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민수기 13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3:1

정탐꾼 밀파(민수기 13:1-20)

Ⅰ. 가나안 땅을 탐지하려고 정탐꾼을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들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으나(1,2절), 나중에 다시 나오는 이 이야기들을 보면(신 1:22), 그러한 의견은 백성들이 먼저 꺼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우리 앞에 먼저 사람을 보내리라" 고 말했다. 이것은 그들의 불신앙의 소산이었다. 그들은 가나안이 복된 땅이요, 반드시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가게 하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믿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지혜보다는 자기들의 정치적 수완을 더 신뢰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대신 하여 정탐해 두셨던 그 땅을 자기들이 정탐하겠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길을 찾으려는 것, 이것은 얼마나 우스광스런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의하기보다는 망각의 표상이나 보고에 더 신용을 두다가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만다. 우리는 신앙으로 행하지 못하고 눈으로 봄에 따라 행한다. 그에 반하여 우리가 사람의 증거를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증거가 더 크다" 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사람들이 모세에게 이러한 제의를 하자, 모세는 (아마 그 저변에 있는 불신앙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뜻을 들으시어, 그들 앞에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했다. "그들이 자기들의 의사대로 향하게 버려두라" 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다음의 죄의 종범이 아니다. 이 정탐꾼을 보낸 것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죄악의 원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 정탐꾼이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고, 백성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기만 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그들의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는 유익이 되었을 것이다.

Ⅱ. 이 목적에 고용된 사람들(4절 이하)은 한 지파에서 하나씩 지명되었다. 아마 그 지명은 백성 전체의 중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각 지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 천부장이나 백부장들이 나아왔을 것이니, 그들이 자기들의 대사를 더 신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최선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악한 결과를 초래했다. 즉 인물의 성질상 그들에게 악한 정보를 가져온 자들을 더 크게 신용하여, 그들은 그 나쁜 소식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어떤 자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의 이름이 모두 기록된 것은 그들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라는 선한 대표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일을 당하여 여호수아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이 특기되어 있다(16절). 그는 모세에게 발탁되어 그를 돕는 사역자였으나, 에브라임 지파의 총의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아말렉을 향하여 보내어졌던 것이다. 그의 일반적인 이름, 곧 그 지파가 부른 이름은 호세아였으나, 모세는 그를 여호수아라고 했다. 이것은 여호수아에 대한 모세의 애정과 그에 대한 권한을 뜻해 준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다른 사람도 그를 그렇게 부르라고 명령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후로는 그의 이름이 여호수아로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구원을 위한 기도 곧 주여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나, 여호수아는 구원의 약속 곧 그가 구원하시라는 뜻이니,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뜻한다. 기도와 약속의 사이에는 이렇게 밀접한 관계에 있다. 기도가 약속을 만들어 내고, 약속은 기도의 방향을 주고 용기를 자극한다. 어떤 자들은, 모세가 여호와라는 이름의 첫 음절을 취하여 그의 이름에 붙임으로써 호세아가 여호수아가 된 것은 그에게 영예를 주기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임재를 확증하여 이 일에나 차후로 그의 모든 미래에 대하여 용기를 지닐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일 후에도 그는 호세아라고 불리운다(신 32:44). 예수란 이름도 여호수아란 이름과 같은 이름이다. 그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여호수아란 이름과 같은 이름이다. 그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대장이 되어 가나안 정복자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 또 하나의 다른 이름의 소유자가 있다(슥 6:11).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나안의 권세에서 구해낸 구원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지옥의 권세에서 구하시는 구주이시다.

Ⅲ. 이 정탐꾼들에게 주어진 지시 사항들이 있다. 그들은 그 곳에서 가장 가까운 가나안 땅으로 보내어졌다. 그것은 그 나라를 잘 관찰해 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나라의 현재 상태를 보고해야 했다(17절).

두 개의 기본 문제가 제시되었다.

1. 그 땅 자체의 관찰이었다. "어떤가를 보라" (18, 19절). 즉 "좋은 땅인가 나쁜 땅인가," 그리고 "기름진 땅인지 박토인지를" (20절) 알아보라고 했다. 지구상의 모든 땅이 한결같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복을 받지는 못했다. 어떤 땅은 다른 땅보다 더 비옥한 곳도 있다. 모세 자신은 가나안 땅이 옥토라는 것을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성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정탐꾼들을 보낸 것이다. 요한이 예수에게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그가 그리스도인가를 물어보도록 한 것은, 요한 자신이 아니라 그가 보낸 그 제자들을 위해서였다. 그들에게는 가나안 지역의 기후가 좋은지, 땅이 비옥한지, 산물은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그 백성들의 욕구 만족을 위해서는 그 땅의 산물을 다소 가지고 와야 했던 것이다.

2. 둘째, 그 주민들의 형편, 즉 그들의 수효와 체구, 체질의 강약과 그들의 주거 곧 그들의 주거 곧 그들이 천막에 사는지 가옥에서 사는지, 그리고 들에서 사는지, 성벽이 있는 도회에서 사는지, 그리고 그곳의 주민들이 버려 두어서 무성한 숲이 있는지 아니면 경작지를 위해 서로 캠페인을 벌여 초목을 베어 냈는지 따위를 알아오도록 했다.

이것이 그들이 탐지해야 했던 제반 사항이었다. 아마 그때에는, 야곱의 시대에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무역이 성행했듯이, 그런 무역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직접 탐지하기 전에는 그 땅에 대한 정보를 입 수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책이나 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잘 알게 되니, 가나안과 이스라엘 사이 보다 더 먼 거리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도 그러한 곤란이나 비용을 들이지 않고 알 수 있다.

Ⅳ. 모세는 이런 주의를 주어서 정탐꾼을 보냈다. "담대하라." 이것은 이 원정의 어려움을 이기기 위한 용기를 말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 대해서도 용기를 줄 만한 최선의 정보를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훌륭한 처신과 결단을 요하는 중책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중대한 신임이 놓여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13:2 없음.

 

13:3 없음.

 

13:4 없음.

 

13:5 없음.

 

13:6 없음.

 

13:7 없음.

 

13:8 없음.

 

13:9 없음.

 

13:10 없음.

 

13:11 없음.

 

13:12 없음.

 

13:13 없음.

 

13:14 없음.

 

13:15 없음.

 

13:16 없음.

 

13:17 없음.

 

13:18 없음.

 

13:19 없음.

 

13:20 없음.

 

13:21

민족적 원망의 결과(민수기 13:21-25)

우리는 약속된 땅을 탐지하는 정탐꾼들의 이야기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된다.

1. 그들은 남쪽에 있는 신 광야에서부터 시작하여 북쪽에 있는 하맛 근처의 르흡에까지 관통해 보았다(21절. 34:3, 8 참조). 아마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 집단으로 몰려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이 그렇게까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가나안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면, 그런 일은 더욱 위험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탐꾼들은 여러 분견대로 나누어 일부러 도보 여행자로 가장하여 통과했다.

2. 그들은 헤브론을 특히 주의해 보았다(22절). 아마 족장들이 묻혀 있는 (창 23:2) 막벨라 밭이 그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므로 말하자면 이 죽은 자들이 이미 가나안 땅을 저들의 후손을 대신하여 자기들의 재산으로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묘지를 특별 방문하고서, 여기에 이름이 나오고 있는 아낙의 자손들의 소유로 되어 있던 곳의 인접 도시를 알아냈다. 저들이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가장 큰 좌절을 겪게 된 것이다. 그들의 신도들의 시체가 자기들을 위해 소유하고 있는 곳을, 그 거인들(아낙의 자손들)이 차지하여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남방으로 올라가 헤브론에 이르니라." 유대인들은 "특히 갈렙이" 그곳에 갔었다고 말해 준다(수 14:9, 12, 13).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도 그들이 아낙 자손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 거기에 당도했었던 것이다(33절).

3. 그들은 포도송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땅이 유달리 비옥하다는 증거로 다른 산물들도 좀 가지고 왔다. 아마 그들은 거기서 떠나올 때 그러한 산물들을 먹었을 것이다. 그 포도송이는 얼만 크고 무겁던지 막대기에 꿰어서 두 사람이 메고 날랐다(23,24절).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이 포도를 가져온 그곳의 이름은 "송이의 골짜기" 라고 했다. 이 유명한 포도송이는 가나안 땅의 모든 산물의 한 증거요 한 견봉이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누리는 현재의 위안은 우리가 하늘의 가나안에서 기대할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의 시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하늘 나라가 어떠한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13:22 없음.

 

13:23 없음.

 

13:24 없음.

 

13:25 없음.

 

13:26

엇갈린 보고(민수기 13:26-33)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막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참인데 어떻게 정탐꾼이 돌아오기까지 40일을 기다렸는지 그 인내란 놀라운 것이다. 특히 그들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한다면 정복의 성공도 보장되어 있었고 거기에 따르는 끊임없는 기적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때에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언약이 주는 확신보다는 자기들 나름의 생각 때문에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불신앙으로 인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고 있는가! 아뭏든, 마침내 사신들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Ⅰ. 대다수가 백성들에게 가나안 행진의 용기를 좌절시켰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유혹 속에 빠진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저들은 저들이 믿을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판단에 더욱 신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보여주신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 강력한 망상을 주시는 것은 위로운 처사이다.

1. 그들의 보고 내용을 관찰해 보자.

(1)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이 대단히 비옥하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져온 포도송이는 가나안의 비옥함을 시각적으로 시위해 주는 증거였다(27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마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 악한 정탐꾼들도 그 땅이 그런 곳임을 인정했다. 이와 같이 대적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그의 약속의 신실성이 입증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보여준 것과 모순되었다. "그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다" 라고 했다(32절). 아무리 젖과 꿀과 포도가 있다 하더라도, 다른 식량은 전혀 없다는 듯이 말한 것이다. 어떤 자들은 그들이 탐지할 때 그곳에는 큰 악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악질은 그들의 대적의 수효를 감소시키어 그들의 정복을 더욱 능률적이 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의 지혜였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탓으로 돌렸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당하게도 그것을 그 기후가 건강상 좋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기화로 그 땅을 악평하는 구실로 삼았다. 그들은 이 가나안의 재앙을 부당하게 두려워한 때문에, 즉시 "광야에서 재앙" 을 만나 죽고 만다. 그것은 정당한 처벌이다(14:37).

(2) 그러나 그들은 합심하여도 가나안 정복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시도해 볼 생각도 안했다. 그 백성들은 강대하고(28절) "큰 체구" (32절) 사람들이요, "우리보다 강한 자들" 이다(31절). 그들은 그 성읍들이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했다. 그 성읍들은 "심히 견고하다" (28절). 그러나 그들이 강조하여 표현한 그 거인들에 대한 말보다 더 이들의 악의를 조장시킨 것은 없다. "우리는 거기서 아낙의 자손들을 보았노라" (28절). 또다시 우리는 "거인들을 보았도다." 곧 "아낙의 아들들" 로서 거대한 채격의 사람들이요, 그들은 "거인들(네피립)의 후손들" 이라 했다(53절). 그들은 이미 그들을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듯이 말했으며, 그들을 보자마자 겁에 질린 것처럼 이야기한 것이다. "오 이 굉장한 자들을 보라! 우리가 그들에게 가까이 가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으리라. 작고 연약해 보일 뿐만 아니라 떨며 파리해질 것이다." "네가 그를 메뚜기같이 두렵게 할 수 있느냐?" 고 하는 욥기 39장 20절과 비교해 보자. "아니오,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눈에 그러하오. 우리가 그들을 볼 때는 두려워 떨게 되고, 그들은 우리를 경멸과 조소의 눈으로 얕잡아 볼 것입니다"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저들은 모든 것을 자기들의 마음대로 이야기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친 못하리라" (31절). 그러므로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2. 이제는, 비록 그들이 인간적인 가능성에 의해서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비겁은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매우 많지 않았던가 ! 잘 훈련되고 결속되며 하나의 이념으로 뭉쳐진 60만 정병이라면 어디를 가든지 무서운 군사들이다. 알렉산더의 군대들은, 이스라엘 군사들보다 훨씬 더 작은 수로도 능히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그들의 총사령관 모세는 지략이 있고 용맹하다. 백성들이 결단하고 용감히 싸워 준다면, 누가 그들을 대적하리오? 가나안이 강대하다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분산되어 있었다. "어떤 자들은 남방에, 또 어떤 자들은 산지에 거했다" (29절). 그래서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빨리 집결될 수 없으며, 저들의 이해관계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장기간 결속될 수도 없으며 이스라엘을 대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나라에는 곡물이 풍성하고 군대가 있을 것이며, 성읍에는 성벽에 있을 것이지만, 이스라엘이 그들의 강한 요세를 치면 물론 그들의 손에 넘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거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체구는 지나치게 크므로 더 큰 표적이 될 것이며, 등치 큰 자들이 언제나 가장 용기있는 자들은 아니다.

3. 그러나 그들이 마땅히 겁을 먹을 만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최악의 사태는 아니다. 성경은 그들을 불신앙인들이라는 낙인을 찍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어떤 인간들의 가능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었다.

(1) 오히려 그들에게는 자기들과 함께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가시적인 증거가 있었고, 하나님의 권능이 그들의 편이 되어 주리라는 약속이 있었다. 가나안 인들은 이스라엘보다 더 강하다. 그러나 왜 그들은 가나안 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그들을 상대할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불가능하단 말인가? 우리의 한가운데 그 하나님이 함께 게시지 않는가? 그가 우리 앞서 가시지 않는가? 그가 힘들어 못하실 일이 있다는 것인가? 우리가 거인들 앞에서 메뚜기 같다 하더라도,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메뚜기들보다 못한 존재들이 아니던가? 그들의 성벽이 우리를 막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성벽이 하늘을 막을 수 있는가?

(2) 이것을 찬양하리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팔의 힘과 능력을 크게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그 팔을 들고 계시다는 것을 실컷 경험했으니 말이다. 애굽인들이 가나안 인들보다 더 강하지 않았는데도 애굽의 병거와 기마병들이 전멸되었던 것이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에 비해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도 패주되고 말았다. 이 시대의 기적은 저들의 빵이었다. 저들은 언제나 값없이 실컷 음식을 먹었다. 다른 어느 군대도 그러하지 못했다. 이것도 저들에게는 크나큰 이점이었다.

(3) 그러나 그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들이 가나안을 물리치고 정복하리라는 특정한 약속이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그 땅을 소유하리라는 것을 여러가지로 확증해 준 바 있었다(창 15:18; 17:8). 하나님은 당신께서 "그들에 앞서서" (출 33:2) 가나안 인들을 "가나안에서 쫓아내리라" 는 것을, 그리고 "점차로" 그 일을 이루리라는 것(출 23:30)을 모세를 통하여 명백히 약속해 준 바 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 그들을 치지 못하리라" 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이루실 수 없는 분이다" 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그를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요,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말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죄악에 대한 간단한 기록을 보게 된다. 그들은 전 회중에게 악영향을 준 것이다(시 106:24). 그들은 "그 땅을 멸시하고, 그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탐지하여 보고 온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고 말한 것까지 좋았지만, 영원한 진리가 그 땅을 그들에게 약속해 주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 땅을 악평했다. 그것이 이 악한 정탐꾼들의 설명이었다.

Ⅱ. 그는 여호수아만이 찬동해 주었지만(36절), 이스라엘 백성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용기를 주었다. "갈렙은 백성을 정돈시켰다." 갈렙은 백성들이 "모세 앞에서" 조차도 이미 동요하고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백성들이 이미 제멋대로 행하기 시작했을 때는, 모세의 빛나는 얼굴도 그들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갈렙이란 온 마을을 뜻한다. 그는 그의 이름에 부합했다. 그는 마음부터가 열심이었다. 그들이 자기 말을 들어 준다면, 그들에게도 성의를 가하려고 했다. 여호수아가 만일 그 동요를 제동하기 시작했다면, 자기의 주인 모세의 편을 든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갈렙이 이 일에 나서도록 버려 두었다. 갈렙은 우드머리 지파요, 따라서 선두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지파의 출신이었다. 갈렙은 그의 친구 정탐꾼들처럼 그 거민들의 힘을 잘 보았다.

1. 그러나 그는 전체적으로 문제를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확신하는 말을 했다. "우리는" 그들이 강할지라도 "능히 그들을 이기리라."

2. 그는 백성들에게 행군하라고 격려했다. 그는 마치 그들의 선두에 서서 용감히 인도하려는 듯이 자기의 단호한 결의를 말했다.

" 곧 올라가자. 보다 용감하고 당당히 쳐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용기만 낸다면 그 땅은 모두 우리 것이다. 올라가 취하자." 그는 "올라가 정복하자" 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사태가 결정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올라가 취하자" 는 들어가서, "우리의 위대한 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 땅을 취하자. 이 외에는 할 일이 없느니라." 는 것이다. "의인은 사자보다 담대하다" 는 것을 명심하자. 구원의 길목에 있는 곤란은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을 믿는 살아있고 능동적인 믿음 앞에서는 사라지고 만다. 약속된 것이라면,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13:27 없음.

 

13:28 없음.

 

13:29 없음.

 

13:30 없음.

 

13:31 없음.

 

13:32 없음.

 

13:33 없음.




































 


Articles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