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유물을 버리라(신명기 12:1-4)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오직 한 분 뿐이라는 위대한 근원적인 진리에서 하나님은 예배를 받아야 하며 그 분만이 받아야 하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 앞에 다른 신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근본적인 율법들이 나온다. 즉 이것이 첫째 계명이요, 둘째 계명은 그것을 보호하는 수비이며 그것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이다. 거짓 신들로 향하는 반역을 막기 위하여 거짓 신들을 예배하는 그런 방법이나 태도로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고, 또 우리가 예배의 타당한 대상에 집착하기 위하여 제정된 예배의 규정을 이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세는 제 2계명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부연하고 있다. 본 장과 다음에 나오는 네 장에 있는 내용은 대부분이 이 문제에 관련된 것이다. "그들이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 는 이러하다.
1. 그들이 가나안의 주인이 된 그들의 휴식과 번영의 날에 지킬 것들이다.우리는 우리의 종교가 우리의 교역의 세월에서만 우리의 일이 된다든가 은밀한 장소에서의 우리의 유흥으로 또 괴로움에서 위로가 되기 위해서만 제정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 우리가 좋은 땅을 소유하게 될 때 더우기 광야에서는 물론, 가나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가 어릴 때는 물론 장성하여서도, 또 우리가 그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때는 물론 일로 분주할 때도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지켜야 한다.
2.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야 할 것들이다. 우리가 여기서 시련의 상태에 있는 동안 순종을 계속하고 마지막까지 결코 우리의 의무를 버리거나 선한 일에 지쳐서는 안 된다.Ⅰ. 그들은 여기서 가나안들이 자기들의 우상의 신으로 섬기던 모든 것들을 폐지하고 근절해야 한다(2,3절). 여기에는 우상 전당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을 혹자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성막은 종교적 사용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주거였고 그것으로부터 전당들이 그들의 기원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견해를 가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용되어 오고 이제 파괴될 장소들은 그들의 예배를 위해 높은 산이나 작은 산들 위에(마치 높은
지대가 그들의 예배를 높이 들어 올리기에 유익한 것처럼) 그리고 유쾌함이나 장엄함을 주기 때문에 푸른 나무대로 터를 잡고 있었다. 마음을 안일하게 하고 경건케 하며 또 움추리게 하고 차분히 가라앉게 하는 곳은 어디든지 예배 장소에 합당한 곳으로 생각되었다. 엄숙하게 그늘진 곳과 숲이 적막함은 오늘날도 명상을 위해 은둔하는 자들에게 애호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은둔이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에게 준 결과는 그들이 예배하는 일을 빛 가운데 내어 놓을 수 없는 어둠의 일을 은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원주민에 의하여 그들의 신으로 섬길 때 사용된 제단과 주상들과 신상들과 함께 모두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모든 이름은 망각에 묻혀야 하고 존경으로 기억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기억되지 않도록 해야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의 사실들을 고려해야 했다.
1. 그들의 땅의 명성. 이와 같이 더러워진 땅을 성소로 불리지 않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수치로 아는 물건들처럼 이 모든 분노의 더미들은 모두 제거되게 하라.2. 그들의 종교의 안전. 사려 분별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특히 퇴폐한 시대에 있어서 그것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도 남기지 않게 하라. 이러한 유해의 본거지들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물건들처럼 멸절되게 하라. 그는 이러한 지시를 하고 예배에 관계되는 규례를 말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선한 것에 대한 확실한 접촉이 있을 수 있기 전에 악한 것에 대한 혐오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롬 12:9).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과 장소 위에 세워져야 하되 마귀의 나라를 멸망시킨 폐허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들은 공존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Ⅱ.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의 제식과 관례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로 보충시켜서는 안 된다. 아니, 그것을 미화하고 개선한다는 구실은 붙여서도 안 된다. "너희는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그처럼 행하지 말라" (4절). 말하자면 "너희는 하나님께 높은 산이나 낮은 산들위에서 제물을 드리고 주상을 세우고 숲을 기르고 신상들을 세움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 너희는 사치스러운 공상을 너희의 예배에 끌어들여서는 안 되며 유쾌한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그는 모든 신들 위에 계시며 다른 신들이 예배받는 것과 같이 예배받지 아니할 것이다."
지정된 곳에서만 제사를(신명기 12:5-32)
모세의 전 율법 중에서 여기 만큼 강하게 강조하고 마음 속에 뿌리박게 하는 특별한 교훈은 없다(내가 기억한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모두 성막 뜰에 세워진 하나의 제단에 그들의 희생 제물을 모두 가져와서 거기서 그들의 모든 종교 의식을 이행하도록 해야했다. 도덕적 예배에 대해서는 지금과 같이 그들이 자기들의 여러 회당에서 예배드리듯이 그때도 의심할 바 없이 어느 곳에서든지 기도할 수 있었다. 이것을 행하라는 명령과 그 반대의 금지가 여기에서는 우리가 자녀들을 가르칠 때처럼 거듭거듭 되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에는 쓸데없는 반복은 없다고 확신한다. 여기에서 이 모든 강조가 거듭되는 이유는
1. 우상 숭배와 미신,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유혹에 의하여 꾀임에 빠질 위험성으로 기울어지는 그 백성의 심중에 있는 이상스런 경향성 때문이다.2. 이 임무의 수행은 그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임으로써 하나의 방법과 하나의 마음을 지속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그들 예배에 부패한 관습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그들 사이에 통일성과 형제의 사랑을 보존하는 데 크게 유용하기 때문이다.
3. 이 임무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라" (딤전 2:5). 우리가 함께 발견하는 이 두 가지 큰 진리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증거를 가지고 한 장소를 굳게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신성의 통일성의 개념을 지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비록 그들이 확실하게 식별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과 그와 교통하는 길은 오직 한 길 즉 메시야 안에서 그리고 메시야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장의 훈시를 타당한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Ⅰ. 여기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나안에 "안정하여"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안식을 주사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 하나님은 그들의 단일성의 중심이 되게하시고 그들의 모든 제물을 그리로 가져가게 하실 어떤 장소를 택하실 것이 약속되어 있다(10,11절). 다음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만일 그들이 한 장소에 얽매이어야 된다면, 그들은 그 장소에 관하여 명백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복음 아래 계신 그리스도께서 일정한 장소를 택하시어 로마 제국이 자부했던 그러한 권세의 자리를 만들려고 의도했다면, 우리는 그 지정된 장소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되었을 것이다.2. 하나님은 그 부족들이 자기들 지방 가운데 그것을 두게 함으로써 오는 세속적인 이득을 얻으려고 서로 다투는 일이 없게 하기위해 그들에게 장소의 선택권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세주의 내림을 의도하시고 거룩한 규례의 제정을 하시듯이 그 선택권은 자기 자신이 가지셨다.
3. 그는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기 위해(11:29) 그리심산과 에발산을 지적하신 때와 같이 당장에 그 장소를 지적하시지 아니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그 이상의 지시와 모세가 떠난 후 신의 지도를 그들이 기대하게 되기 위하여 그때까지 그 일 행하심을 보류해 두신다. 하나님이 선택할 장소는 당신의 이름을 두시고 즉 당신의 것으로 불리어지는 곳, 그의 영광이 머무는 곳,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현현하시고 사람들이 자기들 이름으로 하는 것과 같이 자신을 알게 할 수 있는곳, 당신의 이름이 찬양을 받고 높이 들리는 그런 장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가 법증을 지키시고 당신을 존경으로 찾는 자들에 의하여 찾아지는 그곳이 그의 거처가 될 것이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였고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는 곳이었으며 그의 거처였다. 그 안에는 율법판이 들어 있었다. 즉 "그의 입에서 나오는 율법" 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오는 은총을 받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법궤를 두실 장소를 제일 먼저 선택하신 곳이 실로였다. 그러나 그후 그곳은 죄를 지음으로 인하여 그 영광을 잃고 말았다. 우리는 길르앗 - 여아림과 다른 장소에서 법궤를 보게 된다. 그러나 마침내 다윗 때에 그것은 예루살렘에 안착하였고 하나님은 다른 어떤 장소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보다 더 명백히 솔로몬의 성전에 대하여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다" (대하 7:12)라고 말씀하셨다(대하 6:5 과 비교해 보라). 이제 복음 아래서 우리는 황금을 신성하게 하는 성전도 없고 예물을 신성하게 하는 제단도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뿐이다. 예배의 장소에 관하여 예언자들은 영적인 "분향에 드려지는 곳은 어디나" (말 1:11) - 우리의 구주는 이 산이나 예루살렘도 아니고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
자들은 영접되리라고 선언하셨다(요 4:23).
Ⅱ. 그들은 모든 그들의 번제와 희생 제물을 하나님이 택하실 이 장소로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6절 그리고 다시 11).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것을 그리로 가져오라." 그리고 "그 곳에서 너는 번제를 드리고" (14절), 그리고 "그 고기와 피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에 드릴 것이요" (27절). 여기서 그들의 희생 제물이라고 불리는 화목제에 대해서 그들이 고기는 먹을 수 있으나 피는 제단에 부어야 했다. 여기에서 복종과 존경의 자연적인 표현으로서 그들에게 있는 어떤 본래적인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을 위한 제물과 헌물은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고 받지도 않으신다는 교훈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제물이 열납된 것은, 순전히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단에서 연유된 공로에 의하여서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어느 곳에 있든지 매일 기도와 찬양을 드려야 하며, 이것이 훨씬 더 요긴하고 가치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경건한 이스라엘인은 비록 그가 몇 달 동안 내내 제단에 제물을 바칠 기회를 못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와 교통하며 그로부터 자비를 얻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크리스챤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의 공로에서만 수납되기를 바라고 모든 우리의 영적 제물을 하나님께서 드려야 하는 의무를 예시했다(벧전 2:5).
Ⅲ. 그들은 하나님께 바치려는 제물은 제단으로 가져와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과 자기들이 교통함을 보여주는 표시로서 먹고 마시는 모든 식물(食物)도 율법이 지정한 장소로 가져와야 했다(6절). 그들의 "십일조와 손의 거제", 곧 그들의 처음난 열매, 그들의 서원에 그리고 "낙헌 예물" 과 첫 태생들, 또 그들 자신들이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의하여 종교적 목적으로 쓰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선택하실 그 장소로 가져와야 했다. 즉 그 왕국의 모든 지방에서 나오는 왕위의 모든 세입이 국고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손이 수고하는 모든 것에 복주심을 인하여 즐거워하라" (7월). 여기에서 몇 가지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행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행한 일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과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이익이 된다는 사실이다" (12절). 하나님께 바치는 자들은 그 분 앞에서 즐거이 먹고 그들의 희생물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즉 그는 우리와 더불어 먹고 우리는 그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신앙의 증가로 말미암아 신앙의 정열에 활기를 줌으로써 은혜스러운 관습과 결심을 확고히 함으로 우리 자신의 품성을 높이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높이고 향상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이 양육되는 것이다.2. 하나님을 위한 일은 거룩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먹고 즐거워" 할지니라(7절 그리고 다시 12절과 18절).
(1)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해야 한다(12절). 즉 "눈물로 하나님의 제단을 가리우는" 자들보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자들은 없다(말 2:13). 우리의 일터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삼으실 우리가 섬기는 주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 생각하여 보라. 신앙의 봉사가 그들에게 하나의 고역이나 힘든 일이 되지 않고 즐거움이 되기 위하여 어린 아이들과 노비들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
(2)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데서 발견한 그 기쁨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들을 감동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그들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주심을 인하여 기뻐하여야 한다(7절). 종교적인 업무에서 그들이 가지는 어떤 위안을 그들의 평상의 일로도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영혼의 강건함을 얻어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충심과 기쁨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 안에서 가지는 이러한 경건한 기쁨은 우리가 영원히 기뻐할 것이며 공허하고 육욕적인 환락에서 오는 죄와 유혹을 막는 데 최선의 힘이 되고 세상의 비애에 대한 위로가 되는 것이다.
Ⅳ. 그들은 레위인들에게 친절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들은 즐거워했는가? 레위인들은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지 않으면 안 된다(12절, 18절). 그리고 총괄적인 주의를 주고 있다.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19절). 제사장들의 조력자들로 제단에 참여하는 레위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버림받아서는 안 된다. 즉 언제나 제사장들을 돕는 레위인들의 봉사가 따라야만 했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 외에 다른 제단이 세워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레위인들을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으로 그의 백성을 교훈하고 그들의 예배를 돕기 위하여 나라 안에 퍼져 있는 레위인들에 관한 말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친절히 대접하라고 명령받은 것은 "성 중에 있는 레위인" 에 대한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중에서 그들의 입으로 나오는 율법을 배울 수 있고 우리의 축제에서 우리를 옳게 인도하고 과도를 만류해 줄 레위인들을 우리 가까이 대하고 있는 것은 큰 자비이다. 그들에게 선한 교훈을 주고 선한 본보기를 보여주는 사역자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이 그 백성의 의무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즉 우리의 모든 의식이 완전히 대치되는 저 세상에 이르기까지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 레위인들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12절) "레위인들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어" 경작이나 장사로 생계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너희 재산으로 함께 생계를 유지케 하라. 그들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내고 율법으로 정해진 헌물을 내야 한다. 그들은 그 밖에는 다른 생계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Ⅴ. 그들은 일반 고기는 먹을 수 있었으나 그들이 어디에 거주하든 그들 개인의 집에서는 그들이 제물로 드린 고기는 먹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린 헌물이든 그들이 자기 집에서 먹어서는 안 되었다(13,17절). 헌물로 드려진 것이 아닌 것은 그들이 좋을 대로 잡아서 먹을 수 있었다(15절). 이 허락은 거듭 반복되어 있다(20-22절). 그들이 광야에 있는 동안은 희생물로 드려진 어떤 종류의 짐승의 고기든지 먹지 못했으나 성막문에서 도살된 것은 먹었고 그것의 일부분은 화목제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레 17:3, 4).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는 거기서는 그들이 성막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은 가축들을 제단으로 끌어오지 아니하고도 자기들의 뜻에 따라 가축들을 잡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허락은 아주 명백하게 반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사탄이 사람들에게 시사된 대로 그들 개인의 집에서 헌물을 먹는 것을 금한 율법을 내세워 마치 사탄이 인류의 조상에게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즐거움을 마치 주시기를 싫어하는 것처럼 하여 하나님의 몰인정을 허위로 만들어내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너희는 네 마음에 즐기는 대로 먹어도 좋다." 너무 지나친 쾌락을 취하지 아니하고 또 너무 금욕되어 안정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절히 절제하고 온건함으로 만족하는 것은 자연적이고 합당한 욕망인 것이다. 부정한 자는 거룩한 성물을 먹어서 안 되지만 보통 음식으로 사용되었을 때는 같은 종류의 고기라도 먹을 수 있었다.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 사이의 구별은 엄격히 지켜져야 했고, 그 구별은 거룩한 잔치의 영예를 보존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식사에 있어서는 그러한 구별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이 허락은 이중적인 어떤 제한이었다.
1.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축복에 따라 먹어야 한다(15절). 우리는 우리의 재산 정도에 따라 알맞게 살고 우리가 가진 것 이상으로 재물을 쓰지 않는 것이 우리의 지혜인 동시에 의무라는 것을 명심하자.우리가 가진 것 이상으로 소비해야 할 물건을 집안에 저장해 두는 것도 부당한 처사이지만, 소비하는 것은 더욱 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필경 남의 것을 탈취한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은 더욱 부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당하게 절약된 것은 후에 가서 더 쉽게 탕진될 것이며, 부당하게 낭비되는 것은 아내와 자녀들이나 자기에게 돈을 빌려준 은인들에게 보답하기 보다는 자기가 저지른 악을 보상하는 데에 써버리리가 쉽기 때문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지혜와 중용을 모색하며, 경성함과 단호한 결심으로 그것을 지켜나가야 하리라.
2. 그들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16절과 다시 23절에서). "오직 그 피는 먹지 말라 너는 그것을 먹지 말고" (24절), "너는 피를 먹지 말라. 그러면 너는 복을 누리리라" (25절). 그들이 여호와께 속한 피를 여호와 앞 제단에 붓기 위해 가져올 수 없을 때 그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땅에도 붓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것도 그에게 속한 일이요 보상으로 생명을 빼앗는 일도 그에게 속한 일임을 인정하기 위함이다. 패트릭 주교는 그들이 이와 같이 피 먹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당하는 이유는 고대 우상 숭배자들이 그들의 희생 제물의 피에 대하여 가졌던 미신 시상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의 악마들이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먹음으로써 자기들의 그들과 교통하게 된다고 생각했다.Ⅵ. 그들은 광야에서 가졌던 그들 자신의 부패한 관습이나 가나안 땅에 있던 그들의 선임자들의 부패한 관례들을 따르지 않도록 금지 당하고 있다.
1. 그들이 광야에서 가졌던 불합당한 관습과 그들의 현재의 불안정한 조건을 고려하여 묵과되었던 불합당한 관습을 계속 지켜서는 안 된다(8,9절).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 모세보다 더 훌륭한 통치자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들의 통치자의 눈 아래서 서로 그렇게 밀집해서 야영을 하고 있는 지금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에 더 좋은 질서와 훈련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없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미 많은 잘못과 불법적인 일이 그들 사이에 잠입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하늘의 가나안에 이를때까지는 완전히 순수하고 올바른 사회를 보겠다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희생 제물과 경건한 예배, 공정한 법정과 민정(民政)을 가졌다. 또 "안식일에 땔 나무를" 모으는 사람들은 돌로 쳐 죽였던 것을 보면, 그들에게는 중요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대단히 엄중한 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들은 자주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정했다.(1) 그들은 아무도 율법이 요구하는 그대로 정확히 엄숙한 절기의 결례식을 지킨 자는 없었다.
(2) 그들 중 잘못을 범하기 쉬운 사람들은 진영이 이동하느라고 생기는 빈번한 재판의 중단을 기회로 악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모세는 말한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여기서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불안정한 상태에 있을 때는 다른 때는 결코 인정되지 아니할 것이 용납되고 인정될 수 있다. 꼭 필요한 일들은 그 필연성이 계속되는 동안은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광야에서 있었던 일이 가나안에서도 있어서는 안 된다. 집이 세워지고 있는 동안에는 많은 먼지와 쓰레기가 깔려 있을 수 있지만 집이 완성되었을 때는 모두 말끔히 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모세는 이제 자기의 생애의 통치를 끝내려 하고 있다. 그에게는 이스라엘이 자기의 통치 아래 있을 때보다 그 다음에 더 잘 되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 위로였다.
2. 그들은 가나안 민족들이 그들의 신을 섬길 때 사용한 어떤 의식이나 예식으로 여호와를 예배해서는 안 된다(29-32절). 그들은 우상의 형식이나 모양도 살펴서는 안 된다. "사탄의 깊은 것을 알기 위해" (계 2:24) 그들에게 해야 할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최선의 방법은 감염될 위험이 있는 사실에 대해 전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의 관습을 소개해서는 안 된다.(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노예로 삼고 포로로 잡고 또 그들 앞에서 제거하고 파멸시킨 그들의 생활 풍습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일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풍습을 채용할 만큼 번창하고 발전되지 못했다. 저들은 자기들의 최후를 알게 된 후 참으로 사악하게 미혹되어 있어서 죄인들이 가는 길로 달리고 있었다.
(2) 왜냐하면 그들의 어떤 관습들은 가장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특히 "자녀를 불살라 그 신들에 드리는" 따위의 짓은(31절) 자연의 빛과 법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애정까지도 유린하는 것이었다.
(3) 왜냐하면 그들의 우상 숭배의 관습들은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요 그들이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 관습을 하나님 예배에 끌어 들이는 것은 그 자체도 가증스러운 것이요 그분께 영광을 돌리고 은총을 받기를 희망했던 그분께 대한 모독이다. 제물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경우라면 참으로 나쁜 것이다(잠 15:8).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예배에 관하여 앞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제시하였던 동일한 주의를 주면서(32절) 끝을 맺고 있다. 즉 "너는 그 규례를 더 의미심장하게 한다거나 더 훌륭하게 한다는 구실로 너 자신의 생각을 더하지도 말고 또 그 규례를 더 편이하게 하고 더 유용하게 하며 혹은 간단하게 하기 위해 보류해 둔다는 구실을 내세워 감하지도 말라. 너희는 하나님께 명하신 그것 그대로 그리고 오직 그것만 준행하라." 우리가 신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할 때 신의 영접을 얻을 것을 희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 안에서 당신의 일이 완성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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