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민수기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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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정결케 하는 재의 준비법(민수기 19:1-10)

여기에 보면 많은 암송아지를 엄숙히 "태워서 재로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와 있다. 그 재는 보관해 두어야 했는데, 그것은 장식용이 아니라 정결케 하는 물을 만드는데 쓰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그것은 복음처럼 아름답게 할 능력은 없고, 단지 깨끗하게만 할 수 있었다. 암송마지를 태우는 것은 속죄 제물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제단에서 실행되지 아니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과 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양심을 깨끗케 하고 정화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맺고,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도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제단에서 죽은 소와 염소뿐만 아니라 진 밖에서 죽은 암송아지와 같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Ⅰ. 그 암송아지는 다른 어떤 제물보다 더 주의깊게 선택해야 된다(2절). 흠이 없어야 한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점없는 순결과 죄없는 완전을 상장한다. 또한 붉은 암송아지라야 한다. 그런 색의 송아지는 진귀했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송아지에 회거나 검은 털이 두 개만 있어도 안 된다." 인간으로서의 그러스도는 아담의 아들이었다. 곧 붉은 흙의 아들이었다. 우리는 아담의 옷과 피와 또 그의 원수의 피가 붉은 색이라는 것을 알고있다. 또 그송아지는 멍에를 메어 본일 없는 것이라야 한다. 다른 제물에는 이런 조건이 붙어 있지 않았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자발적인 헌신을 상징한다. "보라. 내가 여기 있노라" 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사랑의 줄 외에는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았다. 이 암송아지는 회중이 공동부담으로 구입한다. 그들이 모두 그 송아지의 혜택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선조들은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다.

Ⅱ. 그것을 태우는 데도 많은 의식이 수반된다. 그 집행은 아론이 아니라 엘르아살에게 맡겨졌다. 그것은 아론은 그와 같은 의식상 순결한 일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부접합할 뿐 아니라," "저녁까지" 부정한 채로(8절) 있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대한 일이었다. 특히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론 다음으로 존엄을 지니고 있는 엘르아살이 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의 대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1. 암송아지는 부정한 것처럼 진 밖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의식법이 죄를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실제로는 깨끗케 할 수 없으므로 그 일을 행하는 자들도 부정 했다. 그들에게 붙은 오염이 계속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모형에 맞추어서,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속죄 제물이 되시고 저주를 당하셨고 "영문 밖에서 수난을 당하셨다" (히 13:12).

2. 엘르아살은 "회막문을 향하여 그 피를 뿌렸다" (4절). 그것은 일종의 속죄 의식이다. 여호와 앞에 피를 뿌림은 모든 속죄제 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단에서 이루어진 일은 아니지만 성소를 향하여 행한 일인 고로, 그 피뿌림의 혜택과 실효성은 성소에 달려 있고 거기서 연유된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제사장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보상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에 의하여 <영은 에인즈워드(Ainsworth)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도 불리운다. 눅11:20> 자신을 흠없이 하나님께 드렸다." 말하자면, 그는 죽으시사 자신의 피를 성소로 향하여 뿌린 것이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여, 내 영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보상을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정결할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가 하는 것을 말해 준다. 이 피뿌림의 효력이 그 재에 주입된다.

3. "전히 태우라" 고 했다(5절). 이것은 우리 주님이 번제물처럼 영육의 극한적 고난을 받으셨음을 상징했다. 제사장은, 그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동안, 백향목, 우슬초, 그리고 흥색실을 넣는다. 이것은 문등병자를 깨끗케 할 때 쓰이는 것들이다(레 14:6, 7). 그래서 그 재가 송아지 재와 섞이게 했다. 그 재는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4. 암송아지의 재(물론 그것은 장작의 재와 정성껏 구별되야 한다)는 정결한 자의 손으로 주의 깊게 모았다. 그래서(유대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을 빻아서 체로 쳐서, 필요한때에 쓸 수 있도록 보관해 두었다(9절). 당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손들을 위해서도 보관채 두었다. 이런 암송아지의 재는 여러 세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많은 정결한 물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즉 그 재는 근 1천년 동안도 쓸 수 있었다. 또 에스라 시대에 다른 암송아지를 잡아서 재를 만들 때까지는 그것이 전해 내려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전설에 의한 것이다. (내 생각에는)그런 암송아지를 잡은 기록이 없다는 사실에만 근거한 계산인 듯하다. 그러나 그것을 믿을 이유는 조금도 없다. 후기 유대교 시대에는 많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에스라 시대와 제2성전이 파괴 기간에도 8번이나 그런 기록을 본다. 그런데 그 사이는 약 500년이다.

이 재는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을 만드는데 쓸 것" 이므로 보관하라고 했다. 이것은 의식법상의 정결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써 죄를 정곁케 한 사건의 산 모형이 된다. 물과 혼합된 재들은 찌끼로 사용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라는 데서 그 효력을 갖는다. 그 효력의 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는 "의를 위하여 율법의 마침" 이 되겼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정결케 하는 물은 그와 같이 암송아지 재로 만들어졌다. 그 암송아지의 피는 제단 앞에 뿌려졌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깃들어 있는 효력이다. "죄를 깨끗케 하는 것" 은 그의 피이다(요일 1:7).

(2) 그 재는 모든 사람이 쓰기에 넉넉했다. 필요할 때마다 각개인이나 가정이 다시금 암송아지를 잡은 것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쓰기에 넉넉했다. 심지어는 그들 중에 체류하는 타국인들도 쓸 수 있었다(10절).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또한 넉넉하다. 모든 이스라엘인들의 죄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 를 위해서도 풍족하다(요일 2:2).

(3) 이제는 여러 세대를 걸쳐 낭비됨이 없이 잘 보관토록 했다. 재처럼 부패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는 물질적 질료는 또 없다. 패트릭(Patrick)주교의 말대로, 이와 같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영속적인 효험을 상징해 주기에 아주 적합하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 모든 시대를 걸쳐서 그들의 죄를 깨끗케 할 수 있고 구원할수있다.

(4) 이 재는 이스라엘의 불결을 깨끗케 해 주는 것이므로 보물처럼 보관되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보혈도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영원히 다함이 없는 샘물로서 우리를 위해 보존되었으니, 우리는 거기에서 믿음에 의해서 날마다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한다(슥 13:1 참고).

5. 이 예식에 참예한 모든 사람들은 그 의식으로 인하여 의식법상으로 불결해진다. 엘르아살은 그 피를 뿌린 일을 했을 뿐인데도 역시 부정해진다(7절). "그 암송아지를 불태운 자는 부정하다" (8절). 그리고 "재를 모은 사람" 도 불결하다(10절).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에 동참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죄를 지었다. 그를 배신한 자, 핍박한 자들, 재판한 자, 처형한 자들, 그들이 행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미리 아심대로" 이루어진 일이지만(행 2:23) 그들에게는 죄가 된다. 그러나 한편 그들 중 어떤 자들, 아마 모두가 자기들을 죄짓게 했던 바로 그 피의 공로로 다시 죄 씻음을 받았을 것이다. 혹자는 이것이 율법적 예배의 불완전성을 상징한다고 보며, 또 그것은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음을 말해 준다고 본다. 남을 정결케 하기 위한 일을 준비한 자들까지도 그 준비한 일로 인하여 죄로 불결해졌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이것은 솔로몬도 이해하지 못한 일이라고 한다. 즉 한가지 사물이 정한 자는 부정하게 만들고 부정한 자는 정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괘트릭(Patrick)주교의 말대로 죄를 위해서 드려지는 모든 희생 제물은 그 사실 때문에 부정해진다는 것, 즉 인간의 죄가 그 제물 위에 옳겨져 있으므로 부정해진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상할 것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죄는 그리스도에게 옮겨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죄를 졌다" 고 했다(고후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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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사용법 (민수기 19:11-22)

정결케 하기 위해 마련한 재의 사용법과 적용법이 나와 있다. 그 재를 보관한 것은 꺼내어 쓰기 위해서이다. 처음에는 어느 한 장소에 넣어 두기로 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밀집하여 진을 치고 있었던 연고이다. 그러나 아마 나중에는 그 재들을 조금씩 나누어서 각 마을에 배치해 두었을 것이다. 날마다 그것이 필요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을 관찰해 보자.

Ⅰ. 이 재로 정결케 하는 의식은 언제 필요한가? 본문에는 시체나 시체의 유골이나 무덤, 또는 시체가 있는 집이나 천막에 접촉한 자로 인하여 생기는 의식법상의 부정함 외에는 언급이 없다(11, 14-10절). 내 생각으로는 무수한 의식법 중에서 가장 부담을 많이 주는 율법의 하나였을 것이다. 부정한 짐승의 시체나 의식법상으로 가장 중대한 부정에 처한 산 사람을 만진 자는 "저녁까지" 만 부정하다. 그러므로 보통물로 씻으면 된다. 그러나 남녀노소 불문하고 죽은 자에게 가까이 간 자는 7일 동안이나 부정하다고 했고, 정결된 물로 두 번 정결케 해야 한다. 그 물은 어려움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는 구할수 없다. 그리고 그 부정이 깨끗케 되기 전에는 성소에 가까이 하면 죽음을당한다.

1. 이것은 특이한 일로써 생각할 점이 있다.

(1) 사람이 일단 죽으면 누군가 몇 사람은 불가분 이러한 오염에 접촉되게 마련이다. 시체에 염을 하고 씻기고 싸메고 나르고 매장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타락되고 부패된 상황 속에는 살아 있으면서도 죄가 없는 자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해 준다. 우리는 우리가 지나쳐가야 할 이 썩을 세상으로 인하여 더러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날마다 죄를 짓는다. 그러나 우리가 죄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죄란 조금도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줄 수는 없다.

(2) 시체를 정중히 돌보고 매장하는 일은 불가피한 일일 뿐 아니라 좋은 일이다. 죽은 자를 위해서나 유가족의 위안을 위해서나 친절한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부정에 접하게 된다. 이 사실은 죄의 오염이 우리들이 하는 가장 좋은 일에도 섞여 있고 붙어 다닌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땅 위에는 선을 행하고 죄짓지 않은 의인이 없다." 우리는 선행을 하는 중에도 종종 실수하기가 일쑤이다.

(3) 자기 집에서 개인적으로 할 때에도 역시 같은 오염에 물들게 된다. 패트릭(Patrick)주교가 관찰한 바대로, 이 사실은 하나님은 은밀히 행한 일도 알고 계시므로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존전에 숨겨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4) 또 이러한 오염은 접하고서도 본인이 그것을 모를수가 있다. 예를 들면 보이지 않는 무덤에 접촉된 경우 따위이다. 우리 구주께서도 그런 일을 말씀하셨다.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눅 11:44). 이런 사실은 몰라서 지은 죄로도 양심은 불결해진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누가 자기의 잘못을 알리요?" 그리고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은밀한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소서."

2. 왜 율법은 시체를 그토록 더러운 것으로 보았는가?

(1) 죽음이란 죄로 인하여 "세상에 들어와, 죄의 삯을" 이미, 죄의 권세가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다른 생물들의 죽음과는 다른 의미를 인간에게 준다. 인간의 죽음은 저주이다. 그것은 율법이 내린 처형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더러움은 곧 죄의 더러움을 의미한다.

(2) 율법은 죽음을 정복하거나 폐하거나 그 죽음의 성질을 변경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생명을 가져오고 불멸의 법을 가져와서 보다 나은 소망을 죽음에 준다. 우리 구주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었으므로, 죽음이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할수 없다. 그러므로 죽은 몸이라 하여 더 이상 불결하지 않다. 그러나 "율법은 새로 오는 자들을 완전케 하지 못했다" 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교회가 율법 아래 있었을 때에는, 시체로 인하여 생긴 오염이 그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죽음을 불안스럽게 생각케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은 죽음을 이긴 승리를 노래할 수 있다.

" 오 죽음아, 네 승리가 어디 있느냐?" 더럽게 할 네 능력이 어디 있느냐!

Ⅱ. 재는 어떻게 사용했는가?

1. 재를 조금 가져다가 샘물 한 컵에 섞는다. 그러면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물을 본문에서는 "정결케 하는 물" (영문: "분리의 물")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부정으로 인하여 성소와 분리된 자들에게 뿌리는 물이기 때문이다. 암송아지의 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상징하듯이, 흐르는 물은 성령의 권능과 은총을 상징한다. 성령은 생수의 강으로 비유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어 우리가 깨끗케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만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의 영" (고전 6:11; 벧전 1:2)으로 말미암아 씻김 받는다. 즉 거룩케 되고 의롭게 된다고 했다. 성령의 은혜와 감화력에 순복하지 않고 스스로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에게 보장하는 자들은 오직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결합해 놓으신 것을 우리가 분리할 수 없고, 흐르는 물에 섞여 있는 재가 아닌 다른 재로는 우리가 깨끗케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2. 우슬초 가지로 그 물을 찍어서 뿌리면 정결하게 된다(18절). 이것을 두고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우슬초로 정하게 하소서." 믿음이란 우슬초 가지이다. 믿음이 양심에 뿌려지면 그 마음이 정결케 된다. 한꺼번에 여러번 뿌렸을 것이다. 재가 섞인 물이 다 떨어 질 때까지 그 물을 여러번 뿌렸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의도대로는, 몇 방울만 떨어져도 그 사람은 정하게 된다. 뿌리는 데 쓰는 정결의 물에 비유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림의 피" 라고 했다(히 12:24).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 에서 깨끗케 된다(히 10:22). 즉 우리의 죄책감에서 발생한 부정함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많은 민족들에게 뿌릴" 젓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사 52:15).

3. 부정한 사람은 "제 3일과 제7일에" 이 물의 뿌림을 받아야 한다(12-19절). 아마 날수 계산은 그가 시체에 가까이한 끝 날부터 했을 것이다. 계속 오염에 접해야만 하는 동안을 정결의 날수로 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체가 매장되어 더 이상 거기에 게입 될 필요가 없을때, 그때는 자기의 날수를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덕을 우리의 영혼의 위안으로 상계되는 때, 그리고 그때에 만이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죽음과 어두움의 무익한 일에서" 손을 끊게 된다. 뿌림의 반복은 나아만이 "7번" 씻었듯이 우리도 종종 회개와 신앙의 행실을 새로이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필수적이어서 잘 해야 할 일은 종종하는 것이 좋다.

4. 그 오염은 단지 의식 법상의 부정일 뿐이지만, 지정된 정결 법을 빼먹는 것은 도덕적 죄가 되고 만다. "부정하고도 자기를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끊쳐지리라" (20절). 아무리 하찮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제도를 경멸하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알아야겠다. 가벼운 상처라도 버려두면 치명상을 주는 것이다. 우리가 시시한 죄라고 부르는 죄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큰 죄인들은 회개하여 자비를 받는 그런 때에도, 우리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부정은 우리와 하나님을 분리 시킨다. 우리가 부정하고도 자신을 징계하지 않으면 영원히 하나님과 구별될 것이다. 치명상을 주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치료법을 무시한 바로 그것이다.

5. 또한 "그 물을 뿌린 자나 만지는 자나 부정한 사람에게 닿는 자" 는 "저녁까지 부정하게" 된다. 즉 그날은 종일토록 성소에 가까이 하지 말아야한다(21, 22절). 이로써 하나님은 이러한 제 의식은 불완전한 것임을 알려 주셨고, 그 의식이 저들의 양심을 완전히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므로.,메시야를 기리도록 하셨다. 메시야는 시간이 차면 영원한 성령에 의하여 자신을 흠없는 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죽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하실 분이시었다" (즉 죽은 자와 같이 더러운 죄로부터의 정결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 제사로써 살아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성소로 나아갈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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