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불(민수기 11:1-3)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엿보게 된다.
Ⅰ.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있다. 그들은 "원망했다" (1절). "말하자면 그들은 원망장이들이었다" -흠정역의 난외에는 그렇게 되어있다. 그들에게는 다소의 은근한 불평과 불만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아직은 공공연한 폭동을 야기시키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이 작은 불티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것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우수한 율법과 규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의 산을 출발하자 마자 하나님께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 속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읽어보자.
1. 죄의 사악성. 이것은 종종 계명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분노케하는 기화로 삼는다.2. 육을 통하여 주어진 율법의 연악성(롬 8:3). 율법은 죄를 발견했다. 그러나 죄를 파괴시킬 수는 없었다. 죄를 견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죄를 정복하지는 못한다. 그들을 "원망했다" . 주석가들은 그들의 원망 내용을 연구한다. 즉 그들은 고깝게도 많은 도움을 입고 있는 그때에, 바로 그런 때에 뭐 원망할 것이 또 있었겠는가 하는 것 때문이다. 물론 원망하는 사람들의 내용이 모두 한 가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자들은 시내 산을 떠나온 것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서는 그들이 긴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 또, 어떤 자들은 기후에 대해서, 또 어떤 자들은 저들이 가는 길에 대해서 원망했을 것이다. 또 어떤 자는 3일간의 여행은 너무 먼 행군이라고 했을 것이고, 또 어떤 자들은 그만한 여행으로는 가나안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불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들의 진영이 어떻게 보호 받았으며, 어떻게 인도되었고, 어떤 편의를 제공받았는가를 생각하며, 또 저들이 좋은 음식과 친구를 가질 수 있었고, 그 행군에도 많은 보호를 입어서 저들의 발이 부풀거나 의복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는 점 등을 감안해 볼 때(신 8:4),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들을 더 이상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했다. 격렬한 불만의 정신을 품은 자들은 언제나 투덜댈 구실을 찾는 법이며, 저들의 외부적 형편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호전되었을 때라도 투덜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Ⅱ. 이 죄로 인하여 분노를 느끼신 하나님의 정의로운 분개가 있다. "여호와께서 그것을 들으셨다." 아마 모세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불안과 불평을 아무리 다른 사람들에게 교묘히 숨기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대단히 분노하셨다. 그래서 그의 "진노가 불붙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유가 있을 때에는 우리들에게 불평을 털어놓을 자유를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시 142:2). 그러나, 타당한 이유가 없는 데도 불평을 할 때에는, 하나님은 당연히 분개하시고 그 불평을 악하게 여기신다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 밑에 있는 자들이 그런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는 분개할 것이다.
Ⅲ. 이 죄에 대한 응징을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으니라." 이 불은 구름에서 나와 나답과 아비후를 불살라 죽이던 그런 불꽃이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진노외 불꽃이 그들의 심중에 타오르고 있을 때(시 39:3), 마땅하게도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그들의 육체를 삼켜 버렸다. 우리는 여러번 그들의 불평에 대한 기록을 보았다. 그들이 애굽에서 처음 나왔을, 때에 그러했다(출 15,16,17장). 그러나 그럴 때마다 지금처럼 그들의 불평에 대한 재앙이 내렸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그들은 그들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크게 체험했으므로, 지금에 와서 그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보다 더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불이 야곱에 대(對)하여 붙었다" (시 78:21). 그러나 그 불이 그들을 삼킨 것은 "진 맨끝에" 있던 자들만이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싸우시기를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보여 주신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점차로 그들에게 임하였고, 그들은 경고를 받게 된 것이다.
Ⅳ. 그들은 모세에게 부르짖었다. 모세는 노련한 그들의 중재자였다(2절). "그(하나님)가 그들을 치시매, 그 때에야 그들이 그를 찾으니라." 그리고 비로소 그들은 모세에게, 자기들의 친구가 되어 주기를 간청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이유 없는 원망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망거리를 만들어 주신다는 것은 지당한 처사이다.2. 자기들이 번성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친구를 경시하는 자들도, 다시금 곤궁에 처해지면 하나님의 친구들이 자기들의 친구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게 된다. "조상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보내 주소서!"
Ⅴ. 그들을 위한 모세의 중재븐 성공했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 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그들의 틈바구니에 설 각오가 항상 되어 있었다) "그 불이 꺼졌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을 징벌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싸움을 막 시작하신 그 때에, 이미 기꺼이 그 싸움을 취소해 버리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믿음으로 불의 세력을 꺾어 버린" 유력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Ⅵ. 이리하여 그 곳에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그것은 원망하는 백성들의 수치와 의로운 하나님의 영예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 곳은 디베라 곧 불사름이라고 불려졌다(3절).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도 이 지명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들이 범한 죄를 범치 않도록 경고를 받게 됨으로써, 저들과 같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전 10:10).
만나와 메추라기(민수기 11:4-15)
본문은 불행하게 혼란된 사회와 이스라엘의 무질서, 즉 백성과 방백들이 다같이 불안하게 되었던 사건을 말해 주고 있다.
Ⅰ. 백성들은 안달하며, 하나님께 도전했다(시 78:19 참조).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영광스런 현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 사실들을 관찰해 보자.
1. 범죄자들은 누구인가?(1) "이스라엘 중에 썩여 살던 무리" 가 시작을 했다. 그들은 "탐욕을 품었다" 고 했다(4절).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떠나 왔던 그 오합지졸은 오직 그 약속의 땅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자들이며, 그 곳에 가는 도중의 시련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자들이었다.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그들은 식객들이었고, 자기들의 고향에서 편히 사는 방도를 모르고 있었던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과 동행하려 했던 자들이요, 그래서 (말하자면) 그들은 외국에 나아가서 자기들의 행운을 찾으려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양떼들에게 감염시키는 전염병을 지니고 있는 양들이요, 온 덩이를 부풀게하는 누룩이었다. 몇몇 불순하고 불만스러워하고 성질이 나쁜 자들은, 그들을 옹호하지 않으려는 큰 관심이 배려되지 아니하는 한, 능히 최상의 사회에까지 거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이런 자들이야말로 "패역한 세대들" 이며, "우리 스스로를 그들에서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행 2:40).
(2) "이스라엘의 자녀들" 까지도 거기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4절). 그 거룩한 자손들은 자기들을 스스로 이 가증한 백성들과 연합시켰다. 혼합된 무리들은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자녀의 수효에 함께 계수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도 중시 여기지 않는 제쳐진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녀들은 자기들의 특성과 품위를 망각하고 그들과 한 패가 되었고, 그들 진영의 불량배들이 자기들의 추밀 고문관이라도 되는 듯이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친근하고 많은 특권을 누리는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자행하고 말았도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알려 주시사 당신을 찬양 하도록 하게끔 했던 그 백성들조차 하나님께 치욕을 돌리니,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영광이란 과연 몇 푼어치나 되랴!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들의 외적 신앙 고백과 신앙인의 특권이 죄에 대한 사탄의 유혹이나 죄 때문에 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주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고전 10:1, 2, 12 참조).
2. 그 범죄 내용은 무엇인가? 그들은 탐욕에 빠져 원망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바로 얼마전에 같은 죄로 인한 징계를 받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죽었지만, 그들은 다시금 같은 죄를 짓게 되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징벌하시어, 그 불길이 채 그들에게서 사라지기도 전에 또 다시 죄악으로 돌아간 적이다(잠 27:22 참조).
(1) 그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누리던 풍요한 진수성찬을 찬미했다(5절).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기서 끌어내 온 것이 엄청난 잘못이라도 되는 듯이 행했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노역의 짐이 무거워 한숨을 지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활은 무거운 노예살이 때문에 점점 고통스러워 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거기서 모두 방백들처럼 지냈다는 듯이 말하면서, 이것이 저들의 현재에 대한 불만의 구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애굽에서 맘껏 고기를 먹었다고 말할 낯이 있는가? 그들은 거기서 중노동으로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있지 않았던가. 그들은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기억했다" (과연 좋은 음식이로다!). 그러나 그들은 벽돌 굽던 일과 공사 감독관, 압제자의 음성과 채찍의 아픔은 기억하지 못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이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을 잊었다.
(2) 그들은 하나님이 베플어 주시던 맛난 음식에 신물이 났다(6절).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떡 곧 천사들의 음식이었다. 저들의 원망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를 보여 주기 위하여 그 음식에 대한 기록이 여기에 삽입된 것이다(7-9절). 그것은 음식으로도 좋았고, 보기에도 즐거웠으니 그 모양은 마치 동양의 진주와 같았다. 그것은 건강에도 좋은 영양가 있는 음식이었다. 그것은 "마른 빵" 이라고 불리우지 않았다. 그 맛이 신선한 기름 같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지혜서 16:20) 모든 사람 각자의 입맛에 맞았다고 하며, 자기들이 원하는 맛이 났다고 한다. 그것은 같은 종류였지만, 요리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함으로써 다양한 음식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돈을 내지 않았다. 애쓰지도 않았다. 그것은 한밤중에, 그들이 자고 있을 때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모아들이는 수고란 말할 만한 노동이 못된다. 그들은 마음껏 먹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는 값싸게 먹었고. 고기를 맘껏 먹었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만나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반 섭리의 산물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한 특별 호의로서, 직접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에서 나오는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만나는 저들이 먹고살던 음식과는 달리 매일 아침 새로운 것이 주어졌고.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었다. 그들이 만나를 먹고사는 동안은, 죄가 그들에게 초래했던 저주, 즉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리라" 고 했던 그 저주에서 면제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란 것은 돼지들이 먹기에도 부적합한 좋지 않은 음식이라는 듯이 말했다. "우리 영혼(개역:정력)이 쇠하여졌도다" 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좋은 음식을 공급해 주시지 않음으로써 자기들을 고생시킨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만나를 보고 경탄했었다(출 16:15). "이게 무엇이냐?" 즉 "이 무슨 진귀한 것인고!" 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우습게 생각했다. 불평투성이의 불만 자들은 자기들에게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지나치게 좋을 정도의 형편에서도 잘못된 것을 찾아내려 한다는 것을 명심해 두자.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여 그 일반적 자비에 대하여 "그러나" 라고 덧붙이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이다. 만나를 주었다. "그러나" 만나 외에 뭐가 있다는 것인가 하는 식이다. 매우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자들도 때로는 불만 때문에 스스로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는 수가 있다.
(3) 그들은 자기들이 고기를 먹기 전까지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노라고 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을 때 많은 양과 소떼를 끌고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탐욕이 많아서 자기들의 우양을 잡아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가축이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그들은 떡을 먹을 때처럼 공짜로 고기를 먹어야 속이 시원했다. 그렇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했던 자들이다). 아니면 성미가 너무 까다로와서 소고기나 양고기로는 만족을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먹던 고기처럼, 뭐 좀 맛있고 진귀한 고기를 꼭 먹고 싶어했던 것이다. 음식을 원한 것이 아니라 향연을 베풀기를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화목 제사를 드리고는, 그 제물 중에서 얼마를 자기들이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식탁은 변변치 않아서 그들은 제물보다 더 맛있는 진수성찬을 찾았음에 틀림없다. 쾌락의 절정에서야 느낄 수 있는 모든 기쁨과 만족을 누리려고 애쓰는 것은, 육적인 정신의 노예가 된 것이다. "진수성찬을 탐하지 말라" (시 23:1-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식에 대한 악속을 주셨다면, 우리가 기름진 것을 먹고 달콤한 것을 마시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4)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식량을 대줄 능력과 자비심이 없다고 불신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줄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릴 수 없다는 것을 당연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이 질문은 정죄받고 있다(시 78:19, 20). "그는 고기까지도 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런 고기를 떡과 함께 주셨던 적이 있었으므로, 자기들이 궁핍해지자(출 16:13) 그런 요구를 다시 한번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원망대신에 기도를 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신앙보다는 욕망이 앞서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5) 저들은 욕심에 뜨거웠다. 그들은 "탐욕을 탐했다" (문자적 의미는 그렇다). 저들은 얼마나 탐욕스럽게 욕심을 내었던지, 마침내는 성화가 나게까지 되었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그렇게 유치했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싶은 것을 다 갖지 못했다고 해서 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욕심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자에게 신세를 져서 해결하려 했다. 우리가 어떤 욕심에 빠져서, 기도를 드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의 탐심을 위해서 음식을 구할 때는" 기도를 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시 78:18). 이 죄 때문에, "여호와의 불이 크데 붙어" 그들을 쳤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경고를 주어.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이" 우리가 악을 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다(고전 10:6).
(6) 고기는 좋은 음식이다. 많은 고기가 율법으로 허용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악을 따라 욕심을 부렸다고 씌어 있다. 그 자체로는 합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데도, 우리의 욕망을 따라 추구하면 나쁜 것이 되고 만다.
Ⅱ. 모세는 지극히 온유하고 착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사실을 보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모세는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고 했다.
1. 그런고로 그 일의 죄악상은 지극히 큰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저들의 원망은 하나님께 큰 치욕을 돌리는 것이요, 모세는 이러한 치욕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또 모세에게까지도 크게 화를 내었다.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당하고 배은망덕한 백성들이 이렇게 계속 시끄럽고 귀찮게 굴게 되면, 결국 모세 자신도 화가 나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중시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가 화를 내었다 하여 그를 책망했다는 기록을 볼 수 없는 것이다.2. 그러나 모세는 화가 나서 그룻된 길을 취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그들을 훈계해야 할 자기의 의무를 잊게 된 것이다.
(1)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과 은혜를 베푸시고. 그 특정한 민족의 구원과 인도에 그를 참여시킴으로써 큰 종으로 세우시고 영예를 주셨으며, 그 영예는 능히 그가 맡은 짐을 상쇄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영예를 경시했다.
(2) 모세는 너무도 많은 감정적인 원망을 늘어 놓았고, 작고 하찮은 소요에 대해서 과민하고 말았다. 그가 통치자의 수고-이것은 그저 보병들과 함께 달리는 것이다-를 감당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전쟁의 공포-이것은 마병과 싸우는 것이었다-를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는 마땅히 신중히 생각해 봄으로써 그들의 동요를 하찮게 여기고 묵과해 버릴 수도 있었다.
(3) 그는 자기의 행적을 찬미했다. 즉 "모든 백성의 짐이 내게 있나이다" 라고 했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멍에를 편하게 해 주셨었는데 말이다. 모세는 그들을 위해 숙소나 식량을 준비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 하셨다. 그리고 만일 어떤 고난이 생기더라도 조금도 모세가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는 그가 물을 수 있는 하나님의 신탁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처신을 가르쳐 주었고, 하나님의 권위가 그를 지원해 주고 있었고, 전능자의 권능 자체가 상벌을 내리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4) 그는 자기의 임무에 충실할 만큼 예민하지 못했다. 그 임무는 하나님의 위임과 명령으로 주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백성이 자기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 아닌 고로 자기가 돌보아 주어야 할 의무가 없다고 제의했으며, 그들 기쁘게 부르시사 고용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그 백성에 대한 어버이 노릇을 하라고 직접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의무를 잊었다.
(5)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고기를 주오리까?" 라고 물은 것은 자신을 과대시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주부가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인 듯이 말한 것이다. "모세가 그들에게 떡을 준 것이 아니로다" (요 6:32). 또한 그는 자기가 단지 하나님의 한 도구가 되어서 그들에게 고기를 줄 수 있으리라는 것도 기대하지 못했다. 그가 말한 뜻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고기를 먹이시렵니까?" 한 것이라면, 그는 이스라옐의 거룩하신 분의 권능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6)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의 짐을 질 수 없다" (14절)고 말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불신한 말이다. 그 길이 훨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모세 자신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훨씬 더 큰 일이었더라도, 하나님께서 힘 주시면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7) 그가 당장에 자기의 생활에 다소의 불편이 있다고 하여, 죽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그것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죽기를 갈망한 것은 가장 나쁜 일이었다(15절). 이게 모세란 말인가? 이 사람이 이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란 말인가? 아무리 훌륭한 자라도 결함이 있으며, 때로는 자기들에게서 가장 탁월한 그 장점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때의 모세의 걱정을 너그러히 봐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혹평하려고 애쓰지 말고 기도하자. "주여,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민수기 11:16-23)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나왔던 저들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악함을 기회 삼아 그 자비의 광채를 더욱 빛나게 한다.
Ⅰ. 모세가 원망한 불평의 시정을 위한 처방이 나와 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통치자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저들의 불평에 지나치게 걱정을 품을 것이 아니라 평안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그가 당장에 통치자의 위치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사실 그래야 마땅했겠지만-하나님께서 보조자들을 명령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고전 12:28)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었다" (즉 다스리는 일에 도움을 주는 자들이다). 그리하여 그의 명예가 깍기거나 실추된 것이 아니라 그의 일을 더욱 손쉽게 해 주었고, "그 백성의 짐을 질 수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방이야말로 모세의 마음에도 맞고 정말로 유익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 모세는 그들을 지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16절). 그 백성들은 너무나 성급하고, 무분별하고 흥분되어 있어서, 선거를 시킬 수도 없었다. 모세 자신이 선출해야만 했다. 또 그래야 다시는 그가 불평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가 뽑을 인원수는 70이니, 애굽으로 내려갔던 사람의 수와 같다. 그는 장로가 될 자들, 곧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뽑아야 했다. 자기들이 "천부장 백부장" (출 18:25)처럼 우수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던 자들이 이제 이 훌륭한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정말로 장로들이 되리라고 네가 알고 있는 자들을 뽑으라. 이름만이 장로가 아니라 자기들의 직임을 다하는 인물을 뽑으라." 우리는 함께 시내 산에 간 장로들의 수효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출 24:1). 그러나 그들은 그 때만의 임시직이었다. 이들의 수효는 영적이다. 또한 이 입법에 따라서, 유대의 대의회 산헤드린-이것은 후대에 가서 예루살렘에서 열렸다. 또 그들의 대법원이었다-도 70명으로 구성되었다. 우리 구주께서도 열 두 사도들을 도와준 70인 제자를 뽑으신 것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눅 10:).2. 하나님은 그 70인에게 자격을 갖추어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들이 그 일에 적합하지 못할 때에는, 그들이 모세에게 더 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자질이 갖추어져야 된다(17절). 모세는 하나님께 지나치게 뻔뻔하게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그와의 교통을 단절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중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끼리도 서로를 귀중히 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려가 너와 이야기하리라" 고 하셨다. 그러면 그도 더욱 진정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나는 네게 주었던 바로 그 영" 곧 지혜와 사랑과 용기의 영을 "그들에게도 부으리라" 고 하셨다. 모세가 그들에 비해 더 못한 영을 가진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그들이 모세와 동등해지지도 않았다. 여전히 모세를 필적할 자는 없었다(신 34:10).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맡은 지위에 맞는 다스리는 영으로 옷 입혀졌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입증할 수 있는 예언의 영을 받았다. 이리하여 하나와 신정(神政)이 수립되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러 쓰실 때에는, 자질도 주신다. 다소 자질이 부족한 자들을 자기들도 당당히 부름 받았다고 자부하지 말라.
(2) 모든 자격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모든 "완전한 은사는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
Ⅱ. 불미스럽던 사람들의 기분까지라도 만족스럽게 되어, 마침내는 아무 소리도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너희 몸을 거룩히 하라" (18절)는 명령을 받았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의 표시로 주어질 하나님의 권능의 증거를 받을 자세를 갖추라는 것이다. "오, 이스라엘이여, 네 하나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 (암 4:12).
1. 하나님은 약속하셨다-차라리 경고하신 것이라 함이 좋을 것이다. 즉 그들은 고기를 실컷 먹게 되리라. 한 달간 계속 나날의 만나 외에, 고기를 먹는 정도가 아니라 고기 잔치를 갖게 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처럼 저들의 식욕을 잘 조절하지 않으면 고기에 신물이 나게 되리라(19,20절). "너희는 네 코에서 냄새가 나서 싫증이 날 때까지 먹게 되리라."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찾아보자.(1) 온갖 감각적 쾌락의 허무함. 그들은 넌덜이나게 먹을 것이다. 그러나 만족을 모를 것이다. 영적 쾌락은 그와 반대이다. 이 세상이 사라지듯이, 이 세상의 탐욕도 또한 사라진다(요일 2:17). 점차적으로 탐욕이 지나면 머지 않아 싫증을 느끼게 된다.
(2) 탐식은 얼마나 잔인한 죄악인가. 그들은 본성에 폭력을 가했다. 건강해야 될 자기들의 육체를 병들게 했다. 그들의 죄 자체가 그들의 징벌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최악의 사태가 오지는 않았다.
(3) 그들이 무절제하게 추구하던 것이 그들에게 싫증이 나게 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처사는 얼마나 의로우신가! 그들이 만나를 천시하듯이 하나님은 그들이 고기를 천시하도록 만들 수 있으시다.
2. 모세는 그 말씀의 실현 가능성을 의심했다(21,22절). 이것은 제자들이 제기한 반대 의견과 같다. 즉 제자들은 "어디서 이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겠읍니까?" 라고 했던 것이다(막 8:4). 어떤 사람은 여기서의 모세의 말은, 단지 어떤 방식으로 그만한 고기가 조달될 수 있겠는지를 겸손하게 물은 것뿐이라고 변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분히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나타내고 있는 고로 결코 변명 될 수 없는 일이다. 모세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떡을 제공해 주신 그분이, 이제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 무한한 권능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다시 고기를 제공할 수 없다는 듯이 그들의 수효가 너무 많다고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주실 고기가 짐승이나 물고기였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동물의 등치가 가장 크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 고기가 조류의 고기였으리라고 감히 생각도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식으로 보시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보다 위에 있다. 모세는 백성들의 탐욕 때문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것은 "족하겠나이까?" 하는 말 속에서 읽어낼 수 있다. 대로는 진실로 위대한 신앙인들도 이 세상의 어떤 불리한 조건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어려워지고, "바랄 수 없는 중에 소망으로 믿는" 믿음을 지니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주의하자. 모세 자신도 감히 "하나님께서 광야에다 식탁을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말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누구나 부르짖는 외침이다. 분명 이것은 모세의 연약함 때문이었다.
3. 하나님은 즉시 만족한 응답을 주셨다. "여호와의 괄이 짧아 졌느냐?" (23절) 모세가 만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오른손의 역사" 를 기억했더라면, 그에게는 아무런 곤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 자신이 수차에 걸쳐 하나님의 권능의 증인이요, 도구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셨다. 모세가 하나님의 권능이 그 백성을 위해 베푸셨던 기사(奇事)를 잊었는가? 즉 애굽에서의 재앙과 바다가 갈라진 일, 그리고 바위를 갈라 물을 내던 일, 하늘에서 떡을 비같이 내리던 일들을 잊었다는 말인가? 그 권능이 없어졌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전보다 약해지셨다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은 이제 과거 당신의 행적에 권태를 느끼신 것인가? 우리들의 불신앙이 의심으로 어떤 이의를 제기하든, 그것은 변함 없다. 즉
(1) 하나님의 손은 짧지 않다. 하나님의 권능은 어떤 일의 쉽고 어려움에 따라 제약될 수 없으며, 오직 당신 지신의 뜻에 따라서만 제약된다.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바다를 측량하시고 하늘을 펴시며(사 40:12), 바람을 움직이던 (잠 30:4) 그 손은 짧지 않다.
(2) 하나님의 손이 짧아지지는 않았다. 그는 전과 같이 여전히 강하시다. "쇠약해지거나 피곤해지지 않는다." 또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때에라도, 우리의 불신을 능히 씻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하지 못할 힘든 일이 무어뇨?"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제 1원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의 교훈을 되돌아 보게 하시며, 옛부터 있던 하나님의 이름 곧 "전능하신 여호와" 의 뜻을 배우게 하시고, 그 일의 결말을 통하여 사실 여부를 밝히신다. "너는 이제 내 말의 실현 여부를 보리라." 하나님의 일은 결코 폐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위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찬미해 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예언을 한 장로들(민수기 11:24-30)
모세의 이스라엘 치리를 도와 주시마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을 보게 된다.
Ⅰ. 여기에 보면, 전체적으로 보아 70명의 정치 고문관을 뽑은 사례가 나와 있다. 모세는 백성들의 동요로 다소 심란해졌었지만,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금 온전한 평정을 회복하고, 즉시 자기의 직무로 돌아갔다. 당면한 문제에 따라서
1. 모세는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 그는 70장로들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장막에 둘러 세웠다(24절).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대기한 것이다.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현현 하시었다. 또 백성들은 저들의 엄숙한 숙명에 대한 증인들이 될 수 있기도 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으려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헌신하고 봉사해 야 한다.2. 하나님도 지체없이 당신의 하실 일을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영을 70장로들에게 주셨다" (25절). 이리하여 그들은 갑자기 능력과 지혜를 받아 비상한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행동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즉 그들은 예언을했고, 그 날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람은) 그 날만 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아마 그들이 최근에 받았던 그 율법에 대한 설명을 했을 것이다. 그들의 사명은 놀라우리만큼 명료하고, 뜻이 깊고, 알기 쉬우며, 표현이 정확하여 그들의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고전 14:25 참조). 이리하여 오랜 후에 사울이 예언의 은사를 받자, 그를 치리자로 허락받았다고 했다. 사울에게도 하루 밤낮 예언의 은사가 임했었다(삼상 10:6, 11).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기 위해 파송될 때는, 아론이 그의 예언자로 일하도록 지시되었다(출 7:1).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다른 일을 맡기시게 되자, 모세에게 자기의 곁에 70예언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거룩한 일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을 잘 교화시킬 수 있는 자임을 명심하자.
Ⅱ. 또한 그 70인 중의 두 사람에 관한 특정 사실이 있다. 곧 엘닷과 메닷인데, 아마 형제였을 것이다.
1. 모세는 그들을 자기의 정치 보좌관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했다" (26절). 칼빈은 이렇게 추측했다. 소환령이 그들에게 보내졌으나, 그들은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연고로 그들에게까지 소환령이 전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지명되었지만, 부름을 받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겸손과 겸양이 지나쳐서 회막에 나아가는 것을 꺼려했다고 본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약점과 무자격성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치리자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사양하려 했다는 것이다. 저들의 정신은 찬미할 수 있다. 그러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은 저들의 과실이었다.2. 하나님의 영은 진 내에 있는 그들을 찾아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천막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에서 예언했다. 즉 그들은 거기에서 기도하고 가르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은사를 받아서 자기들 주위의 개인 천막내에서 그 은사를 실천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회막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과 같이 자기 마음대로 분다" (요 3:8)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로 가서 주의 영을 피할 수 있으랴?"
이 두 장로가 결석을 했다는 데에는 어떤 특별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장로들이 받은 영은 과연 하나님의 영이라는 사실, 그리고 모세가 장로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것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본인들은 겸손 때문에 직무를 수행치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그 일을 맡기셨다. 아니 그보다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그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차지한 것이다. 자신을 낮추는 자들은 존귀하게 될 것이요,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가장 적은 자자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자이다.
3. 이 정보가 모세에게 전해졌다(25절).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개인 천막에 비밀 집회가 있습니다. 엘닷과 메닷이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감독과 관할을 벗어났으며, 다른 장로들의 회합에서도 이탈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전한 자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불법적인 일로 본 것 같다.4. 여호수아는 그들을 중지시키자고 말했다.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28절). 여호수아 자신도 그 70인 중의 한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차지한 직위의 명예를 매우 존중했을 것이다. "예언의 영은 예언자에게 따르는 것이므로" 여호수아는 자기들이 아무런 강압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아님을 당연지사로 여겼다. 그러므로 그는 그 두 사람도 예언을 하지 않든지, 아니면 회막에 나와서 자기들과 함께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그들이 예언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받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단지 앞으로는 금하자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제안은 훌륭한 원칙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것이 엘닷과 메닷을 싫어하는 어떤 개인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정직한 열성 때문이었다. 그는 교회가 통일되기를 바란 것이요, 하나님과 모세의 영예에 관심을 가졌었다.
5. 모세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비난했다(29절).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너는 네가 어떤 영을 받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여호수아와 모세는 특별히 서로 신뢰하는 친구 사이였다. 그는 모세의 영예가 장로들을 부른 이유로 격감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를 책망하고, 다음과 같은 정신을 보여 주었다.
(1) 우리는 남이 받은 은사, 은혜, 능력을 은밀히 시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영예가 자기의 스승 요한의 영예보다 올라가는 것으로 인하여 예수를 시기한 것이 바로 요한의 제자들이 저지른 과오였다(요 3:26 이하).
(2) 우리는 남의 약점이나 결점을 찌르는 일에 열중해서는 안 된다. 엘닷과 메닷이 규칙 위반의 죄를 저질렀다고 가정하더라도 여호수아는 지나치게 성급하게 그들을 대한 것이다. 우리의 열심은 언제나 지혜로운 온유로 조절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인간의 분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약 1:20).
(3) 우리는 가장 선하고 유력자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어느 파당의 머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바울은 자기의 이름을 이용하여 파벌을 옹호하려 하지 않았다(고전 1:12, 13).
(4)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그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마치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지 않은 듯이 생각하여, 우리와 다른 자들을 정죄하거나 금지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막 9:38).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신 자들을 우리가 버린다거나, 남들이 우리와 꼭 같은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 하여 그들에게 선행을 금지시켜서야 되겠는가! 모세는 그런 부류의 인물이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을 침묵시키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을 소멸케 하기는커녕, 오히려 "여호와의 백성 모두가 예언자들이 되기" 를 바랐던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모세는 정당한 자격을 받지 않은 예언자들을 금지시킨다거나 또는 예언의 영이 그렇게 일반화되어 누구게나 임하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호와의 모든 백성" 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 남의 은사에 대한 찬사, 그리고 엘닷과 메닷이 자기가 오지 않는데서 예언한다고 하여 조금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명한 것이다. 거룩한 바울 사도도 바로 그와 같은 정신을 가진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자기의 고난을 더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지만(빌 1:16) 그래서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했다. 우리는 우리의 명예와 정책의 신용이 실추되더라도, 하나님이 예배되고 영광 받으시며 찬양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한다.
6. 이제 새로이 서임된 장로들은 즉시 자기들의 직무에 들어갔다(30절). 저들이 예언을 함으로써, 그 소명이 충분히 실증되자, 그들은 모세와 함께 진으로 돌아가 각각 업무에 임했다. 그들은 은사를 받고 나서 "충실한 청지기로 봉사했다." 이제 모세는 자기의 일과 영예를 그 많은 삶들이 같이 담당해 줄 것을 기뻐했다.
(1)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은 모세의 중언을 명심하자. 즉 통치자기 된다는 것은 하나의 짐이다. 그 통치의 의미를 위식하고 있는 자에게 염려와 번민의 짐이 된다. 그리고 그 의무를 의식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마지막 심판날이 오면 그것은 더 큰 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날 터이니, 그 때에는 그들이 자기의 재능을 감추어 둔 종들의 운명을 이어 받게 될 것이다.
(2)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은 모세의 모범을 본받자. 남의 충고나 협조를 경멸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감사하게 여기면서, 지혜와 권력을 독점하려고 시기하지 말자. 조언자들이 많으면, 안전이 있다.
팀욕자들의 죽음(민수기 11:31-35)
하나님은 모세의 치리를 도와 줄 보좌관들 세워 주심으로써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셨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영으로써 인간의 영을 다스리고 있다는 권능을 보여 주신 셈이다. 이제는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심으로써 백성들에 대한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시려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은 자연계와 그 속에 있는 하등 동물들까지도 다스릴 권능이 있음을 입증하시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 백성들은 고기를 실컷 먹고 배불렀다. (시 78:26 에 나타난 대로 아마 남동풍의)" 바람이 메추라기들을 몰아 왔다" (31절). 메추라기라는 것이 어떤 동물인지는 불분명하다. 시편 기자는 그것을 "나는 새" 와 같았다고 했다. 박학자 패트릭(Patrick)주교는 어떤 현대 학자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 즉 그들은, 메추라기라는 것은 그 지방에 맛있는 식물(食物)로 잘 알려져 있는 메뚜기들이라고 보며, 그것들이 무더기로 쌓여졌었고, 햇볕에 말려서 사용했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달간의 잔치를 마련해 주었으니,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완고한 자식들에게도 관대한 아버지 같았다. 곡식을 먹어 버림으로써 풍성한 애굽 백성에게 재앙을 내렸던 그 메뚜기들이 이제는 먹을 것을 날라옴으로써 불모의 땅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되었다.2.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그 고기를 매우 탐욕스럽게 먹었다. 그들은 지나친 식욕을 발휘하여 "탐욕을 내었다." 모세가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아랑곳하지 않았다(32절). 메추라기들은 하루하고 그 다음날 낮까지 내렸고 그들은 그것을 모았다. 그리하여 각각 자기 집에다 최소한 10호멜씩 날라다 두었다. 다윗은 베들레헴 우물물을 열망했었다. 그러나 막상 거기에 도착해서는 먹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까지 오는 데는 모험이 필요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이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고기를 먹으려 하지 않았어야 할 이유는 더욱 크다. 그것은 불평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모세의 말을 들었다면 그 고기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보내어진 것이라는 것을 더 잘 깨닫고 있어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육욕적 정신의 세력에 지배받고 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정욕이 채워지기를 바랐다. 그것이 오히려 자기들의 귀중한 영혼에 피해를 주고 파멸을 가져오는 것인데도 게의치 않았다.
3. 심판이 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잔치에 대하여 얼마나 값비싼 댓가를 치루었던가! "여호와께서 심히 큰 재앙으로 그들을 치셨다" (33절). 어떤 육체적 질병이 임한 것 같다. 아마 이것은 저들이 포식한 결과였을 것이며.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죽은 자들은 아마 그 폭동의 선동자들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은 종종 진노하시사 죄인들의 욕망을 버려두신다. 반면에 사랑하는 백성들에게는 욕망을 거부해 비리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는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셨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시 106:15). 그러므로 그들을 향하여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진노하셨다" 고 기록되어 있다(시 78:30, 31). 우리가 부당하게 욕심을 낸 것은 성취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오히려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에게 고통이나 십자가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실컷 먹여 주시고나서 재앙을 내리셨다.
(1) 이것은 하나님 당신의 권능이 지니고 있는 명예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하나님은 능력이 모자라 거부하였도다" 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2) 또한, 죄인의 번영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번영은 멸망을 향한 것이다. 그들은 소와 같이 도살 때를 위해서 살찌워지는 것이다.
끝으로, 그 장소에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이름이 붙었다(34절). 모세는 그곳을 기브롯·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탐욕을 부리는 이스라엘인들의 무덤은 이스라엘의 탐욕 자체를 나타내는 무덤으로 보아도 당연할 것이다. 그런 지명이 붙은 것은 경고를 위함이요, 그 결과의 정당함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여전히 죄를 범하였느니라" (시 7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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