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출애굽기 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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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분향하는 단(출애굽기 30:1-10)

Ⅰ. 향단에 관해 내리신 명령은 다음과 같다.

1. 향단은 목제로 싸서 만들되, 금 곧 정금으로 만들고, 높이는 약 1야드, 길이와 폭은 1/2 야드로 만들라고 했다. 그 네 귀에는 뿔을 달고 금테를 두르고, 금고리와 채를 달아 운반 때에 편리하게 하라고 했다(1-5절).

이 제단에는 재를 비릴 수 있는 화상(火床)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향을 태울 때에는 금 향로에 숯을 담아서 제단 위에 놓고 그 향로 안에서 향을 사르고, 그 후에는 제단 위에 재나 숯이 떨어지지 않도록 향로와 숯을 모두 치워 버렸다.

에스겔의 성전 안에 있는 향단의 칫수는 두 배이고(겔 41:22), 거기서는 "나무 제단" 이라고 불리우며 금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것은 복음 시대에 있어서는 영적 향을 드려야 하며, 예배 의식도 평범하게 되고 하나님의 예식이 확대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곳에서도 분향하라" 고 했기 때문이다(말 1:11).

2. 향단은 휘장 앞에, 곧 간막이 휘장밖에 놓으라 했다. 그러나 속죄소 앞에 놓는 것이다. 속죄소는 휘장 안에 있었다(6절). 비록 그 단에서 일하는 자는 휘장이 가로 막혀 속죄소를 볼 수 없었을 지라도 그는 그 쪽을 향해 바라보아야 했고, 분향을 그 쪽으로 향해 해야 했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는 축복의 속죄소 곧 은혜의 보좌를 바라볼 수 없으나(그것은 하나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 앞을 보지 못하게 하며, 그 위를 구름으로 덮으시는 그러한 영광의 보좌이므로) 우리는 믿음의 기도에 의하여 그 보좌 앞에 서야 하며, 그 보좌를 향해 기도하고 쳐다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는 것이다.

3. 아론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매회 약 반 파운드 가량의 향기로운 향을 태워야 했다. 이것은 매일 놋 제단 위에서 태워지는 고기의 악취를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행하여지는 것이며, 또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신다는 사실과, 그들이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지닐 즐거움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7,8절).

놋 제단 위에 드려지는 제사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죄가 속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제사를 드림으로써 행한 올바른 행위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품는 두 가지 큰 관심은 죄책의 면제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4. 향단 위에는 향 이외의 어떤 것도 바쳐질 수 없으며, 또한 향이라도 지정된 향 이외의 것은 드릴 수가 없었다(9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지정한 명령에 따라서 드려진 예배만 받으시기 원하신다. 그 이외의 방법으로 드리는 예배는 금하셨다.

5. 이 단은 매년 한 번 씩 속죄일에 드려지는 속죄 제물의 피를 "그 단의 뿔들" 위에 뿌려서 깨끗하게 되어야 했다(10절; 레 16:18, 19 참조).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나왔을 때에도, 그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이 의식을 행하라고 했다. 이것은 이 단에서 의식을 행하는 제사장들의 죄와 제사장들에 의해서 예배드리는 백성의 죄가 그 단을 불결하게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단은 속죄의 피로 씻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Ⅱ. 이 향단은 다음을 상징해 준다.

1. 그리스도의 중보: 장막 뜰에 있는 놋 제단은 이 세상에서 죽으실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성소의 금 제단은 그의 대속에 의하여 하늘에서 드려지는 그리스도의 중재를 상징한다.

이 단은 속죄소 앞에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시요(요 2:1), 그의 중재하심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아름다운 향기이다.

이 단에는 왕관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중재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여! 내가 원하나이다" (요 17:24).

2. 성도들의 헌신: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향과 같다고 말씀했다(시 141:2). 분향의 연기가 위로 올라가듯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열망도 거룩한 사랑의 불과 경건한 애정의 불길로 타올라 기도 속에서 올라가야만 한다. 제사장이 분향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기도하고 있었다(눅 1:10). 이것은, 기도야 말로 진정한 향품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향은 매일 바쳐졌고, 그것은 영원히 타오르는 향이었다(8절).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매일 최소한 아침 저녁으로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며, 빼먹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분향 때에는 그와 동시에 등불도 켜 놓았다. 이것은 성경을 읽는 것(성경은 우리의 빛이요 등잔이다)이 우리의 일상 활동의 한 부분이며, 또 그것이 우리의 기도와 찬송에 항상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을 건낼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듣기도 해야 하며,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과 우리의 친교가 온전해진다.

거룩한 영혼들의 헌신은 하나님께서 아주 기뻐하시는 바이며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것이다. 성도들의 기도는 아름다운 향기에 비유되고 있다(계 5:8). 그러나 그 기도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에 첨가하시는 그 향품 때문이다(계 8:3).

또한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했을지라도 거기에는 죄가 깃들어 있으니, 그것을 속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뿐 아니라 만약 우리의 심령과 생활이 거룩하지 않다면, "향품조차도 가증히 여기시는 바" 가 되며(사 1:13), 그런 분향을 드리는 자도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다" 고 했다(사 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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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전(출애굽기 30:11-16)

혹자는, 위의 본문과 그 이하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17,22,34절)을 보아서 산 위에서 모세에게 연속적 담화로 전달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간격을 두고 모세가 들은 것을 기록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기억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면서 하나님이 전해 주셨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되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을 때에 하셨다.

장막의 봉사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 수효 만큼 위 속전을 백성들에게 부과하라는 명령이 모세에게 떨어졌다. 모세는 백성들의 수효를 계산해 볼 때에, 이 속전을 부과해야 했다. 혹자는,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를 계산해 본 처음 일이며, 이 때에 장막이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 공과금은 장막 짓는 과업 달성이나 장막에서의 예식 집행을 시작하기 위해 바친 자발적인 헌금의 부족량을 보충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후일에도 비상시 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으며, 백성들이 계수될 때마다 항상 그러했고, 더욱이 다윗왕은 백성 계수 때에 속전을 요구치 않음으로 해서 범죄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유대 저술가들과 그밖에 다른 사람들은 그 세금이 연례적 의무금이 되었으며, 다만 모세가 백성을 계수했을 그 때에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적대자의 감정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 내셨던 성전세였다(마 17:27). 그러나 그 때에 그리스도는 당신이 면세(免稅)되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보여 주셨던 것이다.

모든 도성에 해마다 이 세를 거두어들일 사람들이 임명되었다.

1. 이 때에 지불되는 세금액은 "반세겔" 이었다(1세겔은 약 11.4g). 부자라고 해서 더 내거나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라고 했다(15절). 이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의 영혼이 다같이 귀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구별하는 분이 아님" 을 나타낸다(행 10:34; 욥 34:19). 다른 제사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능력에 따라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의 속전" 인 까닭에 모든 자에게 균등해야 했다. 부자도 가난한 자에게 만큼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가난한 자도 부자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영접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같이 성전 봉사의 경비에 기여해야 한다. 부자나 가난한 자가 다같이 성전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규례 안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어울려 산다." "주는 그들을 지은 자이시며," 주 그리스도는 빈부 양자의 구속주이시기 때문이다(잠 22:2). 유대인들은 "만약 어떤 사람이 성전세를 거절하면, 그 사람은 속죄에 포함되지 못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2. 이 성전세는 "백성들 중에 온역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영혼의 속전" 으로 드려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빼앗아 버렸던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받았음과 그들의 생명이 존속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인내하심의 덕분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자기들의 생명의 은인이신 하나님께 경의를 표했고, 자기들의 죄 때문에 응당 받아야했던 온역을 면제에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3. 바쳐진 돈은 장막 봉사에 쓰라고 했다(16절). 그 돈으로 그들은 희생물과 밀가루, 향품, 포도주, 기름, 연료, 소금, 제사장들의 의복 및 전 회중과 관계된 그 밖의 모든 것을 구입했다. 자기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장막의 혜택을 받는 자들은 그 비용을 기꺼이 바쳐야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중(公衆)예배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는 데 인색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의 제물로 주님을 영예롭게 해야 하며, 하나님 사업에 투자한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돈이 실제로는 "영혼에 대한 속죄" 를 이룰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돈은 그 속죄를 이루시는 분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 속죄의 역사가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는 복음을 보존하기 위한 경비로는 사용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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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 대야(출애굽기 30:17-21)

여기에 나타난 명령은 다음과 같다.

1. 놋 대야 혹은 놋 반(盤), 즉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을 제조하라는 명령이다. 이 놋 대야는 장막 문 가까이에 놓으라 했다(18절). 놋 받침이 대야에서 물꼭지로 흘러내리는 물을 받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제사장들만 사용할 수 있는 대야가 있었으나 지금 우리에게는 유다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이 사용할 수 있는 개방된 우물(슥 13:1) 곧 무진장한 "생수의 샘" 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죄에 오염된 채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인 것이다.

2. 이 놋 대야의 사용법에 관한 명령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집무를 행하러 들어갈 때마다 이 대야에서 손발을 씻어야만 했고, 최소한 매일 아침마다 그러하여야 했다(19:21절). 이런 목적을 위하여 깨끗한 물을 매일 대야에 새로 부어 두었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집에서 아무리 깨끗이 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 대야에서 다시 씻어야 했다. 그러므로 씻으라는 명령이 다시 주어진다(왕상 5:12-14).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 그들이 모든 직무를 수행할 때에 순결함을 보존할 것과 하나님의 성결함에 대해 존경심을 소유하게 하며, 죄의 오염을 두려워 하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처음에 위임을 받을 때에도 씻고 깨끗해져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직무를 행하러 들어갈 때마다 또 씻고 깨끗해져야만 했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곳" 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2) 또한 죄악에 대한 참회를 매일 새로이 하며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영혼의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매일 새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도 매일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우리는 매일 많은 일로 범죄하며 죄악에 물들기 때문이다(요 13:8-19; 약 3:2). 이것이 우리가 엄숙한 규례를 위해 갖추어야 할 준비이다. 곧 "너희의 손들을 깨끗이 하고, 너희의 마음을 성결케 하라."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라" 는 것이다(약 4:8).

다윗 왕도 시편 26편 6절에서 이 율법을 넌즈시 암시하고 있다.

" 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함 속에서 나의 손을 씻고, 주의 단을 두루 다니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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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유와 향(출애굽기 30:22-38)

여기서는 장막의 의식에서 사용되었던 거룩한 관유와 향의 합성법에 관한 지사가 나타나 있다. 이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로터 오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하나님께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1. 거룩한 관유를 만들라고 했다. 그 성분과 분량이 처방되어 있다(23-25절).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물품들이 목적에 가장 적합한 최상품이라는 것만은 확신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것들을 지시했기 때문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secundum artem-기술적으로, 곧 "향을 제조하는 법" 대로 만들라고 했다.

향은 모두 합쳐 거의 50쿼어터 무게였는데, 약 5-6쿼어터의 기름에 붓고 나서 걸러 내면 그 기름은 상당히 향기로운 냄새가 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과 그 안의 모든 비품들에는 이 기름이 뿌려졌다. 제사장들의 성별식에도 그 기름이 사용되었다(26-30절).

이것은 "자손 대대로" 계속하라고 했다(31절).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 자신이 준비한 바로 그 기름이 거의 바벨론 포로 때까지 계속 사용됐다고 한다. 그러나 패트릭(Patrick) 주교는 그 기름이 계속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하며, 여기에 나오는 처방에 따라서 관유의 제조가 반복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솔로몬 왕과 다른 왕들도 그 기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왕상 1:39), 모든 대제사장들은 그 의복의 자락까지 흘러내릴 정도로 많은 양의 이 기름을 받아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이 향 기름의 제조에 대한 기록을 다른 곳에서도 읽을 수 있다(대상 9:30).

그러나 제2의 성전에서는 이 거룩한 기름이 없었다는 데에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패트릭 주교는 본다. 그것은 복음 시대에 있을 성령이라는 더 훌륭한 기름의 한 전조였으며, 복음 시대에서는 그 성유의 필요성을 섭리자 하나님께서 파기하셨으므로-그 성유의 여러 성분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상징한다-그 성유를 제조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장막의 성결함의 탁월성을 보여 주기 위하여, 모양으로나 향기로움에 있어서나 최고도로 아름다운 성유가 장막 안에 놓여졌다. 그리스도의 이름도 "쏟아진 향 기름" 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아 1:3).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운 이름은 "보배로운 기름" 보다 낫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다(전 7:1).

2. 황금 단 위에서 분향되는 향은, 관유를 만들 때 만큼은 귀하고 진귀한 향이 아닐지라도 역시 향기로운 향으로 조제되었다(34,35절). 이것도 1년에 한 번씩 조제되었는데(유대인들은 그렇게 말한다), 매일 1파운드씩, 그러나 속죄일에는 3파운드 이상씩 분향할 만큼 준비된다.

사용할 때에는 잘게 빻아야 했다. 이와 같이 해서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도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희생물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을 때에도, 그 구속주께서 상처를 입으셨으므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분향이 되셨던 것이다.

3. 이 두 가지는 다른 어떤 일상 용도로 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32,33,37절).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친히 세우신 규례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백성들의 심중에 보존시키고자 하셨다.

또한 다윗이 자기 자신을 위해(즉 일상 환락을 위해) 악기를 제조했듯이(암 6:5),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알리시려고 하는 매개물이 되는 것은 어떠한 것도 모독하거나 남용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성물(聖物)을 희롱하는 것,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조롱하거나 경솔히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크나큰 모독이 되는 것이다(마 22:5).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들을 일상 물품처럼 사용하여서는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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