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에 관한 법(출애굽기 23:1-9)
Ⅰ. 재판 과정에 관해준 주의점이 주어져 있다. 그들이 다른 어떤 민족보다 훌륭한 법률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율법에 의거하여 정당한 재판을 운영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증인은 거짓된 소문을 일으키거나 나쁜 평판을 퍼뜨려 무죄한 자가 기소되게 하지 말 것이며, 또 손을 들어 거짓 증언을 선서하여 결백한 자나 죄가 있는 줄 알지 못하는 자가 고소를 당하도록 공모하지 말라는 주의가 환기되어 있다(1절). 한 인간의 생명이 관계되는 사건에서, 그 사람에게 불리한 위증을 하는 것은 정의를 가정하여 모든 사실을 착색시키어 거짓말, 위증, 악의, 도둑질, 살인 등의 온갖 죄악을 내포하는 죄악이다. 거기에는 많은 다른 범죄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단일의 범죄 중에서 아마 이보다 더 많은 죄책을 포함할 수 있는 그러한 죄는 좀처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고의 전반부는 재판 과정에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말에까지도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상과 험담도 일종의 거짓 증거인 것이다. 사람의 평판은 그의 재산이나 생명이 판사나 배심원의 손에 좌우되듯이, 그의 동료들의 처분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이웃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내거나 고의로 퍼뜨리는 자는 특히 누구나가 존경하고자 하는 현명하고도 선한 자들에게 대한 그릇된 평판일 경우에는 저짓 증거와 마찬가지로 정의와 진실과 자비의 법을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된다. 이러한 죄에 대한 더 큰 위해는 피해자의 힘으로도 그런 자는 구제 받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거짓 풍설을 전파하지 말라" 라고 번역한 부분을 난외에는 "거짓 소문을 받아들이지 말라" 고 읽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 있어 때로는 장본인 못지 않게 받아들이는 자가 나쁘기 때문이며, 험구가 피해를 끼치는 것처럼 오히려 그 험구를 묵인함이 더 심한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우리는 종종 거짓된 풍문을 듣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것을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즉 불의를 기뻐하는 자들처럼 즐거이, 기꺼이 그것을 듣지는 말아야 하며 그 풍문의 사실성이 의문시 될 수밖에 없는 한 그것을 신용해서도 아니되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평판을 듣고 있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자비인 것이며, 우리가 남에게서 대접받고자 하는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다.
2. 재판관들은 재판을 외곡하지 말라는 경고가 주어졌다.(1) 그들은 권력이나 다수에 눌려서 그들의 양심에 배치되는 재판을 해서는 아니된다(2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일단(一團)의 재판장들에 의해 재판이 진행되었으며, 판결은 투표의 다수에 따라 정해졌다. 판결에 있어서는 개개의 판사들이 가장 은밀하고 공정한 심문을 하여 자기에게 나타난 대로 선고를 해야 했다. 그러므로 다수 군중들 및 그들의 항의나 존경받는 선배 판사들 곧 라빔(" 다수" 라고 번역된다)의 선고가 자기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각 재판장들은 각자 자기대로 진리에 따라야 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재판석의 연소한 판사가 제일 먼저 투표했는데, 이는 연장자의 권위에 동요받거나 억압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판사들은 어떤 정당에 속한 자나 동료 판사의 지인(知人)들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2절의 전반부(前半部)는 판사들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에게 해당하는 "다수를 쫓아서 악을 행하지 말라" 고 했다. 많은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 악행을 하더라고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넓은 길에 많은 사람이 걸어다니고 붐빈다고 해서 그 길이 더 좋거나 안전한 길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다수자가 무엇을 하는 가를 묻지 말고 우리가 당연히 할 바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동료 종들에게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께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며, 친구를 따라 기꺼이 지옥에 가고자 한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아첨이기 때문이다.
(2) 그렇다고 그들은 가난한 자를 편들어서 판결을 굽혀서도 아니된다(3절). 어떤 사건에서든 의가 승리하고 악은 징계되어야 한다. 사랑과 동정이라는 미명하(美名下)에 정의가 치우쳐지거나 피해가 묵과되서도 아니된다. 가난한 자가 악하여 악행을 저지른 경우에 "그가 곤궁한다는 이유 때문에 우대하는 동정을 베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신 1:16-17).
(3) 그들은 가난한 자에게 편견을 가져 판결을 굽혀서도 아니되지만, 그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자금이 없다고 하여 부당한 피해를 입게 해서도 아니된다. 그런 경우에는, 그 가난한 자들에게 선하고 정직한 이유가 있는 한 재판관들이 스스로 그들의 변호자가 되어야 한다(6절). "너는 가난한 자(者)의 판결을 외곡시키지 말지니라. 그들은 너의 가난한 자들이요 너의 뼈중의 뼈, 즉 너의 가난한 이웃이요 가난한 형재임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불리한 판결을 받도록 해서는 아니된다."
(4) 그들은 나쁜 일을 방조하거나 교사하고자 하는 생각을 두려워해야 했다(7절). "너는 거짓 일을 멀리할지니라. 너는 그런 일을 행하지 말 뿐 아니라, 네가 그일에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며, 또한 그것을 멀리하고 위험스런 함정으로 여겨 두려워해야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너는 네 손으로 무죄하고 의로운 자를 살해하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그런 거짓의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너희가 알 것이지만, 그런 사악한 자를 벌하지 않고 버려두기를 원치 않으신다. 나는 사악한 자를 의롭다 하지 않겠노라." 즉 "나는 타인을 부당하게 정죄한 자를 정죄할 것이다." 재판관들은 모두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5) 그들은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8절). 그들은 뇌물을 받고 동요되어서 부당한 판결을 내리고 무죄한 자를 정죄하며 유죄한 자를 방면하고 사람의 권리를 박탈하는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뇌물을 받아서도 안 된다. 뇌물을 받으면 재판에 악영향을 받아서 자기의 의사와 반대되는 판결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뇌물은 평상시 옳게 판결하던 자의 눈도 어둡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6) 그들은 나그네들을 억압해서는 안 되었다(9절). 비록 외국인이 그들 중에서 토지를 물려받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공정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가졌고 자기들의 재산은 마음대로 향유할 수 있었으며, 그들이 비록 이스라엘 국가에게 대하여 나그네였지만 불의를 당했을 때에는 보상을 받아야 했다. 만약 외국인이 국가 반역죄 이상의 범죄로 재판을 받을 경우에는 본인이 원한다면 배심원의 절반을 외국인으로 할 수 있게끔 규정한 영국법은 영국법이 지니고 있는 형평성과 우수성을 보여 주는 실례가 된다. 이것은 외국인을 압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규정으로 per medietatem linguae 재판이라고 불리운다.
여기서 내세워진 이유는 출애굽기 22장 21절에서와 같이 "너희도 나그네된 적이 있었다" 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서는 "너희는 나그네의 심정을 아느니라" 라고 우아하게 강조되어 있다. 즉 "너희는 너희의 슬픈 경험으로 나그네된 자의 불안과 비애를 다소 알고 해방되었으므로 보다 쉽사리 나그네된 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는 것이다.
Ⅱ. 이웃 사람으로서의 베풀어야 할 친절에 대한 명령이 있다. 우리는 어떤 자에게도, 비록 우리에게 악하게 대한 자에게까지도 필요한 경우라면 기꺼이 온갖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4,5절).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라는 계명은 새로운 계명일 뿐만 아니라 옛 계명이기도 하다(잠 25:21-22).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1. 만약 우리가 원수에게도 이런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면, 비록 여기는 원수만 언급이 되어 있다 할지라도 벗에게는 더 더욱이나 친절히 해야 한다. 왜냐하면 특별한 원한을 품은 자가 아닌 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불친절하게 행동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 만약 우리 원수가 당할 손실과 피해를 방지하지 않는 것이 악행이라면, 하물려 그 원수에게나 그가 가진 소유물에 어떤 피해나 손실을 끼치는 일은 얼마나 큰 악이랴!
3. 만약 이웃의 가축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도로 찾아 주어야 한다면, 우리의 이웃이 만일 죄의 길에서 방황할 경우에 사려 깊은 권고와 가르침을 주어 그들이 스스로가 돌아서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약 5:19-20 참조). 물에 빠진 당나귀를 도와서 끌어올려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면, 죄악에 빠져 있는 영혼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어 이끌어 주도록 더욱 애써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담대하라고 말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 뿐만 아니라 타인의 안녕과 질서도 추구해야 한다(빌 2:4). "네가 말하기를 보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않으시겠느냐?(잠 24:11-12 참조).
거룩한 절기(출애굽기 23:10-19)
Ⅰ. 안식년 제정에 관한 기록이다(10:11 절).
칠년마다 한 해씩 토지는 휴경시켜야 되었다. 그러므로 제 7년 초에는 밭을 갈거나 파종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해 연말에는 아무런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절로 땅에서 산출된 것은 그날 그날 벌어 먹고 사는 자들이 먹도록 거둬들이지 말아야 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 주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들인 땅이 얼마나 풍요한 곳인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서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외국과 무역을 하지도 않고 그 좁은 땅에서 나는 산물로 풍요를 누릴 수 있었고 게다가 매 칠년째의 산물은 남겨둘 수도 있었다.2. 그들의 위대한 지주(地主)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명하시는 대로 그 땅의 소산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무를 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하여서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이해 관계와 밀접히 관련된 문제 속에서 그들의 순종을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후에 우리는, 그들이 이 계명을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잃고 마는 것을 보게 된다(대하 36:21).
3. 그들이 의무를 다하는 동안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서이다. 즉 제 6일의 만나가 이틀 분의 식사를 제공했듯이, 제 6년의 수확은 2년 간의 생계를 지탱시켜 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목숨을 위한 걱정" 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마 6:25). 우리가 만약 우리 사업에 신중하고 부지런하다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날마다의 양식을 공급해 주리라고 신뢰하게 될 것이다.Ⅱ. 주례적인 안식일에 대한 제 4계명이 반복되어 있다(12절). 안식일을 다른 날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듯이, 안식년도 역시 경건히 지켜야 했다. 그러나 매일 매일이 안식일이 되어야 한다는 구실로 안식일의 준수를 철폐하려고 노력한 자들까지 있었다.
Ⅲ. 이방 신들에 대해서는 어떤 모양의 경의도 금지되고 있다(13절). 이 모든 계율과 관계된 한 개괄적 경고가 이 금지 조항에 선행되어 있다. 즉 "내가 네게 이른 이 모든 말들을 삼가 지키라." 우리가 좌로나 우로나 방황하여 길을 잃을 위험 속에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의를 살펴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단순한 부주의로 말미암아 자신을 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크게 조심하고 주의함으로써 자신을 구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우상 숭배는 그들에게 큰 유혹이고 빠지기 쉬운 죄악이었으므로, 그들은 이방신(神)들에 대한 기억까지도 말살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의 모든 미신적 행태의 언어를 폐기하거나 망각해야 했으며, 증오의 말 이외에는 그들에 대한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스도교 학교나 학원에서까지도 지금처럼 그렇게 널리 그리고 친숙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방 신들이나 악마들의 이름과 이야기들이 심지어는 존경심을 가지고 또 때로는 기원하는 마음으로 사용되기를 바랐던 것이 사실이다. 확실히 우리는 이토록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Ⅳ. 하나님이 정한 곳에서 엄숙하고 경건하게 그를 섬기라는 것이 엄격히 요구되어 있다(14-17절).
1.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일 년에 세 번씩 거룩한 집회의 참석해야 했다. 이로써 그들은 서로가 더 잘 알며 서로 사랑하며 고귀하고 특수한 민족으로서의 교제를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2. 그들은 "여호와 앞에" (17절)함께 나아와서 그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향해 자기들을 나타내 보여야 했다. 또한 그들의 모든 즐거움을 지켜 주시는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자기들의 경의를 표해야 했다.
3. 그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표시로써 또 자기들에게 베풀어 준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표시로써 여호와 앞에서 모든 먹고 마시면서 잔치를 가져야 했다. "잔치는 웃음을 위해 베풀어지는 것" 이기 때문이다(전 10:19). 아! 우리는 얼마나 선하신 주인을 섬기는 가! 그분은 "그의 앞에서 기뻐하는 것" 을 우리의 의무로 삼게 하시며, 그를 섬기는 종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도다! 신앙의 엄숙한 예식이 장엄한 잔치라고 하더라도, 결코 신앙이란 음울한 것이라 부르지는 말라.
4. 그들은 "빈 손으로 여호와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었다(15절). 그들은 자기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는 분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로 자발적으로 헌물을 가져와야 했다. 그들이 빈손으로 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듯이, 우리도 빈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러 와서는 안 된다. 우리의 영혼은 은혜, 경건, 신앙적인 사랑, 그를 향한 거룩한 열망, 그리고 우리 자신을 바치려는 헌신의 심정으로 채워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제사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5. 봄과 여름과 가을에 드리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그들에게 회집을 명한 3회의 절기였다. 겨울에는 절기가 없었으니, 그 때에는 여행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수확 기간 중에도 절기가 없었으니, 그 때에는 그들이 일을 하느라고 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헌물을 바치라고 명하시거나 분향으로 그들을 피로하게 하셨다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Ⅴ. 여기서는 나중에 다시 나오는 설명 만큼 상세하지는 않지만, 3절기에 대한 어떤 구체적 지시가 나타나 있다.
1. 유월절에 대하여는, 유교병으로 드리지 말도록 규정되었다. 그 절기에는 누룩이 일체 폐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 그 절기와 희생 제물의 기름도 가증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침까지 남기지 못하도록 했다(18절).2. 첫 수확이 시작되는 때인 오순절에는 "처음 익은 열매 중 첫 것" 을 하나님께 가져와야 했으며, 그것을 경건히 바침으로써 전 수확물이 성별되었다(19절).
3. 소위 수장절(16절)에는 그들이 거두어들인 수확의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했으며, 다음 해의 수확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어떤 이방인들이 미신적 관례로 작물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듯이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아니되었다. 이방인들은 그들의 추수 끝에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아서" 그 다음 해에는 더욱 많은 수확을 산출하도록 그들의 뜰과 밭에 마술적 방식을 써서 그 혼합물을 뿌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그러한 어리석은 관습을 증오해야만 했다.
계율과 약속(출애굽기 23:20-33)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에 전념케 하며 그 의무를 이행할 용기를 얻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은혜가 넘치는 세 가지 약속을 내리신다. 그 약속에는 각각 몇 가지의 긴요한 계율과 거기에 결부된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
Ⅰ. 그들을 인도하고 지키어서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까지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보아! 내가 네 앞에서 한 사자(천사)를 보낼 것이니(20절), 곧 나의 사자(천사)니라" (23절). 혹자는 그 사자는 피조된 천사라고 하는데, 그가 이스라엘의 진영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일을 맡은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돌보시며 하나님은 그의 우두머리 종들 중의 하나를 명하시어 그들에게 시중드는 일과 그들이 아무 것도 궁핍하지 않도록 주선하는 일을 맡기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 곧 계약의 천사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하였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성육하시기 이전에 "태초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 으로서 하나님의 사자이며 교회의 구속주라고도 응당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것은 그의 위대한 사명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가 그 일을 기꺼이 맡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이 가는 길이 처음에는 광야를 통과해야 하고 나중에는 적국을 통과해야 하지만, 이 축복받은 천사가 "그 길에서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 약속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세상의 광야를 통과하는 데 있어서나 지옥 문의 모욕으로부터 보호되어질 것이다.
또한 그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실 것이라는 약속도 주어져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의 추종자들을 위하여 한 처소를 예비하셨으며, 그들이 마침내는 그것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보내신 그분께 신실하기 때문이다.
이 약속과 결부되어 있는 계율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보내실 이 천사의 말을 지키며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21절). "너희는 삼가하여 만사에 있어서 그의 소리를 청종하며, 어떤 일에서든지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가 노엽게 하면 너희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그가 너희의 불의를 벌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그리스도는 단지 그에게 복종하는 자들에게만 구원을 주신다. 명령의 말씀은 "너희는 저를 들으라" 는 것이다(마 17:5). 또 "그가 분부하신 모든 것을 지키라" 는 것이다(마 28:20).2.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필연적 의존은 우리로 하여금 경외케 하며 그를 순종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보호자와 은인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의 방어선이 사라지고 그의 자비의 물줄기가 끊어진다면, 우리는 파멸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말을 주의에 듣고 온갖 가능한 존경과 조심으로 그에게 나아가라."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을 두려워하라.
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신실한 자에게 신실하실 것이며, 그의 뜻을 지지하실 것이다. "나는 너의 대적들에게 대적이 될지라" 고 했다(22절). 이 동맹은 "나는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할 것이며 너를 주저하리라" 고 아브라함과 맺었던 맹약과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동시 방어적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해 관계와 우의를 자기 백성들의 이해 관계와 우의에 즐겨 융합시키려 하시는 것이다.
Ⅱ. 그들이 이제 수 개월 이내에 차지하리라고 바라던(그렇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지마는) 그 가나안 땅에서의 안락한 정착 생활을 누리리라는 것이 약속되었다(24-26절).
1. 이 약속의 조건이 얼마나 온당한지를 살펴보자! 그들은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그들 자신들의 하나님만 섬기면 된다. 그리고 전혀 신이 아니며 존경할 이유가 없는 열국의 신들을 섬기지 않으면 된다. 그들은 열국의 잡신들을 경배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우상 숭배를 거부하려는 그들의 결의, 그리고 타인들의 우상 숭배를 예방시키고자 하는 배려를 취하는 표시로서 우상들은 완전히 파괴해야만 했다. 마치 개종한 마술사들이 자기들의 책을 불사르듯이 해야 한다(행 19:19).2. 이 약속의 항목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보자!
(1) 식량에 대한 위로. 그가 "너의 떡과 물을 축복하리라." 하나님이 축복한 그 떡과 물은 축복받지 못한 자들의 기름진 고기와 포도주 잔치보다 더 신선하고 자양분이 많은 음식이 될 것이다.
(2) 건강을 지키리라고 했다. "나는 병을 없애리라. 곧 병을 예방하거나 제거하리라. 그리하여 열국을 황폐시키는 무서운 전염병이 너희 땅에는 찾아오지 못하도록 하겠다."
(3) 제물의 증가를 약속했다. 그들의 가축은 낙태하거나 새끼를 배지 않는 가축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번영의 한 본보기로 언급된 것이다(욥 21:10).
(4) 그들이 장수하리라 했다. "너의 날 수를 내가 채우리라. 그리하여 너희들의 생애가 불시의 죽음으로 중도에서 끝나지 않으리라." 신앙에는 이와 같이 생명의 약속이 따른다.
Ⅲ. 그들은 그들의 적 곧 그들에게 땅을 내어 주고 쫓겨나야만 될 가나안 땅의 현재 주인들을 정복하고 진압할 것이라고 약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이 일을 실행시키고자 하셨다.
1.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효과적으로(27,28절). 이스라엘의 칼이나 활에 의해서보다는 오히려 가나안인들에게 갑자기 두려움을 줌으로써 하신다. 그들이 비록 완고하여 자진해서 이스라엘인들에게 복종하거나 그들의 땅을 내어 주고 딴 곳으로 퇴거하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너무나 사기가 꺾여서 이스라엘과 대적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파멸되었다. 악마가 가진 권능에는 저들이 대항할 수 일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배하사 그들이 저항할 수 없는 그러한 권능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네 앞에서 두려움을 보낼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들이 곧 도망할 것이다. 수많은 왕벌 떼가 이스라엘 무리를 위해 길을 열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내렸던 재앙에서처럼 그토록 보잘 것 없는 미물로도 자기 백성의 원수를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사자처럼 왕벌들이 가나안인들을 축출할 수가 있다(수 24:12).
2. 갑자기 한꺼번에 행하지 아니하고 조금씩 조금씩 지혜롭고 그리고 점차적으로 하시려 했다(29,30절). 이스라엘인들이 한 민족으로 성장하기까지 가나안인들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듯이, 이스라엘인들이 그 땅 전체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수가 불어나기까지는 아직 그들의 얼마간은 계속 남아 있어야 했다. 교회의 세력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엿볼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교회의 원수들이 점차적으로 조금씩 정복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진정한 자비에서이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를 지키고 하나님께 계속 의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 마음 가운데 있는 죄악도 그렇게 추방된다. 즉 갑자기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다. 이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에 따라 자비를 지연시킬 때도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그 자비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민족을 수용할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점령하기에는 수적으로 충분하지 못하였다. 하나님 안에서는 제안됨이 없다. 만약 우리에게 제한이 온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생긴 제한이다. 가나안 전역이 그들에게 약속되었으나(31절), 다윗 시대에 가서야 비로소 그 땅을 소유는 데에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죄로 인해서 그 땅의 소유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약속에 첨가하여 주신 계율은 우상 숭배자들과는 어떠한 친교도 맺지 말라는 것이었다(32,33절). 우상 숭배자들은 그들이 만일 우상 숭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땅에 거류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과 사귄다는 비난과 그들과 함께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데에 빠질 위험을 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상 숭배자들과 친밀히 사귀면, 죄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과 혐오감이 마멸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에게 경의를 표하느라고 그들의 신들에게 다소의 존경을 표하더라도 그것은 무해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점차적으로 파멸적 함정에 빠져들어가고 말 것이다. 나쁜 길을 피하고 싶은 자들은 나쁜 친구를 멀리 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즉 나쁜 이웃과 함께 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주의해서 잘 살피지 않으면 타인들의 죄가 우리의 올무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범죄하도록 유인하려는 자들에게서 최대의 위험이 온다는 것을 항상 주목해야 한다. 어떤 우정을 핑계삼더라도, 우리를 우리의 의무에서 이탈시키는 자들이 진정으로 우리의 최악의 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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