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태생의 성별(출애굽기 13:1-10)
다음과 같은 기념을 영원히 하라는 주의가 환기되어 있다.
Ⅰ. 애굽의 초태생이 죽임을 당했을 때도 이스라엘의 초태생은 보존된 사실에 대한 기념이다. 이 특별하신 은총을 기억하고 그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모든 세대의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으로 여호와께 성별되어야 하고(2절), 대속(代贖) 받아야 하는 것이다(13절).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권리로 만물을 소유하시고 주관하시나 그들을 보호해 준 권리 때문에 이제 특별히 이스라엘의 초태생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모든 초태생을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부모들은 그들의 초태생을 먼저 하나님께 엄숙히 드리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고 나서, 일정한 의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되돌려 받을 때까지는 그들과 어떤 상관이 있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1. 특별한 자비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나 우리 자녀들의 생명이 어떤 희생을 드림으로써 보존되었을 때에는, 신앙과 사랑의 사업을 통하여 최소한 어떤 감사의 마음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2. 처음이시요 최선이신 하나님께서는 처음 난 것과 최선의 것을 취하셔야만 하신다. 우리는 그에게 우리가 가장 아끼는 것, 가장 귀중한 것을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장자는 그 가정의 기쁨이요, 희망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 것이니라"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린다면,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을(당연한 일이지만)가장 사랑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3. 하나님께 거룩히 성별된 것은 "장자들의 교회" 이다(히 12:23).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 이시다(롬 8:29). 그러므로 그와 연합하여 거듭나는 모든 자들은 장자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탁월한 위엄과 능력이 주어진다. 자녀들에게는 유산이 있는 법이다.
Ⅱ. 출애굽에 대한 저들의 기념은 영속화되어야 한다. "이 날을 기념하라(3절). 그날을 좋은 표시로 삼아 네 생애 중의 가장 기념할 만할 날이요, 네 민족의 탄생일이요, 또는 더 이상 압제의 멍에를 메지 않아도 되는 민족 성숙의 날로 기억하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절도 기념되어야만 하는 것이니, 그 날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종되었던 집" 에서 부활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세가 그들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것을 매년 기념할 수 있도록 그 해의 날짜를 가르쳐 준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해의 날짜는 제시해 주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부활하신 요일은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 이것은 그 날은 더욱 가치 있고 의미있는 날이어서, 매주 기념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주의 능하신 팔로써 너희를 건지셨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더욱 분명히 나타난 구원은 그 만큼 더욱 분명히 기념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또 여기서 기억해 둘 것이 있다.
1. 그들은 분명히 "무교병의 잔치(무교절)를 지켜야 한다" (5-7). 단지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방법때로 그 날을 기념하여 축하해야 하며, 그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제도적 수단을 이용하여 경축해야 되는 것이다.그와 같이 복음 아래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행하여" 그를 "기념하여야" 한다.
얼마나 엄격하게 누룩을 금지시켰는가 보라(7절). 유교병을 먹을 수 없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땅 안에는 누룩이 조금도 눈에 되었던 안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그들은 유월절 전에 그들의 모든 유교병을 집밖에 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불태워 파묻거나 잘게 부수어 바람에 날려 버렸다고 한다. 그들은 등불을 들고 그들의 집에 혹시 누룩이 남아 있지 않나 하여 집안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살폈다고도 한다.
이 문제를 그렇게 주의 깊고 엄숙하게 지킨 데는 이유가 있었다.
(1) 이 잔치를 더욱 더 엄숙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는 "왜 그렇게 법석을 피느냐?" 고 묻는 자녀들에게 더욱 주목해 주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우리로 하여금 열심을 다해 모든 죄악에서 떠나라는 교훈을 주고자 함이었다(고전 5:7).
2. 그들은 자녀들에게 이 예식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그들에게 출애굽의 내력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했다(8절).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일찍부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도록 힘써야 한다. 교리 문답에 대한 유서 깊은 율법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2) 일찍부터 자녀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 주어 잘 알도록 하는 것이 특별히 유익한 일이 된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녀의 영혼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일들, 즉 우리 눈으로 목격한 우리 시대에 행하여진 것들과 우리의 조상들에게서 우리가 전해 들은 모든 것을 우리의 자녀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너희는 그 날(잔칫날)에 너희 아들이 같은 일들을 보여 주도록 하라" 고 했다. 그들이 그 규례를 축하하는 동안, 그들은 그것을 설명해 주어야 했다. 만사는 때가 있는 법이다.
유월절을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기 위한 표와 기념으로 삼으라" 고 지시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기 위한 일을 기억하고 기념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율법의 지배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율법을 그의 마음 가운데 품은 자는 그것을 그의 입에 두어 종종 말하며 더욱 사랑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쳐야 한다.
초태생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 주장(출애굽기 13:11-16)
Ⅰ. 초태생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지시가 계속된다.
1. 가축의 초태생들은 저들의 소유물의 일부분으로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 정결한 짐승들의 초태생 즉 송아지나 어린 양, 그리고 염소들이 수놈이면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다(23:30; 민 18:17, 18). 나귀와 같은 부정한 짐승들은 어린 양으로 대속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목을 꺾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정한 것은 무엇이나(우리는 본래 모두 부정하므로) 대속을 받지 아니하면 멸망을 받기 때문이다(11,13절).2. 그들의 아들 중 장자는 무두 대속받아야 한다.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자녀를 몰록(Moloch) 신에게 제물로 드리 듯, 그들이 장자를 제물로 드려서는 결코 안 된다. 초태생의 속죄 가격은 "5세겔" 이라고 율법으로 고정해 놓았다(민 18:16).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면치 못할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대속하였으므로 우리는 "장자들의 교회" 에 가입될 수 있는 것이다.
부정한 동물들은 물론이요, 그들의 자녀들도 본성적으로 부정하므로 대속받아야 한다. 누가 부정한 것에서 깨끗한 것을 낳을 수 있으리요?
Ⅱ. 그들의 자녀들에게 자자손손 계승되는 모든 세대의 자녀들에게 이 문제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도록 계속 지시하셨다. 자녀들은 모든 초태생이 하나님께 헌납되는 것을 보고 그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부모들이나 교사된 자들은 그들에게 장자들과 모든 가축들의 초태생은 멸망시키는 천사의 칼날에서 여호와께서 특별히 구하시어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은즉,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가르쳐 주어야만 한다(14-16절). 그렇게 구원되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다음에 주목하자.
1. 자녀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에 관하여 부모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권장되고 지도되어야 한다. 아마 이것이 가장 유용한 교육 방식일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들의 질문에 즉각 대답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가 유용한 지식을 그들에게 공급해 주어야만 한다.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나는 지식이 온 땅을 덮게" 되면 그 때에 비로소 가정 교육은 완전히 없어질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종교 행사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성례전이 말씀으로 성별되듯이, 또한 그들의 모든 예식들은 말씀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식은 합리적이므로 우리가 왜, 무엇을 하는지를 알고 지성적으로 행한다면 그때 비로소 열납될 수 있다.3. 본장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 "그 손의 권능으로" (3,14,16), 혹은 "능하신 손으로" (9절) 하셨다는 문구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관찰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장애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크게 드러난다. 강퍅한 마음을 쳐부순 것은 "능한 손" 이었다. 때때로 하나님은 그의 구속사업이 "힘으로는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4:6). 즉 여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힘의 어떤 가시적 전시로 되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4. 가나안에서 태어날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는" 사실을 가르치라고 했다(14,16절). 우리의 조상에게 베풀어진 자비는 우리에게 내려진 자비이다. 우리는 그들의 은총을 입으니 또한 그것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구원받은 그 때에 우리는 그들의 허리에 있었으며 그 구원의 밑바닥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대속받는다고 말해야 할 이유가 이제 더욱 분명해졌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출애굽기 13:17-22)
Ⅰ.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로를 선택해 주셨다(17,18절). 하나님은 그들의 인도자이시다. 모세는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지시만을 그들에게 전하였다. 인간의 길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렘 10:23). 사람은 "자신의 길을 궁리하고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이다(잠 16:9). 계획은 인간의 것이나 성사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는 그의 계획에 복종하고 섭리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애굽에서 가나안에 가는 길은 둘이 있었다. 하나는 애굽의 북쪽에서 가나안의 남쪽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는데 약 4-5일밖에 안 걸리는 여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광야를 통해서 가는 매우 먼 길이었는데 하나님어야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기 위해 택하신 길이 바로 그 길이었다(18절).
1. 하나님께서 그들을 "홍해로 가는 광야의 길로" 인도하심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애굽인들은 홍해에 빠져 죽어야 할 자들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인들도 광야에서 겸손해져야 하고 시험을 당해야했다(신 8: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너는 이 성산에서 하나님을 경배할지라" 고 하여, 광야 여행에 대한 암시를 이미 주셨다(3:12). 또한 그들 자신도 바로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사흘 길을 광야로 가야 한다고 몇 번이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여행길은 그 굽은 길을 택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악명 높은 거짓말쟁이들에 대한 저들의 요구가 정당했었을 것이다.그들이 그들의 적들과 일격을 나누기 전에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문제들이 먼저 타결되어야 했다. 즉 율법이 주어져야 하고 규례가 제정되어야 하며, 계약이 조인되고, 본래의 약속이 비준되야 하는 등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들은 광야에서의 고독하고 답답한 생할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대로는 이상한 일을 처리하기에는 정당한 장소가 못되었다(신 32:10).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백 마일이나 이리저리로 인도하셨겠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셨다" 고 기록되어 있다(시 107:7). 하나님의 길이 우리가 보기에는 돌아가는 길 같이 보이나, 바른 길인 것이다. 그는 비록 그의 백성을 가장 가까운 길로 인도하시지는 않으셨다 할지라도, 가장 적합한 길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우리의 여행을 마칠 때도 그것이 드러날 것이다.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2.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장 가까운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그 길로 가면 며칠 안 걸려서 블레셋 땅(애굽 근처에 있는 가나안 땅)을 통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도무지 싸움에 부적한 저들이 하물며 블레셋인들과 싸운다는 것은 지극히 부적합했기 때문이다(17절). 그들의 기백은 종살이 하는 동안 꺾여 버렸다. 또한 흙손을 잡던 손으로 갑자기 칼을 휘두른다는 것도 실로 어설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블레셋인들은 너무나 무섭고도 용맹한 적이어서 신병(新兵)들로는 접전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말렉인들과 전쟁을 시작하고 광야의 고생을 토대로 가나안인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보다 적당한 일이었을 것이다.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힘에 알맞는 시련을 주시는 것이니, "그들을 감당치 못할 시험에 버려 두지 않는다" 는 것을 명심하자(고전 10:13). 그 약속은 고린도 전서 10장 13절 그 앞 구절과 비교해 보면, 본문에 기록된 사건에 관련된 한 실례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아시며" 우리의 약함과 담력 없음도 아신다. 그러므로 장차 큰 시험을 위해 먼저 작은 시험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새끼를 공중으로 끌고 올라가" 그가 날을 수 있을 때까지 훈련시키는 독수리처럼, 애굽에서 인도하여 훈련시키신다고 하신다(신 32:11).
그들이 가야 할 길에 관한 명령이 주어졌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1) 그들을 혼잡하게 제가끔 간 것이 아니라, 질서 정연한 대오를 맞추어 갔다. "그들은 항오를 지어 나왔다" 고 했다(18절). 그들은(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5열 종대로" 또한 "5개 편대" 로 나누어 행진했다고 한다. 그들은 깃발을 든 군대같이 행군하였는데 이것은 더욱 그들의 힘과 명예를 돋보이게 한 것이었다.
(2) 또한 그들은 "요셉의 유골" 을 가지고 나왔는데, 야곱의 다른 아들들을 유골도 (혹자의 생각처럼) 그들이 죽는 대로 각각 개인적으로 가나안으로 옮겨가지 않았다면 이 때에 함께 가지고 나왔을 것이다(행 7:16).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실 때에 그의 뼈가 반드시 옮겨질 것이라는 특별한 명령을 받은 바 있다(창 50:25, 26). 그래서 그들은 그의 유골을 옮김으로써 그들의 조상이 요셉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 곧 하나님이 그들을 찾으신 것이며 그들을 애굽땅에서 인도에 내시리라는 약속의 이행을 인식시켜 그들의 신앙을 고취했고, 또한 다른 약속의 부분 즉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약속도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기대 속에서 그들을 광야를 방황하는 동안도 그의 유골을 가지고 다녔던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요셉의 유골은 반드시 곧 쉬게 될 것이니, 그 때 우리로 쉼을 얻을 것이라" 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세는 이 유골들을 함께 가지고 가자고 말했다. 모세는 당시 매우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요셉도 그의 한창 때가 있었으나 이제는 한낱 한 상자의 마른 뼈에 불과했다.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모든 것이다. 이 일은 모세에게 자기의 유한성을 상기시켜 주는 충고자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밝히 말하기를 "너는 신이라" 고 하셨다(7:1). 그러나 이제는 인간들처럼 너는 죽으리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Ⅱ. 그 안내자는 그들을 축복받는 길로 인도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기둥으로 인도하셨다" (21,22). 처음 두 구간까지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갈 길을 지시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세가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광야 끝" (20절)에 다다르게 되어, 그들에게는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한히 지혜롭고 친절하고 신실하신 매우 훌륭한 안내자를 맞게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키나(shechinah:이것은 신적 위엄의 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이든가 또는 "때가 차서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영원한 말씀이 미리 현현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교회와 함께 계셨던 것이다(고전 10:9).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는 것이다" (미 2:13). 광야로 인도하신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그들을 길 잃게 하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무사히 광야는 통과하도록 잘 인도하실 분이심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확신은 모세에게나 신앙 있는 이스라엘인들에게는 매우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길을 잃을 염려가 없으며, 그와 같이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방황할까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저들처럼 그들의 길이 밝혀진 자들은 밤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그와 같이 보호를 받은 자들은 강도를 만나 재물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자기들의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령을 자기들의 심령의 안내자로, 하나님의 섭리를 그들 사업의 안내자로 삼는 자들은 그때처럼 육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여호와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앞에서 행하셨듯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행하신다" 는 확신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에 의하여 살아가야 한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가시적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나는 거룩한 기둥의 출현을 보았다.우리는 밤에는 불꽃으로 보이던 것이 낮에는 흔히 연기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신앙의 약함을 불쌍히 보시는 또 교회의 유아기적 형편을 아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로 보여 주셨던 것이다. 또 저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이 사용하는 말로 들려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보지 못했으나 믿는 자들" 이 복 있는 자들이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둥으로 그들 앞에서 가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효험을 체험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1) 그 기둥은 길도 없고 발자취도 없으며 이정표나 지도도 없을 뿐 아니라, 안내자도 없는 그 광막하고 쓸쓸한 광야에서 길을 인도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군할 때에 이 기둥은 그들이 따라 올 수 있도록 그들 앞에서 움직이며 그들의 숙영지도 정해 주었다. 그 숙영지는 무한한 지혜이신 하나님어야 적합한 곳이라고 보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움직일 때나 쉴 때에 그들의 근심과 위험을 덜어 주고 안심케 해 주었다.
(2) 그 기둥은 낮에는 연중, 어떤 때는 극도로 달하였던 더위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3) 밤에는 빛을 제공하여 줌으로써 항상 그들의 숙영지를 즐겁게 하였으며 광야에서도 별로 무서움을 모르게 하였다.
Ⅲ. 이것은 늘 변함없던 기적이었다(23절). 하나님이 "구름기둥이 떠나지 않게" 하셨다. 그들이 잘 아는 지방을 통과하므로 필요없이 보이던 때에도, 또 그들이 불평을 하고 화를 낼 때에도 구름기둥을 제거시키지 않으셨다. 구름기둥은 그들이 가나안 국경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구름기둥은 바람이 흩어버릴 수 없었던 구름이었다.
먼 후일에 이 은총에 대한 감사가 드려진다(느 9:19; 시 78:14).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에는 몇 가지 영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1. 혹자의 생각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그 구름이 그들의 머리 위에 이슬을 떨어뜨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고전 10:2). 이 구름 밑에 들어온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역자 모세의 명령에 자신들이 순종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호가 충성심을 유발한다. 이 구름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나타내는 뱃지였고, 그래서 그들의 충성심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광야로 들어서게 되자 하나님의 통치 하에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2. 혹자는 이 구름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한다. 그의 인간성이라는 구름은 그의 신성(神性)의 불과 빛에 대한 베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구름으로 옷 입으시며, 그의 발은 불기둥 같으시다는 기록이 있다" (계 10:1).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이시며, 우리의 길에 빛이 되시고, 그 길의 안내자이시다.
3.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받을 특별한 안내와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시며 "결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다(시 121:4; 사 27:3). 시온의 모든 집회 위에는 물론 시온의 모든 거처에는 방어 지대가 구축되어 있다(사 4:5, 6 참조). 또한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날개의 그늘 아래에 숨기워진다(시 17:8).
이 구름 가운데서 활동하는 천사들은 저들의 복을 위해 고용되었으니, 저희의 둘레에 저들의 장막을 친다. 오! 너 행복한 이스라엘이여! 누가 너와 같으리오, 어느 민족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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