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민수기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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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므리바의 물 사건(민수기 20:1-13)

그들은 38년 동안 사막에서 긴 행군보다는 지루한 휴식을 취했다. 그들의 뒤에는 홍해가 있었다. 이제 이스라엘 군병들은 다시 가나안으로 행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받아 다시 방랑의 길을 계속해야 했던 바로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금 와 있다. 지금까지 그들은 미로(迷路)와 미궁(迷宮) 속을 헤메었다. 그러는 동안 형을 받은 폭도들에 대한 선고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이 다시금 정도(正道)에 들어섰다. 그들은 가데스에 머물었다(1절). 그러나 가나안 국경에 접해 있는 가데스 광야가 아니라 에돔의 경내에 있는 다른 가데스였으며, 약속의 땅은 아직도 멀었다. 그러나 홍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이었고, 그들은 급히 가나안 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Ⅰ. 거기서 미리암, 곧 모세와 아론의 누나가 죽었다. 아마 모세 와 아론보다 더 나이가 많아 보인다. 모세가 갈대 상자에 담겨 강에 던져질 때 그것을 목격한 그 누나가 바로 미리암이라고 본다면 분명 그렇다(출 2:4). "미리암이 거기서 죽었다" (1절). 그녀는 여자 예언자였다. 이스라엘에게 많은 자비를 베푼 도구 노릇을 했었다(미 6:4).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를 들고 이스라엘 앞에서 가며, 그들을 위해서 기사(奇事)를 행할 때, 미리암은 나팔을 들고 그러한 기사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 앞에서 갔다(출 15:20). 그러나 그녀도 한 때는 원망을 했다(12:1). 고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Ⅱ. 여기에 또 다른 므리바라는 곳이 나와 있다. 므리바란 곳은 이 미 나온 적이 있다. 그들이 광야 여행을 시작하던 무렵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으므로" (출 17:7) 므리바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에 또 므리바란 곳이 있다. 이것은 그 행군의 끝 무렵이다. 이유는 같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으므로 므리바의 물이라" (13절)고 했다. 처음에 있었던 일이 여기서 재연된 셈이다.

1. "회중에게 물이 없었다" (2절). 르비딤의 바위에서 나온 물은 그때 필요한 양만큼만 흘러 나왔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보통의 수단으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때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일반 섭리가 물을 공급하고 있는 곳에서는 기적이 중단되는 것이 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저들은 물이 없는, 적어도 온 회중이 먹기에는 부족한 곳에 당도했다. 우리도 부족함이 많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언제든 여러 가지 불편에 처하게 될 것을 오히려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물이 풍족한 것은 큰 자비이다. 우리가 필요한 자비를 발견했을 경우에는, 그 자비의 진가를 고백해야 한다.

2. 이리하여 그들은 원망과 소동을 일으켰다(2절). "모였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치려고" 팔을 들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다투었다(3절). 그들의 부모들이 하던 똑같은 말투였다.

(1) 그들은 잠시 하나님의 자비가 없어 보이는 곳에 처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악인들과 함께 죽어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자기들을 살려 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들은 집행유예를 내린 자비를 멸시하고, 하나님께서 더 큰 악을 베푸시려고 잠시 불 속에서 꺼내어 놓았다는 듯이 하나님의 자비에 도전했다. 그러나 실 상 저들이 자기들 형제들과 함께 죽었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 저들은 이미 잠시후면 그들의 형제들처럼 죽을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암 5:18).

(2) 자기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광야로 몰아 넣었다고 분노했다(4. 5단). 그들은 모세와 싸웠다. 그러나 모세가 한 것은 여호와의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들은 어느 민족에게 보다도 큰 은혜를 받고도, 그것이 자기들의 권리 침해라고 말했다. 그들은 자유보다 노예를 원했다. 약속의 땅보다 속박의 집을 좋아했다. 저 들이 당면한 어려움은 물뿐이었지만, 저들에겐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이 가득했다. 자기들에게 포도나무나 무화가가 없다는 것 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고생이라는 듯이 투덜거렸다. 다음 사실은 저들의 범죄를 가중시키는 것이다.

[1] 그들은 지금까지 부모들의 불평과 불신으로 인해서 고생해 왔다. "그들은 그 부모들의 패덕을 지고 40년간 광야에서" (14:33) 유랑하게 되었고, 이제 그 40년이 거의 차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의 전철을 답습했으니, 벨사살이 받은 책망과 같다. "이것을 다 알고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였나니다" (단 5:22).

[2]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고, 모세와 아론의 관대함과 신실함을 경험했다.

[3] 미리암이 최근에 죽었다. 그들의 지도자 하나를 잃었으므로. 남은 자들을 더욱 존경했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목자 없는 양같이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점점 무례히 행했다. 누이를 잃은 그들에게 조위(弔慰)를 표하기는커녕, 더 괴롭혔다.

3. 모세와 아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회막으로 물러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알고자 했다(6절). 전과 같이 그는 "엎드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탄원함이요. 하나님의 지시를 바람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언급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망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부복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들을 위해 중재의 기도를 드렸다. 거기서 그들은 명령을 기다렸다. "여호와여, 말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4.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문제를 해결하셨다. 죄인들을 그들의 죄대로 심판하시기 위해 법정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는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않으실 것이다" (호 11:9). 또 "항상 다투시지 않으신다" (창 8:21 참조).

(1) 하나님은 영광의 보좌에 나타나셨다. 그들의 부당한 원망 소리를 제압하시기 위해서이다(6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사람들의 요동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우리의 욕정을 제어하는 힘이 되고, 우리의 입에 자갈을 먹이는 것이 됨을 명심하자.

(2) 그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사, 그들의 정당한 소망을 이루어 주셨다. 물을 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필연적이다. 비록 그들의 탄원 방식이 원망조며 불법적인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물을 주지 않고 그들을 심판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즉각 요구에 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8절).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 번 명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전과 같이 그 백성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며, 아무리 그들이 역경에 처하고 자연적 조건이 극한에 처해 있더라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을 내실 수 있으며, 또 이미 그렇게 했고, 다시 그렇게 하실 수 있으니, 그의 팔이 짧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은 지난번 경우의 그 바위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못 가지게 하기 위해서-즉 그 바위 주위에 어떤 숨은 샘이 있었다든가- 하나님은 다른 한 바위를 지시하셨다. 전 번처럼 바위를 정해 준 것 이 아니라 모세가 원하는 바위를 치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분에게는 어떤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1] 하나님은 지팡이를 들라고 했다. 그가 애굽에 재앙을 불러들이고 바다를 갈랐던 그 유명한 지팡이다. 그의 손에 있었던 것이다. 그 지팡이는 모세와 그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위대한 사건들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고 또한 지금도 하나님을 믿도록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이 지팡이는 회막에다 두었던 것 같다 (9절). 복음서에서 처럼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 곧 "그의 능력의 지팡이" 라고 불리웠다(시 110:2). 아마 그 지팡이가 모세의 지팡이를 가리킬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장로뿐 아니라 온 회중을 모아서 이 일의 증인이 되게 하라고 했다.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보면 저들의 불신앙 이 부끄럽게 될 것이며, 또 확신도 커질 것이다. 하나님의 기사(奇事)에는 속임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은 빛을 피하지 않으며 많은 증인들의 목격을 피하지 않는다.

[3]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위를 향해 명하라고 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려 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이 많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던 자들을 부끄럽게 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 바위보다 더 굳어 있었다. 굽힐 줄 모르고 복종할 줄 모르는 자들이다.

[4] 하나님은 그 바위가 물을 내리라는 약속을 했다(8절). 그대로 되었다(11절). "물이 솟아 나왔다." 이것은 "반석에서 꿀" 들 내며 "단단한 바위에서 기름" 을 내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의 한 예증이요, 동시에 그렇게 죄많은 백성들에게 행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한 예증이기도 하다. 이들은 새로운 세대들이다(옛 세대는 이때쯤 되어서는 거의가 죽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도 그들의 앞서간 조상들처럼 악하다. 저들의 피 속에는 원망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거룩한 은혜에 대한 자격은 상실되지 아니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의 덕분이었다. 그는 하나님이요 인간이 아니다. 그들을 아끼고 용서하신다. 나아가 그는 그들이 먹은 물을 그들의 짐승들에게까지 풍족히 먹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8, 11절), 영적 축복을 상징하는 영적 물도 먹여 주셨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5. 모세와 아론은 이 문제의 처리를 온당치 못하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히 노하여, 그들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는 영광을 차지하지 못하리라고 했다(10-12절).

(1) 이것은 이 이야기 중에서 특이한 부분이다. 그러나 많은 교훈이 들어 있다.

[1] 이 일로 하나님은 대단히 노하셨다. 그것은 당연했다. 하나님은 결코 이유 없이 노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신의 종이요, 자비를 받아 신실했고, 총애 받는 자들이요, 지극히 영광을 받았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앙이 이스라엘이 당하던 것처럼 죽게 함으로써 수치와 곤욕을 당하게 하셨다. 즉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분명코 그 범죄는 그러한 처벌을 받을 만했다.

[2] 그러나 왜 그렇게 하나님이 분노하셔야 했는지 그 사연은 불확실하다. 그들의 잘못은 복잡하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 들에게 "반석에게 명하라" 고 했는데, 그들은 "백성들에게" 명하고, "반석을 쳤다." 이번에는 치라는 명령이 없었다. 그들은 말만으로는 안 될 줄로 알았다. 말씀의 권능을 불신하여 순수한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도 세속적 권능에 의지한다면, 여기서의 모세처럼 말로만 해야 할 때도 반석을 치는 격이다.

둘째, 그들은 이 기사의 영광을 지나치게 자기들이 차지하려 했다. "우리가 물을 내야 하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권능이나 자격 때문에 된 일처럼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지 않았다" (12절). 즉 그들은 이 기적을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에 돌려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셋째, 불신앙은 중대한 죄악이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았다" (12절). 아니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배신" 한 것이다(27:14).명령은 반석에서 물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신으로 그 명령을 범했고, 그 명령의 실효성을 의심했다. 그들은 회의적으로 말했다. "우리가 물을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이처럼 패역한 세대들을 위해서 물이 나올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불확신이 마음에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킬 것인지를 의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그 반석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비딤에서는 그러했었다(출 17:6). 가시적 표적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용하려 하지 않았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의 견해에 의하면, 그들의 불신은 이제 그 40년이 끝장난 지금에 와서 자기들이 과연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 또는 백성들의 원망 때문에 또 다시 시련기를 갖도록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를 의심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반석이 열려 물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건을 계속적인 체류의 지시로 혼돈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 백성들은 지정된 시간에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그들이 가나안에 못들어가게 된 것은 정당하다.

넷째, 그들은 감정적으로 말하고 행동했다. 이것이 그 죄악의 사건이다(시 106:33). 즉 "그들은 그(모세)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래서 모세가 자기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는 것이다. 모세는 화가 나서 그들을 "패역한 너희들" 이라고 했다. 그들이 패역한 자들 인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불렀다. 그래서 모세는 나중에 정당한 견책으로(신 9:24) 그들을 그렇게 부르나 그것은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격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망령되이 터져 나온 발언이었다. 그것은 "라가" 또는 "바보" 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처음에 한번 치고서는 물이 나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은 그가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말 해 준다. 온유한 마음으로 말하면 정당한 말도, 화가 나서 하면 심한 죄악이 될 수가 있다(약 1:20 참조).

다섯째, 가장 죄악을 크게 가중시킨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가운데서" -그들은 이들에게 희망과 신앙과 온유의 본을 보였어야 했다- 불신앙을 보였다는 그 점이다. 모세는 다른 때에도 불신의 죄를 범한 것을 알 수 있다(11:22, 23).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모세의 사이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견책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공공연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그들에게 내려 주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으려는 백성들의 희망을 좌절시키고 있다는 듯이,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께 치욕을 돌린 사건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벌은 엄중했다. 지위와 영예가 높은 자의 범죄는 그만큼 더 무서운 벌을 받는 법이다.



(2) 이 사건 전체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

[1] 가장 선량한 인간, 가장 탁월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도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모세는 대단히 온유한 자이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나타내는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가 넘어질까 조심하자."

[2] 하나님의 재판이 사람의 재판과 다르다. 우리는 모세의 언동에는 별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것이 당신께 중대한 모욕이 된다는 것을 아셨다. 그는 인간의 마음 바탕을 아시고, 그 기질을 아시며, 그들이 무엇을 꾀하는지를 아시며,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의 심판은 신실에 따른"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때에라도 그렇단 말이다.

[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까지도 살피시고 분노하시며, 당신께 가까운 자일수록 더욱 노하신다(암 3:2). 시편 저자는 모세와 아론의 이 죄를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다(시 99:8). "주여, 주는 저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나이다." 많은 사람이 이 생애 속에서는 남김을 받으나 저 생에 가서는 심판을 받듯이, 이 생 속에서 벌받은 많은 사람도 또한 저 생에 가서는 구원을 받기도 한다.

[4] 우리의 마음에 화가 났을 때에는, 혀로 범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때이다.

[5] 그러나 이것은 모세의 정직성과 기록에 있어서의 불편 부당성을 보여 준다. 즉 그는 자기의 잘못을 기록했다. 결코 은폐하지 아니했다. 그는 자기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다고 알았으므로 자기의 언행을 그대로 기록했다.

끝으로, 이리하여 그곳이 므리바로 불리운다(13절). 다른 므리바와 구별하기 위하여 므리바-가데스로 불리우기도 한다(신 32:51). 그 뜻은 "다툼의 물" 이다. 이 백성들의 죄와 모세의 죄,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기념하는 이름이다.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고 모세를 영예롭게 인정해 주신 자비의 기념비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다. 그의 자비가 심판을 물리칠 때 이렇게 불리운다(호 11:9).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당연히 그랬어야 했지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했다(12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스스로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당신의 영광에 침해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화롭게 됨을 받고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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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돔과의 협상(민수기 20:14-21)

이스라엘인들이 에돔인들과 벌인 협상이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인들이 현재 진치고 있는 곳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첩경은 에돔 땅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Ⅰ. 모세는 에돔 왕에게 대사들을 파견했다. 그 땅을 통과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가서 할 말을 일러 주었다 (14-17절).

1. 에돔인들에게 친절을 요구하라고 했다. "그와 같이 네 형제 이스라엘이 말하였느니라." 이 두 민족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공통 조상으로 하고 있는 민족들이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요, 그들이 각 조상이다. 고로 혈족 관계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서로 당연히 친절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에돔인들은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이 나쁜 음모를 꾸미고 있다거나 자기들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는 두려움 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2.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간략한 이야기를 에돔에게 들려주어야 했는데, 이것은 당연히 인정되는 이야기요 에돔 인에게도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중적인 탄원이 있다.

(1) 이스라엘은 애굽인들의 학대를 받았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친척들에게서 동정과 원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애굽인이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학대하였느니라. 그러나 이제 우리는 형제 에돔에게서는 그러한 고생을 겪지 않게 되기를 바라노라."

(2) 이스라엘은 여호와에 의하여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원과 애호를 받아야 한다(16절). "우리가 여호화께 부르짖었더니 그기 천사를 보내었다 곧 그의 임재의 천사요 계약의 천사요, 영원한 말씀이시니, 그가 우리를 애굽에서 구하여 내었도다. 그리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했느니라." 그러므로 하늘의 은총을 받고 있는 백성과 친교하는 것이 에돔인들의 유익이요, 그 나라에도 큰 은혜가 된다. 그들에게 어떤 피해를 입히면 큰 위험이 닥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에게 친절을 베풀고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의 백성으로 삼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요 해야 할 의무이다. "오라, 너 여호와의 축복받은 자여 !"

3. 그들은 에돔 땅을 통과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간청해야 했다. 하나님이 친히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사고 계시므로, 그들이 세계 어디를 가든 그것은 정당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돔인들에게 이 같은 존경의 뜻을 표했으니, 그것은 어느 누구의 재산도 종교적 구실로 침해받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세상 영토는 은총이 아니라 일반섭리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의 고을을 통과하시게 되었을 때 그가 가는 것이 그들에게 기분 나쁘게 하기 쉬운 일이었으므로, "먼저 사자를 보내어" 허락을 구했던 것이다(눅 9:52). 친절을 받은 자는 친절의 요구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

4.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이 그 길을 통과할 때 행동을 조심하겠다는 점을 알려야 했다. 왕의 대로만 아니고 땅이나 우물이나 아무 의 재산도 침해하지 않을 것이며, 값을 죽지 않고 이용하지는 않을 갓이요, 할 수 있는 한 빨리 도보로 통과하겠다고 했다(17, 19절). 아주 공정히 하리라는 것이었다.

Ⅲ. 그 대사들은 부정적 답변을 가지고 돌아왔다(18절). 에돔, 즉 에돔의 왕은 그 나라의 보호자로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리라." 그리고 대사들이 계속 간청하자 그는 거부를 되풀이했고(20절), 그 땅에 들어오면 용서치 않겠다고 위협까지 가했다. 그는 그들을 물리칠 만한 잘 훈련된 군대를 자랑했다. "이리하여 에돔은 이스라엘의 통과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피해를 받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그들의 약속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무수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군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지휘 훈련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을 무서워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학대 받기보다는 학대하는 것은 더욱 용서치 않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토록 의로운 법도 와 율례" 를 가지고 있는 민족을 무엇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인가?

2. 에서가 이스라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 옛날의 적의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에게 피해를 끼치리라는 우려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큰 선의를 베풀고 싶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에서는 야곱을 미워했다. 그것은 축복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미움이 재기된 것이다. 바야흐로 그 축복이 물려지려는 때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에돔의 악한 성격이 수치가 되게 하고 이스라엘의 선한 성격이 영예가 되게 하려 했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서 돌이켰다." 이 기회에 그들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장 타당한 요구가 부당하게 거부되거나,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나 인간의 치욕을 당한다고 하여 이상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귀머거리 같이 듣지 아니하노라." 에돔인들이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경멸을 퍼부은 뒤에, 하나님은 "에돔을 미워하지 말라" (신 23:7)고 하는 특별한 주의를 주었다. 에돔은 그렇게 이스라엘을 미워했지만 같이 미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도 그런 경우에는 복수를 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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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죽음(민수기 20:22-29)

본 장은 미리암의 장례식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남동생 아론의 장례식으로 끝맺는다. 죽음은 때로 한 가정에 겹쳐서 일어나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여자 예언자의 죽음으로 당하던 고통을 선용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 직후에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장을 데려갔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시험하신 것이다. 이 사건은 그들이 호르 산을 좌로 두고 떠난 바로 그 다음 단계에 가서 일어났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죽음은 따라오며, 언제나 무덤은 우리 곁에 있다.

Ⅰ. 하나님은 아론의 죽음을 예고했다(24절).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따로 불러서 이야기했다. "아론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 사랑하는 이 두 형제는 이제 헤어져야만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형 아론이 먼저 죽는다. 그러나 모세도 멀지 않아 그의 뒤를 따르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이별은 잠시 잠깐이었다.

1. 이 명령 속에서 몇 가지 불미한 점이 있다. 아론은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다툼의 물 사건 때에 아론이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 한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모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모세는 자신도 같은 죄인임을 알고 있었다.

2. 그들에게는 큰 자비이기도 하다. 아론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거니와, 악인들처럼 재앙이나 하늘의 불에 의해서 죽지 아니하고 평안하고 영예롭게 죽었다. 그는 "그의 백성에게 끊쳐진" 것이 아니다. 심판을 받아 죽은 자는 흔히 그렇게 표현했다. 그는 "그의 열조에게로 돌아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품속에서 죽는 자를 두고 하는 표현이다.

3. 그들에게는 의의가 크고 어떤 모형적인 성격도 있다. 아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것은 레위적 제사장직의 불완전성을 시사한다. 그 제사장 제도는 보다 나은 것을 바라는 희망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 제사장들은 죄와 죽음 때문에 계속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썩어질 수 없는 것이요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론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모든 영예를 양보해야 한다(히 7:23-25). 아론은 순복했다. 지정된 방식대로 죽었다. 마치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쾌히 죽어갔다.

1. 그는 호르 산 꼭대기에서 자기의 거룩한 옷을 벗어서 그의 형제와 아들에게 넘겨 주었다. 아마 이스라엘 장로들도 몇몇 동반한 것 같다(27절). 그들은 "온 회중의 목전에서" 산으로 올랐다. 아마 그들 이 산에 오르는 용무를 들었을 것이다. 이 엄숙한 절차에 의해서 아론은 자기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가는 자처럼 갔다. 그가 죽기 위하여 산에 올랐다는 것은 성도의 죽음(아론은 "여호와의 도소" 라고 했다)이 그들의 승천이라는 것을 뜻한 바, 그들은 죽어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간다.

2. 모세의 손은 처음에 아론의 제사장 복을 입혀 주었었으나, 이제는 그것을 벗긴다. 제사장직을 하는 의미에서 본다면, 제사장복을 입고 죽는 것은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의 옷을 벗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가야 한다. 그러므로 옷, 장식품, 또는 명예는 별로 적당한 것이 못 된다. 멀지 않아 죽음 이 우리의 영광을 벗겨가고 우리의 모든 직능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금관을 찾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3. 모세는 즉시 제사장의 의복을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혀 주었다. 즉 그에게 그의 아버지의 예복을 입히고, "그의 띠로 그를 힘있게" 해 준 것이다(사 22:21).

(1) 이것은 모세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는 자기의 손으로 제사장직에 관한 율법을 주었었고, 이제는 그 제도가 계승되는 것을 보았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해서 하나의 등불이 임명되고 죽음도 그 불을 꺼버릴 수 없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교회에게 아름다운 징조를 보여 준 것이다. 즉 사역자들과 신도들(영적 제사장들이다)의 한 세대가 가면 또 다른 세대가 그들과 귀를 이르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아론으로서는, 사랑하는 자기 아들이 살아 남았고, 자기의 뒤를 잇고, 또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의 한 상징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 제사장직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구화될 수 있다. 아론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주여, 이제 주의 종은 편안히 떠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뵈었음이니 이다."

(3) 그 백성들에게는 큰 친절이다. 아론이 죽기 전에 엘르아살이 취임한 것은, 아론의 집안에 대하여 나쁜 생각을 품은 자들이 아론의 죽음을 이용하려 그의 아들을 물리치고 제사장을 세우려 하는 따위의 유혹를 막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이미 결정나고 말았으니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으랴? 또한 그들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격려가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이기도 했으며, 하나님의 진실함이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약속이기도 했을 것이다.

4. "아론은 거기서 죽었다." 제사장복을 벗은 후 즉시 그는 편안히 누워 죽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의 능력 이상으로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선한 자들의 바램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 상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세대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그 이상까지 오래 살려고 애쓰는가? 모세와 엘르아살은 동반자들과 함께 아론을 그 자리에 묻었다(신 10:6 참조).그리고 "산에서 내려왔다." 아론을 뒤에 두고 내려왔을 때, 아마 그들은 오히려 아론이 자기들을 뒤에 두고 더 좋은 세상으로 올라가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5. 온 회중이 "30일을 아론을 위해 울었다" (29절). 엘르아살로 아론의 자리가 보충되었다. 오히려 엘르아살은 생의 황금기에 있었으므로 아론보다는 공무에 더 적합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인이 된 대 제사장 때문에 곡을 한 것이다.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사사건건 그에게 원망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죽자 그들은 그를 애도했다. 이로써 자기들의 즐거움을 감사치 않으려 하던 많은 자들은 그것을 잃고 난 후에 슬퍼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많은 선량한 자들은 생전에 보다 죽어서 더 영예를 받는다는 사실은, 살아서는 핍박을 받던 자들이 죽으면 그들의 무덤이 곱게 단장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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