 영혼과 동행해서 올라 가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 세상을 떠나라는 부르심을 입을 때는, "올라 가서 죽으라" 는 소환장을 받는 셈이다.

Ⅱ. 모세는 다시금 이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즉 자기는 결코 들어갈 수 없었던 이 세상의 가나안 땅을 바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믿음의 눈으로 자기가 이제 곧 들어가게 될 하늘의 가나안 복지를 기대하며 바라보았다. 하나님은 그가 결코 가나안을 소유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셨으며, 그 경고가 성취되고 있다. 하나님은 또 모세가 그 복지의 전망은 바라볼 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었는데, 그 약속이 여기서 실행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좋은 땅을" 그에게 보이셨더라(1절).

1. 그가 비스가산 꼭대기에 혼자 올라 갔다고는 하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셨음이라" (요 16:32). 사람은 자기가 죽게 될 때 친구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을 자기 주위에 불러 놓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거나 혹은 친구들이 인자하지 않아서 우리가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우리에게는 전능하시고 선하신 목자가 같이 하시니 "해 받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시 23:4).

2. 그의 시력이 매우 좋고, 또 고지의 장점을 이용하면 전 가나안의 조망을 열망할 수 있을 정도이기는 하였더라도, 만약 그의 시력이 기적적으로 도움을 입고 확대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가나안땅이 끝에서 저 끝까지의 전경(추산해서 세로로 약 160마일)을 어떻게 다 볼 수 있으며,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횡으로 50~60마일로 추산)를 어떻게 볼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그것을 보이셨다" 고 하는 말씀이 나와 있다.

우리가 지금 더 좋은 하늘 나라에 대해서 기대하는 모든 아름다운 전망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계시의 영과 아울러 지혜의 영을 주시는 이도 그분이시고, 목적물과 아울러 그것을 볼 눈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마귀는 아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난한 전경을 보이신 이 일을 모방하고자 꾀했으면서 자기가 더 나은 체 하였을 것이다. 즉 마귀는 공중의 환상을 통해 모세처럼 우리 구주를 "지극히 높은 산 위" 로 모시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드렸는데, 여기에서처럼 한 나라를 먼저 보이고 그 다음에 또 한 나라를 보이는 식의 점차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보여 주었던 것이다.

3. 모세는 가나안을 멀리서 바라 보았다. 구약의 성도들은 꼭 그와 같이 메시야 왕국의 경치를 바라 보았으니, 저희는 "멀리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 보았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도 이 일보다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다. 그것을 완전하게 믿어 약속 중에서 환영하였으며, 성취 속에서 그날을 맞이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겨두었다(히 11:13).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은 은혜를 통하여 자기들의 미래상이 지니는 더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현재 속에서 바라본다. 모세와 비느가산과의 관계는 말씀과 제 의식이 신앙인들과 맺는 관계와 같다. 그 말씀과 의식으로부터 저들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안락한 전망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망 중에 기뻐한다.

4. 모세는 가나안을 보기만 하였을 뿐 결코 차지하지는 못 하였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자기 백성을 장차 닥쳐올 재앙으로부터 데려가 버리듯이, 또 때로는 저희를 곧 일어날 좋은 일로부터 데려가시는 때도 있다. 즉 그 좋은 일이란 현세의 교회가 누리는 기쁨이다. 영광된 일들이란 후일의 그리스도의 나라를 말해주며, 그리스도의 나라의 발전과 확대와 번영상을 나타낸다. 우리는 미리 그것을 내다보기는 하나 그 나라를 목격할 수 있을 때까지 살 것 같지는 않다. 우리 후손들이 그 약속된 땅에 들어 가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우리 자신들의 시체가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잠들게 될 때에 우리에게 주는 위로이다(왕하 7:2 참조).

5. 모세는 이 모든 것을 죽기 직전에 보았다. 하나님은 종종 자기의 은혜롭고도 가장 훌륭한 광경을 유보 시키었다가 저들이 죽는 최후 순간에 힘이 되도록 하신다. 가나안은 "임마누엘의 땅" 이어서 (사 8:8), 그곳을 바라볼 때에 모세는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얻어 누리는 축복을 바라 보았던 것이다. 그곳은 하늘 나라의 모형이었으며(11:16), 믿음은 그것의 실상이요 증거이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며 하늘 나라를 소망하고 저희 눈으로 가나안을 보는 자들은 아주 기쁘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으므로 "주여! 당신은 당신의 종으로 하여금 평안하게 떠나게 하소서!" 하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34:2 없음.

 

34:3 없음.

 

34:4 없음.

 

34:5

모세의 죽음(신명기 34:5-8)

Ⅰ. 모세의 사망(5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었다." 하나님은 그가 결단코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모세는 당초에 하나님의 그 같은 판결을 번복해 주시도록 간절하게 기도하였으나 이제 자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 그는 만족하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신 3:26).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되신 구주께서도 잔이 자기에게서 지나가도록 기도하셨으나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할 것인고로 "아버지여!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조용하게히따르셨다. 모세는 이 세상에 잠시 더 오래 살고 싶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오래 산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자기 조상들의 수명의 연한에는 달하지" 않았었다. 그의 아버지 아므람은 137세까지 살았고, 그의 조부 고핫은 133세, 그의 증조부 레위는 137세까지 살았다(출 6:16-20). 그런데 모세는 그 생애가 자기 조상 그 누구보다 더 유용했는데 왜 120세게 죽어야 하는가? 그는 노령으로 인한 노쇠도 느끼지 않았기에 여전하게 하나님의 사역에 적합하지 않았던가? 이스라엘은 그 어려운 시기에 그를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지도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가나안 정복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저희에게는 여호수아의 담대함과 함께 큰 복이었다. 또 그가 광야의 모든 노고를 치르고도 가나안의 즐거움은 누리지 못하게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은 모세 자신에게도 힘겨운 괴로움이었다. 그가 그 광야의 날에 무거운 짐과 신고를 다 짊어지고서도 대업을 성취할 영예는 타인에게 사양해야 했을 때, 더욱이나 자기의 노역에 참여할 자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 그 종이었을 때는 참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우리는 혈육으로 생각할 때는, 이런 일이 달갑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모세는 아주 온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그렇게 행하고자 하시매 그는 즐겨 복종한다.

1. 본문에 보면 그는 "여호와의 종이" 라 칭함을 받았다. 이것은 그가 선량한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의 종이다). 유용한 인재로, 혁혁하게 유용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섬겨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고 광야를 통과하여 저들을 인도해 낸 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의 종" 이 되었다는 것은 여수룬의 왕 노릇하는 것보다 더한 영광이었다.

2. 그런데도 그는 죽는다. 그의 경건이나 유용성도 죽음의 손길을 면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의 노역으로부터의 안식을 얻으며, 그 보상을 받고, 또 다른 자들에게 자리를 물려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종들이 옮기워서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들은 "그의 성전에서 주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즉 하나님을 더 잘 섬기로 가는 셈이다.

3. 그는 가나안 조금 못 미쳐 있는 모압 땅에서 죽는다. 그러나 아직 모세와 그의 백성은 미정착 상태에 있으며 저들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때였다. 하늘의 가나안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을 것이다.

4. 그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죽는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여호와의 입에서" 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의 입맞춤으로"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아주 편안하게 죽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그것은 eusanasi,a - 즐거운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에는 굴레가 없었다. 그는 자기 죽음에서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기쁘게 만끽하였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의 입에서" 죽었다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죽었음을 뜻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들의 다른 모든 일을 마쳤을 때는 주님께 순종하여 마침내는 죽어야 하며, 주님이 자기들을 부르러 보내실 때는 언제든 기꺼이 본향으로 돌아가기를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Ⅱ. 그의 장사(6절). 모세가 엘리야처럼 하늘로 들려 옮겨졌다는 것은 일부 유대인들이 조작한 근거 없는 상상이다. 그는 "죽어 장사되었다" 고 여기에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마 모세는 그리스도의 변화산상의 장엄함을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여 엘리야를 만났을 것이다.

1. 하나님이 친소 그를 매장하셨으니, 곧 천사들의 수고를 통하여 아주 은밀하게 그러나 아주 훌륭하게 이 장례를 치루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시체까지도 돌보신다는 것을 유의하자. 저희 죽음이 귀하듯이, 저희의 티끌 즉 주검도 귀하여서 한 알의 티끌도 없어져서는 안 되며, 주검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에 기억되야 한다. 모세가 죽었을 때는 하나님이 그를 묻어 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는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 모세의 율법은 끝이 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렇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은 율법에 대해 죽은 바 되었으니, 이는 저들이 다른 분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신 그분" 과 혼인을 맺기 위함이라(롬 7:4). 미가엘 천사장곧 그리스도 (혹자가 생각하듯이)께서 모세의 매장을 담당하신 것 같은 데 이것은 모세 율법이 그리스도에 의해 폐한 바 되며 길에서 거치지 않게 치워져서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의 무덤에 매장되었기 때문이다(골 2:14).

2. 그는 "벧브올 건너 맞은 편" 계곡에 장사되었다. 그를 장사지낸 천사들이 그를 요단강 건너로 운반해 가지고 그를 족장들과 함께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기란 얼마나 용이한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장지에 대해 과도하게 염려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여기서 배워야 한다. 만약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고 있다면 우리의 몸이 어디에 잠들어 있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시리아역 성서의 주석가 중 한 사람은, "그가 벧브올 건너 맞은 편에 장사되었다는 것은 바알브올이 자기에게 연합한 이스라엘인들을 자랑할 때마다 바알브올의 신전 건너편에 있는 모세의 무덤이 바알브올에게 방해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 말한다.

3. 구체적 지명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우상 숭배를 그토록 잘하는 성미의 이스라엘 자손이 저희 국가의 위대한 창시자요 은인인 모세의 시체를 봉안하여 경배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우리는 저들이 저지른 우상 숭배의 본보기 중에서 저희가 유골 숭배를 한 적이 있다는 기록은 읽지 못한다. 그 이유는 아마 저희가 이처럼 모세 숭배를 금지당하였기 때문에 다른 어떤 자를 예배한다는 것은 수치로 생각한 탓이리라. 유대 학자 어떤 이는 "모세의 시체는 감추어졌으므로, 죽은 자와 문답하는 강신술사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렀던 것처럼 "그를 불러 올려서 시끄럽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종 모세의 이름과 기억이 이토록 학대받게 버려 두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많은 자들이 생각하기로는 유다서 9절에 언급된 대로 모세의 시체에 대해 미가엘과 마귀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마귀는 그 장소를 알리고자 하였으니, 이는 그로 백성의 올무가 되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미가엘은 마귀가 알리는 것을 못하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계한 성도들의 유골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부여하는 일에 찬성하는 자들은 우리의 왕되신 미가엘을 거스리고 마귀를 편드는 셈이다.

Ⅲ. 그의 나이(7절).

1. 그의 수명은 노령에 이르도록 연장되었다. 그는 120세였으니 비록 족장들의 연한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자기 동시대인의 대다수 보다는 그 횃수가 훨씬 초과하였던 것이다. 인간의 보통 수명은 당시에 와서 칠십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시 90:10). 모세의 생애는 그 햇수가 40의 3갑절로 되어 있다. 그 첫 사십년은 조정의 신하로 바로의 궁정에서 안락하고도 영화스럽게 살았던 때였다. 두 번째 사십년은 그가 미디안 땅에서 가난하고 고독한 목자로 산 때이다. 세 째번 사십년은 그가 여수룬의 왕이 되어 영광과 권세로 산 때이나 많은 걱정과 수고를 가졌던 때이다. 그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변덕스러워서 온갖 혼합물로 합금된 것이지만 우리의 앞에 있는 세계는 잡된 것이 환합되지 아니한 세계요 불변의 세계이다.

2. 그의 생명은 아주 늙도록 까지 연장되었으나 "그의 눈이 침침하지 않았으며 (이삭의 눈이나 창 27:1, 또 야곱의 눈은 그러했다. 창 48:10), 그의 기력도 쇠퇴하지 않았다." 그의 신체의 기력이나 그의 정신의 원기와 활기도 쇠함이 없어서 여전하게 그는 말할 수 있었으며 늘 하던 대로 글을 쓰고 걷는 데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이해력이나 기억력도 전과 같이 명석하는 뚜렷하였다. 학자중 유대 어떤 이는 "그의 용모에는 주름도 잡지 않았다." 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그의 이는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고 말한다. 유대 학자들 중 다수가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에 대해(출 34:30) 그 현상이 끝까지 계속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이 그가 봉사한 일의 댓가였으며, 그것은 그가 비상하게 겸손했던 결과였다. 그가 "허리에 힘이 있고 골수가 윤택" 하였던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큰 은혜였었다. 모세가 준 도덕법에 관하여는, 비록 진정한 신앙인에게는 그 정죄하는 힘이 백지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계명들만은 여전하게 구속력이 있으며 세상 끝까지 효력을 발생할 것이다. 도덕적 계명들의 눈은 흐리게 되어 않으니, 그것들이 마음의 생각들과 뜻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또 계명의 기력과 의무는 쇠퇴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여전하게 "그리스도께 대한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Ⅳ. 모세를 위한 이스라엘의 엄숙한 애곡(8절). 고인이 된 명사들을 사랑하고 아꼈던 자라면 그들을 잃은 슬픔을 느끼며, 또 그분들을 빼앗기게 한 우리의 죄악에 대해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눈물로 그들을 전송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마지막 존경의 예표이다. 참회의 눈물은 이런 일에 매우 잘 어울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애곡자들은 누구였는가? "이스라엘 자손들" 이었다. 그들 전체가, 그 의식이 무엇이였든간에, 그 의식에 순응하였다. 비록 그들 중 일부는 아마 모세의 통치를 달가와하자 아니하였던 자들이며 거짓 애곡을 하였을 것이다. 아마 그런 자들 중에는 그 전에 모세 및 그의 각료들과 분쟁하였던 자들도 있었으리라. 또 아마 그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자고 얘기 했었던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들조차 비록 모세가 생존했을 때는 그를 어떻게 소중하게 존중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 그를 여읜 이 마당에는 그를 상실한 느낌이 절실하여 애도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리하여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사 29:24). 선량한 사람들, 좋은 통치자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크게 슬퍼하게 되고 그 슬픔이 마음 깊게 새겨진다. 그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미련한 자들이다.

2. 저들이 애곡한 기한은 30일 동안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장례격식이 계속되었다. 애곡을 더 오래도록 계속한 자들도 상당수 있었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위한 "애곡과 추모의 날들이 끝났다" 는 사실은 우리의 손실이 아무리 크다 한들 우리가 자포자기하여 끊임없이 비탄에 잠겨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적어도 시간이 지나서 그 상처가 치료될 때 까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기뻐하며 하늘 나라와 가기를 소망한다면 무엇 때문에 굳이 애곡하면서 묘지를 향한단 말인가? 모세의 의식법은 죽어 그리스도의 무덤에 장사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율법에 대한 애곡을 끝내지 않고 있다.

 

34:6 없음.

 

34:7 없음.

 

34:8 없음.

 

34:9

모세의 인품(신명기 34:9-12)

우리는 이 부분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대한 대단하게 명예스러운 찬사를 보게 된다. 저들은 각각 자기에 대한 찬사를 받으며 또 받아야 마땅하다. 우리가 살아있는 친지들의 찬양에 급급한 나머지 고인이 된 분들의 공적을 완전하게 잊어버림은 배은망덕한 짓이며, 그분들의 생전 공덕을 기리는 것은 저희 명예에 대해 치러야 할 우리의 의무이다. 떠오르는 태양에만 모든 경의가 다 표해져서는 아니된다. 다른 한편, 세상을 떠난 자의 공덕만 칭찬하는 나머지 살아 남아서 그 고인들을 계승한 자들이 우리에게 베푸는 그 은혜를 경멸하는 것도 공정하지 못한 처사이다. 이 두 가지 일에서 다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리로다.

Ⅰ. 여호수아는 그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아주 훌륭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라고 찬양받고 있다(9절). 모세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접경까지 인도해 오고서야 죽어 저희 곁을 떠났는데, 이것은 "율법이 아무것도 온전케 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히 7:19). 율법은 사람들을 회개의 광야로 인도해 가지만, 안식과 정착 된 평강의 가나안 땅에는 인도해 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여호수아를 위해 예비된 영예였으니(여호수아는 우리 주님 예수의 예포였다) 곧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 을 우리에게 행하여 주는 일이다(롬 8:3). 그를 통하여 우리는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곧 양심이 누리는 영적 안식과 하늘 본향에서의 영원한 안식이다. 세 가지 일이 이 중대한 사업에 대한 여호수아의 소명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동시에 일어났다.

1.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이 대업에 적합하게 하셨다. "그는 지혜의 영으로 충만해졌다." 그토록 괴퍅한 백성을 다스려야 하고 그렇게나 책략있는 백성을 정복해야 할 그에게는 그런 지혜가 있어야 마땅하였던 것이다. 행동은 장군에게 있어서는 용기만큼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도 여호수아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의 보물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2.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여호수아에게 그 직책을 위임했다. "그는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수아를 자기 후계자로 삼고 자기가 소명받았던 노역을 여호수아가 감당하기게 적합하도록 자격을 그에게 부여해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 드린다. 그리고 이 기도는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왜 그에게 보통 이상으로 지혜의 영을 부어 주셨는지 그 이유로서는, 여호수아를 통치자로 임명한 일이 하나님 자신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임용하시는 자들로 하여금 그 일에 적합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또 모세가 그에게 안수하였을 때 여호수아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한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위의 교회로부터 자기의 육체적 현존이 떠나시게 되었을 때 성부께 또 다른 위로자를 보내 주시도록 간구하셨고 그 빌었던 바를 얻으셨던 것이다.

3. 백성들은 즐거이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하였다. 백성의 애호를 받는 것은 아주 유리한 일이며, 어떤 종류의 공직이든 간에 부름을 받은 자에게는 큰 격려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모세가 죽었을 때도 저희가 목자 잃은 양떼처럼 되지 않고 저희가 만장일치로 인정하며, 게다가 가장 만족하게 여겨 잠자코 따를 수 있는 한 사람을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백성들에 대한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Ⅱ. 모세는 칭송을 받았다(10-12절). 거기에는 충분하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 그는 참으로 위대한 위인이었으니,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1)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친밀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신 자" 요, 하나님도 그가 대면하여 알았던 분이다(민 12:8 참조). 그는 어떤 자보다도 더 (적어도 구약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본 자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이 그리고 빈번하게 하나님께 접근하였던 자였고, 하나님은 꿈 속에서나 환상 속에서도 또 그가 침상 위에서 깊이 잠든 때 그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깨어서 그룹들 앞에 있을 때에 말씀하셨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고하실 때에는 공포에 질렸었지만(단 10:7)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였다.

(2) 이 세상 나라에서의 그의 세력과 권세. 그가 애굽의 바로 왕 면전에서 행한 심판의 기적들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베푼 자비의 이적들은 그가 하늘의 총애를 받는 자였으며 그가 이 땅 위에서 행한 바대로 비상한 대권을 위임받는 자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족하다. 이스라엘에게는 모세보다 더 사랑해야 할 만한 자 없었으며,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는 그보다 더 두려워할 자가 없었다. 이 본문을 기록한 역사가는 모세가 행한 기억을 가리켜 "능하신 손과 큰 두려움" 으로 "표적과 기사(寄事)" 를 행했다고 했다. 이것은 시내산의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하여 모세의 직임을 완전하게 인준하시고 그 직업이 명백하게 신성한 것임을 실증하셨다. 게다가 그런 일을 "모든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나타냈다.

2. 그는 구약의 다른 모든 예언자들보다 위대한 자였다. 비록 구약 예언자들도 하늘에서는 큰 권세를 가진 자요 땅위에서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였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 위대한 자와는 비교될 수 없었다. 저들 중 아무도 모세처럼 하늘로부터 받은 직임을 입증하거나 행사한 자는 없었다. 여기에 나오는 모세를 찬양하는 이 찬사는 그의 사후 오랜 뒤에 기록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때에까지도 "모세와 같은" 어떤 예언자가 등장하지 아니했고, 그 때로부터 "환상과 예언이 된 시기" 기간에도 그런 자는 나타나지 아니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고 그를 통해 유대 교회를 조성하시고 형성하셨다. 다른 예언자를 통해서는 단지 특별한 질책이나 명령 그리고 예언을 전달하셨던 것이다. 마지막 예언자는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 는 훈계로 끝맺는다(말 4:4). 그리스도께서는 친소 모세의 기록을 들추시고 멀리서" 그(그리스도)의 날을 바라보고 그에게 관해 말한" 증인으로서 모세를 보증하신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다른 예언자들이 모세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를 능가하셨다. 우리 주의 교훈은 더 훌륭하였고 그의 기적은 더 혁혁하였으며, 아버지와는 교제는 더 친밀하였다. 그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에 안기워 있었기" 때문이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신다. 모세는 종으로 서 충실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들로써 신실하였다. 모세의 역사 기록은 그를 모압 평지에 장사 지낸 채 버려 두며 그의 통치 기간도 그것으로 종언을 고하게 하지만, 우리 구주의 역사는 그를 "포은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시도록 하여서 우리는 "그의 다스림과 평강에는 끝이 없으리라" 고 확신한다. 사도는 브리 서신에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우리가 고백한 이 거룩한 종교에 왜 복종하고 무단하게 신실해야 하는지 그 훌륭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탁월하신 분임을 장황하게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님 은혜를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이 신앙에 순종하고 신실하며 변치 않는 자가 되게 하소서!

 

34:10 없음.

 

34:11 없음.

 

34:1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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