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출애굽기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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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출생(출애굽기 2:1-4)

모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분 다 레위인이었다. 야곱은 레위가 치욕의 상황에 처할 것을 예언했었다(창 49:5). 그러나 그 후 곧 모세는 레위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며, 이것은 허물 많은 육신의 모양을 입으시고, 우리로 인하여 저주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파는 모세의 출생으로 다른 지파와 구별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괄목할 만큼 뛰어나게 되었다. 이 갓난 아기에 대하여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Ⅰ. 모세는 어떻게 숨기워 있었는가? 히브리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기 위해 잔인한 법이 제정된 것은 바로 모세가 출생할 당시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어린 사내 아이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의 양친에게는 모세보다 나이가 많은 미리암과 아론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살생의 법이 있기 전에 태어나서 별 위험 없이 키워졌던 것 같다. 그러나 평화스럽게 세상에 태어난 자들은 그들이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그들이 부딪칠 역경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아마도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출생을 예상하고서 근심에 싸여 있었을 것이니, 살생의 법이 발효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태하지 못한 자가 복이 있도다" 하는 말과 같은 형편이 되어 버렸다(눅 23:29).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 내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나았을 것이다(호 9:13).

그러나 이 아기는 후일 그 아비의 집에 영광이 되었다. 이와 같이 때때로 우리의 가장 큰 근심이 결국엔 우리의 가장 큰 기쁨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하심을 보라. 바로왕의 포악함이 그 절정에 있을 바로 그 때에 비로소 구원자가 태어난 것이다. 인간이 교회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고 할 그 때에 하나님은 교회의 구원을 예비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명심하자. 후일에 이스라엘을 이 속박의 소굴에서 이끌어내게 될 모세는 압제자의 광포의 희생 제물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그 살인자들의 손에서 그의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해 거룩한 열심으로 더욱 힘을 얻도록 한 것일 뿐이다.

1. 그의 부모들은 그가 귀여운 다른 아이들보다도 더 "훌륭한 아이임을 알았다." 즉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아이었다(행 7:20). 그들은 이 아이가 보통 아이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 광채가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후 그는 그의 얼굴에 과연 빛이 있었다(34:29).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위대한 역사를 대행하도록 계획하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사의 보증과 자신을 미리 나타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하나님은 삼손을 강하게 하셨으며(삿 13:24, 25), 사무엘에게 가까이 하셨고(삼상 2:18), 다윗을 구원하셨으며(삼상 17:37), 디모데에게는 어려서부터 같이 하셨던 것이다(딤후 3:15).

2. 그러므로 부모들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더 큰 염려를 기울였다. 그들은 이것이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경륜과 어떤 위대한 일에 대한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고 활동적인 신앙을 하나님에 대한 은총의 가장 적은 징후로부터도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두자. 즉 섭리자 되시는 하나님의 자비스런 암시는 그것을 부지런히 찾고 찾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발각된다면 부모들의 생명까지도 위험했지만, 그들을 "석 달 동안" 모세를 자기들의 집 어떤 은밀한 방에 숨겨 두었다. 여기에서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다(마 12:13). 즉 그리스도께서도 수많은 아이들이 학살당했을 때에 기적적으로 보호되었던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는 모세의 부모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모세를 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는 그들의 부모는 구원자가 그들의 자손 가운데서 출생할 것이라는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들은 이스라엘의 보존에 대한 일반적인 약속을 믿었으며, 그 약속이 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행동하게 되었고,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움이 없이 거역해 가며 그들의 아기를 숨긴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앙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은 자비를 획득하는 합법적인 방법을 더욱 촉진하게 하는 것이다. 의무는 우리들의 몫이요, 그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사람을 사로잡는 두려움이 우리를 해방에 줄 것이다.

Ⅱ. 그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석 달이 다 될 무렵 숨겨진 어린애를 찾는 자들이 두루 돌아다니자 그들은 더 이상 그를 숨길 수가 없었으므로(아마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 같다) 그들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가에 놓아두고" (3절) 그의 누이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게 하여 그가 어떻게 되는가, 누구의 손에 넘겨지는가를 살피도록 하였다(4절).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이 일을 하게 하셨다. 즉 모세가 바로의 딸의 들어가게 하고 나아가 이 절박한 위험에서 그를 구하심으로써 지금처럼 버려진 하나님의 교회를 구원하리라는 실례를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버림받은 자들을 특별히 보살피셨다(시 147:2). 이들은 그의 버림받은 자들이었다(사 16:4). 모세는 그의 친구들에게서 완전히 버림받게 된 듯이 보였다. 그의 어머니도 감히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 그를 붙드셨고 지켜주신 것이다(시 27:10).

2. 지극히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섭리를 감히 의지하는 모험을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들이 그들의 아이를 감추어야 했던 그때에 그를 내버렸다면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능력으로 보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는 섭리에 따르는 일이었다고 할 수 없다. "모험이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 내가 망하리라 하면 망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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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구출(출애굽기 2:5-10)

Ⅰ. 멸망의 위험에서 모세는 구원을 받았다. 이 위대한 인물이 어렸을 적에 처해 있었던 곳을 와 보라. 그는 갈대 상자에 담겨 강가에 버려졌으니, 만일 그가 그 곳에 놓인 채로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곧 굶주려 죽었을 것이다. 그가 만일 물 속에 가라앉지 않았다면 악어에게 삼켜지고 말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어떤 다른 이의 손에 넘겨졌더라도 그들은 그를 곧 바로 강 속에 처박아 버렸을 것이리라. 그러나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의 공주를 이 불쌍하게 버려진 아기가 있는 곳에 인도하여 그를 불쌍히 여기게 하셨다. 이것은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아기의 울음 소리가" 공주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5,6절).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하여져 절망에 처한 어린이에게조차 연민의 정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불우한 처지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일이 보살피시니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큰가!(겔 16:5, 6)

2. 비천한 자의 고통을 알아 주고 그들을 돌보고, 도와 준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할 일인 것이다.

3. 우리는 모세처럼 버림받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어린 시절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위험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 마땅한 것이다(시 22:9, 10).

4. 하나님은 가끔 그 대적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할 동역자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잔혹하게 멸망시키려 했는가 하면, 그의 딸 공주는 히브리인의 아이를 다정하게 동정했다. 그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양육해 주게 된 것이다. 오! 주여, 당신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도소이다!

Ⅱ. 모세는 사랑하는 친어머니를 훌륭한 유모로 제공받았다(7-9절). 바로의 딸은 그가 히브리인을 유모로 두는 것이 편리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모세의 누이는 훌륭한 기지를 써서 모세의 어머니를 그의 유모로 소개하였다. 이것은 그 아기에게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어머니야말로 아기에게는 최상의 유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 어머니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만족이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음에서 살리게 되었고, 이제 두려움 없이 그와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너무 기쁨에 도취되고 행복에 겨워하였더라면 그녀가 그의 친 어머니임이 탄로났으리라고 짐작된다(왕상 3:27).

Ⅲ.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로 발탁되었다(10절). 그리하여 그의 부모는 공주를 위하여 그를 양육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아들이 됨으로써 받는 그 영광에 대해 퍽 기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미소들은 성난 얼굴보다도 우리에게는 더 강한 유혹이어서 거스르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전설에 따르면 바로의 딸은 자기의 친 자식이 하나도 없었으며, 그녀 또한 그 아비의 외동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세가 그녀의 아들로 책정되었을 때에 그는 의젓이 왕관을 쓰고 궁정의 고위층들 앞에 서 있게 되었으며, 궁정에서 최상의 교육과 지도를 받았고, 수재들의 도움으로 애굽의 모든 학문에 능통하게 되었다고 한다(행 7:22). 다음을 기억해 두자.

1. 하나님의 섭리는 때때로 가난한 자를 그 진토에서 일으키시어 방백들 중에 세우신다(시 113:7, 8). 날 때에는 미련하고 가난해 보이던 수많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결과로 세상의 마지막에 가서는 상좌에 앉게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이(세상을) 통치하심을 알게 만든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위대하신 역사를 이루도록 계획하신 이들을 찾아내어, 미리 자격을 구비케 하시어서 준비시킨다. 모세는 그가 궁정에서 받은 교육으로 왕자와 여수룬의 왕이 되기에 적합하였다. 궁정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음으로써(당시의 애굽은 그러했다)역사가(성서 기록)가 되기에도 적합하게 되었다. 그가 애굽 왕국의 교육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왕궁에 파견된 전권 대사로서의 자격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Ⅳ. 그의 이름은 모세라고 지어졌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할례를 받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요아김이라고 이름 지었으나 바로의 딸이 그를 모세 곧 "물에서 건져진 자" (모세라는 애굽말의 뜻이다)라고 불렀다. 유대의 율법 수여자를 그리하여 애굽인이 명명했다는 사실은 이방세계에 대한 좋은 징후인 것이다. "나의 애굽에 복이 있으라" (사 19:25)고 말해질 그 날에 대한 희망을 주는 사건이다. 또한 그가 궁정에서 교육받았음은 이사야 49장 23절 말씀인 "열왕이 너의 양부가 될 것이며 왕비들이 네 유모가 되리라" 는 약속 이행의 보증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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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살인 사건(출애굽기 2:11-15)

모세는 이제 자신의 사명를 감당키 위한 준비를 하면서 바로의 궁전에서 그 생애의 첫 40년을 보내었다. 바야흐로 이제는 그가 행동으로 옮길 시기가 온 것이다.

Ⅰ. 그는 대담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망을 지지, 옹호하고 나섰다. 본문 11절에 보면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 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아가 그 고역함을 보았다" 고 하였는데, 이 뜻은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다. 곧 다음과 같은 설명이다.

1. 모세는 애굽 왕궁의 영화와 쾌락을 감히 멸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그 곳을 떠났다. 그 유혹은 실로 강한 것이었다. 그는 소위 출세의 좋은 기회를 쥘 수 있었으며, 또한 왕궁에 있다는 이점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인에게 대해 봉사할 수도 있었다. 그는 바로의 딸에게 호의와 감사로 순종을 해야 했으나, 마침내 거센 유혹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영예로운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는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영예롭고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2. 모세는 속박당하고 수없는 불쌍한 동포에게 자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뜻이다. 그는 그들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고난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는 그들의 멍에를 보고 동정을 그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같이할 것을 결연히 결심하였던 것이다.

Ⅱ. 모세는 앞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위해 해야 할 위대한 일에 대한 모범을 두 가지 작은 실례로 보였다. 이것은 그의 열조들이 "항상 성령을 거슬렸다" 는 것을(행 7:51) 보여 주었던 스데반의 말에서 자세히 나타나 있다(행 7:23 이하). 또한 모세가 처음으로 그들의 구원자로 나타났를 때에도,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할 사역자이었던 모세에게 고의적으로 반감을 품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행하는 일 가운데서 분명히 하나님의 지도와 충동을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으며, 게다가 그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이제 다음 사실을 살펴 보자.

1. 모세는 그 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악을 행했던 애굽인들을 괴롭혔다. 그 한 예로써 모세는 히브리인을 때린 애굽인을 죽였는데, 아마도 그는 (혹자가 생각하는 대로) 모세의 친척이요 그와 같은 레위 지파에 속하는 히브리인 노예를 학대하였던 애굽의 감독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모세가 애굽인을 죽이고 억압받던 그의 형제를 구하였던 것은 일상적인 사례에서는 있을 수 없었지만 하늘의 뜻이 있었던 일이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어떤 무기로써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인 베드로처럼 그 입의 말씀으로 죽였다고 한다.

" 모세가 그를 모래에 감추었다" 함은 후일 바로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이 모세의 권능으로 인하여 홍해 바다의 모래 속에 장사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혼자서 이 정의 (正義)를 실행하려던 것은 긴요한 신중성과 조심성을 동반한 하나의 시험적 행동이었을 뿐이다. 아마 아직은 그의 신앙이 약한 상태에 있었으므로 그가 한 일에 대하여 그는 약간의 주저함을 가졌을 것이다. 깊은 신앙에로 성장하는 사람들도 지극히 적은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였으며, 처음에는 무서워 떨면서 말도 제대로 못했던 것이다.

2. 모세는 그 후 이스라엘인들을 다스리는 일을 하였다. 그 예로써 두 히브리인 사이의 다툼을 말리려 했고, 그 때문에 그는 고난을 당하게 되고 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모세와 두 히브리인 사이의 불미스러운 다툼(13절).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히브리인들 모두가 애굽인들의 혹심한 억압과 지배를 받고 그런 때에 그들이 서로 싸웠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애굽인들의 매가 부족하여 그들이 서로 때려야만 했었다는 말인가? 다음을 명심하자.

[1] 다 함께 받는 공통적 고통마저도 우리가 흔히 기대할 수 있는 만큼 그렇게 하나님을 보았는 백성들을 서로 연합시키지는 못한다.

[2]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를 일으키실 때에는, 압제자 애굽인들을 견제하고 다투는 이스라엘인들을 화해시키는 일이 생김을 우리는 충분히 볼 것이다.

(2) 모세가 그들을 처리한 방법. 모세는 잘못을 저지른 자를 따로 세워놓고 "네가 어찌하여 너의 동료를 치느냐?" 고 유순하게 따져 물었다. 남을 헤치던 애굽인은 죽임을 당했으나, 해치던 히브리인은 단지 질책을 받았을 뿐이었다. 전자의 행동은 근본적으로 악한데서 우러난 범죄였으며, 후자는 일시적 격분으로 그리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하신 하나님은 모든 현명한 통치자들처럼 하나님 자신의 본보기에 따라서, 또 동일한 범죄라도 범죄의 성질에 따라서 범죄자를 서로 구별하실 수 있다. 모세는 그들을 친구로 삼으려 했다. 그것은 선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이 다툴 때에 그들을 나무라셨던 것을 알 수 있다(눅 9:46 이하;22:24 이하). 이는 그 병든 자를 치유하는 여언자로, 화평케 하시는 자로, 또한 모든 원수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그의 동포들을 찾아간 모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있었던 "어찌하여 너의 동포를 해치느냐?" 고 하는 모세의 책망은 오늘날까지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동포를 해치는 것은 어떤 경우이든 나쁜 일이며, 특히 어떤 종류의 박해를 통해서는 어떤 다툼이나 싸움에서든 간에 말이나 손으로 동포를 서로 해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더욱 악한 일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우리가 해친 자들을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의 동포요, 형제요, 동료인 그리스도교인이며, 우리의 종 곧 고난받는 동포인 것이다. "어찌하여 해쳤는가?" 를 생각해 보라! 아마도 전혀 정당한 이유와 원인이 없을 것이며, 말할 가치조차 없을 것이다.



(3) 모세의 계획의 불행한 결과(14절). "누가 너를 우리의 법관으로 삼았느냐?" 고 했다. 그리하여 악행을 행한 사람이 모세에게 싸움을 걸어 온 것이다. 피해를 입은 쪽은 분명히 화해하려 했으나 가해자 쪽은 오히려 이렇게 성을 냈던 것이다. 책망을 참지 못하는 것은 죄책의 표징이며, 흔히 가해자에게 그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 보다는 피해자로 하여금 그 잘못을 참으라고 설복시키는 일이 차리리 더 쉬운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자(고전 6:7, 8). 모세가 말썽을 부린 그 히브리인에게 준 책망은 매우 사려깊고 온화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쓸데없는 저항을 하여 상처를 입었고(행 9:5) 자기를 책망하는 자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1] 그는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다. 즉 "누가 너로 우리인데 법관을 삼았느냐?" 고 했다. 사람이 우정어린 충고를 하는 데에도 어떤 큰 권위가 필요한 것을 아니다. 그것은 친절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우정의 충고를 지배 행위와, 건방지고도 주제넘은 일로 여겨서 권위가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이 좋은 충고나 적당한 훈계를 싫어할 때에, 그들은 그 충고나 훈계를 설교라고 부르려 한다. 그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지지하거나 죄악을 반대하는 어떤 말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양, 모세를 몹시 비난했다. 그러나 모세는 사실상 그들의 왕자와 심판자이었다. 그는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히브리인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자기를 도와 협조할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였으며, 그를 "밀쳐 내버린" 것이다(행 7:25-27).

[2] 그는 모세가 애굽인을 죽였던 일로 그를 비난하며 또 "나도 죽이려느냐?" 고 대들였다. 최선의 말과 행위가 얼마나 악한 악의로 해석되고 있는가를 보라! 모세가 그를 꾸짖었다 하여 모세가 즉시 자기를 살해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죄악을 비난하는 공격을 그의 생명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였다. 모세는 애굽인을 살해했으므로 그런 혐의를 충분히 받을 수도 있었다. 마치 모세는 애굽인과 히브리인을 구별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만약 모세가 피해를 입은 히브리인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인을 살해 했다면, 히브리인은 마땅히 히브리인의 친구이다. 또한 비범한 권력과 열성을 가진 친구인 모세에게 복종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행한 일이요 약속된 전조이었던 모세의 행위에 욕설을 퍼부었다. 만약 히브리인들이 그 암시를 깨닫고 모세를 그들의 우두머리 곧 지도자로 맞이했다면, 아마 그들은 그 당시에 해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해방자를 저들이 멸시했으므로 저들의 해방은 마땅히 지연되고 저들의 속박은 40년이 더 연장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후에 가나안인들을 멸시하여 가나안인들이 40여년 동안이나 그 땅에서 쫓겨났던 것과 마찬가지다. "나(여호와)는 원하나 너희는 (해방을) 원치 않는도다." 신실한 책망과 충고자를 거역하고 멸시하려는 인간은 자기들이 행하는 바를 바로 알지 못하며, 무엇이 그들 자신의 유익에 적이 되는가를 바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다투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내어 보내시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후 40년 동안 모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평화의 날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눈에는 숨겨져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축복의 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세는 아마 커다란 실망으로 낙심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택하였고 그리스도께서 당한 치욕을 감수할 것이다. 이제 그가 첫 출발에서 이러한 고통을 당했고, 동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결심에 대한 매우 괴로운 시련이었다. 아마도 그는 "이것이 히브리인들의 생각이라면 나는 다시 궁정으로 돌아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겠다" 고 말했을 지도 모른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첫째, 우리는 몇몇 특정 종교인들의 어리석음과 까다로움으로 하나님의 방법과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좋지 않은 편견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 교회의 가장 훌륭한 친구들도 그들의 목회와 구원 사업에서 많은 반대와 실망에 부딪치며, 심지어는 그의 형제들에게서도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도 건축자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돌이 되셨으며, 지금도 그가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자들에게서 여전히 배척받고 있다.



(4) 그 결과로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간다. 결국 지금까지 모세를 향하여 한 모욕과 언사는 그에게 실로 친절을 베푼 말이 되고 말았다. 즉 모세는 자기가 애굽인을 죽였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진 것을 깨닫자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바로의 진노가 불현 듯 그를 처치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다툼까지도 그의 백성에게 유익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세가 애굽인을 죽였다는 정보(이것은 모세의 책망을 받은 그 히브리인의 소행이 아니었음은 다행이다)가 바로에게 전해졌다. 모세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안전을 위해 미디안으로 도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5절).

[1] 모세는 그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신중한 생각에서 이 일을 행하였다. 만약 그가 애굽을 버린 것이 사도들의 기록과 같이 믿음으로 된 일이라면(히 11:27),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위무를 다하려다가 어려움과 위험에 처하게 될 경우 신앙의 은혜는 우리 자신에게 합당한 보존책을 적절히 강구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7절에는 "그가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였고, 본문 14절에는 "그는 두려워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모세는 그를 약하게 하고 괴롭히는 망설임과 놀람에 대해서는 두려워 하지 않았으나, 자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앞에 열려 있는 섭리의 길을 따르기를 재촉하는 근면성에서 오는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2] 하나님은 현명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것을 마련하셨다. 사물은 아직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성숙되지 않았다(때가 되지 않았다). 애굽의 죄악의 분량이 아직 차지 못했으며, 히브리인들도 충분히 욕을 당하지는 않았고 그 인구도 하나님이 정한 수에는 달하지 못했었다.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을 해방할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은총의 때가 곧 정해진 때가 오기까지는 당분간은 물러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그 미디안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그들 중에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거기서 안전을 찾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편안히 정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후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 나라를 지나가도록 인도하였으니, 모세는 이미 지금 통과하여 거기에 익숙해질 기회를 찾은 것이다(아마 그래서 더 잘 인도했을 것이다). 그는 애굽을 떠나 그 곳에 이르러 한 우물 곁에 피곤과 깊은 생각에 빠져 막연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그를 인도하시는가를 알아보려고 기다리면서 앉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바로의 궁전에서 안락하게 지냈던 날들에 비하면 크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의 신앙을 이토록 연단시키시니,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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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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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결혼(출애굽기 2:16-22)

그의 조상 야곱이 수리아에서 정착지를 얻었듯이(29:2 이하) 모세는 미디안에서 정착지를 얻고 살았다. 이 두 사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위지하고 거기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아주 우연한 일로 보이는 사건일지라도 후일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지혜로써 그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마련된 것이고 그의 백성에게 중대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우연적이고 사소한 일이 때로는 인간 생활에 가장 큰 행복의 전환점이 되는 수가 있다.

Ⅰ. 미디안의 제사장이거나 방백이었을 르우엘의 일곱 딸들에 관하여 살펴 보자.

1. 그들은 시골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겸손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양들을 위해 물을 긷고 있었다" (16절). 그들의 아버지가 방백이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비록 영예로운 가문의 자녀로 태어났고 그나라에서 특권과 대우를 받는 신분에 있었지만 그들은 직접 어떤 유용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그들이 해야할 일은 전력을 다하여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무위(無爲)는 결코 사람의 명예일 수 없다.

그들의 아버지가 제사장이었다면, 그것은 목사의 자녀들은 여로모로 겸손과 근면에 있어서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다.

2. 그들은 정숙한 여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아비가 불러오게 하기까지에는 이 낯선 애굽인(비록 잘 생기고 훌륭한 모습의 남지이긴 했지만)을 자기들과 함께 집으로 가자고 청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숙은 여인이 갖추어야 할 장신구이다.

Ⅱ. 모세에 관하여 살펴보자. 그는 애굽인으로 간주되었다(19절). 낯선 자는 오해를 기꺼이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는 얼마나 기꺼이 르우엘의 딸들의 양들에게 물먹이는 일을 도와 주었던가! 학식이 많았고 궁중에서 성장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와 같은 경우에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인들에게서 목자들을 경멸하는 것은 배우지 않았다. 자유스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노예적인 천박한 일에 문외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필연성을 주어 그들이 자신을 위해 일을 하게 할 지 모르며, 또한 어떤 기회에 다른 사람을 섬기도록 역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젊은 여인들은 그들이나 그들의 종들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에 처한 것 같이 보인다. 혹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웃 방백의 목자들이거나 아니면 자칭 목자라고 하는 어떤 게으른 건달들이 "그들의 양떼를 몰아 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우울했고 피곤했지만 "일어나 그들을 도와 주었으니", 곧 그 목자들을 쫓아 버렸을 뿐 아니라 그리고 나서 양떼에게 물도 먹여 주었다. 이것은 르우엘의 딸들이 자기에게 친절했으므로 동정심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도 그 때 그가 처한 상황 하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 그는 공의를 행하는 것과 그가 목격한 그와 같은 피해자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워했다.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들의 힘이 자라는 한도까지는 해야만 되는 일인 것이다.

(2) 그는 선을 행하기를 좋아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어떠한 것으로 내몰든지 우리는 거기에서 우익을 구하기를 희구하고 노력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들의 원하는 바의 선을 행할 수 없을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그 선을 기꺼이 실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작은 일에 신실한 자가 큰 일을 위탁받게 되는 법이다.

2. 그의 봉사 행위는 얼마나 훌륭한 댓가를 지불 받았던가! 그 젊은 여자들이 그들의 부친에게 이 낯선 이가 자기들에게 베푼 친절을 알렸을 때, 그 부친은 모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정중히 대접하였다(20절).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진 친절에는 언제나 거기에 보상하실 것이다. 결코 저들이 상급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모세는 즉시 그 미디안 방백의 친절과 호의로 보상을 받았다. 그 방백은 그를 자기 집에 유하게 하고, 얼마 안 가서 자기 딸 중의 한 여자와 결혼하게 했다(27절).

모세는 그녀에게서 아들을 낳게 되어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였으니, 그 뜻은 "타국에서 나그네" 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의 가정을 일으켜 주셨을지라도, 그는 자기가 나그네로 지내던 땅을 기억했을 것이다. 모세가 이제 이렇게 미디안에서 정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1) 하나님께서 모세를 잠시 동안 피신시킨 것은 그의 백성들의 고통의 날에 그들이 숨을 곳을 마련에서 주시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친히 그들의 지성소가 되시어 그들은 보호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2) 또한 하나님은 장차 하실 위대한 역사를 위해 그를 준비시키려고 계획하셨던 것이다. 장인의 양을 치던 미디안의 생활이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 때 그에게는 자기 양은 한 마리도 없었다.)

[1] 즉 역경과 가난을 익힘으로써 모세는 부활 때와 마찬가지로 가난에도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존귀케 할 자를 먼저 낮추신다.

[2] 또한 그에게 명상과 신앙심을 길러 준 것이다. 애굽은 그를 학자로, 신사로, 정치가로, 또한 군인으로서 성장시켜 후일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유익하게 하였지만, 아직 애굽 왕궁이 할 수 없었던 한 가지가 그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모든 일을 해야 하는 자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한다. 미디안 목자 생활의 고독과 은둔을 통해 그는 더욱 성장하였을 것이다. 그는 전자(명상의 수련)를 통해서는 여수룬에서 통치할 준비가 되었고, 후자 (신앙심)로 인하여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룩된 셈이었다. 그 산 근처에서 그는 그 생애의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경건의 수련속에서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은 모세가 바로의 궁정에서 맛보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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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받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출애굽기 2:23-25)

1.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박이 계속된다(23절). 아마도 유아 살해는 계속되지 않은 것 같다. 유아 학살의 고통은 모세의 출생 직후에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의 시대는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그 후 애굽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의 팽창에 대해 만족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노동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부유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종으로 삼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치 않았다. 이리하여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모두 빠짐 없이 일시켰고 그들의 노동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계획했다.

한 바로 왕(바로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칭호임)이 죽고 다른 바로가 왕위에 올라와 전 왕과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으며, 그의 선왕들처럼 역시 이스라엘인에게 가혹하였다. 때때로 조금 속박을 늦추기는 했지만, 즉시 전보다 더한 강포를 휘두르곤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번성했듯이, 또한 그들이 번성하면 할수록 더욱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어깨 위에 악한 자들의 채찍을 매우 오랫동안, 그리고 매우 고통스럽게 허락해 두시는 때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모세가 미디안에서 사는 동안 어느 한 때에, 그가 만약 애굽 궁정에 계속 있었더라면 자기의 형편이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었다면, 또한 그가 그의 형제들과 운명을 같이 했었더라면 지금의 형편은 얼마나 비참해졌을까도 스스로 생각했어야만 했다. 미디안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것을 그에게 큰 퇴보였으나, 그래도 애굽에서 벽돌 찍는 것보다는 더 나은 형편이다. 우리는 우리 동포들의 고통을 신중히 생각해 본다면 서로 화해될 수 있을 것이다.

2. 마침내 이스라엘 해방의 서막이 시작된다.

(1) "히브리인들이 부르짖음이 있었다" (23절). 드디어 그들은 그들의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우상에서 돌아서기 시작했다(겔 20:8). 지금까지 그들은 그들의 고통의 희생물이 된 나머지 그들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박할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한다" (욥 36:13).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속박을 풀기 전에, 먼저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게 하시는 것이다(민 20:16). 하나님이 우리를 그에게로 향하게 하고 해방을 간구는 데에 하신다는 것은 멀지 않아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해방으로 임하시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확실한 표적임을 명심하자.

(2) "하나님께서 들르셨다" (24,25절)고 했다.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뜻을 표현하는 말의 접미사처럼 강조되어 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을 알고 계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압박받는 자의 신음소리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귀에 분명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니, 특히 그의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복수해 주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신음하게 하는 그들의 멍에, 그리고 그들의 신음하듯이 갈급해 찾는 축복, 더욱이 그들 속에서 그들을 위하여 대신 중재의 신음을 하고 있는 성령의 탄식을 아신다.

[2]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기억하였다." 그의 계약을 잊고 있는 것 같이 보이나,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계약을 마음에 두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이 계약을 유념하시나니 그 계약 속에서 그들을 위해 친히 행동하신다(레 26:42 참조).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녀들을 살펴 보셨다." 모세는 그 동포를 돌아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겼다(11절).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굽어살피시사 도와 주시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당신 자신의 백성인 그들에게 은혜스러운 관심을 가지셨다.

여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자주 반복되는 것은 이제 우리는 어떤 위대한 일 곧 opus Deo dignum-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상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인들 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강하심과 그가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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