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의 용도(민수기 10:1-10)
필요할 때마다 나팔 소리로서 공지 사항을 알리라는 지시가 나와 있다. 이런 일은 모세가 꼭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모세 혼자서 생각해도 나팔이 필요한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든 구성은 신령한 것으로 되어야 했다. 따라서 하찮게 보이는 이런 일도 마찬가지였다. 모세는 이런 지시를 받았다.
1. 나팔을 만들라는 것. 그 나팔은 은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주형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쳐서 만들었다. 그래야 그 모양이나 소리가 소기의 목적에 적합해질 것이다. 두개만 만들라고 했다. 그 때에는 그 나팔을 사용할 제사장들이 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솔로몬 시절에는 120명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 는 기록이 있다(대하 5:12). 이 나팔을 만든 목적은 오늘날과 거의 흡사하다.2. 나팔을 사용할 자. 어떤 비천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제사장들 자신이다. 곧 "아론의 아들들" 이라 했다(8절). 비록 그들이 위대한 자라 해도, 하나님의 집에서 나팔수가 된다는 것이 자기들의 지위에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주의 사역자들은 "나팔처럼 크게 소리를 내어" 백성들의 죄를 일깨워야 하며(사 58:1),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사실(사 27:13)을 시사해 준다.
3. 어떤 때에 부는가?
(1) "회중 소집" 때이다(2절). 이와 마찬가지로 시온에서 금식을 위하여 엄숙한 성회로 모일 때에 나팔을 불라는 명령이 있다(욜 2:15). 종교적 집회의 시기와 시간을 누구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제 의식의 혜택은 누구나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자는 누구나 오게 하라." 지혜가 광장 큰 거리에서 소리를 친다. 그러나 그 나팔은 "불분명한 소리를 내면" 안 된다. 각 지파의 두령이나 장로들만 소집할 경우에는 나팔 하나만 분다고 했다. 온 회중을 한꺼번에 모을 경우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령이나 장로들이 모든 선행에 있어서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그 백성 전체를 함께 소집할 때에는, 나팔을 둘 다 불어서 더 먼 거리에 있는 자들도 듣게 했다. 이런 사실에 연유하여, 그들은 "즐거운 소리를 듣는" 복을 받았다는 말을 듣는다(시 89:15). 즉 그들은 공적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께 참예하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다(시 122:1). 그리고 그 큰 날(심판날)에 모일 총회는 "큰 나팔 소리" 에 의해서 소집될 젓이다(마 24:31).
(2) "진의 행진" 을 위해서 분다. 나팔 소리에 따라서 각 편대가 움직여야 한다. 사람의 음성으로는 명령을 능히 전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잘 훈련 받은 오늘날의 군대는 북소리를 듣고 행진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행진을 위할 때에는 "경보를 울려야" 한다(" 울려 불어야" 한다)(5절). 즉 급히, 떨리는 소리로 간격을 두고 분다. 이것은 그들의 행군에 용기를 돋우어서 능히 대적을 맞게 하기에 적합하다. 반면에 계속해서 같은 높이의 소리가 나면 총회 소집의 신호가 된다(7절).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취소해 달라는 애원을 위해서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도 경보의 소리가 울린 적이 있다(욜 2:1). 처음 경보가 나면, 유다 편대가, 두 번째에는 르우벤 편대가, 세 번째는 에브라임, 네 번째는 단의 편대가 행동하게 된다(5,6절). 혹자는, 여기에 저들의 행군을 거룩히 구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다. 즉 그들의 행진이 제사장들의 신호에 따라 진행되었고, 제사장들은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을 가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동작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했던 것이다. 귀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진실로 그들 중에 계심" 을 들을지어다. 아비야 왕은 자기 자신과 자기 군대에게 이 사실을 매우 중대시하게 했다(대하 13:12). 즉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대장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의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며 함께 하고 있느니라."
(3) 전시에는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불였다(9절). "너희가 대적을 치러 나아갈 때에는 나팔을 불라. 이것은 대적에 대한 너희들의 결의를 하늘에 호소하는 것이요, 승리의 기원이니라. 그리고 하나님은 이것이 당신 자신의 제도임을 인정하실 것이며, 너희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라." 하나님은 나팔 소리를 하감하시고 그들의 전쟁에 개입하실 것이다. 또한 온 백성이 이것을 알고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는 데 용감해지리라. 다윗도 "뽕나무 꼭대기에서라는 소리를" 듣고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풍랑 만난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깨울 필요가 없었듯이, 저들도 나팔 소리로 하나님을 깨울 필요는 없었다(마 8: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당신의 자비를 보이시려 하신 갓이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선한 군병들이 죄와 세상과 사탄을 대적하여 잘 싸울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구원의 대상" 이시니 "그들의 발 아래 사탄을 밟게" 할 것임을 확신케 해 주어야 한다.
(4) 저들의 거룩한 절기의 집례를 알릴 때 불었다(10절). 그들에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 이라는 절기도 있었다(레 23:23 이하). 또 이렇게 함으로써 저들의 모든 절기의 제전(시 81:3)과 제물들을(대하 29:27) 아름답게 꾸몄던 것 같다. 이것은 저들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준행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승리의 예배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더욱 분발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기념" 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의식을 지킬 때 하나님은 그 의식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일은 거룩한 기쁨으로 해야 한다.
진의 이동(민수기 10:11-28)
Ⅰ. 이스라엘 진이 시내 산을 출발한 전체적 이야기가 나와 있다. 근 일년간 그 산기슭예 있었고, 그러는 동안 많은 기념할 만한 일이 발생했다. 이 이동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전에 다소간 알려 주었던 것 같다(신 1:6, 7).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약속의 땅쪽으로 나아가라."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내 산은 종을 낳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거기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율법은 실로 우리를 그리스도께 이끌어 가는 몽학 선생이니,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기쁨과 자유에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행복은 율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서 오기 때문이다.
1. 신호가 왔다(11절). "구름이 떠 올랐다." 아마 그들이 행진 준비를 하는 동안은 잠시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천막을 접고 소유물을 정라하고 하는 데는 많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각 가정이 자기들 것만 하면 되고,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그리고 재 빨리 했을 것이다.2. 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좇아 행진했다." 곧 구름이 인도하는 대로 갔다(13절). 혹자는 "여호와의 명령" 이란 말이 위의 본문에나 앞장에서 그들의 모든 여정을 인도하고 지킨 것으로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주시한다. 즉 이것은 먼 후일 그들이 광야에서 길을 잃고 갈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토록 오랜 기간을 광야에 있었다는 중상과 비방을 일축해 버리는 것이다. 사실상 문제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매 단계, 매 발자국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도를 받았다. 그들 자신은 몰랐어도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길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다가 자기를 맡긴 자들은 아무리 난처한 지경에서라도 여전히 갈 길을 알게 한다. 하나님과 그의 안내가 결코 자기들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길을 잃을까 하는 염려는 필요없다.
3. 3일간 행진한 후에 그들은 다시 정지했다. 그들은 "시내 광야에서" 나왔다. 그리고 "바란 광야에서" 쉬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모든 이동은 광야에서 또 다른 광야로의 이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더 낳은 변화를 기대하지만 막상 그 결과는 그렇지 않는 수가 많다. 언제 어디로 가든, 우리가 각오할 것은 인간의 약한 본성에서 오는 공통적인 비극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가서 모두가 편히 쉬기까지는, 도무지 평안과 쉼이 없을 것이다.
Ⅱ. 저희들이 최근에 주어진 모형에 따라 행군한 그 대형이 자세히 나와 있다.
1. 유다 편대가 먼저 행진했다(14-16절). 유다 지파와 함께 유숙하던 선발대의 깃발이 이제는 지휘권의 표시가 되었다. 다윗 시대에로 지휘권의 권한은 유다 지파에게 맡겨졌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대장에게 위임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에게로 모이리라" 는 것이 예언되어 있었다.2. 그리고는 레위 지파의 두 집안이 왔다. 그들은 회막 운반을 맡았다. 구름이 떠오르자 마자, 회막을 걷어서 이동할 채비를 갖추었던 것이다(17절). 그리고 회막을 나누어 실은 수레 6개가 왔다. 이 모든 행진 중에 회막은 종종 이동했다. 이것은 구약 율법 중 의식법의 유동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종종 바뀌어지던 의식법은 마침내 사라졌다(히 8:13).
3. 다음으로는 르우벤의 편대가 행진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 된 일이다(18-20절).
4. 그 후에는 회막의 기구를 맡은 고핫 집안이 뒤따랐다. 그들은 가장 안정하고 또 영예로운 위치인 "진 한가운데서" 행진했다(21절). 그리고 그들(즉, 난외에 있는 바대로 게르손과 므라리 집안)은 "그들(고핫 족)이 이르기 전에 회막을 세웠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레위 집안들뿐만 아니라 제 1편대에 있던 이스라엘인들도 회막을 세우는 일에 협조했을 것이므로 이렇게 일반적인 말로 표현된 것 같다. 아마 자기들의 천막을 치기 전에 먼저 성막을 쳤을 것이다.
5. 에브라임 편대는 법궤를 뒤따라갔다(22-24절). 시편 기자의 기도는 이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도 본다(시 80:2). 즉 그는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앞에서" -이제 지파가 한 편대를 이루었다-" 주여 용기를 내사" (법궤를 용기라고 칭했다. 시 78:61) "우리를 구원하여 주소서. "
6. 단 편대가 제일 뒤에 갔다(25,27절). 이들은 "모든 군대의 후진" 이라 했다. 뒤에 남은 자들은 모두 여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나 어린 아이들(아마 이들은 각 집안의 우두머리들이 돌보았을 것이다)이 아니라 모든 부정한 자, 섞여 사는 무리들, 그리고 연약한 모든 자들은 뒤에서 행진해 갔다. 요셉을 양떼처럼 인도하시는 분은 제일 뒤에 있는 자들까지도 살피신다(겔 34:16).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자들도 보살피신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에게 보내 준 자들은 그가 잃지 아니할 것이다" (요 17:11).
호밥에 대한 모세의 요청(민수기 10:29-36)
Ⅰ. 모세와 호밥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의 진은 가나안을 향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혹자는, 호밥이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 자신이라고 한다. 그래서 출애굽기 18장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밥은 이드로 또는 르우엘이나 라구엘(출 2:18)이라고도 하는 이의 아들일 가망이 더 크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그 아버지는 고향에 갈 때(출 18:27). 그의 아들 호밥을 모세와 함께 남겼다. 바실래가 김함을 다윗과 남겨 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장인이란 단어는 처남이란 단어와 원어로는 같다. 이제 이 호밥은 이스라엘이 그의 고향 부근 시내 산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계속 같이 유숙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이동하고 있으므로, 호밥은 자기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1. 모세는 자기들과 같이 가나안에 가자고 친절한 초대를 한다(29절). 모세는 그에게 약속하기를, 자기들이 필경 그를 선대할 것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을 주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말씀하셨느니라." 이것은 마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오라. 우리 중에 함께 거하자. 우리가 잘 지내게 되듯 너도 잘 지내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잘 지내게 해 주시마고 약속하셨느니라" 는 것이다. 하늘의 가나안을 향해 가는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행해야 한다. 남이 함께 간다고 하여 결코 우리의 보물이나 기쁨이 감소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라고 하셨으리라" 하는 이 말보다 더 힘있게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 백성으로 삼게 하는 주장은 없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와 교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요일 1:3). 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와 같이 가는 것이 좋다(슥 8:23).2. 호밥의 현재의 생각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다(30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잘 볼 수 있는 자들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표적을 아는 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동행을 청해야 한다. 그러나 호밥이 거부하는 것은 자기의 본토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계약의 축복의 진가를 믿게 되면, 그것은 생각보다는 크게 작용하지 않게 된다. 그는 사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다(미디안 사람은 그두라의 후손이므로 아브라함의 혈통에 관계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신앙을 상속 받지는 못한 자들이다(히 11:8). 그렇지 않고서는 호밥이 모세에게 이런 답변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보이는 세계의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 저 세계의 일 추구를 크게 방해한다. 이 세상의 거대한 장점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매력을 능가한다.
3. 모세는 지극히 간절히 청하여 그의 의사를 바꾸었다(31,32절). 모세의 주장은 이렇다.
(1) 호밥이 자기들에게 쓸모있는 자라는 것. "우리는 광야에다 진을 쳐야 하리이다" (그 땅은 호밥이 잘 알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의 눈이 되소서. 우리가 진 칠 곳을 안내하거나 행진할 곳을 말하라는 뜻은 아니옵니다" (이것은 구름이 했다). "단지 우리가 지나가거나 진칠 곳의 편익과 불편을 미리 말해 주소서. 우리가 편리한 점은 최대한으로 이용하고, 불편한 점을 위해서는 최대한의 방비를 하리이다."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뢰와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하자. 기적으로 인도함 받는 자들이라도 일상적인 지도 방편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모세가 이것을 제의한 것은 그의 정보에서 많은 유익을 얻으려 해서가 아니라 그가 다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여 기뻐할 수 있도록 하며 고무해 준 것이라고 본다. 칼빈은 이와는 매우 다른 견해를 피력했는데, 그것이 원의에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나로서는 별로 중대한 뜻을 찾지 않겠다. "우리는 떠나지 마소서. 함께 와서 약속의 땅에 참여하소서. 당신은 광야에서 우리가 어떻게 진 칠 것을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소서. 또 우리는 고생에 동참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가나안에 가지 않더라도 많은 좋은 일을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분명히 이것 때문에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기 시작하였으니, 계속 함께 하소서." 시작을 잘한 사람들은 끝까지 일관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까지 한 고생의 보람을 잃지 않는 법이다.
(2) 자기들이 그에게 친절을 베풀겠다고 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께 행하리이다" (32절).
다음 사실들을 명심해 두자.
[1] 우리가 받은 것만 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힘 주신 것 이상으로 자선을 베풀 수는 없다. 우리가 감히 약속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게 하여 선행을 베풀었다는 것이 그 전부이다.
[2] 고생과 수고로 하나님의 백성에 동참한 자들은 그들의 위로와 영예에도 동참하게 된다. 광야에서 그들과운명을 같이 하려한 자는 가나안에서 그들과 같이 운명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고난 당하며 그들과 더불어 다스리리라" (딤후 2:12; 눅 22:28, 29).
호밥이 어떤 대답을 모세에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침묵이 동의를 뜻하고, 결국 그들을 떠나지 않았기를 희망한다. 그는 자기가 유용한 일을 하리라는 것을 깨닫고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만족케 하기보다는 모세의 뜻을 따랐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가족이 그것 때문에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삿 1:16; 삼상 15:6).
Ⅱ. 이 행진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나눈 교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그들은 "여호와의 산을" 떠났다(33절). 곧 그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고 그의 음성을 들었고, 그와 계약을 맺었던 바로 그 시내 산이다(그들은 그곳에서 축복으로 받아 왔던 그러한 현상을 줄곧 받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그 자랑스러운 산을 떠났다. 성서에서는 과거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곳이 아니고는 다시는 그 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제 시내 산을 작별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이것은 영원한 나의 안식처니라" 고 말씀하신(시 132:14) 그 산이다. 시내 산도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의 산을" 떠날 때에 "여호와의 계약의 궤" 를 가지고 갔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계속 친교를 나누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길을 지시했다." 계약의 궤가 그들 앞서서 갔다. 어떤 자들은 이동의 장소를, 또 어떤 자는 단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궤는 이스라엘 진의 한 가운데서 움직이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 위를 덮고 있던 구름이 그들의 모든 동작을 지시했던 것이다. 궤(곧 궤의 하나님)는 그들을 위해서 "쉴 곳을 찾았다" 고 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나 자식은 탐색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현명한 자가 그들 앞서 가면서 갈 곳과 진 칠 곳을 찾듯이, 그들이 인도된 모든 곳은 그들에게 그러한 곳아었다. 마찬가기로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정탐해 내하신" 땅이라고 일컬어졌다(겔 20:6).2. 그것을 통하여 그들은 "저들의 모든 길이서 하나님께" 고백하고, 법궤를 하나님의 임제의 표증으로 삼았다. 궤가 움직이거나 쉬거나, 그들은 줄곧 하나님을 앙모하고 있었다. 회중의 입을 대신한 모세는 법궤가 움직이거나 서거나 간에 기도를 드렸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들어오거나 나가서나 기도로써 스스로를 성별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기도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
(1) 법궤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드린 기도가 여기에 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을 흩으소서!" (35절) 당시의 그들은 황량한 곳에 있었으나, 적국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길 안내와 광야에서 식량 조달뿐만 아니라 전쟁의 성패를 하나님께 맡기고 있었던 깃이다. 다윗도 오랜 후에 이 기도문을 이용했다(시 68:1). 그도 역시 여호와의 전쟁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세상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원수들도 있다. 공공연한 적도 있고 은폐된 적도 있다. 그의 진리와 법과 규례와 백성을 해치는 원수들이다.
[2] 하나님의 적을 흩고 무찌르는 것은 주의 모든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고 믿고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이 기도는 하나의 예언이었다. 하나님을 계속 대적하는 자들은 자기의 멸망을 재촉할 뿐이다.
[3] 하나님의 적을 흩고 무찌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일어서지 않고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일어나시면" 순식간에 그 일은 끝난다(시 76:8, 9). "주여, 태양이 일어나 밤의 그림자들을 흩어 버리듯이, 일어나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일어나사 그의 적을 흩으셨다(시 68:18).
(2) 법궤가 쉴 때도 기도했다(36절).
[1] 하나님의 백성을 쉬게 해달라고, 어떤 자들은 본문을 이렇게 읽는다. "오,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천만인을 돌이키소서. 이 곤경이 지난 뒤에는 그들을 돌이키사 다시 안식하게 하소서." 그래서 이런 말도 있다(사 63:14). "여호와의 영이 그를 쉬게 하셨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와 성공을 더하게 하시사, 평화의 아침에 느끼는 평온을 누리게 해 달라고 했다.
[2]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안식하시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읽었다. "이스라엘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다음과 같은 점을 명심해 두자.
첫째, 하나님의 교회는 큰 집합체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는 수 천만인이 속해 있다.
둘째, 우리는 기도 중에서 이 집합체와 우리를 관련시켜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복리와 행복은 하나님께서 계속 함께 계셔 주는 데에만 있다. 그들의 안전은 그들의 수효가 수 천만이라 해도 그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또 그들에게 다시 돌아가 그들과 함께 계시는 그의 임재에서 기인된다. 이 수천명이란 하나의 암호이며, 그가 표상이시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 너 이스라엘은 행복하도다! 어느 민족이 너와 같은고!" 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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