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숭배자 처벌법(신명기 17:1-7)
Ⅰ. 어떤 제물이라도 흠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려서는 안 된다는 율법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 예배의 존엄성을 보존하기 위한 법이다(1절).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경고에 종종 부딪친다. 즉 "무릇 흠 있는 것 - 이런 제물은 꼴 불견이다 - 이거나 "얼른 보아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어떤 질병이나 신체적 결함 따위의 "악질 - 이런것은 더욱 꼴사나운 제물이니라 - 이 있는 것을 드리지 말라" 는 경고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 중에 최상의 존재이시다. 그러므로 그에게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한다. 그리고 구약 성서의 제물은 특별한 의미에서 더욱 그러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든 죄와 모든 죄의 모양에서 완전히 순결하여 "오직 흠없고 티없는 어린 양이신" (벧전 1:19)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유대교 후기에 가서는 그들이 바벨론 포로로 인하여 우상 숭배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눈 멀고 절고 병든 희생 제물을 드려(말 1:8)" 이 율법을 범함으로 인하여 불경을 저질렀던 것이다.
Ⅱ.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내릴 형벌에 관한 율법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 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사죄(死罪)가 되었다(13장). 여기에서는 유인당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아니한 죄로 나타나 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몸서리나는 율법들이 제정되었을 때야 그들이 그것을 엄청나게 큰 죄로 단정하는 그 죄의 두려움을 내세워 그들을 붙잡고 계시는 것이며 그렇지 아니하면 설득당하고 말 그 죄에서 그들을 방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야기시키는 이 율법도 그 죄를 막는 데는 효과가 없음이 입증됐다.
1. 이 율법이 비난하고 있는 바 다른 신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어떤 범죄인가? (3절) 해와 달과 별을 숭배하는 것은 가장 고대의 형태이며 가장 그럴 듯한 우상 숭배로 명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증한 것이거늘, 나무나 돌을 예배하고 혹은 비천하고 비열한 동물들의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더 한층 그러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1) 그런 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거듭거듭 금하셨다. 그러나 만일 거기에 대한 거역이 없었다면 이것은 그것으로 충분하였을 것이다(하나님의 예배는 그가 세우신 제도와 규례가 곧 우리의 규칙과 경고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예배하는 자들을 피조물들에게 종속되도록 명령하지는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것을 하라고 명하셨다면 그들은 마땅히 불평하고 비방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금하셨으므로 그들은 마땅이 이것을 권위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2)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악" 이라는 것이다(2절). 그것을 아무리 열심히 숨긴다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살피시며 그것이 아무리 묘하게 변명된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미워하신다. 그것은 그 자체가 엄청나게 가증한 죄악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모욕인 것이다.
(3) 그것은 계약의 위배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신 것은 그들은 오직 당신만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오직 그에게만 드려야 할 영광을 어떤 다른 신에게 바치게 될 때는 그 계약이 무효가 되며 모든 특권은 박탈되는 것이다. 다른 죄들은 모두 계명에 대한 위배이지만, 우상 숭배만은 계약에 대한 위배인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간음이다. 그래서 이것은 결혼의
유대를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4) 이것은 이스라엘 중에 있는 가증함이다(4절). 우상 숭배는 어떤 경우에도 나쁜 것이지만, 오직 참되시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의 특별한 배려로 축복받고 있는 백성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특별히 더 악한 죄악이 되는 것이다.
2. 그것의 심판은 무엇인가? 남자나 여자나 누구든 다른 신을 섬겼다는 어떤 정보나 혐의가 들어오면,
(1) 심문을 해야 한다(4절). 비록 처음에 사실이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더라도 후에 그것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만일 그것이 가히 밝혀지게 되면 그 때는 묵과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사실이 입증되지 않더라도 그것의 두려움을 그 지방에 나타내야 할 것이다.
(2) 증거를 세워야 한다(6절). 그 범죄가 얼마나 가증하고도 위태로운 것인가! 그러나 그들을 고발하는 충분한 증거가 적어도 두 사람의 증인에 의하여 입증되지 않는다면, 어떤 처벌도 내려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무죄한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생사의 문제에 관하여는 두 증인을 요구하는 율법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민 35:30) 읽었다. 이것은 마태복음 18장 16절에도 인용되고 있다.
3. 그 선고와 처형은 무엇인가? 우상 숭배자에게는 중한 처벌 즉 돌로 쳐 죽이는 그러한 중벌이 내렸는데, 그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불문하고 내려졌으며, 여자는 연약하다고 해서 용서되지 못하였던 것이다(5절). 형의 집행 장소는 성문이었는데 이는 범죄자에게 수치를 더하게 하고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공적으로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다. 다른 경우에서와 같이 이 경우에서도 증인들이 먼저 죄인에게 돌을 던져야 했다. 즉 그로 인하여 증인들은 자기들의 증언이 확실함을 서약하는 것이며, 만일 자신들의 증거가 거짓되다면 죄인의 피가 자기들에게 저주가 되어도 좋다는 서약인 것이다. 이 관습은 거짓 증거를 방지하는 데 유용할 수 있었다. 증거가 참이라면 그 증거는 악인의 죽음을 사실상으로 불러들여야 하는 것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범죄에 대하여 자기들의 증오를 입증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또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13:9), 그들 가운데서 악을 제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수행되고 처형이 완수되어야 했다.
재판관의 권위(신명기 17:8-13)
각 성읍에서 재판 법정을 설치하도록 지시 되었다(16:18). 그 법정들은 법에 따라서 형사 소송이나 민사 소송을 청취하고 판결할 권리를 부여받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 법정들은 여기에 제출된 문제들이 여기에서 종결되고 선고가 확정된 것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 때때로 어떤 사건은 하급 법정에 있는 판사들에게는 너무나 난해한 것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고등 법정에 있는 판사들 만큼 율법에 깊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 있으므로, 이런 사건은 상급 법정에 상고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었다. 그래서(우리 법적용어로 말해서) 그들은 특별평결(特別評決)을 구하고 판결을 내리기 전 조언을 가질 시간을 얻도록 해야 했다(8절). 즉 "네 성 중에서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이라고 했다. 이런 어려움을 인정하는 것이 재판관들에게 불명예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 그 문제들은 이런 것들이다. "서로 피를 흘린" 당사자 간의 문제 즉 피해자라고 외치는 자의 피와 살인의 혐의를 받고 있는 자의 피 사이의 문제, 그것도 그 사건이 고의적인 것이었든 우연이었든지에 대한 증거가 불확실할 때이든가, 혹은 "항변과 항변" 사이 말하자면 원고와 피고의 항변 내용이 다른 경우, 혹은 "구타와 구타 사이" 상호적인 폭행 행위 따위에서 그렇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경우에서 비록 증거가 명확하다 해도 그 율법이 가진 의미에서, 그리고 그 율법을 특수한 사건에 적용시킬 때 일어나는 의문점이 있을 때 그러하다.2. 이드로의 충언에 따라 이제까지는 모세 앞으로 가져왔던 이런 어려운 사건들은 모세가 죽고 나서는 어떤 형태이든 최상급 권력기관에 호소하게 되었었다. 상급 권력자로서는 어떤 한 사람의 사사(그러한 큰 소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옷니엘이나 드보라나 혹은 기드온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나 혹은 대제사장(그가 엘리와 같이 공무를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의 탁월함을 받았을 때)이나 혹은 이러한 명예를 감당할 만한 특정 사람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지 못했을 경우에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제사장들이란 물론 레위인들이겠지만)이었는데 이들은 성소에서 섬길 뿐 아니라 공회에 나가 하급 법정에서 올라오는 제소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들은 그들의 학식이나 경험에서 가장 적합한 자격을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확실한 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성령의 도움을 풍부히 받고 있는 자를 마땅히 생각되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9,11,12절). 그들은 그런 문제를 우림과 둠밈에 문의하도록 명령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백성 전체의 문제나 왕실의 공적인 문제와 관계된 경우에만 우림과 둠밈에 의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문제들의 경우는 치리를 맡아 있는 사람들의 지혜와 정직성에 맡겨져 있었고, 율법의 의미에 관한 그들의 해석을 복종하고 거기에 따라서 그들의 선고가 유효하게 집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재판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해도 도덕적 확실성을 제공했고 지식이 풍부하고 사려분별이 있으며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의 판단으로 간주되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 것을 가르치리라" (9절)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은 그들이 세운 그 민족의 최고 법정이 하나님의 제도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
3. 판사나 제사장이나 상급 회의에 의하여 확정된 선고는 사형을 선고 받은 당사자들이 순종해야 한다. 즉 "무릇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행하라" (10절). 또 "그들이 내게 고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11절). 더 높은 권세의 권위로 지시되고 행정부의 타당한 질서가 준행되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명령에 모든 사람이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백성의 안녕을 위하는 길임을 명심하자. 비록 한편 자신이 그 선고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했을지라도(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는 편파적이 되기 쉬운 것과 같이) 그 판결에 복종할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나 양심을 위해서 감수해야 하며 아무리 불쾌한 것이라도 거기에 따라서 견디거나 혹은 손해를 보고 또 지불할 것은 해야 된다. 그러나 만일 하급 법관이 고급 법정의 선고와 다르다고 하여 그 지시를 이행치 않고자 하든지 혹은 사사로운 개인이 그들의 선고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면 이러한 명령 불복종은 비록 그것이 극히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형에 처해야 되었다.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천자히 행치 아니하리라" (12,13절). 여기에서 다음의 사실을 살펴보자.
(1) 불순종의 악. 하나님이나 그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거역하고 반항하는 마음, 또는 그들을 멸시하거나 독선적인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반역과 완고함은 무당을 좇는 것이나 우상 숭배하는 것과 같다. 연약하고 부족한 데서 나오는 견해의 차이가 있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있고 또 용납될 수 있는 것이지만, 고의적으로 교만과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행하는 것(고대 번역들은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행정부에 대항하여 무기를 드는 것이 되는 것이다.
(2) 형벌의 의도, 즉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와 동일한 죄를 범치 않게 하기 위함이다. 혹자들은 형벌의 비참함을 보고 그 반역 죄의 극악성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그 범죄에 혐오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혹자들은 거기에 반대하여 생명을 빼앗기고 자기들 머리에 죄를 덮어 쓰기 보다는 차라리 그 선고에 동의함으로써 자신들의 못된 성품을 억제하여 자신의 안전을 구하려고 하듯이 이 율법으로부터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를 짓밟은 자들이 마땅히 생각할 수 있는 형벌의 크기를 말하고 있다(히 10:28, 29).
왕의 선택과 기준(신명기 17:14-20)
백성들에게 관한 율법이 나왔으니, 왕에 관한 율법이 나오는 것은 적합하다. 남을 지배하는 자들은 자신들도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어져 있는 율법들은,
Ⅰ. 그 나라의 유권자들이 왕을 선택할 때 지켜야 할 규칙들을 말해 주는 것이다(14,15절).
1. 여기에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백성들이 이웃 나라들에서 자기 민족의 위대함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은 왕의 영화와 권세라고 생각하고 왕을 세우기를 바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가정되어 있다. 그들이 왕을 세운다는 것은 자비로 약속된 것도 아니고 의무로 명령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그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허락을 받고 있다. 그들이 다른 민족들과 비슷하게 되기 위하여(하나님은 여러 면에서 그들을 다른 여러 민족들과 구별하셨지만) 욕망의 원칙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정규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되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것을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메시야의 왕국의 상징인 한 나라를 세움으로써 그것을 통해 당신의 경륜에 이바지하게 하려는 의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2. 그들은 선택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 위에 왕을 세우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미리 지시하신 바와 같이 행할 것이며(비록 그후 400년까지는 그런 일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또 다음의 사실과 같이 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 하나님께 문의하여 하나님이 택하시는 자를 왕으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왕들은 하나님의 대리인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에서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자기들 위에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고 한다면 마땅히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임명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예언자인 사무엘에게 청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후 다윗, 솔로몬, 여로보암, 예후, 그리고 다른 왕들이 그 예언자들에 의하여 선택되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이 율법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에는 이것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 "즉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느니라" (호 8:4).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만 하더라도 매사를 그대로 행해야 한다.
(2) 그들은 그들의 동맹을 강화할 수 있다는 구실로나 특별히 어떤 인물이 적합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타국인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방 왕이 들어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안정된 그들에게 반대되는 이상한 관습과 풍습을 소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왕은 "그들 형제들 중에서" 누가 되어야 했고 그래서 그로 하여금 우리의 뼈중의 뼈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히 2:14).
Ⅱ. 그 정부의 정당한 통치를 위해 선택된 왕에게 주어지는 율법이 있다.
1.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신앙에서 이탈케 하는 모든 것을 주의해서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귀, 명예, 그리고 향락 이 세 가지는 신앙에 있어 큰 방해꺼리이다(곧 육신의 욕망과 안목의 욕망과 이 생의 자랑이다). 높은 신분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대비해서 왕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경고를 받고 있다.(1) 말(馬)을 많이 둠으로써 명예를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16절). 말(위풍 당당한 동물)을 탄 사람은 보통 당나귀와 노새 뿐인 그 나라에서는 대단히 위대해 보였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자신의 말안장을 위해서, 그리고 마차를 위해서는 말들을 소유할 수 있었지만 종들을 말에 태워서는 안 되며(전 10:7) 자기 관리와 호위병들을 위해 많은 말을 소유해서도 안 되었으며(하나님이 그들의 왕일 때 그의 사사들은 나귀를 탔다. 삿 5:10; 12:14). 또한 그는 전쟁을 위해서도 말의 수를 늘여서도 안 되었으니 이는 그가 그 말의 힘에 너무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시 20:7; 33:17; 호 14:3). 여기에서 왕의 말을 많게 하지 말라고 하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오만불손하게 되는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애굽과 더 많이 상종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애굽은 가나안인에게 말을 공급했다. 왕상 10:28, 29). 즉 "너희는 그 길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대단히 물들기 쉬운 애굽의 우상 숭배에 감염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레 18:3). 우리는 우리가 죄에 빠질 위험이 많은 사업이나 교제는 주의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되돌아가서 안 된다면 애굽과 상거래를 해서도 안 된다. 솔로몬은 애굽과의 거래에서 유익을 얻지 못했다.
(2) 아내를 많이 두어 솔로몬이 그의 파멸의 원인이 된 것과 같이(왕상 11:1) 왕은 향략을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즉 그의 마음이 그들에게 집착하여 여러 가지 중대한 모든 일, 그리고 특히 경건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정에 탐익하는 일보다 신앙에 더 큰 적은 없는 것이다.
(3) 왕은 은과 금을 많게 하여 부를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된다. 적당한 재물은 그에게 허락되어 있다. 그리고 재물의 선한 절약은 그에게 금지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1] 그는 재물을 지나치게 많이 축적해서 자기 백성들을 궁핍게 해서는 안 되며(솔로몬이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되듯이, 왕상 12:14), 또 재물을 신뢰함으로써 자신을 기만하고 자기 마음을 그곳에만 두지 않도록(시 62:10) 해야 한다.
[2] 그는 자신을 위해 재물을 축적해서는 안 된다. 다윗은 은과 금을 많이 축적했으나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었지(대상 29:4) 자신이나 자기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2. 그는 주의깊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고, 그것을 자신의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부귀와 명예와 오락들보다 더 좋은 것이 되어야 하며, 많은 말과 많은 아내보다도 더 좋은 것이 되어야 하며, 수천 금보다도 더 귀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1)그는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보관하고 있는 율법서 원본에서 자신이 직접 사본을 베껴쓰지 않으면 안 된다(18절). 혹자들은 왕이 다만 이 신명기 책만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율법의 발췌서이고 레위기와 민수기에 있는 율법이 주로 예식적이고 제사장들에 관한 것인데 비해, 이 책의 교훈은 대개가 도덕적이고 재판법에 관한 것이며 왕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모세의 다섯권의 책 모두를 옮겨 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모두 율법서라고 불리워지고 또 그들의 종교의 원천으로 그것들은 모두 함께 보존되었던 것이다. 이제
[1] 비록 왕이 자기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대단히 훌륭한 사본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그것 외에 그 자신이 베낀 율법서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본들은 항상 사용함으로써 낡게 되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는 치세(治世)를 시작하기 위해 새 사본을 가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2] 왕의 주의에는 왕이 이 사본을 베끼기 위해 고용할 만한 서기관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아마도 왕보다도 그들이 더 잘 기록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율법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종교의 행위를 결코 경멸하지 않기 위해, 또 그 일과 그 연구에 자신을 익숙하게 하고 특히 그것을 통해 율법의 모든 부분에 대하여 특별한 지식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그것을 새겨둘 수 있기 위하여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친히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성경이나 양서에서 그리고 우리가 듣는 설교에서 우리에게 가장 마음에 들고 또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기록해 두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대단히 유용한 일이다. 가려쓸 줄 아는 붓은 기억의 부족을 채워주고 선한 주인에게 새로운 것과 오래된 물건으로 창고를 가득 채워주는 일을 해 줄 것이다.
[3] 그가 이전에 율법을 베끼는 일을 다 못했다고 하면 왕좌에 앉아서라도 그것을 다해야 한다. 그가 직무를 시작할 때 그는 무엇보다 먼저 이 일을 행해야 한다. 왕위에 오른 그는 분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내 외에 대한 국사가 그의 시간과 생각을 거의 빼앗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율법의 사본을 자기가 직접 필기해야 한다. 일에 분주하다는 핑계로 그 자신의 신앙을 소홀히 하지 말자. 또한 나라의 요직에 앉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저희를 위해 만가지로 기록해 준 율법" (호 8:12)을 결코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업신여기지 않도록 하자.
(2) 그 자신이 기록한 성경을 소유한다고 해서 그것을 골방에 보관해 두는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야 한다(19절). 성경을 소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되, 매일의 의무와 필요성이 요구하는 대로 그것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의 영혼은 성서가 주는 만나의 양식을 먹지 않으면 안 되며 만일 소화만 잘 된다면 그것은 우리 영혼에 참된 자양분이 되고 힘이 될 것이다. 육신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음식의 혜택을 받고 있듯이, 만일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면" (시 1:2) 그 말씀으로 인하여 영혼이 그와 같이 혜택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일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결코 성서 이상의 것을 배우지 못할 것이며, 오직 지식과 사랑이 완전하게 되는 그 세계가 올 때까지 성서를 사용할 기회는 끊임없이 가지게 될 것이다.
(3) 그가 쓰고 읽는다해도 만일 그가 자기가 쓰고 읽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19,20절).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사색의 주제로 대하도록 된 것이 아니고 명령하는 규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왕으로 하여금
[1] 자기를 다스리도록 해야 할 신앙의 권세와 그것이 자기에게 주는 영향을 알게 하자.
첫째로, 그것은 왕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존경하고 경외케 해 줄 것이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며(아무리 학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끊임없이 배워야 하듯이), 자기가 그만큼 높은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은 자기보다 높이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자기 신하들이 자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는 훨씬 더 하나님을 왕으로서 두려워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둘째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에 부단히 순종하고 준행케 한다. 이것은 앞에서 가진 두려움의 결과로서 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율법을 이행하도록 돌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비천한 종과 같이 그것을 행하고 자기 아랫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로서 행해야 한다. 그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 을 지켜야 한다[그는 custos utriusque tabulae - 곧 두(법)판을 지키는 자이다].
세째로, 그것은 왕을 겸손하게 해 줄 것이다. 아무리 그가 출세하여 높아진다해도, 그로 하여금 마음을 낮추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케 함으로써 그 형제들 위에 교만케" 하지 않는다. 그로 하여금 자기가 그들보다 더 위대하고 더 훌륭한 모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보다 더 선하다고 스스로 속이지 않게 하라. 오히려 그는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할 하나님의 일꾼" 이란 것을 상기케 하라(왕은 major singulis, minor universis- 즉 각 개인 보다는 크지만 전체보다는 작은 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를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실수에서 막아줄 것이다(양 극에는 어느 편이든지 잘못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또 자신의 직무에 있어서 모든 일들을 함에 그를 바르게 이끌어 줄 것이다.
[2] 그로 하여금 그의 종교가 그에게 주는 이득이 무엇인지 알게 하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확실히 이 세상에서 거기에 대한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는 자기 왕국의 모든 부와 권력에서 얻는 혜택보다 종교로 말미암아 얻는 혜택이 더 클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그 본인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그가 왕위에 있는 날수가 길리라." 우리는 유다의 열왕들의 역사 속에서, 요시야의 때와 같이 백성들의 형벌 때문에 하나님께서 왕위의 날수를 짧게 한 경우 이외는 대개가 선한 통치자의 왕위는 오랜 수명을 가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로 그의 가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그의 자녀들이 역시 번창할 것이다. 자손에게 신앙을 물려주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축복을 상속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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