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의식 (레위기 16:1-4)
Ⅰ. 속죄일에 관한 율법이 선포된 일자가 언급되어 있다. 즉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후에" 라고 했다(11절). 거기에 대해서는 10장 1절에 기록되어 있다.
1. 아론은 아직도 그의 집안에 어떤 죄가 남아 있거나 또는 그의 자녀들(제사장들은 죄지을 가능성이 그렇게 많으므로)이 그 후에 어떤 죄를 지어서 죽음으로써 자기의 집안이 멸망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의 집안 죄를 속죄하는 방법을 지시해 주시어서, 하나님이 그 집안을 지켜 주시리라는 것을 알리셨다. 죄를 속하는 것이 그 집안을 굳건히 세우는 일이요, 그 집안에 임할 축복을 지속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2. 제사장들은 나답과 아비후가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경건한 경외심(이것이 없이 나아가면 목숨이 위험하다)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경고를 받은 셈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데에 필요한 지시 사항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 지시를 지키면 목숨이 안전할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유익과 위안까지도 받으리라고 했다.
제사장들조차도 불합당하게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다가 죽었다면 다른 사람들이야 어떠하랴!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전혀 나아가지 않을 것이 아니라, 법칙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사 나머지 사람들은 죽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교훈을 주게 되는 것이다.
Ⅱ. 이 율법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 그 의도 중의 하나는, 회막내에 있는 지성소에 대한 경외감을 간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지성소에는 세키나 곧 하나님의 영광이 구룹들 사이에 기꺼이 거하고 있었다. "아론에게 이르라, 무시(無時)로 성소에 들어오지 않게 하라" (2절). 그 회막 앞에는 제사장들 중 누군가가 매일 분향을 올리는 금 제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 회막 내에는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도 일 년에 한 번 외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도 중요한 의식과 깊은 조심을 가지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특수한 임재를 나타내시는 그 곳은, 어디든지 저속한 곳이 될 수가 없다. 이 세상의 왕들이 거하는 소위 알현실(謁見室)이라는 곳에도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고, 왕비 자신도 그럴 수 없었다면(에 4:11), 하물며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께 그와 같은 신성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겠는가?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일어난 변화는 얼마나 축복된 것인가를 깨달으라.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이 지금은 회막을 통과하여, 매일같이 "담대히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히 10:19, 20).
그리고 우리는 (아론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가야 했지만 그와는 달리) "은총과 보좌" 곧 속죄소에까지 "담대히 나아간다" (히 6:16).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의 현현이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나타나는 때에는 그러한 특별한 제한과 규제가 요구되어 있었다. 감각의 대상물이 그들에게 친근히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들의 경외심이나 기쁨이 그만큼 줄어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현현이 순전히 영적으로 나타나므로 달라진 것이다. 신앙의 대상과 더욱 친근히 교제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자기들의 신중성과 선행을 많이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은 "손으로 지어지지 아니한 성소" (히 9:17)에 무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환영된다. 우리는 신앙에 의하여 "하늘의 처소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엡 2:6). 당시의 아론은, "죽지 않기 위해서는", 무시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언제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죽음을 초래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전과)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속죄소 위에 구름과 함께 나타나셨다. 그러나 지금은 어두운 구름 속으로가 아니라, 맑은 거울을 보듯이 얼굴을 대하고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고후 3:18).
Ⅲ. 이 날의 집무는 대제사장에게만 맡겨졌다. "그러므로 아론을 성소에 들어오게 하라" (3절). 그는 속죄일의 의식을 혼자서 직접 행해야 했다. 오직 한 사람의 제2인자, 곧 그를 대신하거나 보좌할 제사장이 한 사람 있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아론이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으며 병이 생기거나 의식법상의 부정을 범하여 그날의 예식을 수행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다.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제사장이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대제사장이요, 그만이 속죄를 이룰 수 있으며 그에게는 보조자나 대치할 자가 필요치도 아니한 분이다.
Ⅳ. 대제사장은 이 예식에 맞는 옷을 입어야 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만 특유했던 값비싼 옷을 입으면 안되었었다. 진귀한 보석이 달려 있는 그 예복을 입지 말고, 오직 하급 제사장들과 마찬가지의 옷인 세마포 옷을 입으라고 했다(4절). 그러한 의복을 입어야 이 수치의 날(죄 때문에 스스로 금식했으므로)에 그에게 가장 잘 어울렸던 것이다. 또 그의 옷이 얇거나 가벼워야, 그만큼 자기의 손을 일일이 거쳐야 되는 그 날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보다 더 편리했을 것이다.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죄를 대속하시었다. 그러나 그만이 입는 특별히 영광스런 옷을 입고서 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죽을 형체를 입으셨으니, 곧 세마포 옷을 입고 행하신 것이요, 그것은 참으로 정결한 옷이었지만 비천한 옷(사람이라는) 이었다.
두 가지의 속죄제물 (레위기 16:5-14)
유대 학자들에 의하면, 속죄일 전 7일 간 대제사장은 자기 집을 떠나 성전에 있는 거실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 위대한 날의 예식을 위해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이 7일 동안에는 하급 제사장들이 하던 제사나 기타 분향하는 일들을 직접 수행하면서 이 날의 예식에 익숙해지도록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제도에 관한 율법을 읽고 또 읽어서, 그 예식법 전체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 그는 그 날 아침 일찍 평상시에 드리는 아침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 예식을 시작하며 물론 그 예식 이전에 온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그의 손발을 다시 씻어야 했다. 그리고는 매일 드리는 분향을 드렸고, 등(잔)에 불을 붙이고 나서, 이 날을 위해 특별히 지시된 제사를 드렸다(여기에는 없지만 민수기 29:8 을 참조). 즉 수송아지와 수양과, 일곱 마리의 어린양들을 모두 번제로 드려야 했다. 이것은 그의 대제사장 복을 입고 거행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2. 그리고는 자기의 값진 송을 벗어버리고 다시 목욕을 하고 세마포 옷을 입고, 여호와 앞에 자기 자신을 위한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한 속죄제물 이었다(6절). 이 수송아지는 성전과 제단 중간에 놓여졌다.
이 본문에서 언급되어 있는 예물은 자기의 죄와 자기 집안의 죄를 엄숙히 고백하는 것이었고, 그 죄악의 용서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으리라. 이 제물에는 대제사장이 자기 손으로 안수해야 했었다.
3. 그리고 나서는 두 마리의 염소를 놓고 제비를 뽑아야 했다. 이 염소들은 (둘 다) 회중을 위한 하나의 속죄제물 이었다. 이 중의 한 마리 염소는 죽어야 했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드리는 보상의 표시이었다. 다른 한 마리는 추방당해야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죄가 용서되고 제거됨을 표시하는 징표이었다. 그 두 마리 염소는 제비를 뽑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함께 바쳐야(보여야) 했다(7절). 그리고 나서 속죄 염소(아사셀 염소)는 산채로 하나님께 두어 두라고 했다(10절).어떤 사람들은 이 염소들이 몸체가 작아 불쾌해서 죄의 불쾌감을 나타내 주므로 속죄 제물로 선택되었다고 본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당시에 이방인들이 염소 모양을 만들어 자기들의 신을 숭배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다시는 염소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염소를 희생 제물로 드리도록 했다고 본다.
4. 그 다음으로 할 일은 대제사장 자신과 자기 집안의 죄를 위해 드린 수송아지를 잡는 일이었다(11절). 유대인들은 이르기를, "이제 그는 수송아지를 다시 안수하고, 이미 했던 죄의 고백을 다시 하고 용서를 다시 빌면서 먼저 자기 자신과-자기가 먼저 하나님과 화해되지 못하고서야, 어찌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를 중재할 수 있으랴!-자기 집안의 죄 곧 식구들만이 아니라 아론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모든 제사장들의 죄까지를 용서받아야 했다" 고 말한다(시 135:19). 이러한 순결은-거기에서 끝나고 말아서는 안 되지만-먼저 대제사장의 집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수송아지를 죽이고 나면, 그는 다른 어떤 제사장에게 그 (양의)피가 굳어지지 않도록 계속 휘저으라고 했다.
5. 그리고 나서, 한 손에는 향로(아직 연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접시를 들고서, 그 성막을 지나서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래서 법궤에로 나아가서 향로에 불을 피워 그 향기가 성소에 퍼지게 했다. 그러면 즉시 그 지성소의 실내는 연기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하는 법궤 위를 연기가 덮기까지는 법궤 쪽을 바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 옆길로 지성소에 들어가며, 그 후에는 하나님의 존전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뒷걸음질하여 나와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잠시 기도한 후에 급히 성소에서 나와 백성 앞에 나타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들은 대제사장이 잘못하여 여호와 앞에서 죽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거둘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6. 그리고 나서는, 수송아지의 피를 휘젓고 있던 제사장에게 피를 받아, 그 피를 가지고 두 번째로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 때의 지성소는 분향 연기로 가득차 있었던 때이다. 그리고는 속죄소 위에, 아니 그보다는 속죄소 쪽을 향하여 먼저 한 번은 그 위에, 그 다음에는 속죄소의 아랫쪽을 향하여 7번 자기의 손가락으로 피를 뿌렸다(14절). 그러나 (유대인들이 설명하는 대로) 그 핏방울은 모두 땅바닥에 떨어지고 실상은 속죄소에는 묻지 않았다.
이 예식이 끝나면 그는 다시 지성소에서 나아와 피를 담은 그릇을 성소에 내려놓고, 거기서 물러 나왔다.
백성을 위한 속죄제 (레위기 16:15-19)
대제사장이 속죄소 앞에 수송아지의 피를 뿌리고 나와서,
1. 백성을 위해 속죄 제물로 드릴 염소를 잡고(15절), 3번째로 지성소에 들어가 먼저 번처럼 그 염소의 피를 뿌렸다. 그리하면 그는 "성소를 위하여 속죄를" 하는 것이 된다. 즉 백성들의 죄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켜 하나님이 그들 중에 함께 계신다는 은혜의 임재를 나타내는 징표를 멀리 떠나게 만들었으므로, 성소조차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처로는 부적당하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 죄로 인하여 속죄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백성들과 화해하셨던 하나님께서 계속 그들과 화해를 맺으시기 위해서였다.2. 그리고 나서는 회막의 외부를 위해서도 속죄를 해야 했다. 먼저 번에는 수송아지의 피를 뿌림으로써 회막의 안, 즉 내실을 위해 속죄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염소의 피를 앞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각각 7번 뿌리라고 했다. 그 외부에는 진설병 식탁과 분향단이 놓여 있던 곳이다. 그러나 막(휘장)은 제외되었다. 이렇게 회막을 속죄해야 했던 이유가 암시되어 있다. "회막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한 중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16절).
이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심령이 깨끗해야 할 필요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이시고자 하셨다. 즉 하나님은 그 때, 단지 그렇게 불순하고 죄 많은 사람들의 한가운데 서 있기만 했던 그 회막조차도 속죄가 필요하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저들이 드리는 헌신행위와 경건한 의식들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못마땅한 것이었음을 알려 주신 것이다. 그런 것을 위해서도 이러한 속죄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하급 제사장들은 아무도 회막에 들어올 수 없다(17절). 다만 밖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회막 안에서 일하기에 부족하고 부적당한 자임을 고백해야 했던 것이다.
3. 그 다음에 대제사장은 수송아지 피와 염소 피를 얼마간 취하여, 함께 섞어서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의 뿔에 발라야 했다(18, 19절). 분향 단에도 이 피를 발랐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그러한 명령이 밝히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출 30:10).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지시는 대제사장을 번제단에 나아가 행하라고 한 지시로 본다 번제단도 여기서는 "여호와 앞에 있는 단" (12절)이라고 불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제사장에게 번제단으로 "나아가라" 고 했기 때문이며 그 번제단도 속죄가 필요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예물과 제물은 모두 그 제단으로 가져 왔고, 그 제단은 여기에 나타난 대로 그들의 부정함에서 성결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속죄 염소 (레위기 16:20-28)
대제사장은 속죄물을 여호와께 드리고 그 피를 뿌렸다. 그리고는 아마 그 나머지의 피는 놋제단 밑에 부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속죄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백성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었다(20,21절). 어떤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는다는 것에는, 언제나 죄의 고백이 동반되는 것이 제사의 본성이었다. 이 제사도 속죄제이므로, 죄의 고백이 따라와야 한다. 유대교의 비교적 후기의 타락된 시기에 가시는, 그들이 대제사장을 위해 일정한 고백 형식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아무런 죄의 고백문도 처방해 주시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은 그 백성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정성껏 돌보고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어떤 형식문도 필요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죄의 고백은 가능한 한 낱낱이 해야 된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범한 모든 범죄" 를 고해야 했던 것이다. 한 가지 죄가 그 죄의 여러 가지 가중적인 사정에 따라서 여러 번 범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의 고백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말해야 할 뿐 아니라, 아간 처럼 "여차 여차한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말해야 한다(수 7:20).
이렇게 죄를 고백함으로써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죄들을 그 염소의 머리에 두어야 했던 것이다. 즉 그러한 죄의 이행을 설정한 하나님의 명령을 신앙으로 준행함으로써, 대제사장은 죄인들이 받아야 할 처벌을 그 희생 제물에게 이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러한 명령을 내리시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정말 웃음거리, 아니 그 보다 하나님은 모독하는 처사였을 것이다.
2. 그 다음에 그 염소는 즉시 이 (광야로 추방하는) 일을 위하여 선별된 적합한 사람의 손에 끌리어 광야로 내 보내졌다. 즉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보내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깨끗이, 완전히 용서하시는 뜻으로 그 염소를 광야로 내어 보내셨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염소가 그들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리라" 고 말씀하셨다(22절). 그 염소를 (광야에서) 풀어 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발견되지 않으리라" (렘 50:20)는 것을 보여주는 한 표적이었다. 후기 유대인들은 붉은 천 한 조각을 그 속죄 염소의 뿔에 매고 다른 한 조각을 성전 문이나 염소를 놓아 준 곳에 있는 바위 꼭대기에 매어 두는 습관을 가졌다. 그리고서 그들은 그 붉은 실이 희게 바래지면,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네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 는 말씀과 같다(사 1:18). 또 덧붙여 말하기를, 로마인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전의 40년 동안은 그 붉은 천 조각이 조금도 변색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실체(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인하여 그림자(제사)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훌륭한 고백이다.3. 그 후 대제사장은 자기의 세마포 옷을 회막에서 벗어, 거기에 놓아두어야 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그 옷은 대제사장이나 다른 어느 제사장도 다시는 입지 아니했고 매년마다 옷을 새로 저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물로 몸을 씻고, 자기의 값진 옷(대제사장복)으로 갈아입고 자기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서 번제를 드렸다(23,24절). 우리도 죄의 용서를 경험하는 축복을 받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한 속죄 제물의 은전을 입게 되면 우리도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마땅하다. 아마 속죄 제물의 기름(기)을 사르는 일은 이 때까지 연기되었던 것 같다(25절). 그 기름기는 번제물과 함께 불살라져야 했기 때문이다.
4. 그 두 가지 속죄물의 피는 회막 안으로 가져갔었고, 이제 그 고기는 모두 불살라야 했으되, 제단 위에서가 아니라 진 밖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사르라고 했다. 이것은 참된 회개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제거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완전히 용서해 주심으로써 그 죄가 깨끗이 제거되었음을 상징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그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지 않게 된다.
5. 속죄 염소를 광야로 끌고 갔던 자와, 속죄 제물을 불사른 자들은 의식법상 부정한 자들로 여겨졌다. 그래서 옷과 몸을 씻어서 깨끗해지기 전에는 진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것은 죄의 추악한 성질을 상징해 준다. 죄 속함을 위해서 바쳐진 그 제물까지도 사람을 더럽게 한다. 또한 그것은 율법에 의한 제사의 불완전성도 상징해 준다. 그 제사의 제물을 만진 자들, 그들에게조차도 어떤 오점이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제사는 결코 죄를 제거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대제사장은 자기의 향로를 가지러 다시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기쁜 마음으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도 자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규례가 된 속죄일 (레위기 16:29-34)
Ⅰ. 여기에는 이 큰 제전에 대한 몇 가지 지시 사항이 부가되어 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제전을 지키라고 지정된 일자. 그 날은 매년 "제 7월의 제 10일" 에 지키라고 했다(29절). 제 7월이란 사실상으로 제 1월로 계산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녀를 애굽으로부터 인도하여 낸 바로 그 달을 그 후로부터는 제 1월(정월)로 계산하고 그렇게 부르라고 지시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자들은, 제 7월의 제 10일되는 날은 인류의 처음 시조들이 타락했던 날이므로 그들의 타락을 기억하면서 안식일로 지켰다고 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이 날이 모세가 시내 산에서 마지막으로 내려온 그 날이요, 그 때에 모세는 새로운 법판을 들고 왔고, 모세의 얼굴에 광체가 나던 바로 그 날이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그 날은 이스라엘의 온 세대를 걸쳐서 지킬 속죄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사건으로 지은 자기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기억할진대, 회개를 하면 저들의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2. 이 날에 지켜야 할 백성들의 의무.
(1) 그들은 모든 노동을 쉬어야 한다. "그 날은 큰 안식일 (안식의 안식일)이니라." (31절) 속죄일을 위해 해야 할 일만 해도 그 날의 일은 넉넉하며 그 의식을 잘 수행하자면 하루일거리는 족히 되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다른 일은 일체 할 수도 없었다. 죄를 위하여 고행하는 일에 전심 전력하고, 다른 일에 전혀 마음을 쏟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속죄일은 이사야 예언자가 안식일이라고 일컬었던 그 날인 것 같다(사 58:13). 왜냐하면 다같이 단식을 하라는 언급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을 괴롭혀야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내적으로 고행하며, 영혼의 참회를 표하는 뜻에서 육체적인 일체의 오락이나 환락을 금해야 했다. 이 날에는 모두가 (병자와 어린이는 제외) 단식하고, 장신구를 떼어놓고, 기름을 바르지도 아니했다. 다니엘도 그렇게 했다(단 10:3, 12). "다윗도 단식으로 그의 영혼을 괴롭게 했다(시 35:13). 또한 이것은 죄의 추악함과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과, "흉악한 결박을 풀어 버리는 것" (사 58:6)을 의미한다.
유대 학자들은, 그 날이 그들의 영혼을 괴롭게 하는 날이므로, 그 날에는 성경까지도 저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읽지 않아야 했다고 말한다.
3. 이 제도의 영속성. "그것은 영원한 규례니라" (29, 34절). 그러므로 이 의식은 이 율법이 해소되든가 원형(그리스도)에 의해서 모형이 필요 없게 되는 그 때가 오기까지는, 결코 어느 해(年)이고 중단될 수 없는 것이었다. 죄를 계속 범하는 한, 우리는 계속하여 회개하고 속죄 받아야 한다.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을 괴롭게 하라는 이 율법은, 영원한 율례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눈물과 한숨이 모두 사라지는 그 곳에 우리가 도착하기까지는 계속하여 실효성이 있을 것이다. 사도는, 이 사실을 율법의 제사가 죄를 제거하고 그 죄에서 양심을 깨끗이 할 수 없는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보았다. 즉 그것은 속죄일이 되면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 이라고 했다(히 10:1-3). 제사를 매년 드려야 했다는 것은, 그 제사가 죄를 속하는 데에는 미약한 효력밖에 못 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속죄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몸으로 단 번에 드린 제사" 로만 가능한 것이다(히 7:27 참조). 또한 그 한 번으로 족하다. 이 제사는 반복될 필요가 없다.
Ⅱ. 이 모든 율법 속에 어떤 복음이 들어 있는지를 깨닫도록 하자.
1. 죄의 용서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복음의 위대한 두 가지 특권이 상징되어 있다. 물론 그 두 가지는 모두 우리 주 예수의 중보에 힘입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1)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책을 속해 주셨다. 그가 친히 그 속죄의 저작자요, 제물이 되셨다.
[1] 그는 제사장, 대제사장이시오, 그가 "백성의 죄를 구속" 하시기 때문이다(히 2:17). 그분, 그리고 그분만이 per negotio-그 일에 합당하며, 그런 명예를 지닐 자격이 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지명하시고 성별 하신 자이며, 그것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이시니, "하나님은 그 안에서 세상과 자신을 화해하셨다(롬 1:20).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성취하셨다. 그것은 주 예수의 성결과, 모든 죄에서 완전히 깨끗하심과 온갖 은총으로 꾸며진 그의 아름다움을 상징해 주었다.
아무도 대제사장이 속죄를 하는 동안 함께(성소에) 있지 못한다고 했다(17절). 그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홀로 포도즙틀을 밟고", "아무도 그와 함께 할 자가 없게"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사 63:3). 그러므로 그가 수난을 받을 때에는, "모든 제사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갔던 것이다" (마 26:56). 만약 어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라가서 그와 함께 죽었다면 그들이 속죄하는 일을 도와 준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수난당하는 자가 강도밖에는 없었으나 그들은 그러한 의혹을 받을 만한 인물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제사장이 속죄한 구속의 범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과 제사장들과 그리고 "모든 백성을 위해" 속죄하라고 했다(33절). 그리스도의 사죄는 성직자들이나 일반 백성 모두의 "거룩한(그리고 거룩하지 아니한) 것의 죄악" 을 속해 준다. 우리가 제 의식들의 특전을 받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고 혜택을 입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에 의한 것이다. 대제사장이 이룬 속죄는 이스라엘 회중에게만 국한되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는 유대인의 죄만이 아니라 온 이방 세계의 죄악도 위함이다.
또한 아론은 자기의 죄를 위해 먼저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그는 자기의 속죄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죄를 고백해야 했다-에서, 역시 그리스도는 아론보다도 무한히 뛰어나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속죄를 필요로 하는 당신 자신의 죄가 없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대제사장이 되었다" (히 7:26). 또한 그러므로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은 물 속에 서서 "저들의 죄를 고백" 했지만(마 3:6), 그는 "물에서 곧장 나왔던" 것이니(마 3:16), 그는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2] 그는 대제사장이시듯, 그는 친히 속죄를 이루는 그 제물이 스스로 되시었다. 그는 홀로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를 화해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 예물을 이루는 두 마리의 염소에 의하여 예표가 되셨다. 죽임당한 염소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을 상징하며, 광야에 쫓겨난 속죄 염소는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어느 염소를 죽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 결정되었었다.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대로 내어 준바" 되었기 때문이다(행 2:23).
첫째는, 그 속죄는 이스라엘의 죄를 그 염소의 머리에 옮겨 둠으로써 완성된다고 했다. 죄란 마땅히 버림받고 망각의 땅으로 쫓겨나야 한다. 그러나 그 처벌은 그들의 죄를 지고 가는 그 염소에게 이행되었던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 (사 63:6)을 우리 주 예수 (그분은 이 모든 그림자의 실체이시다)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했다(벧전 2:24). 그리하여 그는 우리의 죄를 속하셨다. 즉 우리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되셨다(고후 5:21). 그는 수난당하시고 죽으셨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는 버림받으시고, 잠시 동안 잊혀지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가 버림받지 않으며 영원히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학자들은 우리 주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바로 속죄일인 제 7월의 10일 이었다고 추정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중보자로서 그의 직무에 임하셨다. 수세(受洗)후 즉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나가셨다" (마 4:1). 그것은 곧 무인지경에로 끌려가신 것이다.
둘째로, 이 의식의 결과로 이스라엘의 모든 죄과는 망각의 땅으로 옮겨졌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 즉 친히 그 죄를 자기 몸에 지고 가신 것이다(요 1:29). 하나님이 죄를 용서할 때에는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시지 않으신다고 했다(히 8:12). 즉 "하나님의 등뒤로 죄를 던지시고" (사 38:17). "깊은 바다에 던져 버리신다" (미 7:9). 또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 죄를 멀리 가져가신다(시 103:12).
(2)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올라가신 것을 상징한다. 이는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보여준 바와 같다(히 9:7 이하).
[1] 하늘 나라는 가장 거룩한 곳이지만 사람이 건립한 곳이 아니며 거기에 들어가는 길은 믿음, 희망, 그리고 기도에 의하여 중보자를 통하여서 갈 수 있는데 지금 우리에게는 복음으로 밝히 그 길이 나타나 있지만 그 때에는 지금처럼 그렇게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았던 것이다.
[2]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승천하시사 하늘 나라에 들어가셨다. 또 그는 그의 모든 영적 이스라엘인들의 이름으로 한 공적(公的) 임무를 띠고, 그의 육체의 휘장을 통과하여 들어가셨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 휘장이기 때문에 찢겨진 것이다(히 10:20).
[3] 그는 "자기의 피로" (히 9:12).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는 지상에서 드린 그 제물의 공로를 스스로 지니고 하늘에 이르셨다. 그래서 자기의 피를 뿌리신 것이다. 말하자면 속죄소 앞에 자기의 피를 뿌렸다. 이 피는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가 합치는 것 이상의 것을 이루셨다. 그래서 그는 "죽임당한 어린양으로서" (계 5:6), 하나님의 보좌 중앙에 계신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위해서는 속죄할 수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위한 영원한 구속(히 9:12)을 이루셨고, 그 자신의 옛 영광을 스스로 회복한 것(요 17:4, 5)은 그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이다.
[4] 대제사장은 성소에서 분향을 올렸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사죄에 의하여, 그가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 휘장 안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드리고 있는 중재(기도)를 상징한다. 우리는 이 분향의 구름이 속죄소를 덮고 있지 않다면야, 감히 속죄소 앞에서 살아남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중보자의 중재가 없다면 단순한 긍휼 그 자체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중재가 "이 향" 처럼 향내 나는 향기로서 하나님의 앞에 드려져 있다.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해 먼저 중재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자기 가족, 그 후에 온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했으나 우리 주 예수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드릴 중재의 전조이다. 자신을 먼저 하늘 아버지께 맡기고 다음에는 그의 집안에 사는 제자들을, 그 후에 그들의 말씀을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자들 곧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이렇게 그의 예물의 용도와 의도에 관하여 언급하신 다음에 그는 즉시 붙잡히시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러한 모든 뜻에 따라서 되어진 일들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출입구도 역시 아론의 업적에 비하여 훨씬 우월한 것이다. 즉 아론은 자기의 친아들조차도 지성소에 다시 들어가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성별하시사 "지성소로 들어가는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마련하셨으니, 우리 모두가 거기에 "들어갈 담력" 을 얻게 되는 것이다. (히 10:19, 20).
[6] 대제사장은 거기서 다시 나와야 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는 영원히 거기 사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존전에 알현(謁見)하고 계시며 중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선두로서 먼저 들어가셨고, 거기에서 우리를 위한 대표자로서 계속하여 거주하신다.
2. 여기에는 또한 신앙과 회개라는 복음의 두 가지 큰 의무가 예시되어 있다. 그것들이 있어야 우리는 속죄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 속죄의 은혜를 입을 권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1) 우리는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義)로 의지하며 우리의 죄를 속해 주고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죄밖에 없음을 탄원하면서 믿음으로써 그 죄물의 머리에 우리의 손을 얹어야 한다(죄를 고백해야 한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왕상 18:37). 이것이 내가 나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나이다(고전 15:12). 그러므로 그의 은총과 다스림에 나를 진심으로 순복하오니, 나는 그 안에서 구속함을 입었나이다."
(2) 회개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괴롭게 해야 한다. 잠시 우리의 육체의 환락을 끊을 뿐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우리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자기 부정(否定)과 극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죄를 참회하는 고백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통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속죄 제물에 신앙의 손을 얹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다" (요일 1:9)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희년(禧年)에는, 자유를 선포하는 나팔 소리가 "속죄일" 이 끝날 때에 울러퍼지게 하라고 했다(25:9). 우리의 죄책이 사해졌고, 우리의 속박이 풀이었으며, 우리는 우리 집으로 돌아가리니,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중재에 힘입음이라. 이 속죄제물로 인하여 우리는 영혼의 안식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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