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출애굽기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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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물소동(출애굽기 17:1-7)

Ⅰ. 이스라엘 자녀들이 물이 없어 시련을 겪었다. 그들은 전에 한번 그와 같은 절망에 빠졌던 적이 있었으니 이번이 그 두 번째가 된 셈이다(1절).

1. 그들은 "여호아께서 지시하신 대로",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행군을 하였으나 또 마실 물이 없는 곳에 당도하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에 수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는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단련시키려고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해 가신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러한 시련에서 구함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란 것을 기억해 두자.

Ⅱ. 이 난관에 대한 그들의 불만과 불신을 살펴 보자. 그들은 거기서 "물이 없어 갈하였다" 고 기록돼 있다. 그들이 마실 물이 없다면 목이 말랐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물이 없어 블편을 느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정욕이 물에 대한 욕망을 더욱 자극시켰고, 저들은 갈망 때문에 난폭해지고 성급해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목마름 때문에 무뢰한이 되었다. 본능적인 갈망은 아무리 갈급한 것일지라도 신앙과 이성에 의한 통제와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무절제한 갈망이 빚어낸 언사를 고찰해 보자.

1. 그들은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도전했다(2절). "우리에게 마실 물을 달라." 마치 빚을 갚으라는 식으로 요구하면서, 아마 모세는 이것을 이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강한 불신적 언사를 했다. 그들은 모세가 빵을 주었으니 물도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사실상 신앙과 기도로써 하나님께 의지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한 가지 축복이 또 다른 축복의 징표가 되므로 겸손히 탄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지도 않고 믿으려 들지도 않는 자들은 이미 주어진 은총을 남용함으로써 앞으로의 은총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사람들은 마땅히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약 1:7). 그러나 그들은 아주 당연한 듯이 모든 것을 요구했다.

2. 그들은 모세에게 왜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느냐고 트집을 잡았다. 마치 모세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주 무참하게 죽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한 것처럼 따지고 드는 것이었다(3절). 자기 동포들의 위해 좋은 일을 계획하여 잘 해 낸 많은 사람들의 빛나는 업적이 무사려하고 감사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곡해되어 왔으며, 그들의 인내심은 그 때문에 시련에 부딪쳐 왔다.

모세에 대한 그들의 악감정은 거의 모세를 "돌로 칠 정도로까지" 달했던 것이다(4절). "그는 그들에게 많은 선행을 보였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그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인가?(요 10:32). 무절제한 욕심이 맹목적인 정욕을 부채질하게 되면 그것은 때때로 사람을 가장 부조리한 죄를 짖게 하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게 할뿐더러,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도 불붙은 장작개비와 화살을 던지고 죽이려 드는 것이다.

3.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지 아닌지 묻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아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다" 고 했다. "여호와라고 이름을 밝히시던 그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현존을 질문하고 있는 것이니, 즉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일반 섭리에 대한 물음인 것이니, 하나님이 세계를 지배하시는가 아니하시는가 하는 물음인 것이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 약속에 대하여 질문했다. 즉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렇게 자기들에게 자비로우실 것인가를 물었다. 이 질문을 가리켜 "하나님을 시험했다" 고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일반적으로 불신하고 있음과 또한 그의 약속의 확증을 위해 그의 능력과 자비의 기적들을 그들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아니한다는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들은 사실상 이렇게 상상했다. 즉 모세는 사기군이요, 아론은 협잡군이며 구름기둥 불기둥은 그들의 감각을 미혹시키는 단순한 속임수요, 환상일 것이며, 그들을 구하고 보호하며 먹여 준 이제까지의 모든 기적들은 속임수의 연속이요, 가나안에 대한 약속은 그들을 우롱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가 그들 가운데 계시는가 아니 계시는가?" 고 시험하려든 것이었다.

Ⅲ. 이렇게 비난을 당하던 모세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였는가?

1. 모세는 그 불평자들을 책망하였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고 했다(2절). 이 얼마나 온화한 답변인가! 그들의 흥분된 행동에 자신이 휘말려 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유달리 온순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과격한 말에 과격한 말로 대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기 때문에 이다. 그러나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는 것" 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그들의 불평이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에게 하는 그 비난은 곧 하나님 그 분에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너희가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니라." 즉 "그의 능력을 불신함으로써 너희들은 그의 인내하심을 시험하고 그의 진노하심을 유발케 하는도다."

2. 모세는 하나님께 탄원하셨다. "모세는 여호와께로 나아와 그의 모든 사정을 아뢰였다" (눅 14:21). 사람들이 우리를 부당하게 비난하고 우리에게 시비를 걸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써 그에게 사정을 아뢰고 문제를 맡겨 버리는 것이 가장 큰 대책이 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들으실 것이다. 우리에 대한 그들의 부당한 행위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실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지시해 달라고 졸랐다. 그는 정말 어쩔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 자신으로서는 그들의 기갈을 해결해 줄 수도 없을뿐더러 그들의 흥분을 진정시킬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험을 호소하였다. "그들이 나를 돌로 치겠나이다! 주여! 당신이 당신의 불쌍한 종의 생명을 돌보시려거든 지금 도우소서!

Ⅳ. 하나님께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키 위해 은혜를 베푸셨다(5,6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백성들이 그를 돌로 치려 할지라도 백성들의 앞을 지나가서 사건의 현장으로 나아가라고 지시했다. 모세는 그의 능력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갔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들의 불신과 불만으로 그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 어떤 재앙이나 역병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요(하나님의 명령이 그러해야 마땅하겠지만), 그들을 먹일 물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다.

오! 범죄하는 죄인들에게 대하여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는 얼마나 크신가!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범죄하며 자기와 다투려는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자기와 대항하여 교만을 부리는 자들에게도 그의 은혜의 손길을 펴신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원수가 주릴 때에 그를 먹여 주고 그가 목마를 때에 "그에게 마실 것을 주라고" 교훈을 하셨다(롬 12:20; 마 5:44, 45).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에게까지도 그렇게 아낌 없는 은혜를 주시거듣, 하물며 그를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저버리시겠는가!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하갈에게 행하신 바와 같이(창 21:19) 광야에 있는 모세에게 샘을 가리켜 주시기만 했다 해도 그것은 커다란 은총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 뿐만 아니라 권능까지도 보여 주시고자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기적을 보이사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갈 곳을 지시하시며,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가서 앞으로 행하실 일에 대한 증인으로 삼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확신시키도록 분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그를 격려하기 위하여) 영광의 구름 가운데서 그를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그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셨다. 모세가 이를 순종하자 즉시 반석에서 풍부한 물이 흘러나왔다. 그리하여 그 물은 그들의 진 주변을 강같이 흘렀다(시 78:15, 16).

그 사막에서도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 물이 넘치게 되었다. 그 반석은 "샘의 원천" 이었다고 시편 기자는 묘사하였다(시 14:8).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물을 원할 때 물을 주심으로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사랑을 보여 주셨다. 또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심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모세가 반석을 쳐야만 물이 흘러 나오도록 명령하심으로써 모세의 명예를 높이셨다.

반석에서 흘러 나온 이 훌륭한 물은 꿀처럼 달고 기름처럼 감미로왔던 것이니 극도로 갈증이 심했던 그들에게는 곧 "꿀이요 기름" 이었던 것이다(신 32:13). 그들은 물이 흐를 수 있는 운하를 파고 물을 저장할 연못을 만들며, 후일 그들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난 때와 마찬가지로 샘을 만들기로 했을 것이다(시 84:6; 민 21:18). 여기서 우리가 얻을 교훈이 있다.

1. 우리는 극심한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물을 생각할 수도 없는 "사막 가운데서도" 우리를 위해 "샘" 을 여실 수 있는 것이다(사 43:20). 왜냐하면 그는 "광야에 길" 을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사 43:19).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은 그가 그들의 쓸 것을 마련해 주시리라고 믿을 수 있다. 우리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르는 동안은 분명히 반석에서 나온 물같이, 자비와 은총이 우리를 뒤따랐던 것이다.

2.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고전 10:4). 성령의 은혜와 위로는 "생수의 강으로 비유되었다(요 7:38, 39; 4:14). 그러므로 이 생수의 강은 모세의 율법으로 쳤던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 나셨기 때문이다. 이 반석에서 나온 생수와 열려진 샘 이외에는 어느 것도 우리 영혼의 궁핍을 체울 수 없으며 영혼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감각적 쾌락은 흙탕물과 같으나 영적인 기쁨은 반석의 샘물과 같이 순수하고 맑고 신선한 즐거움의 강인 것이다.

Ⅴ. 그 곳에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그들에게 풍부히 공급되었던 물을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평한 저들의 죄를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맛사 곧 "시험" 이라고 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무리바 곧 "다툼" 이라고도 했으니, 이는 그들이 모세와 다투었기 때문이었다(7절). 그 죄를 기억함으로써 죄인들의 부끄러움을 나타낼 뿐 아니라 (죄는 죄인들에게 오명을 남긴다) 그들의 후손들이 그와 같은 범죄를 짓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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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렉인들과의 접전(출애굽기 17:8-16)

우리는 여기서 아말렉과의 전쟁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기" (민 21:14) 중에서 제일 처음에 기록된 사건인 것이다. 즉 아말렉은 이스라엘과 대전한 제일 첫 번째 나라인 것이다(민 24:20).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Ⅰ. 아말렉의 공격이다. 그들이 "나아와 이스라엘과 싸웠다" 고 했다(8절). 아말렉인들은 장자의 유업과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겨 야곱을 증오했던 에서의 후예들이었다. 이 전쟁은 혈통 속에서 흐르고 있던 증오의 적개심, 곧 악의의 결과였던 것이며 이제 그 약속이 성취되려는 역사로 인하여 그것은 더욱 고조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1. 이 전쟁은 이스라엘에게는 고통거리였다. 그들이 모세와 다투었으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싸우기 위해 아말렉군을 보내신 것이었다. 밖에서의 전쟁은 안에서 일어난 분쟁과 불만에 대한 공정한 처벌이다.

2. 이 전쟁은 아말렉인들에게는 최악의 행위였다. 신명기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신 25:17, 18). 아말렉은 아량 있는 적답게 정정당당히 이스라엘을 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비겁하게 이스라엘의 배후를 공격했다. 너무나 약하여 아무런 저항도 도망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들이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근 애굽을 명망시킨 그 권능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으로 지켜졌고 기적으로 식량을 공급받았던 진영을 쳤으니, 그들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진실로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행하는 자들이었다.

Ⅱ. 침약자들로 인하여 필연적인 방위전에 응한 이스라엘.

1. 이 전쟁의 임무가 여호수아에게 맡겨졌다. 이것은 여호수아에 대한 첫 언급이다. 그는 이 원정의 총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 그것은 "그가 젊어서부터 무사로서" 훈련을 받아야 모세가 죽은 후에 그의 후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그들로 아말렉을 물리치라는 명령을 받았다(9절). 애굽인이 이스라엘의 뒤를 추격해 왔을 때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가 행하시는 것을 그들이 보고만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 자신이 분기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는 매개체들을 이용하신다는 것을 믿어야겠다.

2. 이 전쟁의 총 책임은 모세에게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고 했다(9절).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고 또한 그것이 그의 교회의 유익에 이바지하게 되는가를 보라.

여호수아는 싸웠고 모세는 기도했다. 둘 다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는 사역자였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는 "그의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 를 들었으니, 이것은 애굽에 재앙을 부르고 그 능력으로 이스라엘이 압박의 소굴에서 벗어나게 했던 그 기적의 지팡이였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해 치켜 든 그 지팡이는 그들에게 원기를 돋아 주었다. 그 지팡이는 병정들을 격려하는 군기처럼 들려졌다. 이를 본 병정들은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기적을 베푸신 능력의 지팡이와 손이 저기에 있도다!" 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위대한 일들과 그의 은총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큰 용기를 준다는 것을 유의하자.

모세는 또 호소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해 이 지팡이를 들었다. "이 전쟁은 여호와의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도우시며, 또 도와 주시려고 오시지 않겠습니까? 들려진 이 지팡이가 증거하오니 오! 여호와의 팔이시여 능력을 베푸소서! 라합을 치신 이가 당신이 아니옵니까? 라고 호소했다(사 51:9, 10). 모세는 끈기 있는 안내자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도록 하나님께 탄원한 중개자였다.

우리의 군대가 적을 향해 진군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군대와 함께 하여 달라고 진정한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기도하는 군대는 우뢰와 같은 군대라는 것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살렘과 시온에 기도가 있음으로써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를 꺾으셨도다" 고 했다(시 76:2, 3).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모세가 피곤해졌다(12절). "그의 팔이 무거워졌다" 고 했다. 아무리 강한 팔이라도 오래 지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언제나 편 팔" 을 가지고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다. 전쟁하고 있는 여호수아의 손은 무거워졌다는 말이 없는데 기도하는 모세의 손이 무거워졌다고 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영적이면 영적일수록, 그만큼 더 실패하기도 쉽고 약해지기도 쉬운 법이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는 말이 있지만, 마음을 집중하고 열심으로 기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의 위대하신 중보자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셔도 결코 약해지시거나 피곤치 않으신다.

(2) 모세의 지팡이가 전쟁에 끼친 영향력을 보자(11절).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면(이 갈대아인은 기도를 그렇게 표현했다) 이스라엘이 이기나, "그의 팔이 내려지면" 곧 기도를 쉬면 "아말렉이 이겼다" 고 했다. 모세의 손이 (그들이 조금 전에 비난했지만) 그들 자신의 손보다 그리고 그의 지팡이가 그들의 칼보다 더욱 그들을 안전케 한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전쟁의 승패가 모세의 손의 오르내림에 달려 있게 하신 것이다. 전세가 이스라엘로 기울어지기 전에 우열의 엇갈림이 있었던 것 같다.

가장 좋은 여건이라 할지라도 실패와 성공이 엇갈려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었지만, 아말렉이 잠시 우세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모세의 팔이 내겨졌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여건도 교인들의 신앙의 강도와 기도의 정도에 따라 흔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3) 모세를 지원해 주기 위한 조처가 있다. 모세가 더 이상 버틸 수 있게 되자 그는 주저 않았다. 그러나 안락 의자가 아니라 돌 위에 앉았던 것이다(12절). 그가 그의 팔을 들 수 없게 되었지만 팔을 계속 지켜들고 있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혹자의 생각대로) 미리암의 남편이요 그의 매형인 홀의 도움을 기꺼이 받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다른 사람을 도와 주는 일을 부끄러워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서로서로 한 지체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모세의 손은 고정되어 "해가 질 때까지 내려오지 아니하였다." 팔을 버티기 위해 많은 소동이 있었지만 결국 그의 자발적인 마음이 승리했다.

전쟁에 나아가 그들 앞에서 싸우고 있는 여호수아와 산 꼭대기에 올라가 그들 위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세를 바라본 백성들에게는 그것이 큰 용기를 주었을 것은 틀림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 싸우시는 구원의 장수이신 우리의 여호수아이요, 동시에 신앙이 넘어지지 않도록 천상에서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중보자시니 우리의 모세이시다.

Ⅲ. 아말렉의 패배를 보라. 잠시 동안 승리가 양 진영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때로는 이스라엘이 이겼다가 때로는 아말렉이 이겼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13절). 여호수아는 매우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싸웠던 것이다. 곧 그의 병사들은 훈련도 받지 못했으며 무기도 빈약했고 오랫동안의 노예 근성이 몸에 배었고 불평 잘하고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시어 큰 구원을 이루셨으니, 아말렉의 교만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키 위하여 만든 무기는 얼마 쓰지 못하고 마침내는 부러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뜻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승리를 준 것이었지만,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파하였다" 고 기록되었다. 여호수아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고 또 (예수라는 이름과) 같은 뜻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복자보다 위대하나니,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니라. 모든 주권과 권력을 빼앗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것은 오직 주의 손 뿐이다.

Ⅳ. 승전 트로피가 세워졌다.

1. 모세는 먼저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리려고 애썼다(15절). 그는 여호수아를 기념하여(그의 명예를 기념하는 것은 물론 칭찬할 만한 일이었지만) 개선문을 쌓는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단을 쌓았던 것이다.

물론 그 재단에는 희생 제물이 드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제단 위에는 여호와 닛시 곧 여호와는 나의 "기(旗)" 라고 생겨 넣었다는 것이 특기되어 있다. 이 말은 아마 그 싸움에서 하나님의 지팡이가 깃발처럼 들려 올려졌던 일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능력은 그들을 격려하고 함께 뭉치게 하였던 깃발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개선의 날에 그 깃발을 높이 세웠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항상 세워야만 한다(시 20:5). 그 일은 모두 행하신 분이 거기에 대한 모든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하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후손들이 그것을 보고 위로와 은혜를 입도록 돌보셨다. "이것을 기록하여 기념하되" 허름한 종이가 아니라 책에 "기록하라" 그리고 명심케 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전수케 하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 모세는 지금부터 일기와 제반 사건에 대한 일지를 쓰기 시작해야만 했다. 이것이 성서에서는 기록에 관한 최초의 언급이었다. 아마 그 후 돌판에 율법을 기록하기 전까지는 그런 명령이 주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in perperuam rei memoriam 곧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그것을 기록하라" 고 했다. 이것은 기록으로 남겨졌다.

(1) 즉 "아말렉이 이스라엘에 대해 행한 것을 기록하라. 이스라엘에 대한 아말렉의 증오감과 그들의 잔인한 침략행위를 기록하라. 그리하여 그들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말렉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베푸신 은총이 잊혀지지 않게 하라.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싸우신 것을 알게 하라. 그들을 치는 자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치는 자니라."

(2) 또한 앞으로 될 일도 기록하라.

[1] "때가 오면 아말렉은 완전히 파멸되어(14절) 역사상의 흔적만 남을 뿐이니라."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이름을 지워버려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 하였다(시 83:4, 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계획을 죄절시켰을 뿐 아니라 그의 이름을 지워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용기를 위해 그것을 기록하라. 곧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괴롭힐 적마다, 결국에는 이스라엘이 승리하여 아말렉의 패망을 노래하리라." 이 선고는 부분적으로는 사울 왕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삼상 15:), 다윗 왕에 의해서 완전히 이루어졌다(출 30; 삼하 1:10, 8:12). 그리하여 다윗 시대 후로는 아말렉의 이름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2] 곤경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계속하여 싸우실 것임을 기록하자(16절). 아말렉의 손이 여호와의 보좌 위에 있기 때문이니라. 곧 여호와께서 다스리고 계시는 곳이요, "그의 성소" 이므로 "처음부터 지극히 영화로운 보좌" 라고 일컬어지는 이스라엘 진을 아말렉의 손이 쳤기 때문이다(렘 7:2). 그러므로 여호와는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시겠다" 고 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결코 아말렉과 어떠한 동맹도 맺지 말 것이며 불구대천의 원수 곧 멸망의 운명을 지고 있는 원수로 여기라는 지시를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아말렉의 멸망은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의 모든 대적들의 멸망의 상징인 것이다. 어린양과 대적하는 자마다 어린양에게 삼킴 바 되리라.

 

17:9 없음.

 

17:10 없음.

 

17:11 없음.

 

17:12 없음.

 

17:1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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