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람의 첫 번째 신탁(민수기 23:1-12)
Ⅰ.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한 커다란 준비가 베풀어졌다. 이러한 준비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버리고 모압편에 서시든지 아니면 중립적인 입장에 서시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키는 대로 하리라고 생각하는 미신의 어리석음이여 ! 발람과 발락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마련하지 않은 제단과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매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쇠고기를 잡수시며, 염소의 피를 마실 것이라" 고 생각한 것 같다. 거기에 아무런 믿음이나 순종이 없이 다만 제물만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무의미한 노릇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른 어떤 지방의 토속신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단의 수를 늘린 것은 그들이 선조들의 신앙에서 타락하여, 우상 숭배로 전락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여러 개의 제단을 마련한 것은 여러 신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이 죄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었다" (호 8:11).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망상 속에서 허탄한데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성소와, 기름 부은 제단을 두신 이스라엘을 버리고 자기들에게 오시기를 염치없이 기대하였다.
1. 발람은 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고 귀족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을 자랑하며, 교만에 빠진 것을 보라. 이런 것은 스스로를 하나님과 경배 받는 자의 자리에 올려놓는 악한 자의 정신이다. 어떤 권위에서 발람은 이런 명령을 할 수 있었을까! 돌이나 뗏장을 가지고(내가 지시하는 곳에) "일곱 개의 단을 쌓으라" 고 발람은 명령했다. 이처럼 발람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악의를 경건의 모양으로 숨겼다. 그러나 그의 제물은 "악한 뜻으로 드리는" 가증한 것이었다(잠 21:27). 그가 목적하는 바는 의로운 제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불의한 삯으로 자기 자신을 부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2. 발락이 얼마나 아첨을 많이 하였는가 보라. 단은 즉시 세워졌고 그 제물도 최상의 것으로, 즉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 을 준비하였다. 발락은 또 "번제물 곁에 서 있으라" 고 하는 발람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으며, 그 명령에 화를 내지도 않았고, 또 그것이 고달프거나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비방하지도 않았다.
Ⅱ. 모세가 전해 준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은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하셨다(신 23:5).
1. 하나님은 발람의 입에 축복의 말씀을 담아주셨다. 제물이 타고 있는 동안 발람은 물러섰다. 그리고 그는 "홀로" 그 산당의 높은 곳에 있는 어두운 숲의 가장자리로 나왔다(3절). 이처럼 발람은 홀로 있는 것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좋은 기회를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이나 세상의 일 또는 세상과의 대화에서 물러나며, 홀로 있기를 즐겨하며, 홀로 있어도 결코 홀로 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가 때문이다. 그러므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제대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라.그러나 발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혹시 만나주실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물러섰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범죄함을 알며, 하나님께서 나중에 화를 내서 자기를 만나시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처럼 의심을 품고 말을 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라" (3절).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가는 것처럼 꾸몇으나, 실제로는 사술을 쓰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24:1 참조).
발람의 의도는 어떻든 하나님은 그를 이용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발람에게 임하셨다" (4절). "빛이 어떻게 어두움과 사귀지요?" 그것은 분명히 친밀한 사귐은 아니다. 발람의 길은 여전히 사특한 길이었으며,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적대자였다. 그러나 발락이 하나님의 신탁을 구하기 위해 발람을 선택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러한 고백을 말하게 하셨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적대하기 위해 무장하고 나선 용서할 수 없는 우리들을 보복하게 하신 것이다. 발람은 아마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신 것 을 깨닫게 되자 자기의 행한 바를 자랑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 곱 단을 베풀고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렸나이다." 발람이 어떻게 그것을 마련하였는가? 그는 아무 것도 내놓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을 오직 발락이 내놓았다.
(1) 그런데도 그는 자기가 위대한 일이나 해 놓은 듯이 자랑하였다. 위선에서 나오는 거짓된 경건은 흔히 자랑을 나타내며, 헛된 영광을 나타낸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간다(눅 18:11, 12).
(2) 그러므로 하나님도 이에 그를 만족하게 하여 주기 위해 그의 원하는 바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마치 하나님을 자기에게 빚진 자로 생각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부릴 수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다. 또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물들 때문에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으므로, 적어도 그 댓가로 모압 왕을 위해 그의 이스라엘을 희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흔히 악인들은 그들이 경건한 모습만 보이면 하나남께서 그들을 잘 돌보아주시며, 특히 박해 시대의 커다란 비도덕적인 행실에 대 해서도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 속는 것이다(사 16: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 제물이 가중한 것이긴 하여도, 발람의 기대를 이용하여 "당신의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 주시는" 기회로 삼으셨다(5절). 왜냐하면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오기 때문이다(잠 16:1). 그리고 또 하나님은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의 것이라" (시 12:4)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다. 인간의 입을 지으신 분은 그것을 어떻게 조정하여, 당신 자신의 뜻을 섬길 수 있게 하실는지를 알고 계신다. 이 말씀은 "그들의 입을 놀려 하늘을 거역하는" 완악한 죄인들에게 무서움을 전해 준다. "하나님은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하게" 하실 수 있다(시 64:8). 그리고 이 말씀이 언제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그의 증인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거역하려던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면, 더우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백성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기 위해 열심히 증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많은 말씀을 주실 것이다. "동시에 그들에게는 어떻게 그들이 말하여야 할 것까지도 가르쳐 주실 것이다."
2. 발람은 발락이 듣는 데서 축복의 말을 말다. 발람은 발락이 "벌제물 곁에 서서" (6절) 열심히 일이 성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해답을 듣고자 하는 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제물 곁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어야 한다. 발람은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기원하도록 부탁을 받고 이끌려 온 그 장소에 서서 노래를 지어 말을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축복의 노래였다 (7절). 그는 이스라엘의 안전과 행복과 축복을 노래하였다.(1) 발람은 이스라엘이 그의 독기 묻은 창이 도저히 미치지 못 할 안전한 곳에 있다고 말했다.
[1] 발람은 그의 계획이 그들을 저주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발락이 자기를 불러 왔으며, 자기도 왔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7절). 그에게 전달되어진 소식은 "와서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는 것이었다. 발락의 의도는 이스라엘이 싸움을 하고, 발람이 자기들의 군사들을 축복하게 하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위해 예언하고 기도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2] 발람은 그 계획이 실패하였으며, 그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꾸짖을 수도, 저주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할 수 있으랴" 고 말했다(8절). "그러므로 그는 하지 않았다" 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그는 할 수 없었다" 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이 정당한 고백이다.
첫째, 다른 사람들은 그 가치를 인정해 주었으며, 자기 자신도 틀림없이 귀하게 여겼던 자신의 주술적인 능력에 대해서 그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고백하였다. 그는 그 방면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실패자임을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술을 이용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레 19:31). 하나님의 섭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그러한 복술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보여 줌으로 그 율법의 정당한 이유를 밝혀준 셈이다. 이제 그들은 애굽의 마술사들의 어리석음을 보았듯이 여기 동방의 유명한 마술사의 어리석음도 보게 되었다(47:12-14 참조).
둘째,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있는 주권과 지배를 고백하는 것이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시키시는 일이 아니면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뜻을 지배하실 수 있으며. 그의 생각을 거꾸로 돌려놓으실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세째,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전은 감히 침범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다. 1)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보잘 것 없는 비루한 존재로 떨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무시하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거절하시지도, 버리시지도 않으셨다. 2)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사람들은 지옥의 악의도 받고 있다. 뱀과 그 후손들은 그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 3)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수가 그들보다 우세하더라도 결코 그들을 저주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대해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 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롬 8:39).
(2) 발람은 세 가지 면에서 그들의 축복을 말했다.
[1] 발람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들과 다른 그 특수성에서 오는 축복을 말했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았다" 고 말했다(9절).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조잡하고 무질서한 오합지졸이며, 이 곳 저 곳으로 떠돌아 다니는 무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들의 질서정연하게 꾸며진 진영을 보고 또 잘 훈련된 모습을 볼 때 매우 놀랬을 것이다. 발람은 그들이 독특하게 사는 백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그렇게 살리라고 예견하였고, 그들의 그러한 특수성은 그들의 무한한 영광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훌륭한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이웃에 있는 모든 나라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신앙과 종교 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음식과 의복과 일반 풍속에 있어서도 이 세상으로부터는 구분되어진, 그리고 그 속에 파묻히지 않은 백성으로서 모든 것이 달랐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이것을 비난거리로 삼았지마는 사실은 그것이 그들에 대한 칭찬이었다. 그들이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기" (시 106:35)까지는 그들은 이러한 평판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세상과 분리되며, 세상의 방식과 관습대로 살지 않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며 동시에 명예가 된다. 특별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특권에서부터 오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아마 발람은 이 점을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같은 수준에 머물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간 백성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따로 떼어내어진 백성으로서 다른 모든 민족들보다 존귀함을 받는다.
[2] 발람은 이스라엘의 막대한 숫자에서 오는 축복을 말했다. 그 막대한 숫자는 그들의 명예요, 또한 그들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었다(10절).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예산할까?" 발락은 무엇보다도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했던 것이다.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의 많음을 인함이라" (22:3).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숫자가 더 불어나리라는 발람의 예언을 통해 발락의 두려움과 초조를 더하게 하여 주셨다. 발락은 될수록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여 주면 그들에 대해 더 많은 분격을 터뜨리게 하고, 그 저주를 더욱 지독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발람을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여 주었던 것이다(22:41).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많은 숫자에 대해 노하기는커녕 오히려 감탄하였다. 하나님의 백성과 깊이 사귀면 사귈수록 그들의 훌륭한 점을 더 많이 받게 된다. 발람은 그 숫자를 말하면서 특별히 다음과 같든 점에 관심을 모았다.
첫째, "야곱의 티끌" 이라고 하였다. 즉 그것은 야곱의 백성이란 뜻인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편만하리라고 예언하신 말씀에서 온 것이다(창 28:14).이처럼 발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고백하였으며, 그리고 그 약속은 앞으로도 계속 성취되리라는 것을 기대하였다. 하나님께서 능히 헤아릴 수 없다고 하신 야곱의 티끌을 헤아려 본 것이 다윗의 잘못이었을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 사분지 일" 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네 개의 기치 아래 사방으로 전개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진영의 모양을 시사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매우 거대한 기구이다.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더우기 마지막 큰 날에 모든 그의 백성들이 그에게 모일 때 더욱 그 숫자가 말할 수 없이 많아질 것이다(계 7:9).
[3] 발람은 이스라엘의 종말에 있어서의 축복을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고 있는 의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또는 저 세상에서의 나의 장래의 상태나 받을 보상이 그들의 것과 같아지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뜻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마땅히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오는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의인도 죽어야 한다. 발람 자신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한 것처럼, 우리도 마땅히 우리가 죽을 줄 알아야 한다.
둘째, 발람은 계속해서 영혼의 불멸과, 죽음 너머에 있어서의 인간의 또 다른 상태를 가정하였다. 이것은 고대 사람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믿고 있었다는 고상하고도, 확실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다른 세상에서의 행복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악인의 죽음 보다 의인의 죽음이 바람직한 죽음이라고 기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인이나 악인의 죽음을 그 모양이나 환경에서는 아무런 구별을 찾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한가지로 보일 따름이다."
세째, 발람은 의인들이 살아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죽을 때의 축복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래서 그는 의인의 죽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죽음보다 바람직한 것이며, 나가서 생명 자체보다도 더욱 바람직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소원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원은 "내가 죽을 때 의인의 죽음과 같이 죽기를 완하노라" 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소원은 "나는 지금 의인의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죽기를 원하며, 이 순간 나는 종말을 맞이하기를 원하노라" 는 것이기도 하였다. 현재 발람이 서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얼마 되지 않아 모세가 죽을 모압의 한 산이 있다. 그리하여 아마 하나님을 모세로 하여금 발람이 원했던 것 같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하게 하기 위해 용감하게 그 산에 올라가도록, 발람의 입에 그러한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네째, 발람은 그의 확고한 결단보다는 하나의 종교적인 의견을 나타내보았을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인과 같은 죽음을 죽기는 원하면서도, 의인의 삶과 같은 삶을 참고 살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종말이 의인의 종결과 같은 것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길을 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늘에서는 성자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서는 성자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게으른 자의 소원이다. 그의 손이 수고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그를 죽이는 소원이다." 이 발람의 소원은 한갖 소원에 불과한 것이요, 결코 기도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소원도 다만 그 결과만을 기다리며,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 것이기에 헛된 소원일 따름이다. 이처럼 그의 축복은 죽음이나 죽음 너머까지의 궁극적인 종말에 관해서 언급하는 축복이었다.
Ⅲ. 그 축복의 말씀에 뒤따른 다음과 같은 두 사람의 태도를 볼 수 있다.
1. 발락은 몹시 조바심을 하고 애를 태웠다(11절). 발락은 그의 제물을 차려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실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응답이 자기 마음에 맞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발람에 대해 벌컥 화를 내고 달려들었다. 그러한 응답이 순전히 발람의 뜻에서 나온 것 모양으로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고 힐난하였다. "그대 가 왜 나를 실망시키느냐" 는 말투였다. 때로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며, 교회의 원수들과 그리고 그들의 무력한 사술을 비웃으시며, 그들을 초조하게 만드신다.2. 발람은 묵묵히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순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익살맞게도 그는 발락에 대해 그가 크게 깨닫기나 한 것처럼 선지자의 엄숙한 음성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 할 수 있으리이까?" (12절)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가지고 악 한 선지자를 통해 악한 왕을 혼란에 떨어뜨리게 하기 위해 이러한 고백을 발설하게 하셨다.
발람의 두 번째 신탁(민수기 23:13-30)
Ⅰ.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기 위한 두 번째 준비가 전과 같은 모양으로 마련되었다.
1. 그 장소가 달라졌다(13절). 발락은 발람이 "바위 위에서" 전체 이스라엘의 진영을 보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에 반하게 되었거나 아니면, 공포에 질려서 감히 그들을 저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발락은 발람을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부터는 이스라엘 진영의 일부분이 보일 뿐이며, 그들의 모습이 매우 형편 없도록 보일 만한 그런 곳이었다. 그리하여 거기 가면 틀림없이 발람이 저주의 불덩어리를 이스라엘을 향해 던질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는 곳이었다고 보인다. 궤계를 써서 교회를 넘어뜨리고 쓰러뜨리려고 애쓰고 있는 교회의 원수들의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라. 그들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며, 돌 하나라도 뒤집어놓지 않는 것이 없으며, 하여 보지 않는 시도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으며 얼마나 연구를 하여 보았는가!2. 다시금 제물이 다련되었다. 단을 새롭게 쌓았다. 모든 단에 수송아지와 수양을 드렸다. 그리고 발락은 전과 같이 드린 제물 곁에 가까이 서 있었다(14, 15절). 우리가 만일 발락이 저주를 내리게 하려고 열심이었던 것처럼, 축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다한다면(물론 발락이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리게 하려고 하였지만 결국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와 또 자기 백성에게 내리기는 했어도), 우리는 결코 신앙적인 의식을 위해 우리가 마쳐야 할 부담과 수고를 아낌없이 바칠 수 있을 것이다.
3. 발람은 다시금 하나님께 나갔다. 하나님도 그를 두번째 만나주셨다. 그리고 다른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주셨다. 그런데 그 말씀은 지난 번 주신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는 말씀이었다(16, 17절).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헛되이 찾지 말라" 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더욱더 "야곱의 후손 중 누구" 에게나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누구나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발람과 같이, 그의 가르치심과 명령뿐만 아니라, 관대한 보상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발람이 돌아왔을 때, 발락은 어서 속히 어떤 소식을 가져오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이까! 좋은 소식이 있읍니까? 아니면 일이 잘 될 희망이라도 있읍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할 때의 우리의 물음이 되어야 한다(렘 23:35 참조).
Ⅱ. 하나님의 넘치는 능력은 두 번째도 저주의 말씀을 축복의 말씀으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이 두 번째의 축복의 말씀은 첫 번째의 축복의 말씀보다 훨씬 크고 그리고 강력한 것이며, 그 축복의 말씀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가망을 완전히 배제시킬 만한 것이었다. 발락이 애써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듣기를 원하기 때문에(17절), 이번에는 발람이 특별히 그를 지칭해서 "발람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라고 말을 하였다(18절). 이 말씀은 발락이 비록 왕이지마는(한 마디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여 경청하여야 하는 말씀이며), 두려움으로 들어야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일어나 들을지어다" 라고 말했다. 그의 후계자인 에글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을 때 "좌석에서 일어났다" (삿 3:20).
1. 발람은 이 말씀 속에서 발락을 확실히 슬프게 하고, 실망시키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1) 그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1]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아부 쓸데가 없는 것이며,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다" (19절). 인간의 마음은 쉽사리 변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말을 어긴다. 인간은 후회를 잘하기 때문에 식언도 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그의 약속을 취소하시지 않으신다. 발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바꿀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일이 있다(8절). 이어서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뜻을 변화시키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이요, 하나님의 완전함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으시다" (히 6:18). 간혹 성서가 하나님께서 "돌이키셨다" 고 말하고 있지마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 변했다는 뜻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마음이시며, 누구도 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조금도 변동이 없으시며, 변화의 그림자도 없으시다" 는 것은 위대한 진리이다.
1) 발람은 발락에게 아래와 같이 반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리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이 있어서 말씀하셨는데 당신의 섭리에 따라서 그것을 실천하시지 않으시리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약속하셨는데 어찌 그대로 이루시지 않으시리요?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며, 자기 자신의 말씀에 충실하신 분이 아니시라고 우리가 어찌 감히 생각할 수 있으리요? 그의 모든 명령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그의 모든 약속은 어길 수 없는 것이니이다."
2) 발람은 이상과 같은 일반적인 원칙을 하나의 구체적인 사례에 적응시켰다(20절). "내가 축복의 영을 받았으니 나는 돌이킬 수 없나이다" 고 말했는데,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할 수 없나이다" 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축복 받은 백성이요, 여호와께서 축복하신 자의 후손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그들 머리 위에 있다. 그들은 축복의 약속 아래 태어났고, 가나안의 축복을 위해 태어났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진리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어기시고 당신 스스로를 속이시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 저주를 내릴 수 없다.
둘째, 이스라엘은 지금 당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 (21절). 야곱에게 전혀 허물이 없다거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못보셨다는 것은 아니다. 1) 다만 아직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며, 그들을 멸망시켜야 할 정도의 허물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이 나쁘기는 하지만 그처럼 나쁘지는 않다는 것이다. 2) 그들에게 특히 허물과 죄가 된다는 우상 숭배의 망령됨이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 다시는 그러한 일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른 일로서는 잘못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려고 하시지 않으셨다. 발람은 죄 말고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사이에 죄가 판을 치고 있지 않는 한 그들을 멸망시킬 저주를 내리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해를 끼치고자 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죄로부터 떠나 있는 한 우리는 해를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렇게 읽는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보고 계시지 않으시며, 이스라엘에게 불행을 끼치는 것을 묵과하시지 않으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지도 묵과하시지도 않으시며, 이스라엘이 해를 입는 것을 보고 계시지 않고, 그들을 바르게 하여 주시며, 그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신다" 는 뜻으로 읽는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나 그의 백성들이 당하는 위해를 그냥 보고 계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끼치는 해가 곧 당신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으로 간주하시고 이를 갚아주신다.
세째, 야곱과 이스라엘의 힘을 감히 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람은 발락에게 그들과 겨루어 싸울 방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특별한 양식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에게서 떠나려고 하시지 않으신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며, 그 때문에 오는 승리를 노래하고 있다. "왕을 부르는 소리 또는 경고가 그 중에 있다." 승리와 성공을 확신하며 원수들을 향해 부르짖는 함성은 계속 하나님을 왕과 정복자로 여기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은총을 체험했으며, 그들을 위해 작용하신 그의 능력을 힘입은 바가 많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던 것이다" (22절). 그의 능력은 막을 수도 제재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처럼 영광스럽게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영광스럽게 마치게 하실 것이다. 4)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동안 이스라엘은 적대자들을 능히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들소의 힘을 가질 수 있었다(24:8 참조). 이런 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힘이다.
[2]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발람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사술을 다해도 이스라엘을 해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였다(23절).
첫째, 발람은 자기가 실패한 것을 자인하였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나 복술이 진정 있을 수 없다. 지옥의 저주는 하늘의 축복을 좇아 낼 수 없다. 이러한 종류의 시도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 가난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저 교회를 나타내고 이스라엘은 번창하고 진보된 고 교회를 나타낸다고 본다. 그러나 고(高)교회이건 저교회이건, 교회의 친구가 많건 적건 모두가 하나의 교회가 된다. 그리고 그 교회의 번창을 막을 무기는 없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반대하는 어둠의 세력들의 책략과 계획을 쉽사리 좌절시키며 실망시킬 수 있으며 또 꼭 그렇게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할 수 없다.
둘째, 발람은 이것이 앞으로도 계속 기억되리라는 것을 예견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이 때에" 즉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한" 말을 기억하고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일을 그 백성들을 위해 행하셨는가 ! 이것은 놀라움과 감사의 념을 가지고 말해질 것이며, 이웃 백성들에게 대해 그들의 신이 그들을 이처럼 돌봐준 일이 있는가고 묻는 도전과 함께 말해질 것이다. 교회의 대적들의 악한 계획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신 33:26). 발람이 여기서 다른 이방의 모든 신들보다 훨씬 뛰어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우월성에 대해서 말한 것을 모세가 기억하고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특히 발람은) 스스로 판단하도다" 라고 말씀하였을 것이다(신 32:21). 그러므로 발락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가망을 도저히 가질 수가 없었다.
(2) 발람은 발락에게 오히려 그들로부터 멸망당할 것을 두려워하여야 할 이유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웃 나라에 피를 흘리게 하는 백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와 그의 나라가 피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다루기에 너무 큰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계획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24절). 보라 그리고 두려워하라. 머리를 웅크린 사자와 같이 한동안 가까이에 자리잡고 누워 있는 이 백성은 조만간에 말로 하는 큰 "사자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얻을 승리를 발람이 예견하고 그것을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지금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그 땅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 결코 그들의 싸움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웃의 집이 불탈 때 그는 마땅히 자기의 집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던 것이다.
2. 이 실패 뒤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 발락과 발람은 두 사람이 모두 그 바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1] 발락은 이제 그의 마술사가 침묵하기를 원했다. 발람이 그의 원하는 대로 말을 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기를 원하게 되었다. "그들을 저주하지도 말고. 그들을 축복하지도 말라" (25절). 만일 그대가 그들을 저주할 수 없다면, 나는 그대가 그들을 축복하지 않기를 간청하노라. 만일 그대가 나의 군대를 도와주고 고무하여 줄 수 없다면, 그들을 반대하거나 낙담시키지 말라." 하나님은 그를 떠난 자들을 "많은 모략으로" 피곤케 하실 수 있으시다(사 47:13; 57:10).
[2] 발람은 여전히 자기가 위압당하였다는 것을 시인하며,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한 말을 되풀이하였다(22:38).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6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길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궁리가 있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강하게 작용한다. 둘째, 좁은 의미에 서 볼때도, 교회를 해치려고 만들어진 무기가 맥을 못추듯이, 교회를 송사하기 위해 일어난 해도 하나님은 정죄하신다(사 54:17).
(2) 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시도를 계획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실패가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더욱 혼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 계획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번째의 시도에 들어갔다.
[1] 그들은 장소를 옮겼다. 발락은 드디어 그러한 실패가 발람의 잘못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전에는 발람을 나무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발람이 하나님께 얽매어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도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막지 못할 그런 곳으로 발람을 데려가기를 원했다(27절). 발락과 발람은 이러한 일을 거듭하면서 점점 더 용기를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처음에는 가지 못하게 하셨다가, 두번째는 가도록 허락해 주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처럼 거듭하는 동안 그들이 원하는 지점까지 이르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범한 죄가 신속히 벌을 받지 않게 되자, 죄인들은 더욱더 악한 일을 하고자 열심이다.
발락이 이번에 발람을 데리고 간 장소는 브올산 꼭대기이다. 그 산은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아마 그 곳에는 바알신을 예배하는 곳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바알 브올이라고 일컬어졌다. 발락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 장소를 택했다고 보인다. 첫째, 그 곳은 바알의 거처로 생각되어졌기 때문에 모압의 신인 바알의 거처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결코 와서 그들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둘째, 이곳은 그의 신이 좋아하시는 곳이니 만큼 여호와도 좋아하셔서 잘 생각해 주시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 이 다. 이처럼 아람 사람들은 여호와가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왕상 20:28).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곳에서보다 한 곳에서 더욱 능력을 발휘하신다고 보는 견해이다.
[2] 그들은 또 다시 일곱 수송아지와 일곱 수양을 일곱 단에 바치는 제사를 드렸다(29, 30절). 그들은 그들의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약속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이런 값비싼 제물을 참고 드렸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 바 환상이 마지막에는 꼭 실현되리라는 약속을 받은 우리는 그 실현이 더디다고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눅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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