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출애굽기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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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빵으로 인한 불평(출애굽기 16:1-12)

이스라엘의 무리가 애굽에서 나온 때는 첫 달 15일이었는데, 그후 제 2월 15일이 되자 그들이 떠날 때 가져 온 한달분의 식량은 떨어지고 만 것 같다.

Ⅰ. 이 때문에 불만과 불평을 늘어 놓았다(2,3절). 온 회중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반란에 가담하였다. 그들이 불평을 늘어 놓은 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자인 모세와 아론에게 답변한 것이었다.

1. 다른 것은 고사하고 이 첫 번째 시련에서 벌써 그들은 광야에서 그들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시려 했다면 이미 홍해에서 아주 손쉽게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가 그들을 보호해 주셨은즉 이제도 그들을 잘 돌보아 주실 수 있는 터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능력, 그리고 그의 인자하심에 대한 불신이요, 사사건건 실망하고 생에 대해 절망하며 다만 곧 죽게 되었다고만 말하는 것이었다.

2. 그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모세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것은 그들을 굶어 죽게 할 계획이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모세가 행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 뿐이요, 또한 그들의 복지를 위해 행한 것 뿐이었다.

최대의 호의가 곡해되어 최대의 악으로 여기진 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님을 기억하자. 가장 선한 행동에도 때때로 가장 악한 구설 수가 끼는 법이다.

3.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과소평가하면서 차라리 애굽에서, 아니 그보다도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그들을 이 배고픈 광야로 인도에 낸 것은 여호와의 손이 아니라 단지 모세의 손에만 의한 것처럼 착각하고, 애굽인들이 당한 그 재앙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던 편이 나앙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고통이나 질병이나 괴로움이 닥치면 그것에 대한 자연적 원인은 알지 못하고서, 그런 것은 인간의 손길에 의해서나 어떤 구체적 사건에서 생기는 것은 아닌 양 생각하여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이다" 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인간의 상례이다. 이 얼마나 망언이냐! 지금 이렇게 광야에서 구름 기둥으로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부양되어 살기 보다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차라리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 주시는 사랑의 훈련을 견디기보다는 하나님의 대적들의 멸망에 동참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공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많은 고기를 먹었는지 모르며, 또 그들이 말하는 그 고기 가마가 얼마나 큰 것인지 상상할 수 없다. 또 그들은 그들의 양과 소를 가지고 나왔으므로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불만이라는 것은, 사실이나 이유는 생각지도 않고 과거를 과대평가하고 현재를 헐뜯는다. 불평을 말하는 자처럼 황당무계한 자들은 없다. 그들이 그와 같이 조급하고 감사를 모르며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은 최근에 하나님이 아무리 그들이 위급에 처해 있을 때에도 도와 주실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들에게 주시려고 은총을 예비해 두셨다는 증거를 보이시면서 그렇게 큰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악한 행위였다.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시 106:7-13)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자비를 크게 경험한 그 사실이 오히려 우리의 불신앙과 불평을 크게 조장했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Ⅱ. 하나님께서 자비스럽게도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셨다. "나는 이 불평 분자들에게 유황불이라도 퍼부어 그들을 진멸하리라" 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반대로 그 무리들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실 것을 약속을 하시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친절하신 의도을 알리시어 그가 그들의 불평에 불안해 하거나 그들을 애굽에 그냥 내버려 두었더라면 좋았으리라는 따위의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해 주었다.

(1)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원망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원망함을 들어 주셨다" (12절)고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의 원인이 되었던 저들의 궁핍을 알고 계시니, 그는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괴롭혔던 하나님의 종 모세에 대한 저들의 무례함과 무분별한 생각을 아셨으니, 그는 정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할 때에 우리가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불평하더라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불평을 듣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군주나 부모나 스승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거스르는 모든 불평을 들어 주지는 않는다. 또 그것이 당연하니, 그들은 그것을 참고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고 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 지은 인간을 즉각 벌주시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은 그런 일을 모르고 계신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스라엘의 불평을 들으시고 그 세대를 슬퍼하셨다. 그러나 계속 그들을 돌보시니, 못된 자식을 둔 어진 부모와 같이 하신다.



(2) 그는 그들에게 신속히, 그리고 넉넉히 계속해서 일용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4절).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 졌으므로 그의 조물주는 지혜롭게도 땅의 소산을 그의 양식으로 주셨다(시 104:14).

그러나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위로부터 태어났고 또 직접 하늘의 지시와 통치를 받으며 하늘로부터 그들의 헌장과 율법과 직분을 받는 장자들의 교회의 상징인 이스라엘 백성은 역시 하늘로부터 그들의 양식을 받는 것이다. 그들의 율법은 천사들의 지시로 얻어진 것인즉 그들은 음식도 천사들의 것을 먹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양식을 베풀어주신 일은 어떤 계획이 있었는가를 보자.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4절)고 했다.



[1]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그를 신뢰하는지 안 하는지, 그 신앙의 법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시험하시며, 또한 그들이 하루 거두어 하루 먹고 지낼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 날의 양식으로 그 날을 만족으며(그들의 양식이 다 떨어져 비록 불안하겠지만) 내일의 양식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도우심을 의지하는 가를 시험하시는 것이었다.

[2]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그를 섬기고, 그의 종들을 위해 모든 것을 구비해 주시는 훌륭한 주인에게 그들이 늘 신실한가를 시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감사를 모르는 백성이며, 전혀 은혜를 모르는 백성이라는 것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하셨다.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지라도 그들은 의를 배우려 하지 않도다" (사 26:10).

2.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바 그대로를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갔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아론은 그의 예언자 곧 대변인이다. 모세는 아론에게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말할" 바를 지시하였다(9절). 혹자는, 아론이 이스라엘의 회중에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고 명하는 동안, 모세는 물러나서 기도를 했으며,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호와의 영광의 출현이 있었다(10절)고 한다. 이사야 1장 18절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고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그들을 기까이 오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불평의 소리일지라도 잘 들으려고 친히 내려오신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그러므로 우리 밑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불만을 토로한다고 하여 그들의 이유를 묵살해 버리면 되겠는가?(욥 31:13).



(1) 모세는 그들의 불평의 잘못을 그들에게 인식시켰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와 아론에게만 불평하였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것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고집이다(7,8절).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대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잠잠하였을 것이로되 그것은 여호와께 대한 원망이니라, 너희를 이 시련으로 인도하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그이니라." 우리가 옳든 그르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 원망할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반영하는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손인 까닭이다.

말씀에 의한 책망과 회개의 촉구를 거부하며 자기들이 어떤 걱정거리에 처하였다고 자기들을 위해 일하는 사역자들에게 분노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 저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창조주와 다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불평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니 그는 단지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2) 모세는 그들에게 양식이 다시 마련될 것이라고 확신을 시켰다. 그들이 몇 번이고 고기 가마를 되뇌였던 만큼, 그들은 저녁에는 풍성한 고기를 가지게 될 것이며,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게 될 것이니, 이후로 매일 그러하리라고 말했다(8,12절).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음식을 먹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인이 음식을 먹게 된 것은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를 이리 저리로 이끄시어 가르치셨다" (신 32:10). 또한 신명기 8잘 3절에도 같은 실례가 있다. 곧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먹이심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다. 또한 만나를 보내신 것은 그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고자 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이를 인하여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게 하려" 하신 것이다(6절).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충분히 드러난 일이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어리석고 안목이 좁아서 그들을 인도해낸 것은 모세였다고 말하는 것이다(3절). 이제 하나님께서 만나를 그들에게 내리심으로써, 그들을 인도해 내시고 또 시작한 그 일을 완성시킬 수 있는 분은 바로 무한한 능력과 자비를 지니고 있는 당신 자신임을 입증하신 것이다.

모세 혼자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었다면, 그렇게 만나를 그들에게 먹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 만나를 내리신 일은 여호와께서 하셨으므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에 내신 일도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어야 했다. 그런데도 후일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인시켜 주지 않으면 아니되었다(26:32).



[2] "이를 인하여 나는 여호와 곧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12절). 이것은 여호와로서의 그의 능력과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에게 배푼 그의 특별하신 은총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을 때에도 그가 여호와이신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셨으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실 때에도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신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신 것이었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평을 잠잠케 하시고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10절). 아론이 이스라엘 회중에게 말하는 동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셨다" 고 했다. 구름은 본래 그들에게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이 안 되어 그들은 구름에 친숙해졌으므로 그 구름이 특이한 광채를 발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조금도 그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영혼에 빛을 비출 때에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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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처럼 내린 만나(출애굽기 16:13-21)

이제 그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으로 양식을 공급받기 시작하였다.

Ⅰ. 하나님께서는 저녁에 맛있는 새고기 잔치를 베푸셨으니 곧 "날아 다니는 새" (시 78:27)니라. 그러므로 혹자가 생각하듯이 그것은 "메뚜기" 고기는 아니었다. 메추라기든가 꿩이라든가 아니면 어떤 들새들이 날아와 이스라엘 진을 덮었고, 그 새들은 매우 유순하여 그들이 마음대로 붙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봉사할 뿐 아니라 즐겁게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생활에 필요한 것 외에도 생활에 기쁨이 되는 유용한 사물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Ⅱ. 다음 날 아침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는 비처럼 내려 주셨다. 그 만나는 그들의 매일의 양식으로 계속해야 내렸던 것이다.

1. 그들에게 공급된 것은 구름에서 내려진 만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의미에서도 그들은 공기를 먹고 살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침에 이슬이 마르자 거기서 생겨났으며 다른 어떤 음식보다 영양 있고 원기를 돋우는 음식이 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만나 곧 마누(manhu)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이것은 무엇이냐?" 하는 뜻이다. 혹은 조금 경멸하는 뜻으로 "이것은 시시한 것이로구나!" 또는 좀 놀라서 하는 말로 "이것은 참 이상한 것이구나!" 또는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몫이다. 우리는 그것을 먹고 감사해야 하리라" 는 것이었다(14,15절). 아무튼 그것은 맛있는 음식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식성이 각양 각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의 구미를 당기기에 족하였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건강에도 좋았고 소화도 잘 되었으며 그루(Grew) 박사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압박받던 시대에 지녔었거나 그들의 방종한 식사가 전염시켰던 어떤 질병들을 그들에게서 말끔히 씻어주는 데도 유용했다고 한다.

이 검소한 식사에서 우리는 모두 절제에 대한 교훈을 배우고, 온갖 진미만을 탐욕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2. 그들을 매일 아침 나가서 "일용할 몫을" 거두었다(4,21절).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공중의 새와 마찬가지로 날마다 주의 섭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니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시 104:28)고 새에 관해 말씀하셨다. 내일을 위해 오늘 거두는 것이 아니었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신 것은 매일 내리고 매일 거두는 이 만나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1)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을 위하여 양식을 준비하는 신중성과 근면이다.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베푸시는 것을 우리는 부지런히 거두어야 하는 것이다. 묵묵히 일함으로 우리 자신의 빵을 먹어야 하며, 게을러서 남의 것을 신세진다거나 남을 속여서 빼앗아 먹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대하신 자비는 인간의 의무에 대한 여지를 남겨 놓으신다. 만나가 비같이 내릴지라도 그들이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면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2) 넉넉하면 만족할 줄을 아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각 사람의 식량대로" 거두어 들여야 했다. 음식도 알맞게 먹어야 좋지 너무 먹으면 그만큼 나쁜 법이다. 많이 가진 자도 먹고 입고 살며, 적게 가진 자도 먹고 입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18절). 사실 이생에 필요한 사물에서 오는 위안과 즐거움은 그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소유량이 차이와 같은 그런 큰 차별은 우리 서로에게 없는 것이다.

(3) 또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과 그의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19절)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장막이나 진영에 한 조각의 빵조차 없을지라도 내일은 하나님께서 내일의 양식을 주시리라고 믿으면서 평안히 잠들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들 자신의 창고보다 하나님의 창고가 더 믿을 만하고 안전하다. 그 창고에서 그들에게 보다 맛있고 보다 신선한 음식을 공급해 주시리라.

이것을 생각하면서 "너희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마 6:25 이하)는 말씀을 읽어 보라. 저장해 둔 자들의 어리석음을 살펴 보자.(남보다 더 지혜롭고 잘 처신한다고 자처하면서 내일은 혹시 만나를 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어떤 자들이 쌓아두었던 그 만나는 모두 썩어 벌레가 되었으니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다. 탐욕과 불신으로 저축한 것은 가장 큰 낭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한 부자들의 재물은 썩었다(약 5:2, 3).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라.



[1] 광야에서 기적으로 그들의 양식을 만드사 이스라엘을 먹이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이다. 광야에서도 식탁을 마련해 주시고 먹이시는 그의 능력조차 의심하던 자들에게 그렇게 풍성히 먹이시는 그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못하시랴!(시 78:19, 20) 당시에는 수십만 명을 날마다 먹일 돈도 없으며 재물도 없을 뿐더러 그것을 살만한 시장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40년을 계속 광야에서 행하신 바와 같은 그런 큰 잔칫집은 일찍이 없던 것이니, 그렇게 아낌없이 마음껏 즐기도록 한 잔치는 없었던 것이다. 아하수에로왕이 "그의 왕국의 부요함과 그의 위험을" 과시하기 위해 베푼 잔치도 이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에 1:4).

기록된 바" 해가 뜨겁게 쪼이면 녹았다" (21절)고 했다. 마치 남은 것이 태양열을 받으면 공기 속으로 증발해서 내일의 알곡의 씨앗이 되고 이것이 날마다 반복되는 것 같았다.



[2] "모든 육체에 식물을 주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자(시 136:25). 그는 모든 생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위대한 사육자이시다. 구름 가운데서 일용할 양식을 만드시던 그 위대하신 지혜와 능력과 인자하심이 오늘도 끊임없이 자연 법칙에 따라 해마다 지상에서 식물을 내시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부히 누리게 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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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에 대한 율법(출애굽기 16:22-31)

1. "제 7일 안식일" 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시내산에서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도, 아니 "태초부터" (창 2:3) 있었던 율법임을 분명히 암시해 준다. 만일 안식일 엄수 문제가 이 때 처음 지시된 것이라면, 안식일에 처한 어떤 다른 설명도 없이 제6일에는 평일의 두배의 몫을 거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단 말인가?(5절)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전에 안식일에 대해서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모세가 안식일을 엄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이스라엘 각 지파 지도자들에게도 경이로왔던 그 의도를 어떻게 그들이 미리 알고 실천하였겠는가?(22절).

7일 중 하루를 구별하여 거룩한 일을 하며 인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이 땅 위에 인간을 창조하신 이래로 가장 오래된 실증법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은 옛부터 지켜온 아름다운 도이다.

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 6일에는 두 배를 준비하라고 지시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틀 양식을" 주셨다(29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7일에는 쉬라고 명령심으로써, 그들이 안식일 때문에 절대로 손해 보지 않도록 그들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손해 보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날 그들은 이틀 분 양식을 거두어 들여, 미리 음식을 장만하게 되었다(23절).

안식일 전 날에 미리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아야 하며, 안식일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으라는 이 율법은 엄격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일날 요리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라기보다는 우리가 그 날에 가사를 돌봄으로써 가능한 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에 아무런 방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취해진 조처인 법이다. 생활 필수품에 대한 모든 일은 그 전 날 분명히 다 해야 된다. 우리가 한 가지 중요한 일에 더욱 몰두하기 위해서는 일상 생활에 필요한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이 안식일은 위해 간수해 둔 양식은 부패하지 아니하였다(24절). 그러나 그들이 말씀을 청종치 않고 간수해 둔 양식은 부패하였던 것이다(20절).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간수하였을 때에는 그 만나가 맛있고 건강에 좋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로써 성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 제 7일에는 만나를 중지하셨다. 하나님은 그 때에는 만나를 내리지 않으므로 그 날에는 만나를 기대하지도, 거두러 나가지도 말아야 했다(25,26절). 이것은 만나가 어떤 자연적 원인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요,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의 신적 권위를 확인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안식일은 기억하게" 하는 효과적인 방도를 취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안식일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며, 그 날을 예비해야 하는 그 전 날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제 7일에 백성 중 어떤 자들이 만나를 거두러 나갔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되돌아왔던 것 같다(27절). 찾고자 하는 자는 지정된 시간에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날 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으라. 여호와께서 이 일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고 하셨다(28절).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을까? 모세가 불복종한 것이 아니었다. 결코 아니다. 모세는 이 불순종하는 백성의 지도자였으므로 하나님은 그 책임을 그에게 돌리시어, 모세가 그들에게 보다 따뜻한 책망을 하게 하며, 그들의 불순종은 모세의 어떤 잘못으로 인함이 아님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 그들이 책망받은 것은 제7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지극히 작은 일에라도 불순종하면 하나님은 매우 분노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안식일을 위하여 질투하신다. 양식을 구하려고 안식일 날 바깥으로 보행했다고 책망을 받았다면 순전히 자신의 쾌락을 찾아 안식일날 나다니는 것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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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항아리(출애굽기 16:32-36)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만나를 그의 백성의 양식으로 주셨다. 곧 끊임없이 그들에게 잔치를 베푸셨음을 여기서 읽을 수 있다.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만나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보존했는가? 그들은 만나를 한 오멜 취하여 "금 항아리" (히 9:4)에 넣어, "증거판 앞에" 또한 법궤속에 넣어 보관했다(32-34). 이 만나가 소모되거나 부패되지 않도록 보존한 일은 분명히 기적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적적인 양식은 더욱 기념될 만한 것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대대손손이 내가 광야에서 너희를 먹인 이 양식을 알게 하리라" 하셨다.

곧 그 양식이 어떤 종류였으며, 1인 분의 하루 분량이 얼마나 되는 지를 알게 하여, 그들이 식량으로 고생하거나 그 정량이 미달되어 본적이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식량 때문에 어떤 불평이나 흠잡을 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를 판단케 하며, 또한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처들에게 내려 준 하나님의 자비를 판단케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먹은 양식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은 하나님께서 대한 우리의 신앙을 항상 북돋아 주기 위해서 영원히 기념되어야 하는 것이다.

2. 그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 동안 줄곧 만나가 계속되었으니, 그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가! 그 만나는 그들이 충분한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고 내렸다(35절). 섭리가 하나님의 돌보심이 얼마나 한결같은가를 살펴 보라.

땅이 존속하는 한 파종기와 추수기는 어김이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심히 분노케 했지만, 만나는 결코 중단된 적이 없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이다. 만나는 "영적인 양식" 인다고 불리워졌으니(고전 10:3), 그것은 거룩한 것으로 받게 되는 영적인 축복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참 만나이시며 생명의 떡이신 것이니, 만나는 그 상징인 것이다(요 6:49-5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는 만나인 것이다(마 4:4). 성령의 위로는 감추어진 만나이다(계 2:17). 이것은 만나와 같이 하늘에서 내린 것으로써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지내는 동안 우리 영혼의 지주와 위로가 되는 것이다.

만나는 "이스라엘인들의" 양식인 것이니, 곧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따르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만나는 "거두어 들여야" 한다. 말씀 속의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 속에 적용되어야 하며, 은혜의 매체가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각자의 몫을 각자가 이 기회의 아침, 이 은혜의 아침에 거두어 들여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거두어 들이기에는 너무나 늦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거둔 만나는 모아 두어서는 아니되며, 먹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신앙으로 그를 먹고 살아야 되며,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나는 모든 각인에게 충분할 만큼 풍성한 것이지만, 아무도 필요이상으로 많이 가질 수는 없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풍성하되, 남아 넘치는 것은 없다.

만나를 먹었던 자들은 다시 배고파지며 또한 결국엔 죽어 버리고 말았으며, 그들 중 많은 자들은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다. 그러나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먹고 사는 자들은 다시 주리지도 않거니와 결코 죽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영원히 그들을 기뻐하실 것이다. 오 주여! 우리에게 영원히 이 만나를 더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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