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신 하나님(출애굽기 34:1-4)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졌던 협약은 이스라엘이 금 송아지를 숭배함으로써 갑자기 깨어지고 말았다. 화해를 이루려면 그들이 중단했던 데서부터가 아니라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타락한 자들은 "회개하고 그들의 처음 행위" 를 가져야 한다(계 2:5).
Ⅰ. 모세는 돌판을 다시 준비해야 했다(1절). 전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을 마련하시어 그 위에다 쓰셨다. 그러나 지금은 모세 자신이 그 판을 "깎아 만들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 위에다 쓰시기만 하실 뿐이다. 이와 같이, 순결한 인간의 마음에 처음으로 율법을 기록하셨을 때에는 그 판도 기록도 모두 하나님이 하셨다. 그러나 그 기록판이 깨어지고 죄로 더럽하졌을 때,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성서로 보존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록을 위해 인간 일군을 사용하셨다. 모세는 그 첫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다만 돌판을 깎았을 뿐이다. 여전히 그 기록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화해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그 판을 다시 새롭게 하라고 명하셨고, 거기에 당신의 율법을 쓰셨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것이 우리에게 명백히 말해 주는 것은 이런 것이다.
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화와 화해의 복음 아래 있다 알지라도(모세의 중재는 이것을 상징했다), 도덕법은 계속해서 믿는 자들에게 작용된다는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구하셨지만, 아직도 율법의 명령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께서 산상 설교를 통하여 도덕법을 설명하셨을 때에,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범한 왜곡된 해석으로부터 율법을 변호하셨을 때에(마 5:19), 그는 사실상 그 율법들을 새롭게 하셨으며 그것들을 처음 것과 같이 회복하신 것이다. 즉 율법을 그 원래적인 의미와 의도로 바꾸어 놓으셨던 것이다.2.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나타내는 최상의 증거는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화해하셨다는 첫 번째 표시로 주신 것이 곧 율법판의 갱신이었다. 이와 같이 새 계약의 첫 번째 조항은 "내 법을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는 것이다(히 8:10). 그리고 그 다음에야 "내가 저희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기 때문이니라" 고 말이 따라오는 것이다(히 8:12).
3.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율법을 기록해 주시기 바란다면, 우리는 그 율법을 영접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돌같은 마음은 죄로 인한 뉘우침과 귤욕으로 깎여져야 하고(호 6:5), "넘치는 악을 버려야 한다" (약 1:21). 부드럽고 근면한 마음에 그 말씀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모세는 알맞게 돌판을 깎았다. 그 돌판은 둘 다 매우 가볍고 얇게 되어서, 모세가 양 손에 들고 갈 수 있었다.
그 크기는 필경 그 판을 넣어 두는 법궤보다는 작았다. 아마 약간 더 작았을 것이다. 법궤는 길이가 1.25야드, 폭이 0.75 드였다.
깎아 만드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으므로, 그 생김새는 별로 신기하지 않았으리라. 모세는 다음 날 아침에 그가 가지고 올라갈 돌판의 미(美)는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다.
Ⅱ. 모세는 다시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뵈어야 했다(2절). 비록 모세가 없고 산에 가서 오래 머물음으로써, 최근에 이스라엘이 금 송아지를 만든 일이 생겼었지만, 아직도 하나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그의 방법을 바꾸지는 않으셨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을 배웠는지 시험해 보시려고 전과 같이 오랫동안 모세를 머물러 있게 하셨다. 그 백성들에게 경외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그들은 거기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지시되었다. 아무도 모세와 함께 올라오지 말라고 했다(3절). 그들은 이전에 "우리는 그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니라" 고 말했다(32: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그것을 알려 주시려고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을 뵙고, 또 거기서 시간을 보내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를 보이려고 "일찍 일어나" (4절) 지정된 장소로 올라 갔다.
예배드리는 데에는 이른 것이 좋은 것이다. 아침이 명상에 좋은 친구가 되는 것처럼 은혜에도 좋은 친구인 것이다.
여호와의 강림(출애굽기 34:5-9)
모세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만나 주셨다(5절). "여호아께서 강림하셨다." 즉 어떤 가시적 표시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해 주었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강림은 하나님의 겸비를 뜻한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동행하려고 자신을 낮추는 자를 관찰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친히 낮추신 것이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게 찾아 오시나이까?(시 113:6 참조).
하나님은 "구름 가운데" 강림하셨다. 아마 지금까지 이스라엘에 앞서 갔던, 그리고 모세가 그 전날 장막 문에서 만났었던 그 구름기둥이었을 것이다. 이 구름은 모세에게 경외심을 일으켰다. 모세에게는 가까이 할 수 있는 친숙성이 있다 하여 그것을 경멸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자들도 "그들이 구름 안에 들어갔을 때에, 두려워했다" 고 했다(마 17:5, 6). 하나님이 구름을 그의 처소로 삼는 것은 비록 자신을 많이 알려 주셨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가리워져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셨는가?(6,7절). 하나님이 intransitu-그의 앞을 지나시며 선포하셨다. 한 자리에 고정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미래의 세계로 보류되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보는 최상의 것도 지나가는 덧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전날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것, 곧 당신의 영광을 지나가게 하시겠다(33:22)는 그 약속을 실행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아의 이름을 선포하셨다" (6절). 그럼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이름을 선포하셨을 때에는, 자존자와 자족자의 영광 중에서 자신을 알리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와 선하심과 모든 자에 충족하심의 영광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셨다.
이제 율법의 제 2판을 출판하시려는 하나님께서는 이 선포를 그 서문으로 삼으신 것이다. 율법, 특히 구제하는 율법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 송아지를 숭배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이 막 조인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선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는 ex mero motu- 오직 그 자신의 선의로만 되는 것이요, 인간들의 공덕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시려 하신 것이다.
그 이름의 선포는 하나님의 자비의 우주적인 크기를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선하실 뿐 아니라, 모두에게 선하시다. 모든 사람으로 이 점을 알게 하자.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귀있는 모든 자에게 들려 주고 알리고 또 믿게 하자.
1. 우리가 관계하는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주 여호와이시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모든 존재자의 근거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엘, 곧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 이요, 모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이것은 그의 자비를 나타내 보이시는 접두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까지도 진지하고 거룩한 경의심으로 생각하고 말하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 자비에 의지하도록 우리를 고무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약하고 허약하고 거짓되고 변하기 쉬운 인간이 주는 자비가 아니라 곧 여호아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자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한 최상의 자비이니 우리가 믿어 의지해야 하며 경멸할 수 없는 것이다.2. 그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은 서로를 드러내고 서로를 강조한다. 그의 위대하심에 대해 무서워 떨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가를 알려 주신다. 그리고 또한 그의 자비를 기회로 이용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또한 알려 주신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 알게 하고 깨닫게 하며, 그의 선하심이 그의 영광인 동시에 그의 즐거움이란 것을 잘 보여주는 많은 말이 쌓여 있다. 그러나 불필요한 동어 반복은 없다.
(1) 그는 "자비하시다." 이것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을 말해 준다. 이 말이 제일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자비의 대상이 되는 타락한 인간을 향해 베푸시는 모든 실례들 중에서 제일 앞에서 있는 수레바퀴이기 때문이다(삿 10:16; 사 63: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지독하다고 생각하거나 우리 형제들에 대해서 완고한 심정을 버려야겠다.
(2) 그는 "은혜로우시다." 이것은 값없음과 친절하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사랑하고 계실 뿐 아니라.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유익을 줄겨 베푸시되, 그들 속에 있는 어떤 것 때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인자한 뜻에 따라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자비는 은혜로우시되 값없는 은혜이다. 이것은 우리가 긍휼한 마음과 정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교훈해 준다(벧전 3:8).
(3) 그는 "노하기를 더디하신다." 이것은 때로 죄인들에게 악행을 범할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한 지류이다. 즉 이스라엘의 악함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였고, 또 경험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리하신다. 즉 오래 참으시고 견디신다. 정의의 집행을 연기하신다. 그는 은혜롭게 기다리시며 긍휼의 기간을 연장하신다.
(4) 그는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다." 이것은 풍성한 인자하심, 즉 우리가 마땅히 받을 바 이상으로, 또 우리의 생각과 그 미치는 한계 이상으로 풍부한 인자를 말한다. 긍휼의 샘은 언제나 차고 넘치며, 긍휼의 하수가 언제나 흐르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과 각 개인에게 넉넉하며 또한 영원히 넉넉한 긍휼이 있다. 이것은 약속된 인자하심, 곧 인자와 진리가 함께 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즉 약속된 인자(仁慈)와 그것은 보증하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미한다. 그는 인자하실 뿐만 아니라, 약속을 주시사 우리에게 인자에 대한 기대를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 수밖에 없기조차 하신다.
(5) 그는 "긍휼을 수천에까지" 베푸신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1] 긍휼이 수천 명의 사람에게부터 확장되는 것이다. 그가 갑에게 은혜를 베풀고, 또 을에게 은혜를 배풀어도 그 긍휼은 결코 다함이 없다. 즉 그는 이스라엘인들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져도, 역시 그들에게 넉넉히 베풀 수 있는 긍휼을 가지고 계신다.
[2] 긍휼이 수천 세대, 곧 세상 끝날 때 오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그 자체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6) 그는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신다." 용서하는 긍휼이 특기된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확대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이것 때문에 그는 최근에 극히 의미심장한 증거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종류의 죄악을 용서하신다. 곧 "악과 과실과 죄" 이다. 용서하심도 다양하시다. 또한 그에게는 "풍성한 구속(救贖)이 있다" (시 130:7).
3. 그는 공정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는 형벌받을 자를 결단코 용서치 않으신다" (7절). 혹자는 이 구절을 진노를 경감하신다는 뜻으로 읽고 있다. 그가 공허케할 때에도, 그는 완전히 황패케 하시지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구제책이 없는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몰고 가시지 않으신다" 는 것이다. 또 그것은 우리가 읽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마치 그들의 죄를 알아 채지 못했다는 듯이 그 죄를 북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혹은 참회하지 않고 계속 범하는 죄책은 용서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또 그의 정의에 어떤 보상이 없이, 그리고 그의 통치에 대한 영예를 입증하지 아니하고는 죄책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2) 그는 "아비의 악을 자손에게까지 보응하신다" (8절). 모든 영혼이 하나님 자신의 것이니, 하나님은 공정하게 처리하실 것이다. 그리고 피로 물든 죄에는 악성(惡性)이 있다. 그는 때때로 그렇게 보응하시되, 특별히 우상 숭배자들의 형벌에 대해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증오하시고 분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여움을 영원히 간직하지는 않으신다." 다만 3,4대까지만 보응하신다. 그러나 "긍휼은 수천대까지 이르게 하신다." 이것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이름이 될 것이며, 모든 세대에게 이렇게 기억될 것이다.
Ⅱ. 모세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하여, 그리고 당신의 은촌과 긍휼에 관하여 말씀하신 그 선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보자.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소서" 라고 했던 그 요구에 넉넉한 응답으로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모세가 다시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서, 바위틈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모세는 이것으로 만족하여 더 이상의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도마에게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 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그렇게 했다는 기록은 볼 수 없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시자, 모세는 말하기를, "이제 넉넉합니다. 나는 하늘 나라로 깔 때까지는 더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는 자기가 본 것을 말로 기술하기에는 합당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에 귀를 기울여 보자.
1. 그 사건이 그에게 어떤 감명을 주었는가? 모세는 급히 땅에 엎드렸다고 했다(8절). 그것은 이러한 표현이다.(1)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그의 겸손한 존경과 찬미이며, 하나님이 선포하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 을 하나님께 돌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까지도 깊은 존경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추앙해야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이 친히 보이신 그 현상에 대한 모세의 즐거움과 거기에 대한 감사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를 구체적 실례로 경험했을 때 뿐 아니라, 인자를 베풀겠다는 말씀의 선포만 듣고도 거기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은혜스러우시며 앞으로도 은해스러우실 것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3) 이 선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자신의 거룩한 복종심의 표현이다. 또한 그의 긍휼은 물론 그의 정의에도 찬성하고,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 자신을 친히 선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와 지도하심에 따르겠다는 각오의 표현이다. 이 하나님이 영원히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게 하자.
2. 모세는 그 사건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그는 즉시 그것으로 기도의 터전을 삼았다(9절). 그래서 그것은 진지한 애정이 깃든 기도가 되었다.
(1) 광야에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다. "기도하오니,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소서. 당신의 임재만이 우리의 안전과 승리의 전부이옵니다."
(2) 죄의 용서를 기도했다. "오, 우리의 악과 죄를 용서하옵소서, 그렇지 않을진대, 우리 가운데 주께서 계시기를 바랄 수 없나이다."
(3) 선민의 특권을 기도했다.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주께서 특별히 보살피시고 권념하시며 기뻐하시옵소서."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이요, 모세에게 확신을 준 것이지만, 그는 그것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허락하심의 신빙성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인준해 주시기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를 물리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기도하도록 지도하고 격려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를 통하여 어떤 좋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도, 아직 계속해서 용서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자기들의 용서가 다시 새로워지기를 위해 기도하며 그리고 더욱 더욱 그들의 영혼에 그것이 분명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욱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수치는 더욱 커지고 죄에 대한 관심은 더욱 진하여진다.
하나님은 그 선포의 마지막에서 "그 죄를 자손에게까지 보응하겠다" 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여기서 그 화가 면제되기를 탄원한다. "여호와여 저들 뿐만 아니라 저들의 자녀들까지 용서하시사, 당신과 그들이 맺은 계약 관계가 우리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며, 그들의 유업이 되게 하소서! 이와 같이, 참으로 공적인 정신을 가진 모세와 같은 사람은 자녀들과 장차 태어날 후손들을 위해서까지도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모세는 이상한 탄원을 드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이니라" 라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과 함께 가지 아니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말한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그들을 좀더 훌륭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임재와 은총이 더욱 필요합니다." 모세는 그들이 너무나 목이 곧아서, 자기로서는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충분한 인내와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우리 가운데 행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결코 경외심이 없을 것이니이다. 당신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아니시니(호 11:9) 저들을 용서하시고 참을 수 있나이다."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출애굽기 34:10-17)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우호적 계약이 수립된다. 반역자들이 용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시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 말의 확증은 주의를 촉구하고 찬미케 하는 "보라" 라는 말 속에 나타나 있다. "보라 내가 계약을 세우리라." 그 계약이 파괴되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이제 계약은 새롭게 세워졌는데, 그것을 세운 이는 하나님이시다. 만일 분쟁이 있다면, 그 책임을 모두 우리가 져야 한다. 그러나 만일 평화가 있게 된다면, 그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Ⅰ. 계약의 한 당사자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것이 무엇인가?(10,11절).
1. 일반적으로 보면, "너희 전체 백성 앞에서 내가 이적을 행하리라" 고 것이다(10절). 계약의 축복은 기이한(이적적인) 일들(시 98:1)이요, 곧 은혜의 왕국에 있는 이적들임을 명심하자.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적은 자연의 왕국에서 일어난 기이한 일들, 곧 요단강이 마르고, 하늘의 해가 머물게 되는 것 따위이다. 실로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일", 전례가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리라고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기쁨이요, 그들의 신앙을 튼튼케 하였다." 그 백성이 여호아의 행위를 보리라" 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원수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다. 즉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한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고 했다. 아니, 하나님 당신의 백성까지도 그 일들을 보고 놀랄 것이다.
2. 세부적으로 보면,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들을 쫓아내버리라" 고 했다. 만국의 왕이신 하나님은 당신이 좋으신 대로 어떤 민족을 뽑아내시고, 또 어떤 민족들은 심으신다. 성도들의 왕이신 하나님은 애굽에서 가져온 포도나무를 심기 위해 터를 만드셨다(시 80:8, 9). 열국들이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해 제물이 된 것이다(시 43:3, 4).Ⅱ. 그 계약의 다른 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지키라" 고 했다. 우리가 이 계율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그 약속의 혜택을 기대할 수 없다.
1. 그 두가지의 큰 계율은 이러하다.(1) "너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14절). 어떤 피조물이나 어떤 이름, 또는 어떤 공상적인 피조물에게라도 신의 영광을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좋은 이유가 첨가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생명에 시험이 온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니라." 즉 하나님은 남편이 부부의 침실을 귀중히 여기듯이 당신의 예배를 그렇게 생각하시고 애정을 쏟으신다는 것이다. 질투란 "한 남자의 격노" 라고 불리어진다(잠 6:34).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평한 분노" 이다.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없는 법이다.
(2) 또한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고 했다(17절). 즉 "너는 참된 하나님을 어떤 형상들에 의하여 예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 전에 범하였었고, 그래서 특별히 그들이 주의하고 있는 죄였다.
2. 이 두 가지 계율에는 따른 두 계율이 그 둘레에 울타리를 쳤다.
(1) 즉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길 유혹을 받지 않기 위하여, 그런 것을 섬기는 자들과 친척 관계나 우호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2절). "너희는 너희의 선한 행위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쫓기 쉽고 따르기 쉬운 것이 죄이니라. 그러므로 절저히 조심하여 죄는 그 모양이라도 떠나며 거기에 접근하지 아니하도록 삼가야 한다. 그 땅 거민과 계약을 세우지 말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가나안인들을 몰아내신다면, 그들 또한 마땅히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도를 지켜 가나안인들을 머물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사실보다 합리적인 주관이 또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서 가나안인들과 싸우신다면, 이스라엘은 그들과 화목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인들로 이스라엘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면, 이스라엘도 저들이 자기들의 올가미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그 땅의 정복을 완성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민족적 과제였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그 율법 안에 있는 은혜를 얼마나 많이 권고하셨던가!
특별히 이스라엘은 그들과 잡혼을 삼가야 한다고 했다(15,16절). 그들이 저들의 자녀들과 결혼하면 그들은 그네들의 신들과도 결혼할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선한 것이 나쁜 것을 개혁하기보다는 나쁜 것이 선한 것을 타락시키기가 훨씬 더 쉽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부패를 말해주는 것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길이다. 우상 숭배자들과 맹약하는 자들은 점차 우상 숭배까지도 좋아하게 될 것이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된 자는 드디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단계에 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Obsta Principis-악은 싹날 때 잘라 버려라.
(2) 그들이 신들을 부어 만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저들이 세운 것들과 거기에게 속한 것들, 즉 단과 아세라 신상은 모두 철저히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3절). 이런 것들이 남아 있게 되면, 이스라엘은 시간이 감에 따라 그런 것들을 사용하게 되거나 본따게 될 것이고, 우상 숭배에 대한 혐오나 두려움이 차츰 감소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의 유물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모욕이 되는 것이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커다란 수치가 되는 것이므로 마땅히 근절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성(理性)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유물을 신으로 삼고 거기에 예배하는 그러한 불합리한 짓을 범하는 죄를 지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라.
절기를 지키라(출애굽기 34:18-27)
여기에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바 그들의 엄숙한 절기에 특별히 연관해서 몇 가지의 지시 사항을 반복해 주고 있다.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그것을 기념하여 잔치를 벌이자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친히 정하신 몇 가지 절기(잔치)를 지키라고 의무를 지정해 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환락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신앙을 떠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당신의 종들에게 기쁨을 넘치도록 주시는 그런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지한 신앙심은 끊임없는 축제요, 언제나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Ⅰ. 한 주일에 한 번은 쉬어야 한다(21절). 연중 가장 분주한 때, 즉 "밭 갈때에나 거둘 때에도" 쉬라고 했다. 모든 세속적인 업무는 거룩한 안식을 위해서는 양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확하는 일은 수확기 중에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때 더욱 훌륭하게 번창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확하는 일이나 수확물에 대한 기쁨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우선적이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Ⅱ. 일 년에 세 번 절기를 지키라고 했다(23절). 즉 그들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보여야 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든 종교 예식에서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 곧 무한히 복되시고 크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우리와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으로 존경하고 경외를 표하면서 그분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이요, 또 그럼으로써 그를 신뢰할 용기가 생기고 그를 기쁘게 섬길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다. 그러나 성스러운 의무를 통하여 명령받은 종으로서 또 부탁하는 청원자로서 그앞에 우리 자신을 보여야 한다. 또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일을 마땅히 기쁨으로 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모든 남자들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로 예배드리러 나아왔다면, 그 나라는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을 위험에 놓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집에 남아 있는 가엾은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 그리고 병자들과 늙은 자들은 어떻게 되라는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께 맡겨라(24절).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고 했다. 그들이 침략해 들어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쳐들어 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모든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하나님이 점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욕망까지도 견제할 수 있다. 가나안은 탐스러운 땅이었고, 이웃하고 있는 나라들은 탐욕이 많은 족속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들로 하여금 탐내지 못하게 하리라." 이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거스리는 온갖 죄악적인 욕망을 제거하자. 그리고 나서는 우리 자신과 우리 유익에 악을 미치는 바 타인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죄악적인 욕망은 하나님께서 견제해 주시리라고 신뢰하자.2. 의무를 다하는 길이 안전에 이르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는 우리를 보존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모험을 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에 의하여 손실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고용되어 있으며, 하나님를 시중들고 있는 한, 귀족들이나 국회의원들이 회기 동안에는 체포되지 아니하는 특권이 있듯이, 우리도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된다.
Ⅲ. 또한 그 세가지 절기와 거기에 따르는 부수물들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1. 유월절과 무교절이다. 이것은 애굽에서 저들이 구함을 받았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또 거기에 초대생의 대속법이 첨부되어 있다(18-20절). 이 잔치는 출애굽기 12장 13절에서 제정되었고, 다시 촉구된 바 있었다(23:15).2. 칠칠절 즉 유월절 후 일곱 주일이 지난 오순절의 절기이다. 여기에는 첫 소산에 관한 율법이 부가되어 있다.
3. 매년 끝에 드리는 수장절이다. 이것은 곧 초막절이었다(22절). 이러한 절기에 대해서는 역시 앞에서 말했었다(23:16). 그 율법이 여기에서 반복되어 있다(25,16절). 즉 유월절에는 누룩을 삼가고, 오순절에는 첫 소산을 드리며, 그리고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이것은 아마 수장절과 관련된 말 일 것이다-는 것 등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마도 이스라엘이 애굽인들에게서 보았거나 이웃 나라들이 수확을 축하할 때 본, 그러한 미신적인 의식을 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Ⅳ. 여기서 반복된 이 율법과 함께 모세가 산성에서 이미 들었던 모든 말씀과 장막의 모형이 다시 그에게 반복되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즉 이것은 금송아지가 모세에게 준 혼란과 당황이 그가 보고 들은 바 마음에 간직하고 있던 생각을 빼앗아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화해의 표시로서, 또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 위대한 중보자에 의하여-그는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케 하시려고 오셨다(마 5:17, 18). 그 전체가 조심스럽게 보전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1. 그리고 끝 부분에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는 명령이 모세에게 주어진다(27절). 그래야 백성들이 자주 통독하여 잘 익히게 될 것이며 앞으로 오는 여러 세대에 이것들을 전해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 아무리 감사하여도 다 못할 것이다.2. 하나님께서 이 말씀의 뜻에 따라 모세와 이스라엘과 더불어 계약은 맺으시리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직접으로 계약하지 않고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그들과 계약하리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은혜의 계약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에게 온다. 그리스도는 "백성의 계약을 위해" 오셨다(사 49:8). 그리고, 여기에 있는 계약이 명령의 취지를 따라서 성립된 것 같이 지금도 그렇게 맺어진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기 위해서(마 28:19, 20) 우리는 세례를 받고 계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세 얼굴의 수건(출애굽기 34:28-35)
Ⅰ. 모세는 산 위에 오래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기적적으로 견디어 낸 것이다(28절). 그는 거기에서 간단없이 하나님과 더불어 아주 가까운 교제를 하면서 40주야를 머물렀으나, 그는 그 기간이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나와서 그를 경배하느라고 한 두 시간 보내는 것을 지루해 할 때는, 모세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하나님과 함께 보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며, 또 우리는 영원토록 그를 찬양하면서 지내기를 희망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에 모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모세는 먼저 번에도 그렇게 오래도록 금식했었다. 그러나 그는 두 번째에도 식량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을 믿었고, 그는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체험함으로써 용기를 얻었던 때문이다. 그렇게나 오래도록 그는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없이 견디있다(아마 잠도 자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1.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부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먹을 것이 필요 없었다. 몸을 지으신 이에게는 어떤 일상적인 방식이 아니라도 그 몸에 영양을 공급할 능력이 있다. 그는 일상적인 방식을 사용하시나 거기에만 얽매이지는 아니하신다. "생명이 음식보다 중요하다."2. 하나님과의 교제가 그를 기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음식을 먹을 욕망이 생기지 않았다. 모세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이 곧 그가 먹는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만족을 누렸고 전능자를 보는 그 환상 때문에 그는 몸과 또 몸의 쾌락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총애를 베푸시고자 하셨을 때, 먹을 때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하시지 않고 당신의 빛과 율법과 사랑 그리고 당신 자신에 관한 지식을 베풀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이면서도 참으로 천사의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장 참된 기쁨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며," 음식의 풍부함과 감비로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화평과 기쁨이라." 모세는 물론 엘리야나 그리스도께서도 40주야를 금식하셨다. 우리가 감각적 기쁨을 죽이면 죽일수록, 하늘 나라의 기쁨을 더욱 풍부히 맛보리라.
Ⅱ. 크게 풍요해지고, 또 기적적인 단장을 하고 내려왔다.
1. 모세는 가장 귀중한 보물도 풍부해져서 내려왔다. 그는 양손으로 쓰신 두 개의 율법판을 가지고 왔다(28,29절). 우리에게 율법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은총이다. 이 은총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다(시 147:19, 20). 하나님의 율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큰 영광이다. 이 영광이 모세에게 이루어졌다.2. 그는 최선의 아름다움으로 단장하고 내려왔다. "그의 얼굴 꺼풀에는 광채가 났다" (29절). 모세는 이번에 산에 있는 동안에도 전에 들은 바와 같은 말씀만 들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이 보았다. 즉 얼굴을 대하여 보았다. 그는 어느 정도 "그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고후 3:18).
지난 번에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분개하고 책망할 수 있는 행정관의 영광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천사의 영광과 평화와 화해라는 기쁨 소식을 가지고 내려왔다. 먼저 번에는 채찍을 가지고 왔으나 지금은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내려왔다.
(1) 이것은 다음과 같이 생각 될 수 있다.
[1] 모세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다시는 그의 사명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거나, 그에 대하여 경솔하게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바로 자신의 얼굴 위에다 신임장을 붙이고 있는 셈이었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그의 일생 동안 이 영광이 다소간 계속 남아 있어서, 그가 노년에 이르러서도 원기를 왕성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즉 하나님을 보았던 그의 눈은 어두워지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던 그 얼굴은 주름살이지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얼굴은 바라볼 수 없었으나, 거기서 그의 사명을 읽을 수는 있었다. 왕중의 왕이 영화롭게 하시기를 기뻐하는 자는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했다. 눈에 볼 수 있는 증거까지도 완고한 불신을 정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광채는 그에게 큰 영예였다. 그러나 그것은 뛰어난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에 관하여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온 몸도 그러하였으며,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 고 한다(눅 9:29). 그러나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하나님이 그 영광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그것은 "봄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것" 이 당신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그들의 중재자인 모세에게 이 영광을 맡겨 주셨다는 것은 그 백성에게 커다란 은총이요,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자기들은 그를 통하여 또한 인정받게 되었다는 확신감을 그들이 가졌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사 우리의 변호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 신앙을 지켜 주는 위대한 지주(支柱)이다.
[3]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본 결과이었다.
첫째로, 하나님과의 교제는 얼굴을 참된 영예로 빛나게 한다. 진지한 신앙심은 사람의 용모에 광채가 나게 한다. 예컨대 존경과 사랑을 받게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교제는 얼굴을 보편적인 성결로 빛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산상에 있었었다면, 우리의 겸손과 온유와 그리고 모든 거룩한 교제의 본보기를 보여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 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하며 "성결의 아름다움" 도 나타나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와 교제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 대하여 우리가 예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행 4:13).
(2)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에 대하여 살펴 보자.
[1] 모세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다" (29절).
첫째로, 자기들의 얼굴에 참된 은혜의 광채가 빛난다 해도 자기들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들에게 위로를 주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친구들은 그들에게서 하나님과 같은 어떤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들 자신들은 자기들이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갖춰 있다.
둘째로, 그들의 얼굴이 특별한 은혜와 미덕으로 빛난다고 해도 그것을 가지고 잘난 체할 줄 모르는 것, 그것이 타인에 대한 겸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무엇이든지 간에, 마치 우리의 얼굴이 빛나는 것을 보지 못했고 또 망각해 버린 자와 같이, 언제나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많은 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겸손한 심정이 되어 있어야 한다.
[2] 아론과 이스라엘 벡성들은 그것을 보고 "두려워했다" (30절).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점은 그것을 본 수많은 증인들이 두려워했다는 것으로 입증된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부시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물러 가게 할 만큼 그들에게 두려움도 되었다. 그들은 아마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인지 의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어떤 자비의 징조와 같이 보였다 해도 그들은 죄책을 의식하고 있었고 특별히 모세가 지난 번에 산에서 내려왔을 때 자기들에게 보였던 태도를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최악의 어떤 징조로 생각하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성결도 경외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죄 의식은 사람을 자기 친구들까지도 두려워하게 만들고, 참으로 자신에게 은혜가 되는 것까지도 두려워하게 한다.
[3] 모세는 자기 얼굴에 빛이 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33,35절).
첫째로, 이것은 온유와 겸손의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교훈이다. 우리는 "육체를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의 영광이 가리어 있고 수건이 드리워 있어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열납되기를 진실로 바라는 사람은 결코, 사람에게 알려지거나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Qui bene latuit, bene vixit-칭찬할 만한 숨김도 있다.
둘째로, 이것은 교역자들은 듣는 사람들의 능력에 맞고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들을 조화시켜서 설교하라는 것을 교훈해 준다. 인격 수양보다는 환락에 흐르려는 모든 예술과 학문은 수건으로 덮어 버리자. 그리고 강한자는 약한 자의 부족한 것들에 맞게 자신을 낮추게 하자.
셋째로, 이 수건은 구약 율법의 어두움을 상징했다. 의식적인 제도에는 그리스도와 복음의 은총이 다분히 감추어져 있다. 그런 것이 수건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이라는 그림자의 본체인, 장차 올 선한 것들을 확실하게 보거나" 분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수건에 감추인 아름다움이요, 광산에 묻혀 있는 황금이며 조개 속에 든 진주이었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불멸이 드러나게 되었고, 구약 성경에 있던 수건이 벗겨졌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빛에 대하여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의 심령 위에는 그 수건이 남아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말씀을 고린도 후서 3장 13-15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다.
[4] 모세는 회막에서 여호아와 더불어 말하기 위해 회막으로 나아가 "여호와 앞에 나아갈 때는 그 수건을 벗었다" (34절). 그때는 수건을 가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밝히 드러나며 또 밝히 드러나야 한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그분의 목전에서는 모든 것이 벗겨지고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지 그 앞에서 숨거거나 위장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가 여호아 앞에 나아갈 때는 우리의 모든 베일을 벗어야만 한다. 설명된 바와 같이(고후 3:16), 이것은 한 영혼이 여호와께로 나아갈 때는 그 수건이 벗겨지게 되고, 얼굴을 대하고 그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도 의미해 준다. 또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주님 앞에 나아가 거기서 영원히 그 분과 대화하게 될 때는 수건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벗겨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눈에서도 벗겨질 것이니,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왔고 들어왔던 것을 밝히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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