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산 왕국의 정복(신명기 3:1-11)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또 다른 나라 즉 바산의 나라를 본다. 시혼의 정복은 흔히 옥의 나라를 정복한 것과 함께 진술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시 135:11, 136:18, 20).
Ⅰ. 그들은 어떻게 대단히 강적인 옥을 정복했는가?
1. 대단히 강하였다. 그는 유일한 거인 잔존자였다(11절). 바산왕 옥 자신의 힘은 엄청난 것이었다. 암몬 족속들에 의하여 보존된 그의 침대 뼈대의 유물은 그들의 가장 큰 도성에서도 희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의 침대의 뼈대의 재료를 보면 그의 체중에 대해서 좀 짐작할 만하다. 즉 재료는 철이었으니 마치 나무 뼈대는 그에게 너무나 약한 것이었다고 추측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침대의 크기를 보아 그의 신체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추측할 만하다. 그 침대의 길이는 아홉 규빗이고 넓이가 네 규빗인데 한 규빗은 약 반 야드 정도가 된다고 할 때(어떤 학자들은 반 야드보다 조금 더 된다고 한다). 그 침대는 길이가 4야드 반이고 길이가 두 야드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침대가 그의 실제의 키보다 두 규빗이 더 길다고 인정한다면 즉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허락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서, 그의 키는 세 야드 반이 되는데 그 키는 보통 사람의 두 배이며 다른 모든 기관도 같은 비율로 그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처 넘어뜨렸다(3절).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편을 들어 변호하실 때 그는 거인들도 메뚜기와 같이 처치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 하자. 그 누구도 권능자를 거스려서는 안전할 수 없다. 옥의 군대는 대단히 강하였다. 그는 성벽 없는 고을을 합쳐 요새화 된 60개의 도성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5절). 그러나 그를 처 넘어뜨리도록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위임 받았을 때는 이 모든 것은 그들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다.
2. 그는 대단히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다" (1절). 그가 시혼의 파멸을 보고도 어떤 경고를 받지 않았다는 것과 평화 조약을 내세우지 아니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파멸을 확고히 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공공연히 하늘에 도전하는 자들은 그와 같은 심판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렘 3:8).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2절). 모세 자신은그런 주의를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믿음이 강하였지만 그 백성들은 아마도 그것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이러한 새삼스러운 확신을 주셨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즉 그가 너를 파멸하지 못하도록 너를 그의 손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네가 그의 파멸이 되고 그에게 반의 반역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도록 네 손에 그를 붙이리라." 하나님은 더 보태어 "너는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 고 말하는 이것은 또 하나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획득한 지난 번의 승리를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격려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하나님이시요 변치않는 분위기 때문이다.
Ⅱ. 그들은 어떻게 대단히 탐스러운 나라 즉 바삭의 소유를 획득했나? 그들은 모든 성읍들을 다 취하였다(4절). 그리고 그들 모두를 진멸하였다(6절).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았다(10절). 그래서 이제 그들은 요단강 동쪽, "아르논강에서 헤르몬산" 에 이르는 비옥한 땅을 모두 자기들의 손에 넣었다(8절). 이러한 땅들을 정복하고 소유한 것은 가나안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용기를 붇돋우기 위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죽음을 앞에 둔 모세의 만족을 위해 예정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완전한 승리와 정착을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살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그 역사의 전조만 보여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은 "그들의 유업의 고증" 을 믿는 자들에게 비로소 획득된 소유의 이행으로 주어진다.
정복지의 분배(신명기 3:12-20)
그들이 이 땅을 어떻게 정복했는가를 보여준 후 모세는 이 본문에서 그 땅에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정착하게 된 사실을 보여 주는데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민 32:). 여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이야기가 나타나 있다.
1. 모세는 각 지파에게 할당된 그 나라의 특별한 부분들을 명시하고 있는데 특별히 지파가 현저하게 나누어져 있는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할당된 것을 명시하고 있다. 요셉 지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로 나누어졌다. 므낫세는 반은 요단 이쪽 편이고 다른 반은 요단 저편으로 나누어졌다. 그리고 요단의 동편은 다시 두 큰 가족 곧 야일(14절)과 마길(15절)로 나누어지고 그들은 자기들의 몇몇 배당을 나누어 받았다. 야곱이 그 지파가 작아지리라는 예언은 아마 이러한 분할과 나누임에서 성취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바산은 "거인들의 땅" 이라 불리어졌는데 이유인즉 그들의 소유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은 그 거인의 최후의 인물이었다. 아마 이들 거인들은 그들의 이웃 종족들 보다도 더 먼저 자기들의 나라를 잃고 근절된 것 같다. 자기들의 힘과 체구를 악용하여 모든 사람들과 적대 관계를 가지게 된 그들은 비록 그들이 그 사는 땅에서 힘이 무서웠을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대항하게 되어 마침내 함정에 빠져 멸절되었던 것이다.2. 그는 그들이 이미 찬동한 허락의 조건을 반복하고 있다(18-20). 즉 그들은 요단 저편으로 강력한 한 분견대를 파견하여 가나안 정복의 선봉으로 삼아야 했다. 그들은 그들의 가족에게로 돌아와서는 안 되었는데 적어도(비록 일시적으로는 그들이 그 출정이 끝나서 겨우 숙소로 돌아올 수는 있었다해도) 지금 자기들이 자기들의 소유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의 형제들이 모두 각자의 배당의 충분한 소유를 가지게 될 때까지 그들은 안착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보아서는(빌 2:4) 안 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기적으로 되거나 공익보다 사사로운 이익을 앞세우게 될 때 문제는 악화되었다. 우리가 평안할 때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도 역시 평안한 것을 보고 싶어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과의 한 구성원으로 태어났다. 선한 사람이란 자신의 가족의 평안만큼 이스라엘의 평화를 보지 않고는 크게 기뻐할 수 없는 사람이다(시 126:6).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신명기 3:21-29)
Ⅰ.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주는 격려. 모세는 그에게 지배권을 물려 주었다(21,22절). 그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고 명했다. 이와 같이 나이가 많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연륜이 짧고 경험이 적은 사람들을 돌보고 격려해 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가 용기를 가지기 위해 생각해야 할 두 가지 사실.
1.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느냐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힘을 주사 이 두 왕들을 완전히 쳐부신 것을 보았고 이것을 통해 그는 이와 똑같이 "우리가 싸우는 나머지 왕들에게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리라는 것" 을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으로써 여호와의 손은 모자라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행하시리라는 것을 추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시작하신 이가 끝낼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온전하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것을 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 권세, 그리고 선하심의 실례들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가 "인간이 우리에게 행하는 일을 두려워 한다면"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2.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편들어 싸우시는 일은 오직 승리 뿐일 수 밖에 없다. "만일 하나님이 너희를 원하신다면 누가 너희를 대적하여 이기리요?" 우리가 불안해 하면서 우리의 지도자를 따른다면 우리는 그를 모독하는 셈이 된다.
Ⅱ. 모세가 자신을 위해 드린 기도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1. 그의 기도는 이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뜻이면 자기도 요단강 건너 이스라엘 앞에 서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세는 여호수아가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을 인정한 후 여호수아에게 싸움에 나가 싸우라고 격려한 바로 그 때에 그는 자기 자신이 건너가고자 하는 강열한 충동을 받았는데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그는 어떤 야망이나 참지 못하는 불평이나 혹은 자기에게 내려진 선고에 반항하는 것으로 한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하여 은혜스러운 변경이 있기를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드리는 자세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나이다" 이라고 했다.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께 신앙의 기도를 간구할 수 없는 욕망은 어떤 것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의 욕망이 순결하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나타내 보이자. 우리는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1) 그가 여기서 간구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다.
[1]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과 그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그가 겪었던 위대한 체험 즉 주께서 주의 크심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였나이다.여호와여 당신이 시작하신 일은 완성하소서. 당신은 나에게 이들 두 왕을 정복케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나에게 보여 주셨사오며 그 광경은 나로 하여금 놀라움과 감사함을 주었나이다. 오! 나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의 나아가심에 더 많은 것을 보게 하소서. 나의 왕이시여! 이 위대한 사업은 의심없이 이행되고 완성될 것이온즉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만족하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업에서 그의 영광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 많이 보고 싶어한다. "여호와의 역사는 위대하시온즉" 그러므로 "그 안에서 기쁨을 가지는 자들" 은 그것을 더욱 보고자 한다.
[2] 그가 본 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에 생긴 선한 기억들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으리이까?"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지계 그의 능력 그리고 그의 선하심을 봄으로써 감동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할 마음의 준비가 된다. 그들은 그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과 그의 역사에 대하여 오래 전에(출 15:11) 스스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같은 심정으로 계속하여 주의 행사와 같음은 없나이다(시 86:8)라고 말하고 있다.
(2) 그의 간구는 이것이다. 즉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소서" (25절). 하나님은 그는 건너가서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이 그 백성에게 관한 것과 같이, 즉 그들은 들어가서는 안 되었던 것과 같은 맹세로 인가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위협이 조건적이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였으므로 들어가고 싶다고 간구한다. 히스기야와 다윗은 분명히 경고를 받은 후에도 히스기야는 자신의 생명을 위해 간구했고 다윗은 자기 아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했다. 그래서 전자는 허락을 받았으나 후자는 그렇지 못했다. 모세는 간구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시겠다는 선포를 돌이키게 한 때(출 32:14)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위해 뜻을 돌이켜 볼 희망을 왜 가지지 않았겠는가? "나로 건너가게 하사 아름다운 땅을 보게 하소서. 나로 건너가게 하사 거기서 왕과 지배자가 되게 하소서" 가 아니었다. 즉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구하지 아니하고 여호수아에게 통치권을 넘겨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나로 가게 하사 나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당신의 친절하심에 대한 관람자가 되게 하시고 약속의 땅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내가 믿는 바를 보게 하소서" 였다. 그는 얼마나 애처롭게 가나안에 대하여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 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아는 자들은 그것을 얻어 향유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가 "아름다운 산" 이라는 말로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뜻은 시편 78편 54절에서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는 저희를 그 성소의 지경 곧 그의 오른 손이 취하신 산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한다. 거기에서 그것은 분명히 가나안의 전 땅에 대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러나 성소와 그것의 영광을 목표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2.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 안에 자비와 심판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는 이 양자에 대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돌릴 수 있었다.
(1) 그의 요구에 대한 거부에는 심판이 있고 역시 어떤 노여움이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26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아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 죄에 대해서 불쾌히 여기신다. 그래서 그의 진노에 구원받은 자들까지도 아직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표 아래 있게 될지도 모르며 그들의 심정들이 향하고 있는 어떤 특별한 은혜가 거부될지 모른다. 하나님은 은혜스러우시고 부드러우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녀들이 잘못할 때 노하시고 그들이 바라고 청하는 바 많은 것들을 거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때문" 에 모세에게 노하셨는가?
[1] 그들이 그를 분노케 한 죄 때문이든지(시 106:32-33).
[2] 그가 절대 삼가할 수 없었던 그 때에 모세의 퇴거는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질책이 되었고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이 되었든지
[3] 혹은 그의 범죄와 유사한 행위 후에 어느 때든지 격정적이고 불경한 말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을 주의하도록 그들에게 경고가 될 수 있었던 것이 그들 때문이었다. 즉 "이것이 푸른 나무에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마른 나무에 대해서야 어떠하리요?"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그의 말에 종종 귀를 기울였으나 그 자신을 위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다. 언제나 그 음성이 들려질 수 있는 것이 위대하신 중보자 그리스도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원수들은 그에게 "그는 남은 구원하고 자기는 구하지 못하는도다" 라고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위대한 선지자 모세는 남을 위해서는 응답을 받고 자신을 위해서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그를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씨름한 야곱의 후손 중의 하나인 모세가 비록 헛되이 구하지 않았다 해도 그는 그가 구한 그 자체는 얻지 못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실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간구하는 바로 그것이 그대로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2) 여기에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에서 이 진노와 함께 하는 자비가 나타나 있다.
[1] 하나님은 "그만해도 족하다" (26절)란 말씀으로 발해진 명령으로 모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 말씀으로서 어떤 신적 능력은 의심할 바 없이 모세를 하나님의 뜻과 화해시켰고 그를 그 뜻 안에서 잠잠하도록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시지 않을지라도, 그러나,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우리가 만족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대의 아버지 하나님과 그대의 몫으로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으로 만족하라. 비록 그대가 이 세상에서 받을 모든 것을 소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만족하나니 곧 하나님은 모든 요구에 넉넉하시다(전능자이다).
[2] 그는 그의 요구를 강요하지 말라고 즉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고 지시하시면서도 그의 기도를 존중했다. 그것을 부인하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기에 부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을 우리는 요구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구할지라도, 어떤 특별한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의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부정해 버림으로써 역시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해 준다.
[3] 하나님은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가나안의 광경을 보여주시기로(27절) 약속하셨다. 비록 그가 그 땅을 소유하지는 못했을 망정 그 광경은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애?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광경을 봄으로써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고 그로하여금 그 언약의 땅에 대한 아주 명백하고도 즐거운 생각을 그에게 주고자 함이었다. 아마도 모세는 그의 관찰을 다른 목적을 위해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크게 이 목적을 위해 확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그가 그러한 광경을 볼 수 없었다면 그것이 모세에 대한 특별한 은혜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언약의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위대한 신앙인들까지도 현재의 상태에서는 오직 멀리서 하늘 나라를 볼 뿐이다.
[4] 그는 그에게 한 후계자를 마련해 주셨으니 그는 모세의 영예를 보존하고 모세의 가슴에 가득차 있는 그 영광스러운 역사, 즉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고 들어가 그들을 거기에 안착시키는 일을 수행하고 완성할 사람이었다(28절). 너는 이 일을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라." 하나님이 책임을 맡기시는 자들에게 분명히 용기도 아울러 주실 것이다. 교회의 일군들은 자기들은 비록 죽게 되어 무덤 속에서 침묵을 지키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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