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송아지(출애굽기 32:1-6)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고 있는 동안, 백성들은 지금부터 이미 받았던 율법에 대해서 명상하면서 앞으로 알게 될 내용을 스스로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40일이란 기간도 상당히 짧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은 오히려 이미 받은 율법을 어떻게 하면 파괴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자기들이 기대해 오던 것을 이미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궁리하는 자들이 있었다. 40일 중의 제39일에 여호와께 대한 반역 음모가 꾸며졌던 것이다. 그것을 다음에서 살펴볼 것이다.
Ⅰ. 모세가 없는 동안에 백성의 치리를 맡은 아론에게, 백성들이 소동을 벌였다. "일어 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고 했다(1절).
1. 모세가 없는 것이 백성들에게 어떤 나쁜 영향을 주었는가를 보라. 만약 산에 올라와서 머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모세에게 없었더라면, 모세는 그 책임을 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무릇 재판관들이나 교역자들이나 가장과 같이 다른 사람을 책임지고 있는 자들은, 정당한 이유없이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 책임의 자리를 비우지 말아야 한다.2. 기만하기 위해 매복해 있는 그런 거짓말에 군중이 물들었을 때에, 그들의 분노와 난폭함이 어떠한가를 보라. 처음부터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은 아마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어 본 일이 없으므로 결코 그런 일을 할 생각을 가지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악의 길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와 같은 무리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급류처럼 흘러들자, 그런 제안을 증오하던 소수의 무리들도 감히 그 흐름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작은 불이 얼마나 크게 비화하는가를 보라! 그러면 이 훤화하는 무리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1) 백성들은 약속된 땅을 기다리기에 지쳐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시내 산 기슭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거기에서 완전하고 편안히 지내며, 잘 먹고 잘 교육받고 있었으나, 여전히 전진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과 함께 머물러 주시며 또 그들과 함께 계심을 구름으로 나타내 보여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계셨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것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앞에 서서 인도해줄 신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급히 달려가고 싶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동반해 가기 위해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기다리던 자들이 흔히 자기 스스로의 의견에 빠져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기다려야 한다. 믿음을 가진 자는 조급히 하지 않으니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지 아니한다.
(2) 백성들은 모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데에 지쳐 있었다. 모세는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산에 지체할 것인지를 백성들에게 말하지 않고 산에 올라갔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 기간을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기다리는 시간이 한계에 이르게 되자, 비록 모든 면에서 모세의 부재시를 위한 대비가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몇몇 나쁜 사람들이 나와서 왜 모세가 늦어지는지 알 수 없노라고 발설했다. 즉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에 대하여는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고 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그들이 모세의 인격을 얼마나 경멸하였던가! 그들은 "이 모세" 라고 하였다. 자기를 위해 그처럼 자상한 배려를 베푼 모세에 대해 그들은 배은망덕하였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배신하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영예롭게 하시기를 기뻐하나 그들은 그를 경멸하기를 즐거워하였다. 그나마도 모세의 형제요 그의 대리자인 아론 앞에서 그렇게 하였다. 이렇게 배은망덕한 세상에서는 아무리 크나 큰 공덕을 쌓은 자라 하더라도, 최악의 냉대와 모멸을 면할 길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2] 모세의 지체에 대해 백성들이 얼마나 의심을 품었던가! "우리는 그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고 했다. 백성들은 아무 쓸모 없는 자기들을 보호하시고 먹여 살리신 바로 그 하나님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모세를 보호하고 먹이기를 원치 않으시는 듯이 모세가 막키는 불에 타죽었거나 굶어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세를 좋게 여기려 하던 자들 중에는 모세가 아마 에녹과 같이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사람들이 모세를 나쁘게 생각하든 말든 개의치 아니하던 다른 사람들중에는, 모세가 자기의 책무 수행이 불가능함을 알고 자기의 책무를 포기하고 양 떼를 치러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빈정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추측들은 완전히 사실 무근의 것이었으며, 있을 수 없는 불합리한 것이었다.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가" 는 말하기 어렵지 않았다. 즉 그가 구름 가운데로 들어가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보였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세가 거기에 안전하게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기를 원하셨다면 모세에게 이 같은 은총을 베풀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모세가 만일 오래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모세에게 하실 말씀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었다. 모세는 백성들을 대신하는 대사로서 산 위에 머물렀던 것이고, 거기에 간 임무를 끝내는 대로 즉시 되돌아올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러한 일을 핑계삼아 잔악한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고 했다. 다음 사실 유의해 두자.
첫째로, 좋게 생각할 이유가 그렇게 충분히 있는데도 나쁘게 생각키로 마음을 정한 자들은 흔히 자기들이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채 가장하기가 일쑤이다.
둘째로, 우리의 구속주의 재림을 곡해하는 것이 많은 악행의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영광의 산상에 올라가 계신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늘이 예수님을 감싸 숨기고 계심은 우리를 믿음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예수게서는 그 하늘 나라에 계신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아직 거기에 계신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자들은,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고 묻는다(벧후 3:4). 그들은 주께서 아직도 오시지 않았으므로, 영영 오시지 않는 듯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악한 종은 이런 생각을 가짐으로써 더욱 대담하게 불신앙을 행한다. "내 주는 더디 오시리라" 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째로, 기다림에 지친다는 것은 크고 많은 유혹을 가져온다. 사울왕의 파멸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사울이 지정된 기일의 마지막 시간까지 기다렸으되, 바로 그 마지막 시각을 참고 견디지 못하였던 것이다(삼상 13:8 이하). 그와 같이 바로 여기의 이스라엘 백성도 단 하루만 더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모세가 과연 어떻게 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 여호와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오시기까지 기다려야한다. 비록 지체되더라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실 것이다. 오실 이는 반드시 오실 것이며 늦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예배 제도를 기다리는 데 지쳤으니 그것은 바로 그들이 지금까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리라" 는 말을 들었고, 그 예배의 화려한 행렬과 의식을 무척이나 동경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이 바라던 만큼 속히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해서 그들은 인간의 지혜를 짜내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표징을 고안하여 그것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기들의 창안품을 예배하려 했다. 그것은 아마 자기들이 이전에 애굽인들에게서 보았던 그런 신상이었을 것이다.
순교자 스테반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아론을 향해 "우리에게 신을 만들어 주시오" 라고 말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 고 싶어했다고 한다(행 7:39, 40).
"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신들을 만들라" 고 한 것은 매우 이상한 행동이었다. 만약 그들이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며 그를 잃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모세를 위해 장엄한 추도식을 거행하는 것이 예의 바른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렇게도 크나 큰 은인이 얼마나 빨리 망각되어지는가를 주시하라. 만약 그들이 "모세는 없어졌다. 우리를 위해 치리자를 세워 달라" 고 했던들 다소 분별력이 있는 처사였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도 모세에 대한 배신적 행위요, 모세 부재중의 유사(有司)인 아론과 홀을 모욕하는 짓인 것만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모세가 없어졌으니 우리에게 신을 만들어 달라" 고 말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처사였다. 도대체 모세가 자기들의 신이었던가? 그가 한 번이라도 그들의 신인 체 하였던가?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가는 불분명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숙영지에 그같이 매일 식량을 잘 조달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를 의심할 어떤 여지가 과연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인가? 이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셨고, 아니 지금도 하시듯이, 그렇게 잘 그들을 부양해 줄 다른 신이 도대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런데도 "우리를 위해 신을 만들라! 그들이 우리 앞 길을 인도하실 것이라!" 고 했다. 신들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신들을 갖겠다는 것인가? 한 신으로는 부족한 것인가? "우리에게 신들을 만들어 달라!" 그렇다면 인간의 손으로 만든 그런 신들이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스스로 나아가기보다는 자기들이 옮겨가야 하는 그런 신들이 자기들의 길을 인도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렇게 비참하고 허망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자들이다. "그들은 우상에 미쳐" 있다고 했다(렘 50:38).
Ⅱ. 그들의 보석을 가져와서 우상을 만들자는 아론의 요청이 나왔다. "너희들의 금 귀고리를 내게로 가져오라" (2절). 아론이 백성들의 제안에 대해 일언반구라도 불찬성의 말을 했다는 것을 찾을 수 없다. 그는 그들의 무례함을 힐책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죄와 그 행위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제의에 승복하고, 자기도 그일에 동조하고 싶다는 듯이 말한 것 같다. 당초에는 아론이 단지 농담으로 생각하여, 그들에게 우스꽝스런 우상을 세움으로써 그들의 제안이 잘못임을 폭로하고, 그것이 어리석은 행위임을 그들에게 나타내보이려고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악한 농담도 죄악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경망스런 날파리가 촛불 가까이에서 논다는 것은 결국 위험스런 결과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아론이 백성들에게 금고리를 빼어 가져오라고 말했을 때, 비록 사람들이 탐욕으로 인해서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어" 그것으로 우상을 만들고 싶어 하였겠지만(사 46:6), 자존심 때문에 그들의 금고리를 빼 놓지는 못할 것이라고 아론이 믿었으므로, 그들의 제의를 좌절시키기 위한 계획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동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죄악의 정욕이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죄의 길로 이끌어갈 것인지, 또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할 것인지를 시험해 본다는 것은 안전한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은 여기에서 입증된 대로 위험스런 실험이다.
Ⅲ.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다(3,4절).
1. 신상 제조 계획을 물리치는 대신, 아론은 아마도 그들의 미신적 생각을 오히려 격찬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론은 그들이 가져온 금 귀고리가 이제 가장 찬양할 만하고 값진 신이 될 것이라는 망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들이 우상을 만드는 데에 자기들의 귀고리를 쾌히 내놓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 지극히 인색한 우리들은 자신들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에 드는 비용을 아까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드는 비용을 아까와한다. 이토록 선한 명분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2. 아론은 백성들의 귀고리들을 녹여서, 그 목적에 맞도록 주형(鑄型)을 만들고, 녹인 금을 그 안에 부어 넣었다. 그랬더니 그것은 한 마리의 소, 즉 송아지 모형이 되었다. 그리고 조작 도구로 몇 차례 마무리 손질을 했던 것이다.
혹자는, 아론이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표시로 이 모형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의 머리나 뿔이 신의 권능을 상징하는 데는 알맞으나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경배할 만큼 우둔하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신을 표현하는 법은 애굽인들에게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배웠다고 볼 수 있다. 기록된 대로, "그들이 애굽의 우상을 떠나지 아니했고(겔 20:8), 그녀가 애굽에서 가져 온 음란을 마다하지 않았도다" (겔 23:8).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고 하였기 때문이다(시 106:20).
따라서, 그들은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상하는 다른 우상 숭배자들보자 더 어리석은 행동을 만천하에 드러냈던 것이다.
Ⅳ. 호렙산 기슭에 금송아지가 만들어지자, 그들은 "그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였다" (시 106:19). 그 백성들이 송아지를 좋아함을 보자, 아론은 그들의 비위를 기꺼이 더 맞추어 주고자 하여, 송아지앞에 단을 쌓고 그것을 축하하여 잔치 곧 봉헌식 축제를 열었다(5절). 그런데도 아론은 그것을 "여호와의 절일" 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비록 그들이 짐승처럼 되었지만, 이 우상 자체가 신이라고 생각지도 않았고 또한 그 우상에 대한 숭배를 끝내려 하지도 않았으나, 그 우상을 통해 그들이 예배드리고자 하던 그 참 신이 구현되기를 생각하면서 그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우상 숭배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마치 카톨릭 교도들이 자기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한 수단으로 우상을 사용한다고 변명을 내 세우는 것과 같다. 그 카톨릭 교도들은 금송아지의 축제를 여호아의 절일이라고 하며, 또 그렇게 공포한, 송아지 숭배자들과 조금도 다른 바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지하고 생각이 없는 자들이라도 이 점을 잘 모를 자는 없을 것이다.
그 백성들은 매우 열심이어서 이 축제를 자진해서 열었다(6절). "그들은 이튿날에 일찍이 일어났다." 이것은 그 제전(祭典)을 자기들이 얼마나 즐거워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고대 예배 의식에 따라 그들은 이 새로 만든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나서, 그 제물을 놓고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귀고리를 바쳐 자기들의 신을 만들고는, 자기들의 가축을 드려 그 신께 은총을 빌었다. 만약 그들이 우상을 통해서 하지 않고 직접 이 제물들을 여호와께 바쳤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을 것이다(20:24).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으로 한 형상을 세워둠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그 제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없이 가증한 것이 되고 말았다.
신약 성서는 저들의 이러한 우상 숭배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그 제물을 놓고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을 함께 전해 주고 있다. 즉 제사 지내고 남은 제물을 저들은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노나니, 광대의 놀음이요 방탕한 놀음이라 했다(고전 10:7). 그 신에 그 예배다. 그들이 먼저 자기들의 탐욕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지 않았다면, 송아지를 저들의 신으로 삼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신이 하나의 웃음거리에 불과할 때면, 거기에 대한 예배 또한 오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헛된 생각" 을 품고 있으므로 그들의 예배도 허망한 것이 되었으니, 그 허망함도 지극히 큰 것이었다.
1. 온 백성이, 특히 그렇게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그들의 바로 그 곳에서, 불과 며칠 전에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이라도 만들지 말라" 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불 가운데서 듣지 않았던가! 또 그들은 이 계명이 주어질 그 무시무시한 위엄 속에서 울리는 우뢰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번개를 보지도 못하였고, 지진을 경험하지도 못했더란 말인가? 그들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특별한 주의를 받지 않았었는가?(20:23)그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과 엄숙히 계약을 맺어, 하나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무엇이든 "행하여 복종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24: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직접 엄숙히 계약을 조인했던 바로 그 곳을 떠나기도 전에, 그리고 시내산 꼭대기에서 그 구름이 걷히기도 전에, 그처럼 분명했던 계명을 어기고, 또 "이 죄악이 너희와 너희 자손에게까지 미치리라" 는 그 명백한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것을 보면 율법을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성화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율법은 죄를 알려 줄 뿐, 그 죄를 치료해 주지는 못한다. 이러한 사실이 그 죄를 범한 장소를 지적하여 강조한 그 말 속에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이 율법을 받은 그곳, "호렙산에서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었다" 고 했다(시 106:19). 복음을받았던 자들은 그렇지 아니했다. 즉 "그들은 즉시 우상에서 돌이켰다" (살전 1:9).
2. 아론이 이 죄에 그토록 깊이 관여되었다는 것, 또한 그가 송아지를 만들고 축제를 선포했다는 사실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다. 아론, 곧 여호와를 믿는 성도요, 모세의 형제로서 그의 대변인이요, 예언자인 모세의 친형제요, 그래서 "말 잘하는" (4:14) 사람인 그가 우상 숭배에 대하여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애굽의 재앙과 또 애굽의 신들에게 내려진 심판을 목격하고 또 그것을 내리는 데 한 몫을 담당했던 그가 바로 이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도대체 뭣이란 말인가! 버림받은 애굽의 우상들을 바로 그가 본뜨고 있지 아니한가? 애굽의 우상 숭배를 (그것도 가장 나쁜 것으로) 그들에게 불러들이면서, 도대체 그는 무슨 낯으로 "이것이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 자가 바로 모세와 함께 산에 거하였었고(19:24; 24:9), 또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가시적인 모양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모양을 형상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들었던 그 아론인가? 바로 이자가 모세의 부재중에 백성들을 돌보는 권한을 위임받은 아론인가? 그러한 그가 여호와께 대한 반역 행위를 교사하며 방조하고 있는가? 도대체 그가 그렇게도 죄악적인 행위를 저지른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가 이상하게 놀라서 그 일에 개입된 나머지 비몽사몽간에 그 일을 지질렀거나, 아니면 폭도들의 강포에 겁이 나서 그랬을 것이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아론의 동료이던 홀이 백성들의 그런 요구를 반대하다가 백성들의 습격을 받아 돌에 맞아 죽자(그래서 그 후의 기록에는 홀이 영영 등장하지 않는다). 아론이 당황하여 거기에 응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아론을 제 멋대로 하도록 버려 두셨던 것이다.[1] 그것은 아무리 선한 인간이라도 그 마음대로 하도록 하나님께서 버려 두면 어떻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며, 또한 우리는 사람의 말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2] 그 당시 아론은 하나님의 명으로 대제사장이라는 중요 직분에 임명되기로 예정돼 있었다. 아론은 비록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지언정, 산에서 있는 모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아론에게 주어질 영예로 인하여 그가 분수 이상 높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탄의 사자가 그를 시험에 빠지게 하도록 버려 두셨다.
그리하여 아론이 나중에 그 일을 기억함으로써 항상 겸손해지게 하였던 것이다. 금 송아지에게 단을 쌓기까지 수치스런 죄를 일단 범한 자라면, 하나님의 재단에 시중드는 영광을 차지하기에는 자기가 전혀 무자격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아낌없는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그일을 맡았다고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이리하여 교만과 자랑은 영원토록 침묵을 지키게 되었고, 나쁜 원인에서 좋은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율법은, 죄가 있으므로 먼저 자기들의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는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모세의 중재(출애굽기 32:7-14)
Ⅰ. 하나님은 모세가 없는 동안에 진중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 있는지를 모세에게 알려 주신다(7,8절).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일이 추진되자마자 즉시 모세에게 그 일을 알리셔서, 모세를 내려 보내어 미연에 그것을 방지하실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혜롭고도 거룩한 목적이 있어서 일이 절정에 달하도록 버려 두신 후에 보내시어 그 일을 징벌케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원하시기만 하면 죄를 제재할 방법을 아실 뿐 아니라 그 죄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도움이 되게 하는 방법까지도 알고 계시면서도, 죄악이 저질러지도록 버려 두신다고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결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를 관찰해 보자.
1. 그들은 "스스로를 (개역에는 이 말이 없음) 부패케 하였다" 고 했다. 죄는 죄인 자신의 부패나 타락이다. 곧 자아 부패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정욕에 끌려 유혹받는다.2.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명한) 그 길을 떠났다" 고 했다. 죄란 의무의 길을 떠나 곁길로 들어서는 탈선이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대로 모든 것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은 시작을 매우 잘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은 길을 잃어 버리고 곁길로 들어선 것이다.
3. 그들은 그 길을 속히 떠났다. 즉 율법을 받고서 그대로 쫓을 것을 약속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즉시 떠났다. 또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기사를 베푸시고 앞으로 더 큰 일을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인자한 뜻을 선포하신 직후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즉시 잊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계약을 갱신한 직후에나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자비를 받은 직후에 다시금 죄악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매우 노엽게 만드는 일이다.
4.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저지른 행위를 모세에게 소상히 말씀하셨다. "저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이에 예배를 드렸느니라" 고 하셨다. 우리를 다스리는 세상 왕들의 눈에는 감추어진 죄악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은 세상의 왕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므로, 이 세상의 어떤 죄악도 하나님께 숨겨진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같이 보시고서도 침묵을 지키시지만, 우리가 이 세상 악행의 천분의 일이라도 안다면 우리는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5. 하나님은 모세에게 "저들은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로다" 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당신의 관계를 부인하신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마치, "나는 저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노라. 다시는 저들을 내 백성이라고 하거나 내가 저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고 말씀하신 것 같다.
스스로 부패한 자들은 자신들을 수치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저들과 또 저들에게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수치스럽게 여기시게 되는 것이다.
6.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빨리 내려 보내셨다. "가라, 너는 내려가라" 고 하셨다. 모세는 백성들에 대한 행정관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조차도 중단해야만 했다. 여호수아 또한 그리해야 했었다(7:10). 만사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다.Ⅱ.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분노를 표명하시고, 그들을 죽여 당신의 정의의 판결을 내리시겠다고 하셨다(9,10절).
1. 하나님은 이 백성들의 본성을 말씀해 주셨다.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 하나님의 율법의 멍에를 메려하지 않는도다. 말하자면 저들은 모순의 영의 지배를 받아 모든 선한 일은 거역하며 악행을 즐기면서 저들을 구제해 줄 온갖 방법을 완강히 거부하는 백성이다" 라고 하셨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됨됨이도 아시며, 우리 생활 속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 영의 기질까지도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그의 심판 과정에서 유의하신다.2.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응분의 벌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즉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당장 그들을 진명하고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리라" 고 하셨다(신 9:14). 그러므로 비단 계약의 축복에서 그들을 제외시킬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쫓아내어 버리시겠다고 하셨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게다가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을 베푸시어 그 진노를 진정하시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그루터기와 같이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죄인을 법대로 처리하셔서, 죄악에 대해서 그들을 즉각적으로 멸하심이 하나님께는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꼭 그같이 행하신다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하거나 불명예를 주는 것은 아니다.
3.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재하지 말라고 권유하셨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진멸하시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모세가 어떤 일을 했는가? 아니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하나님께서 어느 한 민족을 저버리기로 작정하셨을 때는, 이미 멸망이 포고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중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겔 14:14; 렘 15:1).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방식을 따라서, 그들에 대한 당신의 불쾌감이 얼마나 큰지를 표현코자 하셨다. 인간들은 일단 자기가 냉혹히 대하기로 작정한 자에 대해서는 누가 말리든 소용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모세의 중재만이 그들을 멸망에서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기도를 귀중히 여기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리스도의 중보로써만,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과 화해" 하시려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재가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멋 있는 제안을 하셨다. 즉 만약 모세가 이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다시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세 자신의 자손에서 한 민족을 일으켜 세우거나, 아니면 그 즉시로 어떤 수단을 써서든 다른 큰 국가를 그의 휘하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하여도 모세에게는 손실을 입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모세가 편협하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졌더라면,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가문의 출세나 성공보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더 원하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한 한 인간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Ⅲ. 모세는 그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중재하고 나섰다(11-13절). 그는 여호와 그의 하나님께 간원하였다. 설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하나님" 이라고 불리워지기를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모세는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우리의 친구들을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이득을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모세는 이 진퇴양난의 계곡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려고 서 있는 것이다(시 106:23).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대로 하게 하라" 고 말씀하셨을 때, 지혜롭게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암시를 포착했다. 그 말씀은 그가 중재에 나서는 것을 금하시는 것같이 보이나, 실상은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대하여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중재할 용기를 북돋우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 하나님께서는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신다" (사 59:16).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모세의 기도(12절). "맹렬한 진노를 돌이키소서" 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부당하다고 모세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백성들을 불살라 버릴 만큼 맹렬하지는 않기를 바란 것이다. "심판을 거두시고 자비를 베푸소서! 이 화를 돌이키소서. 멸망의 판결을 교화의 판결로 바꾸소서!"2. 모세의 탄원. 그는 열심히 변론을 펴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자기의 기도에 열정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모세는 다음 사실을 하나님께 촉구했다.
(1)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또 이미 그들에게 베푸셨던 위대한 일들, 그리고 그들 위에 베푸셨던 막대한 은총과 기적이다(11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저들은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백성이라" 고 말씀하신 바 있다(7절). 그러나 모세는 다시금 저들을 겸손히 하나님께 되돌린다. "저들은 당신의 백성이오며, 당신은 저들의 여호와와 주인이시니이다. 저는 단지 저들의 종이니이다. 주께서 저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나이다. 저는 오직 주의 손의 도구로소이다. 주께서 하실 수 있는 저들의 구원을 위해 사용되어졌을 뿐이니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비록 그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세웠다고 해서 하나님께 진노하신 바로 그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멸망시킬 정도로 분노할 수는 없다는 이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교화시키는 것 만큼 당연한 일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살해하는 것 만큼 부당한 일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부자 관계가 좋은 탄원의 이유가 되듯이 (저들은 "당신의 백성이니이다"), 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아 온 경험이 또한 그러했다. "비록 저들이 무가치한 자들이요, 애굽에서는 애굽인들의 신들을 섬겼을지라도(수 24:15), 주께서는 저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셨나이다.
저 백성들이 애굽에서 범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저들을 구원하신 것이라면, 그들이 광야에서 그와 똑 같은 죄를 지었으니 주는 그렇게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2) 모세는 하나님 자신의 체면을 역설한다(12절).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리려고 주의 백성을 인도하여 내었다'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친자식처럼 또 책임맡은 위탁물처럼 귀한 존재였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생각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도 멸망해 버리는 길이 있다면, 모세는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여호와여, 애굽인들이 무어라고 이르리이까?" 고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애굽인들의 눈과 인접한 모든 이웃 민족들의 시선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민족의 출발점이 경이로왔으므로, 저들의 나중은 더욱 놀랍게 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토록 기이하게 구원받은 한 민족이 돌연 멸망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뭐라고 말 할 것인가? 특히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해 풀지못할 만큼 깊은 앙심을 품고 있고 애굽인들은 뭐라고 할 것인가? 저들은 이르기를, "하나님은 자기가 시작한 구원을 완성시킬 만큼은 강하지 못하거나 능력이 없으시든지, 변덕이 심하다. 그 하나님의 그 백성을 산으로 끌고간 것은 저들로 하여금 제사지내도록 하고자 함이 아니라, 저들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고 했을 것이다. 저들은 이스라엘이 마땅히 심판 받을 만한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은 생각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화합지 못하며 게다가 저들의 (애굽인들의) 눈으로 꼭 보았으면 하고 바라던 대로 하나님이 행하였으니 이것은 자기들의 승리를 말해 주는 충분한 근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주기도문에서와 같이) 우리들의 첫째번으로 기원해야 하는 일과 동시에, 우리들의 중요한 탄원 대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시 79:9).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렘 14:21; 렘 33:8, 9 참조)
그러나 우리가 만약 이것을 들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망시키셔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서 탄원하고 싶어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즉 "애굽인들이 무어라고 이르리이까?"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가르침이 우리 때문에 모독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모세는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하신 언약 곧 저희의 자손을 번성케 할 것이며 가나안 땅을 저들에게 유업으로 물려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그것도 다른 어떤 더 위대한 명세란 있을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맹세로써 세워진 그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탄원했던 것이다(13절).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우리의 간구의 대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약속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주실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것의 성취를 보증하기 때문이다.
" 주 여호와여! 만일 이스라엘이 멸절되어 버린다면, 이 약속은 어떻게 되리이까? 저들의 불신앙이 그 언약을 무효화할 수밖에 없기를 바라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용기를 가져야 하겠다.
Ⅳ.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사 엄한 판결을 감하시고, 그 백성으로서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화를 내리지 아니하였다" (14절).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처벌하실 계획을 하셨으나, 그들을 멸망시키려고는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 보자.
1. 기도의 능력. 중재자의 겸손하고도 믿음이 있는 간구에는 하나님 자신도 스스로 설복당하고 마신다.2. 가련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기꺼이 베푸시는 용서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인을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죽어야 할 자도 멸망받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다른 한 증거도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중재함을 듣고서도 그들을 용서하시며 형벌을 감해 주시기 때문이다.
모세의 분노(출애굽기 32:15-20)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Ⅰ. 증거의 두 판을 모세에게 맡기심으로써,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한 총애를 보이셨다. 비록 그 돌판은 평범한 것이지만, 아론의 흉패를 장식한 그 모든 값진 보석보다도 훨씬 더 귀중한 것이었다. 에티오피아의 황옥으로도 이에 비할 수 없었다(15,16절).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나 천사들을 시켜서 하지 않고 (아마 그런 것처럼 보인다) 친히 이 석판틀 위에, 곧 "그 판의 양면에" 십계명을 쓰셨으니, 일부는 이 석판에, 또 일부는 다른 석판에 쓰셨다. 그리하여 마치 한 권의 책처럼 포개 놓아 법궤 속에 안치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Ⅱ. 모세와 여호수아 간의 친밀한 관계. 모세가 하나님의 알현실(謁見室)인 구름 속에 있을 동안, 여호수아는 되도록 가까이서 (말하자면) 대기실에서 모세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모세를 기다렸다가 그가 나오면 시중들기 위해서였다.
비록 여호수아가 40일간 순전히 홀로 있었을지라도 (아마 만나를 먹고 지냈을 것이다.) 그는 백성둘처럼 기다림에 지치지 않고, 모세가 내려 오자 그도 함께 따라 내려왔다. 그는 먼저 내려오지 않았다.
본문에 보면, 그들이 이스라엘 진 가운데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17,18절). 비록 모세가 아주 오랫동안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종자인 여호수아와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높이 세우시는 자들은 교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또한 모세는 이스라엘 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축복받은 바울도 역시 자기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들었던, 삼층천에 갔다 온 적이 있다는 것으로 해서, 지상의 교회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여호수아는 군인이었다. 훈련 부대의 사령관이었다. 그런고로 그 소리가 "진중에서 나는 싸움 소리" 가 아닐까 하고 염려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바가 있으므로 그 소리를 더 잘 식별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소리가 "노래하는 소리" 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그 때 백성들이 노래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호수아에게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과오를 드러내는 데 조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잘못이란 너무나도 빨리 알려지게 마련이다.
Ⅲ. 우상 숭배로 인해 모세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분노했다. 그 분노는 극심했으나 정당했다. 모세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금 송아지와 또 그 송아지를 가지고 백성들이 어떤 유희를 하는 것인지를 즉시 알아차렸던 것이다. 또한 모세는 자기가 없는 틈에 저들이 얼마나 즐거워하며, 저들이 자기를 얼마나 쉽사리 잊어버리며 또 자기 자신과 자기의 귀환에 대해 저들이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세는 이와 같은 사실은 마땅히 자기를 모독한 것이라고 나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그의 불만에 대한 털끝 만한 이유도 될 수 없었다. 모세는 저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대한 범죄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치욕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분개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던 산에서 "악이 가득한 이 세상과 교제하기 위하여 내려 왔다" 는 것은, 얼마나 큰 변화인가를 주목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전하고 즐거운 것만 볼 수 있으나, 이 세상에서는 오염된 것과 분통터질 일만 보게 된다.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금 송아지와 춤추는 것을" 보았을 때는 대노하였다.
악한 자들의 악행을 목격하고 거기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온유하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조금도 아니라는 생각을 명심하자. 죄에 대해서 화내는 것만은 "화를 내되 죄짓지 않는 것" 이다(엡 4:26). 그런 분노는 자기들 때문에 내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때문에 내는 것이다. 에배소 교회는 오래 참음으로 유명했지만 "악한 자들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계 2:2).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명분을 위해서, 침착해야 하나 하나님을 위해서 열정을 내어야 한다. 모세는 몹시 분노하여 율법판을 깨드리고 송아지를 불태웠다. 이런 강렬한 분노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자기들은 얼마나 큰 죄를 범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도록 하였다.
만일 모세가 그들의 참회를 진정으로 열망하는 한 나머지 이렇게 격노를 보인 것이 아니라면, 저들은 자기들의 그 같은 죄를 아마 가벼이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판들을 깨뜨린" 것은(19절) 그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기고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산을 내려 오기 전에 저들의 죄를 알고 계셨을지라도, 돌판들을 남겨 두고 내려가라는 명령을 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돌판을 손에 들고 내려가라고 모세에게 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계약 맺으시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가를 그들에게 깨닫게 하려 하심이요, 그 계약을 방해하는 것은 자기들의 죄 뿐 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브라임의 악이 드러났을 때(호세아 7:1 의 표현대로) 그 돌판을 그들의 목전에서 깨뜨리고자(신명기 9:17 대로) 하셨다. 그리하여 저들이 그것을 목격함으로써 더욱 큰 감동을 받고 크게 뉘우쳐서 자기들이 잃어버린 그 축복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저들은 이제 막 발족한 협약을 그같이 악명높게 위배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이미 조인될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져 있었으나 그 협약의 기록문은 찢어지고 말았다.
어느 개인이나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분노의 최대의 표적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율법을 빼앗아 버리는 것임을 명심하자.
이 돌판을 깨뜨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총과 연락(유대)이라는 막대기" 를 부러뜨렸음을 의미한다(슥 11:10, 14). 즉 그 민족을 교회의 울타리 밖으로 내쫓아 버리는 것이다.
혹자는 모세가 돌판들을 깨뜨린 것은 죄를 저지른 것이며, 사람들이 노할 때는 자칫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기는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세의 행동은 감정의 발로라기보다는 정의의 발로로 보인다.
우리는 모세가 그 후(신 9:17) 그 일에 대하여 후회스러이 말하는 일이 없음을 발견한다.
2. 모세는 저들이 자신들을 도와 줄 수 없는 신을 의지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송아지를 불살라 버리고" 녹여서 티끌이 되도록 갈아 버렸다(20). 그리고 나서 온 진영의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도록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모든 사람들에게 마시게 했던 것이다. 모세가 송아지를 가루로 만든 것은 도대체 "우상이란 신이 아니라는 것" (고전 8:4)을, 즉 우상은 무(無)와 다름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거짓 신들은 그들을 숭배하는 자들을 도와 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모세는 송아지 우상이 자기 자신 하나도 구해낼 수 없다는 생각을 여기서 드러내보인 것이다(사 46:1, 2).또한 우상 숭배의 모든 유물은 파괴되어야 하며, 바알이라는 이름 조차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그 가루를 흩어 버렸던 것이다. 금을 갈아서 나오는 줄밥은 값진 것이므로(우리는 그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주의깊게 주워 모은다. 그러나 금송아지를 갈아서 나온 줄밥은 가증스런 것이어서, 증오하면서 산산히 흩어 버려야 했다. 그러므로 은금으로 만든 우상은 두더지와 박쥐들에게 던져졌음이 분명하다(사 2:20; 30:22).
그리하여 에브라임은 이르기를 "이제 내가 더 이상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 하리라.
모세가 이 가루를 저들의 음료수와 섞어 마시게 한 것은 저들이 그 때문에 스스로에게 초래한 저주가 저들의 모든 향락과 혼합되어, 그 향락을 고통으로 바꾸어 버리리라는 것을 의미해 준 것이다. 그 가루는 물처럼 저들의 배 속에 들어가고, 기름처럼 저들의 뼈 속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마음으로(하나님의 율법을) 물러난 자는 자기 고집으로 가득 차리라.
그들은 자기가 빚은 술을 마실 것이니 자업자득이다. 이것이야 말로 실로 "마라의 물" 이었다.
아론을 책망함(출애굽기 32:21-29)
모세는 증거판을 깨뜨리고 송아지를 불사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에 대한 의분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제는 죄인들을 헤아려 계산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리하여 행동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어, 죄악을 처벌하는 일을 영광으로 삼으시는 분이시다.(사 59:18).
Ⅰ. 모세는 먼저 아론부터 시작하였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부터 심문하신 것과 같다. 즉 아담은 제일 먼저 죄를 지은 자가 아니라 죄에 끌려들어간 자일망정, 그가 죄악의 주범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모세는 아론에게 정당한 견책을 했다(21절). 그러나 그 범죄의 장본인들처럼(27절) 아론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지는 않았다. 공공연히 죄 중으로 뛰어 든 자들과 잘못하여 얼떨결에 그런 범죄를 저지른 자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또한 자기들을 피해 달아나는 잘못을 좇아가서 범하는 자들과, 자신들은 도망하려 하나 잘못하여 악에 빠지는 자들 사이에는 역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갈 6:1 참조).그러나 아론이 지은 죄가 그를 목베이게 하기에는 마땅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신명기 9장 20절에 나타난 대로, 만약 모세가 그를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 중재 기도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충분히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론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를 멸망에서 구출한 모세는 이제 여기서 아론이 회개하도록 훈계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일을 아론이 생각해 보도록 했던 것이다.
(1) 그가 이 백성에게 행한 일은 무엇인가? "너는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도다" 고 했다. 우상 숭배의 죄는 크나 큰 죄다. 너무나 그 죄가 커서 그 죄가 받을 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백성들이 먼저 선동하여 아론이 그런 죄악에 빠지도록 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론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한 행정관이었다. 그는 마땅히 그런죄를 막아야 했었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 일을 방조하고 교사했으므로, 실상은 그가 백성을 죄에 빠지도록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론이 저들의 마음을 강팍케 하고 그 죄를 저지르도록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통치자들이 백성들의 범죄 행위에 비위를 맞추고, 마땅히 이 공포를 느껴야 할 일을 하도록 장려했다는 생각은 충격적인 일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즉 유혹하였건 조장했건 간에, 남을 범죄케 하는 자는 자기들의 생각 이상으로 큰 화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남을 죄에 끌어 넣거나 또 남들 때문에 죄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레 19:17). 죄에 동조하는 자들은 그 상대방을 파멸하도록 돕는 자가 되며, 실로 서로를 멸망케 하는 자들이 된다.
(2) 그가 무엇에 이끌리었는가?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했느뇨?" 라고 했다. 모세는 아론이 그 같은 짓을 하게끔 마음이 동요된 데에는 필경 어떤 특별한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를 해명해 보라고 한 것이다. 모세는 아론의 마음이 정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어떻게 하였느뇨? 저들이 너를 교묘하게 꾀어냈는가? 감언이설로 네가 죄를 짓도록 만들었는가? 그리하여 너는 백성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네 하나님을 감히 분노케 했는가? 저들의 끈덕짐에 설득되고 말았는가? 그래, 너는 백성들의 소란의 와중에 휩쓸릴 만큼 그렇게 결의가 모자랐단 말인가? 저들이 너를 돌로 쳐 죽인다고 위협하더냐? 너는 하나님께 저들에게 진노하시리라는 경고를 줌으로써, 백성들이 너를 위협하는 것 이상 너는 저들을 더욱 위협해 줄 수 없었더란 말인가?"
우리는 인간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 때문에 결코 죄에 빠져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 때문에 우리가 죄에 빠졌다고 변명하더라도, 우리는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죄에 빠지도록 우리를 단지 유혹할 수 있을 뿐이다. 결코 강제로 죄에 빠지도록 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죄짓도록) 우리를 해칠 수 없다.
2. 아론은 자신을 위해 하찮은 변명을 대었다. 우리는 아론이 나중에라도 자기 죄에 대한 지금의 참회보다는 더 깊이 뉘우쳤으면 하고 바란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론이 말한 것을 보면, 회개에 대한 말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의로운 자는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마 급속히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1) 아론은 모세의 노여움만 풀려고 애썼다. 그러나 실은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풀려고 애써야 했었던 것이다. "내 주(모세)여, 노하지 마소서" 라고 했다(22절).
(2) 그는 모든 허물을 백성에게 돌렸다. "이 백성이 악하나이다. 그들이 이리기를 '우리를 위하여 신을 만들라' 하였나이다" 라고 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죄책을 남에게 전가시키려는 것이 보통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했듯이,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다. 아담과 하와도 그렇게 행했던 것이다. 죄라는 것은 아무도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 놈인 것이다.
아론은 당시 수석 행정관이었고 백성을 다스릴 권력일 지니는 있었다. 그러나 백성이 자기를 휘어잡았다고 호소한다. 그들을 다스릴 권세를 가진 자의 결의가 너무나 약하여 오히려 그들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3) 만약 아론이 "이 모세는 어찌 되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고 하는 백성들의 간악한 억측을 부질없이 되풀이 한 것은 모세가 산 위에서 너무 오래 지체하였기 때문에 결국 모세 자신이 그 죄의 공범자라는 것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다행한 일이다.
(4) 아론은, 마치 그가 우선 필요한 임시 변통물을 만들고, 그 다음에 가서 그 거둔 금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알아 보고자 하여, 저들이 가지고 있는 "금을 빼어 내라" 고 하는 명령만 내렸다는 듯이 말함으로써, 그 범죄에 자신이 가담한 사실을 가볍게 숨기려 했다.
또 그는 금을 불 속에 던져 넣었더니, 우연히 또는 어떤 황금의 마술에 의해서(유대인 기자들이 상상하듯이) 그런 모양의 물체가 나오더라고 유치하게 둘러댔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조각하여 만들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24절). 그러나 모세는 아론이 비록 여기서 그사실을 스스로 고백하려하지 않지만, 아론이 무엇을 했는가를 모든 세대에게 전해 주고 있다(4절).
자기 죄를 은폐시키려 하는 자는 번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명심하자. 조만간 그 죄는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아론이 자신을 위해 말한 모든 것이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의 변명은 자기의 범죄를 더 심화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우대를 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죄악이 많으나, 은혜는 더욱 충만하기 때문이다.
Ⅱ. 그 다음으로 백성이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되었다. 모세가 다가오자, 저들의 유흥은 즉시 깨어지고 저들의 춤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아론을 못살게 하여 자기들의 죄에 공범으로 만들었던 자들은 감히 모세의 얼굴을 바로 보지도 못하였고, 우상과 그 숭배자들에게 대한 모세의 가혹한 처벌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용감히 감행한 죄악이라도 밝히 드러내어 경멸당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니, 그때에는 그 무례한 범행자들이 스스로 당혹에 사로잡혀 슬금슬금 꽁무니를 뺄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자.
심판의 보좌 위에 앉으신 왕께 그의 눈길로 모든 악을 쫓아버리는 도다.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방자하였다(영문:벌거 벗었다)" 고 했다(25절). 그것은, 저들이 자기들의 귀고리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이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저들이 자기들의 순결을 잃었고 그들의 가장 위대한 은인을 배신하고 그들의 의로우신 여호와께 파렴치한 반역을 했다는 비난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영광을 소의 모습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저들에게 큰 수치요 영원토록 남을 오점이었던 것이다. 다른 족속들은 자기들이 자기들의 거짓 신들에게 진실하다는 것을 자랑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진실한 하나님에게 거짓되이 행했다는 것은 당연히 부끄러움이다. 이리하여 저들은" 방자하게 되었고," 자기들의 장신구를 빼앗기고 말았으며,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갑옷도 빼앗기고 모욕을 당하게 되었다.그와 같이 우리의 시조도 범죄하였을 때 "벌거벗어 수치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실로 가장 큰 모독을 당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여기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려했다. 모세는 이 점을 알고 염려를 했던 것이다. 모세는 "저들이 방자한 것을 보았다" 고 했다.
2. 모세는 죄를 은폐하거나 위장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정벌해서 만인 앞에 고발함으로써 이러한 치욕을 씻어버릴 수 있는 방도를 취했다. 자기들에게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었다" 는 비난이 들릴 때마다, 그들은 자기들을 비난하는 자들에 응수하여서 비록 그때 거기서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 사실일지언정, 자기들은 거기에 대한 정의의 판결을 가했노라고, 이사실을 내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정부(政府)는 죄를 용인하지 않았다. 또한 죄인들을 처벌하지 않은채 놓아주는 것을 묵인하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기는 했지만, 거기에 대한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같이 하여 악을 제거할지니라" 고 하셨다(신 13:5).
(1) 누가 원수를 갚았는가? 레위 자손들이 행했던 것이다(26,28절).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 자신의 눈으로 직접 행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칼로써 하셨다. 이로써 우상 숭배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부인" 하는 일이므로 "재판관들에게 처벌을 받아야 하는 죄악" 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욥 31:28; 신 13:9).
그 징벌은 자기들의 형제의 칼로 행하여졌다. 그리하여 그 정의의 심판은 이스라엘 민족의 명예에 더 큰 기여를 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 만약 저들이 인간의 손에 잡혀야 한다면, 원수들의 면전에서 도망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래야 그 무죄한 자들에게도 더욱 효과적인 경고가 되어 차후에도 그런 죄를 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레위 자손들에게는 그들의 이웃을 살해하는 불쾌하고도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 맡겨져야 했다. 이것은, 레위인들이 그 범죄를 방지하기 위하여 보다 일찍이 나타나지 아니했고, 또 그것을 하지 말라고 경고도 하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레위인들에게 내려진 형벌이기도 했다. 레위인들만이 처형을 실행했다. 그것은, 그 전염병에 물들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지파보다 그들 지파에게 더 많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거들의 우두머리 아론은 그렇게 깊이 개입되었는데, 저들이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장한 일이었을 것이다.
[1] 레위 지파는 어떻게 그 일에 대한 부름을 받았는가?
" 모세가 진문(陣門)에 섰다" 고 했다. 곧 재판정에 섰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는 "군기를 세웠다" (사 13:2). 말하자면 진리를 위해 싸울 하나님의 군병을 모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포고했다. "여호와의 편에 선 자가 누구인가?" 우상 숭배자들은 그 금송아지를 그들의 깃발로 세웠다. 그리고 모세는 그들에게 대항하여 자기의 깃발을 세웠던 것이다. 이제 모세는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았고" (사 59:17), 금송아지에 반대하고 하나님 편으로 나아올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예후처럼 외치지는 않았다. 예후는 "내가 받은 모욕을 복수하기 위하여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고 외쳤다(왕하 9:32). 모세는 "누가 여호와의 편이 되겠는가?" 고 외쳤던 것이다. 모세가 "행악자를 칠" 사람들을 (시 94:16) 채용한 것은 하나님의 명분을 위해서 였다.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두 개의 대사업이 있다. 모든 사람의 자녀들은 이쪽 편이거나 혹은 저쪽 편에 가담해 있다. 죄와 악을 경영하는 사업은 악마의 것이고, 모든 악인들이 그편에 속한다. 그러나 진리와 성결을 경영하는 사업은 하나님의 사업이요, 모든 신앙의 백성들이 가담해 있는 편이다. 여기에 중립이란 허용되지 않는다.
둘째로, 여호아의 편에 가담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우리가 대답해야 할 관심사이다.
세째로, 하나님의 편에 속한 사람들은 비교적 소수이다. 게다가 종종 실제 보다도 더 적게 보이는 수가 있다.
네째로, 때때로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증인이나 병사나 또는 중재자로 나서서 당신의 편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하신다.
[2] 그들은 이 직분을 어떻게 수행하라는 위임을 받았는가? "각자 그의 형제를 살해하라" 고 했다(27절). 즉 "너희가 아는 바대로 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데에 활약한 모든 사람들을, 설령 그들이 너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거나 가장 친한 친구일지라도 그들을 모두 죽여라" 는 것이다.
우상 제조와 그 숭배의 죄는 공공연히 범해졌다. 그러므로 레위족들은 그들의 친지들 중 누가 거기에 개입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자들을 살해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지시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또 그 죄인들의 대다수가 그 범행의 처결을 맡은 레위족의 어떤 사람에게 알려졌었거나, 누군가가 그것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 밖 길거리에서 두루 발견되는 사람들만 죽이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자기들이 행한 일을 부끄러워하여 천막 안으로 물러나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계속하는 자들, 그리고 자기들이 범한 가증한 짓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징표가 찍혀 있다(렘 8:12).
그러나 어떻게 감히 레위족들은 저들의 송아지를 불태움으로 해서 성이 날대로 나있던 그 많은 자들과 대결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설명은 어렵지 않다. 죄 의식은 범죄자들의 기를 죽게 했고, 하나님의 주신 사명은 그 수행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그들에게 활기를 준 것은, 모세가 "오늘날 너희들이 여호와께 헌신하였느니라. 그가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고 말해 주었고, 그 말은 그들이 지금 승전을 눈 앞에 둔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또한 그 말은 만약 이 기회를 통하여 자신들을 밝히 드러내기만 하면, 하나님과 그의 일을 위해 자기들을 성별한 일이 될 것이며, 자기들의 지파에게 대한 영원한 영예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아께 헌신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별하실 것이다. 그 위무를 다하는 사람은 존귀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뚜렷한 봉사를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축복을 내리실 것이다.
또 거기에는 레위 지파에게 주는 축복의 말이 있었다. 모세는 "너희는 여호와께 헌신하라. 그리하여 너희는 축복받을 자격을 얻을 것이니라" 고 말했다. 레위족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도우라고 했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이 희생물 제물을 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거룩한 일에 봉사할 사람들은 신실하고 성실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신앙을 위한 뜨거운 양심과 담대한 용기가 또한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회자들은 "분노를 버려야" 하며, 자기들의 가장 가깝고 친한 친척들 보다도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와 그의 사업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보다 우리의 친척들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합당치 않다" (마 10:37). 레위족들의 열심이 얼마나 칭찬받았는가를 보라(신 33:9).
(2) 누가 보복을 받았는가? "그 날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고 했다(28절). 아마 이들은 죄지은 많은 사람에 비해서는 적은 수이리라. 그러나 이들은 그 반역자의 두목들이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 본보기가 되어야 했던 자들이었다. 아침에는 노래를 부르고 춤추던 자들이 밤이 되기도 전에 동족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가 죄 가운데서 안심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에게 불원간 떨어질 하나님의 심판이 주는 변화이다. 손으로 벽에 씌어진 글씨에 의해서 벨사살왕이 심판을 받았던 것과 같다. 우리를 경고하기 위하여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고전 10:7).
사생 결단의 중재 기도(출애굽기 32:30-35)
Ⅰ. 백성에 대하여는 회개를 요구한다(30절).
1. 어떤 자들은 죽임을 당했는데도 또 어떤 자들은 사형을 면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착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모세는 생존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은 죽음을 면하였을지라도, 너희가(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았으면 너희 모두가 마찬가지로 멸망할 것이니라."또한 모세는 그들이 자기들의 죄 자체를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큰 죄" 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은 죽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큰 범죄는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자기들이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게 하려고, 모세는 그들 모두에게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고 말했다.
교역자들의 할 일은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죄를 알려 주는 것이요,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너희는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한 너희는 파멸이다. 구원주가 계시지 않는 한 영원한 파멸이니라. 그것은 큰 죄이다. 그러므로 크게 슬퍼하라. 그 죄가 너희를 큰 위험 속에 빠뜨렸기 때문이니라."
모세는 그들의 죄가 매우 크다는 것을 깊이 깨우쳐 주기 위해, 그 죄로 인하여 생긴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불화를 다시 화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암시해 준다.
(1) 모세가 직접 일부러 "여호와께 올라가서," 율법을 받기 위하여 했던 것처럼 오랜 기간의 엄숙한 대기를 하지 않는 한, 화해는 될 수 없다고 했다.
(2) 또한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신다고 해도, 그것은 우연적인 것이었다. 그것을 기대하기란 극히 어렵다고 했다. 이것은 죄 속에서 큰 화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저들을 속죄하는 일을 떠맡았던 모세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기의 동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올라가야" 했다. 그 죄의 악성(惡性)은 용서를 위해 치른 값에 나타나 있다.
2. 그러나 (그들이 "큰 죄를 범했다" 고 하는 말 들었지만)그 때에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저들에게 진정한 애정을 지니고 있는 그 모세가 그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여호와께로 올라가리라" 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백성에게는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위로는 회개가 있어야 온다. 먼저 상처를 입고, 다음에 치료가 온다. 먼저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가 큼을 보여주고 그리고 나서 자비를 바랄 희망을 준다.
" 모세는" 죄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우연(개연성)에 불과할지라도, "여호와께로 올라갈 것이다."
대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이보다는 더 큰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올라갔다. 그는 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 계셨었고, 그의 모든 뜻을 완전히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 많은 간청자 우리로서는 절대적인 약속이 아니라, 우연에 속한 것이기는 하더라도 특별한 자비를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용기를 받는다. "너희가 혹시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다른 사람을 위한 우리의 기도 중에서, 우리는 그것이 비록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를 주실런지 의문" 이라 할지라도(딤후 2:25) 우리는 남을 위해 하나님께 겸손하고 열심으로 간구해야 한다.
Ⅱ. 모세는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중재에 나섰다.
1. 모세의 청원은 얼마나 감동적이었는가? "모세는 여호와께 돌아갔다." 그것은 장막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더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문제에 관하여는 더 이상의 의논이 없다.이렇게 인간의 죄와 과실들은 그들의 친구들과 교역자들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주며, 또한 그것은 불쾌한 일이요,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일이요, 그들이 즐겨하는 일을 크게 훼방하는 그런 일거리를 준다. 모세는 이 청원에서 다음의 사실을 밝혔다.
(1) 백성들의 죄에 대한 그의 큰 증오심이다(31절). 그는 자기가 그 죄로 인하여 무서워 위축당한 사람처럼 말한다. "오! 이 백성이 큰 죄를 범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먼저 모세에게 알려 주셨었다(7절). 그런데 지금은 그가 애통함으로 하나님께 그 일을 아뢰었다. 그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불리울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모세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 백성" 이라고 했다. 곧 이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의 백성은 자기들을 위하여 황금신을 만들었던 것이다. 황금으로 우리의 신을 삼는다면 황금 우상을 자기들의 희망으로 삼고 거기에 그들의 마음을 쏟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큰 죄이다. 그는 죄를 변명하거나 가볍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판결을 내렸던 그 죄를 이제는 하나님께 죄의 고백으로 말한 것이다. "그들이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라고 했다. 또 그는 변명하러 온 것이 아니라 속죄를 구하러 왔다. "주여, 죄가 중대하오니 용서하소서" 라고 했다(시 25:11).
(2) 그는 그 백성들의 행복을 간절히 빌었다(32절). "그러나 아직도 무한하신 주의 자비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그 죄가 큰 것은 아니니이다. 그러므로 합의하시면 사하옵소서" 라고 했다. 여기서 모세는 무슨 말을 했는가? 이것은 무뚝뚝한 표현이다. "합의하시면(If thou wilt) 사하옵소서. 나는 더 이상 원치 않습니다. 합의하시면 주는 찬양받으실 것이요, 나는 기뻐할 것이요, 나의 중재에 대하여 충분한 응답을 받으리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지기의 말과 같다. 즉 포도원지기는 "만일 실과가 열면" 이라고 했다(눅 13:9). 또 "만약 주께서 용서하시면" 하는 말은, "오! 주는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는 뜻이다. 즉 "만일 네가 알았더라면" 하는 말이다. "오! 또한 주는 알게 되리이다" 와 같은 뜻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사오면, 즉 이미 처형의 결정을 내렸다면,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나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한 처벌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면(고후 2:6), 그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우소서" 라고 했다. 즉 그들이 끊어져야 한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끊어지게 하시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소서. 만약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해야 한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멸망되기를 바라나이다. 그리하여 나 혼자 살아서 그 약속의 땅을 소유하게 하지 마소서."
이 표현은 에스겔서 13장 9절의 빛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다. 즉 거기에는 이 말이 거짓 예언자들을 위협하는 말로 쓰인다.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 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 일에 나서지만 않는다면 그를 "큰 나라" 가 되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10절). 그러나 모세는 말한다. "아닙니다. 나는 나의 이름과 가족이 이스라엘의 멸망 위에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차라리 그들과 함께 몰락하기를 택하겠습니다. 내가 그들의 파멸을 막지 못한다면, 내가 그것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5). 생존자 중에 나의 이름을 기록하지 마소서(사 4:3). 또 생명을 보전하기로 구별한 자 중의 하나가 되지 말게 하소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게라도 하소서" 라고 했다. 이것은 그 백성에 대한 그의 따뜻한 애정을 표현해 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며(요 10:11), 나의 백성의 허물을 인하여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 했던 (사 53:8; 단 9:26) 선한 목자(예수님)의 한 모형이 되었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공적인 신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적인 자세를 보여 준 모범이었다. 모든 사적인 이익은 공동체의 이익과 복리에 종속되어야 한다. 세상에 있는 우리와 우리의 가족이 어떻게 되는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이득이 되고 이스라엘에겐 평화가 오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모세는 이렇게 끈덕지게 용서를 조르면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 모세는 (" 만약 주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주는 불의하고 무자비하나이다" 라고)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았다. 그것과는 정반대이다.
모세는 "그렇지 않으려면, 나를 이스라엘과 함께 죽게 하소서. 그리하여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했다.
2. 그의 청원의 효력은 얼마나 크게 미쳤는가를 관찰하여 보자.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대로 모세를 처리하시지 않으셨다.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적인 불순종으로 인하여 자기들의 이름이 생명책안에 기록되었던 그 영광을 빼앗긴 사람 외에는 어느 누구의 이름도 그의 책에서 지우려 하지 않으신다(33절). 범죄한 사람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결백한 자가 죄책을 지고 죽을 수는 없다. 그 백성들이 모두가 통째로 멸망하지 아니하고, 죄와 관련된 자만 죽게 된다는 자비를 암시해 준다.
이와 같이 모세는 점차적으로 지반을 굳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께서 그 백성과 화해하시려 한다는 절대적 확신을 모세에게 주지는 않으셨다. 만약 용서의 위안을 너무나 쉽게 받게 되면, 그런 죄를 또다시 범하는 데에 담대해지고 죄의 벌에 대한 충분한 의식이 생기지 않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죄의 뉘우침이 좀 더 깊이 새겨지게 하기 위하여, 위로가 잠시 보류되었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들의 위대한 중재자 모세의 신앙과 열심을 시험코자 하셨다. 모세의 청원에 대한 응답을 계속해서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 땅, 곧 가나안 땅을 주는 자비를 베풀겠다고 계속 약속하셨다(34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사엘이 하나님께 합당치는 않지만 모세에게 그들을 인도하라고 돌려 보내시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일반적인 일을 맡고 있는 몇몇 피조된 천사들을 그들 앞에 보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일반적인 길을 벗어나서는 저들의 장래를 위해 어떠한 것도, 아무런 특별한 일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모세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저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받는다(33:14, 17).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모세가 약속받은 전부였다.
(2)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이후에 다른 죄를 지어 그들을 벌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이 죄를 기억하시노라고 경고하셨다.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다음 번에 내가 막대기를 손에 들 때에는 이것 때문에 그들에게 매 한 대를 더할 것이니라."
유대인들은 이 사건에 근거를 두고 금 송아지 가루 한 온스 안에 벌이 내려진 것 외에는, 그 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벌이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자들의 생각이 성서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금송아지를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분노케 하지만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많은 희생물들을 가져오게 하고 여러 가지 의식과 제도를 줌으로써 그들의 짐을 무겁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스데반은 말하기를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고, 그 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라고 했다(행 7:41-42). 그리하여 그 백성들이 빠진 바 우상 숭배 죄에 대한 이상한 중독성은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한 데 대한 공정한 심판이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비로소 해방된 그런 심판이었다(롬 1:23-25 참조).
죄값으로 당장 죽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이후에 언젠가 계산하기 위하여 잠시 보류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벌은 서서히 다가오나 분명히 찾아온다.
당분간 "하나님께서 백성을 치셨다" 고 했다(35절). 그들은 아마 페스트나 그 밖의 어떤 전염병에 걸렸을 것이다. 그 질병은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요, 장차 나타날 더 큰 진노의 증거였다.
아론이 그 송아지를 만들었지만, 여기서는 백성들이 만든 것이라고 말해졌다.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숭배했기 때문이다. Deos gui rogat, ille facit-신들을 찾는 자가 그것들을 만든다. 역병에 걸린 자는 아론이 아니라, 백성들이었다. 아론의 죄는 의지 박약에서 온 죄였고, 백성들의 죄는 고의적인 죄였다.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우리에게는 불분명하나, 하나님께는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사실대로 내려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리하여 모세는 집행유예와 형벌의 완화를 성취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를 완전히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완성케 하는 데는 모세의 율법이 무능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로 보류되었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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