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신명기 32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32:1

모세의 노래의 서언(신명기 32:1-6)

Ⅰ. 모세의 노래에 대한 당당한 머릿말 또는 서언이 나온다(1,2절).

1. 그는 자기가 말하려는 내용의 진실됨과 증요성, 그리고 반역하고 패역한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처사의 정의로움을 하늘과 땅에다 엄숙히 호소함으로써 시작한다. 그는 이미 이 노래에서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리라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31:28). 차라리 하늘과 땅이 이 패악하고 무사려한 백성보다 더 잘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지는 저희 창조주께 대한 복종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그의 종들로서,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계속해 있기" 때문이다(시 119:89-91). 그런 연고로 패역한 이스라엘을 정죄하는 때에는 천지가 일어나 칠 것이다. 천지가 죄인들을 고발하는 증인이 될 것이며, 그들에게 내린 경고에 대하여 증거할 것이고, 저들이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한 사실을 고발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욥 20:27). "하늘이 그의 불의를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치리라." 또한 하늘과 땅은 천사와 사람들, 그 양자의 거처라고 말해지고 있다. 하늘과 땅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의롭다 하는데 동의할 것이며 "그의 공의를 선포하는 데" 찬양할 것이다(시 50:6계19:1, 2 참조).

2. 그는 그 백성에게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엄숙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내 교훈은 내리는 비니라" (2절). 즉 "그것은 패역한 자들을 휩쓸어가는 비가 되리라" 는 것이다. 시리아 역의 한 해설자는 2절 상반절을 이렇게 해설했다. 비는 때때로 심판을 위해 보내지는 것이며 세상이 비로 물에 잠겼던 대홍수를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도 어떤 자들에게는 소생시키고 활력을 다시 주는, 즉"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 이지만 그 반면 다른 자들에게는 공포를 주며 죽이는 것 곧 "죽음에서 죽음으로 가게 하는" 향기가 된다. 그것은 받으려고 잘 준비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감미롭고 즐거운 이슬이 된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이 노래의 주제는 교훈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미 찬미의 노래와 감사의 노래는 주었었다(출 15장). 그러나 이것은 훈계의 노래로 주었으니 시가나 찬미가나 신령한 노래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기 위한 것" 이기 때문이다(골 3:16). 그런고로 다윗의 시편 중 다수가 마스길 즉 "교훈을 주기 위한 것" 이란 표제가 붙어 있는 것이다.

(2) 이 교훈은 비와 소나기로 적절히 비유되고 있으니, 저들은 위로부터 내려서 대지가 열매를 맺게 하며 저들이 보냄 받은 일을 성취시키되(사 55:10, 11 절) 인간의 지혜나 뜻에 의지하지 않는 까닭이다(미 5:7). 이 비가 우리에게 자주 내리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긍휼이요, "그 비를" 받아 "흡수함" 은 우리의 의무이다(히 6:7).

(3) 그는 자기 교훈이 소리없이 조용하게 내리는 이슬이나 가는 비처럼 내리고 맺히리라는 약속을 하고 있다. 전파된 말씀은 조용히 와서 듣는 이들의 마음과 사랑 속으로 교묘히 달콤하게 젖어든 것이다.

(4) 그는 저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영접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목마른 대지" 에 내리는 비처럼 그것이 저들에게는 달콤하고도 즐거우며 환영받을 만한 것이 되리라는 것이다(시 72:6).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에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는 법이다.

(5) 학식이 많은 패트릭 주교는 이것을 기도로 이해한다. 하늘로부터 저들에게 보내진 그의 말씀들이 대지를 부드럽게 해 주는 바와 같이 저들의 마음 속으로 스며 들어가 저들로 순종의 열매를 맺게 해 달라는 기도로 보는 것이다.

Ⅱ.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의로우심에 대한 장엄한 선포가 있다(3,4절).

1. 모세는 이 장엄한 선포를 말하면서, 그것을 자기의 제일 원리로 설정한다.

(1) 즉 하나님의 존귀를 보존하기 위한 제일 원리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께 어떠한 치욕이라도 돌아가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그 백성은 아무리 악하고 부패했다 할지라도, 그는 공명 정대하시며 의로우시며 그의 모든 일은 선하시며 저들의 악함으로 인하여 더 나쁜 분으로 생각될 수는 없는 분이시다.

(2)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경배 하였으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그토록 불경건 하였던 이스라엘의 사악함을 강조하기 위한 제일 원리이다.

(3) 저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처사의 정당하심을 입증하는 원리이다. 우리는 비록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아니 된다(렘 12:1; 시 36:6).

2. 모세는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 하려고 한다고 했다(3절).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모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있으므로, 결코 그 하나님을 거짓 신이나 쓰레기통의 신으로 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려는 것이다.

모세는 그분께 위대함을 돌리라고 저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을 높고 존귀하게 생각하는 일이나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리라" 고 외친다는 일은, 우리에게 죄악을 예방하고 의무의 길을 지키게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위대하심에 무엇을 더 보탤 수는 없없으니, 그것은 그의 위대하심이 무한하신 까닭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인정할 뿐이다. 그분께 그 영광을 바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무한하심을 설명하거나 하늘 세계에서의 그의 영광이 찬란하다고 하는 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의 말씀의 신실하심과 그 공덕의 온전하심 및 그의 나라의 치리가 지혜롭고 공평함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런 일들 가운데에서 그의 영광은 우리에게 가장 선명하게 빛나며, 이러한 것들은 그분께 대한 일을 계시한 것이니,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속하는" 것이다.



(1) "그는 반석이시다" (4절). 본 장에서 하나님은 여섯 번이나 반석이라 호칭되는데, 70인역 성서는 그것을 내내 qeo,j 곧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박학한 휴 브라우턴(Hugh Broughton)씨는 구약 성서 내에서(이 32장 외에서) 하나님이 18회나 반석이라 불리운다고(어떤 곳에서는 반석을 힘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계산해 내었으며, 카톨릭 교도들이 성 베드로를 교회의 터전이 되는 반석이라고 주장할 때는 그를 하나의 신으로 까지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하나님은 반석이시니, 그는 원래 불변 부동하시며 자기를 찾고 자기에게 도피해 오는 모든 자에게는 튼튼한 피난처가 되어 주시며, 자기를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터전이 되시기 때문이다.

(2) "그의 공덕(사업)은 완전하시다." 그의 창조 역사도 완전해서, "모든 것이 매우 선하였고" 그의 섭리의 역사도 역시 그러하며, 또한 때가 되면 완전해 질 것이니, 하나님의 오의가 완성될 때에는 그의 온전하신 역사가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고쳐질 수가 없다(전 3:14). 하나님께서는이스라엘 곧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셨고, 또 그들을 위해 시작하셨던 일을 완전하게 이루어 주셨다. 이 일의 완성으로 저들은 하나님의 모든 사업의 성취하심에 대한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 인간의 일은 제 아무리 최선의 것이라 해도 불완전한 것이어서 흠과 결점이 있는 것이며 미완성인 채 남아 있으나 "하나님은 그의 사업이 완전하시느니라." 그가 시작하시는 일은, 그가 성취하시고야 만다.

(3) "그의 모든 길은 공평하시다" (심판이시니라). 그의 길들의 목적은 모두 의로우시며,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의 선택에 있어서 그는 지혜로우시다. 공평(심판)이라 함은 분별력과 정의를 의미한다. "여호와의 길은 의로우시다" (호 14:9).

(4) 그는 "진실하신 하나님" 이시다. 그의 말씀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고, 그는 자기의 모든 약속에 진실한 분이어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며, 그의 경고는 결코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5) 그는 "불의가 없으신" 분이시다. 당신을 신뢰하는 자이면 그 누구든지 속이지 아니하셨고, 그의 공의로우심에 호소하는 자에게 해를 입히지 아니하셨으며, 그의 자비를 구하여 자기를 맡기는 자들에게 결코 가혹하지 않으셨다.

(6) "그는 공의로우시며 정직하시다" 그는 저들이 당연하게 받을 응징 이상으로 화를 내리지는 않는 분이시며, 또한 당신을 위해 봉사하며 고난을 당하는 모든 자에게 틀림없이 상급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는 참으로 공정하고 의로운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누구라도 자기로 인하여 손해를 당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배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 한 귀절이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바로 실로 얼마나 긍정적이고 찬미로운가!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 분 안에서 기쁨을 얻는 생을 누리며 그 분께 의지하고 그에게 헌신하는 일이 얼마나 당연지사이냐! 이는" 우리의 반석이시요,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결코 그럴 수 없도다(시 92:15).

Ⅲ.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대한 심한 질책이 내려진다. 이스라엘은 그 성격 어느 모를 보아도 저들의 하나님의 품성과는 정반대였다(5절).

1. "저들은 스스로를 부패케 하였다" (개역과는 다름). 또는 "그것은 그 스스로를 부패 시켰다" 는 것이다. "그 민족 전체가 병들고, 온 마음이 쇄하여졌다" 하나님께서 저들로 부패케 하신 것이 아니니, "그는 공정하시고 이로우시기" 때문이다. 저들 자신이야말로 자기들의 죄와 파멸을 초래한 유일한 장본인이다. "저들은 스스로 타락하였다." 그 이유는 누구나가 자기 욕망에 이끌리면 시험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은 스스로 패망하였다" (호 13:9). 네가 거만하여 비웃으면, 네 홀로 죄와 비통함을 당하리라(잠 9:12).

2. "저들의 흠은 하나님의 자녀의 흠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불완전한 상태 속에 존재하는 고로, 흠을 가지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죄나 흠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 기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경배하여 이기려고 애쓰는 그런 약점이 ㅇ아니라, 저들의 마음에 온전히 자리잡은 악이었다.

3. 그것은 저들이 "패악하고 사곡한 세대" 여서 모순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금지한 일은, 그 일이 금지 되었으므로 인하여 더욱 해 보고자 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여 그들 자신의 기분과 기호를 내세웠고 견책을 달가와 하지 않았으며 올바른 징계를 혐오하였고, "저들 마음의 길로 계속 행하기를 고집하였다." 시리아 의역본(意譯本)은 이 귀절을 "저들이 스스로를 흩으며" 변하였으되, "그에게로 간 것이 아니요, 우상을 섬긴 자녀들과, 자기들의 공덕을 박탈당하고 스스로 그 공덕을 내어버린 세대가 되었도다" 라고 해석한다. 우상 숭배자가 하나님을 해칠 수는 없으며 그의 공덕에 손상을 끼치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이 세상의 나그네로 만들지도 못한다(욥 35:6 참조). 오히려 그들이 행하는 모든 피해는 그들 자신과 그들의 공적에 돌아가는 것이다. 박학한 패트릭 주교는 이를 달리 읽어서, "그가 그에게 어떤 해라도 가했는가?" 고 해석한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재앙에 책임을 져야 할 반석이신가? 아니다. "그의 자녀들은 그들의 오명이니라" 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생긴 모든 악은 그 자녀들의 사악함의 열매인 것이다. 그 이유는 저 모든 세대들이 사곡하고 불의한 무리들이기 때문이다" 는 뜻이다. 파멸하는 모든 자들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자들이다. 그들은 결국은 죽어야 할 죽음을 죽는다.

Ⅳ.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이 백성의 배은망덕을 탓하는 가슴 아픈 훈계(6절). "너희가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진실로 너희가 금후로는 이전 같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성실치 못한 행위를 하지말라."

1.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당신을 섬기고 당신께 집착하도록 분부하신 의무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저들에게 아버지가 되셨고, 저들을 낳아서 먹이시고 이끄셨으며, 양육하시며 저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버지의 온정을 박차 버리려는가? 그가 저들을 값주고 사셨으며 많은 기적을 베푸사 저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고, "저들을 위해 사람들을 주고 저들의 생명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주셨던 분이시다(사 43:4). "그는 네 아버지 네 소유주가 아니시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읽는다)곧 네게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는 소유권을 가지신 분이 아니냐?" "소도 제 주인은 아는 법이니라." "그가 너를 지으셨고 너를 생기게 하셨고, 세우셨으며 네 생존을 지속 시키셨다. 그가 그같이 하시지 않으셨느냐? 너는 그가 너를 위해 행하셨고 계획하셨던 큰 기사들을 생각해 본다면, 네가 짊어진 의무를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뜻이다.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우리의 의무 곧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우리를 값주고 사신 구속자이시며 우리를 세우신 성별자이신 분께 대한 우리의 의무 역시 중대하고 확고한 것이 아닌가?

2. 그는 하나님을 버리고 반역하는 일이 악이라고 결론 진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것은 야비한 배은망덕이기 때문이었다. "너는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이것이 네가 입은 그분의 모든 은총에 대한 보답이란 말이냐? 너는 네가 받은 능력으로 네게 능력 주신 그분을 치는데 사용하려느

냐?" (미 6:3, 4; 요 9:32 참조). 이런 일은 온 세상이 부끄러워하는 극악한 행위이다. 어떤 사람보고 배은망덕한 자라고 말해 보라. 그것보다 더 나쁜 호칭은 없는 것이다.



(2) 그것은 극도의 미치광이 짓이기 때문이었다. "오! 우매하고도 지혜롭지 못한 백성아!" 우매한 자들아! 이중으로 우매한 자들아!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 3:1). "너희에게 그토록 요긴한 의지가 되고 있는 분에게 거역하는, 이 진정으로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 자신의 자비를 거짓된 허영과 바꾸려고 버리다니!" 모든 방종한 죄인들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이스라엘 백성의 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무지몽매하고 망은의 인간들이라는 것을 주시하자.

 

32:2 없음.

 

32:3 없음.

 

32:4 없음.

 

32:5 없음.

 

32:6 없음.

 

32:7

하나님의 은덕(신명기 32:7-14)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저들의 큰 은혜자이심을 개략적으로 나타내고, 저들은 감사히 그를 섬기고 순종해야 할 것을 지금까지 말해 왔으나 여기서는 저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심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1. 몇몇 예증은 고대의 것으로, 그 증거를 위하여 그는 기록에 호소한다(7절). "옛날을 기억하라." 즉 지나간 날들의 역사 곧 옛 세계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우신 섭리의 역사를 기억하라. 너희는 일련의 자비가 너희 조상을 꾸준히 뒤따라 보살펴 주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며 모든 사정들이 이제 일어난 일을 향하여 얼마나 오래도록 역사하여 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믿을 만한 고대의 역사들은 매우 유용하며, 특히 구약 교회가 신약 교회이거나 교회의 요람기의 역사는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2. 다른 예들은 더 후대의 것으로서, 그 증거를 위해 모세는 그 당시 생존해 있어 저들과 같이 있었던 아비와 장로들에게 물을 것을 호소한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부지런히 가르치되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법도와(신 6:7), 그의 규례의 의미(출 12:26, 27)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적과 그의 섭리의 방법도 또한 가르쳐야 한다(시 78:3, 4, 6, 7 참조). 그리고 자녀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는 데에 꼭 필요한 사항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해야 한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예증하고, 저들의 확고한 의무를 결코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세 가지 사실이 실례로서 자세히 부연된다.

Ⅰ. 가나안 땅을 저들의 유업으로 미리 정하심. 그러므로 여기서의 가나안은 우리의 천국 분깃이 모형이요 예표로서 예전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미 내정되고 준비되었던 것이다(8절).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노아 홍수후 벨렉 당시에 온 땅이 인간의 아들들에 의해 나누어지고, 각 족속이 자기 몫을 받았었다. 몫으로 차지한 그 땅에서 각 족속은 정책하에 했으며 점차로 한 민족으로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미 당신의 심중에, 안중에 넣어 두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복지(福地)를 적당한 시기에 가서 이스라엘의 상속물이 되도록 정하시고 당시에 존재하던 그 어떤 족속보다 특히 가나안의 자손들은 그 동안만은 그곳에서 거하게 했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할 준비가 될 때까지만 그 땅을 소유하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그 족속은 노아의 저주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저주로 인하여 가나안의 자손들은 섬김과 멸망을 당하도록 정죄되어서(창 9:25), 때가 차 이스라엘이 소유할 때가 되면, 저들은 자연히, 그리고 쉽사리 또 실제적으로 멸절을 당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미리 예정하시고 가나안 백성의 경계를 정하셨다. 즉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가 그 땅에 돌아와 살을 수 있을 만큼 많아지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혹자는 가나안 자신과 그의 열 한 아들들(창 9:15 이하)이라는 수효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수효와 꼭 맞는다고 한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연대와 장소는 다 하나님의 정해진 바이다(행 17:26). 그가 "인간의 자손들에게 땅을 주셨을 때" (시 115:16).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취하도록 하시지 않으시고 민족들에게 그 기업을 나누어 주셨으니, 이는 저들로 자기의 것을 각자가 알고 남의 소유를 침범치 않도록 하시고자 함이었다.

(2) 무한하신 지혜는 넓기가 한량이 없으시니 오랜 뒤에 일어날 일도 미리 정하신다. "그의 모든 일들은" 태초로부터 종말까지 "하나님께는 알려진 바나" (행 15:18), 우리에게는 그렇지 아니하다(전 3:11).

(3) 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나라들과 열국의 일을 명하시는 중에도 자기 교회와 자기 백성을 특별히 감찰하시사 그들의 유익을 교려하신다(대하 16:9; 사 45:4 참조). 가나안인들은 다른 이방 족속들과 같이 자기들도 자기 땅에 대한 영원하고도 확실한 권리를 소유한 줄로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저들이 이스라엘 곧 저들의 주인이 올 때까지의 소작인에 불과하도록 내정하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자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 대한 자비의 목적을 성취하시나니, 저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고, "저들의 마음 또한 그렇게 생각지도 않는" 일인 것이다(사 10:7; 미 4:12).

2. 저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또한 생각 되어지기도 훨씬 전에(내가 말할 수 있는 대로), 이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취하신 특별한 배려에 대한 이유가 나타나 있다. 그것은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크게 하며, 그의 자비를 말할 수 없으리만큼 감사한 것으로 만든다. 곧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임이니라" (9절). 온 세계는 그의 것이다. 그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요, 소유자이시다. 그의 교회는 각별한 의미에서 그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영유지이며 그의 포도원이자 울타리 속에 든 정원이다. 그는 그것을 특별히 기뻐하신다. 교회는 그의 영혼이 사랑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그는 행하시고 거하시나니, 그것은 그의 영원한 안식처이다. 그는 그것에 특별한 염려를 기울이시며 자기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 인간이 자기 기업에 대해 그러하듯, 그는 그것에서 특별한 기대를 하시며, 이 세상 여타 모든 것보다도 이 구별된 자존자들로부터 훨씬 더 큰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으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기업이 되리라는 사실은 쉽사리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저들의 기쁨이요, 복이 되시는 까닭이다. 그러나 저들이, 어떻게 그들을 필요로 하지도 아니하고 그들로 인해 혜택도 받으시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가 하는 것은 결국 거저 주시는 은혜의 놀라우신 겸손으로 귀착되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선한 연고에서니이다. 그래서 그들을 그렇게 부르시고 그렇게 대우하신다.

Ⅱ. 저들을 한 민족으로 형성시킴은 나이가 차야 성년 상속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정하신 때에 이 유산을 차지하기에 적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가나안 땅은 하늘로부터 오는 상속물의 예표였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가 영원전 부터 모든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을 위해 계획되고 예정되었듯이 되었듯이 저들도 시간이 되면(그것은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그 땅에 합당하게 되고 그것을 맞아들이게 된다(골 1:12).

이스라엘이 그 압제자들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종살이로부터 구출되기까지에는, 분명히 깨달을 수 있기 까지에는, 너무나도 많은 기사 이적이 뒤따랐다. 또 그 사건이 너무나 여러 번 말하여졌으므로, 이 노래에서는 새삼 언급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들을 위해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스런 일들에 비하면 그가 지금 저들을 위하여 행하신 영광스러운 일들은 별로 주의를 끌지 못할지도 모르므로, 그는 저들에게 이 일들에로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 백성을 한 민족으로 형성하고 또 약속의 땅에서 저들이 받게 될 위대한 일들에 알맞는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는, 많은 일들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것이 여기에 매우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그를 황야에서 만나셨다" (10절).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저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갈 때 저들이 통과했고 또 거기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도록 했던 그 광야이다. 그것은 "광야 교회" 라고 불리워진다(행 7:38). 그 교회는 거기서 태어났으며, 거기서 길리움을 받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저들이 받은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거룩한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음식이나 배움을 위해서 다른 어떤 나라와 전혀 교통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거시서 "만나셨다(찾았다)" 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저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의 그 백성의 악조건과 악한 성격을 다 같이 묘사해 주는 말이리라.

(1) 저들은 버림받은 자의 상태였다. 애굽은 저들에게 있어서 사막이었고 불모의 황량한 광야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곳에서 속박받은 노예로 살면서, 그들의 압제로 인해 울부 짖었으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구원이라고는 바라볼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찾으시사 인도해 내셨던 것이다.

(2) 저들의 성향(性向)은 전도가 암담한 형편있었다. 저들 대부분은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는 너무나 무지하고 우둔하여 감화를 받기에는 너무 서투르고 불평이 많았으며, 변덕스럽고 고집이 세며 다투기를 좋아하고, 게다가 이상하게도 애굽의 우상 숭배에는 너무도 몰두하고 있었으므로, 저들의 성향 또한 가치 황무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런 성향의 백성에게서 하나님께 드릴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불모의 황무지에서 곡식 거두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고 성별함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본성이 어떠했는가를 기억해야만 한다.

2.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에서 만나셨을 때 그들을 곧장 가나안으로 데려 가시지는 않으시고 저들로 먼 길을 돌아 다니게 하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1)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들을 교훈시킬 시간을 가르치셨으니 저들이 계명들을 받을 능력이 생길 때에 가서 저들에게 계명을 주셨다.

자기 임무가 남을 교육하는 데 있는 자들은 그 훈육이 급작스레 성취될 것으로 기대해서는 아니된다. 배우는 자들은 배울 시간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2)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저들의 신앙과 인내심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시험하셨고, 저들로 하여금 광야의 곤경에 단련하도록 하여서 저들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각 단계에는 교육적인 의미가 있었다. 비록 하나님이 그들에게 시련을 줄 때라도 그는 그것을 통하여 "그의 율법에 의하여 저들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그가 "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내셨다" 고 기록되어 있다(시 107:7). 그러나 여기서는 그가 "저들을 인도해 내사 방황하게 하셨다" 고 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우회하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자기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첩경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회하는 먼 길이 가나안에 이르는 가장 최선의 길이라는 것으로 판명된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어떻게 가르치셨는가가 오랜 후에 설명되고 있다. "당신께서 저희에게 올바른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주셨나이다" (느 9:13). 특히 "또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당신의 선하신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셨나이다" (느 9:20). 그는 효과적으로 가르치신다. 우리는 만약 그들이 먼저 광야의 훈련을 겪지 않았다면 그 백성이 가나안 땅에 부적합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3. "그는 저를 자기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셨으니" 가능한 모든 보살핌과 친절하심으로 저희를 공중과 대기의 해로운 세력에서 또 황폐한 사막의 모든 위해로부터 지키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저희에게 길잡이가 되었고 지키는 자가 되었다.

4. 하나님은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들의 보금자리를 대하듯 저희에게 행하셨다(11,12절). 이와 유사한 것이 언급되어 있으니 즉 출애굽기 19장 4절에 "내가 너희를 독수리 날개로 업었도다" 한 것이니 여기에서는 그것이 확대 부연되어 있다. 관찰해 보면 독수리는 동물들처럼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새끼를 교육하고 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동물임을 보여준다. 이를 목적으로 독수리는 그 새끼들이 졸면서 들어 있는 둥우리를 어지럽게 하여 그들 위에 너풀 거린다. 그래서 그 새끼들이 제 날개로 날기를 배울 때까지 그들이 제 날개를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의 방법을 보여 주어서 그들이 제 날개로 날도록 길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자녀에게 사업을 할 수 있게 훈련을 시키고 그 자녀들이 나태와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주선해야 하는 부모들에게는 한 귀감이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에게 행하셨다. 저들이 자기이 종살이를 달가와 하고 떠나기를 싫어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저들이 자유를 열망하도록 분기시키고, 저들이 속박의 집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을 여러 번이나 막으셨다. 그는 저희를 애굽에서 끌어내사 광야로 인도하시고 마침내는 그곳을 통과 하게끔 하셨다. "주 여호와께서 홀로 저들을 인도하셨다." 그는 어떠한 조력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고 이 일을 이루시는데 자기의 협력자로 아무도 치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것이, 곧 왜 저들이 주 여호와만 섬기고 조력자는 물론이요 그와 대적되는 다른 아무 것도 섬기지 말아야 하는 좋은 이유이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도와준 다른 어떤 신도 없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충성과 경배를 누릴 딴 어떤 신도 있을 수 없다(시 81:9).

Ⅲ. 저들을 복지에 정착시키심. 이 일은 이미 두 지파 반을 복되게 심으심(정착시킴)으로 부분적으로 행해진 바 있는데 나머지 지파들에 대하여도 속히 확실하게 행해지기를 열망하던 터였다.

1. 저희들은 그 원수들에게서 영광스런 승리를 거둘 것으로 축복 받았다. "주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셨다" (13절). 즉 그가 저로(이스라엘) 하여금 승리를 가져오게 하시며 개선하여 돌아오게 하셨다. 저는자기에게 대적하여 지키고 있는 높은 곳과 궁핍과 치욕 속에 초라하게 보였으나 가나안에서는 창대한 자로 여김을 받았으니 진보되고 부하게 되어서 큰 자로 보였다. 그들은 왕중왕께서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백성으로서 당당하게 군림했다.

2. 저들은 모든 좋은 물건들을 아주 풍족하게 축복으로 받게 되었다.

밭의 통상적 소출의 증산 뿐만 아니라 "반석에서 꿀이 나며 굳은 반석에서 기름이 나는" 진귀한 일이 따를 것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1) 광야에서 저희를 따라 기적적으로 공급된 신선한 물을 말한다. 저들은 곤경에 처해 있었으므로 그 물이 평상시에 꿀과 기름처럼 맛있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가나안에서, 심지어 가장 토박한 곳에서도 누리게 될 굉장히 풍부한 꿀과 기름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른다. 가나안의 반석은 다른 나라의 밭이나 초장보다 더 많은 소출을 낼 것이었다. 가나안의 그 밖의 다른 소산물이 언급되고 있다(14절). 건강에 좋은 식품이 그토록 풍부하고 다향했으므로 (무엇이든 그 종류 가운데서는 가장 최상품이었다) 저들이 원한다면 모든 식사가 잔치가 될 수도 있었다. 여기서는 "밀의 콩팥" 이라 불리우는 극상의 곡물로 빚어진 훌륭한 떡과 (밀의 낟알은 콩팥과 비슷하므로)" 풍부한 버터며 우유와, 살찐 가축의 고기", 그리고 저들의 음료수로서는 "포도의 순수한 즙" 이 있었다. 하나님은 저들에게 이처럼 관대한 아버지였고 그토록 자애로운 은인이었다. 가나안에서의 이 풍부한 선물들은 그리스도 왕국의 열매 많음을 상징하며, 그의 말씀과 성령이 주시는 하늘의 위로를 나타낸다고 에인즈 워드(Ains Worth)는 말했다. 그의 왕국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는 버터와 우유를 예비하시며, 그 말씀의 참 우유를 주시니 강한 자들을 위하여는 강한 고기와 심령을 기쁘게 하는 술로써 먹여 주신다.

 

32:8 없음.

 

32:9 없음.

 

32:10 없음.

 

32:11 없음.

 

32:12 없음.

 

32:13 없음.

 

32:14 없음.

 

32:15

이스라엘의 배신(신명기 32:15-18)

이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려는 것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들에게 발생할 사건으로서 저들은 이미 그럴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나 생각하는 바로는 의무에 있어서나 은혜나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쎄 그토록 많은 신세를 입고 있는 백성이라면 결코 그를 떠나지 않으리라고 추측할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들은 급속히 돌아섰도다." 저들의 사악함을 웅변하는 두 가지 예가 여기서 열거되는데, 그것은 어느 것이나 하나님께 대한 변절에 해당한다.

Ⅰ. 방심과 육욕과 자만심, 교만 그리고 풍요와 번영을 속되게 악용하는 것(15절). 이 백성은 여수룬이라고 불리웠다. 곧 "정직한 백성" (어떤 자는 이렇게 해석한다) 또는 "살펴보는 백성" (또 어떤 자들은 그렇게 해석한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저들은 곧 저들의 지식과 정직의 명성을 상실하였다. 잘 먹여 저들이 살찌고 비대하게 되었으므로,

1. 저들은 "살찌고 부대(富大)해졌다." 즉 "육체의 양식을 준비하고" "그 욕망을 채우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모든 모양의 사치와 식 욕의 충족에만 몰두했다. 저들은 "살이 쪘다." 즉 저들이 비대하고 보기에 어색하며 자기 일을 괴념치 아니하고 또 그 일에 적합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우둔하고 어리석으며 조심성이 없고 무분별해짐을 말한다. 이리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번영은 자기 자신을 파멸시킨다" (잠 1:32). 이것이 악의 전부는 아니었다.

2. 저들은 "차 버렸다." 즉 그들은 교만하고 무례하게 까지 되어서, 하나님까지 대항하여 "그 발 뒤꿈치는 들었다."

하나님께서 비록 자기 예언자나 그의 뜻으로 저들을 견책 하신다해도, 저들은 "길들지는 않은 암소나" "멍에 메기에 익숙치 않은 항소" 와 같이 "그 막대기를 차 버렸으며,"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하나님의 섭리의 면전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저는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 조물주에게 정당한 경외를 드리지도 아니하고, 창조의 목적에 따르지도 아니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과거에 자기에게 베푸신 은총에 대하여 빚진 바도 없으며 다가올 미래에 대해 하나님을 의존치 않으려는 듯이 "자기 구원의 반석" 에게 용인할 수 없는 경멸을 가했다. 오만과 방자함으로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 자신의 배를 하나님처럼 여기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며, 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만홀히 여기고 있는가를 스스로 드러내게 된다.

Ⅱ. 우상 숭배는 저들의 배반을 보여주는 가장 큰 본보기이다. 앞에서 기술한 온갖 부정의 당연한 귀결은 우상 숭배에 이르는 것이니, 저희로 자기 신앙에 염증을 느끼게 하며, 자기 임의로 행하고 변덕을 좋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저들이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버렸을 때, 저들은 어떤 종류의 잡신들을 택하여 희생 제물을 바쳤는가?(16,17절) 저들이 참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다른 잡신들에게 행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저희 죄를 가중시키는 행위였다.

(1) 그 "다른 신들" 은 저들에게 아무런 친절을 베풀거나 은혜를 저들에게 베풀었다고 자처할 난한 신들이 아니었으며, 저희가 알지도 못하는 신들이었고, 또 아무런 혜택도 기대할 수 없는 잡신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신들에게는 낯선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신들이라 불리워졌으니, 이는 저들이 혼약을 맺고 충성을 바쳐야 할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2) 저들이 예배와 희생을 드린 신은 "근래에 일어난 새 신들" 이었다. 오래됨이 그 자랑 중 하나가 되는 신앙인데도 헛된 심령들이 이상하게도 새로운 것을 좋아하여, 옛날의 오래된 것을 경멸하고 새로운 잡신들을 애호하여 오고 있다. 새로운 신이라니! 이보다 더 괴물같은 부조리가 있을까? 만약 우리가 평안을 얻을 옳은 길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선한 옛 길을" 구하여야 한다(렘 6:16). 저들의 조상들이 다른 신들을 경배하였음은 사실이다(수 24:2). 그러므로 그 자손들이 그 우상 숭배에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면 아마 변명의 여지가 다소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조상들도 경외하지 않았던 새로운 잡신들을 섬기고, 그 신들이 새롭다는 이유로 해서 더 좋아한다는 것은 끝없는 우상 숭배에의 문호를 개방하는 일이 되었다.

(3) 그 잡신들은 전혀 신이 아니며, 단지 모조품이거나 가짜에 불과하다. 그 신들의 이름은 인간 공상의 날조에 불과하며 저들의 형상은 인간의 손이 만든 작품이었다.

(4) 그들은 악마들이었다. 저들은 "신들" 이거나 인류의 "조상" 이거나 "은혜를 베푸는 자들" 이기는 커녕 저들은 참으로 파괴자(문자적 의미는 그러하다)였으니, 인간에게 화를 뿌리려고 목적하는 자들이다. 저들의 우상을 모신 신전이나 형상을 사로잡고 있는 영이나 어떤 보이지 않는 권능이 있다면, 소위 인도 사람들이 행하듯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런 것들에게서 피해를 입을까봐 두려워서 도무지 예배할 필요가 없는 악령이나 유해한 권능들일 것이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은 악마의 미치는 범위 밖에 존재한다. 악마는 오직 자기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자만 해칠 수 있을 뿐이다. 스스로 "멸망의 반석" 에 부딪치기 위하여 "구원의 반석" 을 내버리는 저 우상 숭배자들이야말로 얼마나 미치광이들인가!

2. 이것이 저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얼마나 큰 모욕인가!

(1) 그것은 하나님을 잊은 것이라고 잘 해석되어 있다. "너를 낳으신 반석은 네가 염두에 두지 않는도다" (18절). 하나님을 마음에 생각하면 죄를 막을 수 있으나 세상을 섬기고 육체에 혹하면 하나님을 잊어 버리게 된다. 우리 존재의 창시자이시요 우리가 그에 의하여 연명하고 있고 그 안에서 생활하고 움직이는 바 하나님을 망각하는 일보다도 더 비천하고 무가치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힘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에", 비록 이상한 다른 가지가 처음에는 즐거운 식물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추수는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한 더미(쓰레기)가 되리라" (사 17:10, 11). 하나님을 잊어 버림으로써 이득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로서 하나님의 격노를 받아 마땅하였다. "저들이 그를 격토케 하여 질투와 분노를 일으켰다" (16절). 왜냐하면 저들의 우상은 그가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우상들이 마음에 자리하든지 지성소에 세워지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상을 불쾌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밝히 알자.

[1] 하나님은 우상에게 질투를 발하시니, 저들이 인간의 심중의 보좌를 차지하려고 하나님과 경쟁하기 때문이다.

[2] 그는 저 우상들을 자기 왕관과 주권에 대한 원수처럼 미워하신다.

[3] 그는 우상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거나 애정을 품는 자들에게 노를 발하시며 또 진노하실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자기들의 행하는 일이 하나님을 진노케 하시는 것인 줄 알지 못한다. "누가 그의 진노의 힘을 알 것인가?"

 

32:16 없음.

 

32:17 없음.

 

32:18 없음.

 

32:19

하나님의 분노(신명기 32:19-25)

이 노래의 순서는 앞 장에 나와 있는 예언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앞 절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다음에는 바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심이 따라 나온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랬다 저랬다 하는 이 어리석고 신의 없는 백성들로 인해 놀램을 당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속는 셈이 된다.

Ⅰ. 하나님은 이전에 저들을 기꺼워하셨던 터이지만, 이제는 저들을 혐오와 경멸로 배척하실 것이었다(19절). 여호와께서 저들의 반역과 우행, 비열한 배은망덕을 보셨을 때 그는 저희를 싫어 하시고 멸시하시게 되었다고 혹자는 해석한다. 죄악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밉살스럽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자녀로 부르셨고 또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부르니, 실제로는 그를 격노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시는 죄인이다. 사람이 신앙을 고백하여 하나님께 가까와지면 질수록 더욱 죄의 길에 빠져든다면, 저들은 하나님께 물론 더욱 불쾌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시 106:39, 40).

Ⅱ. 그는 저들에게 자기가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과 저들에게 대한 자기의 총애를 나타내는 징표를 주셨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에게서 물러 나셔서, "그들에게서 자기 얼굴을 숨기겠다고 하셨다" (20절). 그가 자기 얼굴을 숨기심은 그의 큰 분노를 의미한다.

저들이 자기 하나님께 "저들의 등을 돌렸" 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당신의 등을 저들로부터 돌리실 것이다(렘 18:17 과 렘 2:27 을 비교하라).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방법에 있어서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급속하지 않음을 표시한다. 저들은 처음에 하나님을 배반하여 선의 태만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악의 범행으로 적극적으로 나아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은총을 유예시키어서 저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행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저들이 하나님을 격노케 하여 떠내 보내고 나면 저들이 어떤 친구를 잃어 버리게 되는지를 깨닫게 하며, 또한 이렇게 하면 저들이 회개하게 되는지를 시험하실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 다음 사건을 기대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숨기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 57:17). 하나님은 당신이 저들을 버리심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저들은 상종할 수 없는 자들임을 나타내셨다.

1. 왜냐하면 저들은 완고하며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 없는 백성이요, 죄악의 길을 고집하며, 뉘우치거나 교화될 수 없는 백성이었던 연고이다.

2. 저들은 신실하지 못하여 신뢰할 만한 백성이 못 되었던 까닭이었다. 하나님이 저들을 구출하여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그는 "진실로 저희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자손이라" (사 63:8)고 이르셨으나 저들이 반대로 "그 안에 신실함이 없는 자손" 임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저들은 버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진리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더 이상 관계를 가지지 않으셨다.

Ⅲ. 하나님께서는 전에 저희를 편안히 하고 즐겁게 만들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셨지마는 이제는 저희를 가장 괴롭히는 일을 행하실 작정이셨다. 벌은 죄에 상용하는 법이다(21절).

1. 저희가 도무지 하나님이 아닌 천한 신들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으니, 그 신들이란 헛 것이며 저희 상상이 만들어낸 것들이어서 저희 경배자들의 공경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으며 또 은혜로 갚을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저희가 음욕을 품고 숭배한 잡신이 헛되고 사악하면 할수록 저희가 그 우상신들을 세워 경쟁시키고 반대하였던, 능하시고 선하신 참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범죄가 되었다. 이것이 두 가지 큰 죄악을 우상 숭배에다 더 보태는 것이다(렘 2:13).

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원수들을 일으켜서 저들에게 고통을 주셨으니, 그 대적들은 무가치하고 약한 동시에 보잘것 없으며 한 백성의 이름을 지니기도 감당치 못할 자들이었다. 이점이 저들에게는 더 큰 굴욕이 되었고 저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억압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저들 위에 폭군으로 군림한 백성이 천하면 천한 백성일수록, 저희는 더욱 더 야만적이고(마상의 거지보다 더 오만 불손한 자는 없다) 게다가 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에게 유린된다는 것은, 크고 강한 나라들에게 그토록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었던 이스라엘에게는 불명예가 될 것이었고, 종들의 종인 가나안의 저주 아래 들게 됨은 치욕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장 약한 도구를 사용하셔서 가장 강한 죄인을 벌하실 수가 있다. 죄악으로 자기의 능히 신 창조를 모욕하는 자들은 자기 동료 피조물 중 가장 미천한 자에 의해 모욕을 당해야 마땅하다. 이 말씀이 사사 시대에 가서 뚜렷하게 성취 되었으니, 그 때는 저들이 정복했던 바로 그 가나안인들에 의하여 때때로 억압을 당하였던 것이다(사 4:2). 그러나 바울 사도는 언약을 맺지 않은 백성이었고 신성한 일에는 어리석은 백성이었으니 교회로 불러 들여졌던 것이다. 이것이 언제나 그들에게 분노를 품던 유대인들로서는 아픈 상처가 되었으니 유대인에게는, 시기가 늘 그러하듯, 이것이 저들의 죄악이요 벌이었다.

Ⅳ. 하나님은 저들을 좋은 땅에 심으시고 저들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 주셨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에게서 모든 위안물을 박탈하시사 저들을 파멸로 몰아 넣으시고자 하셨다. 경고된 심판은 매우 무서운 것이다(22-25절).

1.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저들을 불사를 것이다(22절). 저희가 자기들의 풍족함을 자랑하고 있느냐? 그 불길이 땅의 수확을 살라 버릴 것이다. 저들이 자기 힘을 믿고 있느냐? 그의 분노의 불길이 산들의 기초까지도 부숴 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것을 황폐시키려고 발동될 때에는, 그것을 막을 울타리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가장 깊은 음부까지도 사를 것이니 곧 저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참담한 깊이에 까지 이르게 할 것인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저 세상에서 죄인들이 겪는 지극하고도 끝없는 참상에 비하면 극히 경미한 것에 불과할 것이었다. (우리 구주께서 칭하듯) 지옥의 저주는 죄인의 죄스러운 양심을 굳게 압박하여 말할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을 가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다(사 30:33).

2.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은 그 전통에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저희에게 쏟아질 것이다(23절). 하나님의 정죄하시는 심판은 화살처럼 빨리 날아서(시 64:7),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희망에 우쭐거리게 하는 먼 거리의 사람들에게도 이르는 것이다(시 21:8, 12). 그 심판의 화살들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날아오나 죽음에 이르는 부상을 입힌다. 하나님은 자기 과녁을 쏘아 맞추심에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왕상 22:34). 구체적 심판이 여기에 경고되어 있다.

(1) 기근 : "저들은 주림으로 사름을 당하며 그을릴 것이다."

(2) 역병과 다른 질병들 : 여기서는 "타는 더위와 독한 파멸" 이라고 지칭되어 있다.

(3) 짐승들로부터의 모욕 "야수의 이빨과 독사의 독" (24절).

(4) 전생 및 전쟁의 파멸적 결과(25절).

[1] 끊임없는 공포 "밖에 칼이 있을" 때는 "안에 공포" 가 있을 수 밖에 없는 법이다. "밖으로는 다툼이 있으며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도다" (고후 7:5).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물리치는 자들은 원수들에 대한 공포에 빠지는 것이 마땅하다.

[2] 만인의 죽음. 여호와의 칼이 모든 것을 황폐시키려 보냄을 받을 때에는 옥석 구분 없이 멸망시킬 것이다. 청년의 체력도, 처녀의 아름다움도, 젖먹이의 무죄함이나 흰 머리의 사람이 가지는 근엄함이나 허약함도, 그 칼이 이 사람 저 사람을 마구 삼킬 때는 그 칼로부터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전쟁은 그토록 심한 참화를 이르키며 특히 야수처럼 굶주리고 독사같이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 의해 전쟁이 추진될 때는 더욱 그렇게 된다(24절). 이리하여 죄악이 끼치는 해가 어떠한지 살펴보고 그것을 조롱하는 저 어리석은 자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라!

 

32:20 없음.

 

32:21 없음.

 

32:22 없음.

 

32:23 없음.

 

32:24 없음.

 

32:25 없음.

 

32:26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신명기 32:26-38)

받아 마땅한 분노와 복수의 무서운 경고가 길게 부연된 다음, 이 본문에서는 놀라우신 자비의 통지, 받을 자격없는 자들에 대한 과분한 자비의 통지를 대하게 된다. 이것은 심판을 넘어서는 기쁨이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며" 오히려 "돌이켜 살기" 를 원하신다는 것이 드러났다.

Ⅰ. 하나님은 당신의 영예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 저들을 "완전히 파멸치는" 않으실 것이다(26-28절).

1.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저들이 완전히 파멸되어야 마땅하며 "인간들에게서 저들의 기억조차 끊어져서" 이스라엘인의 이름이 아예 역사에서 자취를 감춰야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모략이 없는 백성" 이었기 때문이었으며(28절), 저희는 지금껏 존재한 백성중 가장 멍청하고 몰지각한 백성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도 그의 영광을 믿고자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친절을 맛보고 그것으로 살아 왔으면서도 그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을 버리며 그러한 율법과 언약을 물리치고 쓰레기통 같은 헛된 잡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진실로 "저희 안에 지식이 없도다" 라고 말할 수 있다.

2. 하나님이 저희를 멸망시키시고 저들에 대한 기억을 도말시키시기란 용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저희 중 대다수가 칼에 의해 절단될 때, 그 나머지 무리는 지구상 멀고도 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구석으로 흩어질 것이며 더 이상 그들의 소식이 들리지 않을 곳으로 흩어질 것이라 했다. 그 일은 실행되었다(겔 5:12 참조), 하나님은 가장 굳은 요새를 쌓아 잘 방어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진멸시키실 수 있으며, 가장 잘 결속된 자들도 분산시킬 수 있으시고, 가장 높임을 받던 이름들이라 하더라도 영원한 망각 속에 매장시키실 수 있다.

3. 정의는 그것을 요구하였다. "네가 저들을 흩으리라고 내가 말하였노라." 저들 스스로를 자기의 하나님과 단절시키는 자들은 마침내 지구상에서 절단되는게 합당한 일이다. 어찌하여 저들이 행적에 따라 처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4. 하나님의 지혜는 저들의 원수의 오만 불손함을 헤아려 보시나니, 하나님과 그토록 친근하였고 하나님께서 그처럼 놀라운 일들을 베풀어 주셨던 백성이 몰락하매 하나님을 비웃고 자기들이 이스라엘을 이기고 승리 하였으므로 하나님까지 이긴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바로 그 원수들의 교만이 생긴다. "그 대적들이 말하되 우리 수단이 높도다 하리로다" (27절). 실상 하나님께서 친히 편들어 싸와 주셨던 백성에게는 저들의 수단이 너무나 높았던(교만했던) 것이다. 저들은 "여호와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민족의 거짓 신들 모양으로 허약하며 무능하여 쉽사리 짓밟을 수 있는 분인양 착각하여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자기들이 그 일을 해 낸 것으로 상상할 것이다.

5. 이로써 살피건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 남은 무리를 아끼시고 저 무가치한 백성을 완전 파탄에서 구하시려고 하신다. "내가 그 대적의 분노를 염려하노라." 이 말은 사람의 어법을 따른 표현이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의 분노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나 이 문제에 있어서는 사람을 두려워 하시는 듯이 행동 하셨다는 사실이다. 여호수아나(수 7:9)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염려하던 소수의 선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어느 예보다 이 경우에서는 그 원수의 분노를 두려워 하였다. 저희가 그 점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모세가 그점을 탄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자신이 친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애굽인들이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하나님의 법궤와 그의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이름을 역사" 하실 것이며, 결코 당신의 이름이 모독되어 더렵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으시리라는 사실로 위안을 얻으라! 아무리 우리는 치욕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할지언정,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Ⅱ. 하나님은 저들의 복지를 염려하사 저희의 돌이킴을 간절히 소원하신다. 또한 그를 위하여 저희 종말에 대한 자신들의 진지한 고려를 촉구하신다(29절).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비록 하나님께서 저희가 우매하고 지식이 없는 백성임을 공포 하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슬기있는 백성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신다. 즉 "오! 저들안에 이 같은 마음이 있었으면" (5:29)하고 바라신 것이나, "너희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가 언제 지혜롭게 되겠느냐?(시 94:8)고 하신 말씀대로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스스로 멸망하는 것을 보시기를 원치 않으시며, 저희가 돌이키어 스스로를 돕기를 원하신다. 만약 저희가 하고자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저희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2. 종말이나 닥쳐 올 미래의 상태를 신중히 고려하는 일은, 매우 지혜로운 일이며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저희 백성의 후일에 대해 예고하신 바가 상세히 표현하고 있으나, 그 말씀의 의미는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이해하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생명의 종말과 영혼의 미래상태, 죽음이 감각의 세계에서 영혼의 세계로 우리를 옮겨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죽음은 우리의 시험과 시련 상태의 최종 시기이며, 보상과 응보가 있는 불변하는 상태로 들어감을 뜻한다.

(2) 죄악의 종말과 또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는 자들의 미래모습. 행복을 소중히 여기던 자들은 그 행복을 잃게 될 것이요. 틀림없이 불행에 빠져 들어가고 말 것이니, 그들이 여전히 "자기 범죄 가운데서 계속 행한다면 그 결국에는 어찌 하려느냐?" (렘 5:31). 예루살렘이 이것을 잊어 버렸으므로 "놀랍게도 낮아졌다" (애 1:9).

Ⅲ. 하나님은 당신께서 저희를 완전히 물리치시지 않는 이유로써 이전에 저희에게 행하셨던 기사와 이적을 회상 시키신다. 이것은 30, 31절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이 보이는 바 "저들이 몇 번이나 그러했듯이, 어떻게 한 이스라엘인을 일천 가나안인들도 감당하지 못했던가? 모든 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저희를 위해 싸와 주셨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는 이사야 63장 10절, 11절의 말씀과 부합하는 것이다. 그가 "저희 원수로 변하사" 저희 죄악으로 인하여 "저희와 싸우고자" 하셨을 때, 그는 옛적의 날들을 기억하시고 이르시기를 "저들을 바다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가 어디 계시뇨?" 하신다. 그리하여 그의 손이 깨어 일어나 옛적에와 같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신다" (시 138:7).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자기들이 의지하던 반석, 곧 자기들의 우상에 의하여 팔려가는 신세가 된 적이 있다. 우상들은 그들을 도울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배신하였으니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도살자에게 끌려가는 양과 같이 그들의 입을 막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수들 스스로 저희 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는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 하

였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인 연고라" (32,33절). 이것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의미하는 틀림없으니 저들은 그 멸망이 무르익어 저들의 불의의 분량이 가득 찼으므로 이스라엘의 칼 앞에 그렇게도 쉽사리 엎드려졌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그의 진노의 막대기" 로 사용하시는 경우에(사 10:5, 6) 그 대적들이 이스라엘보다 우세하다는 진기한 사실로도 이 귀절들은 이해될 수 있다. 만약 이스라엘의 반석이 저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셨다면(이사야 30장 17절의 "한 사람의 꾸짖음에 일천인이 도망할 것이라" 는 말씀에서 처럼 애굽의 도움을 신뢰하는 자들을 쳐서 경고된 대로) 어찌 한 사람의 가나안인이 일천 이스라엘인들을 쫓을 것인가? 블레셋인들이 저들의 승리를 다곤신에게 돌렸듯이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자기들의 세력을 아무리 저들의 신들에게 돌린다고 할지라도(합 1:11), 원수들의 반석이 이스라엘의 반석보다 우세할 수가 없었음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곧 저들의 대적들을 진압하실 터였으나(시 81:14), 이스라엘의 사악함이 저들 자신을 택함받은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 인 연고이다(32,33절). 저들은 택함받은 포도나무로서 심어졌으니, 그 종자는 온전히 의로운 씨앗이었으되, 죄악으로 인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타락한 식물" 로 되어 버려서(렘 2:21), 소돔의 불의를 닮은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능가하였다(겔 16:48).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자기의 "포도원" 이라, "기뻐하시는 나무" 라 칭하셨다(사 5:7). 그러나 저들의 열매는 첫째로 "쓸개의 쓴 것 같이" 하나님께는 불쾌하고 역겨운 것이었으며, 둘째로 다른 자에게는 "독사의 잔악한 독처럼" 매우 해롭고 악한 것이었다.

이 귀절을 저들의 징벌로 이해하는 자도 있다. 저들의 죄악이 "종내에는 참혹할 것이요(삼하 2:26)." "뱀의 무는 것 같고 독사의 찌름같은 것" 이다(욥 20:14; 잠 23:32).

Ⅳ.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박해하고 압제하여 온 자들을 결국에 가서 멸망시키시기로 작정하신다. 떨림의 잔이 한순 돌아 갈 때는 바벨론 왕이 마침내 그것을 서원할 것이다(렘 25:26; 사 51:22, 23 참조). 심판의 날이 이르고 있으니 이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였으며 죄인과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서 끝날 것이다(벧전 4:17, 18).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면 교회의 원수들을 낮추실 것이다.

1. 하나님은 저희의 사악함을 불쾌히 여기시사 그 완악함을 눈여겨 보시고 그 셈을 치르신다(34,35절)." 이스라엘에 대한 저희의 앙심깊은 분노가 내 곳간에 쌓여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이후에 복수가 내게 속한다는 사실이 나타나게 될 때에는 저희에 대한 계산이 치러지리라." 혹자는 이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특히 선지자들에 대한 저들의 박해라고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저희를 치는 모든 범죄가 곳간에 쌓여져 있는 연고이다(마 23:35). 그러나 그것은 악인의 사악함이 모두 하나님 곳간에 쌓여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1) 그는 그것을 지켜 보신다(시 90:8). 그는 그 포도나무가 무엇이며 그 포도가 어떠한지 아시고 그 마음의 기질이 어떠하며 생활의 행동이 어떤지도 아신다.

(2) 그는 그 기록을 그 자신의 전지하심 속에와 죄인의 양심속에 간직 시키신다. 그리고 이는 "그의 보물들 사이에 봉하여져 있는데" 이것은 안전과 비밀을 의미한다. 이 책들은 마지막날까지에는 잃지도 아니하며 펼칠 수도 없다(호 13:12 참조).

(3) 하나님은 종종 죄악의 징벌을 오랫동안 지체 하신다. 그것은 그릇이 찰 때까지 하나님의 인내의 날이 끝날 때까지 저장된다(욥 21:28-30 참조).

(4) 셈의 날이 이를 것인즉 그 때는 죄와 분노의 모든 보물들이 붕괴되고 죄인들의 죄악이 정녕 저들을 찾아낼 것이다.

[1] 그 일은 확실히 이루어 질 것이니 여호와는 "보수가 그에게 속하는 하나님" 이신 까닭이며 그는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갚으실 것이다(사 59:18). 사도는 그리스도의 신앙에 반역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엄중하심을 나타내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히 10:30).

[2] 그것은 정한 때, 곧 가장 적절한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아니 그것은 곧 성취될 것이다. "저들의 재난의 날이 가까이 있다." 비록 지체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물쭈물하지 않으며 자지도 않을 것이고 성급히 행할 것이다. 한 시간 안에 바빌론의 심판이 올 것이다.

2. 비록 저들이 하나님을 크게 격노 시켰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과 관계를 가진 채 있었고, 저들의 비참이 그의 자비를 향해 호소한지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백성을 측은히 여기시고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36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실 것이라." 즉 그가 자기 백성을 위해 그 대적들을 정죄하시며 저

들의 주장을 변호하시고 "자기 종들을 인하여 스스로 후회하시사" 저희가 오래도록 신음하였던 억압의 멍에를 꺾어 버리실 것이다. "그가 저희 힘이 진하였음을 보시는 때" 자기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길을 바꾸사, 그가 저희를 대적하여 싸우셨던 거와 같이, 저희를 위해서 싸우실 터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희 죄악을 인하여 저희를 파셨던 그 자들의 수중에서 사사들을 통해 건져 내셨던 사실과(삿 2:11-18)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슬픔을 당하였던가 하는 사실(삿 10:16) 곧 저희가 더 이상 궁경에 처하지 못할 어려움 속으로 전락하였을 때의 하나님의 비통하심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은 저희가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지경이었을 때 저희를 도우셨다. 왜냐하면 그 곳에는 "갇힌 자나 남은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저희가 갇혀 있던 성읍이나 마을에는 거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며 저희가 이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의 산재한 집들에는 거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자기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때는 사태가 저희에게 가장 악화될 때라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신앙을 시험하시고 사태를 극도로 악화 시키심으로써, 저희 기도를 불러 일으키시며 그런 후에야 자기 권능을 나타내신다. 그리하여 그 대적들의 얼굴을 치욕으로 채우시고 "타는 불에서 나뭇가지를 건져 내듯" 그 백성들을 궁지에서 구출해 내심으로써 저희 마음을 크나큰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신다. 그리하여 우상들에게는 치욕과 경멸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37,38절).

3.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섬겼던 신들이 그들을 위해 줄 수 없었던 일을 자기는 그 백성에게 해 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들에게 희생을 바치는 데 아끼지 아니하였으며 저희 신들이 먹는 것으로 생각하여 저희 제단 위에 희생의 고기와 전제의 술을 바치고 그것을 먹고 마시며 즐겼다. 이에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그토록 큰 대가를 지불하면서 아첨하였던 이 신들이 너희의 곤경을 보고 도와 주며 그들을 섬기느나 바쳤던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겠느냐? 너희는 가서 너희가 섬겼던 신들을 데려오고 그들로 너희를 구출하게 하라" (삿 10:14). 이것은 저들로 하여금 저희의 우행, 즉 저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잡신들에 비해 하나님은 그들을 도와 주실 수가 있는 분인데도 그를 버린 저희의 어리석음을 확실히 깨닫게 해서 저희가 회개하고 구원받을 자격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음부가 그 연애하는 자들을 따라 가다가 그들을 미치지 못하여, 자기 우상들에게 기도 할지라도 그들로부터 아무런 자비를 얻지 못하게 될 때에는, 그 여자는 말한것이다. "너는 가서 나의 첫 남편에게로 돌아 가겠다" 고(호 2:7; 사 16:12, 렘 2:27, 28 참조).

(2) 하나님께서는 자기 대적들을 쳐서 이 일을 행하실 터이나 저희가 섬기던 신들이 저희를 이에서 구하지 못할 것이다. 산헤립과 느부가넷살이 대담하게도, 당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도전하였으나(사 37:10; 단 3:15), 그는 그 대적들로 혼란케 하여 그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기들의 경배자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벨과 느보에게 도전하였다. 그 신들은 그들을 구원하고자 일어나서 저희를 도우며 저희 보호가 되고자 하였다(사 47:12, 13). 그러나 저희는 그들을 돕기는 고사하고 저희 자신들이 저들의 오로지 형상에 불과했다. "잡혀 갔던 것이다" (사 46:1, 2). 하나님 이외의 반석을 신뢰하는 자들은 그들의 한란날에 모래 위에 얹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저희가 가장 궁핍할 때에 실패할 것이다.

 

32:27 없음.

 

32:28 없음.

 

32:29 없음.

 

32:30 없음.

 

32:31 없음.

 

32:32 없음.

 

32:33 없음.

 

32:34 없음.

 

32:35 없음.

 

32:36 없음.

 

32:37 없음.

 

32:38 없음.

 

32:39

남은 자의 구원 약속(신명기 32:39-43)

이 노래의 결론은 세 가지 일을 말하고 있다.

Ⅰ. 하나님께 대한 영광(39절).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이라는 전반적 사실을 알라. 우상 숭배자들의 파멸과 우상들은 저희를 도우는 데 무력한 것들이란 사실에서 이것을 배우라."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 점에서 영광을 요구하신다.

1. 자존자라는 영광, 나 곧 내가 그이시라. 이처럼 모세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는 하나님의 바로 그 이름으로 이 노래의 결론을 내린다. "즉 나는 스스스로 있는 자니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자요, 미래에도 있을 자이며, 또 나는 내가 있으리라고 약속하였던 자이고, 있으리라고 경고하였었던 자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자들이나 다 나는 내 말에 신실한 자임을 알게 되리라." 웃질리드(Uzzielides)의 탈굼은 이 귀절을 이렇게 주석하고 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려고 스스로 계시 하시게 될 때에는 그가 자기의 모든 백성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내가 현재에도 있고 이제까지도 존재해 온 자이며 장차도 있을 자임을 알라" 고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계시록 1장 8절에서 "나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으며 장차올 자라" 고 요한에게 말씀하신 그분께 잘 적용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나 곧 내가 그니라" 는 이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서 구출하시리라는 소망을 저희가 가지도록 격려하고 계신 이사야서에서 자주 나타남을 본다(사 41:4; 43:11, 13, 25; 46:4).

2. 유일무이한 주권의 영광.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나를 도울 자도 없으며 나에게 필적할 자도 없으리라" (사 63:10, 11 참조)

3. 절대적 통치권 즉 우주적 섭리의 영광.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나니" 즉 모든 궂은 일과 선한 것이 그의 섭리의 손길로 부터 발생하나니 그는 생명의 빛도 지으시고 사망의 어두움도 형성하신다(사 45:7; 애 3:37, 38). 또 그는 자기의 대적들을 죽이기도 하시고 상처도 입히시며 자기의 백성들은 낫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로부터 반역하고 자기를 거역하는 자들은 그의 심판으로 죽이기도 하시고 상하게도 하시나, 그들이 돌아와서 회개할 때에는 그들을 치료해 주시며 그의 자비와 은혜로 살리시는 것이다. 혹은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에 합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가 만든 모든 피조물과 그가 지은 모든 존재들을 처분할 수 있는 명명백백한 그의 권세를 의미한다. "그는 자기가 죽이고자 하는 자는 죽이실 것이며 자기가 살려 두고자 하는 자는 살리실 것이니" 그의 심판이 발동할 때에 그러하도다. 이처럼 그가 비록 죽을지라도 다시 살리실 것이니, 비록 저가 근심케 하시나 긍휼히 여기시리라(애 3:32), 비록 그가 찢으셨을지라도 우리를 낫게 하시리라(호 6:1, 2). 예루살렘 탈굼은 이 귀절을 이렇게 읽는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일 것이며, 죽은 자들은 저 세상에서 살릴 것이라." 유대 학자들 중, 어떤 사람은 죽음과 그 죽음 후의 생명 즉 영원한생명이 이 말씀들 가운데 암시되어 있다고 평한다.

4. 항거할 수 없는 권능. 즉 제어할 수 없는 권능의 영광. 내가 멸망시키기로 점찍은 자들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는 아무도 없도다." 하나님의 정의의 판결을 거스려 행해질 예외적 일이 있을 수 없듯이, 그의 권능의 집행에서 도피할 수 있는 묘안도 없다.

Ⅱ. 그 대적들에 대한 공포(40-42). 하나님을 증오하는 자에게는 참으로 두려움이 되는 것이니, 다른 잡신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의 율법에 고의로 불복종하여 고집하는 자들이나 그의 신실한 종들을 헐뜯거나 박해하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두려움이 임할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복수로 갚으실 자들이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들을 지배하시는 분으로 모시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원수들인 것이다. 저들을 꼭 알맞는 때에 경고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리어 충성할 수 있게 하려고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저들에게 나타난다.

1. 신의 선고가 맹세로 인준된다(40절). 그는 자기 거룩하심의 거소인 "하늘을 향하여 그의 손을 쳐 드신다." 이것은 맹세할 때 사용되는 옛적의 아주 의미 심장한 표시였다(창 14:22).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자신보다 더 크신 자가 없었으므로 자기 자신에 의하여, 또는 자기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신다. 하나님의 반드시 말씀과 맹세를 거스리는 자는 구제할 가망이 없을 만큼 비참한 자이다. 여호와께서는 죄인들이 계속하여 죄중에 빠져 있다면 저희의 죄악이 바로 저희의 멸망이 될 것이라고 서약하셨고, 그것을 후회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2. 그 집행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져 있다. "번쩍이는 칼이 갈아져 있다" (시 7:12 참조). 그것은 "하늘에서 족하게 마신" 칼이다(사 34:5). 칼이 갈리고 있는 동안에 죄인이 회개하고 자기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잠시 주어지는 것인데, 만약 그가 이것을 무시하면 그 상처를 더 깊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칼이 갈아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칼을 휘두를 손도 완전히 결판을 낼 결의를 가지고 심판에 임하시는 것이다.

3. 그 집행은 굉장히 무서울 것이다. 칼은 고기를 풍족히 삼킬 것이요, 화살은 흠뻑 피에 취할 것인즉, 전장에서 살해된 자와 포로들이 흘릴 피의 양은 굉장할 것이로되 인정 사정이 없을 것이며 오직 처참한 집행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가 보수를 시작하시면 끝장을 보실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도 그의 작업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비평학은 마지막에 붙은 귀절 "원수에 대한 복수를 시작할 때로부터" 에서 많은 괴로움을 겪는데, 위대한 석학 패트릭 주교는 예례미야 50장 35~37절에 나온대로 "대적들의 왕으로부터 종에 이르기까지" 라는 뜻으로 이 귀절을 해독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진노의 칼을 뽑으실 때에는 그 칼은 유혈의 역사를 행하며 그 피가 말 굴레에까지 닿도록 될 것이다(계 14:20).

Ⅲ. 자기 백성에게 대한 위로(43절). "너희 열방들은 주의 백성과 함께 기뻐하라" 그는 이 노래를 끝맺음예 있어 환희의 노래로 결론 짓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는 그 끝이 화평이 되는 남은 무리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즐거워 할 것이니 영원 무궁토록 즐거워할 것이다. 기쁜 일로서 세 가지가 언급되고 있다.

1. 교회 테두리(영역)의 확장. 사도 바울은 이 귀절의 첫 번째 말을 이방인들의 개종에 적용시키고 있다(롬 15:10). "이방인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 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들을 개종시키심에 있어 행하는 바를 보며, 그것이 저들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 하도록 하는 것임을 알라! 참다운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기쁨을 알도록 하며, 종교가 인간을 우울하게 만드느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만 저만한 잘못이 아니다.

2. 교회의 적대자들에게 대한 교회 논쟁의 복수. 그는 "자기 종들의 피" 에 대해 심문하실 것이며, 그 일이 당신께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가 나타날 것이다. 그 피를 흘린 자들에게는 저들이 취토록 피를 마시게 하실 것이다.

3. 자기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것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비축해 두신 자비. 그는 자기 땅과 백성, 즉 자기를 두려워하고 섬기는 모든 자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죄인들에게 어떤 심판이 가해질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무사할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이 점에서 함께 즐거워할지어다.

 

32:40 없음.

 

32:41 없음.

 

32:42 없음.

 

32:43 없음.

 

32:44

가나안이 금지된 모세(신명기 32:44-52)

Ⅰ. 이 노래는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엄숙히 전달되었다(44,45절). 모세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한도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말해 주었고, 그와 동시에 여호수아도 자기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의 다른 회중에게 이 노래를 전달했다. 저들의 두 통치자 즉 치리권을 인계하던 모세와 그것을 인수받던 여호수아 양자의 입에서 이같은 노래가 저들에게 전해진 뒤에도, 저희는 그 두 사람이 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저희의 지휘자가 비록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는 아무 변동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마찬가지로 저희가 만약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그들을 치는 증인이 되었을 것이다.

Ⅱ. 이 말씀들과 모세가 말한 모든 다른 유익한 말씀들을 저희가 유념하도록 하라는 간절한 유시. 모세는 이 모든 것을 얼마나 간절히 열망하였던가! 또 하나님의 말씀이 저희에게 깊고도 오래 지속되는 인상을 지울 수 있도록 그 얼마나 바랐던가! 그들이 언제 어느 때든지 이들 일들로 인해 실족하지 않도록 경건한 질투심으로 그들에 대해 그 얼마나 질투하였던가!

1. 그가 저희에게 훈계한 의무들은 다음과 같다.

(1) 그들 스스로 이 말들을 주의깊게 지키라는 것. "너희의 마음을 율법과 약속과 경고, 축복과 저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노래에 두라. 마음을 다하여 이 노래를 숙고하라. 그 영향으로 감동을 받도록 하고 네 의무에 열중하며 온 뜻과 마음을 다하여 그것에 집착하라."

(2) 이 일들을 저희 다음에 오는 후손들에게 충실하게 전달하도록 하는 일. "네 자녀에 대한 관심이 무엇이든, 그들에 대한 영향이 무엇이든, 이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라. 그리고 저들에게 명하여(네 조상 아브라함이 행하였듯이, 창 18:19)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저들이 준수하도록 하여라." 스스로 선량한 자들은 그 자녀들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선하기를 바랄 수 밖에 없고, 그 후손들이 그들 시대에 그 종교를 계속 보유하며 그런 내용의 상속이 단절되지 않기를 소원할 수 밖에 없다.

2. 그들이 종교를 자기 사업으로 삼고 그 안에서 오래 견디어 내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논법들은 다음과 같다.

(1) 그가 그들에게 훈시한 일들의 무한한 중요성(47절). "그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니 그것이 너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관심해도 좋은 일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그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라 생사가 달린 중차대한 일이다. 그것에 유의하라. 그리하면 네가 영원히 성공하리라. 그것을 무시하면 너희는 영원히 멸망하리라. 아! 사람들의 신앙이 자기들의 생명이며 나아가서는 자기 영혼의 생명이라는 것은 완전히 수긍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2) 그것이 저들에게 누리게 해 줄 무한한 이득. 이 일로 인하여 가나안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이 가나안 땅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들어가 살 것이라고 확약했던 바 영생에 대한 상징적 약속이다(마 19:17).

Ⅲ. 모세의 죽음에 관해 그에게 내리신 명령. 하나님께 대한 이 유명한 증거가 그의 증언을 성취한 이상, 그는 느보산에 올라가 죽어야 했다. 그리스도의 두 증인에 대한 예언에은 모세와 엘리야를 분명히 암시하는 말씀이 들어 있으며(계 11:6) 아마도 순교에 의해 그리스도의 두 증인이 제거됨은 모세나 엘리야의 옮기움에 못지 않게 영광스런 일이다. 바로 그 당일에 모세는 명령들을 받았다(48절). 모세가 자기 일을 끝마친 바에야 무엇 때문에 하루라도 더 오래 살고 싶겠는가? 그가 이전에는 요단강을 건널 수 있기를 빌었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흡족하여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1.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가 지은 죄를 상기시키는데, 이 범죄로 인하여 그가 가나안 복지에 들어감에서 제외됨을 입었으니(51절), 이는 그가 범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견책을 좀 더 참을성 있게 견딜 수 있도록 하며, 그 지각없는 말에 대한 슬픔을 회상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들 중에서 가장 선한자라도 그 스스로가 의식하고 있는 결점을 뉘우치면서 죽는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불쾌히 여기시는 일은 바로 이런 태만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자기가 마땅히 행해야 했던 대로"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했었고" 그가 그 때 받았던 명령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온당한 예절로써 처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2.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형 아론의 죽음을(50절) 상기시키심으로써 모세가 그 자신의 죽음을 더 친근히 여기고 무서워하지 않도록 하신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보다도 먼저 그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 간 친구들, 특히 우리의 맏형이시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면 여간 큰 격려가 되지 않는다.

3. 하나님은 모세를 높은 산으로 올려 보내사 거기서 가나안 땅을 조망하게 하시고 그곳에서 죽게 하신다(49,50절). 자기가 지은 죄를 기억하면 죽음이 두려울 터였으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가나안 복지의 광경은 그 죽음의 공포를 걷어가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화해되심을 나타내는 표징이었으며 비록 그의 죄로 인하여 그가 이 땅 위의 가나안에는 못들어 가게 막힘을 당하였을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더 좋은 복지에 들어갈 자격은 박탈하지 않으셨음을 그에게 보여주는 증좌였다. 모세는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 보았던 것이다. 믿음의 전망과 사망 건너편에 있는 영생의 소망을 잘 구축하고 있는 자들은(자기들이 지은 죄가 자기들을 고발하는 것을 기억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면 언제나 편안하게 안도감을 가지고 죽을 수가 있다.

 

32:45 없음.

 

32:46 없음.

 

32:47 없음.

 

32:48 없음.

 

32:49 없음.

 

32:50 없음.

 

32:51 없음.

 

32:52 없음.




































 


Articles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