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레위기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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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짐승 고기 (레위기 11:1-8)

아론은 하나님의 집의 대제사장으로 위임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고, 공동 서약자로서 둘이서 함께 하나님의 뜻을 그 백성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하였다. 하나님은 이 일을 모세와 아론 둘 다에게 말씀하셨다. 제사장들이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별할 줄 알고 또 그같이 백성에게 가르치는 것은 특별히 그들에게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계약을 세우실 때에,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허락 하셨었다(창 9:13). 그 전에는 땅의 소산물만 먹을 수 있었었다. 그러나 노아와 아들들에게 허용되었던 자유가 여기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제한되고 있다. 물론 그들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온갖 고기를 다 먹을 수는 없었다. 어떤 종류의 고기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 먹지 말아야 했다. 또 어떤 종류의 고기는 정결하다고 여기고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이 문제에 관한 율법은 아주 자세하고 엄격히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율법이 필요했을까? 왜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민족처럼 하나님의 온갖 피조물을 자유롭게 이용하면 안 되는가?

1.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신다는 것이 충분한 이유이다. 그의 뜻, 그 자체가 율법이 되기에 충분하듯이, 그의 뜻 자체가 또한 이유가 된다. 하나님의 뜻은 곧 그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그의 제단의 제 예식에서 뿐이니라 저들의 식탁의 일상적 일에 있어서도 그의 백성의 복종을 시험하시기를 좋게 보셨다. 그래야 그들은 자기들이 한 권위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무흠한 인간의 복종을 시험하셨었다.

2. 부정한다고 금지된 음식의 대부분은 실제로 건강상 별로 좋지 않은 것들이요, 먹기에 부적합한 것들이었다. 또한 우리 생각에는 충분히 건강상 좋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짐승들의 고기, 예를 들면 집토끼, 산토끼, 돼지 따위도 아마 그 나라의 사람들의 몸에는 유해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은 현명하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하듯 하신 것뿐이다. 즉 그런 아버지는 자기 자식들을 병들게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음식은 자식들에게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몸의 주님이시기도 하심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우리의 육적 쾌락을 위해 우리의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죄악임을 깨닫자.

3.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신앙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면에서도 남과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으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제 민족 중의 하나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율법이 있기 전에도, 전통적으로 지켜져 내려온 다른 민족과는 다른 히브리인의 음식법이 있었을 것이다. 애굽인과 히브리인은 함께 식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43:32). 또한 홍수 이전에도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이 있었다(창 7:2). 이방인들에게는 이러한 구별이 신앙의 여러 가지 문제와 동시에 완전히 상실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 율법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는 분명히 환원된 것이요, 또 지키라고 명령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저들만의 독특한 식사법을 가짐으로써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웃 민족과 가까워지지 않을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인의 모형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소한 일뿐 아니라 영적 기질과 생활 과정이 신령한 이스라엘인은 맑은 정신의 단일성을 지켜야 하며, 이 세상과 동화되어서는 아니 된다.

더 관찰하여 얻을 교훈이 있다. 즉 이 율법이 부정한 것으로 가증히 여기도록 명한 피조물의 대부분은 그 자체가 음식으로서보다는 이방인들이 신성시하거나 제물로 삼아 매우 존귀히 여기던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이 여기서는 부정한 것이요 가증스런 것이라고 말해진 것이다. 이것은, 저들이 그런 고기를 먹으려는 유혹에는 빠지지 않는 다 하더라도 이방인들이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건히 증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돼지-후기의 이방인들은 이것을 비너스에게 바쳤다-미네르바의 부엉이, 주피티의 독수리, 해커리(천지와 하계를 다스리는 그리스 여신)의 개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은 여기에서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어 있다.

짐승에게 대하여는 어떤 일반적인 법칙이 있었다. 즉 발굽이 둘이요 새김질을 하는 짐승은 정결하다고 했다. 그런 것만이 정결한 것이다. 이 율법이 반복될 때(신 14:6)에 그러한 짐승이 자세히 언급되었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인들이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범위가 다양하여 저들 자신이 당하는 제한에 아무런 불평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굽은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는 짐승들은 부정하다.

이 법에 의하면 돼지, 토끼 등의 고기는 부정하다. 우리들 사이에 아주 널리 쓰이나 그들은 먹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 의하여 어떠한 고기든 먹어도 좋다고 허락받은 그 자유로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즉 복음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며" (딤전 4:4), 우리는 "아무 것도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행 10:28) 교훈해 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율법이 주어진 뜻은 이스라엘을 구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보며, 적어도 그러한 뜻이 암시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상과 마음의 속사람이 드리는 다른 기도의 행동들은 우리의 영적 양식을 소화시키는 것이므로 "새김질하는 것" 으로서 상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의 행실, 그리고 좋은 교제의 행동은 "갈라진 굽" 이 상징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중의 어느 하나가 없어도 우리는 하나님께 불합당해진다. 두 가지가 항상 병행되어야 한다. 즉 마음속의 인자한 사랑과 생활 속의 선한 행실이다. 둘 중에 하나만 없어도 우리는 깨끗지 못하니, 분명코 정결하지 못하다.

우리에게 부정한 것으로서 금지된 피조물 중에서는, 경건한 유대인이 돼지고기보다 더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었다. 돼지고기를 먹으려 하지 않다가 안티오커스(Antiochus) 형제에 의하여 많은 유대인이 죽음을 당했다. 아마 저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과 자녀들에게 돼지고기에 대한 특별한 반감을 지니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돼지고기는 그 본래의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고 단지 "기이한 것" 이라고만 불렀다. 이방인들은 돼지고기를 미신적으로 이용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돼지고기를 모른다" 고 했다(사 65:4).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돼지고기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셨다. 그것은 저들이 이웃 백성들에게까지 돼지고기의 악한 용법을 배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정한 짐승들을 금지한 것은 그 짐승들의 악한 성질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뜻이 있었다고도 본다. 우리는 돼지처럼 흙탕물에 뒹굴고 더러워져서는 안 된다. 또한 산토끼처럼 소심한 자이어서도 안 된다. 또 집토끼처럼 땅바닥에 붙어살아도 안 된다. 명예롭게 창조된 인간이 멸망할 이 짐승들처럼 스스로 변질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 그 금령은 그런 고기는 먹지 말라고 했을 뿐 아니라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 죄에서 떠나고자 하는 자들은 죄악에 대한 모든 유혹조차도 주의 깊게 대해야 하며 그것을 바라거나 거기로 끌고 가는 모든 것도 피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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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와 새 (레위기 11:9-19)

1. 물고기에 대한 일반적 법칙이 나타나 있다. 어떤 물고기는 정결하고 어떤 물고기는 정결하지 못하다고 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어도 된다. 그 나머지 물고기만 금지되었다(9, 10절). 옛날 사람들은 물고기를 가장 맛있는 식물(食物)로 쳤다(그래서 그들은 단식일에는 결코 물고기도 먹지 못했으며, 물고기만 먹는 것을 고행의 하나로 삼은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물고기에 대해서는 그의 백성에게 많은 제한을 가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자기의 종들에게 필요한 필수품만이 아니라 즐거움까지 제공하시는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금지된 물고기에 관한 말씀이 있다. 그것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라" 고 했다(10-12절). 즉 "너희는 그것들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야 하며, 먹지도 말 뿐 아니라 근처에 가지도 말지니라" 고 한 것이다. 부정한 것은 가증스럽게 여겨야 함을 명심하자. "부정한 것은 만지지도 말라" 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에게만 가증스런 것이였음을 주목하라. 이웃 민족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또한 그러한 고기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역시 가증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유대인들은 특정한 특권을 지닌 존귀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특권을 지닌 존귀를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특권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transeunt cumonere-즉 그들은 역시 특정한 제한을 받고 있었다.

영적 이스라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양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복음의 계약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존귀하게 되었으니, 자기 부정과 십자가를 지라는 복음의 계명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근실해야 하는 법이다.

2. 새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법칙이 없고, 부정하므로 삼가야 할 새들의 구체적 목록만이 주어져 있다. 이것은 그 나머지의 모든 새들은 먹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 나와 있는 히브리 단어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하여 많은 비관이 가해졌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단어들은 여전히 불확실한 채로 남아 있다. 어떤 종류의 새들은 일부 지방에만 특정하기 때문이다. 그 율법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우리는 그 율법이 금지하고 있는 새들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 알아야만 한다. 아마 우리가 저 세상에 가고 나면, 여기에 언급된 새들의 성질을 보다 잘 알게 될 것이며, 그 때는 새들의 성질에 따라서 이름을 지어 준(창 2:20) 아담의 지식에 감탄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율법이 철회되었고 그 교훈이 상당히 상실되었으므로, 여기에 금지된 새에 대해서만 관찰하는 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1) 어떤 것은 맹금이다. 곧 매와 독수리 따위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모든 것을 증오하며 피를 흘리거나 약탈을 함으로써 살아가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맹금의 밥이 되는 비둘기는 사람의 식물로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합당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잡아먹고 사는 매나 솔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가증스러운 것으로 여기라고 하셨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들의 상태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어느 모로 보나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상태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2) 또 다른 새들은 고독한 새들이다. 즉 올빼미나 당아새(영문은 펠리칸. 시 102:6), 까마귀(사 34:11)처럼 어둡고 한적한 곳에 사는 새들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우울한 백성이 되거나, 슬픈 정서나 끊임없는 고독을 지닌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또 어떤 새들은 불결한 것을 먹고사는 새들이다. 즉 뱀을 먹고사는 황새이다. 또 벌레를 먹고사는 새도 부정하다고 했다. 우리 자신들이 모든 부정한 것을 삼가야 할 뿐 아니라 부정한 것에 빠져 있는 자들과의 교제까지도 삼가야 한다.

(4) 또 다른 새들은 애굽인들이나 이방인들이 예언할 때에 이용했던 것들이다. 어떤 새들은 길조로, 어떤 새들은 흉조로 여겨졌다. 그들의 예언자들은 이 새들이 높이 나는 사실을 대단히 중히 여겼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새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증스런 것임에 분명하며 저들은 이방인들의 방법을 배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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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다니는 동물 (레위기 11:20-42)

여기에 나타난 율법은 이런 것에 관한 것이다. 즉

1. 파리, 말벌, 꿀벌 따위처럼 날아다니는 곤충에 관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먹을 수 없다고 했다(20절). 또 사실상 먹기에도 부적합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 지방에서는 별미로 널리 이용되어 오던 여러 종류의 메뚜기들이 있었다. 세례 요한도 사막에서 메뚜기를 먹고살았는데, 메뚜기들은 여기서도 먹도록 허용되어 있다(21, 22절).

2. 땅에 기어다니는 것에 관하여. 이것들은 모두 금지되었다(29, 30 또 41, 42절). "배로 기어다니는 것" 은 뱀이 받은 저주요, 뱀과 인간사이에는 적대 관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창 3:15). 그 적대 관계는 이 율법에 의하여 보존된 셈이다. 땅의 티끌이 기어다니는 것들의 먹이요, 따라서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은 사람의 식물로서는 부적합하다.

3. 이 모든 부정한 동물들의 시체에 관하여.

(1) 그런 것들을 접촉한 모든 것은 그 날 저녁까지 부정해진다(24-28절). 이 율법은 종종 반복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금령에는 율법 창시자의 뜻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이유가 특별히 나타나 있지 않더라도 율법이 금한 모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율법을 업신여겨 고의로 접촉한 것이 아닐 경우에는, 양심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 보거나 하나님께 대한 죄로 여기지 아니했다. 즉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시체들을 옮겨 치우느라고 불가피하게 만져야 될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접촉하면, 의식법상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저녁까지는 회막에 들어갈 수 없다고 금지되었고, 어떠한 성물도 먹지말 것이며, 심지어는 이웃 사람들과 다정히 이야기하지도 말라고 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은 저녁까지만 계속된다고 했으니, 이것은 모든 의식법사의 오염은 이 세상 저녁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끝나고 만다는 사실을 상징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밤 새로이 그 날의 죄를 회개함으로써 그 죄에 접촉된 우리 자신의 오염을 깨끗이 씻어 버려, 우리의 부정함 속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개나 말 따위의 부정한 동물이라도 살아 있을 때에 접촉하면, 그것 때문에 의식법상 부정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죽었을 때에는 만지지 말아야 한다. 그 고기들은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만져서도 안 된다(창 3:3).



(2) 그 시체들이 그릇이나 기타 아무것 위에 떨어지면, 그것들은 저녁까지 부정해진다고 했다(31절). 그 그릇이 토기 그릇이면, 그릇을 깨뜨려 버려야 한다(33절). 이것은 비록 일상 생활 속에서라도 더러운 것은 무엇이나 주의 깊게 삼가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성소에 있는 그릇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다에 있는 모든 항아리까지도 "여호와께 성결" 해야 한다(슥 14:20, 21). 이런 경우에 관한 율법들은 매우 철저하므로, 그것을 지키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죽은 이나 쥐가 어디에 떨어지더라도, 그 물건은 부정한 것이 되고 말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일 화덕이나 질탕관이면 모두 깨뜨려 버리라 했다(35절). 그 예외 사항도 역시 매우 까다로왔다(36절 이하).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부단히 율법에 관심을 두고 정확히 복종하는 것을 훈련시키기 위함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짐스러운 의식들에게서 우리가 해방되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보다 중요한 문제까지도 신중성을 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은 전혀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의식법상의 오염에서 자기들의 몸과 집안 살림살이를 지키고 깨끗이 했듯이, 우리는 죄의 제 오염에서 우리의 귀중한 영혼을 부지런히 보호해야 하며, 죄에 오염되었을 때에는 속히 깨끗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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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법 (레위기 11:43-47)

Ⅰ. 이 율법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 율법은 단순히 음식물의 목록을 위해서 있는 것이거나 그들의 식사법에 대한 지시 사항 따위를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율법에 의하여 그들 자신이 거룩하고 성결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44절).

1. 즉 그들은 이 율법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들이 먹는 음식이 모두 한결같을 수 없듯이 저들의 하는 행위도 모두가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또 하나님의 율법을 늘 지키는 것을 배우고, 비록 일상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그 율법에 따라서 즉 "하나님께 합당하게" (요삼 6)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먹고 마시는 일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고전 10:31), 법에 따라 해야 한다.

또 그것을 통하여 자신들 스스로를 모든 이웃 민족들과 구별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된 백성임을 알아야 한다. 또 이방인처럼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배워야 한다. 즉 이 모든 법은 성결을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세상의 초등 학문" 은 저들을 교육시키는 가정 교사요, 지도자였다(갈 4:2, 3). 이러한 초등 학문은 아담에게 있었던 첫 성결(거룩함)의 부흥이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의 최상의 상태가 될 성결을 위한 보증이다. 아무도 이러한 성결이 없이는 주님을 만나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모든 규례의 위대한 뜻이며, 그 규례를 통하여 우리는 거룩케 되며 성결케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매우 하찮게 보이는 음식에 관한 이 율법조차도 그렇게 숭고한 뜻을 지향했던 것이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뵈올 수 없다" (히 12:14)는 것은 신약에서는 물론 구약에도 있는 하늘의 율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자신을 가증하게 만들지 말라" (43절)는 경고가 있다. 가증스러운 죄와 교제하면, 우리 자신을 역시 가증스럽게 만드는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럽게 보이는 자들이 진실로 불행한 인간들이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가증스럽게 만드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가증스럽게 여기시지 아니하신다.

이 율법이 주어진 의도는, 유대 저작자들에 의하면 결혼이나 그밖에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 이방인과는 일체 교제하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한다(신 7:2, 3). 마찬가지로 그러한 도덕 정신은 우리도 준행해야 한다. 즉 우리에게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교제)하지 말라" 는 금령이 있다(엡 5:11). 또한 마음과 생활에서 참된 성결이 없이는, "제사 드리는 자가 돼지의 피를 드림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 66:3). 그러므로 사람이 돼지고기를 먹는 것도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이어늘, 하물며 돼지의 피를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것은 오죽 분노를 살 것인가(잠 15:8 참조).

Ⅱ. 이 율법을 준 이유를 보자. 그 율법은 모두 율법 창시자 자신에게서 연유된 것이요, 우리는 모든 행동에서 복종을 보임으로써 그분께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했다.

1.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로다" (44절). "그러므로 너희는 순결한 복종을 통하여 (내게도 존경을) 행하여야만 하느니라" 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오, 우리는 예의 범절이 있으므로,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든 우리는 그것을 실행할 수밖에 없으며 그 명령이 아무리 우리의 마음과는 모순되더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2. "나는 거룩하니라" (44절). 45절에도 반복되어 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면, 우리가 그분께 용납되기를 바라는 한은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그의 성결은 곧 그의 영광이시다(출 15:1). 그러므로 그의 성결이 "영원토록 그의 전이된다" (시 93:5). 이처럼 강조되어 있는 이 위대한 계율은, 비록 폐기된 율법(의식법을 가리킴)의 한 가운데 나타나 있지만 복음의 계율에서도 인용되고,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벧전 1:16). 그 신약의 계율에서 보면, 이 모든 의식법사의 규제는,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할 때에 좇던 정욕을 본받으면" 안된다는 것을 교훈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벧전 1:14).

3.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니라" (45절). 이것이 저들이 그 유별난 율법들을-지금까지도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유별나게 존중하고 있지만-저들이 즐거이 복종해야 했던 그 이유이다.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그들에게 더 귀중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분이기에 그들에게 그러한 것을 기대하더라도 당연한 것이다.

Ⅲ. 이 율례의 결론을 보자. "이것은 짐승과 새……들에 관한 율법이니라" (46,47절). 이것은 저들에게 영원한 율례로 주어진 것이다. 즉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 저들의 율례가 된다. 그러나 복음 아래 있는 우리로서는, 하늘로부터 베드로 사도에게 전해졌던 한 음성에 의하여 분명히 철회되었음을 알고 있다(행 10:15).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사용하는 대로 사라져 버리는" (골 2:21, 22) 다른 규례들과 더불어, 이 율법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하여 실제적으로 폐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식물(食物)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천거하지)못한다" (고전 8:8)는 것과 무엇이든 그 자체가 속된(부정한) 것은 없다는 것, 그리고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마 15:11)을 확신하는 바이다.

1.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가 이런 멍에 밑에 있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선한 것으로 허락되어 아무것도 거부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2.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 자유 안에 굳게 서자" (갈 5:1). 그리하여 "식물(食物)을 폐하라고 하며" (딤전 4:3, 4) 모세를 복귀시키고자 하는 자들의 교훈을 조심하도록 하자.

3.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모든 선한 피조물을 삼가 조심하여 적절히 사용하도록 하자.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삼가도록 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식탁이 덫이 되는 일이 없도록 음식을 함부로 먹지는 말자. "네가 만일 탐식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두라. 또 그 진수성찬을 탐하지 말라" (잠 23:2, 3). 본성은 작은 것으로 만족하며 은총은 더욱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정욕은 아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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