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우벤에 대한 예언(창세기 49:1-4)
Ⅰ. 예언의 서언이 있다.
1. 회중이 모아졌다(2절). "너희는 함께 모이라," 그들 모두가 그들의 업무를 떠나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고 그의 유언을 듣도록 보내라. 비록 그가 종종 죽음으로 인해 처자식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었지만, 임종하면서 그의 모든 자식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기 주위에 보는 것은 야곱에게 위안이 되었다. 마지막 순간의 그를 본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유용했으나, 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그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그는 각자에게 다른 사람이 듣는 데서 그 말할 바를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증거와 조언과 위안에 의해서도 유익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에게 다시, 또다시 함께 모이는 것을 끊지 말라는 것), 그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과 이삭의 아들들처럼, 서로 갈라지지 말고 합동하여 하나의 백성을 이룰 것이라는 예언을 암시했다.2. 전반적인 의도가 나타나 있다(1절).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너희 사람들이 아니라 너희 재산이) 이르리라." 이 예언은 그들 후에 오는 자들에게 그들이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와, 거기 와서 정착할 때 그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 그들의 길을 안내하는 데에 유용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에게 이 세상에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무엇이 일어날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이 이 세상에서 행동한 바에 따라 모든 것의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말해줄 수 있다.
3.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2절).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던 나 이스라엘이 너희를 설복하게(어기게)하라." 자식들은 그들의 신실한 부모가 말하는 것, 특히 그들이 죽었을 때 말하는 것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 그것은 권위와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다(잠 4:1).
Ⅱ. 르우벤에 대한 예언. 그는 르우벤부터 시작하니(3, 4절), 그가 장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족의 명예가 돼야 할 그가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부정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가족의 큰 수치가 되어, 그는 장자의 특권을 상실했다. 그리고 그의 임종하는 아버지는 비록 그를 버리거나 상속을 하지 않지는 않더라도 여기서 단호히 그를 강등시킨다. 그는 한 아들로서의 모든 권한은 가진 것이나, 장자의 권리는 못 갖는다. 우리는 르우벤이 그의 죄를 회개했다고 생각할 근거가 있고 그것은 용서받았다. 그러나 이 부덕의 표시를 그에게 주는 것은 죄악에 대한 증오와 다른 자식들에 대한 경고에 필요한 정의의 부분이었다. 이제 강등의 방법에 있어서
1. 야곱은 여기서 그와 그의 모든 형제들이 그가 상심한 바를 보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속에서 죄의 악함을 보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 장자의 온갖 장신구를 달아 준다(3절). 장자로서 그는 그의 아버지의 기쁨이었고 "그의 기력의 시작" 이었기 때문에 그의 자랑이었다고 했다. 그가 그의 부모에게 얼마나 환영을 받았는가를 그의 이름이 말해준다. 르우벤, 즉 한 아들을 보라. 그에게는 그의 형제들보다 빼어난 품위가 있었고 그들을 능가하는 힘이 있었다. 그리스도예수는 많은 형제들 중 장자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당연히 가장 빼어난 힘과 품위가 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탄생한 그의 교회도 그와 마찬가지로 장자들이다.2. 이 장신구를 떼어내고(4절), 그를 밑으로 던져버리기 위하여 그를 들어올린다. "너는 탁월치 못하리라. 한 지파를 가질 것이나 빼어남은 갖지 못하리라" 라는 한 마디 말이었다. 어떤 재판관도, 선지자도, 왕도 또 다단과 아비람을 제외하고 어떤 사람도 그 지파에서 나오지 않으리라. 그런데 그들은 모세에게 그들의 불 경건한 반항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그 지파는 전진하려 하지 않고 비열하게도 요단 저편에 정착지를 선택했다. 르우벤 자신은 그의 형제들에게 영향을 주도록 그의 장자로서의 그에게 부여된 모든 것을 잃은 것같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에게 말할 때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2:22). 장자의 명예와 특권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없는 자들은 그것들을 곧 잃을 것이고 다만 그들의 이름만 남을 것이다. 르우벤이 가진 성격은, 그것 때문에 그가 이 악평을 듣는데 물같이 불안정했다(끓는 물 같다)는 것이다.
(1) 그의 덕성이 불안정했다. 그는 그 자신과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했다. 때로는 아주 규칙적이고 질서 있는데, 때로는 가장 험악한 길로 빗나갔다. 불안정은 인간의 탁월한 능력을 파멸시킨다. 사람들은 고정하지 않기 때문에 번영하지 못한다.
(2) 그의 명예는 끊임없이 불안정했다. 그것은 그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연기로 사라졌으며 땅에 엎질러진 물처럼 됐다. 덕성을 져버리는 자들은 그들의 명예를 간직할 기대를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야곱은 그가 이와 같이 부덕하게 된 그 죄를 가지고 특별히 꾸짖는다. "너는 네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다." 그가 이 죄를 저지른 것은 사십년 전이었으나 지금에 와서 그것이 다시 그에게 기억시켜진다. 시간이 어떤 죄든 그 죄를 양심으로부터 저절로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므로, 좋은 이름으로부터 그 흔적을 씻어버리지 못할 죄들이 있으니, 특히 제 7계명에 속한 죄들이다. 르우벤의 죄는 그의 가족에 지울 수 없는 악명을 남겼고, 흉터 없이 치료될 수 없는 상처인 불명예를 남겼다(잠 6:32, 33). 결코 악을 행치 않도록 하자. 그러면 그것에 대해 말을 들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예언(창세기 49:5-7)
이들은 나이로 르우벤 다음 사람들이었고, 그들 역시 야곱에게 슬픔과 수치가 되었으니, 그들이 배은망덕하고 야만스럽게 세겜 사람들을 죽였고 그것을 그는 여기서 회상한다. 자녀들은 부모의 불쾌를 초래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나니, 그것을 오랜 후에 더 큰 악으로 받지 않고 축복을 상속받고자 할 때 거절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시므온과 레위의 성격. 그들은 형제였다. 그러나 그들의 아버지와는 달리 그들은 정열적이고 보복적이었고, 맹렬하고 자제할 줄 모른다. 방어를 위한 무기이어야 할 그들의 칼이(이 구절을 난외로 읽을 때;5절) 그들 자신을 해(害)로부터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들을 해치기 위한 폭력의 무기가 되었다. 자식들의 성질이 그 부모의 성질과 아주 많이 다른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야곱의 가족에서도 그랬다. 자식들 형성하는 것은 부모의 능력으로 되지 않고 교육의 성질로도 안된다. 야곱은 그의 아들들을 온화하고 조용한 모든 일에로 걸들였으나 그들은 이와 같이 거칠게 되었다.2. 이것의 한 증거는 세겜 사람의 살인인데, 야곱은 당시 이것을 심히 분개했고(34:30) 아직도 계속 분개하고 있다. 그들은 한 사람, 즉 세겜 자신을 베었고 많은 다른 사람들을 베었다. 그리고 나서는 담을 무너뜨렸고 집을 파괴했으며 그들을 약탈했고 주민을 학살했다. 아무리 훌륭한 통치자들도 그들 휘하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악한 죄를 범하는 것을 항상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한 가족의 두 사람이 유해(有害)한 사람들이면, 그들은 대부분 서로 더 나빠지기 때문에 그들을 갈라놓는 것이 현명하다. 시므온과 레위는 아마도 요셉을 헤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이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야곱이 여기서 약간의 내용을 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분노하여 그들이 "그 사람" 을 베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고집이 얼마나 유해한 일인지 보라.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의 나이 먹고 경험 있는 아버지에게 충고 받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그의 분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차라리 그들 자신의 열정에 의하여 움직이려 했다. 젊은 이들이 그들 자신의 의지를 더 적게 만족시키려 하면 그만큼 더 이로울 것이다.
3. 그들의 야만적인 행동에 대한 야곱의 저항. "오, 내 혼과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6절). 여기서 그는 보편적으로 그런 행위들에 대한 그의 증오뿐만 아니라 특히 그 일에 있어서의 자기의 결백을 주장한다. 아마도 그는 배후에서 돕고 선동했다는 의심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의심을 받으며 죽지 않으려고 이와 같이 그 사실에 대한 증오를 단호히 표현한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명예이다. 영혼의 힘과 기능 때문에 우리는 멸망하는 짐승들과 구별되고 권위가 지워진다는 것을 명심하자.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잔인하고, 유해한 사람들이 속한 모든 사회를 증오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그들의 모의 속에 들어가려는, 또는 사탄의 깊이를 알려는 욕망을 갖지 말아야 한다.
4. 그들을 이 악으로 안내한 그 야비한 욕망에 대한 그의 증오. "그들의 분노가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그들의 인격을 비난하지 않고 그들의 욕망을 비난한다.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1) 분노는 큰 죄의 원인이고 원천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저주 그리고 심판에로 보낸다(마 5:22).
(2) 우리는 우리의 열의를 표현함에 있어서 사람 대신 죄를 사랑하거나 축복하지 않 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죄 대신 사람을 미워하거나 비난하지 않기 위해 항상 죄인과 죄를 구분해야 한다.
5. 이것 때문에 그들의 자손이 낮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예언한 불쾌의 표시. "나는 그들을 나눌 것이다." 레위 사람들은 모든 지파에 흩어졌고, 시므온의 자손은 함께 모여 있지 않았고, 그들은 너무 궁핍해서 그 지파의 많은 사람들이 정착과 생계를 위하여 스스로 흩어졌다. 이 저주는 후에 레위 사람에게는 저주가 되었으며 시므온 지파는 시므리의 죄 때문에(민 25:14) 그대로 저주가 되었다. 수치스런 흩어짐은 죄많은 집단과 도당에 대한 정당한 처벌임을 명심하자.
유다에 관한 예언(창세기 49:8-12)
유다에 관한 영광스런 일이 여기서 언급된다. 나이 많은 세 아들의 죄에 대한 언급이 그 임종하는 족장과 야곱의 검정을 그렇게 심하게 상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유다를 위한 축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축복이 속했다. 유다의 이름은 찬양을 의미하며, 그것에 대한 암시로 그는 말한다. "너는 네 형제들의 찬송이 될지라" (8절). 하나님이 그로 인해(29:35), 그에 의해, 그리고 그 안에서 찬양 받았다. 그러므로 그의 형제들이 그를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칭찬 받을 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들의 찬송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다음과 같은 것이 예언되어 있다.
1. 유다 지파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성공한다. "너의 손이 너의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서 이루어졌다(시 18:40).2. 다른 지파보다 우월하리라고 했다. 그 자체가 수가 많고 빼어났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들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네 아비의 아들들이 내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흘이었다(시 60:7). 그 지파는 광야와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선봉이었다(삿 1:2). 르우벤이 상실한 장자의 특권, 즉 위엄과 능력의 탁월함은 이와 같이 유다에게 돌려졌다. "너의 형제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고 너를 찬양하며, 그처럼 현명하고 용감한 지휘관을 가진 것을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원한과 질시를 받지 않고, 찬양 받으며 갈채 받고 사람들이 기꺼이 그들에게 복종하면 그것은 축복이다.
3. 강하고 용감한 지파이며 지배자와 정복자가 되리라고 했다. "유다는 사자의 새끼로다" (9절). 사자는 짐승들의 왕이어서 그것이 울면 숲 속의 공포가 된다. 그가 먹이를 잡아도 아무도 그것을 보복하려고 그를 추적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으로써 유다 지파는 대단히 강하게되고 큰 승리를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승리로 얻어진 노획을 평화스럽고 조용하게 누릴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즉 그들은 전쟁을 하되 전쟁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한다. 유다는 항상 물어뜯고 항상 노하고 항상 으르렁거리는 성난 사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자기의 힘과 성공에 대한 만족감을 즐기는 웅크린 사자로 비유한다. 이것이 정말 훌륭한 것이다.
4. 이 지파는 왕의 지파가 되어야 하고 메시야가 탄생할 지파가 되어야 했다. "흘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니 실로가 오시기까지라" (10절). 야곱은 여기서 예견하고 예언한다.
(1) 왕권이 유다 지파로 온다는 것, 그것은 다윗에게서 성취됐으니 그 가족에게 왕관이 주어졌다.
(2) 실로가 이 지파에 속한다는 것. 그의 자손, 그 약속된 자손 안에서 온 세상이 축복 받으리라는 것, 저 평화롭고 번영하는 자, 또 어떤 이들이 번역하듯 구세주, 그가 유다에게서 올 것이다. 이와 같이 임종하는 야곱은 멀리 떨어져서도 그리스도의 날을 보았고, 그것은 그의 임종에 위안과 격려가 됐다.
(3) 왕권이 유다 지파에 온 후에 적어도 그들 자신의 정부가 그 지파에서 메시야가 올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니 교회의 왕으로서 그리고 최고 제사장으로서의 그 메시야 안에서 제사장직과 왕권이 결정되는 것이 적합했다. 다윗의 때로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 왕권이 유다에게 있었고, 이어서 유대의 통치자들도 그 지파였으며, 또는 레위 지파였으니 그것은 유다의 자속이었고(그것은 결국 같았다), 유대가 로마 황제의 한 도성이 될 때까지, 곧 우리 구세주의 탄생의 때까지였고, 그 때에는 그 도성 중 하나로서 세금을 물었다(눅 2:1). 그리고 그가 죽을 때 유대인들은 재빨리 주장했다. "우리는 가이사외에는 다른 왕이 없다." 이러므로 우리 주 예수가 와야 할 분이고 우리가 찾아야 하는 바로 그 분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거절하지 못하고 동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바고 그 지정된 때에 왔기 때문이다. 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이 유명한 예언을 놀랍도록 잘 설명하고 예증했다.
5. 아주 풍성한 지파가 될 것이고, 특별히 어린이를 위한 젖이 풍부하며 강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할 포도주가 풍성하리니(11, 12절). 관목(灌木)의 열(列)중에 포도가 하도 흔하고 강해서 그들은 그들의 나귀를 거기에 매었으며 열매가 너무 많이 열려서 그들의 나귀에 실었다. 포도주가 물처럼 풍부해서 그 지파의 남자들은 아주 건강하고 생기 있으며 그들의 눈은 기운차고 빛났고, 그들의 이가 희리라고 했다, 여기 유다에 관해 말한 것 중 많은 부분이 우리의 주 예수에게 적용된다.
(1) 그는 그 아비의 모든 자식들의 통치자이고, 그의 모든 아버지의 적들의 정복자이다. 그리고 그는 즉 모든 성도들의 찬송이다.
(2) 그는 "유다 지파의 사자" 이니 이 예언에 따라서 그렇게 불리우니(계 5:5), 왕권과 권력을 파괴하고 정복자가 되어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3) 왕권이 그에게 속한다. 그는 "율법 수여자" (흘)이며 모든 나라들의 욕망 하는 바(학 2:7), "그 백성의 회중이 그에게" 속할 것이니, 그는 이 땅으로부터 들려서 모든 사람들을 그에게 이를 것이요(요 12:32), 멀리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안에서 그들 집단의 중앙으로 모이리라(요 11:52).
(4) 그에게는 영혼을 부양하고 신선하게 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신성한 생활을 유지하고 고취시키는 모든 것이 풍족하다. 그에게서 우리는 포도주와 우유를 얻으리라. 유다 지파의 모든 풍요를 돈 없이 값없이 얻으리라(사 55:1).
여섯 형제에 관한 예언(창세기 49:13-21)
여기 야곱이 그의 여섯 아들에게 한 예언이 있다.
Ⅰ. 스불론에 관하여(13절). 그의 자손이 바닷가의 땅을 기업으로 가졌고, 상인이 되며 선원이 되고 무역하는 자들이 되리라는 것, 이것은 2, 3백년 후에 가나안 땅이 제비로 나뉘어 "스불론의 경계가 바다로 올라갔을 때 이뤄졌다" (수 19:11). 그들이 그들의 제비를 스스로 뽑았든지 여호수아가 지명해주었든지간에, 우리는 이것이 야곱의 유언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몫으로 나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의 뜻으로 고안된 것 같고 야곱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 같다. 하나님의 섭리의 몫은 원본에 꼭 맞는 사본처럼 하나님의 상담의 계획과 일치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만약 예언이 "스불론이 배를 매는 해변이 되리라고" 예언했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그를 그렇게 만들 것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하나님은 우리의 주거지의 경계를 정하신다. 우리의 운영에 적응하고 그것을 선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요 또한 의무이다. 스불론은 해변에 살았다면 그를 또한 배가 머물 해변이 되었을 것이다.Ⅱ. 잇사갈에 대하여(14, 15).
1. 그 지파의 남자들은 강하고 부지런하며 노동에 적합하고 노동을 하려 하며, 특히 농사일에 적합했다. 인내심 있게 그의 짐을 지고 그것에 적응해서 그것을 보다 가볍게 만드는 나귀처럼 되리라고 했다. 잇사갈은 경작지와 농작물 양쪽으로 세금을 냈다. 그것은 고통을 겪은 지파였고 거기서 생산한 것은 세와 세금으로 요구되었다.2. 그들이 노동 중에도 그들의 몫이 될 그 땅의 비옥함으로 격려되리라는 것.
(1) "그는 집에서 쉬는 것을 좋게 여겼다" 는 것을 알았다. 농부의 노동은 군인이나 선원의 것과 비교하면 정말 휴식에 지나지 않으니, 이들의 조급함과 위험은 너무 커서 집에 남아서 계속적인(평생)일을 하는 자들이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된다.
(2) 그는 토지를 아름답게 여겼다." 기이한 것들로 눈을 채워주는 즐거운 전망뿐만 아니라, 그의 노고를 보상해 주는 즐거운 열매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만 한다면 농촌 생활의 기쁨이 많으니 그 불편을 보상할 만큼 풍족히 채워준다. 잇사갈은 이들을 생각하면서 "그의 어깨를 내려짐을 지었다." 믿음의 눈으로 하늘 보금자리의 좋음과 그 약속의 땅의 즐거움을 보자. 그러면 우리의 현재의 봉사가 쉬워지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 겸손해지도록 해준다.
Ⅲ. 단에 대하여(16, 17절). 단에 관한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1. 그 지파의 일반적인 지파에 관하여, 즉 단은 첩의 아들 중 하나였지만 그는 다른 지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사사(士師)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한 지파가 될 것이며, 나그네의 발꿈치를 갑작스레 물어뜯는 뱀처럼 기술과 책략과 기습에 의하여 그의 적들에게서 이익을 취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 영적인 이스라엘에는 "종이나 자유인" 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유의하자(골 3:11). 단은 다른 어느 지파 만큼이나 좋은 특권을 가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단처럼 뱀의 간사함으로 뛰어나고, 어떤 이들은 유다처럼 사자의 용기로 뛰어날 것이다. 그러나 어느 편이나 다 가나안 사람들을 쳐부수는 하나님의 일을 훌륭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2. 삼손에 관한 말일 것이다. 그는 단 지파였고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즉 다른 사사처럼 들판에서 싸움으로 해서가 아니고 그들을 비밀리에 괴롭히고 곤혹을 줌으로써 그들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켰다. 그는 블레셋인들이 있던 지붕 이들은 그위에 있었다. 밑에서 그 집을 무너뜨림으로써, 마치 말이 자기를 타고 있던 주인을 팽개치듯 해 버렸다. 이와 같이 야곱은 그의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제 말하느라고 지쳐서 죽을 지경이 되어 삽입구 처럼 나오는(18절)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오 여호와여!" 라는 말로 위로 받는다. 마치 주어가면서 한 숟갈의 강심제를 마시거나 영약의 냄새를 맡아 기운을 차리는 자와 같았다. 또는 만약 그가 여기서 중단해야 하고 그가 의도한 바를 다 말하기 전에 숨이 끊어진다면, 이들 마로 그의 영혼을 하나님의 품에 맡기고 숨을 거두려는 것이다. 온화하고 생기 있는 헌신의 경건한 절규는 때로 두서 없기는 하지만 건방진 것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질서 있게는 아니더라도 애정이 넘치는 말이리라.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할 때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가 기다렸던 구원은 "그리스도" 였으니 그가 말한 약속된 자손이었다(10절). 그는 이제 곧 자기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야 하므로, 그는 그들의 회중을 사모하고 있다. 그가 지금까지 기다렸던 구원은 또한 "하늘 나라" 곧 더 좋은 나라였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히 11:13, 14). 그는 애굽에서도 그 나라를 사모했고 지금까지도 계속 추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가 기다렸던 그 구원의 위안을 이제 누리려는 참이었다.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살아있는 성도의 특징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는 하늘로 가는 우리의 길이요 우리는 그 길을 이용해야 한다. 또한 하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안식처이며 그것을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임종하는 성도의 위안이다. 왜냐하면 그가 기다려 온 것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 찾았던 것이 올 것이다.
Ⅳ. 갓에 관하여(19절). 야곱은 그의 이름에 대해 언급하니, 그 뜻인즉 "큰 떼를 의미하며 이 지파의 성격은 전쟁을 좋아하는 지파로 예견하는데, 다음 구절에도 나온다" (대상 12:8). "갓 사람들은" 싸움에 적합한 자들이다. 그가 예견하기를 요단 건너편의 저 지파의 상태는 그 이웃 족속인 모압과 아몬 족속에게 침략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래서 그들이 결코 자신들의 힘과 무용을 자만하지 않도록 그들의 적이 여러번 접전하여 그들을 이길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이 패배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도록 "도리어 추격하리라" 고 안심시키니, 이것은 사울과 다윗의 시대에 이르러 모압 족과 암몬족이 완전히 멸하여 실현되었다(대상 5:18 참조). 하나님과 그 백성의 뜻은 비록 일시적으로 좌절되어 꺾이는 때가 있을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승리할 것임을 명심하자. Vincimur in praelio, sed non in bello 즉 싸움터에서 졌으나, 전쟁은 승리하였노라. 마음속에 은총은 갈등으로 인하여 더렵혀지는 수가 있고 부패의 뭉치가 이를 전복하는 수도 있으나 그 대의(大義)는 하나님의 것이니 은총은 결국 정복자가 되리니, 그렇다. "정복자 이상이다" (롬 8:37).
Ⅴ. 아셀에 관하여(20절). 이는 매우 풍족한 지파가 되리니, 필요한 양식은 물론이거니와 살찜과 "진미", 왕의 "진미" (이는 왕도 "밭의 소산을 받기" 때문에; 전 5:9)까지도 듬뿍 받으리니 이 양식들은 아셀에게서 다른 지파, 아마도 다른 땅에까지 수출되리라. 자연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뿐 아니라 맛있는 것까지도 내려 주셨으니 우리는 그를 은혜를 풍성히 베푸는 자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일용할 양식은 어느 곳에든지 충분히 공급되지만 진미는 단지 특정한 곳에만 주어진다. 곡식은 양념보다 흔하다. 만일 생명이 있는 곳 어디에나 그 만큼의 호사(豪奢)가 주어진다면 이 세상은 지금의 상태보다는 더욱 혼돈해질 것이며, 이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Ⅵ. 납달리에 관하여(21절). 이는 그 이름으로서 투쟁을 가리키는 종족이다. 그것은 "맞붙어 싸움" 을 의미하며 그에게 내려진 축복은 이김을 뜻한다. 그는 "놓인 암사슴" 이다. 비록 이 예언이 몇몇의 경우처럼 완전히 들어맞지만 않았지만 하옇든 이 종족이 다음의 몇 가지 사실과 상통한다는 점은 여실히 증명되었다.
1. 사랑스런 암사슴처럼(이 말은 그의 별명이다. 잠 5:19)자기네 끼리는 물론 다른 종족과도 친근하고 공손히 지냈다는 그들의 언사는 아주 상냥하고 다정하였다.2. 놓인 암사슴처럼 자유를 갈망했다.
3. 빠른 암사슴처럼(시 18:33) 직분을 신속히 처리했다.
4. 떠는 암사슴처럼 위험이 닥쳐올 때에는 소심하였다. 친구에게 매우 친절한 자들이 적에 대하여도 매우 용맹스러운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다.
5. 그들은 붙임성 있고 예의가 바르며 언어는 세련되고 또한 그들은 항상 유순하여 좋은 말만 썼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중에는 제각기 커다란 성격의 차이가 있어 서로 상반되는 점이 많으나 이 모두가 이스라엘 민족을 아름답고 튼튼하게 하는 것이니, 곧 유다는 사자와 같고 잇사갈은 나귀와 같고 단은 뱀과 같으며 납달리는 암사슴과 같다. 신장과 피부색이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격과 재질이 다르다고 서로 헐뜯고 시기하지 않도록 하라.
요셉과 베냐민에 관한 예언(창세기 49:22-27)
그는 이제 그의 가장 아끼는 아들인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축복으로써 끝맺으니, 이를 마치고는 숨을 거두게 된다.
Ⅰ. 아주 크고 충만한 요셉에 대한 축복. 그는 "열매 맺는 가지", 즉 싱싱한 나무에 비유되니(22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고난의 땅에서 열매를 맺게 하셨던 때문이다. 그가 열매를 얻었다(41:52). 그의 이 두 아들은 곧 포도나무의 가지요, 혹은 다른 어떤 무성한 식물과도 같으니,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하나님은 목마르고 시들었던 자들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고 그들과 다른 이들에게도 풍족히 편안케 해주시는 능력이다. 역사에는 요셉에 관한 것이 야곱의 다른 어느 아들의 것보다도 많이 기록되어 있으니, 그러므로 야곱이 요셉에 관하여 한 말은 예언으로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23, 24절). 이에 관하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언급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을 위해 창고에 축복을 쌓아 두셨다는 사실로 야곱의 믿음과 희망을 북돋게 하기 위함이다.(1) 요셉의 곤경과 시련(23절). 지금은 평안하게 명예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야곱은 자기가 옛날에 겪어왔던 고생을 그에게 환기시킨다. 그도 수많은 적을 가졌었으니, 여기서 이르는 바 "활쏘는 자들" 로서, 이들은 악행을 저지르는 데 숙달되었고 박해를 가하는 수법에 통달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요셉을 미워하니, 이제 박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에게 독화살을 쏨으로 하여 그들은 요셉을 심히 괴롭혔다.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 집에 기거하면서 그에게 앙심을 품고, 조롱하고, 탈취하고, 위협하고, 배반하며 그를 죽이려고 생각하였다. 보디발의 짐에 있는 보디발의 아내는 그의 덕행을 뻔뻔히 먹칠할 때마다 그를 심히 괴롭히며 힐난하였는 바(유혹이란 육신에게는 불화살이자 가시오, 선한 영혼에게는 매우 쓰라린 것이다.) 그녀가 이를 견디지 못할 때는 요셉을 미워하고 무고와 화살로 공격하니, 거기엔 하나님이 가장 악한 사람의 양심 속에 준비한 피난처 외엔 방패가 없었다. 필시 바로의 궁중에도 적대자들이 생겨 그의 출세를 시기하고 그를 전복시키려 꾀하였을 것이다.
(2) 이 모든 시련 하에서의 요셉의 힘과 지원(24절). "요셉의 홀이 도리어 민강하였다. "즉 그의 믿음이 꺾이지 않고 꿋꿋이 견디어 내어 이긴 자기 되었다.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라" 함은 그의 다른 미덕이 역량을 발휘하였음을 말하니 곧 싸움터의 무기보다도 강한 그의 지혜와 용기와 인내심이라, 한 마디로 그도 모든 시련을 통하여 성실과 위안을 유지했다. 그는 불굴의 결단으로 그의 모든 짐을 감당하였으며, 결코 그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3) 이 힘의 출처와 근원.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의 손에 의한 것이니 전능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힘을 주실 수 있었으며, 또한 "야곱의 하나님에" 의한 것이니 그와 계약을 맺은 하나님이므로 그를 도왔다. 유혹에 대항하고 고난을 견딤에 필요한 구리들의 모든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의 자비는 충만하며 그의 힘은 우리의 약함을 완전케 해 주신다.
(4) 그가 결국 도달할 영광과 유익의 나리. 그러므로(이상스런 섭리의 방법으로) 그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야곱과 그의 가족의 "목자이자 조식" 곧 부양자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여기의 요셉은
[1]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힐난과 마움을 받음에도 그의 고난을 감수해 내어(사 50:7-9) 나중에는 "목자요 초석" 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2] 전체 교회와 그 특수 신자들의 모형이었다. 지옥이 성도들에게 화살을 쓸지라도 하늘이 그들을 보호하고 힘 주시며, 그들에게 왕관을 씌울 것이다.
2.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이 내용이 전의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라. 네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다" (25절). 여기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그에게서 도움이 있기를 계속 소망하게끔 하는 격려가 되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를 지금껏 도와주신 그는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이나 우리는 많은 에벤에셀(삼상 7:12)을 세움이 합당하리라. 요셉이 전능자 뿐 아니라 "그 아비의 하나님" 에게서까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아라.
(1) 그가 앞으로 너에게 닥쳐올지도 모를 환란과 위험 속에서 너를 돕고 싸움터 속에서 네 후손을 도울 것이다. 여호수아가 그에게서 났으니, 그는 가나안 전쟁에서 주도를 잡았다.
(2) 그가 너를 축복할 것이되 오직 참되게 축복할 뿐이다. 야곱은 요셉에게 축복이 내릴 것을 기도할 뿐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축복을 주신다. 요셉에게 내린 축복의 내용을 관찰해보자.
[1] 다양하고 풍성한 축복. "위로 하늘의 축복" (때에 따라서 비와 좋은 기후 그리고 천체들의 후한 감응) "아래로 원천의 축복", 이는 권세에 대비되는 말로서 지하의 동굴과 빗물이 있는 커다란 원천이다. 영적인 축복은 위로 하늘의 복이니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 희구하고 찾아야 할 복이며 또한 우선권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복이다. 반면에 세속적인 축복은 이 땅의 것으로서, 우리의 중시와 가치관에서 위치해야 할 복이다. "어머니 뱃속과 젖가슴의 축복" 은 아이가 순산되어 평안히 젖을 먹을 때에 받은 복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거듭나매 자라나는 바(벧전 1:23, 2:2) 그 말씀 중에는 새 사람에게 어머니 뱃속과 젖의 축복이 있다.
[2] "내 부여조(父與祖)의 축복보다 더 나은" 고귀하고 탁월한 축복(26절). 그의 아버지 이삭은 단 하나의 복을 가졌고 그가 이복을 야곱에게 물려주고 나서 에서에게 줄 복이 없음에 매우 허전하였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열 두 아들에게 제 각기 줄 복들을 받았으되 이제 추후에 이르러서는 가장 값진 축복을 요셉에게 주신 것이다. 그 가족에게도 함께 수반된 커다란 축복은 여럿으로 늘었는 바, 그 증가 추세에 있어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들의 아들들에게 준 축복들은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준 축복들 만큼 그렇게 즉각적이고 두드러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이 사망한 후 그 아들들이 엄청나게 자식을 번식시켰다.
[3] 영속적이고 광범한 축복.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은 축복" 이니, 가장 열매가 무성한 산의 모든 산물들을 포함할 만큼 광범하고, 그리고 그 산들이 존속하는 한 영속하는 축복이다(사 54:10). 무궁하신 하나님의 축복은 영원한 산의 풍성함 뿐 아니라 그보다 더욱 많은 것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자. 이러한 축복은 다음과 같이 말해져 있다. "그것들(축복들)이 ......되리로다" 는 것은 하나의 약속이며(흠정역 성서는 그렇게 되어 있음), "......하리로다" 로 보면(개역은 이렇게 되어 있음) 그것은 기원이다. "요셉의 머리의 머리로 돌아오리라" 한 것은 그 축복들이 그의 머리를 장식하는 금관과 보호해 주는 특구가 되리라는 것이다. 또 요셉은 잠시 동안 "그의 형제들과 헤어 졌었다" (흠정역은 이렇게 읽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가 그 형제 중 나실인이라" 고 풀이하니 이는 곧 요셉이 그를 보다 훌륭하고 더욱 탁월한 자라는 뜻으로 본다(개역 성서는 "그가 형제 중에 뛰어났다" 로 읽음). 선인이 학대당하는 일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형제들 가운데 있는 나실인(뛰어난 사람)은 그들에게서 쫓겨나 그 형제들과 헤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을 보상해 주리라.
Ⅱ. 베냐민의 축복(27절). 그는 "물어뜯는 이리" 라. 이것으로 보건대 야곱은 자기의 언질을 던짐에 있어서 단지 예언 정신에 의한 것이었지 본연의 애정에 의해 이끌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예견과 예연을 들려주는 상대자인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에게 다음 말을 할 때 부드럽게 했을 것이다. 즉 그의 자손은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호전적인 종족이 될 것이며 또한 그들은 적으로부터 앗은 물품으로 배를 채우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 아주 활동적이고 분주히 살아가며, 그들의 이웃과 다른 이들에게도 두려움을 지키는 종족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으리라" 함은 밤새에 먹이를 구하여 나누어 놓았음을 말한다.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세대 당시를 보면 그들 가운데 왼손잡이가 많았다고는 하지만(삿 3:15, 20:16), 그들의 행적은 높이 알려질 것이다. 두 번째의 사사(士師)였던 에훗과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이 이 지파의 출신이었으며 마지막 세대 당시에는 유대의 적군을 쳐부수었던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또 이 종족이었다, 베냐민 사람들은 그들이 기브아 사람들인 벨리암 사람들의 (삿 20:14) 뜻에 필사적으로 성원을 보낼 때 이리들처럼 물어뜯었다. 복 받은 바울 또한 이 종족이며(롬 11:1, 빌 3:5), 그는 실제로 하루 중의 아침이면 학대자가 되어 빼앗은 것을 먹었고 저녁이면 설교자가 되어 움킨 것을 나누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재각기 다른 성미에 따라 그의 의를 이룰 수 있으니 속은 자도 속인 자도 다 그의 것이다.
야곱의 죽음(창세기 49:28-33)
Ⅰ. 야곱의 아들들의 축복에 대한 요약이 나온다(28절). 비록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의 불쾌한 언질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각인의 분량대로 모두에게 축복하였다" 고 전해지니, 에서가 당한 것과 같이 저버림을 받은 아들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때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가 우리를 어떻게 꾸짖으시든 간에 하나님의 약속에 관련을 갖고 그의 백성들 사이에 이름과 장소를 가지며 하늘나라의 가나안에 참여한다는 기쁨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축복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
Ⅱ. 야곱은 아들들에게 자기의 매장에 관한 엄숙한 유시를 내리었는바, 그 내용이란 이미 앞에서 요셉에게 말한 것을 되풀이함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숨을 거두는 지금, 그가 죽음에 대해 뭐라 말하는가 보라.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라(29절). 죽음을 가장 바람직한 형상으로 우리가 생각함이 좋으니, 곧 죽음의 두려움이 멀리 사라질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이 세상의 만인과 우리의 자식들로부터 우리를 떼어놓긴 하지만, 또한 그것은 타계(他界)에 있는 우리의 선조와 동포들에게 우리를 데려다 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마도 야곱은 왜 아들들이 그를 가나안에 묻어야 하는가의 이유로써 죽음에 대한 이와 같은 표현을 썼는지도 모른다. 즉,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열조로 돌아가리라. 나의 혼은 완전해진 의인들의 영령에게로 가야 하노라. 그러하니 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과 함께 나를 묻어다오" (31절).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의 마음은 이에 대하여 매우 강렬히 쏠려 있으니, 이것은 자기의 타고난 땅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 즉 조만간에 가나안은 그의 자손의 유산이 된다는 데 대한 신념의 도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들들로 하여금 약속된 땅에 대한 기억을 간직시키려 하였는 바, 이는 자기의 장례식을 이용하여 그 곳에 다녀옴으로 아들들에게 좀 더 낯익게 하기 위함일뿐더러, 그 곳에 대한 아들들의 여망과 기대를 보존시키기 위함이었다.2. 그는 그 곳의 지리 및 전에 이미 매장지로서 아브라함이 이루어 놓았던 그 곳의 매입 상황을 아주 세심하게 알려준다(30, 32절). 야곱은 혹시나 그의 아들들이 17년 동안이나 애굽에 머무르고 난 뒤에 가나안은 물론이고 그들의 조상이 물려있는 매장까지도 잊어버리지 않을까. 혹은 가나안인들이 그 땅에 대한 야곱의 소유권을 가지고 시비를 일삼지나 않을까 하여 매우 근심이 되었으므로, 그는 이렇게 죽어가는 마당임에도 그토록 자세하게 매장지의 구입에 관해 설명하여 만일의 실수를 예방할 뿐 아니라 그 나라에 대하여 자기가 얼마나 배려를 쏟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죽음에 임한 성도들이 하늘의 가나안에 마음을 두고 죽은 후에 거기서 안식하리라고 희망하는 것은 그들의 커다란 즐거움이요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Ⅲ. 야곱의 죽음(33절). 그가 축복을 내리고 유시를 전하기(두 가지 모두 그의 아들들에 대한 명령 속에 포함되어 있음)를 마치고 그의 증언을 끝내니 이제는 임종 준비에만 전념하였다.
1. 그는 임종을 위한 자세로 고치니, 즉 침상가에 몸을 정면으로 앉게 하여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을 내렸으며(꺼져가는 등잔에 신선한 기름을 가져다주는 예언의 영감. 단 10:19), 이러한 작업을 마치고나니 "그 발을 침상에 거두었다." 이는 기다랗게 드러눕기 위함이며, 타력(打力)에 꿋꿋이 묵종하는 자와도 같거니와 그 보다도 오히려 즐거이 휴식을 취하려는 자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기운이 진(盡)하였다. "내가 나를 눕히고 자리라."2. 그는 기꺼이 자기의 영을 영들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손에 넘기었으니 "그가 죽었도다."
3. 그의 분리된 영혼이 신실한 자의 영혼이 모인 곳으로 갔으니 이제 육신의 부담에서 벗어나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찬 세상이 되었다. 그가 "그의 열조로 돌아갔더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죽음을 우리들을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데려가 줄 것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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