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관습을 좇지 말라 (레위기 18:1-5)
여러 가지 제도를 백성들에게 주신 다음, 하나님은 도덕적 계율의 공포(公布)에로 들어가셨다. 전자의 율법(의식적 용법)들은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하나의 모형으로서의 유용성을 지니며, 후자의 율법은 여전히 법으로서의 구속력(拘束力)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1. 여기에는 이러한 제 율법을 공포하는 신성한 권위가 나타나 있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 4, 30절), 또다시 "나는 여호와니라" (5, 6, 21절)고 하셨다. 즉 "만물을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계신 여호와이니라. 그리고 너희를 다스릴 특별한 권리가 있는 너희 하나님이니라" 는 것이다. 여호와는 존재의 터전이시므로, 또한 권세의 터전이요, 우리는 그의 소유이요, 우리는 그를 섬겨야 되며, 그는 모든 불순종하는 자를 벌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께 최고의 의무를 다하리라고 동의하였고, 그분께 대한 책임이 있으며, 너희의 모든 행복은 그분 안에서 발견되느니라" 는 것이다.2. 애굽에서 보았던 우상 숭배의 유적을 삼가라는 엄격한 경고가 주어졌다.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에서 살았었다. 또 가나안 인들의 우상 숭배에 영향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바로 그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3절).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당신의 규레들을 그 백성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저들의 풍속중에는 aliquid deliscendum--잊어 버려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상 숭배로 유명한 애굽에서 젖을 먹으면서 함께 빨아먹었던 바로 그런 것들이다. "너희는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라" 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종살이하던 땅의 풍속을 따른다면, 신앙적으로 그들의 지배를 다시 받는 것이므로, 그 종살이하던 땅의 풍속을 삼가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큰 부조리이다. 또한 그것은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그들을 구해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는 지극히 큰 배신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모순의 영에 의해서 지배받는 자들처럼,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러한 제 규례를 받은 후에도 가나안 인들의 사악한 관습을 따르거나 그 땅의 악습을 물려받을 위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위험 때문에 저들에게 경고가 내린 것이다. "너희는 그들의 규례를 행하지 말라" 고 했다. 그러한 악행이 관습화되어, 저들의 관행(慣行)을 규례라고 불리우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관행은 하나님의 규례와 적수가 되고,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한 그의 백성들조차도 그것들에게서 법을 배울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이다.
3.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라" 는 엄숙한 책임을 맡겼다(4, 5절). 다윗은 시편 119편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기도하고 고백을 올릴 때에, 이러한 분부나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임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이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를 책 속에 간직하고 우리의 손안에 간직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그것이 실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라" (시 103:18).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행로를 가야하며, 그 법도를 우리의 법칙으로 삼아 일해야 하며, 우리의 보물처럼 지키고, 우리의 눈동자처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2) 순종하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온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살리라" 고 했다. 즉 "그는 이제부터 행복하여지리라" 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
[1] 그것은 매우 은혜스러운 교훈으로서, 아직도 유효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히 지킨다면-물론 죄 없는 완전에 이르지는 못하겠지만-우리는 의무를 다하는 길이 우리의 안위가 되는 길이요,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 이 있는 것이다(딤전 4:8). 지혜는 이르기를, "내 계명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또 "영으로써 몸의 행실(이것과 우리의 관계는 이스라엘인에 대한 애굽인의 관습과 같다)을 죽이면, 살리라" 는 말씀이 있다(롬 8:13).
[2] 또한, 비록 가장 작은 죄를 범하여도 그 죄가 우리를 이생에서 영원히 축출하리라는, 그런 계약의 성질은 지금 유효하지 아니하다는 이유에서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두 번씩이나 인용하면서, 그것은 복음이 계시하는 신앙과는 반대된다고 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행하는 자는" evn auvtoi/j-그 안에서 곧 "그 의(義)로 살리라" 고 설명한 것이다(롬 10:5). 그러한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고 했다(갈 3:12).
복음이 성취한 변경 사항은 그 마지막 말속에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것을 행하는 자들은 살 것이지만, "" 그로 인하여" 사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이지 율법 그 자체가 나빠서는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써 살리라.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삶을 얻는 것이요, 자기들의 공로로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갈 3:21, 22 참조). "의인은 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써" 살 것이요, 저들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힘입어 사는 것이다.
근친상간을 금함 (레위기 18:6-18)
이 율법은 제 7 계명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며, 복음 아래 있는 우리들도 지킬 의무가 있는 법이다. 그 율법은 인간의 본성(자연) 자체의 빛과 법에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 조항 중의 하나.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상관하는 행위는, "이방인 중에서도 그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그러한 죄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던 죄이다(고전 5:1). 이방인들 중의 어떤 특정한 사람들은 여기에서 금지된 어떤 근친상간을 습관처럼 여겨 왔지만, 천박한 욕심에 사로잡힌 잔인한 민족들 외에서는 그러한 근친상간이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증오의 대상이 되었었다.
다음 사항을 관찰해 보자.
Ⅰ. 여기에 명시되어 있는 근친상간의 금지는, "그들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는 것이다(6절).
1. 이것은 주로 친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려 했던 것이다. 결혼이란 참으로 신성한 제도이다. 결혼이란 제도와 안식일 제도는 모든 제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이요, 지상의 모든 인간에게 한결같이 뜻을 주는 제도이다.또한 그것은 인생의 위안을 의도한 것이다. 또한 결혼은 인종의 품위 있고 존귀한 번식을 의도한 것이다. 이 점이 동물과는 달리 인간성의 뛰어난 존엄성이 된 것이다. 인생은 "만물의 영장" 이요, 여기에 나타난 율법들은 인간의 존귀를 뒷받침해 주기 위한 것이다. 신성한 규례는 신성한 규제에 복종해야 한다고 요청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규례는, 타락된 인간 본성에 깃들어 있는 것(죄)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자칫하면 그 타락한 본성의 고집을 따르고 그 욕망에 사로잡혀 법의 견제를 박차고 나아가기 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금령은 저항할 수 없는 권위로 공포된 것들이지만, 거기에는 지극히 큰 타당성과 공정성도 깃들어 있다.
(1) 결혼을 하면 두 사람이 한 육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에서이든 이미 본성적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인 육체들끼리라면 결혼이란 제도를 통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극히 큰 부조리이다. 결혼이란 제도는 이전에는 연합되지 아니한 것을 연합시키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2) 결혼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평등을 부여한다. "네 갈빗대(옆)에서 네 배우자를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전에는 우열의 차이가 있는 자들이 서로 결혼한다면(본문에서 언급된 관계는 바로 이런 관계이다), 본성에 의하여 있던 질서가 한 적극적인 제도에 의하여 사라지고 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것는 결코 허락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과 종, 고귀한 자와 비천한 자 간의 불평등은 사회적 동의와 관습에 기초한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혼이라는 평등성에 의해서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 그리고 삼촌과 질녀, 숙모와 조카들 간의 불평등성은 혈통으로 된 것이든지 결혼으로 된 것이든지, 인간의 본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불평등은 영속적인 것이요, 결혼이라는 제도의 평등성에 의해서 사라진다면 큰 혼란이 생길 것이요,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태고적부터 내려온 제도이지만 본성(자연)의 질서에 맞는 것이다.
(3) 형제자매 사이를 제외하고는, (촌수상) 평등한 친족은 결코 금지되지 아니했다. 그러한 평등성은 물론 혈통에만 의해서나 또는 절반 정도만 혈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결혼에 의해서 생긴 평등성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전저의 경우와 같은 본성적인 부조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친누이들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등성은 어떤 실제적인 율법에 의해서 지원되고 있으므로 범하거나 저항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그들(형제자매)이 젊은 시절에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그들 간에 죄악적인 다른 관계가 생기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결혼의 어떤 의도를 파괴하지 않고는, 서로 결혼할 수 없는 자들이다. 만일 모든 남자들이 자기의 친누이와 결혼한다면(그것도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전해지면 합법적인 것으로 되기 쉽다), 각 가정은 그 나름의 한 세계를 이루게 될 것이요, 그 때는 "우리가 모두 서로 한 지체이니라" 는 것은 잊혀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근친상간은 다소라도 건전한 이방인들에게는 가장 파렴치한 짓이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여겨 왔던 바이라는 것이 아주 확실하다. 또 이러한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 사람들도 저들이 스스로 그것을 금하는 법을 지켰던 것이다.
근친상간적인 혼합을 변호하기 위하여 결혼이라는 의식을 이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요, 그들의 죄책을 조금도 완화시킬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규례를 모독하는 죄책을 가중시키는 것이요, 가장 고상한 목적의 제도를 가장 비열한 목적에 이바지하도록 이용하는 죄책을 더한다.
2. 그러나 근친상간 금지에는 전자와 같은 의도 외에도 다음과 같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즉 결혼을 빙자하여 친척 중의 어떤 사람을 범하는 부정한 짓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음탕한 몸가짐, 방탕한 희롱, 악마의 모양을 뒤집어쓴 모든 행동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악마는 "친족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서로 마음껏 친밀히 교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간에 되어지는 모든 일은 순결한 것이다" 라고 속삭인다. 그러한 행동이 타인들에게서 별로 악한 것으로 의혹을 받지 않으면 않을수록, "사탄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고후 2:11) 더 많은 관심을 그 사람들에게 기울여야 한다. 사탄은 매우 교묘한 원수요, 기회만 있으면 우리를 삼키려고 찾고 있기 때문이다.Ⅱ. 금지된 친족 관계가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다. 거기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법칙은 이러하다.
남자의 친족과도 결혼이 금지되어 있듯이, 자기 아내의 친족과도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형제의 아내와 결혼을 금한 율법(16절)은, 유대 나라에만 있는 특정한 예외를 규정하고 있다. 즉 그들은 자식이 없이 남자가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나 다음으로 가까운 친족이 그 과부와 결혼하여 그 집안에 자식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해야 한다는 예외 규정이다(신 25:5). 그것은 그 사회에 유익을 가져온다는 이유에서만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유가 사라졌으므로 그러한 예외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남자는 결코 그의 형제의 과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이 발효되고 있는 것이다.
" 그녀(아내)의 형제를 취하지 말라" 고 한 금령(18절)은 일부다처제를 묵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의 어떤 율법들은 그런 것을 인정했다(출 21:10; 신 21:15). 그러나 한 남자가 (야곱의 경우처럼) 자매를 취하여 결혼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 만일 한 남자가 자매를 같이 아내로 취하면, 이전에는 그렇게 가깝지 않던 (자매지간이 아닌) 관계의 두 여자가 한 남자의 아내들이 되었을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보다 큰 질투심과 적대심이 일어나기가 쉽기 때문이다. 즉 이전에 평등했던 자매가 한 남자의 아내들이 된 경우이다. 아내의 여자 친형제가 그 남편의 첩이나 둘째 아내가 된다면, 아내가 살아 있는 한, 일생 동안 다툼이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수간과 우상 숭배를 금함 (레위기 18:19-30)
Ⅰ. 부부 생활의 존귀성을 보존하기 위한 율법이 나타나 있다. 즉 부부 생활은 때맞지 않게 부당하게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했다(19절). 또한 음행자에 의해서 침해받아서도 아니 된다고 하였다(20절).
Ⅱ. 또한 자기 자녀들을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하는" (21절)가장 수치스런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율법이 있다고 몰렉 신이란(어떤 자들의 생각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예배하기 위해 만든 우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를 예배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자녀를 그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 그 우상 앞에서 불태워 죽이든가, 그 우상에 귀의한 광신자로 삼았다. 그래서 그 자녀들은 두 개의 불 사이를 통과하게 하든가, 어떤 자들이 생각하는 데로, 하나의 불 위에 던져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이 거짓된 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행위들이었다. 그들은 그러면서 자기들의 자녀들 중의 하나를 이런 식으로 하여 몰렉 신에게 성별하여 바치면, 나머지 자녀들 모두에게 행운이 온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들의 친자식을 거짓 신들에게 그렇게 아낌없이 바치었는데,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위해 바치지 못할 만큼 아까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죄악(이러한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그들은 그러한 죄를 짓는다)이, 자신들과 자기들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보호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자행되었고, 그들과 그들 자녀들이 그런 죄로 인하여 어떻게 악화되었는가를 살펴보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가져 그들(우상)에게 드려 제물을 삼았도다" (겔 16:20).
그러므로 본문 중에는, 그러한 행동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 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들은 여호와보다는 몰렉 신에게 더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가축만 드리는 자들이 몰렉에게는 자기들의 자식까지도 드렸기 때문이다.
Ⅲ. 또 부자연스러운 정욕 곧 남색(男色:sodomy)과 수간(獸姦)을 금하는 율법이 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치욕적인 이름의 죄들이다(22, 23절).
다른 죄들은 인간을 짐승의 수준 정도로 떨어뜨리지만, 이 죄들은 인간을 짐승 이하로 몰락시키고 만다. 도대체 이러한 율법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율법이 수립된 이래로 그러한 율법이 범해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간성에 대한 영원한 수치요 치욕이다. 인간이 이렇게 부끄러운 욕정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흔히 인간이 우상을 숭배한 데 대한 처벌로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도 그렇게 말했다(롬 1:24).
Ⅳ. 이러한 죄와 그밖에 가증스러운 사악 행위를 금하는 말씀이 나타나 있다. 우리를 훈계할 수 있는 명백한 권한을 가진 분께서-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사람으로 대접하시려 하시고 또 "사랑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이끌려 하시는" (호 11:4) 분이신고로- 겸손한 자세로 우리와 변을 펴신다.
1. 죄인들은 이러한 혐오스런 짓으로 자기 자신들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 고 하셨다(24절). 모든 죄는 양심을 더럽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죄들은 그 자체가 특별한 배덕(背德)의 요인을 품고 있는 죄들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고맙게도 우리에게 스스로를 정결케 하라고 요구하시며, 더러움에 빠지지 말라고 권고하시고 계신다.2. "무릇 이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는 자는 끊쳐지리라(죽으리라)" (29절). 또 그렇게 되어야 당연하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 자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17).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른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아니라면, 영혼은 육체의 정욕으로 인하여 파멸되고 말 것이 확실하다.
3. "그 땅도 더럽다" 고 했다(25절). 이러한 죄악이 자행되고 묵인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 땅은 하나님의 회막이 들어서기에는 부적합한 곳이 되어 버린다. 순결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스러운 임재를 나타내는 표시(회막)를 그러한 땅에서는 거두어 가실 것이다.
또한 그 땅에 사는 주민들에까지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그러한 죄에 감염되거나 같이 빠져 버릴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정말로 선한 사람들로서는 그 땅에 살기조차 역겹고 증오스럽게 되는 것이다. 소돔의 악행이 의인 롯의 영혼에 미친 영향과 같은 것이었다.
4. 이러한 죄악 때문에 (가나안 땅의) 이전 주민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럽게 되었다(24,27절). 그러므로 이러한 율법이 필요했던 것이니, 그것은 전염병이 나도는 지역에 우리가 들어가려면 그 병을 예방하는 예방 주사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짓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 짓을 행하던 제 민족들은 이제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고, 불원간 이스라엘의 칼에 의해서 멸망해 버릴 운명에 놓이고 말았기 때문이다.이 일로 인하여 이러한 진흙탕에 빠져서 자신을 더럽힌 자들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가를 저들은 깨닫을 수밖에 없었고, 모든 선한 자들의 콧구멍에서도 얼마나 악취가 나고 있는가를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처럼 이미 성화(聖化)되고 존귀케 된 사람이 다시금 자기들을 더럽혀서야 말이 되겠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추악한 죄악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것으로써 우리의 정결을 보존하려는 지극한 관심과 조심을 지녀야 하는 장신구로 활용해야 한다.
5. 이런 따위의 죄악으로 인하여 가나안 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죄악이 아모리 족속의 죄악의 분량을 채우게 되자(창 15:16). 그렇게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들이 파멸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당시로서는, 당분간, 그들의 나라를 도구로 써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악을 인하여 벌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25절). 대범하게 신성을 모독하는 무신론적인 자들 위에 내려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신성 모독과 무신론을 좇는 조그마한 겉모양을 닮는 것조차도 철저히 조심하라는 경각심을 주기 위한 것임을 명심하라. 가나안 인들의 패망은,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을 닮지 못하게 하려는 경고의 사건이었다. 아니 그 보다도, 창조주께서 그러한 가증스러운 일에 분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세계가 그러한 죄악으로 짓눌려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 땅 스스로도 그 땅의 거민들을 토하여 낸다" 고 했다(25절). 말하자면 그들이 밟는 그 땅이 그들의 발 밑에서 신음하고 아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대적" (사 1:24)들이 그 땅에서 물러나기까지는 그 땅도 평안할 수 없을 것이다.이것은 죄악이 지니고 있는 극도의 증오스러움을 말해 주는 것이다. 죄악의 사람은 참으로 "악을 행하기를 물 마시듯이 한다" (욥 15:16). 그러나 무해한 피조물들조차도 그들을 대(對)하여 파도치고 있다. 많은 집과 마을이 사악한 주민들을 토하여 내었다. 말하자면 그들이 그 사람들을 혐오한 것이다(계 3:16). 그러므로 "그 땅이 너희로 토하여 낼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28절). 그 땅은 그들에게 보장되고 권리가 양도된 땅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인들의 악행을 답습한다면 그 땅은 그들에게 같은 운명을 안겨다 주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가나안인 들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이스라엘의 자녀들도 똑같이 가증스럽게 보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아니 오히려 더욱 가증스럽게 보셨다는 사실 명심해야 된다.
바울 사도는 여기에서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종류의 경고를 개종한 이방인에게 해 주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거부당한 유대인을 두고 한 경고이었고, 이제 이방인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말았다고 했다(롬 11:19 이하). 그러므로 그들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본을 받지 말라" 고 하는 경고를 들어야 했다(히 4:11). 이러한 경고는 더욱 일반적으로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온갖 죄악에서 실제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무저갱의 문에서 나는 소리에 신앙의 귀를 기울이자. 그리하여 저주받은 죄인들의 슬픔에 찬 비명과 부르짖음을 들어보자. 그들은 땅이 토하여 내고 지옥이 삼켜 버린 자들이다. 저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이제는 영원히 멸망되고 만 자신들을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최후 운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깨달아 우리는 죄에서 떠날 줄 알아야겠다.
Ⅴ. 본 장은 이러한 죄악의 물결에 대한 강력한 방파제를 주시는 것으로써 결론짓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가중한 풍속은 하나라도 좇지 말라" (30절). 이것이 처방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죄악적 풍속은 가증스러운 풍속이다. 속되고 유행어도 악한 풍속은 결코 그 자체가 경건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이 조금도 가증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유행되는 속된 풍속은 더욱 가증스러운 것이다. 보다 관습에 깊이 물들어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그러한 악은 더욱 위험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2. 죄악된 풍속을 하나라도 용납하거나 인정하는 것은 치명적인 해독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악은 많은 악으로 통하는 관문이 되기 때문이다. Uno absurdo dato, mille sequuntur-단 한 가지의 부조리를 용인하면 당신은 곧 수천(부조리)을 불러들이게 된다. 죄악의 길은 저절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언덕길이다.
3. 하나님의 규례에 언제나 굳게 서는 것이 거대한 죄악의 파멸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제방이 된다. 거룩한 규례의 달콤한 맛을 더 잘 알고 그 규례의 권능을 그만큼 잘 느낄 수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에게는 죄인들의 가증스런 풍속이 주는 금지된 쾌락에 흐르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더 적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를 안전하게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뿐이요, 그 은총은 은총의 방편(규례들)을 활용하는 가운데서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의 제도들을 버리지 아니하는 한, 하나님은 결코 먼저 우리를 죄악된 욕정에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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