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권고(신명기 4:1-40)
이 가장 생생하고 탁월한 교훈은 너무나 완벽하고 또 그 세목들은 너무나 자주 반복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함께 취급하지 않을 수 없고 몇 가지 합당한 표제로 소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본문은 여러 문단으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Ⅰ. 일반적으로 이것은 과거 역사의 사용과 응용이다. 이 이야기는 그 역사로부터 오는 추론의 방법으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1절). 이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재 음미해 보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섭리로 말미암아 의무와 복종에 다시 한 번 열심을 낼 수 있도록 자극 받아야 한다. 우리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고대의 역사들을 활용해야 한다.
Ⅱ. 그의 교훈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방향이란 그들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하고 그를 섬기는 일에 더 가까이 하도록 설득하려는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향하지 않도록 하며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게을리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가 그들에게 매우 영감 어린 수사법으로, 권고와 지시의 방법으로, 또한 자신의 권고를 강력하게 하는 동기와 논증의 방법으로 역설하는 내용을 관찰해 보자.
1. 여기에서 그가 그들에게 어떻게 당부하여 명령을 하며 또한 그들에게 무엇이 선한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가를 알아 보자.(1)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경성하기를 요구하고 그들에게 교훈된 규례와 법도에 주목하기를 요구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그가 의미하고 있는 바는 그들이 지금 그에게 귀를 기울여야 될 뿐 아니라 율법의 책이 그들에게 읽혀지거나 혹은 그들이 읽을 때마다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명을 담고 있고 너희 자신의 영혼에 큰 유익을 담고 있으며, 그러므로 너희의 가장 큰 주목을 요구하는 그 규례에 귀를 기울이라."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셨다(10절). 한 증인을 세워서 들려 주었다. 즉 그 전달의 환경에 의하여 그때 강제된 주의는 그후 줄곧 마땅히 그 자체의 탁월성에 의하여 계속 귀를 기울여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두 번 들어야" 하고 종종 들어야 한다.
(2) 모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 중에서 순수하고 온전하게 보존케 하라고 한다(2절). 그것을 순수히 지키라. 더 보태지 말라. 그것을 온전히 보존하고 거기서 감하지도 말라. 실제상으로도 그와 같은 것은 있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율법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금한 악을 더하거나, 율법을 이행치 아니함으로써 그 율법이 요구한 선을 감소시켜서도 안 된다." 생각으로도 그와 같이 다른 것이 있어서도 안 된다. 즉 "너희는 마치 하나님의 제도가 부족한 듯이 생각하여 네 자신의 창의안을 보태서는 안 되며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보다 어떤 종교 예식을 조금이라도 더 부과시켜도 안 되고, 또한 지시된 어떤 것을 필요없거나 잉여의 것으로 삭제하거나 제처 두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하여 어떤 것도 거기에 첨가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하면 그것을 오직 더 나쁘게 할 뿐이다(전 3:14 참조). 유대인들은 이 율법의 문자, 일점 일획까지도 변경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하여, 히브리 법전의 순수성과 통일성을보존하는 데 있어 그들의 이러한 큰 주의와 정확성을 기울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크게 은혜를 입고 있다. 우리는 신약 성서의 끝 부분(계 22:18, 19)에서 신약 성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울타리를 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3)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과(2절), "그들을 행할" 것과(5,14절), "그들을 지켜 행할" 것과(6절), "언약을 이행할" 것(13절)을 당부했다. 듣는다는 것은 행함을 위해 있어야 하고 지식은 실행을 위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들이 지켜야 할 길이며 그들이 고수해야 할 규칙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도덕적 훈계에 의해 다스려야 하고 그들의 예배는 거룩한 의식에 따라 수행되어야 하며 정의의 집행은 재판법에 따라야 한다. 그는 자신의 강론을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40절)는 반복된 말을 하면서 끝마치고 있다. 실천하고 복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어야 하겠는가?
(4)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대단히 엄격하고 주의깊게 하라고 부탁한다. 즉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9절). 그리고 "너희는 깊이 삼가라" (15절). 그리고 다시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23절)라고 한다. 경건한 신앙을 가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며 신중하게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유혹의 손길이 얼마나 많으며 또 우리 가슴 속에는 얼마나 부패한 의향이 숨어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주위를 살필 필요성이 얼마나 크며 경성하여 우리의 마음을 지킬 필요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심성 없이 전적으로 모험만 하는 사람들은 바르게 행할 수가 없다.
(5) 그는 그들에게 특별히 우상 숭배의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 시키고 있다. 이 죄는 다른 민족들의 관습을 통하여 그들이 가장 유혹받기 쉬운 것이었고 그들의 마음을 부패시키는 데 몰입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가장 격노케 하는 것으로서 그들 자신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지 않도록 깊이 삼가라" (15,16절). 그가 그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는 우상 숭배의 종류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형상 숭배, 즉 그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했을 때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고 "그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고 말았다. 제2계명은 분명히 이것에 대한 지시이고 여기 즉 15~18절에서 상술되어 있다. "스스로 부패하지 않도록 깊이 삼가라." 즉 "너희 자신을 타락시키지 않도록" 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 마음속에 모든 불경건에 대하여 어떤 상감물(象嵌物)이 반드시 필요한 것과 같은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적인 간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스스로 파멸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만일 어떤 것이든 너희를 파멸할진대 이런 것이 바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지니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으로든지, 혹은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새의 형상이라든지,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지 말라." 이 교도들은 모든 이러한 종류의 형상을 만들어 신을 예배했으나 그것들은 우리가 호세아 8장 6절 즉 "이것은 공인(工人)이 만든 것이라 참신이 아니니" 라는 말씀에서 명확히 나타난 바와 같이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도 없고 그것을 인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어떤 형상으로 무한하신 영을 나타낸다는 것, 그리고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 위대한 창조주를 대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최대의 모욕이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최대의 기만이 아닐 수 없다. 모세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그는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실 때 그는 그들의 귀에 들릴 수 있는 음성으로 나타나셨고 그것으로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를 가르치고 하나님은 말씀의 형식에서 우리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들의 눈에 보이도록 어떤 형상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내세에서 가지게 될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보류해 두신 바이며 현세에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형상은 보지 못하였노라" (12절).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느니라" (15절). 아마 그들은 어떤 형상을 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돌파하고 들어가 여호와를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출 29:21). 그러나 그들이 본것이란 빛과 불 뿐이었고 그들은 어떤 형상이고 만들 수 있을 만한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무한한 지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 우상 숭배의 위험을 염려하시어 자신을 그와 같이 현현하시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우상 숭배의 유혹을 초월했기 때문에 호의가 허락되어 여호와의 형상을 보았다(민 12:8)는 말이 있다. 그러나 최근까지 애굽의 우상들을 보고 온 그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그것을 모방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할 때는 제 2계명은 헛되이 받게 되는 것이다. 패트릭(Patrick)주교가 말한 바와 같이 "왜냐하면, 그들은 이 율법이 금지한 내용은 단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여 준 형상 이외의 모양을 만들지 말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보여준 그 형상을 만드는 것은 합법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리의 환상과 상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으로 우리 스스로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주의를 기울이자. 우리 마음 속에는 우상이 있을지 모르나, 성소에는 아무런 형상도 없었다.
[2] 일월 성신의 예배는 또 다른 종류의 우상 숭배로서 그들은 여기서 그런 것들에 대한 주의를 받고 있다(19절). 이것은 가장 옛적부터 있었던 우상 숭배의 일종이고 우리보다 높은 상황에 있을 뿐 아니라 가장 현저히 그들 자체에 영광을 가지고 있고 이 세계에 가장 크게 봉사해 주고 있는 피조물들에 대한 숭배를 야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갈채를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갈채를 받고 있다는 것이 그것으로 하여금 더욱 위험하게 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의미는 이런 것이다.
첫째 분별해야 할 유혹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 즉 여러 민족들의 관습에 대한 쓸데없는 상상의 강한 충격과 충동적인 급류에 휘말려 미혹되어 그것을 경배할까 하노라(19절) 라는 주의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눈을 따라 행한다" 는 것으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의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일 때 그렇게 되기가 아주 쉬운 것이다. "너희가 일월 성진을 보면 그들의 높음과 밝음과 그들의 규칙적인 운동과 힘있는 감응력에 너무나 감탄하여 그것들을 만드시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봉사해야 할 사명을 부여하신 즉 그들에게 존재를 부여하시고 이 세상을 향한 축복을 그들에게 부여하신 창조자에게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그들에게 돌릴 강한 유혹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에 대한 신앙이 약하여졌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러한 유혹에 대항하여 무장할 수 있는 큰 결심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그러나 그는 그러한 유혹이 그 근거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보여 주고 있다. 이들 거짓 신들, 즉 일월, 성신, 다만 그들이 마땅히 예배해야 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나누어 주신 축복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사람들을 섬기는 물건들이요 땅에 빛을 주도록 만들어지고 사명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섬긴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섬기도록 된 물건들을 섬겨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히브리 말로 해란 쉐메쉬([op,[o,)라고 하는데 그것은종(servant)이란 의미이다. 그것은 이 가시적 세계의 하인장(下人長)이며 모든 인류에게 등불을 켜 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주인으로 예배되지 않도록 하라. 더 나아가서 그것들은 하나님의 선물들이다. 우리가 그 일월 성진으로부터 받고 있는 모든 혜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분에게만 돌려야 할 영광을 그들에게 돌린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지극히 큰 명예 훼손이다.
(6) 모세는 그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이행하도록 가르칠 것을 지시하고 있다.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가르쳐" (9절) 그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도록 하라(10절).
[1] 일반적으로는 자손들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도록 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배를 후대에게 전하기 위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특권을 몰수당하지만 않았다면 이스라엘에서의 하나님의 나라가 영구화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 이것을 위하여 부모들은 그들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가르치고 모든 계명을 이행하도록 훈련해야 했다.
(7) 모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의무를 결코 망각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라(23절). 하나님은 매양 언약을 염두에 두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언약이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경성하고 어느 때에든지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심중을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우리의 신앙을 잊지 않도록, 또 우리가 그것을 잃거나 내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심과 주의, 그리고 거룩히 경성함이 나쁜 기억력을 방지하는데, 최선의 도움이 된다. 이런 것들이 모세가 그들에게 준 지시요 명령들이다.
2. 이제 우리는 그가 이러한 권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동기나 혹은 논증이 무엇인가를 알아 보자. 그는 얼마나 그들 앞에 놓인 그 이유를 명령하고 있고 자신의 입을 그것에 대한 논증으로 채우고 있는가! 그에게는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많았다. 그의 논제들 중의 어떤 것들은 실로 그 백성들에게만 특정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종교는 그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고 불신앙적인 모든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자기들의 귀를 틀어막는 능력있는 매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영광, 그리고 선하심을 강조한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확실히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지킬 양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감히 그분을 대항하여 죄지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여기서 그들에게 다음의 사실들을 기억나게 해준다.
[1] 주 여호와는 "오직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이란 것" 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고 명심" 하지 않으면 안 된다(39절). 여기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많다. 알고는 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명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타당한 추론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리로서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알려질 수 밖에 없으며 너무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만일 그것을 마땅히 명심한다면 그 결과로 세계를 개혁하게 될 것이다. 즉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무한하시고 영원한 존재요 자존하시고 자족하시며 모든 존재와 힘과 운동의 근원이 되시며 또 그는 하늘 위의 하나님으로서 모든 영광으로 옷입으시고 모든 상층 세계에 있는 만군의 주요, 그리고 그는 아래 지상에서도 하나님이시고 비록 이곳이 그의 영광의 보좌에서 거리가 멀다 할지라도 그의 감찰 하심이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비록 낮고 천할지언정 그의 돌보심과 살피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참되시고 살아 계신 그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 이방인들의 모든 신들은 모두 모조품들이요 약탈자들에 불과하다. 그들 중의 어떤 것도 하늘과 땅에 있어 우주적 군왕은 없으며 다만 국소적인 신들에 불과한 것들이다. 최상의 수호신(Numen) 곧 신성을 예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일 그들의 하나님을 변경시키든지 혹은 그를 무시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다시는 용서받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2] 그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 이시라고 했다(24절). 그를 격노케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왜냐하면,
첫째 그는 모욕하는 자를 분별하시는 질투의 눈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너희의 완전한 애정과 존경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결코 애정의 적수를 용납하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 자신을 향한 우리의 신성한 질투에 대한 선한 이유가 된다.
둘째로 그는 특히 그의 예배에 대하여 모욕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형벌을 내리신다. 거기에 대해서 그는 특별히 질투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소멸하는 불" 이다. 죄인에 대한 그분의 진노가 그와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은 가공할 만한 것이며 파멸하는 것이요, "반역자들을 삼키는 불과 같은 분노" 이다(히 10:27). 불은 불이 붙을 수 있는 연료에만 붙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들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파멸되기에 합당한 자들에게만 내리는 것이다(고전 3:13; 사 27:4). 신약 성서에서까지도 우리가 하나님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기쁘게 섬겨야 할(히 12:28, 29) 이유로서 우리에게 강요된 동일한 논증을 보게 되는데, 이는 비록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요 그를 신실하게 섬기는 자들에게 기쁨의 빛이 될지라도 그를 거슬리는 자들에게는 그를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이다.
세째로 그럼에도 그는 "자비하신 하나님" 이라는 것이다(31절). 이것은 회개를 격려하는 것이지만 순종하게 하는 유인으로도 봉사할 수 있고 그들의 배교를 방지할 수 있는 타당한 사려도 된다. 여기서 그것이 나오는 바와 같이 우리가 그에게 신실할 때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아니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을 우리가 저버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 외에 어디로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찾아가겠는가?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의무를 사랑의 줄로 묶어 견고히 지키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늘 그에게로 나아가게 하도록 하자.
(2) 모세는 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와 그들 위에 있는 그의 권위와 그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너희가 지키고 행해야 할 계명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나의 명령이 아니라 그 계명들은 무한한 지혜로 이루어지고 절대 주권으로 제정된 여호와의 계명들이라" 고 모세는 말한다. 그는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이다(1절). 그래서 너희는 상속상으로 그의 것이고 너희 열조도 그의 것이고 너희는 그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2절).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의 승낙에 따라 그의 것이 되었다. 그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다(5절).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그의 대리자요 또 대사로서 대한다" 라고 모세는 말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에서 모세는 그들에게 그가 여호와로부터 받은 모든 것과 또 오직 받은 그것만을 전하여 주었다.
(3) 모세는 경건을 위한 지혜를 강조한다. "이것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이니라" (6절).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1] 그들은 스스로가 지혜롭게 행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너희의 지혜라." 그것은 바른 이치에 대한 찬동할 수 있는 힘일 뿐 아니라 우리의 참된 유의에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최초로 또 가장 고대의 신의 계시가 가지고 있는 격언들 중의 하나이다. 즉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라는 것이다" (욥 28:28).
[2]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교훈을 읽고 들음으로써 확실히 이 율법으로 다스림을 받은 백성들이 지혜롭고 이해심 있는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이웃들의 기대에 답했을 것이다. 위대한 일들은 신의 계시에 의하여 인도된 자들과 하나님의 신착을 받은 자들에게서 정히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백성들보다 더욱 지혜롭고 더욱 선하지 않으면 안 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만일 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에 의하여 지배된다면 그들은 그렇게 될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을 위하여 책망이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 위에 내려진다 해도 결국 그들에게는 확실히 영원한 혼란만 덮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빛과 율법이 혜택을 누리고 있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지혜롭고 명예롭게 처신해야 한다(전 10:1 참조). 그래야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들은 그들의 처해 있는 행복한 안정의 혜택을 누리게 되는 특유한 이익을 강조하고 있다(7,8절). 하나님과의 우리의 교제(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요 행복이다)는 말씀과 기도로 보존되어 있으니 이 두 가지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하늘 아래 그 어떤 백성보다도 더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1] 어떠한 나라도 그들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말할 수 있는 특전을 가진 나라는 없다(7절). 하나님은 그들이 부르는 때에는 언제나 그들 가까이 계셔서 그들의 요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의 신탁에 의하여 그 요구를 해결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고 또한 그들의 간청에 응답하시어 그것들을 특별한 섭리로 허락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빵과 물과 병나음을 달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보았고 그들을 구조하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매우 즉각적인 도움이 나타남을 보았으며 그들 가운데 거하심을 그들은 보았고(시 46:1, 5) 그들의 기도에 그의 귀를 열고 계심을 보았다. 아래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첫째 모든 경우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찾고 모든 일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아시기를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가진 특성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문의하여 허락된 일 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로 하나님을 찾는 그들은 확실히 부르심 가운데서 그를 찾게 될 것이며 모든 믿음의 간구에 대하여 평화의 응답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분을 보게 될 것이다(사 58:9). "너희는 유모를 찾는 아기와 같이 부르짖고 그는 여기 있다고 대답하리니 나의 귀여운 아이야 무엇을 위해 소리치느냐?"
세째로 이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참으로 위대하고 영예롭게 만드는 특전이다. 어떤 백성이나 개인을 위대하게 하는 데에 이보다 더 이상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어떠한 이름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왕(하나님과 겨루어 이룬 자)이라는 이름보다 더 명예로운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위대한 나라가 어디 있는가? 다른 나라들은 더 많은 국민의 수와 더 큰 국토와 더 오래된 국체를 자랑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하늘 나라에 대한 이러한 관심에 대하여 자랑할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그들도 자기들의 신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처럼 그렇게 가까이 있지는 못하다. 이방신들은 열왕기 상 18장 27절에 있는 것과 같이 필요한 때에 그들을 도울 수는 없었다.
[2] 어떠한 민족도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규례와 법도에 대하여 그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민족은 없다. 이것 역시 어떤 다른 민족보다도 더 큰 위대함이었다. 그 규례와 법도가 그렇게나 공의로운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는가?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첫째 하나님의 율법의 이 모든 규례와 법도는 어떤 민족의 규례나 법도 보다도 더 무한히 공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다른 어떤 민족들의 율법보다도 훨씬 더 탁월하다. 어떠한 율법도 그와 같이 자연적인 동등성과 정당한 이치를 가진 편견이 없는 명령으로 조화를 갖춘 법은 없으며 그와 같이 그 자체가 그 법의 모든 부분과 시종일관하는 것도 없으며 그와 같이 성서의 법과 같이 인류의 복리와 이익에 부합하는 것은 없다(시 119:128).
둘째로 그들 앞에 놓인 이러한 규례와 법도를 가진다는 것은 어떤 국가나 민족보다도 참되고 초월적인 위대함인 것이다(시 147:19, 20 참조). 우리가 우리 중에서 존귀와 능력으로서의 성서를 가지게 된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명예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호의에서 한 백성의 높임을 말하는 증거이며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그들을 높이시는 수단인 것이다. 율법을 위대케 하는 자들은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위대하게 될 것이다.
(5) 모세는 그들에게 이 율법을 주었을 때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많이 강조한다. 너희가 호렙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을 잊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0절). 그들 중 어떤 자들은 비록 그들이 20세 미만이었고 또 그 나머지는 그들의 조상들의 몸 속에 들었다 할지라도 지금 그들이 살아서 그것을 회상할 수 있었다. 그 열조들은 거기서 율법을 받고 언약을 맺었으되 그들 자신들만을 위한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들의 자손들을 가르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심에 있어서 특별히 통찰하신 그들의 자손들을 위해서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이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두 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들은 그것들을 결코 잊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1] 그들이 시내산에서 본 것(11절). 그들은 불과 어두움의 이상한 혼합을 보았다. 이 둘은 무섭고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 불과 어두움의 광경은 매우 대조적이었음에 틀림없다. 흑암의 한 가운데에 불이 나타나 보임으로써 그의 광경은 더욱 무섭게 보였다. 밤중에 불은 가장 무서운 것이며 그 불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움을 더 어둡게 하여 더욱 무섭게 보인다. 그것은 이러한 불이 분산하지 아니한 강한 암흑을 반드시 조정하기 때문이다. 시내산에서 있었던 이 현상을 암시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그리고 당신의 원수와 그 백성의 적들에 대항하여 불과 암흑 가운데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일컬어지고 있다(시 18:8, 9).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본것을 그들에게 다시 말하고 있다(36절). 즉 "그는 너희들에게 당신의 위대한 불을 보였느니라." 한 번 번쩍이는 섬광, 즉 하늘에서 비친 불도 우리들에게 공포를 일으킨다. 그런데 혹자는 대개의 피조물들이 자연적으로 그 빛의 광선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는 그 빛을 향하여 그들의 얼굴을 돌린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부단한 불은 얼마나 두려움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인가! 그것은 심판의 날에 대한 징조를 보여 주었다. 심판 때에 "주 예수께서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 나타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상기시킬 때에 그는 그들이 보지 못한 것에 대하여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 멋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자기들의 산당에 하나님의 형상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의하건데 만족스러운 근거란 그는 무한한 능력과 완전하심을 가진 존재라고 믿는 것이지 어떤 경우에도 그가 우리가 가진 것과 같은 육체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2] 그들의 시내산에서 들은 것(12절). "여호와께서는 너희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너희 자신의 말로 말씀하셨고 너희는 그것를 들었다." 그는 이것을 그의 강론의 마감 부분 즉 32절, 33절, 36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그들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향하여 창조의 역사에서 소리나 언어를 없이도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나 그 음성은 들을 수 있다(시 19:1-3).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그 교회의 유아 상태의 허약성을 깊게 고려하여 지체를 낮추시어서 소리와 언어로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나타내셨다. 여기에는 "주의 길을 예배하기 위한 광야의 소리가 있었다."
둘째로 그들은 그 소리를 "불 가운데서" 들려오는 것으로 들었다. 이것은 그것에게 말씀하신 자는 하나님 자신임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누가 삼키는 불꽃 가운데 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욥에게는 회오리 바람으로부터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불가운데서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더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우리와 같은 사람들 즉 "이들의 위엄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하므로(욥 33:6, 7),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마땅하다. 불이 그들을 삼키지 아니했다든가 모세 자신이 떨었음에도 그들이 두려움 때문에 죽지 아니했다는 것은 자비의 놀라움이었다.
세째로 결코 어떤 백성들도 그와 같은 소리는 듣지 못했다. 모세는 그들에게 지난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장소를 상고하여 보라고 명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이 호의가 전에도 없었고 또 필적할 만한 것도 없을 만큼 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32절). 그들에게 행해진 이 특별한 영광이 그들의 특별한 복종을 요구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그렇게나 많은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다른 백성보다도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더 많은 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은 공히 예상될 수 있는 것이었다.
(6) 그는 그들을 위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현현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이 불 가운데 노동하던 쇠풀무 곧 애굽에서 불러내시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을 택하여 자신의 백성 즉 "기업의 백성" (20절)을 삼으신 것이다. 이것을 그는 거듭 언급하고 있다(34,37,38절). 하나님는 어떤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이와 같을 일은 행하시지 않았다. 이 민족의 발흥은 다른 민족들의 발흥과는 전혀 달랐다.
[1] 그들은 이와 같이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뛰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어떤 공로가 있다든가 상 줄 만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들에게 친절을 베푸셨기 때문에 그들을 택했던 것이다. 값없는 은혜의 이치를 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언약을 담당하실 그 분의 공로로 애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자비로 애굽인들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내시는 이적과 기사로 애굽에서 구원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인들을 대항하여 당신의 팔을 펴셨으니 그것은 역병을 불러들이는 모세의 편 팔로 말미암아 표시되었다.
[3] 그들은 가나안의 행복한 정착이 계획되어 있었다(38절). 이들에게 터를 마련키 위하여 어떤 다른 민족보다도 그들의 하나님에게 더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제 민족들은 그들 앞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애굽인들과 가나안인들은 이스라엘의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희생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스라엘의 빛에 대하여 항거하는 자들과 이스라엘이 가는 길을 막는 자들은 바로 그것이 그들의 위기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7) 그는 때때로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벌하려고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현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특별히 바알브올의 사건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3,4절). 이것은 바로 최근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의 눈은 바알브올과 연합한 자들에게 내릴 급작스러운 파멸이 있을 것과 여호와께 의지하고 있는 자들은 구원받을 것임을 보았던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의 위험과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 주는 유익이 어떤 것인지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모세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도 열거되어 있다. 즉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인하여 내게 진노하셨다" (21,22절). 자기들의 진실한 친구요 지도자인 모세에게 부닥친 이 큰 손상에 대하여 저들이 정말로 염려하고 있는지, 그 솔직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모세는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우리 자신이 당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괴롭힌다.
(8) 그는 순종에서 오는 확실한 이득을 촉구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의 논중을 폈다. 즉 "너희는 살고 그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소유하기 위하여" (1절). 즉 그는 이렇게 결론을 짖고 있다. 즉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잘 살기 위하여" (40절). 그들의 운명은 그들의 선행에 달려 있고, 그들의 번영은 그들의 경건에 달려 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은 확실히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다.
(9) 그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배반의 치명적인 결과는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 민족의 파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25~31절에서 상술하고 있다.
[1] 그는 그들이 그 땅에 오래 머물게 되고 그들의 처소에서 안주하게 될 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들은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이든지 조각하여"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에게 나아가게 될 것을 예견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을 가장 쉽게 망하게 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25절).
[2] 그는 이 죄 때문에 그들에게 내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다. 즉 "너희는 전멸될 것이요" (26절), "열국 중에 흩어질 것이다" (27절),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들을 섬길 것이다(28절). 그것을 너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을 섬기도록 강요될 것이며, 혹은 너희 자신의 술취함과 우둔함을 통하여 너희 자신을 포로로 잡힌 데서 구하여 줄 더 좋은 구원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죄에 대한 벌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들 후대에 가서도 종교의 의무를 저버리는 자들은 그들이 곤핍하게 될 때 위로를 바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때는 공히 그들은 "그들이 섬기던 신들에게로" 보냄을 받을 것이다(삿 10:14).
[3]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훗날에 그들을 위해 자비를 간직해 두시고 계실 것이라는 것을 희망하도록 격려하고 또 하나님은 당신의 심판을 통하여 그들에게 회개하도록 하여 그들을 다시 당신과 언약의 관계를 맺게 될 것을 희망하도록 격려하고 있다(29-31절). 여기서 아래의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첫째 우리가 처한 곳이 어떤 곳이든지간에 비록 우리 자신의 고국이나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땅과 하늘 사이에서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가 놓인 곳은 없다.
둘째로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구하고 그에게 온전히 몸 바치고 그의 은혜에 대한 진지한 갈망과 그것을 얻기 위해 온 정성을 다 쏟는 그들, 즉 오직 그들만이 위로의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세째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언약과 각성을 보내는 것이며 그들과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올바른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너희에게 임할 때 이것은 너희가 주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그로부터 떠남으로써 닥쳐오는 환란이 무엇인지 보게 되는 때문이다" (단 9:11, 12).
네째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비록 우리가 고난을 통하여 그에게로 끌려갈지언정 우리를 저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희망할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만일 우리가 마침내 그 언약을 기억하게 되면 그는 그것을 잊지 않고 계셨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이 모든 논증들을 한데 묶어서 이 신앙이 그 측면에 어떤 이치를 가지고 있는지 말해보자. 즉 하나님의 통치 중에 하나님이 저버리신 것은 하나도 없고 먼저 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해일 뿐인 것이다.
도피성(신명기 4:41-49)
1. 이스라엘이 지금 야영하고 있는 요단 이편에 세운 도피의 성읍들의 이름들이 나타나 있다. 그 목적을 위해 세 개의 성읍이 지명되었다. 르우벤 지파를 위해 하나, 갓 지파를 위해 또 다른 하나,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를 위해 또 다른 하나이다(41-43절). 모세는 그가 아직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 그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즉 그는 정착한 후에 통치자들에게 그가 떠난 후에도 그들에게 더 좋은 본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2.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행한 다른 설교의 서론. 우리는 그것을 다음의 몇 장에서 보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 회중이 교훈을 받기 위하여 참석했던 그 다음 안식일 후에 설교되어진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체로 전장(前章)에서는 그들에게 순종하라는 훈계를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그들이 준행해야 할 율법을 반복하되 보편적인 것을 요구하고 어떤 절대적인 순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행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는 그것들에 앞서 그들이 지키고 행해야 할 규칙으로, 또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로서 율법을 먼저 이야기하고 또 그들이 이 완전한 자유의 율법을 들여다 봄으로써 그들이 그 안에서 계속할 수 있기 위하여 그들의 자연의 모습을 비쳐 주는 거울로서 그 율법을 그것들에 앞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증언, 규례 그리고 법도" 들이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이전에 제정한 도덕적이고 의식적이며 판결문적인 율법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이제 "요단 이편" 에서 반복되었던 것이다(44-46절). 모세가 그들에게 이 율법들을 전달한 장소가 여기에 특별히 기술되어 있다.
(1) 그곳은 모압 족속들의 우상의 전당인 벳브올의 맞은 편이었다. 모세는 이 전당을 아마 때때로 내려다 보았을 것이며 그는 그들에게 그런 것에 감염되거나 그와 같은 위험한 장소에 대하여 특별한 주의를 하면서 보곤했을 것이다.
(2) 그것은 그들이 시혼과 옥의 손에서 획득하여 사실상으로 이제 소유로 차지하게 된 그 땅으로서 새로운 정복지에서였다(47절). 여기에서의 그들의 현재의 승리는 바로 그들의 순종을 입증하는 힘있는 논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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