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1)(출애굽기 20:1-11)
Ⅰ. 율법의 기록자 모세는 서문에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고 기록했다(1절). 그 십계명의 율법은 이러하다.
1. 이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이다. 이 율법들은 하늘과 땅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왕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왕 중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확실히 능력도 있다.2.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율법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시되,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신다" (욥 33:13). 즉 성령으로, 양심으로, 또한 섭리로,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주의하여 귀를 기울여야 할 그의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그가 십계명을 말씀하실 때와 같이 친히 말씀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그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말씀은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 그가 구속주이심이 인정된 것과 같이(마 3:17)) 귀로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매우 두려운 위엄이 서린 음성이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이미 그 이전에 인간에게 주셨다(그것은 인간의 심중에 본래적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죄가 그 기록을 마멸시켰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지식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방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Ⅱ. 율법 제정자의 서문은 이러하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다" (2절).
1.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제정하실 수 있는 그의 권위를 개괄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 모두가 복종할 여호와" 라고 밝히신 것이다.2. 하나님께서는 그의 첫 4계명 가운데서 그 자신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도 쉽게 깨드릴 수 없는 3가지 조항이 복종을 요구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자존(自存)하시며 남의 간섭을 받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영원히 계신 분으로 모든 존재와 힘의 근원이 되신다. 곧 "하나님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명령하실 수 있는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다. 존재케 하신 이가 법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시고 거기에 상 주시며, 불순종을 징계하실 수가 있다.
(2)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 그들과 계약하신 하나님, 그들 자신이 동의한 하나님이신 때문이다. 그들이 그의 계명을 듣지 않으려 한다면 누가 들으리요? 하나님은 약속을 주사 친히 그들에게 대한 의무를 지셨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당신의 교훈을 지키라는 의무를 요구하심이 마땅할 것이다.
세부적인 계약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해도, 그들은 모두 세례받은 자들인 고로, 그들은 하나님을 저들의 하나님으로 삼는 그런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를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하고 불신실하며 매우 패역한 것이다.
(3)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참한 종의 신분에서 영광의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신 큰 은총을 배푸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베푸신 큰 기적들을 목격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해방 사건의 제 형편을 생각할 때 더욱 감사한 의무감을 굳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그 구원의 복된 열매를 즐기면서, 하루 속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의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아니 오히려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통치할 더 큰 권력을 가지고 계신다.
이제 그들은 그들을 자유롭게 하시고 그들을 값주고 사신 그분을 섬기기로 고백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를 죄의 소굴에서 건져주신 그리스도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를 드려야 마땅할 것이다(눅 1:74). 주께서 결박을 푸셨으니, 우리는 그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다(시 116:16).
Ⅲ. 그 율법의 내용을 보라. 십계명 중 처음 4 가지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규정한 것이다(보통 이것을 첫 돌판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그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그 창조주를 사랑하는 것이 본분이므로, 그 4계명이 다른 나머지 계명보다 선행되는 것이 합당한 일이다. 정의와 자선도 경건의 정신에서 우러나올 때에만 하나님께 복종하는 행위로 열반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성실한 자가 그 형제에게 성실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는 한 마디로 그를 경배하는 일 그것 뿐이다. 즉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드리며, 내적으로는 우리의 정성을 모두어 경배하고 외적으로는 위엄 있는 언행과 참석으로 경배드려야 한다. 이것이 영원한 복음의 전체 본질임을 말하고 있다. 곧 "하나님을 경배하라" 는 것이다(계 14:7).
1. 제 1 계명은 우리의 유일한 경배 대상이신 여호와께 대한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3절). 애굽인들이나 그밖의 이웃 민족들은 그들 나름의 공상의 산물인 많은 신들과 이상한 신들, 그리고 새로운 신들을 가지고 있었다. 범죄하기 쉬우므로 이 계명이 제일 서두에 강조된 것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고로 그들은 전적으로 그에게만 의지할 것이며 자기들이 고안한 어떤 신이나 다른 나라에서 빌어온 신들에게 의지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당시에 세계는 다신론이 팽배하여 있어 이것이 가장 범죄하기 쉬운 죄악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고서는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근절시킬 수가 없다. 우리도 마땅히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영광을 다른 피조물에게 돌림으로써 역시 이 계명을 범할 위험에 처하기 쉬운 것이다.교만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게 되고, 탐욕은 황금의 신을 만들며, 정욕은 배로 하나님을 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두려워하며 더 섬길 뿐 아니라 더 기뻐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나 사실상 우리의 신이 된다.
이 금령은 전 율법의 기초가 되는 훈계를 준다. 우리는 여호와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만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여 그를 찬미와 겸손한 예배로 섬기며 받아들이고 우리의 애정을 완전히 그에게 두는 것이다. 이 계명 중에 "내 앞에" 란 말은 다음의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1) 우리가 어떤 신을 가져도 하나님은 그것을 확실하게 아신다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 옆에 있어서 그가 모르시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 앞에 있다. 우상 숭배자들은 비밀한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사실을 찾아내지 못하겠는가?
(2) 그사실은 하나님을 대단히 분노케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차마 당신의 얼굴을 돌릴 수 없는 죄악이요, 간과하거나 묵과할 수 없는 죄악이다(시 44:20, 21 참조).
2. 제 2계명은 예배의 규례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예배를 친히 지시하심은 합당한 일이다.
(1) 금령: 참 하나님을 섬기더라도 어떤 형상을 만들어 예배하는 것은 금하고 있다(4,5절).
[1] 유대인들(적어도 포로 후기의)은 이 계명으로 인하여 신의 모양이나 어떠한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도 금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군대들이 그들의 깃발에 새겨넣은 여러 형상들을 "가증한 것" (마 24:15)이라 불렀고, 특별히 그것들이 "거룩한 곳에" 세워질 때 그렇게 불렀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어떤 형태로든지 만들어서는 안 되며(하나님을 누구와 같다고 할 수 있겠느냐?"; 사 40:18, 15)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형상이란 거짓을 가르치는 교사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롬 1:25).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이신 하나님을, 하나님도 몸을 가지고 있는 듯이 우리를 잘못 생각하도록 교사한다(합 2:18).
또한 그 계명은 하나님이 마치 우리와 같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여 우리의 상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일도 금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적인 예배란 상상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신앙의 힘으로 주관되어야 한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처럼 어떤 형상이나 그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들이 그 형상을 예배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죄를 범하지 않고자 하는 자들은 죄지을 기회를 멀리 해야 한다.
[2] 그들은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아야 한다. 즉 이따금씩 그들에게 어떤 존경의 표시를 하거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제사나 분향 그밖에 종교적 숭배 행위로 그것들을 계속 섬겨서는 더욱 아니되는 것이다. 그들이 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는 그들의 신앙심을 지도하거나 감정을 고조시키거나 예배에 도움을 준다는 구실을 붙여 어떤 형상을 앞에 두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 할지라도 어떤 형상을 매개체로 하여 드려지는 것이라면 그는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교도들 중에서도 최선의 그리고 최고대의 율법 수여자들은 그들의 사원에 형상들을 세우는 것을 금했다.
이 규례는 이교 황제인 누마(Numa)에 의하여 로마에서 금지되었었다. 그런데 교황이나 감독에 의하여 형상 설치가 명령되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반그리스도교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앙에서 형상을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이 계명에 위배되며, 도저히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교리 문답서나 신앙적 서적에서 이 계명의 이유를 제 1계명과 결합시켜 버리어 빼어 버렸다. 그리하여 제 3계명을 제 2계명으로, 제 4계명을 제 3계명으로, 이런 식으로 붙였다. 10가지 계명을 만들기 위하여 그들은 제 10계명을 둘로 나누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고로 그들은 그들의 주장에서 2가지 큰 악을 저지르고 있으니, 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삭제한 것이요, 그 둘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형상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2) 이 금령이 강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5,6절).
[1] 예배하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은 질투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며, 특히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이 세우신 제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상 숭배와 모든 거짓 예배에 대한 증오, 우상 숭배자들에 대하여 분노를 나타내며, 그를 예배하는 데에 사용되는 우상처럼 보이는 모든 것과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 모든 요인에 대한 분노를 나타낸다. 질투는 민감하게 나타난다.
성서에서 자주 표현된 바와 같이 우상 숭배는 영적인 간음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질투로 불리어지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그가 말씀으로 지시하신 방식과 다른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심히 두려운 일임을 알자.
[2]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징벌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들이 그를 사랑한다고 자랑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미워하는 자라고 단정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사악함을 살피시리라." 즉 그들은 율법의 파괴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을 모욕하는 자며 약속을 파기하는 자며, 신앙의 뿌리를 뽑는 자들이므로 엄하게 징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그 자손들에게도 갚으신다." 이 죄로 인하여 그들의 교회는 폐쇄되고 그들에게 이혼장이 주어질 것이며, 자녀들은 부모와 더불어 계약에 관계되었듯이, 이제는 그들이 부모들과 더불어 계약과 모든 교제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가정의 완전 파멸과 같은 심판을 백성에게도 내리실 것이다. 우상 숭배자들이 자기들의 3,4대까지 후손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산다면, 그것은 그들의 눈에 고통이 될 것이요 심장을 찢는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가 칼로 목베임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 가며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부모는 패역한 짓을 하다가 죽고, 그의 자녀들은 그들에게서 본받아 그들의 전철을 밟고 거짓 숭배를 계속한다면), 그 사악함의 분량이 다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헤아리시기 위하여 심판하러 오시고, 저들의 조상들이 범한 우상 숭배의 책임을 묻는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불의한 점이 없다.
그가 우상 숭배자들을 오래 참으신다 할지라도 언제나 참으시는 것은 아니다. 4대를 넘기지 않아 반드시 갚으시는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사랑스러운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하는 일을 단념케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이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불명예의 낙인을 온 가족에게 찍을 뿐만 아니라, 그 부모가 죽고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불쌍한 그 자녀들에게 떨어지게 하신다.
[3] 그를 신실히 예배하는 자에게는 은총을 내리시라고 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 2계명은 이와 같이 거짓 숭배를 금지할 뿐 아니라, 그가 가르치신 모든 계명들을 지키면서 그를 경배하라는 율령을 내포하고 있다.
제 1계명이 사랑과 기쁨과 소망과 경모의 내적 경배를 요구한다고 하면, 제 2계명은 기도와 찬송,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성실한 준행 등 외적인 경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사실을 유의해야겠다.
첫째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계명과 특히 그를 경배하는 일과 관련된 계명들을 지키려고 끊임없는 노력과 심혈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또한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킬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된다. 복음적인 예배는 모든 복음의 복종에 좋은 영향력을 줄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자들을 위해 은총을 예비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도 자비를 필요로 한다. 자기들의 공적을 내세울 처지는 못된다.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으며, 자비로운 보상과 보호를 받는다.
세째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에 대한 진노가 3,4대에만 미치는 데 반하여, 이들에 대한 자비는 천대에까지 미친다. 그러므로 자비의 물결은 영원히, 충만히, 종적으로, 그리고 값없이 흘러 넘친다.
3. 제 3계명은 우리의 예배 태도를 말하고 있다. 최대한의 경의와 성의를 다하여 드려야 한다고 했다(7절).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그들은 여호와를 저들의 하나님으로 삼았으므로 그들은 의당 그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리라고 상정되어 있다(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의 신의 이름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언급할 때는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주의는 매우 필요한 계명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계명도 한결같이 필요한 계명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이다.
[1] 위선으로 부를 경우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앙고백을 하나 그 고백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이름이 명하는 바와는 달리 저들의 악에서 떠나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이다. 그런 자들의 경배는 헛될 것이다(마 15:7-9). 그들의 제물이 무익할 것이다(사 1:11, 13). 그들의 신앙도 헛된 것이 되고 만다(약 1:26).
[2] 계약을 범하는 경우다. 우리가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서도 그 약속은 우리에게 선한 것만을 행하도록 명령한다. 그 맹세를 여호와께 이행치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이다(마 5:33).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잠 5:4) 또한 그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갈 6:7).
[3] 경솔한 명세를 하고, 또 어떤 정당한 근거나 마음에 작정도 없이, 또 어떤 명백한 의도나 선한 목적도 없이 지나가는 말로 서약하고 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의 속성 중 어떤 것을 언급하는 경우이다.
[4] 거짓 맹세를 하는 경우이다. 혹자는 이 계명의 본의는 이 거짓 맹세를 주로 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옛 사람들에 의하여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마 5:33)라고 말하여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교육에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는 것이었다(신 10:20).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하나님을 거짓말에 대한 증인으로 불러 세우는 셈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를 모욕하는 셈이 된다.
[5]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고 부주의하게 사용하며, 그 이름에 대한 어떤 두려운 감도 없이 함부로 사용하고 경우이다. 맹세의 형식을 모독함은 물론이려니와, 예배의 형식을 모독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알게 하시는 그 어떤 것들 즉 그의 말씀이나 그가 세우신 제도들 중 어떤 것에 대한 모독도 물론 그러하다.
그들이 부적이나 주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농담이나 오락을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이다.
(2) 준엄한 벌: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했다. 남의 범죄를 처벌하고 행정관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직접적으로 어떤 사유 재산이나 공공의 안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예를 위하여서 질투까지 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은 묵과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런 죄인은 아마도 자기 자신은 죄도 없고 그런 행위에는 아무런 유해함도 없을 것이며, 하나님도 이것은 결코 추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생각은 미연에 막으시기 위하여 명백하게 "죄없다 아니하리라" 고 그의 뜻을 밝히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망령되이 부른 자들에 대하여는 복수하실 것이니,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 떨어지는 무서운 일을 당하리라는 것이다.
4. 제 4계명은 예배의 시간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날마다 예배와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레 중 하루를 특별하게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 예배드리는 데 바쳐야 한다.(1) 그 계명의 내용은 이렇다(8절). 즉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그리고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고 했다(8절). 안식일은 그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일곱째 날을 복주시고 거룩케 하신 사실(창 2:3)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새로이 설정된 법이 아니고 옛 법을 다시 재연시키신 것이다.
[1] 그들이 거룩히 지켜야 할 날이 나타나 있다-" 엿새동안 일하고 이레되는 날" 이라 했다. 이 날이란 창조의 첫 7일간의 제7일로 계산된 것이인지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계산해서 일곱째 날인지, 혹은 이 둘 모두를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정확한 날짜는 그들이 알고 있었다(16:23). 그러므로 이 날로부터 그들은 제7일을 지켰던 것이다.
[2] 그 날은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첫째, 휴식의 날로 지내야 한다. 그들은 직장에서나 그 밖의 세속적인 어떤 일도 이 날은 하지 말아야 했다.
둘째로, 거룩한 날로 지켜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별하고 거룩한 예식에 시간을 써야 한다. 하나님은 그 날을 축복(blessing)해 주심으로써 거룩케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엄숙한 찬양(blessing)을 드림으로써 그 날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
이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한 목적이 있으므로 그 목적 외의 어떤 다른 목적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3] 누가 그 날을 지켜야 하나?
"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 이라고 했다. 아내란 말은 없다. 아마 아내는 남편과 한 몸이니 남편과 함께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그 아내도 그와 같이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머지 가족들은 일일이 열거되어 있다. 자녀나 종들도 그들의 연령과 능력에 따라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다른 여러 가지 신앙 생활의 실례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가장은 먼저 자기들 스스로 여호와를 섬길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돌봐야 한다. 그리하여 적어도 가족들이 몰라서 안 지키는 경우는 없도록 해야 한다(수 24:15). 개종한 나그네들까지도 다른 날과 구별하여 이 날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그 당시에는 그 나그네들에게 어떤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보였을지 모르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방인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저들도 안식일의 은혜에 동참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목적을 나타내는 축복임이 드러났다(사 56:6, 7 참조).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는 것을 주목하신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나그네임이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안식일에 우리가 행하는 일은 특별히 주시하신다.
[4] 이 의무에는 특별한 각서를 두셨다. "안식일을 기억하라" 고 했다. 이 말은 안식일 이전에도 이미 정해져 있었고 지켜졌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날짜 계산법을 잊어버렸거나, 혹은 노동 감독관들로 인하여 금지되었거나, 신앙이 크게 타락하고 무관심하여져서,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그 날을 상기하는 일은 필요하였을 것이다. 잊혀진 의무는 우리가 모르고 있더라도 여전히 의무가 남아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기억하라는 말은 우리가 그 날을 망각하기 쉬우나 기억하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혹자는 그 말은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준비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안식일이 되기 전에 그 날을 기억해 되고, 그 날이 되면 준비하였다가 거룩히 지키고 의무를 다해야 함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2) 이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
[1] 우리는 "엿새 동안은 힘써 일을 행하라" 고 했다. 그러므로 엿새 동안은 우리 자신을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제 7일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엿새 동안 피곤해졌으므로 제 7일을 휴식일로 주신 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다.
[2] 안식일은 하나님의 날이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친히 정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을 위해 성별하신 날, 곧 "네 하나님 여호와" 의 안식일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다른 목적으로 돌리는 것은 여호와를 모독하는 일이다.
그 날을 거룩히 지킴은 우리의 의무인 것이다.
[3] 안식일은 세계 창조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길 의무로써 또 천지를 지으신 그분을 신뢰하는 용기로써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지켜져여 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계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 때문에 자기들이 만든 신들을 예배하는 다른 모든 민족들과는 구별된다고 선언했다.
[4] 엿새 동안 일하고 제 7일에는 휴식하는 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보이셨다. 하나님은 "제 7일에는 안식하사", 스스로 만족해 하셨고,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시사 기뻐하셨다" (시 92:4). 그것은 우리도 제 7일에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족하면서 그의 솜씨의 영광을 그에게로 돌려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안식일은 천지 창조의 과업이 완료되면서 시작되었으며, 섭리와 구속의 과업이 완료될 때까지 영원한 안식일이 있게 되리라. 우리는 창조 때의 안식을 기념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영원한 안식일을 대망하면서 매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니, 우리는 그를 예배함으로써 이 두 가지를 우리 자신에게 확고히 하는 것이다.
[5] 하나님께서 친히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친히 구별하사, 그 날을 영광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 날은 여호와의 거룩함과 영광의 날이다. 하나님은 그 날을 축복하사, 우리가 그 날을 거룩히 지킴으로써 그 축복을 받으라고 격려하셨다. 그 날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날" 이다. 그러므로 그 날을 파괴하는 모든 행동을 삼가도록 하자.
하나님은 이 날을 축복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셨고 거룩히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을 속되게 하거나 그 시간을 다른 보통 시간과 똑같게 여기지 말자.
십계명(2)(출애굽기 20:12-17)
우리는 여기서 흔히 둘째 돌판으로 불리는 열 계명 중 마지막 여섯 계명의 율법들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우리 자신과 이웃들 상호간의 의무가 들어 있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대계명의 제 2부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보편적 의의 한 본질적 지맥이 되는 것과 같이, 인간들을 향한 의는 참된 신앙의 한 본질적인 지맥이다. 신앙과 정직은 병행해야 한다.
Ⅰ. 제 5계명은 우리 친족들에 대한 의무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의무만이 특별히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계명은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다.
1. 부모들의 인격에 대한 겸손한 존경 곧 그들에 대한 내적 존중심은 그 부모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행동 속에 외형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부모를 경외하고" (레 19:3) "공경해야 한다" (히 12:9). 이것의 반대는 그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이다(잠 30:17).2. 부모들이 주는 율법적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에 관하여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엡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 그들이 너희를 부를 때에 오고 그들이 너희를 보내는 곳으로 가라. 그들이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하면, 그들이 금한 것은 하지 말라. 그리고 그것을 행하되 자녀로서 즐겁게 그리고 사랑의 원리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하라. 비록 너희가 '싫소이다'하고 말했을지라도 그 후에 뉘우치고 순종하라" (마 21:29).
3. 그들의 책망과 교훈과 징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고 부드러운 책망 뿐만 아니라, 완고한 훈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복종해야 한다.
4. 부모들의 충고나 지시, 그리고 의견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마음에 꺼리는 태도가 아니라 시인하는 태도로 하라는 것이다.
5. 범사에 부모들을 즐겁게 하고, 필요할 때에는 그들을 부양해 드림으로써 그들의 노년을 편하게 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는 이 계명에 대해 이와 같은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계신다(마 15:4-6).
이 계명에 부과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다.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 계명의 서두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으므로 복종해야 한다는 이유가 언급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여기서 두 번째 법록의 서두에서 또 하나의 이유로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지금은 그들이 광야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이 복된 땅을 유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간 후 행실을 바로 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훌륭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 땅에 거주하는 날 수가 단축된다는 사실, 즉 어떤 특정 개인이 죽음을 당하게 되거나 전 민족이 거기서 쫓겨나게 됨으로써 그들의 날이 줄어들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했다. 그러나 순종하는 자녀들에게는 그 복된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이 특별히 약속되어 있다.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키는 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부모들이 모아서 그들에게 물려준 것들이 주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부모를 부양하는 자들은 하나님 곧 만인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부양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약속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3).
하나님께로 향한 마음을 품고 이 계명과 그 나머지 다른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한다는 것과 무한하신 지혜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여기시는 한 땅에서 오랫동안 살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이 땅을 빨리 떠나는 듯이 보여지더라도 영생으로 곧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실 거룩한 가나안 땅에서 충분히 보상되리라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
Ⅱ. 제 6계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에 관한 것이다(13절). "살인하지 말지니라." "네 몸이나 다른 사람들의 몸을 부당하게 해쳐 건강과 안녕과 생명에 손상이 되는 일은 하지 말라!" 이것은 자연의 법칙 중의 하나로서,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게 준 계율에 의해 강력히 시행되었다(창 9:5, 6).
그것은 어떤 정당한 전쟁에서나 또는 우리 자신을 위한 필연적 방어에서나 또는 판사가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는 일 따위에서 죽이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에게 대한 악의와 증오심("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개인적인 보복은 금하고 있다. 또한 갑작스런 감정의 자극으로 인하여 일어난 과격한 분노와 유해한 언행, 또는 감정으로 인한 어떤 처사들은 금지되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계명을 설명해 주고 계신다(마 5:22). 그리고 세상의 무죄한 자와 우수한 자의 피를 재촉하면서 핍박을 하는 것은 최악의 행위로서 금지되고 있다.
Ⅲ. 제 7계명은 우리 자신의 정절과 이웃의 정절에 관한 것이다.
" 간음하지 말지니라" (14절). 우리 주님은 이것을 제 6계명 앞에 두셨다(개역 한글판과는 다름). 곧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고 하셨다. 우리의 순결은 우리의 생명 만큼 이나 귀한 것임이 분명하며, 또한 죽임을 당하는 것 만큼이나 몸이 더럽혀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계명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고 있는 모든 육신의 정욕으로 되어지는 모든 부정한 행동과 안목과 같이 육신의 정욕을 자극하고 그것을 고조시키는 모든 관습까지도 금하고 있다. 그런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이 계명에 금지되어 있는 바이다(마 5:28).
Ⅳ. 제 8계명은 우리 자신의 재산과 이웃의 재산과 재물에 관한 것이다. "도적질하지 말라" (15절). 비록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정당한 보복 행위로서 애굽 사람들을 탈취하도록 허용하셨고 또 그렇게 명령하였을지라도, 그 본의는 그들이 이처럼 서로를 약탈해도 좋다는 전례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죄악되게 소모함으로써 가진 것을 스스로 탈취하거나 죄악되게 절약함으로써 그 유용성과 유익성을 스스로 잃고마는 일을 금하고 있다. 또한 옛날부터 내려온 땅의 경계표를 옮겨 버리거나 이웃의 자리를 침해하며, 그 사람으로부터 그의 집이나 밭을 강제로 또 몰래 빼앗거나, 또한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빌어온 것이나 길에서 주은 것을 돌려 주지 않고, 정당한 부채나 임대료나 품삯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리고 공금이나 국고 세입이나 신앙과 일에 헌납된 것을 횡령하는 것(이것은 가장 악하다)을 금하고 있다.
Ⅴ. 제 9계명은 우리 자신의 명예와 이웃의 명예에 관한 것이다.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16절). 이것은 다음의 일을 금하고 있다.
1. 어떤 일을 그릇되게 말하며, 거짓말하고, 모호한 말을 쓰는 것, 그리고 이웃을 속일 계획과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2. 우리 이웃에 대해 부당하게 나쁜 말을 하는 것, 곧 그의 평판에 손해가 되게 말하는 것이다.
3. (이것은 위의 두 가지 경우를 포함하고 있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는 것, 즉 법정에서 맹세를 하면서(이것은 이 계명 뿐만 아니라 제 3,6,8계명도 범하는 것이다) 또는 법정 외에 일상적인 대화에 의해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 일로 그를 책망받게 하거나 비방하는 것, 모략하는 것, 고자질하는 것, 잘못 행한 일을 실제보다 위장시켜 실제보다 더 나쁘게 위장시키는 것,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이웃을 파멸시키고 우리 자신의 명성을 세우고자 하는 것 따위이다. 이것은 모두 금지된 행위들이다.
Ⅵ. 제 10계명은 근본적 문제를 말해 주고 있다. "탐내지 말지니라" (19절)고 한다. 앞의 계명들은 우리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행하려는 모든 욕망을 은연중에 금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계명은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는 모든 과도한 욕망을 금하고 있다. "오! 저런 사람의 집이 내 것이라면! 저 사람 아내가 내 것이라면! 저 사람의 재산이 내 것이라면! ...." 이것은 분명 우리 자신의 몫(운명)에 대한 불만의 소리요, 이웃 사람들의 것을 부러워하는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주로 여기에서 금지되고 있는 죄들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이 그의 눈을 가리는 있는 비닐을 떨어지게 했을 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곧 "참내지 말지니라" 하는 율법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첫 탄생아 곧 우리 속에 거하고 있는 죄의 처음 열매들이요, 그리고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의 첫 시작이 되는 그 모든 과도한 욕구와 욕망을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이 계명이 능력있게 그의 양심 속에 들어와서 그에게 탐욕의 정체를 비추지 않았더라면, 그 죄에 대한 화를 알지 못했으리라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 탐욕을 깨달을 것이다(롬 7:7). 하나님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율법의 거울을 통해 우리 얼굴을 보게 하셨고, 그 율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두려움과 더불어 주어진 율법(출애굽기 20:18-21)
Ⅰ. 율법은 특별한 두려움과 함께 주어졌다. 이처럼 두려움에 싸인 장관 속에서 함께 전달되었던 것은 일찍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보통 때보다 더 크고 더 눈부신 천둥과 번개가 일어났고,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액센트가 주어졌고, 문장마다 쉼표가 있었다.
그러면 율법은 왜 이처럼 두렵게 그리고 매우 무시무시한 예식을 갖추어서 주어졌는가?
1.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위엄을(유일회적으로) 목격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어 "여호와의 두려움을 알아", 그를 경외하면서 살아가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2. 그것은 죄인들이 이 율법을 어겼을 때에 당하게 될 모든 심판의 두려움을 미리 나타내는 전조이었다. 그 때에는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재판장 하나님의 오심을 통고하는 경고를 울릴 것이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오리라."
3. 그것은 율법이 양심 속에서 넣어준 양심의 가책을 시사해 준다. 율법은 이 양심의 가책으로써 영혼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율법이 이와 같이 모세에 의해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여 그들의 교만을 꺾는 그런 방식으로 주어졌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은혜와 진리" 를 사람들이 더욱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구약 율법의 두려움에 대한 실례를 자세히 말해 주고 있다. 즉 구약의 률법은 우리의 특권을 빼앗아 가는 공포의 검이지만, 신약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 빛과 자유와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히 12:18).
Ⅱ. 이것이 그 당시 백성들을 당분간은 감동시켰다. 만일 그들이 이것에도 감동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정말로 우둔한 마음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1. "그들은 떨며 멀리 서 있었다" (18절). 하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 광경을 직접 보기를 몹시 원했다(19:21). 그러나 지금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무례함을 충분히 반성하여 거리를 지키는 것을 배웠다.2.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자기들에 말씀하지 말기를 원하였다" (히 12:19). 그러나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실 것을 간청했다.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연락하기에 합당한 자로서 모세를 지명했고,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여겨 그의 말에 청종키로 약속함으로써, 그들은 모세의 중재에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무한한 지혜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그 방법을 우리가 잠자코 수락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두려움" 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한 때 하나님은 인간의 자녀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려 했으나, 인간은 그것을 견뎌낼 수 없음이 판명되었다. 그런 것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달아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무섭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우상 숭배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즉 그들은 이후에 곧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사역자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가르침에 만족하자.
우리가 그의 교훈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러하셨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번개와 천둥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교훈을 듣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 문제는 이미 확정되었다.
Ⅲ. 모세는 이러한 공포를 주는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해 줌으로써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20절). "두려워 말라." 즉 "그 우뢰와 불이 너희를 사르기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말라" 고 했다. 그들은 이것은 두려워했다(19절.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우뢰와 번개는 애굽에 내렸던 재앙 중의 하나였으나, 모세는 그것이 애굽에 보내어졌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그들에게 보내졌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 주었다.
1. 천둥과 번개가 일어난 의도는 그들이 중재자 없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것을 원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모세는 중재자의 직책에 선택하신 것이 얼마나 경탄한 일인가를 그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이 도망한 이래로 모든 죄인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이야기하거나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2, 그들의 의무를 지키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였다. 모세는 "두려워 말라" 고 말해 줌으로써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 이처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도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놀라서 두려워하서는 안 된다. 그런 두려움은 우리를 괴롭게 하며 잠시 동안의 명상으로 생긴 것 뿐이다. 그것은 우리를 떨리게 하고 속박시키며, 우리를 사탄에게 팔아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떼어 놓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심중에 하나님의 위엄을 공경하고 그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우리를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에 복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의 의무감을 촉구하며 우리의 행실에 신중을 가하도록 해 준다. 그러므로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시 4:4).
Ⅳ. 모세의 중재로 하나님과 그들과의 친교가 진행되었다(21절). 백성들이 계속 멀리 서 있는 동안 곧 죄의식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지속되는 동안, "모세는 암흑으로 가까이 갔다." 문자적으로 보면 "가까이 가도록 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어 그를 격려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어떤 랍비들의 추측대로 천사를 보내어 손을 잡아 그를 붙들어 인도하지 않았다면, 모세 자신은 감히 그 암흑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를 가까이 이끌리라" 고 하는 말씀은 대중보자에 대하여 언급하신 것이다(렘 30:21).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중보자를 통해서이다(엡 3:12).
제단에 관한 율법(출애굽기 20:22-26)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암흑" 으로 가까이 갔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서 친밀하고 아무런 두려움도 주지 않은 채 그만 들을 수 있게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여기서부터 23장 끝까지의 말씀이다. 그것은 주로 십계명에 대한 해설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처음에는 말로, 그 다움에는 글로 써서 백성들에게 전해야 했다. 본문 속에 있는 율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Ⅰ. 예배를 위에 형상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고 있다(22,23절).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이것은 어떤 권세 가진 왕이 초라한 거지 때들과 다정히 이야기하는 것 이상의 놀라운 겸양이었다) 이제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라" 고 했다.
1. 제 2계명이 여기에 반복되어 있다.(1)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을 그들에게 주신 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에 빠지거나 그러한 죄를 범하는 특정한 죄악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유의하고 계시다는 것을 지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10계명을 주었으나 모세는 첫 두 계명을 그들에게 특별히 잘 설득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2) 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셨던 행위에서와 같이 능히 추론해 낼 수 있는 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은 친히 그들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 주셨다. 따라서 마치 하나님께서 부재중이신 것처럼 그의 형상을 만들 필요가 그들에게는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기만 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어떤 모습도 보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음성으로만 자신을 나타내셨음은 그들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도 안 되며 다른 어떤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하나님과 교제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신 것이다.
2. 형상 숭배를 반대하는 두 가지 논거가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1) 형상을 숭배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나를 비려 신상을 만들지 말라" 는 말 속에 그것이 시사되어 있다. 비록 그들이 형상을 하나님의 조상(彫像)으로서만 숭배하는 체하여도, 실상은 그것을 하나님의 적수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2) 형상을 숭배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라. 그런 신상들이 네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상은 너희의 신앙을 타락시키는 것이며, 너희 스스로를 기만하게 된다" 는 말 속에 나타나 있다. 처음에는 그들이 금과 은으로 예배할 신상을 만들면서 금은 귀금속을 풍성히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 돌리는 척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만듦으로써 저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감동된 척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럼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고", 그리하여 점차로 그들은 나무나 돌로 신상을 숭배할 정도로까지 그러한 강한 망상 속에 빠져들어갔음이 당연하다.
Ⅱ. 예배를 위해 제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지시가 나타나 있다. 이것은 희막이 세워지기 전에 그들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사용한 임시적 제단을 의미한다. 물론 그들이 세워진 후에도 종종 만들어졌었다. 즉 기도온(삿 6:24)과 마노아(삿 13:19), 사무엘(삼상 7:17), 그리고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제단을 쌓았었다. 우리는 여기에 나타난 것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보여 준 영광스러운 장면에 매우 감동되어, 그 중의 많은 사람들이 이 격렬한 헌신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자 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제물을 바칠 제단이 필요했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은 것이다.
1. 제단을 "흙" 이나 "다듬지 않은 돌" 로 매우 순수하게 만들라고 했다(24,25). 그들은 쪼아 내어서 어떤 모양을 만들어 놓은 돌로 제단을 만들지 말고, 단지 거친 모양 그대로 돌을 쌓아야 했다. 이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저들이 그 새겨진 형상에 마음을 쏟을 유혹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훨씬 값비싼 제단을 꾸미라고 지시하신 예식법을 세우기 전에 먼저 이러한 법을 명하신 것은, 구약의 율법 시대가 지나간 후에는 제단의 소박함이야 말로 종교의 외적 의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장식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과 복음적인 예배는 외적인 형식이나 화려함으로 드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거룩한 미(美)는 채색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로마교회가 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창기의 화려한 옷을 입히는 일을 행하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토단" (土壇)이 가장 훌륭한 제단인 것이다.
2. 제단은 대단히 낮게 만들라고 했다(26절). 즉 그들이 층계를 밟아 제단에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게 하였다. 재단이 높을수록, 그리고 하늘에 가까울수록 그 제사가 더 잘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이교도들의 어리석은 환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들의 제단을 높은 곳에 설치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이 살피시는 것은 제물의 높낮이가 아니라 마음의 고위와 천박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의 제단을 낮추라고 명령하셨다.우리는 그들이 광야에 세웠던 제단들이나 또는 다른 특수한 경우의 제단들이 단지 한 번에 단 한 마리의 짐승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에 있는 제단은 훨씬 길고 넓게 만들어져서, 한 번에 많은 제물을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제단의 높이는 길이와 넓이에 알맞는 비율인 10큐빗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층계로 제단에 오르내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서 말하는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나는" 폐단을 막기 위하여 무척 고심했음이 분명하다.
Ⅲ.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드린 예배는 어디에서나 그들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너희 이름을 기록하는 곳이나" 또는 내 이름이 기록되는 모든 곳에(즉 내가 성실히 예배받는 곳에) "강림하여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고 했다(24절). 그 후에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기록할 만한 특정한 한 장소를 택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 아래서 그것이 폐하여졌으므로,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이 최대한으로 확장된 것이다.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이름으로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곳은 어디에나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고 임재하심으로써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며, 은혜의 선물로 상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시어서 복 주시는 것을 바랄 뿐 우리의 신앙적 집회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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